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세월 5
세레즈력 366년 봄.
가만히 시선을 들어올려 위를 바라본다. 흡사 하늘에서 내리는 순결한 눈으로 만들어낸 것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대리석 계단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천국을 향해 가는 길인 것처럼, 길게 뻗어내린 순백색의 계단 중간 즈음에는 금실로 자수 공단을 박은 화려한 예복 차림의 그가 서있다.
찬란하게 빛나는 봄날, 순결한 여신의 전당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작은 태양인양, 그의 어깨까지 흘러내린 황금빛 머리칼이 뭇 사람들의 시선을 확 잡아맨다.
"오르시지요."
내 주위에 늘어서 있는 상위 의전관 중 한 명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며 허리를 굽혔다. 스치듯이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나는 다시 정면을 바라본다. 그리고 내 앞으로 길게 뻗어내린 이 신전 계단을 오르기 위해 천천히 발을 들어올린다. 발목을 덮고 있는 치렁치렁한 드레스 자락 사이로, 일순 진주 구슬과 레이스로 감싸여 있는 구두코가 언뜻 보이는 듯 했다.
계단 위로 한 걸음 내딛자, 내 뒤에 서있던 궁내부 소속의 상위 시녀 둘이 빠르게 다가와 신전 아래로 굽이굽이 파도쳐 내린 내 밝은 크림색 치맛단을 조심스럽게 붙들어 올린다. 행여라도 무거운 드레스 자락 때문에 내가 휘청거릴까 염려하듯이.
의전관들의 도움을 받으며,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흡사 이 계단이 무너지기라도 할까 두려워하는 사람마냥, 조심스럽게.
알레이시아 신전의 이 계단을 이제까지 몇 번이나 올랐으면서도, 나는 이 순백색의 계단이 이토록 찬란하게 느껴질 날이 오리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내게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았던 이 조형물이, 그저 그 위에 내가 가슴에 품은 그 사람이 서 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이렇게나 내 영혼 깊숙이 스며들 것이라고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이 순간, 내게 이 계단은 그야말로 빛의 세계로 가는, 가장 경건하고 가장 신성한 길처럼 느껴졌다.
벅차오르는 가슴을 안고, 나는 점점 좁혀지는 그 분과의 거리를 가늠해 본다. 이제 열 걸음, 여덟 걸음. 아니, 다섯 걸음.
막 그 정도 거리에 이르렀을 때,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석상마냥 그 자리에 서 있던 나의 왕자님이, 단아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로 다가온다.
어쩐지 눈시울이 젖어드는 것 같은 기분 속에서, 우리의 거리는 그렇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한 걸음.
눈이 부신 햇살을 등지고 선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내게 내민다. 어서 오라고 말하듯이.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그 분의 다정한 눈동자가 나를 향해 살짝 미소짓는다.
전신으로 호흡하는 기분으로,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올린다. 그리고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을 만큼 떨리고 있는 손가락을 그의 손등 위에 살며시 내려놓는다. 그 분이 그러한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쥔다. 마치 안심해요, 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자애로우신 대지의 어머니, 알레이시아여. 당신 앞에서 하게 될 신성한 언약 그대로, 제가 이 분을 사랑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이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이 마음 변치 않고 한결같이 이 분만을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그리 인도하소서.'
18살의 봄날, 알레이시아 신전. 앞으로 내가 가야할 그 길을 축복해주듯이, 찬연한 빛으로 가득찬 약혼식 날에, 나는 신전을 지켜주시는 신성한 여신께 기도를 올렸다. 세상에서 가장 겸허하고 간곡한 마음을 담아.
세레즈력 367년 겨울.
"이게 뭐하는 짓들이냐? 당장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
아버지의 한 마디에, 마차 위에 내 짐을 싣던 하인들이 핏기가 가신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이런 시기에 이리 소란을 피우다니. 내 그렇게나 행실에 주의를 기하고 자중하라 일렀거늘 너희가 정녕 그 명을 어길 참이었단 말이냐."
