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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서리
작품등록일 :
2019.04.01 17:47
최근연재일 :
2019.07.20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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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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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66. 재앙의 결과

DUMMY

상황이 완전 역전됐다. 이번엔 정만의 팔이 허공을 부유했다. 절단면에서 피를 뿜었다. 그는 다급히 성물을 쥐고 기도를 했다.


“오로니아시여!”


상처가 좀 지혈되는 게 전부. 그러나 출혈사를 막을 수 있는 게 어디인가. 정만은 불평 없이 검을 고쳐잡았다.


반대로 성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팔을 벤 건 의도한 게 아니었다. 복수심은 있되, 재현하며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 목표는 목이었고 정만은 죽었어야 했다.


그런데도 월도가 빗나간 건 성진에게 문제가 있어서다.


‘쳇. 벌써 시간이.’


계약하면서 쓰게 된 반지의 기술, 피의 군주. 그것의 사용 시간이 다 되어갔다. 곤란한 일이다.


육체야 흡혈귀의 힘이니 그렇다 쳐도, 피로 만든 월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레이 소드를 막을 수 있으면 싸움이 되지 않는다. 그는 속으로 혀를 차며 달려나갔다.


서컥!


“쳇!”


효과가 떨어지는 게 벌써부터 드러났다. 피의 응집력이 약해져서 월도가 잘려나간 것이다. 다시 회복됐지만, 이젠 타격을 주기가 만만치 않다. 일일이 월도가 베이면 힘으로도 밀어붙이기 어렵다.


‘속도를 살려서 틈을 내면···’


어떻게든 약점을 찾아본다. 팔이 잘린 왼쪽으로 파고든다. 정만이 크게 물러서며 검을 휘둘렀다.


“하늘을 걷는 계단을. 비행(飛行).”


레이 소드가 공중으로 흩어진다. 갑작스러운 돌개바람이 정만의 몸을 저택 밖으로 날려 보냈다. 성진이 다급히 쫓았지만, 적은 이미 공중에 떠 있는 상태였다.


그걸 본 성진의 머릿속으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공격. 다른 하나는 도주.


그는 전자를 택했다. 월도를 똑바로 세우고 날아올 공격에 대비했다.


“···네 얼굴을 기억하겠다.”


그러나 정만의 선택은 도주였다.


순식간에 날개를 회쳐서 달아난 그를 보며 성진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야 저 새끼?”


둘 중 한 명이 죽어야 끝나는 싸움인줄 알았다. 성진의 경험은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사람, 몬스터. 어느 쪽이든 목숨을 걸었다. 이 세계에서의 짧은 기억이지만 그만큼 밀도가 높았다.


무엇보다.


정만은 대재앙이었다. 여태까지 파악한 방식으론 피하면 더 커다란 형태로 몰아치는 존재. 그렇기에 반대로 적이 도망가리라곤 상정도 못 했다. 게다가 딸도 있지 않던가.


얼이 빠졌다.


“···진짜 간 거냐?”


혹시나 방심을 유도하려는 전략인가 싶어 기다려 봤지만, 정만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리는 사이 ‘피의 군주’ 지속 시간도 끝나서 월도가 사라졌다. 그는 어색함에 뒷머리를 긁으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안에는 피온과 오드가 치료를 끝낸 상태였다.


“아···”


아닐라가 성진을 바라봤다. 복잡한 감정이 눈동자에 실려 흔들린다. 그녀는 간신히 한마디를 뱉었다.


“죽였나요?”


“도망쳤습니다.”


“아···”


이미 복잡한 감정에 다른 감정이 더해진다. 성진은 아닐라가 생각을 정리하도록 놔두며 피온과 오드를 살폈다.


“괜찮냐?”


[너야말로 괜찮냐? 내가 본 거로는··· 죽었다고.]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으로 있는데, 결과만 말하자면 죽었다 살아났어.”


[···예언가란 건 대단하구만.]


“아니. 이건 예언한 거 아냐.”


[뭐? 마! 그럼 운 없었음 뒤졌을 거란 소리잖아!? 네 모가지 똑바로 안 챙겨!?]


“아예 예언이 안 될 수준은 드물다고.”


능청스럽게 말했지만, 이번 일은 성진도 느낀 바가 많았다. 주인공이 정말로 적이 될 수 있다는 것과 재앙이 스스로 몸을 피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반항도 못 할 만큼 강력한 존재가 나올 수 있다는 점 등등.


이젠 적을 속단할 수 없었다. 언제 어떤 존재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드는 어때?”


[···포션으로 치료할만한 수준이 아니어서, 아닐라한테 신성치료 받았어.]


바닥에 뉘인 오드는 악몽이라도 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성진은 그를 한번 쓰다듬어 주곤, 아닐라에게 말했다.


