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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끈을 풀어 헤친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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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2
작품등록일 :
2019.02.18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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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01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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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크리에이터 (12)

DUMMY

바쁘게 발을 놀리던 인수가 다급히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시야에서 한참이나 멀어졌건만 등골이 따끔거리는 서늘한 기운을 낄 수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그는 이내 고개를 휘휘 저어 화난 선비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흩어 버렸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답을 내지 못한 문제 풀이가 다시 시작됐다.


‘······를 찾으시오.’


선비가 소리 없이 전하려 했던 말은 인수에게 절반만이 닿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멀어질 때마다 기억도 멀어졌다. 기억 속 선비의 입술은 그때그때 다르게 움직였다. 아’라고 생각하면 ‘아’로 보였고, ‘어’라고 생각하면 ‘어’로 보였다.


문득 짐을 덜어내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서둘러 그 생각을 떨쳐냈다. 청승맞은 자책이었다. 선비라면 그런 거짓말을 할 바에 짐을 지고 싸움에 임했을 것이다.


소리 없는 말. 선비는 알아들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불확실한 방법을 사용하진 않았을 테니.


자신이 찾아야 하는 것이 생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서로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기에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런 방법을 취한 것이리라.


“돌대가리인 건 아는데 제발 좀 돌아라, 머리야······!”


인수는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다섯 명의 적에게 둘러싸여 고전하는 선비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언제나 뒤에서 렌즈를 통해 지켜봐야 했던 지난날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해야 할 임무가 있다.


“그건가······?”


그럴 듯한 생각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생각이 미치자마자 바쁘게 움직이던 발을 멈췄다. 다시 움직였을 때 그의 기척은 불어오는 바람보다 옅었다.


까치발을 들고 옥상을 뛰는 그는 밤의 고요를 등에 업은 불청객이었고, 공중에 날아오르는 그는 달밤을 산책하는 한량이었다.


양상군자와 한량보를 운용하는 인수는 유령처럼 소리도 없이 움직이며 주변을 탐색했다. 달리기도 걷기도 아닌 애매하기 그지없는 걸음걸이였다.


낡은 주택의 옥상에 착지를 하려던 순간이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옥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진한 양념 냄새와 기름 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를 스쳤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야외에서 술판을 벌이려는 사람들이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오건만 갑옷처럼 두꺼운 패딩 점퍼만 있다면 문제없다는 태도였다.


“안 춥냐?”


“그닥. 왜? 추워?”


“아니. 나도 그닥.”


술과 안주를 나눠든 두 남자의 대화였다. 빨개진 볼과 굳은 손, 움츠러든 어깨가 말해주는 것과 상반된 대화가 오갔다. 그들의 허세는 몇 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두 여자의 존재 때문이리라.


인수가 옥상에 발을 내딛었을 때, 네 명의 남녀가 그의 앞을 지나쳤다.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에 완전히 얼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들이었다. 미행자에게 쫓겼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섬뜩한 두려움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찰나의 순간 이들이 자신을 발견한 후 일어나게 될 나비효과들이 머릿속에 줄줄이 재생됐다. 일주일, 한 달, 수년 뒤의 일까지. 그 끝은 언제나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결과였다.


그러나 네 명의 남녀는 최악의 상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인수를 그대로 지나쳐갔다. 여타 그러한 상상들이 그러하듯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의 신경은 온통 앞의 남자들에게, 뒤의 여자들에게 쏠려 있었다.


그때 안주를 든 남자가 멈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야, 손수건 있냐.”


“요새 누가 그런 걸 들고 다녀.”


“저기 너무 더러운데.”


옥상에 조촐하게 마련된 야외탁자는 도시의 먼지를 한껏 품고 있었다. 인수의 존재감은 먼지보다 아래였다.


인수는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네 명의 남녀가 자리에 앉아 술판을 벌이고 나서야 숨을 죽인 채 그늘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진 옥상을 벗어나는 그의 얼굴에는 전에 없던 자신감이 피어 있었다. 눈으로 확인했다. 허투루 갈고 닦은 무공이 아님을.


자신감은 그를 더욱 완벽한 유령으로 만들었다. 발이 바닥에 닿으면 어느새 그는 그늘에 녹아 사라졌다. 고조된 자신감과 함께 넓어진 시야는 가장 은밀한 경로로 그를 이끌었다.


