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속삭임
프로텍트 아머로 무장하고 나온 나를 오금명이 힐긋 했다. 녀석은 내 소문을 아는지라 기분 내키는 대로 막 다루는 녀석들과는 달리했다.
솔직히 금동환이 저리된 것도 나와 관련 있다는 소문이 은근히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서포트 주제에 프로텍트 아머를 착용했느니 뭐라 욕지거리를 내뱉을 테지. 녀석의 눈빛만 봐도 당연히 알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필 내가 서포트해야 할 파티가 우리 반에서 제일 골통 두 명인 오금명과 이명우라니 내 팔자도 참.
옆에는 역시 무장한 차성희가 있었는데 매일 본 레깅스 스타일과 달리 전투복을 입혀 놓으니 색다른 멋이 느껴졌다. 귀엽지만 왠지 모를 도도한 분위기는 남자의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마성의 힘이 있다.
그녀는 이미 정석우의 여친이라는 소문이 파다해서 그녀에게 집적대는 남자애들은 없다. 하긴 정석우가 아니더라도 그녀의 레벨이 A 클래스다 보니.
"동혁 오빠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그녀가 나를 이리 대하는 것은 마인 사건 이후다. 그녀는 내게 오빠라는 호칭을 정확히 사용했고 그건 정석우나 석동일도 마찬가지다. 아니 우리 반 애들이 어느 순간부터 나를 형이나 오빠로 호칭했다.
그녀의 파티인 금동환이 나를 힐긋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버린다.
오늘 같은 D급 던전에 투입되는 파티는 이렇게 두 파티다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나아간다.
나는 이미 던전 경험이 상당하므로 별반 느낌이 없지만 다른 친구들은 그렇지 못한가 보다 오금명도 긴장한 것인지 입술을 핥아 댄다.
솔직히 D급 던전은 나 혼자 솔플 뛰어도 충분하다. 반월륜을 사용하지 않고 각성도만 있어도 충분할 것 같다.
선두는 오금명과 이명우가 나섰다. 둘 다 신체 강화다 보니 당연한 거겠지만
얼마 가지 않아 스캐빈저 무리가 쉭쉭 소리를 내며 우리의 등장을 알아차리고 달려들었다.
홀로 그램이 아닌 실물을 보니 조금 두려움이 밀려오는가? 두 사람의 몸이 굳어 있었다.
"무엇하냐? 공격 안 할 거야?"
내 호통에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은 방패와 무기를 세우고 달려들었다. 확실히 서창명이나 안칠현 아저씨들하고는 수준이 달랐다. 애들이라고 하지만 B급들이다 보니 D 급 몬스터는 어렵지 않게 상대했다.
다만 경험이 없다 보니 마음이 앞서고 주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터널 시야에 걸려 앞만 보는 문제는 있지만.
대부분 이런 직렬 사고 때문에 던전 수준을 자신의 레벨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으로 정한 것이다.
점점 검이 손에 붙고 스캐빈저를 몇 마리 쓰러트리자 한숨을 돌린 두 사람은 긴장한 얼굴에서 약간은 웃음 띤 얼굴로 변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의 미소겠지.
이번 던전은 인간형 몹이 나오는 것 같다. 스케빈저 몇 마리 잡고 의기양양해 있는 이들에게 다음으로 등장한 몬스터가 구울이었다. 구울 개체 하나하나는 그리 강하지 못해도 이들은 최소 수백 단위 떼거리로 덤비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작정하고 무식하게 베어 넘겨야 하는 몬스터다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금세 수가 쌓이게 된다.
물론 여기 오기 전에 아카데미에서 공략 비디오를 틀어 주고 애들에게 주입 교육하긴 했다. 하품하면 잠자던 애들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그중에 이 두 녀석도 있다는 것이 문제다.
구울을 몇 마리 베어 넘기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갑자기 쏟아져 오는 구울 무리에 혼쭐이 나고 있었다.
오금명의 얼굴을 보니 질려 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명우도 숨 내쉬는 것도 힘들 정도로 구울 떼거지를 막아 내고 있었다.
"구울 공략 안 봤어? 이놈들은 막는 게 아니라 쓰러트려야 해. 하나 막고 있으면 금세 숫자가 불어난다."
내가 미리 힌트를 주었건만 역시 이상과 현실은 다른 것이다. 녀석들은 내 앞에서 무게를 잡고자 하는 투가 역력했다.