“저하고 피온은 인질을 찾아볼테니, 오드 좀 봐주세요.”


“네. 확실하게 지킬테니 다녀오세요.”


둘은 1층 방부터 뒤졌다. 정만이 튀어나온 방향. 당사자가 나온 곳이니 가장 의심스러웠다.


“···뭔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복도에서부터 뭔가 발견한 둘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조심스레 전진했다.


[사람인데? ···그리고 피네.]


피를 흘렸던 사람은 고개를 숙인채 벽에 기대어 쓰러져 있었다. 정신을 잃은 모습. 월도를 꺼내려면 성진은 허공을 잡으며 입맛을 다셨다.


[왜 그래?]


“월도가 망가져서 무기가 없어.”


[지옥 고양이를 보내볼께.]


이미 한차례 크게 덴 두 사람은 과할 정도로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평소라면 다가가서 툭툭 건드렸을 피온도 일부러 지옥 고양이를 써서 확인했다.


쓰러진 사람은 반응이 없었다. 둘은 시선을 교환한 뒤 다가갔다. 운동을 덜 한 40대 남성. 치사량 수준의 출혈. 그는 얼굴을 보기 위해 손을 뻗었다.


덥썩!


그러자 마치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남자가 움직였다. 성진의 팔목을 붙잡아 눈을 마주쳤다. 왠지 모를 불쾌감. 흡혈귀의 강력한 육체를 이용해, 팔을 떨쳐냈다.


“오오! 이건 정말··· 새로운 조율자···”


털썩.


늙은 노인의 목소리. 그걸 마지막으로 남자가 고꾸라졌다. 주먹으로 패버리려던 성진이 멈칫하며 다시 남사를 살폈다.


“···죽었어.”


[수상한걸. 마지막으로 하는 말 들었어?]


“새로운 조율자··· 였던가. 어느 쪽이든 죽는 사람이 할만한 유언은 아냐.”


조율자. 조율자. 왠지 모르게 걸리는 단어를 머릿속에 기억한 성진이 다시금 수색을 이어갔다. 방을 하나하나 뒤지며, 감춰진 통로가 없는지 꼼꼼히 살폈다.


그러다가 툭 하고 던지듯 물었다.


“아닐라 씨 부담스럽냐?”


[그렇다기보단 껄끄러··· 마. 갑자기 물어보기냐?]


벽면을 긁어보던 피온이 무의식중에 답했다. 성진은 피식 미소를 흘렸다.


“그게 뭐 어때서. 나도 이해되는데.”


아닐라 킴 레이. 정만의 딸. 피온은 죽을뻔 했고, 성진은 죽었다. 서스럼없이 받아주는 게 이상하다. 그나마 비난이 없었던 것도 같이 싸우며 치료해준 탓이다.


그녀가 아빠라고 부르며 말리는 장면부터, 싸우고 치료해준 것까지. 전부 보면서 겪은게 피온이었다. 원수의 자식인데 대놓고 싸운걸 봤으니, 원망하기도 애매하다. 그렇게 이런저런 상황을 재다보니 껄끄럽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너도 그렇잖아. 죽은 당사자니까.]


“···나는 조금 달라.”


성진은 좀 더 냉정하게 보는 편이었다. 아닐라와 정만을 둘로 갈랐다. 아닐라는 동료고 정만은 적이다.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어도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정만을 죽일 수 있으면 망설이지 않을거고, 아닐라를 도와야 한다면 곧장 도울거다.


이분법이 위험하긴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난 그게 안 돼. 어떻게든 생각하게 되더라.]


“그럴 수도 있지.”


어느 쪽이 정상인가 묻는다면 단연코 피온이다. 성진은 수긍하며 다음 방을 수색했다.


“대신 티는 내지 마. 저쪽에서 상처받을 거야.”


[노력해 볼께.]


둘은 지하실로 내려가는 통로를 찾았다.






*


아닐라는 오드를 돌보며 생각에 잠겼다.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으나, 부친과 대적한 건 큰 충격이었다. 게다가 죽이겠다는 각오까지 다졌으니 더더욱.


그 마음에는 아직 변함이 없었다. 부친이 싫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납치를 하고 거침없이 동료를 죽이는 장면에 온갖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부친이란 걸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사과도 없었어.’


성진을 죽인 건 오해에 가까웠다. 아닐라를 먼저 만났다면, 칼부림보단 말다툼을 했을 것이다. 마지막엔 정만이 그녀를 데려가며 끝날 가능성이 높았지만, 이토록 꼬일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정만은 성민을 죽일 걸 실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뿐이랴. 아닐라가 반항하는 걸 보고 피온과 오드를 죽이려 했다.