그렇게 십여 분을 달렸을 무렵이었다. 발아래 옥상에서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고는 급하게 그늘 아래에 착지해 모습을 숨겼다.


인수는 그늘에 숨어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두ㄲ운 외투와 모자로 무장한 남자가 옥상 난간에 기대어 태블릿으로 어떤 화면을 보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에 난간에 올라서서 화면이 보이는 곳까지 거리를 좁혔다. 태블릿의 화면을 확인한 순간 그는 고개를 쳐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태블릿 화면에는 익숙한 여인이 담겨 있었다. 선비였다.


옥상에서 꽤나 떨어진 하늘에서 제자리 비행을 하는 드론을 발견했다. 카메라가 장착된 드론이었다.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이 남자가 바로 수달이었다. 모호했던 촬영 장소에 대한 수수께끼도 풀렸다. 드론을 사용했기에 공간의 제약 없이 촬영이 가능했던 것이리라.


이토록 먼 곳에서도 또렷한 화면을 담아내는 카메라와 그 무게를 견디면서도 흔들림 없는 드론. 둘 모두 인수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고가의 장비였다.


인수는 고심했다. 무엇이 최적의 방법일까. 드론을 낚아채서 부수는 것? 태블릿을 빼앗는 것? 결국 둘 모두 빼앗아야 했다. 영상은 어디에나 저장될 수 있었으니.


문제는 우선순위. 간단한 결정이었다. 인수는 양상군자를 최대로 펼치며 수달의 머리맡까지 바짝 다가가서는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이보시오.”


“으악!”


촬영에 집중하고 있던 수달은 불의의 속삭임에 화들짝 놀라며 홱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이미 인수는 난간 아래로 내려간 뒤였다. 그리고 수달의 신경이 다른 곳으로 쏠린 사이 잽싸게 태블릿을 낚아챘다.


“아?!”


수달이 비명을 내지르며 손을 허우적거렸지만 이미 태블릿은 인수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제야 인수를 발견한 수달이 어깨를 들썩였다.


놀람도 잠시. 수달이 기다시피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붙잡힐 리 만무했다. 인수는 멀찍이 뛰어오르며 태블릿에 집중했다. 이미 수달은 안중에 없었다. 그보다 드론 조종이 급했다. 안정적으로 선비를 비추던 화면은 어느새 어지럽게 흔들리며 하늘과 땅을 오갔다.


드론과 연결된 태블릿을 쥔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드론 조종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평소 자부심을 갖고 있던 게임 실력과 조종은 무관했다.


위태롭게 곡예비행을 하는 드론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것은 인수만이 아니었다.


“빨리 내놔, 이 새끼야!”


수달은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만 같은 드론을 보며 인수를 다그쳤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인수를 따라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자, 잠깐. 뭘 원하는지 알겠으니까 얼른······.”


호통 뒤에는 설득이었다. 간절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인수를 달래려 했다. 그의 반응만으로도 드론과 카메라가 얼마나 고가의 장비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인수의 손이 축축하게 젖었다. 긴장으로 흥건해진 손에 가뜩이나 어려웠던 조종은 더욱 엉망이었다. 화면이 점점 더 어지럽게 흔들렸다. 화면은 이미 그 기능을 잃은지 오래였다. 그는 눈에 잔뜩 힘을 주고 하늘에서 휘청거리는 드론을 노려보았다.


본격적으로 해보겠다는 자세였으나 기세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안 돼!”


“아아······!”


인수의 외침과 수달의 안타까운 탄식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목표를 잃을 사람처럼 상하좌우 정신없이 움직이던 드론이 맞은편 벽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수달은 난간에 몸을 기대어 닿을 리 만무한 손을 뻗었고, 인수는 폭발적인 속도로 달려가 난간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인수의 머릿속에서는 온통 드론과 카메라의 가격만이 맴돌았다. 백학주 몇 병을 팔아야 저것들을 살 수 있을까. 수십 병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만 같았다.


“아, 조금만······.”


간절한 마음이 새어나왔다. 있는 힘껏 손을 뻗어보지만 드론은 야속하게도 뒤를 돌아봐주지 않았다.


