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데이(One day)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SF

연어진
작품등록일 :
2019.04.01 11:35
최근연재일 :
2019.06.18 01:29
연재수 :
71 회
조회수 :
30,176
추천수 :
641
글자수 :
759,256

작성
19.04.12 13:24
조회
511
추천
9
글자
25쪽

이변없는 승자 1

DUMMY

16개국이 경합하는 16강전은 분석가들의 예상이 맞아떨어지며 승패를 결정지었다. 조 1위로 올라간 8개 팀 모두 8강에 진출했다. 세계적인 기업에서 분석한 자료에서도 같은 결과를 도출했고, 스포츠도박을 즐기는 이들의 분석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결과에 한해선 이변이 없었다.


이변이 없는 결과란 배팅한 이들이 큰 배당을 받지 못한다는 공식이 성립된다. 모두가 같은 결과를 예측하고 당연하게도 배팅이 몰리기에 1.2배 이하의 배당이 주어진다.


하루는 승무패방식과 기록식 두 개에 전부 배팅했다.


승무패 방식은 16강 8개 경기, 8강 4개 경기. 그리고 4강 두 경기와 결승, 3~4위전까지 모두 16경기 중 15개 경기의 승무패를 맞추는 방식이다. 2주가 넘는 기간 동안의 경기를 예측하는 게임은 없었다. 보통은 일주일 안의 경기들을 구성해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프로리그까지 게임에 포함하지만, 월드컵이라는 특수상황에 맞춰 특별히 만들어진 게임이었다.


특별하지만 방식은 이전과 같았다. 이 방식에서 모두 맞춘 사람이 1등이 되어 배팅금액의 대부분을 받는다. 물론, 운영사가 50%를 가져가고 나머지 중 등수에 따라 차등지급하는 것이다. 2등은 한 개를 틀린 경우, 3등은 두개를 틀린 경우이며 3개를 틀리면 4등이다. 4개 이상 틀리면 낙첨이 된다. 즉 11개 경기결과를 맞춰도 환급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전부 맞출 자신이 있지만 배팅금액제한이 10만원이라 하루는 승무패 경기에 크게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스포츠배배의 정보 교류 카페에서도 1등이 엄청나게 나올 것이란 말을 보았기에 더욱 그랬다.


하루가 기대한 것은 기록식이다. 맞추기 어려워 그런지 기록식은 최소 5배로 시작되는 고배당을 준다.


승패는 예측한 그대로 도출되었다. 하지만 경기의 자세한 내용까지 예측하지 못한다. 그로 인해 16강 마지막 경기가 남은 7월 1일 오늘, 하루의 계좌에는 3,750만원의 잔고가 있었다.


어제까진 구매만 하고 계좌상태를 확인하지 않았던 하루였다. 운동화로 인해 기분이 저조했던 하루는 집으로 돌아와 전화기를 끄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사라져버린 운동화의 이익을 떨치기 위해 계좌를 확인한 것이다.


“아아... 진짜 경기결과와 상관없구나.”


스포츠도박에서는 연장전과 승부차기에서 일어난 점수를 결과에 포함하지 않는다. 즉, 축구의 경우 90분 동안의 골만 기록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8개 경기 중 연장까지 간 경기가 3경기나 되었고, 그 중 두 경기는 승부차기로 승자가 결정되었다. 결과는 이변이 없었지만, 과정에선 이변이 있었다. 스포츠도박에선 대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연장까지 간 모든 경기는 기록식에서는 무승부가 된다. 하루는 경기결과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90분 내에 일어난 골에 대해서만 배팅했다. 너무 잘 맞추면 운영자의 눈이 쏠릴 것을 우려해 일부러 두 경기를 틀리지 않았다면, 하루의 잔고는 오천만원이 넘었을 것이다.


‘쉽게 들어오니 쉽게 나가는 건가.’


