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뚜기 영혼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체프라
작품등록일 :
2019.04.01 20:07
최근연재일 :
2019.05.04 14:53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5,902
추천수 :
18
글자수 :
168,894

작성
19.04.06 20:23
조회
150
추천
0
글자
11쪽

3화. 어린 양의 피(2)

DUMMY

다음 날.


어제 일로 출근도 못하고 원룸에서 은둔 아닌 은둔 생활을 하던 재하에게 연락이 왔다. 동주였다. 태주 그룹 전무실에 와 있다며, 재하더러 빨리 전무실로 오라는 것이었다.


처음엔 정말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동주를 알았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을 잠깐 가졌던 재하는 제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제가 한 짓을 떠올려 보니 금세 답이 나왔던 것이다.


이미 동주가 불려간 마당에 재하 혼자 피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 듯싶었다. 하지만 선뜻 나서기도 두려웠다. 한참을 갈등하던 재하는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일단 부딪혀 보고, 상황을 봐 가면서 대처하자는 심산으로 재하는 태주로 향했다.



똑 똑.


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김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재하를 잘 모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재하가 신분을 밝히자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그를 집무실로 안내했다.


김 비서가 안내해 준 집무실에 들어서자 상석에 앉아있던 강 전무가 신기한 눈빛으로 재하를 빤히 쳐다봤다. 재하는 잔뜩 굳은 얼굴로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고개를 살포시 들자 재하 오른쪽으로 다리를 꼰 채 차갑게 저를 노려보고 있는 소영이 눈에 들어왔다. 재하 왼쪽에는 이미 와 앉아있던 동주와 은비가 구원의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 하재하 씨? 반가워요. 어서 와 앉아요.”

강 전무가 반갑게 손짓하며 말했다.


은비까지 부른 걸 보면 강 전무는 이미 다 아는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되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지 않은가. 재하는 난감했다.


저 혼자 문제라면 막무가내로 어떻게 해 보겠는데, 친구까지 걸려있는 일이다 보니 함부로 대처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와 죄책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강 전무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문을 열었다.

“다들, 서로 잘 아시죠? 여기 윤동주 씨, 배은비 대리, 그리고 하재하 씨. 그렇죠?”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인 세 사람은 서로 쳐다보며 어색한 눈인사를 나누었다. 손만 뻗으면 충분히 닿을 수도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소영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궁금한 게 너무 많아서 그러는데. 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그래, 우선 이거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군.”

강 전무가 종이 한 장을 들고 흔들며 재하를 기분 나쁘게 쳐다봤다.


“이게 뭔지, 설마 모른다고 하진 않겠죠? 하, 재하 씨!”

“.......”

“정말, 몰라요? 알죠?”


강 전무가 내려놓은 종이는 동주의 이력서였다. 얼굴에 핏기가 가신 재하는 더는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강 전무는 기다렸다는 듯이 재하를 매섭게 노려보며 몰아붙였다.


“여기 윤동주 씨가 당신한테 보낸 이력서 말이야. 이게 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걸까? 잘 아는 당신이 설명 좀 해줘야겠는데. 응?”


동주와 은비가 동시에 재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재하는 그들의 시선이 아프게 와닿았다.


“아, 그리고 재하 씨를 내가 추천했다고 들었는데. 우리, 아는 사이였던가? 그렇게 꿀 먹은 사람처럼 가만히 있지만 말고, 말 좀 하지?”

“그, 그게.”

“그게 뭐? 또 배 대리, 차 지점장 일은 어떻게 된 거고. 내가 모르는 일이 왜 이렇게 많냐고, 응? 내가 치매야? 아님, 미친 거야? 당신이 알 거 아냐. 말 좀 해 보라고, 응?”

강 전무가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재하는 속이 탔다. 모든 시선이 재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입안의 살을 씹으며 재하는 갈등했다. 솔직하게 말해야 할지, 아니면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끝까지 시치미를 떼는 것이 나을지 선뜻 판단이 서지가 않았다.


“당신한테 지금 내가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는 거야. 모르겠어? 솔직하게만 말해 준다면, 머 그냥 없었던 일로 해 줄게요. 딱히 우리가 큰 피해를 본 것도 아니고. 배 대리나 재하 씨 자리야 그냥 두든, 나중에 빼든 상관없는 거고.”