너는 나설 필요도 없다. 우리가 다 할 테니 하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행동에서 읽을 수 있었으니까.
잠시 방심하는 사이에 구울 무리가 녀석들을 둘러쌌다. 물론 구울이 아무리 달라붙어도 B급에는 상처를 줄 수 없다고 해도 이들은 던전 초출인 애들이다. 궁지에 몰리면 사고가 좁아지고 실수를 연발한다.
"후, 이놈들 D 던전에서도 헤매네."
나는 오금명과 이명우가 들으라는 듯이 크게 고함치고는 반월륜를 수십 개로 나눠 한번 훑어 줬다. 밀려오던 구울의 목을 전부 공중으로 치솟게 만드는데 놈들의 눈에는 장관으로 비쳤겠지. 눈빛을 보니 대충.
녀석들은 입을 딱 벌리고는 할 말을 잊어버린 듯한 눈치다. 내가 실전에서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 처음 봤을 테니까.
이미숙 선생이 현역 헌터 대동 없이 나만으로 팀을 구성한 것에 대해 오금명과 이명우가 한소리를 했었다. 그때 이미숙이 그런 말을 했지.
"이놈들아 동혁이가 너희들 서포트 봐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해."
그 이유를 두 사람은 비로소 느낄 수 있겠지.
"그러니까 공략을 충실히 보란 말이야. 아무리 D급 던전이라도 방심하면 훅 간다? 구울은 쓰러뜨리는 속도를 늦추면 순식간에 불어나기 때문에 무조건 베어 넘겨야 해. 다음 구울부터는 나도 붙는다. 어차피 이 던전은 거저먹는 거지 문제없어."
내 말에 오금명은 감히 반박조차 못 했다. 실전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걸 방금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
구울이 밀려 나오기 시작했을 때 각성도를 꼭 써 보고 싶기도 했다. 육강이니 무강에서 무엇이 달라졌을까 했지만 한번 베어 보니 느껴지는 게 있었다.
날카로움의 차이랄까 그전에는 손끝에 뭔가 살짝 걸리는 느낌이 있었다. 검이 살을 가를 때 조금 잡히는 느낌이 있었다면 지금은 정말 완벽하게 깨끗이 빠지는 느낌이다. 검에 기름을 발라 놓아 살과 근육 속에서 자유롭게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구울의 몸속에서 반원을 그렸는데 부드럽게 검이 회전했다. 니텐이치류의 검법이 훨씬 맛깔나게 변했다.
힘과 민첩에서 오금명과 이명우에 비해 떨어질지는 몰라도 구울을 베어 넘기는 속도는 내가 훨씬 빨랐다. 경험과 무기 차이에서 녀석들과의 레벨을 메꾸었기 때문이다.
서창명이나 안칠현처럼 던전 경험이 수 없는 사람들이 구울과 싸우는 것과 지금 오금명이랑 이명우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만큼 경험이 얼마나 던전 공략에 큰 위치를 차지하는지 피부로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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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정말 B 맞냐?"
차성희는 짜증 나는 투로 쏘아 뱉었다. 그 고운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금동환은 신경질적으로 구울을 상대했고 따로 떨어진 김광호는 혼자 구울에 둘러싸여 발광해댔다.
"정말 못 봐주겠군. D 레벨에서 이 모양이면 상급 던전은 어떨지 안 봐도 뻔하다."
차성희는 독하게 녀석들을 몰아붙였다. 구울은 줄지 않고 더욱 기승을 부리며 밀려들었다.
차성희는 윈드 윕을 꺼내 휘둘렀다. 채찍에 휘감진 구울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녀가 짜증이 나 있던 게 원래는 정석우와 석동일의 서포트로 참여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이들의 서포트를 맡으라고 하니.
던전 초입부터 이들에게 화풀이해댔다. 금동환 김광호는 학급에서도 소문이 안 좋은 문제아들에다 아웃사이더들이라 엘리트인 자신과 너무나 동떨어진 매치라고 생각했다.
애초부터 어긋난 파티가 잘 굴러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금동환과 김광호도 따로 놀았고 차성희는 그런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역시 혼자 구울을 처리했다.
거의 혼자 구울을 처리하다시피 한 차성희는 금동환과 김광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희는 뭐야? 호흡도 맞지 않고 차라리 여기서 놀고 있을래? 던전은 나 혼자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그럴 수는 없지 않아. 이거 다 녹화되고 있는데. 잠시만 쉬고 다시 시작하자."