"대공 전하, 소인들은 그저···"
"예 어디라고 구구하게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냐. 필경 너희들이 그 목숨이 아깝지 않는 게로구나! "
떨리는 목소리로 애써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던 하인 하나가 아버지의 엄격한 일갈에, 혼백이 빠져 나간 듯 마당 위로 털썩 내려 앉는다. 다른 하인들 역시도 사색이 된 건 마찬가지였던지라, 나는 얼른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이 소란이 더 커지기 전에 무마하기 위해.
"그들을 나무라지 마십시오. 제가 성을 나갈 것이니 준비하라 일렀나이다."
"대체 어디를 가겠다는 말이냐, 줄리에트. "
짧게 숨을 들이키며 아버지의 엄한 얼굴을 올려다본다.
"도성으로 갈 것입니다."
"도성이라니! "
날이 선 목소리가 숨막히는 공기 사이로 울려퍼진다. 나는 당장이라도 불벼락이 떨어질 것처럼 엄한 그 눈길 앞에서 휘어질 줄 모르는 나무처럼 고개를 뻣뻣하게 곧추세운 채 똑바로 서 있었다.
도성을 휩쓸고 지나간 전염병에 국왕 폐하마저 쓰러지신 것은 근 보름 전쯤의 일이다. 우리 가문에서도 다른 가문에서 그러하듯이, 차도의 기미 없이 나날이 악화되기만 하는 폐하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살피기 위해 도성으로 가신의 일부를 파견했고, 급기야 오늘 새벽 일찍 그로부터 국왕의 서거를 알리는 급전을 받았던 것이다.
"지금 도성의 상황을 모르지도 않을 터. 네가 제 정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와 같은 언행을···!"
숨막히는 침묵 속에서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아버지가 기가 막히다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알기 때문에 가겠다 하는 것 아닙니까. "
"아직, 도성에서는 아무런 공식 발표도 없었느니라. "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득달같이 도착한 급전은,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소식이었다. 벌써 열시가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그 말 그대로 도성에서는 국왕의 서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리 기다리고 있으란 말씀이십니까. "
"늦어도 오늘 오후나 저녁 나절에는 공식 파발이 도착할 것이다. "
아버지의 예상은 지극히 타당한 것이었다. 지금껏 수도에서는 아무런 발표도 없었으니까. 시간 안배를 해보더라도, 각 영지로 국무부에서 보낸 공식 파발이 도착하는 건 아마 오늘 오후가 지나서일 것이다. 달리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공문을 받고나서 움직이라는 아버지의 뜻은 알고 있다. 그리하는 것이 법도라는 것 역시도.
하지만 하지만, 오늘 오후라니.
아침에 아버지에게 국왕의 서거 소식을 받은 이후, 지금까지. 그저 도성으로 갈 준비를 갖추어질 때까지 기다린 것만으로도 피가 바짝 마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그리 할 수는 없었다.
"그때까지는, 제가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
지금 당장이 아니면 안돼.
나는 한 치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아버지를 올려다본다.
"도성의 공문을 받고 출발해도 늦지 않다. 그리고 또 그리 하는 것이 관례이기도 하고."
알고 있다, 그 말이 옳다는 것은.
그리고, 내가 그 말을 순순히 따를 수 없다는 것도.
"제가 그저, 아버님의 딸이며 폰다 가문의 공녀였다면, 그 말씀대로 따랐을 것입니다. 하오나, 저는 태자 전하와 미래를 함께 하기로 약속한 몸입니다. 지금 수도에서 돌아가신 분은 제게 아버님과 마찬가지 분이세요. 그런 제가 아직 공식 발표가 나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다 알면서도 이리 시간을 지체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가고 싶었다, 도성으로.
아니, 가야만 했다. 그의 곁으로.
이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부친을 잃고 슬픔과 비탄에 잠겨 있을 나의 리온에게로.
