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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끈을 풀어 헤친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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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2
작품등록일 :
2019.02.18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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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26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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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크리에이터 (10)

DUMMY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넘겼다. 듬성듬성 불빛이 새어나오던 창문들도 하나둘 검게 물들었다. 그리고 이내 아파트의 모든 불빛이 사라졌다.


인수는 난간에 기대어 불 꺼진 단지를 내려다보았다. 늦은 밤의 아파트 단지는 생각 이상으로 을씨년스러웠다. 그 어떤 시골 마을보다 싸늘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은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사람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 서 있을 때 느끼는 혼자가 아닌 기분. 귀신이 곁에 있다는 오싹함.


물론 인수와는 무관한 이야기였다. 귀기가 존재하는 곳은 제한적임을 선비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우연하게라도 마주칠 수 없음을 알았다. 게다가 선비심공은 그런 사이한 기운과 상극이 아니던가.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등골이 오싹한 것은 인간의 본능이거나 등 뒤에서 어슬렁거리는 미행자의 기척 때문이리라. 분위기 탓인지 다소 귀엽게 생각됐던 난간에 매달려 있을 상상 속 미행자의 모습이 점점 기괴하게 변해갔다.


선비심공의 기운을 끌어올려 불안하게 흔들리던 마음이 진정시켰다. 그리고 미행자를 향해 눈총을 보냈다. 그러나 이미 미행자는 그곳에 없었다. 고개를 돌린 순간 이미 귀신같이 다른 쪽으로 이동한 뒤였다. 뒤통수와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흐음.”


인수가 상념 가득한 신음을 흘렸다. 문득 떠오른 생각 때문이었다.


누군가 미행자를 조종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눈을 빌려 실시간으로 보고 있거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미행자에서 정보를 얻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느 쪽이든 조종이 가능한 범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인즉슨 미행할 수 있는 거리에 한계가 있다는 의미였다.


인수의 시선이 어둠 너머의 먼 곳까지 향했다. 하지만 어디까지? 라는 물음이 되풀이됐다. 경공으로 수십 분을 달렸음에도 따라왔다. 처음부터 잘못된 가정은 아닐까.


물음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급기야 이대로 선비문을 떠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자문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새로운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난간 주변을 돌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단지 내 아파트의 수와 간격을 확인하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후우······.”


인수는 긴장한 표정으로 심호흡을 하며 몸을 풀었다. 실수 한 번으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똑같아. 겁낼 거 없어. 평소처럼 하면 완전 쉽지, 쉬워.”


이제는 익숙해진 혼잣말로 스스로를 달랬다. 그리고 내공을 끌어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미행자가 느껴지는 곳을 향해 한 차례 고개를 돌리고는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힘이 잔뜩 들어간 달음박질에 인조잔디가 깊이 파였다. 좋지 않은 신호였다. 인수는 고민 없이 난간 앞에서 발을 멈췄다.


“후우, 후우.”


그는 긴장을 풀려는 듯 손발을 털며 호흡을 골랐다. 처음으로 대회에 출전한 육상선수의 마음이 이러할까.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할 수 있었던 일이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운기를 하듯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일부러 딴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한동안 먹지 않았던 햄버거를 떠올렸다. 일정한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 몸 안에 노폐물이 쌓일 것을 염려하며 피하고자 했던 음식들을 생각했다.


선비를 만나기 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먹었기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혀끝에 맛이 맴도는 것만 같았다. 맛을 상상하며 발을 굴렀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저녁도 먹지 않았다. 이미 장을 보기에는 늦은 시각. 선비문에 남아 있는 것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뭐가 남아 있더라······.”


인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인조잔디가 깔린 바닥을 박찼다. 그의 발에 닿은 인조잔디는 무사했다. 평소처럼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육상선수와 같은 격한 움직임도 없었다. 본래 선비보법의 모습처럼 산책을 하듯 여유 있는 몸놀림으로 난간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난간을 코앞에 두고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빠르지만 부드럽게 하늘을 날았다. 그의 몸이 하늘에서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누군가 그 모습을 봤다면 한 마리의 학을 떠올렸으리라.


포물선을 그리며 맞은편 아파트 옥상으로 날아가는 인수의 신경은 온통 등 뒤로 쏠려 있었다. 미행자의 기척은 그에 결코 뒤지지 않는 속력으로 빠르게 가까워졌다. 역시 안 되나, 라는 생각과 함께 절망감이 가슴을 물들었다.


