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현주소 (2)
본문은 작가의 창작에 의한 허구입니다.
설정과 실제는 다를 수 있습니다.
- 김만수 -
예상은 했지만, 술잔이 서너 번 돌고 나니 다들 그동안 꼭꼭 숨겨뒀던 괴로운 이야기를 꺼내 놓고 있었다. 대한민국 중년 남성들 대부분이 겪고 있는 고통이지만, 유독 우리 친구들에게는 그 크기가 더 크게 다가온 것 같았다.
“천천히 마셔라. 마셔도 취하지도 않는데 그렇게 들이부어서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 스탯 떨어져서 예전 같지 않거든?”
“그래? 하긴 나도 얼마 전부터 에이징이 오긴 오더라.......”
“그러니까 하는 말 아니냐? 다들 은퇴하고 예전만큼 돈 버는 것도 아닌데 술값 어떡하려고 그래?”
태훈이의 잔소리에 다들 지지 않고 한마디씩 받아쳤지만 결국은 태훈의 승리였다. 각성 이후 일반인의 육체를 뛰어넘은 초인이 되었고, 초인의 몸이 된 우리의 주량은 인당 소주 열 짝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소주 한잔에 골로 가는 알코올 쓰레기, 줄여서 알쓰들이 들으면 엄청 부러워할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각성 이후 우리는 소주 한잔에 골로 갈 수 있는 알쓰가 더 부러워졌다.
각성자들은 혼자 소주 열 짝을 비워도 필름이 끊이지 않는다. 취기가 돌긴 하는데 그냥 살짝 알딸딸한 정도다. 각성전 소주 서너 잔을 마시고 느낄 취기를 소주 열 짝을 마시고 느끼는 게 과연 정상일까?
처음엔 좋다고 마셨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술을 마시는 게 지겨워졌다. 그래도 한동안은 술을 마시러 다녔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그것도 귀찮다고 술을 끊게 되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술을 억지로 마시는 미련한 짓을 계속 반복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각성자과 동시에 우리의 화려했던 음주 인생은 끝이 났던 거다.
‘그래서 그랬나?’
생각해보니 각성 초기에만 친구들과 모임이 잦았다가 시간이 가면서 점점 이런저런 이유로 모이는 횟수가 줄어들었던 것 같다.
그땐 그랬다. 다들 각성자가 되어 제각기 다른 길드에 가입하면서 바쁘게 활동했다. 길드마다 던전 사냥 스케줄이 달랐고, 활동 구역도 달라서 모두 모이는 게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린 미리 정한 날에 월차를 써서 모임을 가졌다.
“세상 참... 대단한 것도 아니고 고작 소주값 걱정이나 하고 있으니........”
일이의 한탄에 다들 얼굴이 굳었다. 내일 모레면 50세가 다 되어가는 마당에 주머니 사정이 다들 좋지 않았다. 굶어 죽지는 않아도 여유를 부릴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갈수록 주머니 사정이 궁핍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나마 연금 들어 둔거라도 있어서.......”
“연금? 이혼하자마자 일시불 청구로 절반 뜯기고 나머지는 애들 양육비로 다 나가고 거덜 났는데 연금은 무슨.......”
태훈이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말이 연금이지 연금은 우리들을 위한 게 아니었다. 나, 태훈이, 그리고 정호까지 모두 이혼을 당한 마당에 연금까지 뜯기고 있었다.
“돈 못 버는 놈은 버려지는 세상이잖아?”
태훈이 녀석이 뼈를 때리는 말을 툭 던졌다. 던전이 생겨난 뒤로 세상은 더 각박해졌다. 던전에서 구하는 물질로 새로운 기술 문명이 발전하기는 했지만, 반대로 잃은 것도 많았다. 특히 농지 유실이 가장 큰 타격 중에 하나다.
몬스터의 출현으로 이전 끽해봐야 멧돼지나, 고라니, 뉴트리아 등의 야생 동물에 의한 피해가 아닌 인명 살상력을 지닌 몬스터에 의한 농지 유실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였다.
“야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우리가 못 버는 거냐? 그건 아니잖아? 예전에 잘나갈 때처럼 존나 벌지 못하는 것뿐이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말대로 다들 대충 먹고 살만큼은 밥벌이를 하고는 있었다. 한창 잘나갈 때 씀씀이를 줄이지 못하고는 못 한 것이 문제였다.
“예전처럼은 아니어도 그냥 일주일에 D던 한탕씩만 해도 돈 걱정은 안하고 살 텐데.......”
“일주일 뭐야? 보름에 한탕씩만 해도 살만하겠다.”
“내 말이!”
“꿈같은 이야기다. 보름이 아니라 한 달에 한탕만 뛸 수 있어도 소원이 없겠다.”
취하지도 않은 것들이 헛소리하는 걸 듣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F등급도 안 되는 능력치로 D급 던전을? 우리 중에 설마 그런 야무진 꿈을 꾸는 녀석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제 보니 다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보편적으로 40세를 기점으로 각성자의 에이징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수년간 에이징을 겪은 우리들의 능력치는 E급에서 F급 이하로 떨어진지 오래다. 특히 데미지를 감소시켜주는 저항과 스킬을 사용에 필요한 마나 수치가 떨어지는 건 치명적이다.
육체적인 능력치는 꾸준히 잘만 관리하면 50세까지도 에이징으로 인한 저하를 늦추고 일반인보다 더 강인한 능력을 보일 수 있긴 하지만, 저항과 마나의 저하는 막을 방법이 없는 걸로 알려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능력치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하다. 바로 금기시 되는 엘릭서 파우더를 흡입하는 거다. 엘릭서 파우더 흡입은 무척이나 간단하지만 지극히 위험한 방법이다.
괜히 엘릭서 파우더라는 이름이 붙은 게 아니다. 기적의 치료제라는 엘릭서처럼 완벽에 가까운 회복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굳이 파우더라는 단어가 따라붙은 이유는 부작용이 있기 때문이었다.
‘말했다가 미친놈이라고 욕이나 먹겠지........’
내가 생각해도 엘릭서 파우더를 흡입하는 건 미친 짓이니까.......
그래도 잠시나마 능력치를 회복할 수 있다면.......
미련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엘릭서 파우더를 마신 뒤로 감당해야 할 부작용이 두려웠다. 처자식을 잃었을 때 더는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크크크크........”
참으려고 했는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엘릭서 파우더의 부작용을 두려워하는 나 자신이 우습기만 했다.
그때였다. 싱가포르에 출장 갔다는 낙원이가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낙원아!”
정호가 먼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낙원이를 불렀다.
‘이게 무슨 일이래?’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낙원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뭔가가 이상했다. 눈웃음을 짓고는 있지만, 어딘가 굳어진 표정을 보고 알았다. 예전부터 무슨 일이 있으면 저런 어색한 표정을 짓곤 했다. 낙원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출장이라면서?”
“어. 그랬지. 일이 일찍 끝나서 그냥 들어와 버렸다. 간만에 다 모이는데 나만 빠지는 것 같아서.......”
“잘했다. 잘 지냈지?”
“어? 어 그래. 다들 잘 지냈지?”
명색이 불알친구인데 서로 주고받는 인사가 이렇게 어색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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