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고양이가 되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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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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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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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07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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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 친해지길 바라 (5)

DUMMY

“먼저 이렇게 이야기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스로의 이야기를 털어놓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것도 오랫동안 알아온 친구사이도 아닌, 이제 막 시종이 된 자에게 털어놓는 것은 더더욱 말이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루시엘님이 저를 싫어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꾸 이리저리 훅훅 사라지시곤 하셔서요.”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형님한테 행여 또 이상한 소리를 할까봐 무서웠거든.”


아마 내가 아닌 다른 인간이었더라면 분명 그는 루시엘의 행동을 곧이곧대로 루시안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면 루시엘은 더욱 움츠러들었을 거고.

일단 저 기죽은 태도부터 바꾸는 게 시급했다.

저러면 잘 될 일도 망칠 테니.


“저는 루시엘님을 믿습니다.”

“뭐?”


뚱딴지같은 말을 내뱉자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야 그렇겠지.

태어나서부터 보아왔던 시종들, 가족들도 안 하는 소리를 내가 하고 있으니.


“지금 이제 막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저한테도 이렇게 이야기 해주셨잖아요.”

“아...”

“저에게도 미안하다고 순순하게 인정해주셨고, 스스로에 대한 고찰을 끊임없이 하신 걸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루시엘님이 앞으로 더 좋은 분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진심이었다.

비록 그가 자존감이 낮아 스스로를 한없이 격하시키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별달리 비뚤게 나가지도 않았다.

얼마든지 어긋날 수 있는 상황이어도, 그는 나름대로 정도를 지키고 있었다.

그건 정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내가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자신을 가지세요. 적어도 당신의 시종인 저만큼은 그렇게 믿고 있다는 걸 알아주세요.”


최소한 내 주변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람 일이라는 게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라지만, 그렇더라도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늘 바라왔다.


“오늘은 피곤하실 테니 이만 주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응. ...아니, 이건 먹고 잘래.”


루시엘은 내가 사온 케이크 꾸러미를 풀었다.

주황 장미 묶음은 근처에 있던 화병에 물을 부어 꽂아 넣었다.

장미를 바라보던 루시엘이 중얼거렸다.


“주황 장미의 꽃말을 알아?”

“꽃말...장미라면 사랑이라는 뜻이었던가요?”


단순히 루시엘의 머리색이 생각나 사왔을 뿐이라 내가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식물에 관심이 많다더니, 아무래도 그는 꽃말에도 박식한 모양이었다.

내가 애매한 목소리로 말하자 루시엘이 작게 웃었다.


“장미는 색이랑, 꽃의 개수에 따라 꽃말이 있거든.”

“처음 알았습니다.”

“빨강 장미는 정열적인 사랑이라는 이미지가 있다면, 흰 장미는 순결을 의미하고, 노란 장미는 질투라고들 하지. 그리고 주황 장미는...”


꽃송이를 살짝 만지작거리던 루시엘이 뒷말을 이었다.


“수줍은 첫사랑 고백.”


오, 정말 나와는 죽어도 안 어울리는 꽃이었다.

누군가가 내가 루시엘에게 이 장미를 건넨걸 보았더라면, 내가 수줍게 루시엘에게 고백이라도 한 걸로 오해했을 지도 모르겠다.

여기가 루시엘의 방이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음. 저는 그게 루시엘님의 이미지와 맞는다고 생각해서 샀던 것 일뿐이니까...”

“알아. 색깔이 내 머리색이니까 그렇겠지. 그런데 이렇게 보고 있으니까 꼭 오늘의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러면서 루시엘은 웃었다.

그가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그와 만나고 처음 보았다.

항상 어딘가 주눅들어있고, 기가 죽어있었는데, 지금만큼은 그가 누구보다도 빛나보였다.


“내 이야기를 이렇게 누군가에게 처음 고백해보는 건 처음이니까. 그런 의미에선 딱 이네.”

“앞으로도 자주 그렇게 해주세요.”


장난스럽게 말하자, 루시엘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여기에 단 케이크까지 들어가면 정말로 완벽한 마무리였다.