맞은편 옥상에 발을 디딜 때였다. 빠르게 희미해져가는 기척에 인수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조금 전까지 고갯짓을 따라 뒤통수로 이동하던 미행자의 기척이 이제는 정면에서 느껴졌다.


빠르게 희미해지던 미행자의 기척은 이내 다시 짙어졌다. 그리고 원래 그랬던 것처럼 순식간에 뒤통수로 이동했다.


“역시······!”


불과 몇 초 전 속마음도 잊고 인수가 기뻐하며 중얼거렸다. 괴한의 그림자 인형이 나무 그늘에서만 생성되던 것을 생각하며 시도해본 계획이었다. 미행자도 그림자 인형처럼 그늘이나 어딘가에 붙어서만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었다.


미행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숨을 죽이고 숨었다. 그 기척을 등으로 느끼며 인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며 손발을 풀었다. 움직임이 한결 가벼웠다. 수없이 대회를 경험한 베테랑 육상선수 같았다.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미행자가 느껴지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기척은 예외 없이 뒤통수를 따라서 움직였다.


인수가 바닥에서 발을 뗐다. 선비보법을 운용하며 달리기 시작하는 그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유유자적한 선비와 같았다. 바닥의 인조잔디가 분위기를 더했다.


언제나 선비의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그 또한 보법만큼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을 수준이었다. 옛 무림이 되살아나지 않는 이상.


무공은 마음의 수련이라 했던가.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를 뛰어넘으며 인수가 그리는 곡선이 전보다 부드러웠다. 그리고 빨랐다.


미행자는 빠르게 40층 높이의 벽을 내려간 뒤 다시 같은 높이의 벽을 오르고 있었다. 속력으로만 본다면 제 아무리 선비라도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것이 있던가. 누구에게나 결점이 있기 마련이고, 생물이 아닌 것 같은 미행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멀어졌던 등 뒤의 기척이 순식간에 가까워지려 할 때, 인수는 이미 착지를 마치고 곧장 다음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난간 앞에서 바닥을 박차고 날아오를 무렵 미행자의 기척이 옥상에 도착한 것이 느껴졌다.


작은 차이였다. 건너편 아파트 옥상으로 도약할 때마다 불과 한두 걸음. 그러나 그것이 모여서 어느덧 인수와 미행자 사이에는 열 걸음이 넘는 차이가 벌어졌다.


일곱 번째 아파트를 향해 날아오르는 순간이었다. 인수는 영영히 뒤통수에 붙어 있을 것만 같았던 기척이 한순간 사라진 것을 느꼈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명확한 증거였다.


“내가 이겼어.”


인수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혼잣말이었으나 어쩐지 내뱉고 싶었다.


“내가 이겼다고.”


일곱 번째 옥상에 착지를 하고 다시 여덟 번째 도약을 위해 달리면서 그는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했다. 곁에 누군가 있었다면 들을 수 있었을 만한 목소리였다.


하늘로 솟는 움직임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미행자의 기척이 조금 더 오랫동안 사라졌다. 예상보다 길었다. 미행자에게 감정이 있다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리라.


그렇게 열한 번째 착지. 그리고 열두 번째 도약. 하늘을 나는 순간까지도 인수는 미행자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껌처럼 지긋지긋하게 뒤통수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인수의 몸에 열기가 올랐다. 쉬지 않고 달렸기 때문인지 격앙된 감정 때문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벅차오르는 감정을 내뱉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작게 중얼거리는 인수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성에 차지 않았다. 가슴 속에는 여전히 미증유의 충동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나도 1인분은 하는 사람이야―!”


응어리진 무엇인가를 토해내듯 우렁차게 외치며 뛰어올랐다. 단지 내에 쩌렁쩌렁 울릴 만큼 커다란 목소리였다. 주민들 몇몇은 잠에서 깨어났으리라. 누군가의 잠을 방해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속은 시원했다.


미행자의 기척은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인수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이후 아파트 단지 전체를 몇 차례나 더 돌고 나서야 인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제자리에 섰다.


“하아······ 하아······.”


등 뒤를 돌아보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턱 끝까지 차올랐던 숨이 완전히 평온을 되찾을 때까지도 미행자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아―.”


