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어 빠진 이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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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호17
작품등록일 :
2019.04.0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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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9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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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3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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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3)

DUMMY

나는 내가 무언가를 잘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건 습관적인 비관적 주의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말로 내가 잘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특기라는 게 없다. 빈말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그랬다.


관찰력이 뛰어나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초등학생 때는 누구나 잘한다는 달리기로 칭찬을 받은 적 또한 없었다.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이류 씨.”

작업 건물의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내게 김태호가 말을 걸어왔다. 그는 어느 때보다 힘없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아닙니다. 제 쪽이 살 가능성이 크니까요. 당연한 거죠.”

탈출을 위한 미끼로 자원한 후에 나는 내 스킬 중 달리기가 있다는 사실을 모두의 앞에서 공개했다. 그런 면에서 도망만 치는 것이라면 누구보다 내가 살 가능성이 크다는 것 또한 설명했다.


사람들은 납득한 듯한 분위기였다. 아니 납득을 했건 안 했건, 자기 외에 사람이 자원해서 위험한 일을 해주겠다는데, 그걸 굳이 거절하고 나설 멍청이는 없었다.


“··· 역시 이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제가 하겠다고 하고 오겠습니다.”

김태호는 잠시 말이 없더니, 그런 말을 하며 건물의 밑으로 내려가려 했다.


“그러지 마세요. 그러다 김태호 씨가 죽기라도 하면 제 잠자리만 뒤숭숭해집니다.”

결국, 그때 몬스터들과 싸우자고 한 것은 나였으니까요. 뒤이어 내뱉은 말에 김태호의 안색이 확 어두워진다.


김태호가 또 괴상망측한 소리를 하기 전에 나는 미리 선수를 쳤다.


“얼른 통로로 가서 나머지 분들과 합류하세요. 저도 죽으려고 하는 거 아닙니다.”


“그럼?”

되묻는 그의 말에 나는 손끝을 뻗어 건물 옥상에 놓인 거대한 글라이더를 가리켰다. 그가 말한 조사용 글라이더였다.


“몬스터들을 유인하고 나면 이곳으로 올라와 글라이더를 타고 장벽 바깥으로 넘어갈 겁니다. 건물의 높이를 봐서는 충분히 장벽을 넘을 수 있겠죠.”

나는 그리 말하곤 조용히 김태호의 등을 떠밀었다. 그는 끝까지 뒤를 돌아보며 미련에 찬 눈으로 날 바라봤지만, 어쩔 수 없다.


임시 기지라는 거주지를 잃은 이상 이젠 이세계에서 맨몸으로 2주를 살아남아야 한다. 지구의 숲에서도 2주를 살아남기 힘든데,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이곳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다.


최소한 김태호라는 구심점을 잡지 않으면 힘들겠지.


“그럼 꼭 무사히 탈출해주세요. 저희는 먼저 포탈이 있었던 곳에 가 있겠습니다.”

김태호는 마지막으로 그리 말하고는 옥상의 문 너머로 사라졌다.


포탈이라, 좋군. 어떤 불상사로 인해 포탈이 열렸을 때 바로 이 세계의 상황을 알릴 수 있는 위치면 좋았다. 마땅한 거주지가 없는 이상, 새로 거주할 곳을 찾는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포탈 주변은 안성맞춤이지.


“어디 보자.”

나는 옥상의 고요함을 몸으로 느끼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입구 앞의 통로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수십 명의 사람, 이 건물 밑에서 통로 쪽으로 향하는 큰 점 하나.


김태호가 저곳에 도착하면 시작이다. 저쪽에서 이쪽으로 신호를 보낼 방법은 없으니, 내가 알아서 적당히 시작하면 그 틈을 타 알아서 탈출하겠지.


나는 옥상에 턱을 괴고 앉아 몬스터들을 내려다봤다.


몬스터라고 알고 있으니 마련이지, 몰랐다면 그저 징그러운 털 바닥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밀도가 엄청났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시원한 바람, 피로로 찢어질 것 같은 다리가 의자에 앉아 긴장이 풀리자, 저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나왔다.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됐지?


바로 하루 전의 일상이 무섭도록 그리웠다. 이곳에선 빌어먹을 일밖에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나는 점차 등선 너머로 넘어가는 태양을 보고선 기합을 팍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이 되면 위험하다. 불빛 하나 없는 이세계에서 사람은 밤에 취약해질 테니까.


