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끈을 풀어 헤친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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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2
작품등록일 :
2019.02.18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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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8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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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22 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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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면술사 (10)

DUMMY

“생강시?”


“오, 생강시가 말을 했던가?”


“······정체가 무엇이오?”


“일반적으로는 피술자. 하지만 난 꼭두각시라고 부르지.”


“피술자? 꼭두각시?”


“아하, 참. 강한 힘에 어울리지 않는 백치미를 갖고 있어. 하나 알려주자면 피술자는 최면에 걸린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야.”


“최면술? 최면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이오? 내가 들었던 최면술과는 조금······ 다른 것 같소만.”


선비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상담실장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 행세를 하고 있었다. 마치 다중인격을 가진 사람 같았다. 최면술이라고 말하지만 선비가 아는 최면술은 인격을 바꾸는 기술이 아니었다.


“최면이혼술(催眠移魂術). 생각해보니 잘 모르는 것도 당연해. 평범한 최면술은 아니지. 서양의 최면술과 이혼술을 결합해 창안한 주술이니까.”


“이혼술······. 혼을 옮긴다는 뜻이오? 듣기만 해도 아주 위험한 기술인 것 같소만.”


“그렇지, 맞아. 최면을 걸면 몸을 빌리는 것이 가능해. 물론 피술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어.”


“잘 알았소. 그럼 지금 마지우라는 여자의 몸을 빌리고 있는 그대의 정체는 무엇이오?”


“아, 어떤 게 좋을까. 그래, 말하자면 최면술사. 최면술사 마곤익이오.”


자신을 마곤익이라 밝힌 최면술사는 선비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 선비는 최면술사의 이름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곤익? 마 씨 성은 흔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소. 그 몸의 주인과 어떤 관계인지 물어도 되겠소?”


“사촌.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관계지. 그런데 이렇게 한가하게 대화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닐 텐데?”


“달리 방법이 없지 않소? 게다가 불이 났으니 누군가 출동할 것이라고 생각하오. 여긴 도시 한가운데이니 말이오.”


“조금 있으면 요란하게 사이렌을 울리면서 소방차가 도착하겠지. 그리고 화재를 진압하고 방화벽에 갇힌 너희를 발견할 거야. 으음. 사실대로 말하면 방화벽은 생각 못했어. 우선 생강시를 당해낼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거든. 무림에서도 생강시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으니까.”


“그렇게 되었소.”


“그런데 이 시체들은? 이 여자도 머지않아 죽어. 경찰에게는 뭐라고 설명할 셈이야? 뭐라고 변명하든 믿어줄까?”


선비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무림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고민조차 무의미했다. 방법은 없었다.


상담실장의 몸을 빌린 최면술사가 검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선비의 굳은 표정이 마음에 든 눈치였다.


“무림인이 활개를 치던 시대는 갔어. 오히려 힘에 대한 믿음 이 자신의 발목을 잡지. 너도 선조들과 같은 전철을 밟는 거야.”


“사람을 뒤에서 조종하고, 곤경에 빠진 사람을 구경하는 일이 즐거운 모양이오.”


“아주 즐거워. 드라마나 영화보다 재밌어.”


“······악행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를 것이오.”


“글쎄. 수백 년 동안 우리에게 너 같은 경고를 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어. 결과는? 그들은 몰락했고 우리는 부흥했지. 그런데 아까부터 너무 여유를 부리는걸. 본인이 견딜 만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최면술사는 인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인수의 얼굴은 땀으로 흥건했고 숨을 쉬기 힘든지 헐떡거렸다. 불길을 막아준 방화벽도 열기까지 완벽하게 막아주지는 못했다. 방 안의 공기는 시간이 갈수록 달아오르고 있었다.


선비는 펼쳤던 흑접선을 다시 접고 내공을 집중했다. 흑접선의 끝은 어두운 하늘이 보이는 유리창으로 향했다. 유리창을 깰 생각이었다.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그건 꽤 비싼 강화유리를 써서······. 아? 사람을 여러 번 놀라게 하잖아.”


최면술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강화유리가 선비의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조각났기 때문이었다.


뚫린 유리창으로 공기가 순환하며 방 안이 한결 서늘해졌다. 그리고 들리지 않았던 바깥의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도로 위를 지나는 차 소리와 부산스러운 웅성거림 그리고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였다.


“이미 소방차가 도착한 모양이야. 자, 결정의 시간이다. 소방관들이 불을 끄고 방화벽 너머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 그때 넌 어디에 있을 거야?”


최면술사가 검은 눈동자를 흥미롭게 빛내며 물었다.


