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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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FromZ
그림/삽화
포타리
작품등록일 :
2019.02.22 23:57
최근연재일 :
2019.04.24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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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04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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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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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7. 부디 이 신기루를 영원히 (5)

DUMMY

***1***



녹음기가 켜졌다. 그녀에게서 조바심이 엿보인다.


"그럼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제가 소속된 세력은 대략 100의 인구로, 한 명의 정부 고위 관계자와 시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정부의 고위 관계자가 있다는 것은 놀랍다. 나는 정부에 소속된 자들이 살아있다면 어딘가의 안전한 지하 시설에 숨어있을 것이라고 줄곧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저희는 도심부의 중앙 지하철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주 소수의 인원만이 지상으로 파견되고 어딘가 이동할 때는 반드시 지하의 선로를 이용합니다."


그래서 그녀의 집단과 마주칠 일이 없었던 것이었다. 우리가 지상을 활보하는 동안 그녀의 집단은 지하를 활보하고 있었다.


"방사능을 측정할 기기도 피폭을 치료할 장비도 없어서 대체로 지상에 나가기를 꺼리는 편입니다. 안전하게 지하철만 돌아다녀도 필요한 물품은 대강 구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지하에서 모든 것을 충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저 같은 사람들이 외부와 교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대다수가 지하에만 머물러선 귀중한 정보를 모으기 쉽지 않을 텐데요?"


"일단 정부에 소속되셨던 높은 분이 계셔서 도시의 주요한 시설에 대한 정보는 다 꿰뚫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상에 파견되는 인원들도 물건이 아니라 정보 수집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쪽의 거주지보다 주요 정보가 많았던 것입니다."


인격 데이터의 위치는 일반인이 절대 알아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중요한 시설이나 물건이 있는 위치를 알고 있다면···.


예를 들어 그녀의 집단이 정부의 비밀 시설이나 최신식 무기가 연구되고 관리되는 시설의 위치를 알고 있다면, 우리의 인구수가 많다고 해도 무력 측면에선 그녀의 집단과 거의 대등한 입장일지도 모르겠다.


"그 대가로 의사 역할을 할 수 있는 로봇을 원하신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이건 저희가 조금 손해 보는 거래가 아닐까요?"


"위급한 사람이 있어서 급하게 마련한 거래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감정에는 호소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생각해봐도 이 정도의 정보로는 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더 알고 싶은 정보가 있다면 사양 말고 질문해주세요."


"저희가 처음 만날 날, 기억하세요?"


"기억합니다."


"그때 제게 했던 질문의 의도가 궁금하네요."


지난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그녀는 나에게 두 가지 사건에 대해서 물어봤다. 군사기지로 접어드는 외곽 도로에서 왜 그들을 죽였는지, 항구에 있는 사람들은 왜 죽였는지 말이다.


그래서 사건의 경위를 말해주었더니, 우리에게 힘이 있었음에도 그들을 전부 살해한 이유를 물어보았다. 이후에 그녀는 공식적인 거래가 끝나고 나에게 개인적으로 죄책감을 느끼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 의도가 궁금했다.


그녀가 뜸을 들인다. 말하기 곤란한 걸까. 아니면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걸까.


"······사실 거주지의 위협적인 행보에 적지 않은 경계심을 품었습니다. 당시에는 그쪽이 가지고 있는 무력이, 그 폭력성이 위험해 보여서 접촉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세력을 물색하려 했으나, 저희와 거래가 성립될 수 있는 규모의 세력이 끝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드물게 발견되는 작은 세력은 저희가 흡수했으니까요. 결국엔 그쪽의 세력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 도시에 우리 말고 다른 세력은 없다는 것 같다.


"그래서 저희의 거주지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는 건가요?"


대충 그럴 거라 짐작했는데 또 그녀가 뜸을 들인다.


"···비슷합니다."


비슷하다고?


"두려웠습니다. 모두가 거주지를 두려워했습니다.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며 영향력을 점점 뻗쳐나가다 도시의 기반 시설이나 환경까지 간섭할 수 있게 된 그쪽의 세력을 두려워했습니다. 심지어 군용 화기에 다수의 군인까지 그쪽 거주지에 합류하면서 그 두려움은 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정한 것입니다."


"무엇을요?"


"거주지와 적대하면 끝이라는 판단이 위에서부터 내려왔습니다. 지상을 탐색하는 인원 중에 제가 가장 친근한 인상이라는 평가가 내려져서, 그때부터 계속 그쪽과 접촉하고 있는 것입니다. 높은 분들은 그쪽의 세력과 어떻게든 공생관계를 형성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위아래가 있는 게 아닌 대등한 관계를 말입니다. 그렇게 교류하기 위해선 일방적인 도움이 아니라, 서로 무언가를 교환하는 거래가 필수였습니다."


