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누가 강호 제일인인가(4)
세상은 광대한 무武의 바다, 내 곁엔 아무도 없다
서아의 변화 무쌍한 연펀이 무사들의 눈앞으로 다가들자 무사들은 우선 급해서 피한다는 게 조천세(朝天勢) 비슷하게 모양으로 검을 치켜세웠는데 연편은 허공에서 변화를 특기로 하는 것.
휘리릭-!
순식간에 방향을 바꿔 무사의 발목을 낚아 채 버렸다. 발목을 채인 놈은 서아가 여자아이라는 것을 알고 반대쪽 발로 연편을 밟고 묶인 제 다리에 힘을 실어 오히려 끌어당기려고 했다. 앞 선 동료와 똑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었다.
“요년 이리 와라! ”
서아는 사내 힘을 못 당하고 질질 끌려가면서도 연편을 끌어당겨 그의 균형을 흐트러뜨리려 했다. 사내는 큰공을 세우게 된 것을 기뻐하여 벌써부터 웃고 있는데 서아는 짐짓 용을 쓰는 체 해 본다.
“이거 안 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목소리까지 힘에 벅찬 것처럼 꾸며서 냈다. 그는 서아가 발악을 하는 것으로 여겨 끙 하고 전 힘을 다해 끌어당기는데 서아가 그 탄력으로 그의 품속으로 날아 들어가며 상대의 면상을 도토리같이 여문 머리로 박아 버렸다.
빡-!
우지직- 하며 사내의 코뼈가 내려앉는 느낌을 뒤로 하고 서아는 지체없이 몸을 뺀다. 경공에 뛰어났던 허맹이 되살아난 듯 쏜살같이 사지를 벗어났다.
“저 년 잡아라, 저년 잡아!”
등뒤로 부상당한 무사의 살기 어린 눈빛이 끈끈하게 늘어붙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담장을 뛰어넘어 달릴 뿐이다.
‘다 틀렸어!’
그녀는 연신 자책의 괴로움에 신음했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이다. 신중하지 못했음을 탓하기엔 너무도 상황이 다급했다.
‘일단 도망치고 보는 거야. 생각은 나중에!’
다급히 몸을 피하는 중에도 사당으로 향하는 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희봉이 가경에게 사당으로 피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을 들은 터. 그녀는 희봉의 지혜를 믿어 보기로 했다.
사당은 깊은 정적만이 감돌았다. 서아는 두려운 마음에도 한 가닥 오기가 치솟아 올랐다.
‘여기서 들키면 황가 귀신들을 다 태워 버리고 나도 죽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뱃속에서 뜨거운 용기가 솟아올라 두려움이 어느 정도 가시는 거 같았다.
‘그 자식이 여기 어딘 가에······ 있을 텐데?’
가경의 모습을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가 무사히 빠져나갔을 것 같지는 않았다. 둔해 보이는 그가 빠져나갔다면 그녀 역시 빠져나갈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곧 그가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이 숨을 만한 곳은 없었다.
‘용케도 잘 숨었네?’
그녀는 가경이 사당으로 피해 온 것을 알았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구석구석을 찾아보았다.
“혹시, 저기?”
역시 제단 밑이 수상했다. 몸을 낮춰 제단 밑을 보았다. 가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할 때 무엇인가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제단 밑바닥엔 먼지가 더께를 이루고 있었는데 어느 한 부분만 쓸린 듯 먼지가 없는 것이었다.
‘저건 사람이 손으로 쓸어 낸 흔적이야!’
그녀는 제단 밑으로 재빨리 몸을 굴려 들어갔다. 막상 눕고 보니 몸을 움직이기 수월할 정도로 공간이 떠 있었다.
“팔쌍도를 다 써 버린 것이 아깝네. 지금 품속에 있다면 무서울 게 없는데.”
그녀는 허전한 품속을 매만지다가 몸을 옆으로 뉘었다. 사당의 출입문 쪽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엇!”
서아의 몸이 한쪽으로 쏠린 그때 바닥이 기우뚱 기울며 그녀는 깊이를 모를 나락으로 떨어져 갔다. 하지만 서아는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바짝 긴장하고 있었던 데다가 무예를 닦은 몸이라 떨어지면서도 몸을 고양이처럼 좌우로 비틀어 체중을 분산시키며 떨어져 내렸다.
‘여긴 또 어디야?’
사당 지하 바닥에 떨어져 내린 서아는 잠시 멈추어 서서 어둠이 눈에 익기를 기다린 후에 손으로 사방을 더듬어 보니 벽이 느껴졌다. 손톱으로 긁어 보니 뭔가가 부스스- 부서져 내린다. 부서져 내린 것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기 위해 입으로 가져갔다.
‘흙이네?“
시야가 막힌 것이 답답했지만 품에는 부싯돌조차 없어서 서아는 그야말로 봉사나 다름이 없었다.
‘통로가 있을지 몰라.’
되도록 침착해지려고 애쓰며 그녀는 천천히 앞쪽으로 나가며 손을 집는데 문득 한쪽 벽면이 허전한 것이 느껴진다. 서아는 여전히 손끝의 감각에 의존해 걸어나갔다.