길게 뻗은 손에 잡힌 것은 산산이 부서진 날개 조각. 카메라라도 살릴 수 있을까 싶어 잔해들을 살폈지만 깨진 렌즈와 부서진 몸체가 눈앞에서 멀어져갈 뿐이었다.


아무도 없는 골목이었기에 무고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요란한 소음이 고요한 골목을 한바탕 훑고 지나갔다.


인수도 잔해의 비를 뒤따라 골목에 내려앉았다. 착잡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것이 아닌데도 안타까운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당연한 벌을 받은 것이라 생각하려고 해도 마음이 불편했다.


“······별 수 있나.”


인수는 혼잣말로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는 바닥에 나뒹구는 잔해를 하나하나 살폈다. 장비가 망가졌다고 해서 모든 일이 기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메모리 카드. 기록을 없애겠다고 모니터에 총을 쏘는 영화 속 주인공들을 보며 언제나 혀를 찼던 그였기에 같은 우를 범하는 일은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메모리 카드는 멀쩡했다. 기록의 손상 여부까지는 알 수 없으나 오히려 손상된 편이 더 나았다. 똑같은 짓으로 수달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니.


메모리 카드를 챙긴 뒤 그는 손에 든 태블릿을 내려다보았다. 처치곤란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영상이 기록된 곳은 카메라의 메모리 카드뿐만이 아니었다. 태블릿에도 영상은 얼마든지 기록될 수 있었다.


꺼림칙하지만 태블릿은 돌려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메모리 카드와 태블릿까지 확보했지만 여전히 불안감은 남아 있었다. 수달이 아주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라면 녹화된 영상을 어딘가에 클라우드 서버에 연동해 저장했을지도 몰랐다.


문득 수달의 다리 한쪽을 붙잡은 채 옥상 난간에 매달아 협박을 하는 상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어떤 히어로 영화에서 악당에게 정보를 캐낼 때의 장면이었다.


고개를 들어 옥상을 올려다보았다. 5층 높이. 무게중심이 머리로 쏠린 채 떨어진다면 아무리 운이 좋아도 몸의 절반 이상이 불구가 되는 일을 피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거······ 돌려줘요.”


급하게 옥상에서 내려온 수달이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그는 인수의 손에 들린 태블릿과 바닥에 흩어진 잔해들을 보고 있었다. 미간에 새겨진 깊은 주름은 차마 표출하지 못한 분노이리라.


“그럴 수 없소. 이건 내가 가져가도록 하겠소. 지은 죄가 있으니 억울하게 생각 마시오.”


인수는 선비의 말투를 흉내 내며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지은 죄? 무슨 죄?”


“진짜 몰라서 하는 소리······이오?”


수달은 당최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거짓 없는 반응에 인수는 자신이 헛다리를 짚은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선비를 촬영하고 있지 않던가. 빼도 박도 못하는 현행범이었다.


“선비님의 영상을 도용하지 않았소!”


“아, 그거? 그런 걸 도용이라고 하나?”


“그게 도용이 아니면 뭐요? 허락 없이 가져다가 썼지 않았소.”


“허락 받을 정도로 대단하지 않던데. 기껏해야 조회수가 500 언저리? 아무도 모르게 묻힐 게 뻔했는데 무료로 홍보해준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뭐라고······?”


“까놓고 말해서 그렇잖아요? 아무리 신기한 영상이면 뭐하나. 거기 올라간 영상이 몇 개나 될까요? 하루에 올라오는 영상은? 셀 수도 없죠? 기업들이 홍보비에 얼마나 많은 돈을 쓰는지 알면 그런 말 못할 건데요.”


수달의 표정과 목소리는 너무도 당당했다.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인수는 말을 잃었다. 대꾸할 의지마저 꺾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사고방식 자체가 달랐다. 범죄자의 사고방식이란 언제나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법이다.


“저기요?”


긴 침묵에 수달이 불안한 듯 인수를 불렀다. 인수의 시선은 태블릿에 꽂혀 있었다.


“쳐다보지만 말고 어서 돌려주는 게······.”


“분명······.”


“음?”


“처음이 아니겠지.”


