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는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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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설
작품등록일 :
2019.04.01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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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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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06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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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오발탄-1

DUMMY

의식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알 수 없다는 느낌이라도 드는 것으로 보아 의식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한데 의식이란 것이 몸속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공간의 어딘가에서 몸 안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보이긴 하는데 인식할 수가 없고, 들리긴 하는데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호텔 객실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얄궂게도 모든 풍경은 영화를 보고 있을 때처럼 카메라의 시점으로 눈에 들어왔다. 소파 위에 사내 한 명이 누워 있었다. 카메라가 사내를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사내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자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정신이 말짱하게 깨어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두툼한 조끼에 청바지를 입고 있는 품이 그 자신의 옷차림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카메라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사내의 가슴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쩜 사내는 이미 죽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가 더욱 바짝 다가섰다. 사내는 진짜로 죽어 있었다. 바로 그 자신이었다. 소름이 온몸의 털을 훑고 지나갔다. 아, 나는 이미 죽었구나. 나는 이미 유령이 되어 있는 것이구나. 몸속의 모든 세포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막상 목구멍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카메라는 그 자신의 시체를 향해 점점 더 다가섰다. 그리고 더는 다가설 수 없을 만큼 거리가 좁혀졌을 때 누워있던 시체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회칠을 한 것처럼 새하얀 면판에 대비되어 더욱 섬뜩하게 보이는 시커먼 눈꺼풀, 그리고 그 속에서 불타고 있는 새빨간 눈알. 이쪽을 돌아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시체가 아니었다. 그 끔찍한 얼굴이 히죽이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되었어, 신귀출. 저쪽으로 갈 때가 되었다고.”


신귀출은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 객실천장의 익숙한 무늬가 눈에 들어왔다. 진짜 죽은 건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이 제일 먼저 스쳤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곧바로 공포심으로 바뀌었다. 이러다 진짜 죽겠구나 하는 강박이 끊임없이 그를 몰아붙였다. 움직여야 한다. 죽지 않으려면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악몽의 한가운데서 그랬듯이 움직여야겠다는 건 마음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었다.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눈동자와 혓바닥과 성대가 전부였다. 신귀출은 광증에 빠져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사람 살려! 누구 없어요! 사람 살......”


신귀출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있는 대로 목청을 돋우어 소리를 지르다 보니 문득 이게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킬러를 보내온 것은 물론 웨이팅클럽일 게다. 그렇다면 아직 상황이 종료된 게 아니다. 놈들은 절대 혼자 움직이는 법이 없다. 킬러 뒤에는 항상 포터가 도사리고 있고, 그 뒤에는 메신저가 도사리고 있으며, 끝내는 컨덕터란 놈까지 이어지게 마련이다. 어디에선가 놈들은 지금의 이 상황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아직은 움직여서는 안 된다. 죽은 척 가만히 자빠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백에 하나라도 살아날 가망이 생긴다.


신귀출은 기왕에 누워있던 자세 그대로 동작을 멈춘 채 눈까지 질끈 감았다. 가슴이 어찌나 두근거리는지 심장이 뛸 때마다 누군가 손바닥으로 등허리를 땅땅 때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십여 초쯤 흐르자, 두근거림이 점차 잦아들면서 호흡도 한결 편안해졌다. 차분해진 의식의 스크린 위에 마치 파노라마를 보듯이 모든 상황이 또렷하고 간결하게 떠올랐다.


방금 전, 글쎄 얼마동안 정신을 잃었는지 알 수 없으니 정확하게 방금 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느낌상으로는 방금 전에 일어난 일처럼 느껴졌다.


방금 전에 이곳에 왔던 킬러 놈은 지금까지 그 자신이 마주쳤던 킬러들과는 노는 물이 다른 놈이었다. 놈이 대체 어디로 들어와서 어디로 나간 것인지 신귀출은 그 순간까지도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접근기술 하나만 보더라도 놈은 프로 중의 프로인 것이다. 게다가 놈은 소음기 달린 권총까지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그런 물건을 구할 수 있는 건 특수부대에서 암암리에 양성한 암살전문가들 뿐이다. 아니면 국가기관의 요원 출신이거나. 틀림없이 둘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신귀출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 고개를 조금 갸우뚱했다.