뚫린 창문 너머로 거센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들려오고 뒤이어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강한 물줄기가 강사들이 일을 보던 사무실의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안팎으로 커다란 창문이 있는 사무실은 좋은 진입로일 것이다.


“뭐해? 서둘러. 생각할 시간 따위 없어. 이 주변 소방관들의 일처리는 아주 빠르다고.”


최면술사는 고민하는 선비를 재촉했다. 생각할 시간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고압의 물줄기로도 유리창이 깨지지 않자 직접 유리창을 깨기 위해 소방차의 고가사다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선비의 시선이 갈 곳을 잃었다. 세 구의 시체와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인수를 번갈아보다가 깨진 창문을 쳐다보고 이내 최면술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인수를 쳐다보았다.


“째깍째깍. 지금도 시간은 가고 있어.”


최면술사는 상담실장의 머리를 괘종시계처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그 움직임이 어딘지 모르게 인형 같아서 보는 이로 하여금 오싹함을 느끼게 했다.


몇 번의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고, 이어서 유리창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선비가 있는 원장실까지 들려왔다. 소방관들의 외침이 거리의 소음과 뒤섞여 시끌벅적했다.


“오오, 그들이 오고 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널 잡으러 올 거야!”


최면술사는 더욱 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목이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빨랐다.


그 모습을 선비는 미간에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결심한 듯 움직였다. 바닥에 쓰러진 인수를 둘러업고 흑접선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선비심공의 기운들이 흑접선의 끝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한 발짝 발을 내딛으며 유리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시 한 번 풍류가 펼쳐졌고 매화가 피었다. 금이 간 채로 창틀에 붙어 있던 유리창들이 느리게 다가온 매화에 부딪히자마자 떨어져나갔다. 유리창이 사라진 창틀은 두 사람이 비집고 지나가기에 충분히 넓었다.


“호오. 다시 봐도 놀라워. 몇 번인가 봤지만 무공은 신비롭다니까. 가끔 술법보다 무공을 배울 걸 후회해.”


최면술사는 내공으로 피어오른 매화를 감탄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말과 달리 부러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선비는 창틀 앞에 서서 바깥을 살폈다. 긴장한 표정의 경찰관들과 호기심 어린 표정의 구경꾼들이 한데모여 있었다. 이대로 탈출하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때를 기다려야 했다.


소방관들은 벌써 사무실을 지나 복도를 향했다.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화재가 진압되고 있었다. 선비는 소방관들의 움직임을 귀로 파악하며 창밖을 응시했다. 머지않아 기회가 올 것이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곳을 빠져나갈 기회가.


그때 수많은 소음들 속에서 소방관들의 대화가 선비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이 안에 생존자 확인됐어?”


“아직 확인 안 됐습니다!”


“여기선 열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 같으니까 창문으로 진입해!”


“아직 불길이 잡히지 않아서 혼자 갈 수 없습니다! 곧 후발대가 올 테니까 기다리죠!”


“언제 기다려!”


소방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창밖으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후발대였다. 후발대로 도착한 소방관들은 순식간에 준비를 마치고 벌써 고가사다리를 올리고 있었다. 방향은 선비가 있는 원장실이었다.


“난 더 이상 못 기다려주겠어. 한 번 잘 빠져나가 보라고, 선비양반!”


최면술사가 선비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선비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최면술사가 조종하고 있던 상담실장의 고개가 비정상적으로 꺾여 있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상담실장의 몸이 턱에서부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머리 윗부분이 균형을 잃고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 또한 바닥을 적신 액체의 일부가 되어 갔다.


녹아내린 시체는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그것은 바닥을 적셨고, 서서히 그 영역을 넓혔다. 그리고 이내 생강시의 시체에 닿았다.


네 구의 시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까지는 불과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바닥에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액체만이 흥건했다.


선비는 액체에 발이 닿지 않도록 물러났다. 영물의 가죽으로 만든 갓신도 버텨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지독한 액체는 벌써 연기를 뿜어내며 기화되고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화골산이 분명했다. 뼈와 살을 순식간에 녹여 버릴 정도로 지독하고 치명적인 물질은 그것뿐이었다. 상담실장이 몸에 지니고 있던 것일까. 알 수 없었다.


화골산이 상담실장의 몸에 심어져 있었는지 어금니 사이에 숨겨두고 있었는지는 선비에게 중요치 않았다. 정신이 팔린 사이 소방차의 고가사다리가 창틀에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그때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건물 주변을 둘러싼 자욱한 연기가 바람을 타고 원장실의 창가를 뒤덮었다. 선비가 그토록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선비는 내공을 한껏 끌어올리고 인수를 어깨에 둘러멘 채로 창가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흑접선을 활짝 펼치자 순식간에 검은 안개에 둘러싸였다.


