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새롭게 부는 바람(1)
세상은 광대한 무武의 바다, 내 곁엔 아무도 없다
“이제 야명주를 사 주겠다는 작자가 나섰으니 아가씨는 곧 부자가 되는 겝니다.”
이패는 가아의 눈치를 보며 연신 아부하기 바빴다.
“그래?”
가아(佳兒)는 흡족하게 대답하고는 연신 술을 들이켰다. 자신 때문에 여러 사람의 운명이 뒤틀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아는 기분 좋게 취해 갔다. 그녀의 오라비들은 이미 객점의 이 층으로 올라가 잠을 자고 있었다. 이패는 진작부터 자고 싶었지만, 가아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재미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조 계집애 때문에 못 떠나겠단 말이야.’
이패가 가아에게 반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들 삼 남매의 솜씨에 매료됐다는 게 옳았다. 혼자 강호를 떠돌기엔 이패는 여러모로 부족했다. 그러던 차에 가아 삼 남매와의 인연은 그에겐 행운이라 할 만했다.
가아 패거리의 솜씨도 무서워서 신변의 안전도 그만이었지만 무엇보다 이들 패거리엔 격식도 없었다. 그게 이패의 배짱에도 맞았고 더욱이 가아의 고운 용모는 이패에겐 청량한 기운을 돌게 해서 강호에 나온 이후 가장 봄날 같은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거기다 가아는 술을 즐겨 해서 오늘처럼 취하는 날이 많았다.
“자, 자 한잔 더 드세요.”
이패는 가아가 술을 과하게 먹는다 싶자 무슨 좋은 수가 나지 않나 싶어 옆에서 술을 쳐주며 온갖 아양을 떨어 댔다.
“그럼 야명주를 팔면 얼마나 받게 될까?”
“글쎄요 모르긴 해도 부자가 될 겁니다.”
“부자?”
“네 부자. 큰 집을 사고 정원을 꾸미고. 보자······, 가동은 한 열 명만 두어도 평생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 수 있을 겁니다.”
“이게 그렇게나 값이 나가?”
“그럼요. 부르는 게 값입니다.”
“은 오십 관은 나갈까?”
“더 받을 수 있습니다.”
이미 백 번도 더 되풀이한 문답이었지만 가아는 싫증을 내지도 않았다. 흡족해진 가아는 계속 술을 들이켰다. 마셔도 취하는 줄을 몰랐다. 온전하지 못한 두 오빠 때문에 노심초사하다가 뜻하지 않게 진귀한 보배를 얻어 신세가 펴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구름 위를 걷는 듯하였다.
“기분 좋다.”
그녀가 처분하려는 야명주는 비아에게서 뺏은 것이다. 벌써 수차례 매매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가격 때문에 틀어졌었다. 또 그간 벌어놓은 것이 있어서 밑지고는 팔 수 없다는 생각에 시일을 끌었었다. 하지만 이제는 수중에 돈도 떨어지고 해서 마지막 수단으로 야명주를 팔려고 한 것이다. 가아는 거기까지 생각하니 문득 희봉이 떠올랐다.
“그 여자 어떻게 됐을까?”
“누구 말입니까?”
“희봉 말이야.”
“아! 죽었겠지요. 제 원앙월을 머리에 맞았으니, 살기 힘들 겁니다. 아까운 여자였죠.”
이패는 아무 뜻 없이 말했지만 그게 실수였다. 느닷없이 가슴팍이 뜨끔해서 보니 은침이 박혀 있었다. 은침은 가늘게 꼬리를 흔들며 완전히 이패의 가슴팍을 뚫고 그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아를 쳐다봤다. 가아가 싸늘하게 응수했다.
“넌, 이제 두 개만 더 박히면 넌 죽을 거야. ”
“아가씨······?”
“이제 하나를 깊이 박아 놨으니 평생 못 빼내. 죽고 싶으면 함부로 입을 놀려 봐, 어디!”
이패는 식은땀이 흘렀다. 가아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잠시 방심하는 사이에 목숨의 삼분의 일이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가아가 유독 음란한 말과 행동을 끔찍이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을 놀린 게 실수였다.
딸랑!
그때 객점 입구에 매달아 놓은 풍경이 울리며 안으로 손님 둘이 들어왔다. 둘 다 남자였는데 한 사람은 체구가 가녀린 편이고 한 사람은 어깨가 유난히 널찍했다. 둘 다 죽립을 쓰고 있어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오! 죽립?”
가아는 원래 죽립을 좋아했다. 대개 사람 꼴 아닌 것들이 사람들이 죽립 아니면 복면이었다. 가아 삼 남매가 주로 하는 것이 목에 돈 걸려 있는 놈들이었으니 가아는 제 버릇대로 죽립을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었다.
둘 다 죽립을 객점 안에서도 벗지 않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구린 데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판단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죽립을 벗겨 보고 싶었지만, 어깨가 넓은 남자의 기도가 범상치 않아 기회를 보고 있었다. 둘은 간단한 요깃거리만을 주문했을 뿐 술을 시키지 않았다.
