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풀은 빨리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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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세렌디퍼
작품등록일 :
2019.04.0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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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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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3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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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풀은 빨리 자란다

DUMMY

질식할 것 같은 꽃향기에 수연은 코를 막았다. 꽃가루가 자꾸 입으로 들어와서 뱉어내기도 바빴다. 수련 꽃 안에 고이 모셔진다는 것은, 얼핏 아름답게 들리는 말이지만, 실상은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수연은 목까지 올라오는 여러 가닥의 꽃술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바깥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했다. 이 꽃봉오리가 그리 단단할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칼로 쭉 찢어 가르면 꼼짝할 수 없을 터인데 밖은 어째 조용했다. 수연은 다시 입에 손을 갖다 댄 다음 꽃봉오리 한쪽을 만져서 봉오리를 조금 열고 그 너머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수연은 의아해하며 꽃 밖으로 나왔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위협하던 칼은 바닥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아지트로 올라갔다. 위에는 아무도 없고 LED 등은 쓰러져 있었다. 태블릿은 보이지 않았다. 인기척이 느껴져 수연이 아래를 내려다보니 누군가 겁에 질려 휴게실 입구 쪽에 주저앉은 게 보였다. 장미였다.


“미안. 내가 그런 거야.”


수연이 아지트에서 기어 나오자 장미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녀의 어깨를 보고 있었다. 수연이 어깨를 확인하니 상처 입었던 부분에 아름다운 수련 한 송이가 피어난 게 보였다.


“너도 괴물이···?”


“오빠. 조우빈은 어디 있어?”


수연이 묻자 장미는 미간을 찡그리며 기억해내려고 애쓰는 표정을 지었다.


“김남우가 자기 사무실로 부른 뒤로 못 본 것 같은데. 아직 연구동 A에 있을 수도 있겠다. 그보다 너, 괜찮아?”


수연은 그렇다고 대답하곤 연구동 A가 있는 방향을 보았다. 식물 능력을 쓰면 바로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능력에 한계가 있는 만큼 신중히 사용해야 했다. 도환이 말한 ‘억제하는 약’을 구하기 전까지는.


“내가 조우빈 데려올까.”


장미가 말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바닥에 떨어진 칼을 발견했다. 칼을 집어 들어 살펴보던 그의 표정에 짜증이 일었다.


“그냥 백지단에나 가버릴 것이지.”


그는 중얼거리고는 칼을 든 채 밖으로 나섰다. 수연은 휴게실 한가운데에 핀 대책 없이 큰 수련 꽃봉오리를 보며 이건 무엇으로도 감출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뜯어내서 태워버리지 않는 이상은. 우빈은 생각보다 침착했다. 수연이 새로 얻은 능력을 보면서도 그럴 수 있다는 반응이었다. 그는 수연이 항체 보유자를 만났고 그녀가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었으며 서로 소통할 방법을 찾고 있다는 얘기까지 듣고는 무릎을 '탁' 쳤다.


“아! 그걸 버리지 않길 잘했어.”


‘그것’이란 긴 전화선을 말하는 것이었다. 인터넷 연결이 실패할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쓰려고 남겨둔 것이었다. 청소년 대학 전체에 연결하려고 했던 만큼 길이는 넉넉했다. 수연은 시험 삼아 짧은 전화선 양옆에 수련 잎으로 작은 전화 모양을 만들었다. 벨 소리도 전화번호도 없었지만, 목소리를 전달하는 데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아지트가 더는 안전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장미의 방 책상 서랍 안에 이 임시 전화기를 설치하기로 했다. 그는 어쩐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수연은 이제 전화선 반대편을 나무뿌리 왕국까지 잇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그녀는 이 일에 얼마나 많은 식물 능력이 필요할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시도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입 맞춘 손끝을 전화선에 대자 조금 찌릿했다. 그녀는 몸속에서 흐르던 피가 탐욕스러운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되는 기분이 들었다. 5분 정도 흘렀을 때 아이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기 시작했다. 10분이 흐르자 말릴지 말지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제 와서 멈출 순 없었다. 15분이 흘렀고, 뭔가 뚝 끊어진 느낌이 들었다. 수연은 손을 뗐다. 연한 초록빛 수화기가 서랍 안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그녀는 ‘다 된 것 같아’라고 하려고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한 무더기의 손바닥보다 큰 수련 꽃을 쉴 새 없이 토해냈다. 전부 토하고 그녀는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을 보았다. 온몸이 식물투성이였다. 한쪽 눈에도 꽃이 피어났고 몸에 드러난 부분은 전부 초록빛이었으며 군데군데에 둥근 수련 잎이 자라난 게 보였다. 피부도 수련 줄기의 표면을 만지는 것처럼 반들반들했다. 이 상태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수연은 다시 장미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은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그녀의 겉모습을 보고 두려워하는 게 느껴졌다. 모루도 이런 상황에 놓였을 것이다. 수연은 그토록 혼자 남기 싫어하는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모루를 홀로 두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한 수연은 장미와 우빈에게 말했다.


“혹시 내가 완전히 괴물이 되어버려도 전화기에 관심을 가져야 해. 아마 항체 보유자가 이걸로 연락해올 거야. 그 안에 들어올 사람이 나 말고 그 사람 정도니까. 그 애 혼자 놔두지 마.”