이천만원, 신경을 쓰면 삼천만원까지 받을 수 있는 신발을 호기롭게 신어버리고 이내 후회하고 돌아와 그와 비슷한 금액이 있는 계좌를 보고 하루는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돈을 써야 돈이 들어오지!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라며 매달리던 하루에게 그의 어머니가 했던 말이다. 가만히 있으면 돈이 벌리느냐며 자신이 했던 일을 항변하며 한 말에 하루는 할 말을 잃었었다. 그 후 하루는 모친을 설득하길 포기했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까지 떠올라 기분이 저조해지자, 하루는 내일 있을 경기의 승무패 게임에 배팅하고 창을 닫았다. 그날 결과가 나오는 기록식에 배팅하지 않은 이유는 갑작스럽게 늘어나는 돈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그만 해야겠다.’


자리에 누운 하루는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돈을 번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던 것만 끝내고, 손대지 말자. 이러다 중독되겠어.’


하루는 도박에 빠진 적이 있다. 심각한 중독까진 아니지만, 습관처럼 도박을 했었다. 막일판을 전전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아도 늘어나는 빚을 감당하기 힘든 시절 그는 막일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판에 끼었었다. 따기도 하고 잃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월급을 모두 날린 일꾼이 밤에 칼을 들고 숙소로 들어와 난동을 부렸다.


-돈 내놔! 이 사기꾼 새끼들아! 짰지?! 짰잖아!


그 모습이 자신의 미래처럼 보여 하루는 다음날 일을 그만두고 숙소를 떠났다. 떠날 때 그는 혹시 잃은 돈을 내 놓으라 쫓아오는 이가 없는지 연신 뒤를 보았었다. 그 이후 도박에 대해서 정색할 정도는 아니지만 가까이 하려고 들지 않았다. 친구간의 내기정도는 하지만, 판을 펼치고 본격적으로 노름을 하면 슬쩍 일어나 피했다. 그게 법적으로 합법적인 한도가 정해진 게임이라 해도.


하루가 가진 마음의 부담감은 그가 가진 도덕적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강박적인 반발심이라는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다. 만약 합법이 아니었다면 하루는 절대 이런 일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자신을 달랬다.


*


<7월 3일>


하루는 스포츠도박으로 생활을 이어갈 생각이 없었기에 일자리를 찾아보았다. 도농복합도시이며, 항구를 낀 평택이었기에 일자리는 많았다. 대부분이 육체노동에 해당하지만 그런 일이 익숙한 하루는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직업알선 업체를 통하면 수수료를 떼어가기에 월급을 받는 일을 찾아보았지만, 그런 일의 대부분이 협력업체라 하여 알선업체나 다름없는 곳을 통해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기에 하루는 꺼려졌다. 그런 곳에 들어가 좋은 결말을 맞이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원청업체가 지급을 미뤄 협력업체가 도산해도 노동부에서는 협력업체 사장을 닦달하지 원청에서 돈을 받아 주지 않는다. 그런 일을 두 번이나 겪은 하루는 되도록 단계를 거치지 않은 곳에 취직하고 싶었다.


‘형님들에게 연락해야 하나.’


예전에 함께 일하던 이들에게 연락을 해볼까 하던 차에 전화기가 울렸다.


“왜?”

-하루야. 너 돈 있냐?


갑작스런 마루의 말에 하루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얼마?”

-한 이천 되냐?

“....말해. 어디에 쓰는지.”

-있어?

“말하라고.”


주저하던 마루는 집으로 온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온 하루는 마루의 차가 보이자 급히 걸어갔다. 타라는 소리도 들리기 전 문을 열고 앉은 하루는 마루를 노려보았다.


“뭐냐.”

“아... 나 일 벌였다.”


신중한 마루가 무슨 일을 벌였을지, 하루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보았다.


“아니, 씨발... 그 새끼가... 와, 미치겠다.”

“뭐냐고. 제대로 말해.”

“아... 그게...”


