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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법군
작품등록일 :
2019.04.0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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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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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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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DUMMY

“···가가! 진 가가! 이제 슬슬 기침하시지 않겠습니까?”


잠결에 들려오는 너무나 그리운 목소리, 그리고 마치 오랜만에 듣는 것 같은 가가라는 호칭.


“···설마, 비매, 인가? 아니, 그럴 리가···!”


갑자기 기억이,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는, 뭐라 말하기 힘든 감각에 묶여서 서서히 가라앉는 느낌이다.


“···어머, 아직도 수마가 덜 달아났나보군요? 소녀가 쌍극도를 빼들어야 정신을 차리실 겁니까?”

“···아, 으앗! 그래, 내 금방 일어나겠네! 나 참, 비매는 느긋할 줄 모르는구먼!”


내가 부르는 비매, 무인들에게는 ‘쌍극도 정나비’로 알려져 있는 괄괄한 여협이자 인생의 반려다.


“조금 있으면 마물들이 몰려들 겁니다. 그런데 느긋하게 잠이나 청하는 걸 보면 꽤나 여유로워 보입니다만?”

“···하하하! 내가 괜히 ‘백마살 진마진’이라 불리겠어! 홀로 마물들을 백 마리나 상대해서 붙은 별호라고?”


백마살 진마진, 그게 내 별호이자 이름이었다.

수많은 마물들과 싸우면서 붙어버린 이 별호에는 그 만큼 자신이 있다는 반증이 된다.

예전부터 그래왔고, 이번에도 그럴 것이며, 앞으로도 줄곧 마물들과 싸우더라도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는 비매야 말로 괜찮겠어? 아이들은 어쩌고?”

“···진 가가? 소녀가 비록 검에 일생을 바친 여자라지만, 이제 와서 아이나 돌보라고 전선에서 이탈하길 바라는 건 아니겠죠?”


쌍극도라는 이도류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화려한 검법이 특기인 비매는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그 어떤 고수라 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자랑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역시 조금 불안하긴 했다.

평소처럼 마물들을 토벌하며 지내다가 위기에 빠진 비매를 구해준 것을 계기로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 아직까지 마음 속에 걸렸다.


“아, 아니 내 말은··· 크흠! 물론 검도 좋지만, 부디 무리는 하지 말아달라는 얘기였지! 무인에게 있어서 혈육은 약점이 되기도 하니 말이지!”

“후후후. 어쩐지 평소의 진 가가답지 않아서 색다른 기분이네요? 하지만 소녀가 진 가가에게 목숨을 빚진 이후로 방심은 하지 않는 답니다?”


그런 담소를 나누는 사이 망루에서 경보가 울렸다.


“그럼 진 가가, 소녀는 먼저 가볼 테니 수마나 완전히 깨고 오시길!”


그리고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비매의 뒷모습이었다.

전장의 혹독함은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당시의 수준은 매번 찾아오는 것에 배 이상이었다.

그 동안은 별 다른 보급 없이, 실력이 출중한 절정고수들이 개인적으로 참전하는 것으로 막아왔던 게 화근이었다.


“이번 전쟁에 크게 패해서 본국으로 마물들이 침범했다며?”

“대부분이 마을에까지 들어와 피해가 극심하다더군.”

“아닐세, 소수는 꽤나 이지적이라서 싸움을 피하고 숨어산다고 들었는데?”

“나 참, 물론 피해도 피해지만··· 제일 중요한 건 앞으로도 막아내느냐, 마느냐가 아니겠는가!”


제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고수라 할지라도 나 홀로 수천, 수만의 어마어마한 대군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인 한 사람을 기준으로 두었을 경우의 이야기였다.


“본인의 이름은 백마살 진마진이라 하오! 본국의 모든 고수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지켜야 나가야 할 민중들에게 도움을 바라오! 부디 힘을 빌려주시오!”


본인의 실력만 믿고 싸우려드는 무인들을 한데모아 통솔할 수 있는 집단, 즉 그들을 묶어서 활용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했다.

설령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얼마만큼의 금액을 지불해서라도, 본국의 위기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본국의 모든 것을 집약시켜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탄생한 게 연맹이고, 나는 맹주로 추대되어서 마물들을 상대로 끝없이 분전했다.


