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한 옴니버스인 죄와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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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법군
작품등록일 :
2019.04.0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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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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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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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화

DUMMY

제가 처음으로 ‘저’를 의식한 곳은 눈보라가 세차게 휘몰아치는 어두운 숲 속에서였습니다.


“···기억을 잃었다고? 무슨 일인지 몰라도 그거 참 안 됐네.”


그곳을 지나가던 무척 새하얗고 아름다운 분의 말씀에 내심 슬픈 마음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죠.

비록 제가 누군지도 모르고,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며, 설령 이름조차 잊어버려도 눈앞의 아름다운 분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미안하지만, 나도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흥미도 없어. 우리들은 그런 존재니까.”


그 아름다운 분의 말씀으로는, 나는 설녀라는 것 같습니다.

눈과 얼음만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을 한 마물.

그리고 저를 포함한 설녀들은 기본적으로 누구에게나 차갑고 냉소적이라는 것 같습니다.


“···뭐? 좀 더 자기가 누군지 알고 싶다? 그런 건 본인이 직접 찾아다니지 그래?”


그 아름다운 분의 말씀이 맞아요.

저는 이대로 제가 누군지도 모른 채 이렇게 슬픈 기분을 떠안으며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숲 속을 나와서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잠깐 기다려, 혹시 그대로 떠나려는 거야?”

“···예. 무슨 문제라도···?”


어딘가 심기가 불편하신 모양인지 갑자기 아름다운 분께서 내게로 다가왔습니다.


“···만일 당신이 정말로 기억을 잃었다면, 이대로 떠나면 머지않아 죽게 될 테니까. 최소한의 정보만 가르쳐 주겠어.”


그러자 그 아름다운 분께서 내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설녀의 특징을, 여행 중에 몸이 녹지 않으려면 스스로 얼음으로 만든 잠자리에서 몸과 마음을 항상 치유해야 된다고 말이죠.

그렇게만 한다면, 설녀들은 불로불사에 가깝게 오랫동안 장수할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도움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부디 당신의 이름을 듣고 싶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우리들에게 이름 같은 건 없어. 있어서도 안 되고, 있더라도 슬플 뿐이니까.”


그렇게 그 아름다운 분의 의미심장한 말씀을 새겨듣고, 저는 용기를 내서 여행을 떠났습니다.


“아아··· 대체 이것은 뭘까요. 그리고 저건 무엇일까요. 모든 게 궁금하고, 모든 게 신기합니다···.”


저의 목적은 제가 누군지 아는 여행이기도 했습니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것들을 접하고, 또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 덕분에 서로 말이 통하는 분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기억을 잃은 저의 소소한 즐거움이었습니다.


“이런 늪지대에 설녀라니,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어머! 어쩜 신기하게 생기신 분인지··· 몸에 윤기가 흐르고, 반짝이는 것이 무척 아름답네요!”


제가 여행 중 처음 만난 그 분은 저와는 달리 남성인지, 여성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인 면모를 보이셨습니다.

그 늪지대라는 곳에서 두 발로 걸어서 나올 때마다 몸의 윤곽을 타고 매끄럽게 흘러내리는 껍질 같은 피부하며, 무엇보다 저에게는 없는 크고 굵직한 꼬리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실례지만, 당신은 누구신가요?”

“···허어? 그냥 지나가는 렙틸리언이오만?”

“렙틸, 리언? 역시 아무 것도 모르겠지만, 당신의 피부와 꼬리가 매우 근사하군요!”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군. 당신 같은 타 종족 처자에게 근사하다는 말을 듣게 되다니.”


그 근사한 렙틸리언 분은 늪지대에서 물고기라는 것을 잡고 돌아가는 길이었다는 모양입니다.

그 물고기라는 게 파닥파닥 거리면서··· 무척 생기가 넘쳐서 귀엽더군요.


“···어머, 초면에 대단히 실례가 많았습니다. 제가 아무래도 과거의 기억을 잃은 모양이라 모든 게 신기해 보여서 말이죠.”