마루는 평택의 고물상 주인들 간에 돌던 소문의 기회가 자신에게 왔다고 확신했다. 고물상을 찾아온 외국인이 말을 걸기에 미군부대의 장교거니 생각한 마루는 그가 차에 대해 말하자 기회라 생각했다.


“아니, 근데 씨발... 그 새끼 무슨 캠핑카 파는 외판원이더라고.”

“뭐?”


생소한 일이라 하루는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계약서까지 꺼내기에 난 군용트럭을 합법적으로도 넘기는구나 싶어서 좋아했지. 그 새끼 계속 영어를 해대서... 젠장.”

“무슨... 그래서?”

“계약해버렸지...”

“뭘 샀는데?”

“...스쿨버스.”

“응?”


마루가 산 것은 캠핑카로 개조하기 위해 수입해 들여온 미국의 스쿨버스다. 오래되어 교체되는 스쿨버스에 대해 알게 된 한국의 캠핑카 제조업체가 구입해 개조해 판매할 생각으로 들여온 것이다. 그런데 계약한 업체가 도산하는 바람에 수입한 스쿨버스는 다시 돌아가거나, 폐차장이나 고물상으로 가야 할 상황이었다. 판매상에서는 도주한 수입업체의 대표를 고소했지만, 그것으로 피해액이 상쇄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 들어온 차를 팔아 어떻게든 수입을 내야 할 상황이었다.


“도로 가져가는 비용이 더 들고, 들여올 때 배 삯도 지불해야하고... 저쪽도 영세업체다보니 위태로웠나봐. 그러다 고물로라도 팔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둘러보는데, 나처럼 군용지프라 생각한 사장들이 몇 있었나봐. 그걸 보고 얼씨구나 하고 찾아와서 판 거지. 본래 고물로 팔려던 것보다 더 받고... 미국 개새끼들이야.”


“사기 아냐?”


“아니... 내가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 계약서는 완벽해.”


“스완을 데려다 놓고 대화를 했어야지!”


마루의 처 스완은 모국에서 변호사자격을 취득한 사람이다. 국제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 스완은 영어를 포함한 4개 국어에 능통하다. 그런 스완이 곁에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어후, 누가 모르냐.... 말하면 위험하다고 말릴까봐.... 젠장! 그 새끼 내가 영어 모르는 거 알고 계속 미군 어쩌고 이야기 하고... 그래서 난 당연히 그런 말인 줄 알았는데, 지가 군출신이라고 자랑질 한 거였더라.”


마루는 5년 정도 미국에서 생활했었다. 그래서 영어는 조금 할 줄 알지만, 어려운 전문용어에 대해선 무지했다. 상대는 그런 마루의 상황을 파악해 교묘하게 속이 것이다.


“허... 그건 어떻게 알았는데?”


“스완이... 계약서 보고 이게 뭐냐고 물어서... 그 놈 데려와서 대화해보니까 그렇다더라고... 자신은 군용물품을 취급한다고 말한 적 없다고....”


화는 났지만 하루는 마루가 군수품에 손대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이천이면 돼?”

“어어... 그래도 그 새끼가 양심은 있어서 오천에 여덟 대 넘기기로 했다. 다른 사장들은 나보다 빨리 알아차리고 손 떼고 잠수해버려서... 나도 팔아서 손실 조금이라도 메꾸려면 돈 주고 배에서 내려야 하니까.”

“배에서 내리지도 못한 거냐? 진짜... 그런데 여덟대에 오천이면 싼 거 아냐? 엔진이랑 다 있을 거 아냐?”


손실이 나겠지만 잘 분해해서 팔면 손실을 최대한 무마할 수 있을 것이라 계산하며 말했지만, 마루는 고개를 흔들었다.


“다섯 대는 껍데기만 왔어. 가져와도 못 쓴다고 다 개조해서 쓴다고, 세대는 멀쩡해.”

“움직이는 차 세대에 오천이면...”

“잘 수리하면 어떻게 팔릴 것 같아. 수리비가 좀 들겠지만... 그럼 한 삼천은 세이브 하는 셈이지. 나머지는... 후우, 스완도 그렇게 보고 있으니 눈에 힘 풀어.”

