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파옥(1)
세상은 광대한 무武의 바다, 내 곁엔 아무도 없다
희봉은 황견이 진작부터 자신을 노골적으로 살피는 것도 모르는 체 내버려두고 또 천염이 은밀한 추파를 던져 오는 것도 무시한 채 누각 위에서 사방을 살펴보고 있었다. 거기서는 정원의 구조물이 한 눈에 보였다. 희봉은 여전히 정원에 눈을 고정한 채 황견에게 물었다.
“저쪽 서쪽 방위에 누각 하나를 더 지을 실 건가요? ”
황견이 막 들려던 술잔을 내려 놓고 보니 틀림없이 누각이 들어설 자리이다. 그로서는 자신만이 전각배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어떻게 그걸 아시었소?”
그녀는 빙긋 웃을 뿐 더 말이 없다. 그로서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녀가 입술을 꼭 다물고 있자 더 물어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총명하기 그지없는 여자라는 것을 느끼고 더욱 사랑스런 마음이 일었다.
‘아버지의 계획을 꿰뚫고 있음이 틀림이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설계도를 가지고 있는 나도 전체적으로는 무엇이 어떻게 들어설지 모르겠는데 그녀는 한 번 돌아보는 것으로 누각이 들어설 자리까지 짐작하고 있다.’
황견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냉천염은 어떻게든 희봉과 말을 나누고 싶었다. 자기와 몇 마디를 나눠 보면 자신의 학식이나 재치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황견은 쓸 데 없는 화제로 아까운 시간을 축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그녀와 황견의 대화로 겨우 끼여들 기회를 잡았다.
“아가씨께서는 저 자리에 누각이 들어설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전 여기 공사가 시작되고 수십 번을 다녀갔는데도 이미 들어선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는 그녀가 자기의 칭찬을 듣고 겸양의 말이라도 할 줄 알았다. 물론 황견이 똑같은 뜻으로 그녀에게 물었지만 그는 이미 그녀가 황견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자기가 질문한 말에 대답을 한다면 그녀가 자기에게 호감이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대구조차 없다. 더욱이 황견에게는 웃음이라도 보였지만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차갑기가 얼음 같구나!’
그는 찬물을 뒤집어 쓴 듯 모욕감을 느꼈다. 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한 번 물어 볼 수도 있지만 만약 그랬다가 대답을 듣지 못하면 그 결과는 더 참담하기 때문에 그는 분한 마음을 참고 있었다.
황옥은 두 남자가 경쟁하듯 희봉을 보고 서로 마음을 얻어 보려 하는 것을 알고 마음속에 불쾌한 마음이 가득 찼다. 언제 이런 수모를 겪어 본 적이 있었던가.
‘천염이 날 의식도 않고 있어. 날 신경도 안 쓴다고!’
그녀는 대갓집의 영애(令愛)로 항상 남자들은 그녀의 환심을 얻으려 했었고 그녀는 그런 대접에 익숙해져 있었다.
‘말도 안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그녀의 얼굴에 열기가 확확 치솟고 있었다. 웃으려고 해도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그녀는 자제하려고 애를 쓸수록 얼굴에 노기가 떠올라 스스로 당황했다. 더 있을 자신이 없었다.
“머리가 아파서 전 들어가 쉬어야겠습니다. ”
쥐어짜듯 겨우 그 말만 던지듯 해 놓고 누각을 내려 왔다.
“야 야, 그렇게 가면 어떡해?”
황견이 불러도 소용없었다. 그 틈에 희봉 역시 불러 준 것에 대한 겸사를 하고 곧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가 빠지자 황견과 천염은 일시에 흥미를 잃었다. 천염은 황옥이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지금은 희봉에게 무시당한 것이 분하기만 했다. 다만 황견은 희봉의 뒷 모습을 보며 신비함을 잃지 않는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을 내심 기뻐했다. 이제껏 자신을 이토록 애타게 하는 여인을 보지도 못했고 만날 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로서는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해도 귀엽게만 보일 뿐이었다.
‘어쨌든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진 여기 머무를 테니까······.시간은 많다. ’
일이 이렇게 되자 여흥이고 뭐고 그예 끝이 났다.
“명주에도 주인이 있으며, 미녀에게도 역시 임자가 있다.”
황견이 술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놀고 있네. 두꺼비 같은 자식.’
천염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았으나 비위가 틀려 아무 말 없이 일어났을 뿐이었다. 황견과 천염이 일어서고 곧 연회는 파했다. 일시에 시종이며 무사들이 자신들의 주인들을 따라 분분히 흩어졌는데 장사령 만큼은 제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이거, 가볍게 볼게 아닌데!’
그는 우두커니 서서 남들 모르게 옆구리를 쓸어 내리고 있었다. 범의 허리를 지닌 그가 식은땀까지 배어 나올 정도로 힘겹게 서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 계집이 멧돼지라도 잡겠구나’
시간이 갈수록 둔중해지는 통증으로 봐서 서아의 내력이 상상 이상으로 중한 것을 알았다.
* * *
희봉은 비아와 함께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저기 규각으로 가는 길에 황옥이 보였다. 서아는 몇 걸음 뒤쳐져 있고 황옥이 앞서 걷고 있었다. 희봉이 무슨 생각에선지 황옥에게 가까이 가려할 때 서아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무슨 일이에요?”
그 말에 황옥이 돌아보고는 서아에게 비켜서게 했다. 희봉이 보니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희봉은 짐작 가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부드럽게 물었다.
“제 처소로 가서 차 한 잔 하시겠어요? ”
황옥은 대답을 하지 않고 희봉을 보았다. 희봉의 눈에는 놀리는 기색도 없고 진심이 어려 있었다. 황옥은 본시 품성이 귀한 데가 있는 여자였지만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터라 잠시 감정을 어쩌지 못한 것이었다.
희봉이 진심으로 권하자 황옥도 선선히 순응했다. 황옥으로서도 희봉이란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황옥이 좋다는 뜻을 밝히자 희봉은 비아에게 찻물을 먼저 끓여 두라고 일러서 먼저 처소로 보냈다. 하지만 황옥의 호위 시녀인 서아는 떼어놓을 수 없었다. 객으로서 남의 하녀에게 명령할 처지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또 희봉이 계획하고 있는 일에 서아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서아를 뒤에 딸리고 황옥과 함께 걸었다. 황옥은 희봉이 유난히 고집 센 비아를 능숙하게 다루는 것을 보고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언제 저희 집에 오셨어요?”
“이제 곧 한 달이 다 되어 가요.”
“제 아버님께서 와 있으라고 하던가요?”
“네.”
“저희 아버님하고는 어떻게 아세요?”
“제 아버님하고 친분이 있으세요.”
그야말로 짤막한 대답이었다. 희봉은 자신의 얘기에 대해선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아직 황옥의 성품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세한 얘기를 피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옥은 누구에게라도 자신의 얘길 털어놓고 싶은 나이였다.더욱이 천염이 희봉에게 보인 관심을 생각하면 차라리 희봉에게 솔직히 자기 감정을 고백하고 도움을 청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녀가 막 천염에 대한 화제를 꺼내려고 하는데 희봉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까 아가씨 보자기를 훔쳤다는 그 사람······, 혹시 아는 사람이세요? ”
사해의 스산한 바람이 멈추질 않아
- 작가의말
여인들은 각자의 꿍꿍이를 펼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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