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풀은 빨리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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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세렌디퍼
작품등록일 :
2019.04.01 20:14
최근연재일 :
2019.07.08 07:30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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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글자수 :
303,038

작성
19.04.25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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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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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3쪽

계략

DUMMY

좋은 신발. 좋은 옷. 좋은 식사. 내가 원했던 게 이거였을까?


정은 단정히 다려진 셔츠와 검은 면바지를 입은 자신을 보며 스스로 되물었다.


그는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모루가 생각났다. 그녀의 시뻘겋게 불타는 몸뚱이와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는 얼굴. 끝내는 시꺼먼 숯덩이가 되고 말았던, 그녀는 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모루는 뜨겁다고 외치지 않았다. 원망하는 말을 뱉지도 않았다. 그러나 정은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 죄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비극은 닷새 전, 정과 한이가 도환을 따라 그가 찬양해 마지않는 무리로 가면서 일어났다.


“네가 이정이라는 애니? 반갑다.”


“나도. 도환이가 네 얘길 했거든. 굉장히 착하고 사려 깊은 성격이라고 하던데.”


정은 한동안 그런 말을 들으며 어쩔 줄 몰랐다. 도환을 따라 만나게 된 아이들은 경차 여러 대로 주변을 둘러싸고 가운데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캠핑을 벌이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이런 험악한 상황에서도 밝고 활기차 보였다. 그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저, 저도 반가워요.”


그는 말을 더듬었다. 아이들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모닥불 곁으로 정과 한이를 끌어와 앉히고 거기서 꼬챙이에 끼워 굽던 소시지를 나눠 주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고기였다. 맛있는 것을 먹으며 웃고 떠들자 정은 그도 모르는 사이 긴장을 놓고 아이들 무리에 녹아들었다.


모루가 여기 있으면 좋을 텐데!


정은 모루가 함께 앉아서 구운 소시지를 먹는 상상을 했다. 그녀의 행복해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는 고민 끝에 그들에게 모루에 대해 털어놓기로 했다.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게 뭔데?”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소개시켜 주고 싶은 애가 있는데요. 어떤 여자애에요.”


“오, 좋지!”


“조금 특이한 병에 걸린 애지만요.”


그는 말하고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아이가 말했다.


“난 손가락이 한 개 없어.”


그 아이가 왼손을 펴들자 과연 검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배에 큰 흉터가 있어. 어릴 때 불에 데었거든.”


다른 아이가 윗옷을 조금 들어서 흉터를 보여주며 말했다.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도 서로 아무렇지 않아 했다. 정은 이제 그들을 완전히 믿게 되었다. 그는 원래 생각했던 만큼보다 조금 더 많이 이야기하고 말았다.


“그 애는 반만 식물 괴물인 건데요, 사람이랑 다른 점은 똑같아요. 그 애가 있어야만 백신을 만들 수 있대요.”


아이들은 겉으로는 환영했다. 일부는 얼른 만나고 싶다고 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언뜻언뜻 그를 향해 미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정은 모루가 인정받았다는 기쁨에 그 웃음에 담긴 의미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그날 밤 다른 아이들이 자는 사이 몰래 캠프를 빠져나왔다. 그가 모루를 어떻게 찾을지 궁리하기도 전에 그녀는 바닥에서 솟아 나왔다. 정은 즐거운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괜찮대. 다 너를 만나고 싶댔어.”


모루는 의심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래, 나도 봤어. 하지만 그 사람들 좀 수상하지 않아? 본 적도 없는 사람을 그렇게 환영하다니. 내가 전에 본 사람들은 모두···”


정은 상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냐. 그 사람들도 자기 상처 보여주는 거, 너도 봤잖아. 그 사람들 진짜 좋은 사람들인가 봐. 우리 백신 금방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그의 들뜬 모습을 보자 모루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의 끈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백신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다. 그녀는 정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서.


다음 날, 모루가 아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몸에 돋아난 나뭇가지들을 죄다 꺾어내고 솔잎을 엮어 만든 안대로 옹이구멍 눈을 일부 가린 채였다. 그들은 눈을 조금 꿈뻑이긴 했지만 그녀를 반겼다. 그들은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모루는 아이들을 위해 작은 나무뿌리 식탁을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솔잎 방석도.


밤이 되었다. 모루가 만든 솔잎 침낭에서 자던 정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그러자 눈앞에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아이들이, 낮에는 그토록 친절했던 아이들이, 수군대며 뭔가를 꺼내들고 있었다. 그건 화염병이었다.


'식물 괴물이 근처에 있기라도 한 건가?'



그런데 아이들은 모루 앞에 하나둘 서더니 화염병에 불을 붙일 준비를 했다. 정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곧 그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 무리에는 도환도 있었다. 아니, 한이와 정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같은 일을 꾸미고 있었다.