“엇차!”

옥상에 있는 수많은 글라이더 중 한 개를 집고 힘을 준다. 윽, 예상보다 무거웠다. 나는 글라이더를 질질 끌고 옥상 끝머리에 걸쳐 놨다.


“한 개.”


“두 개.”


천천히, 힘을 써서 글라이더를 옥상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놓는다. 여덟 개 정도 올려놨을까, 팔이 후들거렸다. 엄청 무겁네 이거, 진짜로 날 순 있는 거겠지?


준비는 끝났다. 나는 머리를 빼꼼 내밀어 바로 밑을 내려다봤다. 몬스터가 바글거렸다. 시선을 조금 돌리자, 저 너머 통로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흡!”

한차례 기합성과 함께, 글라이더를 두 개 동시에 옥상 너머로 떨어트린다. 날까? 날지 않는 게 좋았다.


이건 말 그대로 공성용이었으니까.


쿵!


바닥을 찍는 무거운 소리가 한차례 들려왔다. 나는 밑을 확인할 새도 없이 곧바로 다음 글라이더 둘을 떨어트린다.


쿵! 쿵!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울렸다. 엄청 무겁더니만, 무게 값은 해주는군.


쿵!


마지막 글라이더까지 전부 쏟아부은 내가 실적을 확인하려는 영업 사원처럼 고개를 밖으로 내밀어 실태를 확인한다.


“후유, 나이스 샷!”

나이스 샷! 이라기엔 바닥에 뭉게뭉게 핀 먼지구름이 너무 거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마치 화가 난 액체 괴물처럼 내가 있는 건물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털 덩어리들과 분주하게 움직이는 통로의 사람들이 내가 할 일을 잘 해냈다는 것을 증명했다.


“너무 작아서 잘 안 보이는데. 저 늑대 놈들, 건물 올라올 수는 있나?”

아니, 농담이 아니라 건물의 문 여는 방법도 몰라서 못 올라오는 거 아니야?


그럼 그냥 여기서 시간이나 보내다가 글라이더를 타고 탈출하면 되는 일이긴 한데.


긴장 어린 표정으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탄식했다.


세상만사 쉬운 일 하나 없다더니, 그건 이세계에서도 같았다.


“문은 또 어떻게 따고 들어왔데.”

쿵쾅쿵쾅, 벌써 아래층까지 온 건지 건물을 부술 듯이 날뛰는 늑대들의 행적이 들려왔다.


사람들은? 아직이다. 아직 입구 쪽의 늑대들이 채 빠지지 않아서 입구로 갈 수 없다.


나는 한쪽 무릎을 의자에 올려 신발 끈을 묶었다. 왼쪽도, 오른쪽도, 메이커의 로고가 떡하니 박힌 운동화가 아직 자신은 달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뭐, 그럴듯한 짝퉁이지만.


쿵!


한 차례, 옥상이 크게 흔들렸다. 밑에서 뭔 짓거리를 하는 것인지. 당최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래서 층간 소음이 문제인가 깊이 납득이 가기도 한다.


“후우···.”

심호흡을 깊게 하고, 옥상 끝에서부터 뒤로 물러난다.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알게 된 건 여러 가지가 있다. 몬스터라든지, 퀘스트라든지, 상태창이라든지, 스킬이라든지.


그 스킬에 대해 알아챈 것을 말하자면, 그건 재능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라는 것이다.


처음 설명을 들었을 때는 그러려니 했다. 그럴 수도 있지 싶었다.


내 관찰력과 달리기와 걷는 게 사실은 타고난 것이었다니!


그럴 리가 없지.


쿵!


옥상이 또 한 번 흔들린다. 건물이 무너질 것처럼 위태위태하다.


말하자면 그거다. 인터넷 학술계에서 유명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얘기다.


내가 가진 재능이었기에 그게 스킬로서 작성이 된 건지.


스킬란에 작성이 됐으니까 내 재능으로서 자리를 잡은 것인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구시렁거리며 점차 흔들림이 심해지는 건물에서 몸을 풀었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몸을 쭉 늘어 당기지만 느껴지는 건 시원함보다는 고통이다.


하루 사이에 너무 고생을 많이 했다. 이제는 슬슬 쉴 때가 됐다.