아닐라가 가장 크게 받아들인 것도 그 장면이었다.


‘아빠는 날 생각하는 게 아니야. 자신을 생각하는 거지.’


시골에서 조용히 살아간다. 그게 꿈일 순 있다. 그러나 그걸 아닐라에게 강요한다면 구속이다. 아무리 좋은 이상(理想)이라도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으면 개인의 욕심이었다.


그녀는 그 부분이 혐오스러웠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자신도 이 파티에 있을 자격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었다.


‘아빠가 글론 씨를 죽였어.’


동료가 죽었다.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았다.


‘내 반지 때문에 죽은 거야.’


그것은 틀린 추측이었다. 저택에 들어온 순간부터 정만의 표적이었다. 반지가 없더라도 성진은 죽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고(思考)는 거기까지 미치지 못 했다. 스스로를 탓하고 싶었다.


‘여기 계속 있어도 되는 걸까?’


상황이 정리되긴 했다. 성진은 되살아났고, 동료는 치료됐다. 정만은 살아서 도망쳤다.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시나리오. 하지만 매듭이 지어지진 않았다.


되살아난 성진은 문제가 있었고, 정만은 다시 돌아올게 분명했다.


‘집으로 돌아갈까?’


무릎을 끌어안는다. 저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온다. 억울함. 무력함. 분노. 죄책감. 여러 가지 감정이 그녀를 짓누른다.


저벅. 저벅.


그때, 성진과 피온이 돌아왔다. 기절한 프롱, 플레나 남매가 담긴 자루와 함께.


“아닐라 씨. 이 두 사람도 좀··· 울었나요?”


“아, 아뇨. 으··· 그게, 괜찮아요! 그보다 두 사람 봐달라 했죠!? 와, 음식을 못 먹었나 많이 말랐···”


눈물을 훔치며 밝게 말하려던 아닐라는 이내 멈칫했다. 음식을 먹지 못해서 마른 금발의 남매. 둘이 이렇게 된 건 그녀의 부친. 정만 때문이다. 납치범이란 추측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나한텐··· 이런 범죄가 나쁘다고 알려줬으면서.’


그녀는 정말 아버지가 부끄러웠다. 동시에 다시 한번, 이 파티에 있어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다행히 몸이 약해진 것 빼곤 정상이에요. 마법 풀어 놨으니까, 일어나면 맑은 수프부터 먹이면 될 거 같아요.”


“좋은 소식이군요.”


일행은 프롱, 플레나 남매를 데리고 여관으로 향했다. 오드까지 데려가야 했기에 성진이 두 명을 옆구리에 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닐라 씨. 괜찮으면 둘이서 이야기 좀 할까요?”


“네?”


그녀는 당황했지만, 이내 수긍하곤 성진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작은 테이블을 앞에 두고 마주 보며 앉은 두 사람. 먼저 입을 연건 성진이었다.


“피온에게 제가 죽었을 때 상황을 들었습니다. ···납치범이 아닐라 씨 아버지라고.”


“···맞아요.”


심장이 덜컥한 아닐라. 입술을 깨물며 각오를 다졌다. 동료에서 빠지라는 말을 들어도 괜찮도록.


그러나 이어진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괜찮나요?”


“···네?”


“아닐라 씨와 아버지의 관계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하지만 가족과 적대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압니다. 생각도 복잡할 거고요.”


차분하게. 책망하는 느낌없이. 오히려 그녀를 걱정한다.


“그럴땐 그냥 다 털어버리는 것도 좋더군요. 들어드리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세요. 아, 그럴게 아니라 저부터 하죠.”


성진은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아닐라 씨의 반지 덕분에 살았습니다. 피온과 오드도 위기를 넘겼죠. 부친과 싸우게 됐지만, 그걸 아닐라 씨와 엮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곤 웃었다.


“당신은 저희 동료니까요.”


“···흑. 으흑···”


그녀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깊숙이 차오르던 덩어리를 토해내듯, 하나씩 말을 꺼냈다.


조금 구속하긴 해도 부친을 좋아했던 것.

그에게 배운 것.

그것을 그가 어긴 것.

배신감.

너무 강했던 구속.

여행의 즐거움.

미안함.

바닥을 뒹굴던 두 개의 팔.

죄책감.

그런데도 같이 있고 싶은 마음.


금이 간 마음의 댐은 한번 터지자 걷잡을 수 없게 됐다. 성진은 가끔 추임새를 넣었을 뿐, 듣기만 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닐라는 끝없이 이야기하다가 저녁 늦게 테이블에 엎어지듯 잠이 들었다.


“좋은 밤 되길.”


달콤한 소리. 달콤한 향기. 그것에 취하며 생각했다.


아, 이 사람이 계속 곁에 있어 줬으면.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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