‘놈이 훈련받은 암살전문가라면 왜 확인사살을 하지 않았을까. 놈이 내 골통이나 모가지에다 한 방만 더 쐈더라도 내 혼은 지금쯤 지옥에서 박박 기고 있었을 것이다. 혹시 심장에다 두 방 더 쏜 게 확인사살이었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킬러들에겐 표적의 얼굴을 상하게 하는 것은 절대 금기이다. 표적의 신원확인을 어렵게 하는 것은 잔금을 포기하는 짓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놈은 무의식적으로 그런 버릇이 나왔던 걸지도 몰라. 그러니까 얼굴 대신 심장을 쐈을 테지. 하지만 놈이 쏜 총알과 내 심장 사이에는 고분자화합물로 만든 지폐뭉치가 숨어있었다. 그 지폐다발이 마치 파이버글라스처럼 심장으로 향하는 총알의 탄도를 비틀어 놓음으로써 내 갈비뼈만 부숴놓은 것이지. 흐흐, 결국 돈이 나를 살린 거야.’


최악의 위기는 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에 붙은 시계도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04시 50분. 새벽 두 시 뉴스를 보다가 잠깐 선잠이 들었던 것도 기억이 났다. 깊이 잠들지는 않았으니 킬러가 잠입했던 시각은 대략 3시 전후였을 것이다. 그리고 놈이 일을 마치는 데 필요한 시간은 길어야 30분 안팎이었을 테고. 그렇다면 킬러의 작업을 보조하고 감시하던 포터는 이미 철수했다고 봐야 한다.


뒤처리를 전담하는 다른 포터들이 이곳으로 밀어닥칠 일도 없을 것이다. 클럽 측에서 살인현장의 흔적을 지워버릴 생각이었다면, 그 정도 뒤처리쯤은 일이 끝난 후 5분 안에 이루어졌을 테니까. 놈들의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 머릿속에서 또렷하게 정리가 되었다.


‘놈들은 현장을 그대로 방치할 생각이었어. 호텔 살인사건이니 뭐니 하면서 언론에서 떠들어주길 기대하고 있는 거지. 정치인들이 뭔가 꿍꿍이를 꾸밀 때 큼직한 연예인스캔들 한 방 터뜨려주는 거나 똑같은 수법이야. 그래야 황만수에게 쏠려있던 대중의 관심이 다른 데로 나눠질 테니까. 나 같은 놈 하나 죽여 봐야 웨이팅클럽은 털끝도 다치지 않을 거라 생각했겠지. 흐흐, 미련한 놈들. 너희들은 내가 죽지 않을 걸 오히려 고맙게 생각해야 할 거야. 내 시체가 발견되고 내 비장의 카드가 드러났다면 너희 웨이팅클럽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을 테니까.’


신귀출은 자신의 조끼가 비록 총알에 뚫리긴 했어도 내용물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조끼 속에는 돈만 들어있는 게 아니었다. 황만수가 몇 번이나 고쳐 쓴 미완성 유서 몇 장과 황만수가 이원재로부터 전해들은 웨이팅클럽의 정보를 녹취한 소형녹음기가 지폐다발과 함께 감춰져 있었다.


클럽에서는 그것들의 존재를 아직 짐작조차 못 하고 있다. 황만수를 납치해서 끌고 다니는 동안 클럽의 포터들은 킬러와 표적의 동향을 끊임없이 감시했다. 때로는 망원렌즈를 이용했고, 시야가 차단된 곳에서는 신귀출의 구두뒤축 속에 몰래 숨겨둔 도청기로 킬러와 표적의 대화를 감청했다.