“너 가서 저 죽립을 벗겨 봐!”
가아의 명이 떨어지자 이패가 놀라 말했다.
“제가요?”
“그래 너!”
이패는 죽립을 쓴 사람들을 보았다. 가녀린 쪽은 간단히 날려 버릴 자신이 있었지만, 어깨가 벌어진 쪽은 왠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가아가 품속에 손을 넣는 것을 보고는 더는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삼 분의 일의 목숨은 버린 셈이었다. 은침에 맞아 죽으나 죽립을 벗기다 죽으나 매한가지였다.
‘젠장 천하의 이패가 신세가 이게 뭐람!’
이패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일어설 수박에 없었다. 그가 일어서는 것을 보고 가아는 은침을 한 움큼 쥐었다. 여차하면 뿌릴 기세였다. 이패가 소변을 보러 가는 척하다가 죽립에 손을 뻗쳤다.
“어이쿠!”
죽립에 닿기도 전에 이패는 팔이 떨어지는 것 같은 통증에 바닥을 뒹굴었다. 동시에 가아의 은침이 비 오듯 날았다. 어깨가 넓은 남자는 죽립을 벗어 은침을 모조리 받아 냈다. 강직한 턱과 불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호목(虎目)의 사내는 곡신의 청년 고수 마등이었다.
“너 이리와. ”
그는 가아에게 손가락 세워 까닥까닥 해 보였다. 가아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다가 흥미를 잃었다. 현상범이 아니었다.
“쳇 아니잖아.”
상대는 고수다. 그녀가 날린 은침을 받아 내는 솜씨며 한눈에 어느 쪽에서 누가 날린 것인지 파악하는 모습에서 그의 녹록지 않은 무예를 알았다. 고수인 데다가 현상범도 아니다. 가아는 이내 흥미를 잃고 술잔을 다시 채우고는 한 손을 휘저어 보였다.
“됐어. 그냥 먹기나 해.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뭐가 어째? 당장 이리와 너!”
마등의 결기 어린 목소리에도 가아는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곤한 듯 하품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마등은 가아의 자리로 가서 마주 앉았다. 칠척장신의 당당한 사내가 당장이라도 가아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지만 가아는 태평하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왜 그래? 안 다쳤으면 된 거 아니야.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그러니까 누가 죽립을 쓰고 다니래?”
마등은 어이가 없었다. 강호가 사나운 곳이라는 것은 듣고 있었지만 이렇듯 맹랑한 여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해 봤다.
“그렇다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살수를 쓴다는 말이냐! 버릇이라고는 없는 너는 내게 혼 좀 나야겠다.”
가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날 혼내겠다고 어떻게? 한번 해 봐!”
마등은 가아가 바짝 얼굴을 내밀자 당혹스러웠다. 까만 눈동자 두 개가 이상하게 빛이 났다. 흑단 같은 머리에서도 특이한 향기가 진동했다. 동행하는 상문은 특별한 향수를 쓰지 않는데 가아의 향기는 어찔할 정도로 강했다.
“이 미친 것이···.”
흉악한 수법과는 달리 흑의 여인은 가까운 데서 보니 연약해 보이는 외모였기 때문에 마등은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저 따끔하게 경고나 해주려는데 가아가 수를 쓴 것은 그때였다.
쓕!
그녀는 신속하게 마등의 눈을 찔러 왔다. 전형적인 응조수(鷹爪手)로 연타가 특징인 수법이었다. 마등은 앉은 채로 상체만 뒤로 밀어 눈으로 찔러 오는 손가락을 피했지만, 가아의 손은 기이하게 방향을 틀어 매의 발톱처럼 마등의 완맥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완맥이든 견정혈이든 일단 잡히게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되고 아예 분근착골(分筋錯骨)까지 당할 위험이 있었다.
“망할 년!”
마등은 여인이라 가볍게 보려는 마음은 이미 없었다. 신속하게 탁자를 손으로 밀고 그 여세를 몰아 발로 강하게 탁자를 차 가아와의 거리를 더욱 벌렸다. 뻗쳐 오는 신속함을 피할 길이 없어 강하게 틈을 벌려 버린 것이었다.
“어머!”
가아는 거센 기세에 놀라 일어서려고 했지만, 탁자에 실려 온 마등의 기세는 실로 엄청났다. 가아는 탁자에 밀려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빠져나올 새도 없이 마등이 탁자의 반대쪽을 발로 밀고 있었다. 가아는 꼼짝 구석에 갇혀 버린 신세였다.
‘제법이네!’
가아의 놀라움은 컸다. 지척의 거리에서 경고도 없이 예비 동작도 없이 단숨에 제압하려고 한 것인데 공격은 실패했고 상대는 순간의 임기응변으로 자신을 구석에 밀어 넣기까지 했다. 허리를 뒤로 젖혀 가아의 공격을 피하는 것과 손으로 탁자를 밀어낸 것이 동시였다. 이런 동시 공방(攻防)은 가아로서도 혀를 내두를만한 반응이었다.