“웃겨서 그래, 임마. 너 그거 안한다고 했잖아.”

“....기회라고 생각했지. 내가 미쳤나보다. 그 사장 구속될 거란 소문도 돌던데.”

“걸렸데?”

“그런 것 같아. 그래서 다들 기회가 오려나 생각했지... 설마, 미국에서 애들 태우던 버스가 올 줄 알았겠어?”

“크흐!”


아이들이 가득 탄 스쿨버스를 떠올리고 하루는 웃음이 터져버렸다.


“웃지 마. 미치겠다, 지금.”

“계좌로 쏴주면 되지?”

“어어... 그런데.... 있어?”

“응.”

“니가? 돈이 어디서...?”

“합법적으로 번거다.”


하루의 말에 마루는 그의 전신을 훑었다. 그리고 낯선 운동화를 보더니 발을 들었다. 기어스틱 때문에 발을 넘겨 하루의 신발을 밟지 못했지만, 하루는 그가 뭘 하려는 지 짐작할 수 있었다.


‘삼천짜리라고 말해도 할 수 있을까?’


말해버릴까 생각하던 하루는 친구의 장난에 맞춰 신발을 숨기는 몸동작을 보였다.


“새신도 사고. 어디 괜찮은 현장 건졌어?”

“으음... 뭐 비슷해.”

“아아, 제초작업 하고 다니는구나?”


고개를 끄덕이려던 하루는 이어진 말에 창밖을 보았다.


“그런 것 치곤 살이 안탔는데.”


마루보다 하루의 재정 상황을 잘 아는 이도 드물 것이다. 정신이 없었기에 하루에게 연락한 것이다. 정신이 들고 보니 하루가 어떻게 이천이라는 돈을 가지고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물을까 하며 입을 달싹이던 그때, 하루가 말했다.


“인증서 컴퓨터에 있어서, 들어가서 보내줘야 한다.”


‘빚을... 미안하다...젠장.’


하루가 빚을 내서 돈을 빌려주려 한다 생각하고 마루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 그럴래? 난 바로 그 놈 만나러 가야하거든. 이리로 옮기는 것도 돈 드는 일인데... 미치겠다.”

“도와줘?”

“아니, 트레일러 불렀어. 세대는 공업사로 바로 갈 거고.”

“알았다.”


지금 잡아두고 훈계해봐야 귀담아 듣지 못할 것을 알기에 하루는 더 말하지 않고 마루를 보내주었다. 마루도 친구의 빚을 빨리 갚아줘야겠다 생각하며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


집으로 돌아온 하루는 사이트 계좌에서 이천 오백만원을 꺼내 은행 계좌에 넣었다. 이천을 마루의 계좌에 입금해준 그는 밖으로 나갔다. 삼백만원을 인출해 아파트 재계약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하루는 일이 잘 끝났다는 마루의 전화를 받고 뿌듯함을 느꼈다.


“돈은 쓰기 나름이구나.”


마루는 과거 그가 빚에 시달릴 때 더한 금액을 빌려준 적이 있다. 마루가 돈을 부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그럴 때 자신이 내줄 수 있는 돈이 있다는 것이 그를 기쁘게 했다. 그런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루야, 도와줘.

“왜? 문제 생겼어?”

-아 씨발, 자리가 부족해. 뭔 버스가 이렇게 크냐? 젠장 다섯 대 쌓아둘 곳이 없다. 와서 고물 좀 치워라.

“....넌 친구냐. 원수냐?”

-친구.

“....알았다. 택시타고 갈게.”

-어, 스완보고 택시비 가지고 나가 있으라고 할게.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루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친구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었다.


“마침 오늘 경기도 없고... 잘 됐군.”


콜택시를 불러 고물상에 도착했을 때, 트레일러 두 대가 다섯대의 스쿨버스를 나눠 싣고 입구를 막고 있었다. 하루는 차를 넘어서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하루는 이날 처음으로 마루의 고물상이 좁다고 생각했다.