“저 앤 반만 식물이라니까! 우리하고 다른 건 다 똑같다고! 내 말을···”


정은 다급하게 외치며 아이들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잠에서 덜 깬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좀비를 죽이자!”


도환이 외쳤다. 아이들이 일제히 화염병을 던졌다. 모루는 뒤늦게 잠에서 깼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의 몸을 감싼 소나무 껍질은 건조해서 불에 붙기 쉬웠다. 불은 그녀의 몸뚱이를 자비 없이 태웠다. 정은 모루에게 달려들어 불을 끄려 했지만, 주변 아이들이 막았다. 그는 차마 그녀의 이름을 외치지도 못하고 애타게 발버둥만 쳤다.


때마침 식물 연결망이 바닥에서 솟아나기 시작했다. 연결망에서는 인간 형태의 식물 괴물들이 생겨났다. 아이들은 경차에 올라탔다. 도환은 그가 마지막으로 모루에게 달려가려고 몸부림칠 때 그를 슬쩍 놓아주었다.


정은 몸을 던져 모루와 함께 바닥을 뒹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자신이 화상을 입을 걱정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막 모루에게 달려들려는데 오토바이 한 대가 먼발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한 남성이 이쪽으로 질주해 오고 있었다. 그는 헬멧을 써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오토바이에서 내린 남자는 뒤쪽 짐칸에서 소화기를 꺼냈다. 그리고 모루에게 발사했다. 도환을 비롯한 아이들은 차를 타고 떠났다. 그들은 일부러 차 한 대를 남겨두었다.


소화기의 분말 때문에 일어난 흰 먼지가 가라앉자 모루의 처참한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완전히 새까맣게 타 있었다. 그녀가 살아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반초들(여기서는 수연이 만든 용어를 우선 쓰겠다. 이 무렵에는 아이들이 수십 가지 말로 이들을 불렀다.)이 헬멧을 쓴 남자의 뒤에서 달려들었다. 그는 모루의 몸에 붙은 불이 꺼진 것을 확인하고 소화기를 휘둘러 반초들의 머리통을 차례로 깨버렸다. 머리가 파괴된 반초들은 허물어져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주변 일대에 다가오는 녀석들을 열 마리쯤 해치운 다음 놀라 움직이지 못하는 정 앞에 한쪽 무릎만 꿇은 자세로 앉았다.


“나와 함께 가자.”


그가 상냥하게 속삭였다. 정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남자는 의식을 잃은 모루를 소중히 안아 들어 도환 일행이 두고 간 경차 뒷자리에 두었다. 모루는 쭈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뒷좌석의 두 칸 밖에 차지하지 않았다. 그 옆엔 소란이 끝나고서야 잠에서 깬 한이가 앉고 남자는 운전석에, 정은 조수석에 탔다.


"오토바이는요?"


"상관없어. 너희가 더 중요하니까."


남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이 차를 타고 달려 도착한 곳은 시청이었다. 정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오토바이를 탄 남자가 헬멧을 벗었다. 그를 알아본 정의 몸이 굳었다.


“전에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내 이름은 이미 들어서 알겠지만, 난 송백지야.”


그의 표정은 전과 달리 부드러웠다. 정은 그의 말투가 매우 또렷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모든 발음을 정확하게 했다. 아나운서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내가 이 애를 찾은 건 이 애의 피로 백신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야. 우리 모두 언젠가는 식물 괴물에 먹힐 운명이지만, 백신을 맞으면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어. 식물 괴물들이 저 애가 마치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 봤지? 그렇게 되는 거야. 무슨 뜻인지 알겠니?”


정은 대학교 기숙사에 놓인 태블릿으로 본 글을 떠올렸다. 그 글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는 여전히 불안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곧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큰 아이들이 그를 정과 비슷한 나이대인 아이들이 머무는 방으로 데려갔다. 그는 쉴 수도 있고, 씻을 수도 있고, 새 옷도 입을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자 아이들이 그에게 ‘집회’가 있으니 전원 참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집회란 것은 강당에서 매일 열리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행사가 있을 때처럼 아이들이 주르르 앉았다. 무대 가운데에는 스탠딩 마이크가 서 있었고 백지가 그 마이크를 잡았다.


“다들 알겠지만 이 자리는 우리가 그동안 목표해 왔던 것을 되새기는 자리다. 우리가 하려는 것은 그동안 어떤 아이도 하지 못했던 것이지만, 이게 우리들이 사는 세상을 완전히 바꿔놓을 거야.”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우리가 만들 세상은, 부모가 없어서 보호받지 못 하는 일도 없고, 어른들끼리 싸움으로 아이들이 고통받는 일도 없는 세상이다. 기회는 오로지 지금뿐이다! 창밖을 보면 저 거대한 줄기가 보일 것이다. 저 줄기가 어른들을 모두 먹어 치웠다. 이미 그들은 돌아오지 못한다! 어른들은 또 무책임하게 우리를 버리고 죽어버렸다! 백신을 만드는 일은 진행중이다. 우린 살아남을 것이다. 백신만 완성되면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 한날한시에 일제히 저 줄기를 공격해 폭파하는 거다. 그러기만 하면 우리가 바라던 그날은 온다!”


