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장 이삭줍기 1화 귀환
39장 이삭줍기
1. 귀환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굵은 빗줄기에 대지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첨벙거리는 길 위를 빠르게 달려 나가고 있는 사륜 마차의 커다란 바퀴 양옆으로 고여있던 빗물이 촤아하는 소리와 함께 튀어 오른다. 데니아크는 마차 천장 위로 탁탁거리며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창가를 가리고 있던 가죽 덮개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두 손바닥을 연이어 펼치면 전부 다 가려질 정도로 자그마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콜드베폰 영지의 거리는 가을비 탓인지 평소와 달리 행인들의 그림자 하나 없었다.
데니아크는 시선을 조금 들어올려 창문 너머로 언뜻 비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두어 시간 전 자신이 항구에서 도착했을 무렵부터 먹구름이 잔뜩 몰려들어 심상치 않은 빛을 띠고 있던 하늘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막 배에서 내려 콜드베폰 영주가 내려보낸 사람을 따라 마차에 올랐을 무렵만 해도 이리 거세게 내리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위클리암 성을 향해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먹구름으로 까맣게 수놓아져 있던 하늘이 한 방울 두 방울 빗방울들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비가 내리면 땅이 질퍽질퍽해지기 마련인지라, 이동 중에는 빗줄기가 굵어지지 않기를 바랐던 그의 속마음과 달리 거무스름하게 잠긴 하늘은 그의 사정따윈 전혀 돌아볼 생각조차 없는 듯했다. 찌뿌둥하게 흐린 하늘에서 하나둘 굴러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은 점점 거세어지기 시작해 지금은 시야마저 희뿌옇게 가리고 있을 정도였다. 폭신폭신한 고급 모직 의자에 기대앉아 쉴새 없이 내리치고 있는 빗줄기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던 데니아크는 어쩐지 마차 안의 공기마저 눅눅하게 젖어드는 느낌에 들고 있던 덮개를 내렸다.
벌써 한 달 반이 지났던가.
자신이 뮤켄의 청탁을 받아들여 커런스로 출발했던 것도. 데니아크는 짧게 한숨을 토해냈다. 그랬다. 아체프렌 왕자에 대한 커런스의 조력 의사를 탐지해 보기 위해 자신이 세레즈를 떠났던 것도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난 옛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사이 충실하게 흘러간 시간을 대변하듯, 세레즈는 폭염이 연이어지는 늦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맞이하고 있었다. 계절이 바뀐 탓도 있겠지만, 한달 만에 돌아온 모국의 모습은 어딘지 많이 달라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이런 상황에 세레즈에 변화가 없었을 리 없었다. 태자 전하의 귀환에 대한 소문이 커런스 왕실에까지 속속들이 알려져있는 시점 아닌가? 게다가 제가 커런스를 출발할 즈음 세느비엔느가 도성에서 안타미젤 왕자의 대관식을 치렀다고 하니, 신왕의 등극이 태자의 생환 소식과 맞물렸다면 그간 국내 사정이 얼마나 숨 가쁘게 돌아갔을지는 불문가지였다.
'가만, 그러고 보니 벌써 대관식이 지난지 보름이 지났군. 전하께서는 어찌 계시려나. 모두들 한참 정신 없을 시기겠군.'
데니아크는 팔짱을 낀 채로 두 눈을 살짝 내리감았다.
데니아크를 태운 마차는 세찬 빗줄기 속을 뚫고 야트막한 언덕길을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눈에 띄게 기온이 떨어지는 북부 영지 특유의 한기를 막기 위해 이중삼중으로 단단히 밀폐된 구조의 마차인데도 불구하고, 피부 곁을 감돌고 있는 공기는 이상하리만큼 냉랭했다. 기분 나쁘게 추적거리는 빗소리도 그렇지만, 창문 너머로 아련히 들려오는 바람 소리마저 시원스럽게 터져 나오지 못하는 어린애의 울음마냥 한없이 서글프고 서러운 음조를 띠고 있었다.
그들이 콜드베폰 영지의 본성인 위클리암에 도달한 것은 정오를 훨씬 지나서였다.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처럼 지겹게 내리치던 빗줄기도 그들이 본성으로 들어가는 도개교를 건널 즈음에는 많이 가늘어져 있었다.
머리 위를 두드리는 빗방울을 맞으며 빗물에 젖어 미끌거리는 돌계단을 올라서자, 기다리고 있었던 듯 위클리암 성의 상위 의전관 하나가 곧장 다가왔다. 커런스로 떠나기 직전, 임무를 받고 출발 보고를 하기 위하여 위클리암에 들렀던 그 날에도 저를 안내해준 사내였다.
"어서 오십시오, 데니아크님. "
가볍게 예를 표한 사내는 주저 없는 몸짓으로 마차에서 내려 내성까지 들어오는 사이에 젖어버린 데니아크의 망토를 벗겨내고, 그 대신 들고 있던 모포를 그의 어깨 위에 둘러주었다. 그리고 그는 좀 젖어있는 상대방의 망토를 자신의 한 팔 위에 단정하게 걸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리로 오십시오. 아직 식전이실 듯 하여 미리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잠깐만."
마차를 타고 오면서 잠시 눈을 붙였던 탓인지 그리 피곤하지도 허기가 지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왕 다녀온 일에 대해 보고를 먼저 하는 편이 나을 테지. 그리 마음을 굳힌 데니아크는 자기가 전할 말만 끝내고 바로 돌아서 버린 사내를 불러세웠다.
"예. "
"괜찮다면 대공 전하를 먼저 뵙고 싶은데. 그리 해주실 수 있겠는가?"
석고로 만들어진 것마냥 딱딱한 얼굴의 사내가 잠시 입매를 푸는 듯했다. 그러나 데니아크가 그 미세한 표정의 변화를 채 감지해 내기도 전에, 그는 다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예, 그럼. "
그는 근처에 서있던 청년에게 나직하게 몇 마디 이른 다음, 다시 데니아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일단 응접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저를 따르십시오."
소규모의 응접실에서 시녀들이 내온 홍차를 홀짝거리며 벽 한 편을 장식하고 있는 콜드베폰 영주가의 문장(文狀)을 새삼스러운 듯 바라보고 있던 데니아크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약간 놀란 표정으로 돌아섰다.
한껏 젖혀진 문 사이로 제국내 최연소 대공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영지에 도착한 이상 영주인 뮤켄부터 만나봐야 할 것 같아 의전관에게 그리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조금은 더 기다려야 될 줄 알았는데, 소탈하기만 한 이 젊은 대공은 타인을 기다리게 만드는 것으로 스스로의 위엄을 드높이고자 하는 사고 방식 같은 건 전혀 없는 듯 했다. 데니아크는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유엘 레 데니아크, 임무를 마치고 무사히 귀환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 사이 정말 수고 많으셨소, 데니아크 경."
뮤켄은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추는 그에게 성큼 다가가 그 손을 붙들며 쾌활하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번에 경이 보내온 서한을 받고 하루가 열흘인 양 줄곧 경이 세레즈로 어서 도착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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