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풀은 빨리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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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세렌디퍼
작품등록일 :
2019.04.01 20:14
최근연재일 :
2019.07.0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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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2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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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뜻밖의 발견

DUMMY

[늦었어.]


지훈이 내민 그의 휴대 전화 메모장 화면에는 이 한 마디가 적혀 있었다. 수연은 영문을 몰랐다.


3일 만에 들어왔잖아? 뭐가 늦었단 거지.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지훈은 몇 자 덧붙여 썼다.


[하루 늦었어. 일요일부터 세는 거야.]


그러니까 무전기로 처음 대화한 일요일부터 쳐서, 화요일에는 들어왔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월요일부터 세는 게 아니었다.


"그럼 원래 저한테 맡기려던 건은 무효예요?"


지훈은 고개를 저으며 새로 쓴 메모를 보여주었다.


[너밖에 없다.]


"다흔 여헉드은 영라기 앙 대. 죽거나 굉울항테 억힌 오양이야."

'다른 녀석들은 연락이 안 돼. 죽거나 괴물한테 먹힌 모양이야.'


그는 타자를 치다 답답했는지 결국 말로 했다. 지훈은 타자 속도가 유난히 느렸다. 수연이 그의 손가락을 잘 살피자 왼쪽 엄지 손가락의 움직임이 어설픈 것이 보였다.


"그애허 네가 해져야겠다. 다흔 여헉드이 아우도 오 돈 앙킁 네가 더 해져야 해. 대힌 언하능 걸 하나 들어주께. 어 가꼬 시흥 거 이셔?"

'그래서 네가 해줘야겠다. 다른 녀석들이 아무도 못 온 만큼 네가 더 해줘야 해. 대신 원하는 걸 하나 들어줄게.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그 때 지훈이 기대한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값비싼 물건이나 귀한 음식? 아니면 친구를 만나게 해달라는 것? 수연은 이정 생각을 잠깐 했다. 그녀를 구하려다 식물에게 먹힌 도환 생각도 스쳐지나갔다. 당장 그녀에게 간절한 건 소중한 사람들과 무사히 재회하는 것, 그리고 식물 괴물에게 먹힐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다른 더 좋은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수연은 혹시 다른 사람이 있지 않은지 주변을 살폈다. 그녀는 방금 전 죽을 고비를 넘겼을 때 지훈이 있던 위치인 1층 회의실에 있었다. 수연은 창문에 블라인드를 내렸다.


"어 대단한 거아도 얘기하여능 거야? 어차히 앙 드일텐데."

'뭐 대단한 거라도 얘기하려는 거야? 어차피 안 들릴텐데.'


"항체 보유자요."


지훈의 입가에서 여유로운 미소가 사라졌다.


"여기 있죠?"


그 말에 지훈은 입을 계속 열었다 다물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 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수연이 항체 보유자가 이 곳에 있다는 걸 유추할 수 있었던 건 이정이 그녀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올 때 사용했던 맨홀 덕분이었다. 그들이 들어가자마자 들어온 입구가 사라지고, 시청 뒤뜰로 들어오자 출구가 사라지는, 그런 마법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한 명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확실한 건 아니었어. 한 번 던져본 건데 너무 수상한 티를 내는군.


수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훈은 혼자 뭔가 골몰히 생각하다가 이따금씩 아, 그엉거까지는(그런 것까지는), 하는 따위의 말을 내뱉더니 휴대전화 메모장에 글을 썼다. 그가 보여준 내용은 이랬다.


[어려워. 만나게 해주는 건 가능할 수도. 그것도 어렵지만.]


그렇겠지.


수연도 아예 항체 보유자를 넘겨받는 수준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항체 보유자에게서 힌트를 얻어내 믿을 만한 사람에게 정보를 넘길 수 있다면 값어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나는 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물론 그 '정보'를 듣고도 살아남았을 때 얘기지만. 방금 전에도 죽을 뻔 했고(수연은 그 때 상황을 가능한 한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수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훈은 또 한참 뭔가 적었다. 이번엔 좀 내용이 길었다.


[이건 정말 어려운 거니까 내 부탁 외에 조건 하나 더 추가.]