“···비매가 남기고 간 두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 아이들만큼은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그런 생각을 갖고서 줄곧 맹주를 해오니 주변에서 천군만마라고 불러주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맹주로서 유능할지라도 어쩌면 아비로서 실격인지도 모른다.

두 아이들과는 만나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간혹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도 소식을 전해 받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나는 다시금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기억 상실, 이라?”

“거듭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두 아이들은 맹주님은커녕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천운이 따랐기에 그나마 목숨이 붙어있을 뿐이지, 사실상 두 아이들을 잃었다고 보시는 게···.”


내 인생의 반려는 전장에서 죽어버렸고, 두 아이는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에 기억을 잃게 되었다.

그 어떤 의원들도, 그 어떤 귀중한 약재라도, 잃어버린 것을 되돌릴 수 없었다.

나에게는 힘이 있었지만, 정작 지켜야 할 존재는 지키지 못하는 부질없는 힘이었던 것이다.


“맹주님, 부디 마음을 단단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비운의 사고로 소중한 이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헤아릴 수 없겠지만, 맹주님에게는 달리 지켜야만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렇다.

나는 많은 것을 잃었지만, 많은 것을 얻었고, 또한 그것들을 잃지 않게 지켜나가야 했다.

하지만 진수련이 본국에서 나갈 때, 문득 생각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거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연아를 붙잡아야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낭아에게 검을 쥐게 해서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해야겠군.”


결국은 더 이상 그 무엇도 잃기 싫었다는 내 욕심 때문에 기억을 잃은 낭이를, 염열도 진화랑으로 타인을 대하듯 키우기로 했다.

힘을 잃기에는 내가 갖고 있는 지위가, 아이를 잃기에는 내가 갖고 있는 미련이 너무 컸었다.

그래서 나는 잃은 것에 관심을 끊기 위해 바깥으로 관심을 돌렸다.


“본국 이외의 나라라··· 그래, 어쩌면 타국에 있는 자원이 본국에 유용하게 쓰이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지.”


많은 사람들과 무인들이 나를 두고 연합맹주라고 치켜세우면서 의지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다 괴로운 것을 잊기 위해 새로운 것에 관심을 두려는 비겁하고 겁쟁이에 욕심마저 많은 늙은이에 불과했다.

그러니 이 더러울 만큼 더러운 부질없는 목숨이 다하더라도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아버님! 할아버님! 부디 정신을, 정신을 차리시기 바랍니다! 할아버님!”


그렇게 의식이 끊어지려는 순간, 어디선가 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비매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듯 앳된 목소리였다.


“···물러서시오, 진 소저!”


어디선가 병장기끼리 부딪히는 맑고 청아한 소리가 들려온다.

뭔가 그리우면서도 은근히 신경이 거슬렸기에 눈을 떠봤다.


“···크윽! 미, 미안하오! 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소!”


그것은 비좁은 층계참에서 벌어지는 혈투.

앞에는 비틀거리면서도 전력을 다해 염열도를 놀리고 있는 진화랑이, 그리고 뒤에는 아칸 공을 업고 있는 진수련이 있었다.


“할아버님! 드디어! 정신을, 차리셨군요··· 커흑.”

“여, 연아야··· 노부는 대체···?”


진수련이, 연아의 얼굴이 병자 같은 흙빛마냥 심각한 상태였다.

마치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파랗게 질린 수척한 얼굴이, 지금은 무려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아마도, 소녀가 보기에는 회광반조를 겪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할아버님의 몸에서 조금이나마 생기가 돌아오니 다행입니다.”


지금에야 생각이 났다.

연맹 최상층의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에 연아가 사용한 기묘한 술수로 아래층까지 도달했었건만, 본맹의 무인들이 덤벼들어서 내가 앞장서서 응전해야 했었다.

그러나 독에 당한데다 전성기 시절도 아닌 내가 무리를 하다가 의식을 잃어버린 것 같다.


“···크윽!”


진화랑이 짧은 침음성과 함께 뒤로 밀려났다.

아무래도 한계인 것 같다.


“···하, 할아버님?!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간신히 의식이 돌아오셨을 뿐이라 더 이상은···!”