그녀는 다시 타고 왔던 자전거를 끌고 나무뿌리 왕국으로 되돌아왔다. 올 때 그녀는 지훈이 준 무전기와 아지트에 있던 LED 등을 챙겨서 왔다. 천장에 달린 불빛이 약해져 가고 있으므로 그 대용으로 쓰려는 것이었다. 이것조차 얼마나 버틸지는 알 수 없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공중에 매달린 정자 안에 전화기가 놓여있었다. 수연은 전화기를 들고 말했다.


“들려?”


곧 우빈의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응.”


그날 밤에는 모두 장미의 방에 모였다. 경비대원인 아이도 참석했다. 그는 전에 도망쳤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우리도 이렇게 모이니까 제법 단체 같은데. 이름이라도 정해 볼까.”


장미의 말에 아이들은 각자 의견을 내놓았다. 불꽃. 어구모(어른들을 구하는 모임). 비밀결사단. 전화 너머로 듣고 있던 수연이 한마디 했다.


“식물이랑 관련된 말로 정하면 어때.”


그러자 떡잎, 새싹, 그로우(grow) 같은 의견들이 나왔다. 큰 진전은 없었다.


“뭐해? 자는 척하고 잠깐 나왔어.”


모루가 나무뿌리 왕국에 왔다. 수연은 간략히 상황을 설명했다. 모루는 수화기 너머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항체 보유자예요.”


“아, 항체 보유자분. 혹시 실례지만 사전 같은 걸 구할 수 없을까요? 저희 단체 이름 정하는 중이에요.”


장미는 가볍게 장난으로 한 말이었지만 모루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녀가 찾아보겠다며 밖으로 나가버리자 수연을 포함한 다른 아이들이 그를 질타했다. 모루는 약 15분 만에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속담 사전’이 들려 있었다. 각종 속담이 주제별로 나열되어 있었고 수연은 그중 나무·풀 항목을 펼쳐서 찾았다. 하나하나 짚어가며 읽어 내려가던 수연의 초록빛 손가락이 어느 한 대목에서 멈췄다.


“오, 이런 말도 있다. ‘나쁜 풀은 빨리 자란다.’.”


“뜻이 뭔데?”


“별로 긴요하지 아니한 것이 먼저 나선다는 말···에이.”


“나쁜 풀은 마디가 세 개가 되기 전에 제초제를 뿌려야 죽는데.”


장미가 무심코 한 말에 아이들의 이목이 쏠렸다.


“어?”


“아. 우리 부모님이 전에 했던 말이야. 이 속담도 그런 뜻일걸? 왜, 잡초는 작물보다 빨리 자란다고 하잖아. 사실 잡초는 자기가 살겠다고 그러는 것뿐인데.”


“그거 좋다.”


우빈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우리가 잡초인데, 아니, 남들이 보기엔 잡초로 보이지만, 사실 아닌데, 벌써 자라버린 거지. 세 마디도 넘게. 그래서 우리가 이기는 거야.”


“무슨 말이야?”


성민이 물었다. 지금껏 가만히 듣고 있던 소예가 조곤조곤한 말투로 다시 정리했다.


“겉보기엔 잡초처럼 보이는 우리가 청소년 대학이나 백지단 모르게 빨리 계획에 성공할 거라는 얘기네. 난 좋은 것 같아.”


“그런데 너무 길어.”


“그럼 단체 이름은 세 마디라고 하면 어때? 마디가 세 개 되기 전에 제초제 뿌려야 되니까 이미 세 마디면 끝난 거잖아.”


경비대원 출신인 아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좋은데!”


이렇게 해서 이들의 단체 이름이 정해졌다. 찾아낸 속담은 버리기 아까웠으므로 좌우명으로 삼았다. 단체명 ‘세마디’, 좌우명은 ‘나쁜 풀은 빨리 자란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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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월~금 아침 7시 30분 연재합니다. 19.04.08 110 0 -
73 외전 - 죽은 이의 이야기 19.07.08 102 1 9쪽
72 에필로그 19.07.05 82 2 8쪽
71 살아줘 19.07.04 70 2 9쪽
70 화승총(花勝銃) 19.07.03 66 2 8쪽
69 모두 모이다 19.07.02 81 2 7쪽
68 그들의 싸움 19.07.01 276 2 9쪽
67 내막 19.06.28 78 2 8쪽
66 비밀 선물 19.06.27 69 2 8쪽
65 행운은 적에게 19.06.26 68 2 10쪽
64 각자 행동하다 19.06.25 65 2 7쪽
63 심장에는 혼자만 19.06.24 75 2 9쪽
62 꼭대기로 19.06.21 112 2 8쪽
61 맹수 19.06.20 70 2 7쪽
60 어느 편 19.06.19 82 2 9쪽
59 민우 19.06.18 66 3 8쪽
58 거대한 나무로 19.06.17 94 3 8쪽
57 준비 19.06.14 87 3 8쪽
56 합작 19.06.13 82 3 7쪽
55 협박 19.06.12 76 3 7쪽
54 지키기 위한 선택 19.06.11 86 3 7쪽
53 1+1=? 19.06.10 48 3 7쪽
52 감정의 방향 19.06.07 62 3 8쪽
51 살인 동기 19.06.06 65 3 8쪽
50 녹음 19.06.05 63 3 8쪽
49 완성 19.06.04 62 3 8쪽
48 영웅 19.06.03 70 3 9쪽
47 다른 비밀? 19.05.31 57 3 9쪽
» 나쁜 풀은 빨리 자란다 +1 19.05.30 72 3 9쪽
45 위로와 소망 19.05.29 60 3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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