쿵!


건물이 크게 흔들린 직후, 나는 자세를 잡는다.


언젠가 모니터 너머로 봤던 멀리 뛰기 선수의 자세다.


목표는 바로 옆 건물 옥상. 거리는 멀다. 그러나 절대 닿지 않을 정도는 아니다.


“쉬는 건 이다음이다!”


등 뒤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동시에 초등학생 이후 처음으로 온 힘을 다해 발을 뻗었다.


한 발자국, 흔들리는 옥상 바닥을 밟는다.


두 발자국, 푹 꺼지는 듯한 감각에 발바닥에 힘을 주고 땅을 찬다.


세 발자국, 나는 옥상의 끝에 있다.


그 직후, 나는 허공을 날았다. 등 뒤에서 스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가 눈가에 보인듯한 감각과 동시에, 마치 포탄이라도 맞은 듯이 내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갔다.


“끄악!”

그 이상한 속도에 나는 철퍼덕 다른 건물 옥상에 착지해 몸을 굴렀다. 옥상의 반대편 끝까지 굴러가고 나서야 속도는 조금 줄어들었다.


“망, 망할. 뭐야.”


뭐긴 뭐야. 나는 짐작 가는 바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옆으로 치워 둔 상태창 밑에 짧지만 굵은 메시지가 보였다.


[달리기(1) 활성화]


잘 됐군. 나는 그리 생각하며 달리기 스킬의 효능을 보기 위해 제자리에서 통통 튀었다. 딱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곤 앞으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으악!”

순간적으로 나는 옥상 끝에 서버렸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딛으려고 했을 뿐인데···.


대단하지만, 뭐랄까, 달리기라는 이름치고는 너무 대단한 거 아니야? 순보라든가, 블링크라든가,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도 될만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허투루 움직이지 않게 조심하며 옥상 끝에 걸터앉았다. 방금까지 내가 있었던, 무너지는 건물이 시야를 넓게 채웠다.


건물이 무너질 정도라니 대체 저 넓은 공간을 얼마나 꽉 채운 걸까. 말 그대로 미친 수준의 집요함이었다. 무너지는 건물에서 넘쳐나는 늑대들과 건물에 들어서지 못한 늑대들이 옥상에 있는 나를 발견하곤 꾸역꾸역 이 건물에도 밀고 들어온다.


“··· 사람들은 전부 나갔나?”

이 건물에선 입구 쪽이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을 끌자. 문제는 없다.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달리기 스킬이라면 몇 번이고 다른 옥상들을 넘나들 수 있다. 건물에 제멋대로 치고받는 늑대들이 먼저 자폭할지, 내가 돌아다닐 건물이 먼저 사라질지는 두고 봐야겠지.


또다시 흔들리는 옥상, 지진이라도 난 듯이 부들거리는 건물에 내가 다시 다른 건물로 뛰려는 찰나.


상태창 밑으로 무언가 올라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연회와 오락의 신이 당신을 응원합니다.]


[서브 퀘스트 – 지역 조사 0/100]

[수락] [거절]


퀘스트, 여태껏 봐온 퀘스트와는 다른 퀘스트였다. 몬스터 퇴치가 아닌, 지역 조사.


무슨 차이일까. 단적인 의미로만 보면 전투는 아닌 것 같은데. 임시 기지를 조사하라는 소린가?


일단 퀘스트는 받아서 나쁠 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첫 퀘스트라면 완료하지 않는 쪽이 스킬의 활성화를 유지할 수 있어서 이득이니까.


[퀘스트 수락!]


쿵!


또다시 내가 딛고 있던 건물이 쓰러지려 했다. 나는 다시 엉거주춤 자세를 잡고, 옆 건물을 향해 힘껏 몸을 날린다.


세찬 바람에 눈이 절로 감긴다.


“어?”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모르는 장소에 있었다.


[TIP -지역 퀘스트는 수락 시 퀘스트 수행이 가능한 장소로 이동합니다]


“이런 씨···.”

절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망할, 해삼, 말미잘, 바보, 멍청이.


허공을 넘나들던 나는 지상에 있었다. 그것도 임시 기지의 한복판에.


작가의말

좋은 토요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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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튜토리얼s +1 19.04.08 142 3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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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탈의 너머 19.04.01 319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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