연아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절로 나왔다.


“···허, 허허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누가 누굴 걱정한다는 게냐?”


아무래도 연아는 잘못 이해한 것 같다.

생기가 돌아온 게 아니라 마지막으로 불타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그리운 옛날 얼굴도 보고, 쓰디쓴 경험을 다시 맛보기도 한데다 없었던 미련마저 다시 생겨버렸다.


“···염열도, 자네도 더 이상 애들 장난 같은 칼질은 그만두고 비키게.”


방금 전에 검격을 주고받으면서 내상을 입은 모양인지 입가에 흐르는 혈선이 무척이나 안타까워 보였다.

아직 앞날이 창창한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내상이나 입어서 골골거리면 대체 어찌하여 연아를 지켜준단 말인가.


“···하, 하오나! 맹주님께서는 소인 같은 것보다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힘드실 터! 또한 맹주님은 연맹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인재십니다!”


또, 또 그 지긋지긋한 소리다.


“···갈! 쿨럭.”


내부로부터 연맹이 붕괴한 이상 내가 해야 할 일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지키는 것이다.

또한 지금은 수많은 무인들이나 일반 민중들을 지키는 것보다 눈앞에 죽어가는 자식들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더 이상 연맹이 어쩌고, 맹주가 어쩌고, 그런 이유는 지긋지긋하다.

그런 쓸데없는 이유로 간신히 지켜온 두 아이마저 잃게 된다면, 나는 더 이상 살아있을 가치조차 없다.


“···염열도, 자네는 노부가 눈여겨본 신인 중에서도 실력이 가장 두드러지는 인재일세. 마치 전성기 시절 노부처럼 말이지.”


낭이는 비매의 당당하고 저돌적인 면모를 닮았다.


“···그리고 연아도, 그 문장력인지 뭔지 기묘한 술수는 그렇다쳐도 총명한 머리와 배려심은 장차 남정네들의 마음을 충분히 뒤흔들 수도 있는 무기가 될 게다.”


연아는 비매의 아름다운 외모와 마음씨를 닮았다.


“···설령 노부가 이 자리에서 천명을 다할 지라도 두 사람을 지켜낼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을 정도로 기쁠 따름이네.”


나는 비매를 지키기 못 했다.

두 아이의 원래 기억도 지키기 못 했다.

그리고 지금도 하늘에게서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지만, 내 대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었다.


“노부는 지금부터 남아있는 모든 생명력과 기력을 쥐어짜서 정면을 돌파하겠네! 그 틈을 타서 염열도 자네가 아칸 공과 연아를 짊어지고 달아나도록 하게!”


이미 독이 전부 퍼진 모양인지 전신에 감각이 없다.

하지만 단전으로부터 흐르는 진기는 느껴진다.

비록 비루하기 짝이 없는 적수공권이긴 해도 나의 모든 힘을 담아서 활로를 뚫어내리라 마음먹었다.

설령 칼에 맞아서 팔다리가 날아간들, 심장이 꿰뚫리든, 반드시, 반드시 탈출하게 만들리라.


“···쿨럭! 하, 할아버님! 안 돼요! 제발!”

“허, 허허허. 연아야? 거기 있느냐? 몇 살 먹은 계집아이처럼 눈물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는데, 정작 앞은 보이지 않는구나?”


이미 살 만큼 살았다.

보고 싶을 만큼 보았다.

그리고 잃을 만큼 잃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쉬고 싶었다.


“···맹주님, 이 염열도가 하늘에 맹세하겠습니다. 진 소저만큼은 목숨과 바꿔서라도 반드시 지켜내겠습니다!”

“하하하! 노부로서는 자네도 무사하길 바라네만, 그래도 그 의기만큼은 높이 사겠네! 진 소협··· 아니, 진 대협!”


준비가 끝났다.

늙어빠진 몸에 억지로 활기가 샘솟는다.

망가진 몸이 억지로 움직일 수 있도록 의지를 다진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싸움이자 발버둥이다.


“크, 크하하하! 자, 다들 뛰어가게! 그리고 연맹의 천군만마의 힘을 마지막까지 똑똑히 보고 있게나!”


나는 그렇게 층계참 아래의 문을 정면으로 박살내며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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