“하루야!”


지게차를 움직이고 있던 마루의 부름에 손을 흔든 하루는 집게차로 고물을 옮기는 곳으로 달려갔다. 어설픈 조작으로 고물을 옮기던 외국인 노동자가 하루를 알아보고 기계를 멈춘 후 뛰어 내렸다.


“보스친구!”

“응고, 내가 할게. 응고는 작은 지게차 운전해.”

“알았다.”

“그래, 나도 알았다.”


하루가 돕자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를 내릴 공간이 만들어졌다. 바퀴는 달려 있기에 트럭으로 견인해 움직이고, 지게차도 앞뒤로 달라붙어 이동하는 방식으로 다섯대를 붙여 세웠다. 트레일러 기사들에게 기다려준 수고비를 지급해 보낸 마루는 멍하니 노란 스쿨버스를 보는 하루에게 다가와 맥주캔을 내밀었다.


“노란 스쿨버스에 맥주까지... 여긴 미국이냐?”

“크흐. 너도 그 생각했지? 이야... 타 볼래?”

“좋지.”


둘은 신이 나 스쿨버스에 올라탔다.


“오! 분위기 사는데?”

“유리도 다 멀쩡하고 내부도 넓고. 하루 너 여기 들어와서 살아라.”

“내가 왜? 집 있는데.”

“집 덥잖아. 여긴...”

“여긴 안 덥냐? 에어컨도 없는데. 엔진도 없고.”

“아아... 그러네? 거기에 위가 철판이라 낮에는 찜통이겠다.”

“지금도 찜통이다... 나가자.”


달궈진 차 안은 오래 있을 곳이 못된다며 하루와 마루는 웃었다.


“...고맙다.”


하루는 답하지 않고 마루의 어깨를 가볍게 치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


<7월 6일>


8강전 마지막 경기가 끝난 아침, 하루는 논에 나가 있었다. 김서현의 죽음을 발견한 날 탈곡기를 수거해달라고 했던 노파의 부탁을 받아 그녀의 땅에 무성한 풀을 베어주기 위해서였다. 풀을 베는 동안 인근 두 곳의 논에도 제초작업의뢰가 들어와 그는 저녁이 되어서야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어쩐다. 나 땜시 밤까정 제초기 돌렸네이.”

“괜찮아요. 일당 넉넉하게 받았으니까.”

“안 줌 나한티 혼나니 글치. 얼매 받았나?”

“하하... 사만원씩 주시더라고요.”

“그게 많은감? 품쓰믄 팔만원은 줘야디. 후려쳐먹을 생각만 혀고, 기둘려 봐. 내 가서...”

“하하, 괜찮아요. 길가만 베었는데요 뭐. 길이 반듯해서 작업하기도 쉬웠고요.”

“으잉... 그런가. 그람 되았지. 밥 묵고 가.”

“...예.”


거절할 수 없어 하루는 노파의 집에 가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여긴 시원하네요.”


식사를 끝내고 내준 수박을 씹으며 평상에 앉아 바람을 쐬며 하루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집안의 뜨거운 공기를 떠올렸다.


“땅이 가까워 글치. 땅허고 물허고 흙문대고 살믄 도통 더위를 안묵지.”

“흐으... 농사는 포기하신 거예요?”

“할란가?”

“농사 지어본 적이 없어서요. 일당으로 와서 모내기도 해보고, 이것저것 해봤지만.”

“울 땅 끝내줘. 농약 안쳐서 유기눙? 그거 햐도 되고. 논에 우렁풀고 거위풀고 그렇게 혀도 좋지. 할란가?”


노파의 말과 눈빛에 서린 아쉬움을 보고 하루는 마음이 흔들렸다.


“임대... 하실래요?”

“걍 혀. 놀리면 땅이 죽어.”

“그럴 수는 없죠... 임대료 드릴게요.”