조건이 추가된다는 말에 수연은 조금 긴장했다. 메모 아래쪽에 네모난 상자 그림이 조금 보였다. 스크롤을 내리자 표가 나왔다. 체력검사 통과 기준이 적힌 표였다. 그 밑으로 글이 더 있었다.


[이거 통과하면 만나게 해 줄게. 왜냐면 걔 있는 곳 가는 게 어려우니까. 들키면 죽을 수도 있어. 체력이 좋아야 돼.]


예상 외로 납득할 만한 조건이었다. 정말 항체 보유자가 이 건물 안에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놓쳐선 안 되는 인재일 테니까. 또한 수연은 지훈이 항체 보유자를 가리켜 '걔'라고 표현한 것을 보고 그 사람이 지훈보다 나이가 어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다음 날부터 수연은 기초 트레이닝에 들어갔다. 간단히 몸을 푼 다음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달리기 등을 해서 매일 조금씩 한계치를 늘리는 훈련이었다. 다른 백지단원들에게는 비밀이었다. 아직 단원으로서 충분히 검증받지도 않은 그녀가 체력 단련까지 하고 있다는 게 밝혀지면 그 뒤로는 정말 아무것도 못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였다. 매일 땀에 젖어 샤워실로 들어갈 때 그녀는 일을 지나치게 키운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도 들었다. 하지만 기껏 소원을 들어준다는 데 허튼 데다 써버렸으면 훨씬 더 후회했을 것이다.


트레이닝을 몰래 하고 있다는 사실만 빼면 수연은 정말 얌전하게 지냈다. 덕분에 그녀에게 허락된 활동 반경도 점차 넓어졌다. 처음에는 지훈이 심문을 하겠다며 불러내는 일(사실 체력 단련 하러 가는 것이지만) 외에는 가림막을 쳐서 만들어 둔 작은 침실과 화장실 외에 아무데도 갈 수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그녀는 식사 시간에 식당에도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식단은 보통 때 먹는 급식 같지는 않았고 식물 줄기와 새 고기를 적당히 섞어서 볶아 만든 일품요리였다. 즉석 식품은 쓰이지 않았다. 지훈의 말에 따르면 대형 할인점에서 가져온 식량이 남아 있긴 하지만 계속 그것으로 버티는 건 힘들기 때문에 최대한 음식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노력하는 중이었다. 수연은 밥을 먹다가 준연과 마주쳤다. 그는 자기 친구들과 함께 가지 않고 수연 앞에 앉았다.


"여기 앉아도 돼?"


"응, 상관없는데."


수연은 대답하고 바로 식사에 열중했다. 음식은 겉보기에는 말라 비틀어진 풀때기와 뻣뻣한 고기 조합이었다. 그러나 먹어보니 의외로 볶음국수 맛이 나고 괜찮았다. 양념(굴 소스)의 도움을 꽤 많이 받은 모양새였다. 준연은 자기가 받아온 음식을 1분 만에 전부 먹어치웠다. 그리고 수연을 보았다.


"있잖아."


"어?"


준연은 운을 띄워놓고 주저했다.


"내가 그 전에, 집에서 했던 말... 잊어 줘. 이상한 소릴 했던 것 같아서."


수연은 숟가락질을 멈췄다. 그녀는 오른쪽 위로 눈을 굴리며 그가 했던 말이 뭐였지, 하고 생각했다. 그 대화를 나눈 지 일 년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집에서라. 잘 기억이 안 나. 어떻게 생각하냐고 해서 내가 거기에 대답했던 것만 기억나는걸.


"난 너 착하다고 했던 것밖에 기억 안 나는데."


"그렇다고?"


준연은 헛웃음이 났다. 그는 그 때 했던 말로 약점을 잡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 착하잖아. 나 혼자 먹으니까 같이 밥 먹어주고."


수연은 다시 요리를 한 입 먹었다. 준연은 또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녀가 그 사실을 눈치챈 것 같자 그는 시선을 조금 피했다.


뭐지?


"물론 네가 뭐 물어보려고 앉은 거긴 하지만."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되게 쓰레기같다."