창가를 뒤덮은 검은 연기는 곧 위로 향했다. 선비는 검은 연기의 움직임에 맞춰 창가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흑접선의 검은 안개가 연기와 동화되었고, 선비는 안개와 연기 속에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벽을 박차며 위로 향했다. 발이 무거웠다. 사군자대연회로 고갈된 내공과 어깨에 둘러업은 인수 때문이었다. 결국 6층 창틀에서 발을 멈춰야 했다.


선비는 깨진 창문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뒤에 몸을 숨긴 채 숨을 골랐다. 그리고 연기가 높이 솟을 때 다시 창틀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강한 바람이 불었다. 선비의 검은 원피스가 바람에 나풀거리더니 팽팽하게 당겨졌다. 창틀에 남아 있던 유리조각에 원피스가 걸려 선비의 발은 디디려던 곳을 밟지 못하고 허공을 스쳤다.


“칫······!”


아래로 추락하던 선비는 혀를 차며 다급히 6층의 창틀로 손을 뻗었다. 피가 튀었다. 흑접선을 쥔 손이 붉게 물들었다. 창틀에 남아 있던 날카로운 유리조각 때문이었다. 내공으로 손을 보호할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갑작스러운 사고였다.


“크윽.”


길게 찢어진 손에 힘이 들어가자 알싸한 고통이 밀려왔다. 선비는 다급히 창가 안으로 들어갔다. 창틀에 매달린 채 옥상으로 뛰어오르기에는 디딜 곳이 마땅치 않았다. 어깨에 짊어진 인수를 부여잡느라 양손을 쓸 수도 없었다.


6층은 연기로 가득했지만 불길은 보이지 않았다. 아래층에서 올라온 연기가 이곳에 고여 있었다. 선비는 연기를 피해 몸을 잔뜩 숙인 채 다시 기회를 엿봤다.


다시 연기가 솟아오르길 기다리는 동안 선비는 손바닥의 상처를 살폈다. 길게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급한 대로 혈을 짚었다. 어설픈 점혈이지만 피를 멈추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창틀의 유리조각에 묻은 자신의 피를 닦아냈다. 신경이 쓰였다.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경찰보다 검계로 추정되는 흑막 때문이었다.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간다고 하더라도 그들과의 인연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응?”


선비의 눈앞으로 희미한 연기가 지나갔다. 창밖에서 들어온 연기도 아니었고, 화재로 생긴 검은 연기도 아니었다. 연기의 진원지를 확인하기도 전에 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6층에는 여러 개의 방이 늘어서 있었다. 그중 선비와 가까운 방에서 거품을 잔뜩 머금은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골산에 녹아내린 시체의 그것과 같은 듯 달랐다. 액체는 더 진했고, 냄새는 더 고약했다.


기분 나쁜 액체는 부주의하게 틀어놓은 수도꼭지에서 흘러내린 물처럼 쉴 새 없이 문 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저 액체에 몇 구의 시체가 녹아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지옥에도 강이 있다면 아마 저런 강이 흐르리라.


선비는 고개를 돌렸다. 온천수처럼 피어오르는 연기에 얼마나 많은 이의 살과 뼈가 녹아 있을지 상상하면 숨조차 쉴 수 없었다. 흔들리는 연기들이 만들어내는 형태는 비명을 지르는 얼굴 같기도, 도움을 청하는 손짓 같기도 했다.


선비는 그것을 애써 외면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모든 것이 타는 소리와 그것을 잠재우려는 물줄기 소리가 무고한 영혼들의 울부짖음처럼 들렸다.


수많은 생명들이 희생되는 동안 어째서 아무도 이곳에 관심을 주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큰 권력이나 재산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었다.


대기의 떨림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끓는 액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도 함께 흔들렸다. 지진인가 싶었으나 창밖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눈치였다.


복도 끝이 붉게 물들었다. 눈이 시릴 만큼 밝은 빛과 함께 터져 나온 불꽃은 삽시간에 주변을 삼키며 빠른 속도로 선비를 향해 다가왔다.


입을 열 시간도,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자신을 집어삼키기 위해 쇄도하는 화염을 보자마자 선비는 있는 대로 내공을 끌어올렸다. 둑이 무너진 것처럼 밀려오는 내공에 터질 듯 부푼 혈도가 옷 위로 도드라졌다.


“크윽······.”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키면서도 선비는 멈추지 않았다. 내공의 파도는 흑접선과 다리로 흘러들어갔다. 흑접선의 먹구름처럼 진한 안개가 순식간에 주변을 감쌌다.


“꺄악!”


“다들 물러나요!”


