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뚜기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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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프라
작품등록일 :
2019.04.01 20:07
최근연재일 :
2019.05.04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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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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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21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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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가진 자의 품격(3)

DUMMY

제 몸으로 돌아온 재하는 굳은 표정으로 주방으로 걸어갔다. 거친 발걸음 소리를 내며 제 기분을 드러냈다. 냉장고 문을 신경질적으로 닫은 그가 소주병을 입에 물고는 냅다 들이켰다.


잠시 그를 멀뚱히 지켜보던 소영이 입꼬리를 한껏 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생했어요.”

“흥. 고생? 사람이 죽었는데, 고생이라. 그것참. 마음 편해서 좋네.”

“왜, 옛 애인 때문에 그래요?”

“뭐요?”

“안 그럼, 새삼스럽게 왜 그래요? 룸살롱에서는 잘만 죽이 더마. 한두 명도 아니고.”

“........”


재하는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니지 않은가. 어울리지 않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처럼 구는 것에 차 회장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그런 값싼 동정심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에요.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자중하시고, 아셨죠?”

“...네.”


차 회장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재하 등을 쓸어주었다. 그러자 재하는 한순간에 순한 양으로 변해버렸다.



다음 날.


어젯밤 운전자의 난폭운전으로 교통사고가 발생하였다는 뉴스가 전파를 탔다. CCTV에 찍힌 사고 차량은 차선을 넘나들며 과속으로 추월하다가 주차된 트레일러에 충돌하려는 순간에 멈췄다. 누가 봐도 운전자의 과실이었다.


운전자와 동승자가 현장에서 사망했다는 안타까운 소식과 난폭운전의 위험성에 대해 대중에게 경각심을 주는 멘트로 뉴스는 마무리되었다. 어느 누구도 그 희생자가 누구인지는 관심조차 가지려 하지 않았다.



어느덧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끝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그날은 연말 기업인 송년 만찬회가 있는 날이었다. 재하는 김 비서와 함께 차 회장을 보필하여 송년 만찬회가 열리는 시내 호텔로 향했다.


강 회장을 전무 시절부터 보필했던 김 비서가 차 회장의 사람이라는 것을 재하는 뒤늦게 알았다. 그래서 강 회장 주변의 일들을 차 회장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재하의 혼이 강 회장의 몸에 옮겨간 것도 김 비서가 차 회장에게 귀띔해준 것이 분명했다. 저수지에서 죽을 뻔했던 저를 살려준 것도 어쩌면 김 비서가 알려줬을지도 모른다고 재하는 추측했다.


알게 모르게 일련의 사태와 관련해서 그 배후에 김 비서가 있었을 거라고 재하는 생각했다. 하여튼 김 비서는 그림자처럼 차 회장이 가는 곳마다 항상 따라다녔다. 재하는 그런 그녀에 언제부터인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동갑내기이기도 했기에 친근감이 더했다.



차 회장이 연회장으로 들어가고, 연회장 입구 근처에서 김 비서와 재하가 나란히 선 채 잠시 대기하고 있었다. 복층 구조로 된 연회장 안을 둘러보던 재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윤주 씨는 이런 데 자주 와 봤어요?”

“아뇨. 한, 두 번?”

김 비서가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며 답했다.


“역시, 있는 사람들 모임이라 스케일이 커긴 크네요.”

“좀, 그렇긴 하죠?”

김 비서가 쑥스럽게 웃다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말을 이어갔다.


“참! 이사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못 드렸는데.”

“무..슨.”

“제 동생요. 저희 계열사 협력업체에 취직했다고 하던데.”

“아..”

“알아보니까, 이사님이 그 사장님한테 부탁하셨다고.”

“아, 그 머... 그냥 자리 있나 한번 알아본 거뿐인데. 하하하.”

재하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고마워요. 졸업 앞두고 마땅히 갈 데가 없어서, 저도 동생도 걱정 많이 했는데.”