이걸로 한 건 해결인가.

루시엘 몰래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한 가지 물어도 될까?”

“제가 답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요.”

“조금 웃기게 들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괜찮겠어? 이런 나랑 계속 있어도.”

“아까 말했잖아요. 저는 할 수 있는 한, 루시엘님 곁에 있을게요.”


말하면서도 속이 내심 찔렸다.

어차피 그와 나의 관계는 시한부나 다름없다.

내가 그의 시종이 된 것도 교육원에 있을 제 3황자를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적어도 그와 함께 있는 동안은, 그에게도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문득 루시안이 루시엘에게 내 정체와, 본 목적을 말하지 않은 이유가 떠올랐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이니까. 다치질 원하지 않으니까.

항상 행복했으면 하니까.

그 역시 위험한 일은 스스로 다 떠맡으려하는 바보였다.


루시안도 나름대로 루시엘에게 최선을 다했던 거일 테다.

다만 그 사랑의 방향이 그를 이해하는 쪽이 아니라 그저 무조건적으로 퍼주는 쪽으로 가는 바람에 살짝 어긋난 것 일뿐이다.

근본적으로 사이가 틀어진 것은 아니니,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조금은 이 형제가 부러웠다.



며칠 후, 나는 교육원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농땡이를 부리고 있었다.

교육원에 가기 위한 준비는 매우 간단했다.

별다른 의복이나 용품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모두 다 교육원에서 지급되기 때문이다.

즉 나는 몸만 따라가면 되는 거다.

덕분에 루시엘이 방에 있을 동안, 나는 적당히 주변 장소들을 청소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떠나기 전, 에드가 이곳으로 잠시 들릴 거라고 루시안이 말했었는데...


바닥을 적당히 쓸고 있는 나와 달리, 헤일리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탁자에 카드들을 늘어놓은 채 고심하고 있었다.


“또 연애운 보는 거예요?”

“아니! 이번에는 내 가까운 미래를 보고 있었어.”

“그래서요. 결과는 어때요?”

“그냥 그렇지, 뭐. 별다른 특별한 일도, 신나는 일도 없을 거래.”

“대신 그만큼 평화롭게 있을 수 있다는 거니까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그거야 나도 알지. 그렇지만 가끔은 스릴 넘치는 일도 있었으면 좋겠단 말이야.”


스릴이라. 나는 그런 것보다도 지루하더라도 일상적인 나날을 보내는 게 꿈이었다.

지나치게 다이나믹한 인생도 그다지 좋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루시엘님이랑 많이 친해진 것 같더라?”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항상 저를 생각해주시거든요.”


이건 맞는 말이었다.

그날 이후로 루시엘은 꽤나 나를 신경 쓰고 있었다.

문제는 난 그에게 주목받는 입장이 되고 싶진 않았단 거다.

이전보다 밝아진 건 좋은데, 분명 기쁜 일인데, 괜히 더 귀찮아지는 건 아니겠지.


“흐응. 그건 분명 좋은 일이네. 그리고 루시엘님도 이전이랑 꽤 많이 달라지신 것 같아. 내 생각엔 너 때문인 것 같은데 맞지?”

“제가 뭘 했겠어요. 그냥 대화 상대나 해드리고 그런 거죠.”

“아냐. 그보다도 더 무언가가 있는 거 같아.”


갑자기 헤일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 사람,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슨 일이라니...아무 일도 없는데요?”

“아냐. 내 감이 말하고 있어. 분명 나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루시엘님이 저렇게 밝으신 모습은 처음 본단 말이야.”


더 이상은 대화 불가다. 얼른 도망쳐야겠다.


“저 이따 나갈 거니까 이만 가볼게요!”

“뭐? 어디 가는 거야!”


헤일리에게 빗자루를 넘겨준 뒤, 나는 재빠르게 별관을 빠져나왔다.

그녀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빠른 속도로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미처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해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아...”

“앗!”


상대는 나보다 컸다.

덕분에 빠르게 달리고 있었던 나는 반작용으로 휘청하며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상대가 내 손을 붙잡아 준덕에, 땅바닥과 그대로 마주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상대를 볼 때였다.


