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청혼 그 이후 - 실연 上
청혼 그 이후 – 실연
1.
아체프렌과 브라우웰의 대담은 미드프레드가 각오한 것과 달리 어쩐지 뜨끔하게 만들었던 초반의 브라우웰의 몇 마디 말을 제외하고는 시종일관 부드럽고도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평탄하게 이어지다가 더 이상 아무런 문제도 벌어지지 아니한 채 마무리지어졌다.
끝까지 들키지 아니한 것에 안도해도 좋을지 아닐지 알 수 없었지만, 당사자인 브라우웰은 물론이요 아체프렌도 이 일을 덮어두기로 한 것 같아서 미드프레드 역시도 이 사실을 무덤까지 가져가리라 다짐하면서 자리에서 물러나왔다.
간혹 여장과 같은 짓궂은 요구로 미드프레드를 난처한 지경에 몰아넣기도 하였지만, 객관적인 시각으로 볼 때 놀라울 정도로 자비로운 주인에 속하는 아체프렌은 미드프레드가 본인의 유일무이한 전속시종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상당히 많은 자유시간을 보장하고 있었다.
미드프레드는 한가로운 오후에 종종 그러했던 것처럼 그 날도 태자궁 내에 있는 도서관에서 몇 권의 책을 빌려가지고 나왔다.
미드프레드가 거리낌 없이 들락거릴 수 있는 도서관은 태자궁 내에 있는 아체프렌 소유의 도서관 뿐이었지만, 아체프렌은 미드프레드가 책을 가까이 하는 것을 무척 기뻐하여 종종 수행이라는 명목 하에 세레즈 최대 서고인 본궁 산하의 왕립 도서관에 미드프레드와 함께 발걸음하여 그가 원하는 책을 찾아 읽게 해주곤 하였다. 그러한 배려가 없었다면 미드프레드가 엄청난 독서광에 세레즈 전역에서도 내노라할 만큼 열정적인 수서가인 태자와 마주 앉아 이런저런 전략이나 정책에 대한 토론을 일상적인 대화처럼 스스럼 없이 나눌 수는 없었을 터였다.
처음에는 문서상 기록이 말소되기는 하였어도 반란귀족의 후예인 미드프레드가 태연히 태자의 도서관을 드나드는 것에 의견이 분분했지만, 공사 구분이 명확한 아체프렌의 성정과 넘쳐나는 총애에 대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다소 인정머리가 없다 싶을 정도로 깍듯하게 아체프렌을 대하는 미드프레드의 태도 때문에 불편한 입소문은 금방 가라앉았다. 사실 제3자가 볼 때 아체프렌과 미드프레드의 관계는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주종 관계라 어찌하여 미드프레드가 태자에게 총애를 받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소리가 지치지도 않고 도는 걸까 싶은 의구심이 품을 정도인 것이다. 여하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자궁 내의 아체프렌의 도서관을 본인을 제외하고는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미드프레드는 두툼한 두께의 책을 겨드랑이 사이에 하나씩 끼고, 나머지 한 권은 펼쳐든 채, 도서관에게 태자궁 본관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화랑을 걸어 가고 있었다.
아체프렌이 부러 사람의 출입을 금지시켜 놓은 탓인지 복도는 선뜩할 정도로 고요해서 별로 크지 않은 미드프레드의 발걸음 소리만이 낭랑하게 울려 퍼지고 있을 따름이었다.
“....읏!”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고 믿고 안심하여 걷고 있던 미드프레드는 왼편 회랑 안쪽에서부터 덥썩 내밀어진 손아귀에 양팔에 끼고 책을 놓쳐버린 채 기둥 안쪽으로 끌려 들어갔다. 다소 거칠다 싶게 미드프레드를 끌어당긴 손길에 그는 미처 저항할 태세조차 갖추지 못한 채로 신화 속의 영웅들이 새겨져 있는 거대한 기둥에 등과 뒤통수를 부딪쳤다.
그러나 황급히 입을 틀어막는 손바닥에 반사적으로 솟아오른 신음조차 목구멍 안쪽으로 억눌려 버렸다. 미드프레드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저녁 나절의 역광 탓인지 상대의 얼굴은 제대로 안 보이고 저녁 햇살을 닮은 금빛 머리카락이 먼저 들어왔다. 설마...?
“쉿, 안심해, 나야.”
석양빛을 받은 대리석 원주가 금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는 가운데, 미드프레드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브라우웰이 입을 열었다.
“공자님께서 여기는 어떻게...”
“내일 돌아가니까.”
미드프레드는 브라우웰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냥 눈을 깜박였다. 브라우웰이 내일 아르헨돌프 본가에 있는 베케이노 영지 돌아간다는 것 정도는 아까 들어 미드프레드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하여 으쓱한 기둥 뒤에서 자신 브라우웰이 마주서 있어야 할 이유가 되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런 분위기는 꼭 그것 같지 않은가. 껄끄러운 눈을 피하여 밀회를 갖는 연인들만의 내밀한 그 무엇. 거기까지 생각을 미친 미드프레드의 이맛살을 찌푸렸다.
“장난이 심하십니다. 공자님. 아랫사람을 놀라게 하시는 것이 요사이 사교계의 유행이기라도 한 겁니까?”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브라우웰의 푸른 눈동자에 문득 짙은 빛을 품었다. 짧은 침묵 끝에 어처구니없는 듯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 장난이라. 그걸 누가 먼저 쳤지?”
웃고 있지만, 브라우웰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찬 서리가 내릴 것처럼 냉랭했다. 한정 없이 잔혹해질 때의 아체프렌과 꼭 닮은 눈이었다.
“천한 신분인지라 지체 높으신 분들처럼 돌려 말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만.”
이 정도 말했으면 뻔히 들통난 것을 알텐데도 도리어 이렇게 강하게 맞받아쳐 오다니, 아까 아체프렌 앞에서 보인 온순하고 고분고분한 모습이 믿을 수가 없을 정도의 면모 아닌가. 아아, 오히려 본성인 것인가.
브라우웰은 한층 더 이녀석에서 흥미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미드프레드가 기대서 있는 커다란 기둥에 한 손을 짚었다. 잠시 후 흘러나온 그 음성은 이제 겨우 열댓살 정도의 어린애가 냈다고는 도저히 믿을 힘들 정도로 위협적인 울림을 하고 있었다.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것도 정도가 있는 거다, 미드프레드.”
미드프레드는 쓴웃음이 솟아오르는 것을 간신히 내리 눌렀다. 어째 아까 쉬 넘어간 것이 가시처럼 걸리더니만 결국 이리되는구나.
브라우웰의 오른 손이 얼굴 쪽으로 쓱 올라왔다. 미드프레드는 닥쳐올 것이 왔다는 기분이 되어 이를 앙물며 눈을 감았다. 뺨을 내리칠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손은 의외로 머리카락 사이를 사이를 파고들어 대충 반뺨 정도 되는 길이의 귀걸이 끝부분의 자그마한 사자형상 장식을 살짝 잡아당겼다.
“아까 미뉴에트를 출 때 공녀의 왼쪽 귓불에는 귀를 뚫은 흔적이 있었다. 신체를 귀히 여기는 커런스 문화에서 귀족가의 영양이 제 몸에 상처를 남긴다는 것은 일반적인 일을 결코 아니지. 특히 귓불을 꿇어 다는 귀걸이는 예속의 표식이기도 하니까. 너의 이 사자 형상의 장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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