백지는 주먹을 쥐어 보였다. 아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일제히 손뼉을 치며 환호를 했다. 그와 친해진 또래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은 그 분위기에 낄 수 없었다. 그는 아빠를 떠올렸다. 아빠가 잡아먹히던 모습이 생생했다. 그러자 두려워졌다. 전에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는 백신을 만들 생각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거기에도 어른들은 다시 되돌아올 수 없다고 했었지. 그러면 아빠는? 아빠는 두 번 다시 못 보는 거잖아?


정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안에서는 그가 이상한 사람이었다. 다들 돌아오지 않을 어른들은 이미 내버린 것이다. 그러나 정은 왜 아무도 ‘혹시 어른들이 살아있다면’이라는 가정을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아빠를 사랑했고, 그래서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정은 우선 모루를 다시 만날 방법을 찾기로 했다. 백지는 그녀를 만나게 해줄 것 같지 않았다. 그 이전에 그와 마주칠 일조차 드물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걸어 잠근 회의실이나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백지단의 미래를 고민하느라' 그런 거라고 정과 같은 방을 쓰는 아이들은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몰래 잠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그는 그런 걸 하기에 너무 약했다. 해서 정은 시청 앞을 지키는 ‘감시원’ 역할에 지원했다. 지금은 단순히 앞에 서 있는 역할 정도밖에 하지 않지만, 운동부였던 아이들이 곧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훈련을 받으면 강해지겠지.


정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더는 악몽을 꾸게 되지 않게 된 것은 수요일, 수연과 재회한 날이었다. 쓰레기 산 너머에 서 있는 그녀를 보며 아는 척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의 등을 뭔가가 툭툭 쳤다. 그가 돌아보니 소나무 줄기였다. 줄기는 쓰레기 산 밖으로 통하는 지하 통로를 열어 주었다. 다른 감시원들을 보자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다녀오라고 말했다.


모루가 한 걸까? 그 앤 엄청난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백지단에서 나쁜 수를 쓰려 해도 소용없을 거야. 아직 무사한 거라고. 어쩌면 정말 백신을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을지도 몰라.


수연을 데려다주고 다시 시청 앞으로 뛰어가며 그는 작게나마 희망을 느꼈다.


이후 백지단에서 머무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 강당에 모였고 백지의 연설을 들었다. 그러나 연설을 아무리 들어도 정이 그의 말을 믿게 되는 일은 없었다.


‘나는 아빠 시체를 보기 전까지는, 아빠가 죽었다고 믿지 않을 거야.’


그는 다짐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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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월~금 아침 7시 30분 연재합니다. 19.04.08 110 0 -
73 외전 - 죽은 이의 이야기 19.07.08 102 1 9쪽
72 에필로그 19.07.05 82 2 8쪽
71 살아줘 19.07.04 70 2 9쪽
70 화승총(花勝銃) 19.07.03 66 2 8쪽
69 모두 모이다 19.07.02 81 2 7쪽
68 그들의 싸움 19.07.01 276 2 9쪽
67 내막 19.06.28 78 2 8쪽
66 비밀 선물 19.06.27 69 2 8쪽
65 행운은 적에게 19.06.26 68 2 10쪽
64 각자 행동하다 19.06.25 65 2 7쪽
63 심장에는 혼자만 19.06.24 75 2 9쪽
62 꼭대기로 19.06.21 112 2 8쪽
61 맹수 19.06.20 70 2 7쪽
60 어느 편 19.06.19 82 2 9쪽
59 민우 19.06.18 66 3 8쪽
58 거대한 나무로 19.06.17 94 3 8쪽
57 준비 19.06.14 87 3 8쪽
56 합작 19.06.13 82 3 7쪽
55 협박 19.06.12 76 3 7쪽
54 지키기 위한 선택 19.06.11 86 3 7쪽
53 1+1=? 19.06.10 48 3 7쪽
52 감정의 방향 19.06.07 62 3 8쪽
51 살인 동기 19.06.06 65 3 8쪽
50 녹음 19.06.05 63 3 8쪽
49 완성 19.06.04 62 3 8쪽
48 영웅 19.06.03 70 3 9쪽
47 다른 비밀? 19.05.31 57 3 9쪽
46 나쁜 풀은 빨리 자란다 +1 19.05.30 72 3 9쪽
45 위로와 소망 19.05.29 60 3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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