“조심해야지.”

“어, 언제 온 거야?”


하얀 머리가 선선한 오후 바람에 얕게 휘날리고 있었다.


“조금 전에. 더 빨리 오고 싶었는데 바쁘다기에 기다렸어.”


루시안이 그렇게 언질을 준 모양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주변엔 우리 외의 사람은 없었다.

행여 샬럿 시종장이 보았더라면 경박스럽게 뛰지 말라고 한 소리를 들었을 거다.


“그동안 무슨 일은 없었지?”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없었어.”

“다행이네.”


안도한 듯 그가 미소 지었다.

그러자 내 마음 또한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널 따라가고 싶은데.”

“그러다가 네 존재가 발각되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변장이라도 하면 되지 않을까? 알리샤에게 부탁해서 외형을 바꾸는 마법을 써달라고 하는 거지.”

“괜한 사람 붙잡고 그러지 마. 그리고 내가 싫어.”

“너무하네.”


에드는 서운한 표정을 지었으나 나는 딴청을 피웠다.


“한 학기가 끝나는 시점에 온다고 쳐도... 최대 두 달인가.”

“아마 그렇겠지.”

“너무 긴 데.”


에드가 투덜거렸지만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기도 뭐하니까, 일단은 나가자.”

“그래.”


우리는 천천히 거리로 내려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작 몇 주 가량 보지 못했을 뿐인데, 에드는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었다.

네가 내 부모라도 되는 거냐.


“루시엘 이라는 아이는 어떤 아이야? 난 동생이 있다는 사실만 알았지, 그 애에 관한 건 몰라서 궁금했어.”

“음...일단 적어도 루시안 보다는 나은 것 같아.”

“어떤 면에서?”

“글쎄...성격적인 면에서 더 낫다..?”

“하하. 그게 뭐야.”


루시안은 확실히 여러모로 귀찮았다.

붙임성 좋고, 활발하게 나서는 건 분명 좋은 성격이지만, 조용하게 있고 싶고, 눈에 띄는 걸 원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거의 상극인 셈이다.

즉 나와 그 놈은 정반대란 소리다.


하지만 에드는, 적어도 집안에 있을 때는 활기차고 에너지 넘치는 소년이었던 지라, 나는 그가 루시안을 꺼려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쿵짝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루시안이 말하기를, 에드가 교육원 내에서는 말이 없는 편이라고 했는데, 실은 내성적인 성격이었던건가?


“에드는 루시안을 왜 꺼려하는거야?”

“그건...”


에드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적어도 그때는 처신을 잘 해야한다고 생각했거든.”


에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묵묵하게 들었다.


“우리 가문은 제국의 탄생과 함께 이어져 온 가문이었으니까. 그래서 가문에 누를 끼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몸을 사렸던 것도 있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부러웠던 것 같아.”

“부러웠다고?”

“응. 누구에게나 인기 좋고, 쉽게 친해지고. 가문의 장남이면서 저렇게까지 자유분방하게 행동할 수 있구나 싶기도 했고. 여러모로 신기한 사람이었지. 그래서 더 꺼려했나 봐. 이런 걸 열등감이라고 하나?”


사람은 늘 스스로를 누군가와 비교한다.

나보다 못난 자를 보며 자존감이 올라가고 나보다 뛰어난 자를 보고 좌절한다.

이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비교 활동은 인간의 본능인 셈이니까.

루시엘이 그러했고, 에드가 그러했듯.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겠지.


“내가 보증할게. 에드가 훨씬 낫다고.”

“하하. 고마워.”


에드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그만 두라니까. 그거.

내가 투덜거리며 그의 손을 치우자 그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고양이일 때는 쓰다듬는 거 좋아했잖아.”

“그땐 그거고, 지금은 인간이잖아.”

“아이들은 쓰다듬 받는 걸 좋아한댔어.”

“뭔 헛소리야.”


노을이 마을의 곳곳을 붉게 물들였다.

이제 곧, 이베네 황립 교육원으로 떠나야 한다.


작가의말

항상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주도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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