“···허어? 기억을 잃다니, 그거 큰일이군? 혹시 괜찮다면 내 집으로 와서 자세한 사정을 들을 수 있겠는가?”


저는 렙틸리언 분의 상냥한 권유에 감격해서 간단히 승낙했습니다.

제게 도움을 주신 아름다운 설녀 분도 그렇고, 그 분도 그렇고, 비록 저는 기억을 잃었어도 다양한 만남을 갖게 된 것에 감사하면서 그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집이라 생각되는 지푸라기로 만든 움막에 찾아가 제가 처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흠흠. 줄곧 듣고 보니 그대는 소문으로만 들었던 마신의 축복을 받은 게로군?”

“···마신의 축복, 이라뇨?”

“···크흠! 마신의 축복이란··· 아니, 그걸 설명하기 전에 이곳에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눈치니 간략히 설명해주지.”


렙틸리언 분의 설명에 따르면, 제가 있던 곳을 포함해서 방금 지나온 늪지대나 그 밖의 다른 지역들도 모두 통틀어서 편의상 남쪽이라고들 말하나봅니다.

남쪽에는 다양한 마물과 아인들이 저마다의 생태계가 확립된 지역에서 살아가며, 해당 영역을 침범하는 경우도 있고, 그럴 경우에는 약육강식이라는 유일한 법칙을 준수하며 살아남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남쪽에 거주하는 생명체 전반이 숭배하는 신이 바로 마신님이고, 당신은 그 마신님의 축복을 받아서 기억을 잃었다는 거지.”

“···아아! 그렇군요! 그런데··· 기억을 잃은 게 축복이라뇨?”

“···듣기로는 기억을 잃은 것은 대가라고, 진정한 의미의 축복은 다른 요인에 있다고들 하지.”


그렇게 렙틸리언 씨는 그게 무엇인지까지는 알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 대신에 저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운 좋게 말이 통하면서 성격이 온화한 자들이 친절을 베풀었지만, 일부의 마물이나 아인은 이유를 불문하여 타 종족에게 적대적인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솔직히 마물이면 몰라도, 설녀에게 싸움을 걸 정도로 지성이 모자란 아인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당신이 여행을 계속하겠다면 적어도 상대방의 호의나 적의를 간파할 수 있어야 할 거야.”

“아아··· 이 얼마나 감사한 말씀이신지! 저를 염려해서 귀중한 가르침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렙틸리언 분께서 꼬리를 살랑이며 호창하게 웃으셨습니다.


“아, 아니··· 아하하하! 나는 그저 마신의 축복을 받은 귀중한 인재가 남쪽 변방에서 허무하게 죽는 걸 원치 않아서 조금 도움을 주고 싶었을 뿐이야.”

“어머··· 그래도 초면인 상대에게, 그것도 타 종족에게 그러한 친절을 베푸는 것은 필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겠죠.”


그 후로도 그 렙틸리언 분께서는 제가 모르는 것들을 다양하게 알려주셨고, 저는 그 때마다 모르고 있는 것들이나 궁금했던 것들을 알 수 있는 매 순간이 무척이나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어머! 그러고 보니, 제가 당신의 이름을 묻지 못 했었군요. 괜찮으시다면 부디 이름을 알려주실 수 있겠어요?”

“···미안하지만, 그건 거절하도록 하지. 피차 지나가던 길이기도 했고, 이대로 인연을 쌓으려한들 힘들어지는 건 오히려 당신 쪽이겠지.”


그 아름다운 설녀 분의 말씀처럼, 저는 그 분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어서 다시금 질문했습니다.


“···저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아~ 새삼스럽지만, 미안하군. 타 종족이면서 주제넘은 참견이었어. 아인의 의리로서 최소한의 정보는 알려주었으니 당신은 슬슬 떠나는 게 좋겠어.”


아무리 기억이 없는 저라도 그 렙틸리언 분이 곤란하신 것 같은 낌새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필시 기억을 잃은 저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그 분의 심려를 불편하게 만든 것이겠죠.


