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끈을 풀어 헤친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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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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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8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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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8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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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23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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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1)

DUMMY

의문의 최면술사와 마주친 지 한 달이 지났다. 선비와 인수의 삶은 전과 달라졌다. 선비는 일을 그만둔 뒤 수련에 매진했고, 남는 시간은 서재에 틀어박혔다.


인수도 원룸 계약을 해지하고 선비문 별채에 기거하기로 했다. 입학신청서에 주소를 적은 것이 화근이었다. 선비도 곧이곧대로 주소를 적어 넣었지만 한 달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선비문의 입구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다행히도 그들에게 진법을 꿰뚫어보는 능력은 없는 듯했다.


이른 아침. 인수는 연무장에 앉아 눈을 감았다. 가부좌를 튼 자세는 아직 엉성하기 짝이 없었지만 표정만큼은 진지했다. 며칠 전부터 느껴지기 시작한 기의 흐름에 집중하며 선비심공의 구결을 되뇌었다.


생강시의 독에 당한 인수는 꼬박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후유증은 상당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현기증에 일상생활이 불가할 지경이었다.


선비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장문인의 권한으로 인수를 속가제자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른 무공을 제외한 선비심공의 호흡법만을 전수하는 조건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비고 어디에도 생강시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약은 없었고, 남은 방법은 선비심공의 정순한 내공을 몸 안에 담는 것뿐이었으니.


“후우······.”


한 차례 운기행공을 끝낸 인수가 눈을 뜨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피었던 검버섯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오히려 예전에 비해 깨끗했다. 눈동자 역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호수처럼 맑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인수는 곁에 두었던 수건으로 이마와 몸을 흥건하게 적신 땀을 닦아냈다. 깨끗했던 수건은 금세 검은 얼룩들로 지저분해졌다. 선비심공이 몸 안에 쌓인 불순물을 내보내고 있었다.


벌써 열흘째였다. 23년 동안 불순물이 쌓인 혈도는 쉽게 깨끗해지지 않았다. 더딘 속도에 불만은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개운해지는 몸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아낸 인수는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벽곡단을 꺼냈다. 몸 안에 쌓인 불순물을 전부 내보내기 전까지는 벽곡단으로 식사를 대신해야 했다.


벽곡단을 씹으며 인수는 서재로 향했다. 손에는 벽곡단 서너 개를 담은 접시가 들려 있었다. 오늘도 밤낮을 잊은 채 선조들의 기록들을 살피고 있을 선비를 위한 아침식사였다.


“선비님. 아침이에요.”


“아, 벌써 그렇게 되었소?”


선비가 책에서 눈을 떼며 되물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 움직임에 맞춰 검은 원피스가 하늘거리며 움직였다. 천잠사로 짠 원피스는 이제 선비의 평상복이었다.


“오늘도 벽곡단이에요.”


“늘 고맙소. 서재는 해가 들지 않다보니 시간의 흐름이 잘 느껴지지 않아 식사를 놓치기 일쑤요.”


“뭘요. 어제는 뭔가 실마리를 얻었나요?”


“대신 조사를 해준 덕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오.”


“인터넷에는 없는 정보가 없죠. 가짜 정보를 걸러내는 게 어려워서 문제지만.”


인수가 피터스 어학원에 대해서 조사한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도심에서 일어난 상당한 규모의 화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어떤 신문에서도 그날의 화재를 크게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압도할 만한 다른 사건이 없었음에도 대중의 관심은 빠르게 식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평소 음모론을 펼치길 좋아하는 인수는 최면술사가 속해 있는 조직이 언론에 영향력을 끼칠 만한 힘을 가졌다고 의심했다. 그래서 시작된 조사였다.


“자질구레한 사건들까지 기록을 남겨준 선조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구려. 인수, 그대가 건네준 어학원에 관한 정보와 생강시와 검계 관련 기록들을 종합하니 그들의 정체가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소.”


“어떤 놈들이죠?”


“시작은 검계였고, 지금은 연합이오.”


“연합?”


“처음에는 왜의 닌자들과 손을 잡았고, 중원 무림의 쇠락 이후에는 갈 곳을 잃은 무림인들을 끌어 모은 모양이오. 그들 중에는 사이한 술법을 부려 무림의 공적이 되었던 자들도 있었다고 하니 생강시를 부린 것도 납득이 되오.”


“일본 닌자······ 중국 무림인······.”


인수는 할 말을 잃은 듯 짧게 중얼거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닌자와 무림인. 현대를 사는 인수에게는 현실감 없는 단어들이었다.


“놀랐소?”