‘어두워.’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어느 한순간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흙벽 저 너머로 은은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
‘됐어!’
서아는 걸음을 빨리 했다. 다가갈수록 사람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촉각을 곤두세웠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신형을 날려 가보니 생각대로 가경이었다. 그는 복도 중간쯤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 벽면에 대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 듯했다.
‘저놈이 미쳤나?’
하지만 아니었다. 서아가 가만히 보니 그의 앞엔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있었고 가경은 거기에 귀를 대고 한동안 듣다가 다시 자신의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뭐라고 떠드는 중이었다.
“너, 지금 뭐하고 있어?”
가경은 느닷없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가 이내 서아를 알아보는 눈치였다.
“아가씨, 이리와 보세요.”
서아는 그의 곁에 가까이 간다는 것이 내키지 않아 망설이고 있는데 가경이 말했다.
“여기 사람이 있어요. 아픈 거 같은데······,”
황진후의 집 안팎 사정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그녀였지만 사당 밑에 사람을 가두어 놓을 수 있는 시설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누가? 비켜 봐!”
서아는 가경을 떠밀고 문에 귀를 대본다. 과연 사람의 신음 소리 같은 것이 들려 오고 있었다.
“거기 누구 있어요?”
문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걸려 있는데 잘라 내지 않고는 열 수 있을 거 같지 않았다. 자운은 문을 두들겨 본다.
톡-톡-톡!
둔중한 두께가 느껴졌다. 서아는 제 힘으로는 열 수 없음을 알고 가경에게 말했다.
“여기 말고 나가는 데는 없어?”
가경은 힘없이 고개를 젓는다.
“여기가 끝인 거 같아요.”
서아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사당에서 떨어져 내릴 때의 감각으론 날개 달린 새가 아닌 이상 다시 올라가긴 불가능할 거 같았다.
“내가 어쩌다가······!”
그녀가 성정이 악독한 것은 아니지만 양리를 암습하느라 정신을 극심하게 소모한 데다가 쫓기게 된 이유가 가경에게 있다고 생각하니 그를 볼수록 화가 치밀었다.
“아악!”
가경은 부지불식간에 비명을 내질렀다. 어깨뼈가 바스러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던 것이다. 서아는 아직도 분이 안 풀린 듯 가경을 노려보며 이까지 바득바득 갈아댄다.
“왜, 왜 때려요?”
두려움을 느낀 가경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서아는 화를 못 참겠다는 듯 그의 부상한 어깨를 걷어 차 버렸다.
“악!”
가경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천한 소축으로 위장해 황진후 집에 잠입한 이래 하녀로만 삼 년째였다. 천하게 태어나지 않은 그녀가 시녀 생활을 하려니 눈물을 흘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내가 어떻게,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아?”
모진 수모를 견디는 것은 오로지 부친의 원수를 찾아낼 기회를 잡기 위해서였는데 난데없는 비렁뱅이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사실 그 모든 것이 가경 탓일 리는 없었으나 그녀의 분노는 만만한 가경을 향했다.
‘아예 죽여 버릴 거야!’
가경을 노려보는 서아의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가경은 겁을 집어먹고 필사적으로 기어서 도망쳤다. 하지만 어디를 가든 벽이다.
“때리지 말아요.”
가경은 통증으로 말조차 이을 수가 없었다. 그저 겁먹은 눈으로 애원하듯 그녀를 쳐다볼 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냉랭했다.
“싫은데. 난 널 때려야겠어. 내 분이 풀릴 때까지 맞아 줘야겠다고!”
서아는 욕설을 퍼부으면서 발을 높게 들었다. 그의 옆구리를 차서 뼈를 부러뜨릴 생각이었지만 가경이 먼저 그녀의 발을 움켜잡았다.
“이거 안 놔!”
서아는 즉시 몸을 날려 다른 쪽 발로 그의 옆구리를 찍어 찼다.
“으헉!”
둔중한 충격에 가경은 숨조차 쉴 수 없었지만 발을 놓치는 순간이 곧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더러운 손 치워!”
서아는 넘어지면서도 잡힌 발을 회전축으로 삼아 다른 발로 가경 정수리를 향해 찍어 내리려 했다. 조금 전 양리에게서 본 것을 그대로 응용해 본 영문삼퇴중 부작목(斧斫木)하는 수다. 도끼로 나무를 찍어 벤다는 수니 맞았다면 멀쩡하기가 힘든 수다.
우두둑-!
하지만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진 것은 정작 서아 쪽이었다. 서아는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공격을 포기하고 말았다.
“너?······ 너!”
가경이 손에 들어온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을 힘껏 꺾어 버린 것이다.
“미안해요.”
비록 그가 무예는 모르지만 늘 불편한 다리 대신 손을 많이 썼기 때문에 단순한 용력만은 놀라운 데가 있었다. 그 힘으로 그녀의 조그만 발을 우악스럽게 비틀었으니 가느다란 발목이 온전할 리 없다.
“아파!”
서아의 비명이 지하의 텅 빈 공간에 울렸다.
사해의 스산한 바람이 멈추질 않아
- 작가의말
나락으로 떨어진 가경과 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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