“···그렇습니까, 그래도 당신의 도움 덕분에 많은 것을 알 수 있어서 무척 도움이 됐습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감사했습니다.”

“아아··· 부디 잃어버렸다던 기억을 되찾길 바라지. 당신에게 마신의 가호가 함께 하길 빌지.”


저는 렙틸리언 분과 헤어진 후로도 다양한 종족의 마물이나 아인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다양한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됐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저에게 위험이 닥쳤던 적도 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주로 뭔지 모를 것을 함부로 집어먹어서 몸 상태가 나빠지거나 예쁘게 일렁이는 무언가에 손을 넣으려다 무심코 녹아버리기 직전까지 갔던 일이나 어째서인지 가는 곳마다 숭배 받는 일에 휘말려서 여행이 도중에 멈추는 일도 많았답니다.


“···여러분의 성의는 대단히 감사하지만, 저는 기억을 되찾기 위한 여행 중이라 이만 이곳을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남쪽의 곳곳을 빠짐없이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자들에게 제가 누구였는지 질문해왔습니다.

그야말로 수십, 수백, 수천에 이르는 무척 다양한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때로 제게 우호적이었고, 때로는 적대적이었으며, 간혹 저와 마찬가지로 기억을 잃으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이능작가, 라뇨? 마신의 축복이 아니었습니까?”


저와 비슷한 체험으로 기억을 잃으신 분은 놀랍게도 이전에 인간이라는 종족으로 활동하셨던 드래곤이라는 분이셨습니다.


“그대의 주장은 옳다. 허나 그것이 옳다고 진실은 아니다. 또한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게 생겨날 수도 있지.”


그 분은 저 같은 왜소한 몸과는 비교조차 불허할 정도로 매우 큰 몸집을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외적인 생김새를 살펴보면 언젠가 만났던 렙틸리언 분과 다소 비슷할지는 몰라도, 그 분은 바위로 이루어진 언덕에 배를 깔고 누운 채 저의 머릿속으로 말을 걸고 계셨습니다.

그런 그 분의 이지적인 말투와 지금까지 만난 분들 중에서도 가장 위엄 있는 자세를 취하신 분은 처음이었습니다.


“···이능작가. 그것은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나조차도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이질적인 개념이었다. 그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 마물과 인간의 인생으로 살아가면서 수백 년의 시간을 들여야 했지.”

“어머, 무려 수백 년이라니! 대단히 나이가 많으셨군요!”

“···그대 또한 나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한다만, 그건 피차 잃어버린 과거에 달렸겠지.”


그 분의 대답을 듣고 과거의 제가 그 정도로 오래 살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종족이 다르더라도 저는 그 드래곤 님처럼 깊이가 있는 생각을 할 수 없었으니 말이죠.

저는 아무리 남쪽을 돌아다녀도 다양한 경험 이외에는 저에 대한 것을 알 수 없었으니까요.


“···과거에 강대했을지 모르는 그대에게 묻겠다. 아직도 과거를 찾고 싶은가?”


저는 그 분의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과거를 찾기 위해 여행한 모든 것들이 저의 마음을 한 가득 채우고 있었고, 덕분에 이제는 슬프거나 외롭지 않았습니다.

비록 제가 누구였는지 몰라도, 저는 설녀라는 종족이면서 다양한 곳을 여행하고, 다양한 것을 경험하면서, 다양한 것을 배우고, 다양한 분들과 인연을 쌓는 여행이 즐거워서 만족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의 저로 만족하기에 더 이상 과거는 필요 없습니다. 만족스러운 인생이니까요!”

“···그것이 그대가 옳다고 선택한 진실인가? 그것이 정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인생인가?”


그 분의 또 다른 질문에 저는 무척 의아했습니다.

이보다 더욱 기쁘고 보람찬 인생이 어디에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제게 더 이상 과거는 필요 없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만난 분들 덕분에 무척 행복하답니다!”

“···그렇다면 과거에 강대했을지 모르는 그대여, 그대가 주장하는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인생을 되돌아보고 오라. 그리고 이능작가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면 다시금 나에게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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