“아서. 첫 농사면 수입도 안나. 술렁술렁 연습한셈 치고 혀봐. 나가 도와줄게.”

“올해는 끝났잖아요.”

“하긴 글치? 아님 연뿌리라도 심을까? 물만 대면 쑥쑥 큰다던디. 난 오리 키워볼라고. 키워서 잡아서 푹 고와 팔고 그람서 살라고. 우렁 팔아서 각시 사온 총각 이야기도 있던디...”

“하하... 그럼 물 대고, 오리랑 우렁을 길러볼까요?”

“주변서도 같이 혀야 혀. 주변서 약 뿌리면 오리랑 우렁 죽어부리니께.”

“그럼 어렵겠네요.”

“아녀. 봐봐, 나랑 영감이랑 짓던 땅이 여깄제? 그 옆에는 나 사촌동상이고, 그 여피는 사돈 것이고, 그 여피는 울 큰아들 것인디, 큰아들이 팔아 묵었지. 그길 사서 귀농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 사돈의 사촌이여. 그니께 다덜 내가 하라면 하게 되어 있어. 괜찮혀.”

“와, 유지셨네요?”

“클헤헤헤! 유지? 그란가? 울 영감이 동네 이장도 혀고 했었구만... 글치, 유지지. 여태까정 땅을 유지했으니 유지지. 클헤헤헤!”

“푸하하하!”


노파의 웃음에 전염되어 하루도 오랜만에 풀어진 얼굴로 웃어버렸다.


“농사 배울람 사촌동상한티 말해둘 터.”

“아...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

“그럴 걱정 하덜 말어. 농사꾼은 있제, 누가 농사짓는다 허면 첨엔 뚱허니 대허는디, 속으론 기특혀게 생각혀. 흔한감?”


하루는 반쯤 농담으로 시작한 말이 생각보다 커지는 것 같아 걱정이 들었다. 그를 아는지 노파는 달래듯 말했다.


“내년부터 혀보자고. 다 허지 말고, 작게... 한마지기만 허면 되겄지이.”

“그 정도면 적당하겠네요.”

“정말 할랑가?”


하루는 한마지기의 넓이를 알지 못했다. 약 25미터의 정사각형의 땅이 한마지기인데, 200평의 크기라 알고 있어도 실제 농사를 해보지 않으면 그 넓이를 가늠하기 힘들다. 노파는 권했지만 해보지 않은 하루가 200평의 땅에서 얼마나 고생할지 눈에 훤하기에 걱정하며 보았다.


“여유생기면 농사짓거나 배타거나 그럴 생각을 했었어요.”

“낭만파여? 클헤헤헤.”

“하하하! 뭐, 그런 셈이죠.”

“그려, 그람 혀. 간단하게 콩부터 심어볼텨?”

“콩을 논에 심을 수 있어요?”

“두둑올리면 가능혀. 물도 많이 빠졌으니께. 할랑가?”

“언제부터 심어야 하는데요?”

“6월에 심제. 근디 7월 상순 전에도 괘안혀. 대풍을 심으면 되겄제. 나가 동상한티 두둑 만들어 두라고 할테니께, 와서 심어 봐. 씨도 좋은 놈으로다가 골라 둘랑께.”

“...내일이요?”

“모레 와.”

“예..”


노파의 추진력에 헛웃음을 흘리던 하루는 설거지를 돕겠다고 나섰다가 노파에게 쫓겨났다.


“아, 가! 밤도 늦어부렀는디 뭐땀시 버틴당가. 어여 가.”


가라고 소리치며 농작물을 한 아름 들고 와 자전거 뒤에 실으려는 노파의 행동에 하루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모레 올게요.”

“그려. 조심 혀고. 라이트 켜야지. 이잉.”


걱정하는 목소리에 울컥한 하루는 급히 페달을 밟았다.