"그게 그때의 질문이랑 관련이 있나요?"


"그래도 거주지가 마냥 폭력적이고 위험한 세력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저희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질문을 한 것입니다. 왜 그때 그런 폭력을 휘둘렀는지를 말이죠. 어쨌든 저희는 대답을 다 들었고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면서 이해관계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거주지는 이성이 있는 세력이라고 판단이 내려진 것입니다."


"······오늘 가실 때 의사 로봇과 함께 돌아가세요."


"성립됐네요."


작은 여자는 녹음기를 도로 가져간다. 이제 정식적인 교섭은 종료되었다.


"속이 후련하네요."


"저도요."


"지하철이라···. 역시 지하였네요. 어쩐지 도통 마주치질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장애물 없는 최단 경로의 길, 지하상가, 지하 시설···. 지하에도 있을 건 다 있으니까요. 굳이 많은 사람이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지 않아도 되죠."


"방사능을 처리할 수 있는 약품이나 기기는 아직 없나요?"


"약간의 소모품만 있어서 항상 아껴 쓰고 있어요."


"도와드릴까요? 거래가 아니고요."


내가 넌지시 건넨 물음은 호의의 표시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목적은 다르다.


그녀가 거주지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만약 진심으로 거주지를 신뢰하고 있다면, 기꺼이 호의를 받아들일 것이다. 반대로 여전히 거주지를 두려워하고 있거나 신뢰하지 않고 있다면, 나중에 이 호의를 빌미로 곤란해지거나 우리에게 의존하게 될 미래를 경계하여 내 호의를 거절할 것이다.


"괜찮아요. 어차피 그쪽 덕분에 도심부의 환경은 계속 나아지고 있잖아요? 급한 상황이 돼도 지상에 나가서 문제 될 건 없으니까요. 괜찮아요."


"아주 나중의 이야기지만···. 지하의 물건과 지상의 물건이 부족해졌을 때는 어떻게 하시게요? 그때가 되면 지금처럼 거래만으로는 충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저는 모르겠는데 위에서 다 생각이 있다고 해요. 저는 그쪽처럼 높은 사람이 아니라서 오늘이나 내일의 일만 걱정하며 살고 있어요."


그녀의 지하철 집단과 우리의 거주지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미래의 이야기를 은근슬쩍 꺼내보았지만, 원하는 대답은 듣지 못했다.


슬슬 이 자리가 끝날 때가 된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어봐야겠다. 정부의 고위 관계자가 있는 그녀의 집단이라면 그럴듯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최근에 하늘을 지나간 무인기를 보신 적이 있으세요?"


"아니요···? 도시 위로 무인기가 지나갔다고요?"


지하철 집단에서는 지상에 나오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하늘을 유심히 볼 일도 드물어서 역시 모르고 있나 보다.


"볼 기회가 없죠. 굳이 하늘을 볼 일도 없고요. 그나저나 무인기라니···. 진짜예요?"


"그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건 엄청난 발견이에요. 몇 가지 추측되는 건···. 있죠."


그런 흐름으로 그녀와도 무인기에 대한 의견을 공유했다.


그녀는 의문을 섞지 않고 추측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의견을 들으면서 심히 동조했다.


그 무인기는 극단적으로 둘중 하나다.


그것은 이 멸망한 도시를 향한 선의 혹은 악의다.


일단 무인기는 아주 높은 확률로 다른 국가에서 바다를 건너 왔다. 이 도시국가에서는 무인기가 아니라 드론 병기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비밀리에 무인기를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만한 크기의 무인기라면 반드시 활주로가 필요하다.


그러나 도시에는 공항이 없다. 따라서 동쪽 끝에 있는 군사기지가 유일하게 활주로가 있는 곳인데 그곳의 활주로를 이용할 무인기였다면 이미 핵공격을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다. 정밀한 회로는 고사하고 동체마저 까맣게 불타서 고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무인기가 다른 국가에서 왔다고 가정했다.


무인기는 우리를 적대한 국가의 정찰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다른 국가에서 멸망한 도시의 생존자를 구조하기 위해 미리 파견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근처의 국가는 이미 전쟁의 불길에 휩싸여서 멀쩡한 곳이 없다. 사실 근처가 아니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전쟁을 진행하고 있었다. 다른 국가의 영토나 도시를 향한 핵공격이 점차 늘어났고 고립을 선택한 이 도시국가마저 그 거대한 파괴 행위를 피할 수 없었다.


내가 평화로운 거리를 누비고 있을 때도 세계는 분명히 불타고 있었다.


어쩌면 세계가 아직도 불타고 있을 지도 모른다.


혹은 지금쯤 그 불길이 꺼진 세계가 우리가 있는 이곳과 비슷하게 변했을 것이다.