강 전무의 말이 끝나자마자 은비가 재하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무언의 압박이었다. 재하는 피하듯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불안한 얼굴로 재하 눈치를 살피던 강 전무가 그윽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혹시 압니까. 서로 힘이 되어 줄 수도 있는 거고. 이런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안 그렇습니까?”

“저, 마실 것 좀.”

입술을 혀로 쓸어내린 재하가 힘겹게 말했다.



김 비서가 가져다준 물을 마신 재하는 한숨을 삼켰다. 겁에 질린 눈빛으로 주변을 잠시 둘러본 재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뗐다.


“사실대로 말하면,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아, 물론이죠. 용서가 다 뭡니까. 다른 것까지 해 드리지요. 그런 걱정 말고, 어서 말씀해보세요.”

강 전무의 입꼬리가 야비하게 올라갔다. 그러자 곁에 있던 소영이 여유롭게 비웃었다.



재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작심한 듯 그간의 일을 털어놓았다. 군대에서 이상한 노인네를 만났던 일부터 시작했다. 그들이 준 알 수 없는 액체를 마셨는데, 그러다 그냥 우연찮게 식당에서 마주친 강 전무의 육신에 자신의 혼이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 몸에도 옮겨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실망스럽게 말했다. 더구나 혼이 빠져나간 몸은 마치 송장처럼 쓰러지기 때문에, 함부로 남의 몸에 혼을 옮기려는 시도를 하기가 겁난다고 투덜댔다.


하여튼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혼이 강 전무에게만 옮겨간다고 했다. 기왕 그렇게 된 김에 자신을 태주에 취직시키게 되었다고 사과했다. 옮겨간 혼은 강 전무 몸에서 한나절 밖에 머물지 못한다고 안심시켰다. 동주가 그 식당에서 직접 목격했었다며, 증인이라고 덧붙였다.


듣고 있던 그들 모두 소리 없이 탄식했다. 모두 믿기지 않는 듯한 눈빛으로 입을 멍하니 벌린 채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 틈에 소영이 몸을 부르르 떨며 손가락으로 재하를 가리키고 물었다.


“그..그럼, 차 지점장을 여기 부른 그날도?”

“....예.”


짝!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소영이 벌떡 일어나더니 재하의 뺨을 갈기는 것이 아닌가. 강 전무가 놀라 그녀를 제지하고 나섰다.


“아니 당신, 갑자기 왜 이래? 때릴 거까진 없잖아!”

“그, 그게 아니라.”

소영은 얼굴이 발그레 지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근데, 왜 하필 나일까? 나와 일면식도 없는데.”

강 전무가 예리하게 물었지만 재하는 명쾌한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단순히 추측하건대, 강 전무는 재하가 오래전부터 자신이 간절히 되고 싶었던 워너비였다고 했다. 절실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그래서 아마 혼이 옮겨간 걸 거라고 재하는 자신 없게 덧붙였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그런 엄청난 초능력 같은 것이 아니고, 그저 강 전무 몸에만 옮겨가는 능력밖에 없다며 재하가 겸연쩍게 웃었다.


하지만 강 전무의 생각은 달랐다. 말은 안 했지만 소영도 아마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유독 강 전무에만 제 혼을 옮겨 갈 수 있다는 재하 말을 온전히 믿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도 옮겨 갈 수 있는 방법을 아직은 모르든지, 아니면 숨기고 있든지 둘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재하가 분명 어딘가에 쓸모가 있을 거라 판단했다.


한동안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 누구도 선뜻 나서려 하지 않고 남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소영은 재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 소영이 눈길을 제게 돌리자 강 전무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당분간, 외부에 발설하지 말고 우리만 아는 걸로. 아셨죠? 하긴 머,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고 믿을 리도 없겠지만. 하여튼 우리만 아는 걸로 합시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 주었으니까, 보답을 해야 마땅하겠지요? 그래서 말인데, 친구분과 마찬가지로 윤동주 씨도 저희 회사에 입사시켜 드리죠. 저한테 뭐 따로 할 말이라도?”


세 사람은 서로 눈치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강 전무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끝냅시다. 나가서 일들 보세요.”