*


마땅한 일자리가 있었다면 하루는 농사짓는 일을 거절했을 것이다. 한여름 땡볕에서 일하는데 보수는 형편없는 그런 일자리만 나와 있어 그는 차라리 농사를 짓기로 했다. 금전적으로 어느 정도는 여유가 있기에 행하는 것이기도 했고, 평소 해보고 싶던 일이기도 했다.


약속한 7월 8일 아침 일찍 노파의 땅에 도착한 하루는 노인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 또 웃고 말았다. 하루가 농사짓는다는 말을 듣고 온 노파의 친인척들이며 인근 땅 주인들이었다.


“워따, 빤빤하게 생겼구먼. 결혼 햤는가?”

“콩자루나 날러어.”

“총각, 여가 나의 사촌동생이고, 여가 사돈이고. 여가...”


하루는 이미 안면이 있던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인사하고, 벌써 움직이기 시작한 노인들을 앞서 움직여 콩이 든 자루를 들었다.


“나눠 들어야지.”

“아...”


콩을 심는데 몽땅 들고 다니려 했다며 노인들은 깔깔대며 웃었다. 하루는 앞서 시범을 보인 노인들을 따라 두둑에 비닐을 까는 작업부터 배웠다. 비닐을 깔고 고정하려 양측면에 흙을 덮고 두둑 중앙에 구멍을 내고 콩을 심는 작업을 하며, 하루는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두둑 한 줄을 끝내고 다음 줄에 섰을 때, 그는 농사의 고단함을 깨달았다.


“빨리혀도 늦게혀도 끝나는 시간은 매한가지여.”

“예...”

“사돈, 잔소리 허지말고 나와서 막걸리나 잡숴.”


노파는 하루 혼자 한마지기의 땅에 콩을 심게 했다. 그래야 한마지기가 얼마나 넓은지, 또 그런 땅에서 정성을 들여 기른 작물이 얼마나 적은 가치로 팔리는지 체득하게 할 셈이었다. 하루는 두 시간에 걸쳐 허리를 펴지 못한 채 콩을 심었다. 콩을 다 심고 난 후에는 물을 주고, 새가 와서 먹지 않게 드러난 콩이 없는지 다시 한 번 살폈다.


“뭣 땀시 그려. 새도 먹고, 벌레도 먹고 그러다 안 먹은 것이 자라야 잘 자라는 법이여.”

“그렇지. 나눠먹어야지 다 먹으려 들면 다 뺏기게 되는 법이여.”


노인들의 조언을 들으며 자리에 앉은 하루는 막걸리를 받아 들이 키고, 파전을 씹다 물었다.


“비닐은 왜 까는 건가요?”

“저렇게 깔면 피가 안나.”

“피가 뭐여. 쌀 키우나? 잡초지.”

“그냥 풀이라 혀. 뭐땀시 유식한 척이여~.”


왜 싸우는지 모를 일이었기에 하루는 괜히 물었다 여겼다.


“서른 마지기 두고 한마지기만 할라고?”


하루는 200평의 땅이 얼마나 넓은지 허리로 실감하고 있었다.


“이것도 힘드네요.”

“하다보면 욕심 생기는 법이여. 가만두면 하나 둘 늘리다 다 짓고 있겄지.”


노인들은 그게 뭐가 웃긴지 배를 잡고 웃었다. 허리가 쑤시던 하루는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속으로 장담했다.


*


농사를 시작하고 하루는 왜 농부들이 일찍 일어나는지 깨달았다.


“허.”


피곤했지만 콩을 새가 다 먹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들어 그는 눈이 번쩍 떠졌다.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샤워를 한 후 파스를 전신에 덕지덕지 붙인 하루는 아파트 현관 앞에 둔 자전거에 타려다 고개를 흔들었다.


“차를 사야하나.”


마루가 가까이 살았고, 살며 자가용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던 하루지만 쑤시는 몸으로 자전거를 탈 엄두가 나지 않아 자가용이 간절해졌다.


“살까?”