그녀는 높으신 분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둘 테니, 나에게 지하철 집단을 방문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조만간에 그곳으로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곳에서 내가 놓쳐버린 세계의 진실을 조금이나마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2***



"저분에게 무전기를 드리는 게 어떻습니까?"


그녀가 일어나려는 찰나에 하사가 그렇게 귓속말을 해왔다. 그의 입김이 갑자기 귀에 닿아서 깜짝 놀랐지만 그런 내색은 가까스로 어떻게든 감출 수 있었다.


어차피 빠른 시일 내에 지하철 집단을 방문할 것이다.


앞으로도 작은 여자와 계속 접촉할 것이고 이제 서로의 집단에 대해서 대강 파악하고 있다. 무전기를 주고 정보를 교환할 정도의 신뢰는 충분히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에게 무전기를 하나 건네고 나와 그녀가 쓸 전용 채널을 알려주었다.



***3***



두껍고 털이 많은 이불로 바꾸었더니 제법 푹신하다.


허리가 따뜻하게 잠기는 것 같다.


어둡다.


이렇게 눈을 감고 있으면 계속 떠오른다.


내일 날이 밝으면 지체 없이 연락을 취해야겠다.


지금 당장이라도 지하철 집단에 찾아가서 물어보고 싶다.


알고 싶다.

그것이 좋은 소식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절망적인 사실이라고 해도 알고 싶다.


모르고 있으면 계속 답답할 뿐이다.


작은 여자에게서도 확실한 대답은 듣지 못했다.


그 대답이 솔직한 대답이었을까. 혹시 허가받지 않은 대답은 할 수 없어서 돌려서 말한 건 아닐까.


신뢰가 필요하다.

신뢰를 원한다.


그녀와 친해지면 좋은 미래가 펼쳐지지 않을까.


졸려서 몽롱하다. 시끄러운 머릿속을 비우고 편히 잠들고 싶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많아서 그런 건지 너무 오래 깨어있다는 느낌이 든다.



***4***



그래서 그 무인기는 결국 뭐였던 걸까.


자꾸만 그것이 생각나서 도무지 잠들 수가 없다.


지금쯤이면 무인기에 대한 것이 지하철 집단의 고위 관계자에게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이라면 무언가 알고 있을까. 짚이는 게 있지 않을까.


정부의 고위 관계자가 지하철에 남은 것을 보면, 결국 정부의 지하 시설이라는 것은 없었다는 걸까.


하지만 어째서 한 명뿐인가.


정부 입장에서는 아주 높은 자리의 중요한 인물이 아닌가.


어째서 한 명만 살아남았지······. 어째서······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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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92 코즈
    작성일
    20.08.30 09:01
    No. 1

    대부분의 사건에서 원흉은
    그 사건을 통해 최종적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자 또는 집단이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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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Epilogue. 맴도는 기억의 끝자락 (1) +2 19.04.23 664 41 13쪽
56 10. 살인충동과 바벨탑 (5) +1 19.04.23 544 34 11쪽
55 10. 살인충동과 바벨탑 (4) +2 19.04.22 473 29 11쪽
54 10. 살인충동과 바벨탑 (3) +1 19.04.22 472 30 10쪽
53 10. 살인충동과 바벨탑 (2) 19.04.22 451 29 11쪽
52 10. 살인충동과 바벨탑 (1) 19.04.19 452 3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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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8. 어리석은 역사의 되풀이 (5) 19.04.11 523 31 10쪽
45 8. 어리석은 역사의 되풀이 (4) +1 19.04.10 457 35 11쪽
44 8. 어리석은 역사의 되풀이 (3) 19.04.09 450 33 11쪽
43 8. 어리석은 역사의 되풀이 (2) +2 19.04.08 469 37 13쪽
42 8. 어리석은 역사의 되풀이 (1) +1 19.04.05 484 35 11쪽
» 7. 부디 이 신기루를 영원히 (5) +1 19.04.04 486 38 12쪽
40 7. 부디 이 신기루를 영원히 (4) +1 19.04.03 515 40 12쪽
39 7. 부디 이 신기루를 영원히 (3) +2 19.04.02 507 34 12쪽
38 7. 부디 이 신기루를 영원히 (2) +1 19.04.01 504 39 12쪽
37 7. 부디 이 신기루를 영원히 (1) +1 19.03.31 502 38 15쪽
36 6. 악연의 파편 (5) +1 19.03.30 518 36 12쪽
35 6. 악연의 파편 (4) +1 19.03.29 509 35 15쪽
34 6. 악연의 파편 (3) +9 19.03.28 503 37 12쪽
33 6. 악연의 파편 (2) +1 19.03.27 555 34 12쪽
32 6. 악연의 파편 (1) +1 19.03.26 522 38 12쪽
31 5. 그래도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5) +2 19.03.25 528 38 14쪽
30 5. 그래도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4) +1 19.03.24 556 3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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