“놀랐다기보다······ 어쩐지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아서요. 선비님을 만났을 때부터 세상을 예전처럼 볼 수 없었는데 이제는 정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기분이에요.”


“본인은 이것을 운명이라 생각하기로 했소. 돌이킬 수 없다면 그대도 우리의 만남이 운명이라 생각하는 것이 어떻겠소?”


선비의 표정과 목소리는 그 어떤 때보다 다정했고 부드러웠다. 그것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말투와 대비되어 인수에게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인수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서로에게 깍듯이 존칭을 쓰며 지내고 있지만 연하의 이성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저도 우리가 운명······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소. 원칙대로라면 사제 관계지만 그런 격식은 따지지 않도록 합시다. 서로에게 의지해야 할 상황이니 말이오.”


“하하······. 제가 선비님에게 의지해야 할 상황 같은데요.”


“전혀 그렇지 않소. 그동안 바깥세상과 격리된 삶을 살아 세상물정에 어두운 사람이오. 그대가 도와주지 않으면 그들의 뒤를 쫓기는커녕 실체조차 밝히지 못할 것이오.”


“네? 쫓는다고요? 우리 둘이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않소. 게다가 먼저 쫓지 않으면 쫓길 것이오. 그들의 잔인한 손속과 신속한 결단을 겪어보았으니 알지 않소? 비밀을 알고 있는 이상 살려둘 자들이 아니라오.”


“하지만 둘이서 아니, 결정적인 순간에 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무슨 소릴 하는 것이오. 그대의 역할이 있지 않소.”


“역할이요? 설마 촬영을 말하는 건 아니겠죠?”


“왜 아니겠소.”


“······농담이죠?”


인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러나 선비는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아니, 선비님 말대로 아주 위험한 자들이잖아요. 그런 자들이랑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저는 옆에서 카메라 들고 구경이나 하고 있으라고요?”


“그대의 꿈이 무엇이오?”


“갑자기 꿈은 왜······ 인터넷 방송으로 성공하는 거죠.”


“본인의 꿈은, 선비문의 목표는 세상에 선비의 도를 널리 펼치는 것이오. 범애중(汎愛衆)이라 하였소. 민중에게 널리 사랑을 베푸는 일 또한 그중 하나라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다면 서로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오?”


“말도 안 돼요. 꿈의 크기가 너무 다르잖아요. 민폐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렇잖아요. 제 꿈은 단지 저를 위한 거예요. 선비님의 꿈은 선비님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대다수를 위한 행복······ 인류애······ 세계평화······ 그런 종류의 것이라구요.”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고 말이오. 며칠 동안 두 눈으로 보지 않았소? 이제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은 나뿐이오.”


“알고 있어요.”


모를 리 없었다. 한 달 동안 기거하면서 아무도 보지 못했으니까.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곳저곳에 남아 있는 사람의 흔적들이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아직 선비가 혼자인 이유를 듣지 못한 인수였으나 어느 정도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몰락한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수련해도 총 한 자루에 제압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림인들의 존재의의가 사라졌다. 문명의 발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마음으로는 선비를 돕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이 미천하다는 것을 인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선비에 비해 낫다곤 하지만 세상물정을 잘 아는 것도 아니었다. 아직 제대로 된 직장조차 다녀본 적이 없는 풋내기인 것이다.


그나마 정보를 찾는 것에 능하다지만 그것이 과연 선비를 돕는 일인지조차 의문이었다. 어쩌면 죽음으로 이끌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차라리 총을 구해보는 건 어때요?”


“거절하겠소.”


인수의 제안을 선비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찰나의 망설임도 없었다. 여태까지 선비가 이토록 분명하게 거부감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에 인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유를 물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쩐지 알 것 같았다.


“그럼 함께 싸울 동료를 많이 만드는 건······.”


“거절하겠소.”


“왜죠?”


선비는 단번에 두 번째 제안을 거절했다. 인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이유를 물었다.


“아직 제자를 들일 만큼 강하지 않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장문인의 자리를 맡고 있다지만 전대 장문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오.”


“하지만 일반인들은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잖아요. 상대적인 거 아니에요? 누가 문제를 일으켜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예요.”


“제자를 뽑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오. 힘을 얻기 위해 오는 자들이 아니라 선비문과 뜻을 함께할 수 있어야 하는 사람을 뽑아야 하오. 그리고 장문인은 제자들을 힘으로 굴복시키는 자리가 아니라 존경을 받아야 하는 자리라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혼자서는 역부족이라고요. 혼자서 조직을 상대하는 건 정말 무리에요.”