건물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에 소란이 일어났다. 6층 창가에서 새빨간 불길이 사람들의 머리 위까지 뿜어져 나왔다. 구경꾼들은 불덩이가 자신에게로 떨어질까 머리를 감싸며 뒷걸음질 쳤다.


그 광경을 선비는 옥상에서 내려다보았다. 불길이 덮치기 직전 검은 안개를 둘러 연기인 척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던 6층에 갑자기 번진 불길.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갑자기 빠른 속도로 쇄도하던 화염은 돌이켜봐도 부자연스러웠다. 직전에 흔들렸던 대기와 눈이 부실 만큼 밝게 빛나던 빛도 그러했다. 누군가의 소행이 분명했다.


방화를 저지른 범인은 정황상 최면술사가 유력했다. 그러나 침입자를 죽이기 위한 방법으로는 비효율적이고 요란하기만 했다. 구경꾼들이라는 변수가 있었지만 달아나기에도 시간이 충분했다. 일부러 놓아준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 만큼 허술했다.


“설마 그런······.”


문득 떠오른 생각에 선비는 몸서리를 치며 부정했다. 하지만 가능성이 높은 가설이었다. 흔적을 지우기 위한 것이리라. 극단적이지만 가장 확실하고 빠른 해결법이다.


의문은 6층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화골산의 흔적이었다. 생강시는 아니었을 것이다. 일반인을 제물로 한 생강시는 말하자면 일회용에 불과했다.


시체도 아니었을 것이다. 화골산으로 녹아내린 양으로 봤을 때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만약 그만큼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면 이미 가족들의 신고가 빗발쳤을 것이다.


다른 가능성을 제외하면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최면에 걸린 수강생들. 아닐 것이라 믿고 싶지만 가장 유력했다. 소문이 돌 정도였으니 최면에 걸린 사람이 네 명뿐일 리 없었다.


네 명의 여자들이 그랬듯이 물건처럼 어두운 방 안에 보관되어 있었으리라. 그리고 리모콘이 부서졌을 때, 그들 또한 생강시로 변했을 것이다.


고삐 풀린 생강시로 인해 오랫동안 지켜온 비밀이 세상에 드러나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송두리째 태워버린다. 그것이 그들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 어떤 흔적조차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잔인하고 단호한 수법에 눈앞이 아찔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정체가 탈로 나고, 쉽게 제압할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닫는 순간 과감히 모든 것을 포기했다.


쓸개즙을 머금은 것처럼 입 안이 썼다. 의로운 일을 하기 위해 왔건만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평생 최면에 걸린 채 놀잇감이 되었을 테지만 그래도 살아가길 원했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선비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등에 입은 화상이 화끈거렸다. 천잠사는 멀쩡했지만 열기까지 막아주지는 못했다. 운용할 수 있었던 한 줌의 내공은 기절한 인수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했으니 선비는 강렬한 열기를 고스란히 맨몸으로 받아야 했다.


화재현장에서 올라오는 연기는 점점 더 심해졌다. 시야를 완전히 가릴 정도로 두터운 연기 뒤로 몸을 감춘 선비는 고통과 고뇌로 가득한 눈빛으로 지상을 살폈다. 구경꾼은 더 늘었고, 쉽지 않은 화재진압에 또 한 대의 소방차가 막힌 도로를 뚫고 달려오고 있었다.


구경꾼들을 살피던 선비의 눈동자가 매섭게 밝게 빛났다. 안력을 집중해 그들의 면면을 관찰했다. 어딘가에 있을지 몰랐다. 모든 일의 원흉인 최면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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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6) 19.02.28 72 0 13쪽
16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5) 19.02.27 64 0 15쪽
15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4) 19.02.26 83 0 14쪽
14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3) 19.02.25 77 0 15쪽
13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2) 19.02.24 85 1 14쪽
12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1) 19.02.23 81 0 14쪽
11 1. 최면술사 (11) 19.02.22 65 0 13쪽
» 1. 최면술사 (10) 19.02.22 70 0 17쪽
9 1. 최면술사 (9) 19.02.21 81 0 13쪽
8 1. 최면술사 (8) 19.02.21 83 0 16쪽
7 1. 최면술사 (7) 19.02.20 89 1 16쪽
6 1. 최면술사 (6) 19.02.20 87 1 14쪽
5 1. 최면술사 (5) 19.02.20 118 0 13쪽
4 1. 최면술사 (4) 19.02.18 160 1 25쪽
3 1. 최면술사 (3) 19.02.18 180 0 19쪽
2 1. 최면술사 (2) 19.02.18 268 0 27쪽
1 1. 최면술사 (1) 19.02.18 799 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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