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세월 8
세레즈력 368년 여름.
집무실 너머 복도에서 나를 발견하신 아버지가, 말을 멈추시더니 마주 서있던 사내 둘에게 이만 물러가라는 손짓을 보인다. 나와 마주친 것이 낭패라는 듯 내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서둘러 아버지의 집무실을 나서는 낯선 사내들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는 내 귓가에 아버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왔다.
"안색이 아직 창백한데, 이리 움직여도 괜찮은 게냐, 줄리에트?"
나를 마주대할 때마다 거의 항상 그리하듯이 아버지의 입가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드리우고 있었지만, 나를 향한 그 눈빛에는 딱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착잡함의 그늘 비슷한 것이 짙게 배어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예. 어머님께서 줄곧 곁을 지켜주신 덕에 많이 나았습니다. "
가볍게 고개 숙여 의례적인 인사를 건넨 다음, 나는 다시 시선을 들어올려 아버지와 두 눈을 마주했다.
"도성에 가셨던 일은 어찌 되셨는지요?"
어째서일까.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문제인데도 이렇게 입밖에 내어 물어볼 수밖에 없는 것은.
···나,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것일까.
"······."
돌아오는 것은, 무겁기만 한 침묵 뿐.
"말씀해 주세요. "
이제와서 무엇을 그리 망설이시나요? 사실, 이 문제는 저도 알고 아버님도 아시는 문제잖아요. 제가, 그 분이 어떠한 반응을 보이셨을지 모를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래서, 그리 대답을 주저하시는 겁니까.
"저는 들을 권리가 있습니다. "
짧은 한숨 끝에, 아버지가 가만히 내게로 시선을 맞춰온다.
굳게 다물려 있던 그 입술이 살짝 벌어지던 순간, 나는 주먹을 말아쥐고 있던 손가락에 잔뜩 힘을 주었다. 무슨 말을 듣게 될 지 다 안다고 해도, 전부 다 각오하고 있다고 해도.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그 말에 틀림없이 상처 입을 테니까. 아버지를 통해서 내게 다가온 내 사랑의 차가운 거부의 말이, 내 가슴을 또다시 할퀴고 유린할 테니까.
"아직, 구체적인 말씀은 하나도 없으셨다. "
하아. 저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한숨 비슷한 것이 흘러나온다.
그래요···. 아직은 아니로군요.
아직, 아직까지는······.
"그저, 너를 만나고 싶다고···"
말아쥐고 있던 손가락이 스스르 풀어진다.
"네가 쾌차하거든 너의 의사를 물어봐 달라 하시더구나. 많이 힘겹다 한다면 당신께서 스스로 이리 오시겠노라고. "
"아니오. "
폐하께서 찾으시는데 제가 어찌 싫다 할 수 있겠어요.
"제가 도성으로 갈 것입니다. "
스스로의 망설임을 끊어내듯이, 부러 단호하고 명확한 목소리로 나는 한 번 더 강조한다.
"줄리에트. "
도리어 그런 내가 걱정스러운 듯이, 아버지가 근심 섞인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신다.
"네 모르리라 생각하지도 않지만, 이번 일은 쉬 해결될 것 같지가 않더구나. 이번에 네가 도성으로 가게 되면은···"
알아요, 아버지. 폐하께서 저를 찾는 연유가 무엇인지.
아버지는 잠시 말을 끊어내어 숨을 들이키시더니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나는 네가 좀더 신중히 생각하여 결정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한다. "
그리고 아버지가 애써 피하시고자 하는 소리가 무엇인지도요.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고 있습니다. "
전부 다, 알고 있기에 가려는 것입니다.
"하오나 제가 도성으로 아니 들어가겠다 하면, 당신께서 이리 오시겠노라 하셨다면서요. 그말은 제가 폐하를 뵙는 것을 거부한다 하여도, 그것은 단순한 시간 유예 밖에 되지 않는다는 의미 아닙니까. "
피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설혹 그 분께서 나에게 다른 여인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 고백하신다 해도.
하여 내게 파혼해 달라, 하신다 해도.
"폐하께서 무슨 연유로 저를 만나시고자 하는지,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알고 있어요. 저를 보기 전까지, 그 분께서는 대외적으로 아무런 발표도 하시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일에 대해 알기가 두렵다고, 이렇듯 뒤로 물러나 비겁하게 하루하루를 연장시켜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폐하의 정혼녀이며 폰다 가문의 공녀인 줄리에트는, 그리 해도 좋다고 배우며 자라지 않았습니다. "
아버지는 아시지요?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의연하고 굳센 태도로 살아가거라, 라고 제게 일러 주신 분은 바로 당신이니까요.
그러니까, 저 피하지 않을 거에요.
"더이상 제 문제가 제 의지와 무관하게 진행되도록 내버려 두지 아니할 겁니다. 도성으로 가서, 폐하를 뵙고 직접 해결 짓겠어요. "
****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무심히 던진 시선 끝에 닿아있는 나뭇잎 가장자리가 노랗게, 빨갛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서둘러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는 나뭇잎 사이 사이로 시선을 옮겨가며 생각에 잠긴다. 내게, 이 여름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고통스럽고, 아팠는데. 이제 그 잔혹한 여름도, 서서히 그 기세를 다해가고 있었다.
열 셋의 두근거림. 열 여섯의 그리움. 열 일곱의 초조함. 열 여덟의 벅찬 행복감. 열 아홉의 안타까움. 그리고 그리고······
그렇게, 지나온 그 무수한 여름들이 내게 주었던 의미를 되짚어 보던 나는, 귓전을 어지럽히는 낮은 한숨 소리에 시선을 들어올렸다.
"나는···"
원형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던 그의 한숨 소리였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운,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한층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그의 한숨 소리.
"빈 말로도 공녀께 용서하라 할 수 없는 몸입니다."
자리를 권한 이후 지금껏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가 천천히 말을 꺼내고 있었다. 깊이를 잴 수 없는 바다처럼 그윽하고 아름다운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그러나 최소한 내 직접 알리는 편이 공녀를 대하는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그의 목소리가. 아니 그 잔잔한 음성 안에 담겨 있는 냉정한 울림이 내 가슴 속에 시리도록 선명히 맺힌다.
알고 있나요···?
우리가 처음 만난 열 세 살의 봄 이후로, 둘만의 자리에서 당신이 나를 '폰다 공녀' 라고 지칭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그런데, 그런데. 이제 당신은 나를 '줄리에트' 라 불러주지도 않는군요.
우리··· 이렇듯, 서먹해질 수도 있는 거였군요.
이런 일이 있어도, 우리가 함께 보낸 그 시간만큼은, 그 기억만큼은 변함 없으리라는 생각···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나 봐요.
당신은, 이리도 금방 내게서 멀어질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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