“선조들이 고집스럽게 지켜온 곳이오. 내 대에서 폐문을 하더라도 그럴 수는 없소. 아무나 제자로 들였다가 선비문의 이름을 더럽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이오.”


인수는 선비의 목소리와 표정에서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늘 선비의 말투가 외모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오랜 연륜과도 같은 무게감이 서려 있었다.


“결국 둘이서 헤쳐 나가야 하겠네요. ······좋아요.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있으니까 목숨 걸고 한 번 해보죠. 남들은 평생 못할 경험이겠죠? 죽어도 여한은 없겠어요······.”


“목숨을 걸 필요는 없소. 싸움은 내 몫이고, 그대의 몫은 살아남아 그것을 후대에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오.”


“그럴 수 없어요.”


“감정에 치우치지 말길 바라오. 무의미한 죽음이오.”


“아니, 선비님이 당할 상황이면 저도 위험에 쳐해 있지 않겠어요? 안 싸우고 촬영만 했으니까 순순히 살려줄까요?”


“기척을 숨긴 채 촬영하시오.”


“제가 그런 능력이 있을 리 없잖아요. 전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에요.”


선비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렇게 잠시 뜸을 드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몇 가지 무공을 가르쳐주겠소.”


“무공을요? 이렇게 갑자기?”


인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선비심공을 전수할 때도 선비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선비심공을 전수한 뒤 많은 고민을 했소. 하지만 고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오. 그대의 말처럼 지금으로서는 촬영을 한다고 하더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오. 아직 그들의 규모와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지 못했으나 지금까지 알려진 정황상 결코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 없소. 그래서 최소한 자기 몸은 보호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겠소.”


“설마······. 그럼 나도 선비님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이는 게······.”


“오랫동안 수련한다면 가능하겠지만 기대는 하지 않길 바라오. 무공을 배우기에는 한참 늦은 나이니······ 그저 생존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오.”


“내가 무공을 배운다니······.”


인수가 흥분으로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상보다 과한 반응에 선비가 뒤늦게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그리 거창한 무공이 아니니 너무 큰 기대는 마시오. 간단한 경공과 내공으로 몸을 보호하거나 기척을 숨기는 정도의 활용법 정도만 가르칠 예정이니······.”


“오, 경공! 몸을 보호하는 건 호신강기라고 하던가요? 기척을 숨기는 건 은신술?”


“제발 진정, 진정하시오. 너무 과한 상상을 하고 있는 것 같소. 호신강기나 은신술 같은 수준 높은 무공들이 아니란 말이오.”


“그래도요! 와, 무공이라니······.”


“왜 이렇게 흥분하는 것이오? 참 낯선 모습이오.”


“하, 남자의 로망이라고요. 점프 한 번에 허공을 날아다니고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면 어떤 남자든 흥분하죠.”


“이해하기 어렵구려. 요즘 세상에 고강한 무공을 갖고 있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소. 부주의하게 사용했다가 누군가에게 들키는 날에는 약점이 되고 말 것이오. 그대와 같은 제안을 하는 순진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소?”


“끝까지 잡아떼면 포기하지 않을까요?”


“내가 잡아뗐다면 포기했겠소?”


“음······. 생각해보니 그건 장담하기 어렵네요.”


선비의 표정이 엄중해졌다. 한 문파를 책임지는 장문인의 자태였다.


“최악의 경우 입막음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살인이 강요될지도 모를 일이오. 할 수 있겠소?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죽일 수 있냐는 말이오.”


“사람을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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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끈을 풀어 헤친 선비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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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6) 19.02.28 72 0 13쪽
16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5) 19.02.27 64 0 15쪽
15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4) 19.02.26 83 0 14쪽
14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3) 19.02.25 77 0 15쪽
13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2) 19.02.24 85 1 14쪽
» 2.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1) 19.02.23 82 0 14쪽
11 1. 최면술사 (11) 19.02.22 65 0 13쪽
10 1. 최면술사 (10) 19.02.22 70 0 17쪽
9 1. 최면술사 (9) 19.02.21 81 0 13쪽
8 1. 최면술사 (8) 19.02.21 83 0 16쪽
7 1. 최면술사 (7) 19.02.20 89 1 16쪽
6 1. 최면술사 (6) 19.02.20 87 1 14쪽
5 1. 최면술사 (5) 19.02.20 118 0 13쪽
4 1. 최면술사 (4) 19.02.18 160 1 25쪽
3 1. 최면술사 (3) 19.02.18 180 0 19쪽
2 1. 최면술사 (2) 19.02.18 268 0 27쪽
1 1. 최면술사 (1) 19.02.18 799 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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