김광호의 말에 차성희는 멀찌감치 떨어져 혼자 주저앉았다.
"마음대로 해 너희들이 가든 말든 나 혼자 할 테니까."
김광호는 그녀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낮게 웅얼거렸다.
"시발련이."
금동환은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지만, 그의 가슴속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일전의 홉고블린 사건으로 반에서 왕따를 당한 것은 물론 F등급의 벌레들까지 자신을 피해 다녔으니 그의 자존감은 박살이 나 있었다.
자신은 누구인가 반에서 강하기로 치면 서열이 3위다. 그 정석우와 석동일 바로 다음이 자신이라는 이야기다. 그런 그가 개 같은 일을 당할 줄은.
그날 김영좌 소령으로부터 당한 수모는 영원히 잊히질 않을 것 같다. 그는 나이 어린 애들을 다룰 줄 아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어떻게 해야 가슴에 못을 박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금동환이 반 학생을 갈구는 일진이라고 해도 김영좌가 그에게 준 수모는 자존감을 완전히 박살 내버리는 것이라 그 충격이 대단했다.
차성희를 바라보는 눈에 살기가 어렸다. 저년도 나를 무시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터질 듯이 끌어 올랐다.
'저년을 죽이고 싶니?'
마음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그렇게 물렀다.
'그래 저년을 죽을 만큼 패고 싶어'
'그럴 힘은 있고? 저 애는 A 레벨인걸?'
'그럼 어쩌란 말이야. 나도 강해지고 싶은데 정해진 레벨이 있는데.'
'내가 그 힘을 줄 수 있어. 강해지고 싶지 않은 거야?'
'네가 힘을 준다고 넌 누구지?'
금동환은 정신을 후딱 차렸다. 지금 누구와 대화를 하고 있는 거지? 라고 어리둥절해서 하며 좌우를 둘러 봤다. 저쪽에 앉은 차성희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고 김광호는 검을 닦고 있다. 누구도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은 없다.
'누구냐?'
'너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신이지.'
'신이라고?'
'그래 힘을 원한다고 말만 해. 너에게 A 레벨을 넘어설 힘을 주지'
'A 레벨을 넘는 힘이라고? 그거 정말이냐? 당장 힘을 줘.'
'좋은 아이구나. 너에게 힘을 주마. 바닥에 오른 손바닥을 대어 보아라'
금동환은 차가운 던전 바닥에 손바닥을 대었다. 화끈거리는 통증이 손바닥을 통해 들어왔다. 금동환이 놀라 손을 떼어 보니 손바닥에 기묘한 문장이 하나 새겨져 있었다.
'신이 힘을 주신 건가? 신이 힘을?'
"이봐 가자! 움직이자고."
금동환이 허리들 들고 일어나며 김광호에게 말을 했다.
'피가 그립구나. 넘치는 힘으로 저 아이를 피의 수렁으로 밀어 넣어 보아라.'
금동환이 눈을 깜박일 때마다 조금씩 붉은 기운이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얼마 안 갔을 때 쏟아져 나온 것은 스켈레톤의 무리였다. 금동환의 눈이 점점 붉게 충혈되어 갔지만 차성희도 김광호도 느끼지 못했다.
금동환은 눈앞의 스켈레톤을 쓰러뜨리며 힘을 쏟아냈다. 그는 세상이 살짝 붉게 변했다고 얼핏 생각은 했으나 그냥 무시했다. 스켈레톤이 눈앞에 아른거려 찢어 버리고 싶은 욕망이 앞섰기 때문이다.
한 마리 두 마리 스켈레톤을 찍어 누르자 근육이 수축하며 힘이 차올랐다. 흉부가 팽창되는 힘이 팔뚝을 타고 주먹으로 쏟아져 내렸다.
금동환은 검을 집어 던지고 두 주먹으로 스켈레톤을 후려쳤다. 한 방에 스켈레톤이 터져 올랐다. 어깨와 등 뒤로 이글이글 힘이 뻗어 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금동환은 완전히 힘에 도취해 갔다.
"이봐 동환아 검을 떨어뜨렸어."
뒤쪽에서 따라가던 김광호가 소리쳤지만, 금동환은 전혀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저 애 왜 저래?"
차성희도 금동환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가만 저거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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