"네 어찌 하나만 알고 둘은 생각지 못하는 것이냐? 네 말처럼 너는 그저 공녀 신분이 아니다. 태자 전하의, 아니 이제 신국왕 폐하의 정혼녀인 것이야. 너의 행실 하나 하나에게 세레즈의 수백만 백성들의 이목이 쏠릴 터인데. 네 어찌 그리 경망스레 움직이려 든단 말이더냐. 이럴 때일수록 몸가짐에 유의하고, 자중하며 지내야 하거늘. "
그런 것 따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아니,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지금의 저는, 리온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차서 다른 건 돌아볼 여유가 없어요.
"지금 남들의 이목이 그리도 중요한 것인가요? "
그거 아세요, 아버지?
나의 사랑은, 나의 리온은요. 하루 아침에 자신이 머물고 있던 그 안전한 울타리를 전부 다 잃어버렸어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 속에서도, 상실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지극히 무겁고 부담스러운 짐을 그 두 어깨에 짊어져야만 해요. 모두를 지켜내야만 하는 그 높고 높은 자리에, 외롭게, 고독하게, 내팽개쳐진 거라구요.
지금 그가 얼마나 힘들어할 지에 대해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저는 백성들의 이목보다도, 신료들과 귀족들의 수군거림보다도, 가문의 명예나 제 자신의 평판보다도, 그가 더 소중해요, 나의 리온이. 나의 정혼자인 펠릭스 전하가.
그가 느끼고 있을 아픔을, 아주 조금이나마 덜어드릴 수만 있다면, 내 무엇을 버려도 아깝지 않아요.
그런 제 마음, 이해하실 수 있겠어요?
"펠릭스 전하께서 가장 힘들어 하시고 괴로워하실 때, 그 절망감을, 그 고통을 덜어 드리지 못한다면, 제 위치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때마저 곁에 있어주지 못한다면, 제가 그 분을 모르는 이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어요? 저는 이런 상황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기 위해서 그분과 정혼한 것이 아닙니다. 제 마음, 아버님께서는 잘 아시잖아요?"
그에게 위로가 되고 싶었다.
아니, 하다못해 그가 느끼고 있을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줄리에트. 펠릭스 전하께서는 네 생각만큼 약한 분이 아니다. 날 때부터 왕자(王者)로 자라오신 분이야. 물론 마음을 추스릴 시간은 필요하겠지만, 이럴 때 너까지 나서서 그분께 누가 되어서는 안되는 게야. "
아냐. 아니야.
아버지는 몰라요, 그 분에 대해서.
지금 그분이 얼마나 위태롭게 서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외면으로 나타나는 차고 단단한 모습은 그저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아요.
태자라는 신분 때문에 늘 눌러참고 감추어야만 하는, 한없이 여리고 아픈 소년의 모습을, 나는 느꼈어요.
그래서, 가야 한다는 거에요. 편한 자리가 아니라면, 그 분은 눈물조차 짓지 못할 테니까. 마음껏 울지도 못한 채, 자기 스스로를 괴롭힐 테니까.
"이런 상황에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어요. "
물론 지금도 그는 눈물을 억제하며 창백한 얼굴로, 늘 그래왔듯 차분하고 침착하게 서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마음이 얼마나 참람할지, 나는 알아. 나만은 알고 있어.
그러니까 보내줘요. 다른 때는 아니더라도 지금 그 곁에는, 그를 알고 이해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해요. 내가, 그런 버팀목이 되고 싶어. 내가 그의 대지가 되고 싶어요. 그러니까 그의 곁으로, 나를 보내주세요. 제발.
"저는 도성으로 가야만 해요. "
안타까움에, 눈시울이 다 젖어든다.
"허어, 네 정녕! "
나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간절하게 말한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린다.
"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세요. "
"공녀께서 다소 흥분하신 것 같구나. 게 뭣들하는 게냐. 당장 안으로 모시지 않고! "
19살의 겨울, 펠릭스 전하께서 하늘을 잃어버린 그 날, 나 역시 표현할 수조차 없는 자괴감에 몸부림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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