“뭐라고 중얼거려요?”


“사람이 변하나?”


인수의 생각이 길지 않은 삶의 궤적을 따라서 흘렀다. 스스로에게 건넨 질문의 답을 내는 것은 쉬웠다. 어차피 누구에게나 각자의 답이 있을 질문이다.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는 질문이다. 애써 의문을 가진다 한들 언제나 답은 스스로의 경험에서 나오지 않던가.


인수는 고민을 그만두고 태블릿의 메모리 카드를 뽑았다. 그리고 태블릿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태블릿은 힘겨운 소리를 내더니 이내 버티지 못하고 두 동강이 났다.


“뭐하는 거야!”


수달의 화난 외침에도 인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동강 난 태블릿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형태가 남지 않을 때까지 잘근잘근 밟아 버렸다.


“양아치 같은 새끼가! 남의 물건으로 뭐하는 거냐고!”


“인과응보······ 아니겠소?”


“경우가 다르잖아. 옷 차려입고 말투만 바꾸면 선비냐? 하는 짓은 깡패잖아!”


그 순간이었다. 인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수달과 거리를 좁혔다. 수달이 눈치 챘을 때는 이미 인수의 손이 그의 발을 낚아챈 이후였다.


“엇······!”


수달의 외마디 비명이 길게 꼬리를 남겼다. 순식간에 땅과 하늘이 뒤바뀌면서 바닥이 없는 하늘을 향해 영원히 추락할 것만 같은 공포를 느꼈다.


찰나의 공포가 가신 뒤 정신을 차렸을 때, 수달은 자신이 옥상 난간 너머에 거꾸로 매달려 있음을 깨달았다. 오로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인수의 손 하나에 의지한 채로.


눈을 치켜뜨면 보이는 단단한 아스팔트 바닥에 수달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도움을 바라듯 시선을 내리깔아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인수를 쳐다보았으나 이내 다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벌레를 쳐다보듯 경멸스러웠기 때문이리라.


바람에 소매가 흔들리고, 발목을 쥔 손가락이 꿈틀거릴 때마다 손바닥을 타고 떨림이 전해졌다. 동공이 확장된 수달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격렬하게 흔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허공에 매달린 수달에게는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인수도 다르지 않았다. 몇 시간은 훌쩍 흘러버린 기분이었다.


“악······! 앗?”


갑작스러운 흔들림에 수달이 억눌린 비명을 내지르더니 생각보다 덜한 통증과 손과 발에 닿는 단단한 바닥의 감촉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인수를 올려다보았다. 난간 위에 서 있는 인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수달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수달은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볼품없는 자세 그대로 눈치를 살폈다. 그토록 바라던 바닥을 밟게 되었지만 여전히 상황은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 있음을 알았다.


“두고 보겠소.”


그 한마디를 남기고 인수는 단숨에 수달에게서 멀어졌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두려움을 심어주었으나 반성을 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새로운 피해자를 찾으리라.


음지에서 세상을 바로잡는 영웅이 되는 일은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상상으로 꿈꾸던 영웅이 된다는 것. 그것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범죄자가 진심으로 과오를 뉘우친다는 얘기를 좀처럼 믿지 않았다. 충분히 위협하지 못했다.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지 않으려면 손을 놓아야 했다. 지독한 범죄자들과 싸우는 영웅들의 자비는 선량한 시민들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던가.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들은 미련 없이 손을 놓았을 것이다. 영웅이 된다는 것.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양심과 인격에 상처를 입고 싶지 않아서, 손가락질 당하고 싶지 않아서 아무도 하지 않을 일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인수는 아무도 없는 옥상에 섰다. 수달도, 선비도 보이지 않는 조용한 곳. 그곳에 홀로 서서 빼앗은 메모라 카드를 짓이겼다. 원래 형태를 완전히 잃을 때까지.


할 일을 끝낸 그는 선비가 있을 방향을 바라보며 한숨과 함께 마른 침을 삼켰다. 생전 처음으로 입 안이 쓰다는 말을 통감했다.


특별한 힘을 가졌건만 변하지 않았다. 악인도, 선인도 될 수 없었다. 어중간한 위치에 서서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여전히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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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3. 마담 (2) 19.03.13 48 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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