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장 흐르는 별 6화 원유회
6. 원유회
정오를 지나 한 꺼풀 기세가 꺾인 태양이 베케이노 영지의 본성, 콘웰의 드넓은 정원 위로 비스듬히 내리쬐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진초록의 잔디 위에 피어난 갖가지 꽃나무들이 여름 햇살 아래 화사하게 반짝였고, 원유회를 위하여 엊저녁부터 후원 한편에 구덩이를 파고 통나무 장작으로 불을 지핀 화덕에서는 옅은 연기가 피어올라 고기를 굽는 내음을 품은 실바람을 타고 금빛 하늘 위로 퍼져 나갔다.
금일의 원유회를 위하여 특별히 제작된 접이식 기다란 테이블이 잎사귀가 무성한 커다란 나무 아래의 시원한 그늘 아래 주르륵 놓였고, 그 앞뒤로 등받이가 없는 고풍스러운 빛깔의 나무 의자들이 배치되었다.
베케이노를 수호하는 미의 여신 프레노시르와 그녀를 따르는 꽃의 요정들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조각한 청동조각상 주위로 수십여 개의 높이가 다른 물줄기가 솟아오르는 거대한 분수대 좌우로도 방문객들이 시원한 물줄기의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푹신한 의자와 작은 티 테이블이 보기 좋게 놓였다. 내방객들의 동선을 고려하여 그들이 아름다운 콘웰 성의 드넓은 정원을 편히 쉬면서 만끽할 수 있게끔 배치된 가구들은 선왕의 누이이자 베케이노의 공작부인이기도 한 안젤리아나의 뛰어난 안목과 세심한 주의력을 천 마디 이상으로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오후가 되어 손님들이 하나둘 도착할 즈음, 장밋빛으로 물들어 붉게 타오르는 화덕의 숯불 위로 꼬챙이에 꿴 돼지와 양고기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익어가고, 통나무 태우는 내음이 고기를 굽는 맛있는 냄새와 함께 섞여들어 손님들의 식욕을 자극했다.
뮤켄이 콘웰 성에 도착한 저녁 무렵에는 이미 콘웰의 내성 입구에는 안장을 얹은 말이며 수십여 대의 마차가 줄지어 늘어설 정도로 많은 이들이 베케이노에 도착해 있었다. 손님들의 말과 마차를 관리하는 공작가의 하인들이 부산하게 성주위를 오가며 내방객들을 성안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정원은 먼저 도착한 손님들로 가득했고, 마차에서 내린 이들은 친분 있는 이들과 친근하게 어울리며 원유회의 분위기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뮤켄은 북적거리는 사람들의 무리 가운데서 이 원유회의 주인공이자 콘웰 성의 주인인 공작을 찾았다.
베케이노의 영주인 헤라이더 라 아르헨돌프 공작은 정원에서 연회홀로 이어지는 하얀 대리석 계단 위에 있었다. 다갈색이 섞인 금발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채 언뜻언뜻 서리가 내려 있었으나, 왕국에서 손꼽히는 무장답게 훤칠한 사지와 넓은 어깨를 지닌 그에게서는 여름 햇살처럼 강인한 의지와 풍파 많은 왕성이 심어준 노련한 세련됨이 한데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풍겨 나왔다.
뮤켄은 인생의 선배이자, 군부에 몸담았을 적에는 상관이었으며, 지금은 왕국을 위해 함께 싸우기로 의지를 다진 비밀스러운 전우인 그에게로 다가갔다. 대공이 되어 콜드베폰 영주로 부임한 이래 그와 몇번이고 서신은 교환했으나 이렇게 얼굴을 맞대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듯 강녕하신 모습을 다시 뵙게 되어 참으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공작님.”
소탈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뮤켄에게 아르헨돌프 공작은 빙긋이 미소지으며 계단을 내려와 손을 내밀었다.
“공사다망한 와중에 대공께서 베케이노의 원유회에 참석해주어 나야말로 영광이오.”
유서 깊은 명문가의 자제답게 예의범절이 깍듯한데다 사려 깊은 성품을 지니었고, 거기다 뛰어난 군사적 재능까지 보유한 이 젊은 대공은 공작이 수도방위본부의 사령관으로 군부에 몸을 담았을 적에도 유난히 마음이 가던 수하였다. 무릎의 지병 악화로 관직에서 물러날 때에도 후임인 밀시언 장군에게 뮤켄에 대해서만은 특별히 당부를 남겼을 정도로 말이다. 세월이 돌고 돌아 그가 부친인 선대 콜드베폰 영주의 자리를 이어받아 왕국 최연소 대공 위에 올라 서로의 위치가 바뀌었지만 이 진중한 청년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공작님께서 초청하셨는데 제가 천리인들 마다하겠습니까.”