쉽게 벌었기에 쉽게 버는구나 생각하며 자신의 욕망을 내린 하루는 힘겹게 페달을 밟고 어제 만든 밭에 가 보았다. 이미 나와 논에 들어가 피와 잡초를 뽑는 노인들을 보다 하루도 자신의 밭에 내려갔다.


하루사이에 기적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새가 쪼아 먹었는지 흙이 비닐 위로 올라오고, 반쯤 쪼개진 콩조각이 놓인 곳이 몇 곳 있었다. 어제 받아 둔 콩주머니를 열어 새로운 콩을 넣으려 손가락으로 깊이 구멍을 파던 그의 뇌리에 어제 노인들이 해준 조언이 떠올랐다.


-깊이 묻으면 안전할 거 같지? 깊이 넣으면 올라오기 힘들어~. 안 그러것나? 땅에 파 묻으면 나오기 얼마나 까다롭것나. 그챠?

-그라도 얇게 묻으면 또 안디여. 뿌리가 깊이 안 들어감서 거시기 해부리니께.

-어짝 사람이 해도, 땅이 알아서 키우는 겨. 괘안혀.


깊이도 얇게도 아닌 적당히. 정확하게 측정이 안 되고 자신들도 가늠이 안 되는 노인들의 기준인 적당히를 떠올리며 하루는 씨를 뿌렸다. 흙을 단단히 눌러 새를 막으려던 그는 그랬다간 싹이 올라오지 못할까 누르던 손에 힘을 뺐다.


‘이게 농사구나...’


부지런히 움직여도 자연의 힘은 이기지 못한다. 그래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움직인 만큼 보상이 돌아오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는 생각했다.


-총각! 밥 묵었나! 아, 밥이 남어~. 와서 먹던가.


“큭! 예에! 곧 갈게요!”


-오던지 말던지.


퉁명스레 말하고 노파는 서서 기다렸다. 하루는 급히 자리를 정돈하고 둔덕위로 올라갔다.


작가의말

선추코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원데이(One day)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71 섬지기 3 19.06.18 246 9 23쪽
70 섬지기 2 +1 19.06.17 222 8 22쪽
69 섬지기 1 +3 19.06.14 243 11 23쪽
68 11시간 4 19.06.08 257 7 17쪽
67 11시간 3 19.06.07 245 9 20쪽
66 11시간 2 +2 19.06.05 260 8 27쪽
65 11시간 1 +1 19.06.04 251 10 32쪽
64 꼭 필요한 사람 5 +2 19.06.03 248 9 24쪽
63 꼭 필요한 사람 4 +2 19.06.02 245 9 31쪽
62 꼭 필요한 사람 3 +4 19.05.29 304 11 21쪽
61 꼭 필요한 사람 2 19.05.25 296 8 28쪽
60 꼭 필요한 사람 1 +2 19.05.23 318 10 16쪽
59 취미생활 2 19.05.22 308 9 32쪽
58 취미생활 1 19.05.20 313 9 24쪽
57 평범한 사람 3 +1 19.05.20 326 9 28쪽
56 평범한 사람 2 19.05.19 297 6 23쪽
55 평범한 사람 1 19.05.18 295 4 25쪽
54 핸드폰 7 19.05.17 307 8 21쪽
53 핸드폰 6 19.05.11 334 7 17쪽
52 핸드폰 5 19.05.11 289 6 21쪽
51 핸드폰 4 +3 19.05.09 317 5 11쪽
50 핸드폰 3 +2 19.05.07 312 9 22쪽
49 핸드폰 2 19.05.06 311 5 26쪽
48 핸드폰 1 19.05.05 355 7 29쪽
47 미래 고정하기 2 +4 19.05.04 312 7 25쪽
46 미래 고정하기 1 19.05.04 311 5 23쪽
45 미래는 시작되지 않는다 2 +1 19.05.03 320 7 23쪽
44 미래는 시작되지 않는다 1 19.05.02 314 5 16쪽
43 실종 +8 19.05.02 331 8 19쪽
42 추락 7 19.05.01 328 7 2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