‘괜히 건드렸나?’
하지만 후회는 이미 늦었다. 마등은 발로 집은 탁자를 가아 쪽으로 거세게 밀어 대고 있었다. 가아는 다리가 끼어 꼼짝도 하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아파!”
“너 감히!”
마등은 분해 목소리가 다 떨렸다. 이토록 무례하고 악랄한 공격은 처음이었다.
“사내가 뭘 그걸 가지고 그래? 피했으면 됐지. 그만해. 아프다니까!”
가아는 오히려 짜증스레 말했다. 마등은 이런 여인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 번이나 목숨을 빼앗으려고 해 놓고는 천연덕스럽게 아프다고 통증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사정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마등이 여인을 희롱하고 있는 줄로 알 것이었다.
“넌 더 맞아야겠다!”
마등은 더는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다리를 부러뜨리고는 관가에 처박을 생각이 들었다.
“너 같은 건 강호에 풀어놓아 봐야, 여러 사람에게 좋을 게 없다! 오늘 내 손으로 다리를 분질러 주마!”
마등이 막 힘을 가하려는데 마등 뒤에 서 있던 가냘픈 남자가 가로막았다.
“등 오빠. 그녀를 놔줘요. ”
뜻밖에도 체구가 가냘픈 쪽은 여자 음성이 흘러나왔다. 복식은 남자였건만.
“상문. 이 여잔 성미가 고약해. ”
상문은 곡신의 제자들과 함께 길을 떠났지만, 지금은 마등과 함께 요기하러 나온 것이었다.
“아뇨. 등 오빠 놔주어야겠어요.”
마등은 상문의 말이 이상한 듯 고개를 돌려보다가 이제야 사태가 험악해진 것을 깨달았다. 객점 중앙엔 어느새 내려온 흑의인 둘이 서 있는데 그 기세가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얼굴까지 다 검게 싸맨 흑의 인들이었지만 눈만은 살벌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뭘 노려보는 것이오? 이 여자가 당신 일행이요?”
흑의 인들은 말이 없었다. 오히려 살기를 뿜은 안광이 짙어졌을 뿐이었다.
“흥! 당신들은 말도 못 하는 사람들이오?”
흑의 인들이 검을 뽑는 것을 보고 상문은 다급하게 말했다.
“등 오빠 제발! 이런 식이면 다시 낙양으로 돌아가세요!”
흑의 인들의 기세가 날카롭다고는 하나 마등이 그런 것에 겁을 먹을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상문의 신신당부가 있었던 후라 마등은 가아를 한 번 노려본 후에 탁자에서 발을 뗐다.
가아는 벌써 탁자를 발로 차 버리고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등은 가아가 검을 다시 검집에 꽂는 것을 보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저년이 언제 검을 뽑았었지. 무턱대고 달려들었다면 위험할 뻔했다.’
가아는 이미 검을 뽑아 든 채 탁자로 교묘하게 가리고까지 있었다. 말로는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면서 마등의 안목을 완전히 흐려 놓기까지 했었다.
“오빠 올라가요. 별거 아니에요.”
가아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의자에 앉아 술을 들이켤 뿐이었다. 이패는 그녀가 배짱이 센 것인지 미친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상대방이 살기를 띠고 노려봐도 그녀는 까닥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아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마등 같은 눈빛을 한 남자는 절대로 자신을 해치지 못한다는 것을. 그와 같은 귀공자를 만나면 그녀는 이렇게 한껏 장난을 치고 싶은 것이었다.
“점잖은 체하는 것들은 병신이라고 보면 돼.”
그런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마등은 강호 경험이 적고 강직한 사람이어서 그녀 같은 여자가 있다는 얘긴 꿈결에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상문은 가아 자리를 지나쳐 자신의 자리로 가려는데 가아가 상문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넌 누군데 얼굴을 가리고 다녀? ”
그 말과 동시에 가아의 손이 슬쩍 움직이는 듯했는데 어느새 상문의 죽립은 가아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어!”
이패와 가아가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둘의 감탄은 성격이 조금 달랐다. 이패는 강호에 출사한 이후 이렇게 많은 미인을 연달아서 보기도 처음이었다. 희봉과 가아의 미모도 뛰어났지만, 상문의 미모도 이들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푸른 눈에 흑단처럼 까만 머릿결은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가아가 놀란 이유는 곧 밝혀졌다.
“너 왜 눈깔이 파랗지?”
“이, 이!”
마등이 못 참고 손을 내뻗었다. 가아는 자연스럽게 몸을 뒤집으며 권자를 훌쩍 벗어났다.
“왜 이래, 얼굴 좀 본 거 가지고.”
그때 느닷없이 상문이 손뼉을 가볍게 쳤다.
“정말 빠르네요! 혹시 그건 은현보(隱現步) 아닌가요?”
가아는 일 초만을 보인 것인데 이들이 정확하게 수법을 알아맞히자 은근히 두려움이 일었다.
“너 누구야!”
사해의 스산한 바람이 멈추질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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