"그래. 친구들한테 가, 이제. 안녕."


수연이 손을 흔들었다.


"아냐."


그는 그대로 앉아서 수연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나갈 때쯤 물이 든 컵을 들고 와서 안 마셔? 하고 물었다. 이 곳에 와서 가장 좋은 건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전기가 통하지 않는데도 이 곳은 태양열을 이용해 냉장고를 가동할 수 있었다. 밤에 전등도 켜둘 수 있었다. 태양열로 얻을 수 있는 전기는 제한되어 있어서 뭐든 아껴 써야 하긴 했다. 그래도 쓸 수 있다는 게 어딘가.


다음 날 준연은 아침을 먹을 때에도 수연 앞에 앉아서 먹었다. 점심에도 마찬가지였다. 수연은 슬슬 관심이 조금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지훈은 그런 수연을 이해할 수 없었다.


"후담스어우 께 어 있어. 니가 앙에 드었나 호지."

'부담스러울 게 뭐 있어. 네가 맘에 들었나 보지.'


계속 앞에 앉아서 보는데 눈이 너무 커서 부담스러워. 그러고 보면 코도 오똑한 것 같고. 턱선도... 음?


"어? 걔 잘생겼잖아?"


"우슨 아리야. 이제 알았어?"

'무슨 말이야. 이제 알았어?'


"네."


"아니, 이샹항 섀끼네 이거. 원 그걸 지긍 알아?"

'아니, 이상한 새끼네 이거. 뭔 그걸 지금 알아?'


"그러게요."


"그어게요?"

'그러게요?'


지훈은 더 말하려다 말고 이마를 짚었다.


"아, 올라. 체역 단련이나 열시이 해."

'아, 몰라. 체력 단련이나 열심히 해.'


안 그래도 수연은 전보다 몸이 가벼워진 걸 체감하던 차였다. 그녀는 준연의 지금 행동이 전에 비해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원래도 그녀가 발목을 다쳤을 때 자기 옷을 찢어서 붕대를 감아주기도 하는 친절한 아이였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었다. 남우는 식물에 먹히거나 하지 않고 살아만 남아준다면 앞으로 알아낼 정보를 알려주고 싶은 1순위이기도 했다. 수연은 훈련 강도를 높였다. 그만큼 발전 속도도 빨라졌다. 체력 검사를 통과할 고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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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월~금 아침 7시 30분 연재합니다. 19.04.08 110 0 -
73 외전 - 죽은 이의 이야기 19.07.08 102 1 9쪽
72 에필로그 19.07.05 82 2 8쪽
71 살아줘 19.07.04 70 2 9쪽
70 화승총(花勝銃) 19.07.03 66 2 8쪽
69 모두 모이다 19.07.02 81 2 7쪽
68 그들의 싸움 19.07.01 276 2 9쪽
67 내막 19.06.28 78 2 8쪽
66 비밀 선물 19.06.27 69 2 8쪽
65 행운은 적에게 19.06.26 68 2 10쪽
64 각자 행동하다 19.06.25 64 2 7쪽
63 심장에는 혼자만 19.06.24 74 2 9쪽
62 꼭대기로 19.06.21 112 2 8쪽
61 맹수 19.06.20 70 2 7쪽
60 어느 편 19.06.19 82 2 9쪽
59 민우 19.06.18 66 3 8쪽
58 거대한 나무로 19.06.17 94 3 8쪽
57 준비 19.06.14 87 3 8쪽
56 합작 19.06.13 82 3 7쪽
55 협박 19.06.12 76 3 7쪽
54 지키기 위한 선택 19.06.11 86 3 7쪽
53 1+1=? 19.06.10 48 3 7쪽
52 감정의 방향 19.06.07 62 3 8쪽
51 살인 동기 19.06.06 65 3 8쪽
50 녹음 19.06.05 63 3 8쪽
49 완성 19.06.04 62 3 8쪽
48 영웅 19.06.03 70 3 9쪽
47 다른 비밀? 19.05.31 57 3 9쪽
46 나쁜 풀은 빨리 자란다 +1 19.05.30 71 3 9쪽
45 위로와 소망 19.05.29 60 3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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