선배이자 상관이었던 아르헨돌프 공작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뮤켄은 예전과 하등 다를 것 없는 태도로 정중히 예를 갖춰 그를 대하였다.
“아니, 콜드베폰의 대공 전하가 아니십니까?”
등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쾌활한 음성에 그들은 함께 고개를 돌렸다. 아르헨돌프 공작과 안젤리아나 공주의 유일무이한 아들인 브라우웰 공자였다. 부친을 닮아 시원스럽게 뻗은 팔다리와 모친인 안젤리아나를 연상케 하는 크고 선명한 푸른 눈동자가 매력적인 그는 적금발의 호쾌한 청년이었다.
“지난번 도성에서 열린 결혼 피로연에서 대공 전하의 놀라운 왈츠 솜씨에 찬탄한 수많은 공녀들이 금일 가면무도회에 대공 전하께서 참석하시느냐고 오후부터 저를 못살게 굴기에 반드시 참석하실 것이라 장담하고 말았는데 이제야 비로소 제가 공녀들께 면이 서겠습니다.”
도성에서의 결혼 피로연이란 여왕이 주선하여 이루어진 크레힐트 레 마르소비야 공녀와 글렌스미트 레 폰다 공자와의 혼인 직후의 연회를 지칭함이었다. 여왕의 의심을 받지 않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미드프레드를 대면할 수 있는 데다, 아체프렌 왕자를 그레안 영주 로엘 대공과 대면시켜주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에 뮤켄도 그 피로연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아체프렌 왕자의 약혼녀인 스와닐다 공녀와 함께 춤을 춘 적이 있었다.
“뛰어난 사교술로 커런스까지 위명이 자자한 공자께서 저의 부끄러운 솜씨를 과하게 평해주시니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뮤켄 본인이야 아무 생각이 없었으나, 기실 브라우엘의 말처럼 스와닐다와 춘 왈츠는 그 후로도 한동안 세레즈 사교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놀라운 무공을 인정받아 보수적인 왕실로부터 대공위를 물려받은 뮤켄과 재상의 무남독녀인 스와닐다는 왕국에서 손꼽히는 선남선녀였다. 왕자의 실종으로 스와닐다의 장래가 불투명해진 상황인지라 미혼인 젊은 대공과 그녀의 조우가 상류 사회의 호사가들의 눈에는 평범하게 비치지 않았다. 뮤켄이 스와닐다와의 왈츠 이후에 더는 그 누구와도 춤을 추지 아니하여서 그들을 향한 뭇사람들의 시선에는 한층 더 호기심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위명이라니요. 저야 그저 아름다움과 풍류를 탐하는 가련한 한 마리의 나비일 뿐인걸요.”
브라우웰이 웃음을 터트리며 손사래를 쳤다. 브라우웰이 울린 처녀가 기백은 이른다 할만큼 바람둥이로 유명한 그였지만, 감탄이 나올 만큼 뛰어난 춤솜씨 외에도 이 젊은이가 다방면에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어 여왕인 세느비엔느도, 제 주군인 아체프렌도 몹시 탐내는 인재라는 점을 뮤켄은 익히 알고 있었다. 브라우웰 라 아르헨돌프는, 뮤켄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황 속에서도 굳이 베케이노의 원유회에 참석을 결정하게 만들 만큼 중요한 존재였다.
“젊은이는 젊은이들끼리 통하는 면이 있겠지. 브라우웰, 네가 대공 전하를 안내해 드리거라. 베케이노의 명물인 사과주도 꼭 대접하고.”
공작이 부드럽게 어조를 낮추어 아들을 자연스레 뮤켄과 연결해주었다. 앞으로 다가올 내일에, 아체프렌과 세레즈를 위해 칼을 들어야 할 자는 자신이 아니라 아들 브라우웰과 뮤켄이라는 점을 그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고 있었다.
“예, 아버님.”
그리고 그것은 활달한 기질을 숨기지 못하여 사교계에서 노닥거리는 것으로 소일하는 아들이 진중한 뮤켄과의 만남으로 한층 더 성장하기를 바라는 아비의 마음이기도 하였다.
“올해는 아직 수확기가 아니지만, 작년에는 사과 농사가 풍년이었기에 아주 좋은 과실주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통구이 전에 드시면 고기의 풍미가 한층 깊어질 것입니다.”
“그거 기대되는군요.”
“저를 따라오십시오. 전하께 베케이노의 명물을 안내하게 되어 몹시 기쁩니다.”
-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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