“아니에요. 거기 사장님이 고마우신 거지. 나야 뭐.”

“이사님이 물량 많이 주셨다고, 사장님이 오히려 고맙다고 하시던데요.”

김 비서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재하를 빤히 쳐다봤다.


“아, 그건... 그럴 만하니까.”

“그리고 막냇동생 부대 면회까지 갔다 오셨다면서요?”

“그, 그건 좀 미안... 합니다. 내가 좀 오버했죠?”

“아,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라. 너무 고마워서요. 제가 해 드릴 게 없는데.”

“별소리를 다... 그런 거 바라고 한 건 아니니까, 마음에 두지 마요. 자꾸 그러면, 서운해지려고 하니까.”

재하가 장난스럽게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김 비서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사님 혹시.”

“네.”

“술인데 ‘아드백 10’이라고 아세요? 보드카라고 하던데.”

“아뇨. 근데 왜요?”

“우연히 한번 마셔봤는데 맛있어서, 호호호. 나중에 한번 드셔보시라고.”

“아, 네에.”


같이 한잔하자고 할 줄 알고 은근히 기대했는데, 재하는 내심 실망스러웠다. 김 비서는 그런 마음도 모르고 밝은 얼굴로 한 여자를 가리켰다.


“저기, 저분 아시죠? 호텔 미르 정 대표님.”

“아, 저분이 그분이구나. 엄청 세련됐네요. 얼굴도 예쁘고.”

“그래서 저희 회장님이 싫어하나 봐요.”

“그래요?”

“물론 정 대표님도 우리 회장님을 싫어하지만.”


재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정 대표에 시선을 떼지 않았다.


행사가 곧 시작될 거라는 방송이 나오면서 두 사람의 대화는 멈추고 말았다.


노동부 장관의 축사가 끝나자 건배가 이어졌다. 재하는 연회장 한구석에 우두커니 선 채 만찬을 구경했다. 자신이 끼일 자리는 없었다. 오직 가진 자들의 만찬에 불과했다. 화장실을 다녀온 김 비서가 지겨운 듯 시간을 확인했다.


“빨리 안 끝나려나...... 생각보다 재미없죠?”

김 비서가 재하를 보고 물었다.


“허허. 그러네요. 어, 저기.”

재하가 먼 곳에 시선을 두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김 비서가 그의 시선을 좇아 확인했다.


정 대표가 차 회장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이동하여 인사를 나누려던 참이었다. 재하는 두 사람의 표정 변화에 무척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생각보다 자연스러운데.”

“머, 어쩌겠어요. 싫어도 인사는 해야 하니까.”

“그냥 귀싸대기를 갈겨버리지.”

“호호호. 이사님도 참! 그러면 재미는 있겠다.”

김 비서가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더니 공기가 답답하다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물끄러미 정 대표를 지켜보던 재하에게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밖으로 나간 재하는 계단을 통해 한 층 더 올라갔다. 연회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4층이었다.


“될지 모르겠지만, 한번 놀아볼까?”

재하는 싱긋이 웃으며 정 대표를 쳐다봤다.


한 번도 시도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제 영혼을 이동한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굳이 여자 몸으로 옮겨갈 이유도 없었지만.


정 대표가 문득 고개 돌려 위를 쳐다봤다. 위층을 막고 있는 안전유리벽 너머로 어렴풋이 재하 모습이 들어왔다. 의자에 기댄 채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되긴 되는구나, 혼이 재하인 정 대표는 신기한 듯 제 몸을 찬찬히 훑었다. 검은 원피스가 사뭇 어색하게 다가왔다.



3층 복도 유리벽 앞에 선 채 눈 내린 바깥 거리를 감상하던 김 비서 뒤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이 지긋한 남녀가 황급히 연회장 밖으로 나오기까지 했다. 무슨 소동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김 비서는 서둘러 연회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검은 물체가 술 취한 사람처럼 연회장 테이블 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유리잔과 접시가 부딪히고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정장을 한 남자들이 검은 물체를 따라다니며 내려오라고 구슬리고 있었다. 쉽게 잡을 법도 한데, 건장한 남자들이 어찌 된 영문인지 겁을 먹은 듯 함부로 끌어내리지 못했다.