교무실로 불려와 선생님께 한참 혼나고 돌아가는 학생 모습처럼 세 사람은 머쓱하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집무실 문 앞 가까이에 다다랐을 즈음 그들 등 뒤에서 강 전무가 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참, 재하 씨!”

“네?”

“고의든 우연이든, 두 번 다신 내 몸으로 들어오지 마요. 아셨죠?”

“아, 예. 알겠습니다.”

“가 봐요.”

강 전무가 매섭게 노려보며 말하고는 휙 돌아섰다.



세 사람은 잠시 입을 꼭 다문 채 복도에서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길 기다렸다. 숫자가 바뀌며 엘리베이터는 19층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시선을 앞에 두고 걷던 동주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말했으면? 아마 미친놈이라고 욕이나 해 댔겠지.”

“머, 하긴. 후후후. 그나저나 이거 미안해서 어떡하냐. 괜히 나 때문에 들킨 것 같은데.”

“아냐. 언젠가는 들통날 일이었어. 차라리 잘됐지, 머. 이젠 마음 편하게 회사 다녀도 되잖아.”

재하가 싱긋 웃었다.


곁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은비의 미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강 전무가 재하의 든든한 조력자인 걸로 내심 기대했었는데, 아닌 것에 못내 실망스러웠던 것이다. 게다가 차 지점장과의 관계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니, 은비는 발가벗은 것처럼 창피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 그녀에 재하가 힘겹게 입을 뗐다.


“미안.”

“뭐가?”

“응? 아, 그..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나한테 미안해할 거 없어. 어차피 난 상관없는 일이니까.”


은비가 표정 변화 없이 차갑게 말했다. 그러자 재하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내가 미쳤지. 저런 걸... 누구 때문에 정직이 됐는데. 체!’

재하는 분한 눈으로 은비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갔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고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수직 하강했다. 재하의 기분이 그랬다.


그들이 사라진 태주 그룹 본사 19층 복도에 정적만이 감돌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메뚜기 영혼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1 8화. 고독한 해결사(2)-완결 19.05.04 123 1 13쪽
30 8화. 고독한 해결사(1) 19.05.01 115 0 9쪽
29 7화. 근본 없는(4) 19.04.29 112 1 12쪽
28 7화. 근본 없는(3) 19.04.27 120 1 10쪽
27 7화. 근본 없는(2) 19.04.26 193 1 11쪽
26 7화. 근본 없는(1) 19.04.25 123 0 12쪽
25 6화. 가진 자의 품격(4) 19.04.23 136 0 13쪽
24 6화. 가진 자의 품격(3) 19.04.21 155 2 11쪽
23 6화. 가진 자의 품격(2) 19.04.20 136 1 15쪽
22 6화. 가진 자의 품격(1) 19.04.19 152 0 13쪽
21 5화. 어쩌면(4) 19.04.17 148 0 15쪽
20 5화. 어쩌면(3) 19.04.16 180 0 13쪽
19 5화. 어쩌면(2) 19.04.15 208 1 11쪽
18 5화. 어쩌면(1) 19.04.13 199 0 11쪽
17 4화. 나쁜 생각(4) 19.04.12 169 0 12쪽
16 4화. 나쁜 생각(3) 19.04.11 166 0 13쪽
15 4화. 나쁜 생각(2) 19.04.10 169 0 14쪽
14 4화. 나쁜 생각(1) 19.04.09 191 0 14쪽
13 3화. 어린 양의 피(4) 19.04.08 225 1 15쪽
12 3화. 어린 양의 피(3) 19.04.07 212 1 10쪽
» 3화. 어린 양의 피(2) 19.04.06 151 0 11쪽
10 3화. 어린 양의 피(1) 19.04.06 184 0 15쪽
9 2화. 딴생각(4) 19.04.05 167 1 12쪽
8 2화. 딴생각(3) 19.04.05 191 0 11쪽
7 2화. 딴생각(2) 19.04.04 188 1 12쪽
6 2화. 딴생각(1) 19.04.04 223 0 10쪽
5 1화. 이상한 노인네(5) 19.04.03 229 1 15쪽
4 1화. 이상한 노인네(4) 19.04.03 261 1 9쪽
3 1화. 이상한 노인네(3) 19.04.02 318 1 13쪽
2 1화. 이상한 노인네(2) 19.04.02 290 2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