그제야 인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옥상 정원의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탁하기만 한 서울의 공기도 이 순간만큼은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폭풍 뒤 고요라고 했던가. 진이 빠진 얼굴이었다. 봉제인형처럼 힘없이 앉아 흐리멍덩하게 풀린 눈으로 난간 너머 먼 곳을 바라보았다.


40층 아파트 옥상.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한밤의 도시는 불빛만이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진을 업으로 삼는 작가라면 당장 카메라를 꺼냈으리라.


“아······. 어떻게 내려가지.”


좀처럼 보기 어려운 야경을 눈앞에 두고 인수가 내뱉은 감상이었다. 막막한 표정이었다. 머릿속에서 해야 할 일들이 후루룩 지나갔다.


텅텅 빈 단전을 회복하기. 선비에게 오늘 일 설명하기. 옥상에서 내려가기.


그중 단연 가장 중요한 일은 선비에게 오늘 사건에 대해 설명하는 일이었다. 적당한 변명으로 얼버무리겠다는 생각은 버린 지 오래였다. 미행자의 존재를 숨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가장 급선무는 역시 40층 높이의 아파트에서 내려가는 일이었다. 등산보다 하산이 위험하다는 말이 처음으로 피부에 와 닿았다.


“아.”


인수는 단말마와 함께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파트 복도와 연결된 출입문이 있었다. 다가가서 손잡이를 돌리자 어두운 복도와 계단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다시 문을 닫았다. 그리고 제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운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약 30분 뒤. 든든해진 단전을 품고 편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를 벗어났다.




* * *




“다음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오.”


“네······.”


인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나절 만에 돌아온 선비의 대답이었다.


인수가 미행을 따돌리고 선비문으로 돌아간 때는 야심한 새벽. 발을 들이자마자 마주한 것은 잠도 자지 않고 연무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선비였다.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선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인수를 쳐다보았다. 미행을 당할 때보다,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을 때보다 더한 중압감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견디다 못해 전부 이실직고했었다. 장을 보러 가겠다고 했던 거짓말부터 영상을 촬영했다고 짐작되는 곳에 갔던 일 그리고 정체불명의 검은 물체에게 미행을 당했던 일까지. 어떻게 설명했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횡설수설했다는 것만 알았다.


선비는 일말의 대꾸와 표정의 변화도 없이 인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한나절이 지나 다시 저녁이 찾아왔을 때, 본채에 틀어박혀 있던 선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찬가지로 별채에서 반성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인수는 선비의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다시 안으로 들어가 급하게 전대 장문인의 회색 두루마기를 걸쳤다.


선비는 흑립과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그것은 곧 외출을 의미했다. 한가로운 밤 산책일 리 없는 외출이다.


인수는 묵묵히 선비의 뒤를 따랐다. 어깨와 다리에 돌덩이를 묶고 달리는 기분이었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선비의 무거운 침묵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향할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그였다.


목적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인수에게는 벌써 눈에 익은 풍경이 스쳐갔다. 그리고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땜통이 생긴 산이 보이는 건물의 옥상이었다.


“어디서 미행을 당했소?”


“음, 지나왔어요. 좀 나중에 눈치 챘거든요.”


인수는 방금 지나온 길을 가리켰다.


“그 자가 촬영을 한 곳은 어딘 것 같소?”


“여기요.”


이번에는 바닥을 가리켰다. 공교롭게도 선비가 걸음을 멈춘 곳은 인수가 어젯밤 조사를 나왔던 곳과 같았다.


“여기서 미행이 시작된 모양이오. 그대의 생각을 읽혔구려.”


“그런가 봐요. 영상을 보고 확인하러 올 거라고 예상했겠죠.”


인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정신이 없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던 그였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때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그렇다는 건 설마?”


“그 설마가 맞는 것 같소.”


“어쩐지 양심이 없더라니······.”


“우릴 계속 지켜봐왔을지도 모르겠소. 어쩌면 지금도······.”


선비가 중얼거리더니 무엇을 느낀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말이 씨가 된 것일까. 이내 인수도 기척을 느끼고 함께 고개를 돌렸다.


선비와 인수가 바라본 곳에는 복면을 쓴 두 남자가 서 있었다. 산불을 지르고 달아났던 괴한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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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3. 마담 (5) 19.03.20 42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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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3. 마담 (3) 19.03.15 42 0 13쪽
23 3. 마담 (2) 19.03.13 41 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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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9) 19.03.06 34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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