김 비서가 검은 물체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을 즈음, 차 회장이 불쾌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 이사 어디 있어?”

“네? 방금 여기... 근데, 무슨 일이에요?”

이 상황에 차 회장이 하 이사부터 찾는 것이 김 비서는 의아했던 것이다.


“이 사람이 정말!”

차 회장이 분한 듯 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이내 테이블 위에 서 있는 정 대표를 노려봤다.


그러기를 잠시, 정 대표가 테이블 위에 주저앉았다. 그 틈에 건장한 남자들이 정 대표를 들쳐 업고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호텔 직원들이 연회장 안을 청소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연회장 주변을 에워싼 남자들이 카메라와 휴대폰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그때 재하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싱글벙글거리며 연회장 입구 복도에 나타났다.


“무슨 일, 있었나 봐요? 왜 이리 시끄럽지.”

“어머, 하 이사님. 어디 계셨어요? 방금...”


짝!


김 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짜고짜 차 회장이 재하 뺨을 냅다 갈기는 것이 아닌가. 어리둥절하기는 맞은 사람이나 김 비서도 마찬가지였다.


“회, 회장님.”

김 비서가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게 또 때리네.’

재하는 그 생각뿐이었다.


“내가, 자중하라고 했죠?”

차 회장이 살벌하게 노려보며 말하고는 휑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사님.”

김 비서가 걱정스럽게 쳐다보고는 서둘러 차 회장을 뒤따라 나갔다.


“이 씨! 좋아할 줄 알았는데.”

재하는 제 뺨을 어루만지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괜히 했다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무겁게 다가왔다.



차 회장이 탄 차량을 호텔 입구에서 배웅한 재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김 비서가 안쓰럽게 쳐다보며 한소리 했다.


“왜 그러셨어요?”

“내가 뭘요.”

재하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그런 재하에 김 비서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재미는, 있었어요.”

“네? 아.”


그렇게 두 사람은 암묵적으로 동의하며 주차된 곳을 향해 나란히 걸었다. 추운 날씨에 쓸다가 남은 눈이 얼어붙어 길은 미끄러웠다. 땅을 보며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내딛고 있을 때였다.


걸어가는 쪽에서 엔진 굉음이 거칠게 들려왔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운전석에 당황한 여자 얼굴과 조수석에 있는 어린 남자아이의 겁먹은 눈초리가 재하 눈길에 들어오는 찰나였다.


“비켜!”

재하는 김 비서를 힘껏 옆으로 밀쳐 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재하 몸은 차량 보닛 위를 구르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재하를 치고 간 차량은 화단에 부딪히고 나서야 멈췄다.


“이, 이사님.”

바닥에 주저앉은 김 비서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고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주변 사람들이 사고 차량으로 몰려갔다. 의식이 없는 재하를 지키고 있는 것은 김 비서뿐이었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쉽게 끝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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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7화. 근본 없는(3) 19.04.27 120 1 10쪽
27 7화. 근본 없는(2) 19.04.26 193 1 11쪽
26 7화. 근본 없는(1) 19.04.25 123 0 12쪽
25 6화. 가진 자의 품격(4) 19.04.23 136 0 13쪽
» 6화. 가진 자의 품격(3) 19.04.21 156 2 11쪽
23 6화. 가진 자의 품격(2) 19.04.20 136 1 15쪽
22 6화. 가진 자의 품격(1) 19.04.19 152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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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3화. 어린 양의 피(2) 19.04.06 151 0 11쪽
10 3화. 어린 양의 피(1) 19.04.06 184 0 15쪽
9 2화. 딴생각(4) 19.04.05 167 1 12쪽
8 2화. 딴생각(3) 19.04.05 191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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