신귀출은 클럽의 포터들이 자신의 물건에 뭔가 장난을 쳤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래서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든든한 보험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클럽에서는 이원재의 수기장부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값비싼 수기장부를 눈에 잘 띄는 손가방에 따로 보관했던 것은 버리는 카드로 활용하려는 의도였다. 위기에 빠진 도마뱀이 제 꼬리를 잘라버리듯 언제든 떼어 줄 수 있는 미끼였던 것이다.


고개를 돌려서 화장대 위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수기장부를 넣어두었던 손가방이 열려 있었고, 자질구레한 내용물들이 반쯤 쏟아져 있었다. 짐작했던 딱 그대로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고개를 다시 돌려서 소파 팔걸이에 걸어둔 잠바를 찾아보았다.


활극이 벌어지는 동안 뭔가에 쓸렸던 모양인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신귀출은 누운 채로 몸을 조금 움직여 보았다. 가슴 쪽에 큼직한 식칼이 통째로 박혀있는 듯 예리하게 후벼 파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래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던 근육의 무력증에서는 조금씩 회복이 되어가고 있었다.


신귀출은 이를 악물고 소파 위를 기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잠바를 주워 올렸다. 그리고 그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전원을 켰다. 부르르 진동음을 내며 기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켜보는 것은 며칠 만에 처음이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대포폰이었지만, 혹시라도 클럽의 포터들에게 위치추적을 당할까봐 두려워 늘 꺼두었던 것이다. 이제 표적 제거작업이 완료되었다고 간주한 거라면, 놈들이 굳이 시체의 대포폰이나 추적하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화면을 옆으로 밀고 연락처의 중간쯤에 있는 서장걸이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신귀출과 감방동기인 그는 이런 일에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인물이었다. 한때는 제법 유명한 금고털이 기술자였지만, 이제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보험사기나 처먹고 다니는 불쌍한 인생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 호텔 방문쯤은 작은 핀 하나로 따버릴 수 있는 손재주가 있었다.


신귀출은 손가락으로 이름을 눌렀다. 화면에 전화기 그림이 떴다. 한참 자빠져 자고 있을 시각인데 과연 전화를 받기나 할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전화기 그림을 길게 눌렀다. 신호 가는 소리가 여러 번 이어졌다.


역시 곧바로 받지는 않았다. 그래도 머리맡에 전화기를 놔두었다면, 서서히 잠이 깨고는 있을 것이다. 놈은 성질 좋은 인간이 아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누군지 확인해 보지도 않고 대뜸 쌍욕부터 퍼부어댈 것이다. 머리가 좋은 편도 아니라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기억이나 해낼지도 의문이었다. 한때 몇 번 어울려서 작업을 한 적은 있었지만, 놈과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런 경우에는 아주 믿을 만한 놈이었다. 돈만 넉넉히 준다면 지뢰밭이라도 파헤칠 놈이니까.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 예상했던 대로 잔뜩 뒤틀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떤 씨발새끼가 오밤중에 전화질이야?”


-----------


야간작업 팀의 메신저는 모든 책임을 무번 포터에게 미루느라 안간힘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보고는 개연성보다는 비약이 훨씬 많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만은 분명했다. 신귀출은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그 행방마저 알 수 없는 것이다. 컨덕터는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지려는 야간 메신저의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거기까진 잘 알겠습니다, 메신저님. 수기장부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것도 회수가 안 된 건가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반색을 했다.


“아, 그건 무사히 손에 넣었습니다. 하정태가 그 일만큼은 제대로 해냈습니다. 무번 포터가 회수해 온 걸 지금은 제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원본이 틀림없고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수기장부는 클럽과 클럽의 모체인 펀드를 동시에 날려버릴 수 있는 가장 위험한 뇌관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완전히 마무리된 것이 아니다. 신귀출의 목숨이 붙어있는 한, 언제 어디서 어떤 화약에 불이 붙을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다.


“수기장부는 S-9 지점에 임치해 두십시오. 잘 아시겠지만, 메신저님께서 직접 배송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정태의 동선은 확보하고 계신 거죠?”


“예, 컨덕터님. 하정태는 자기가 입고 있는 재킷의 단추가 도청기 겸 위치추적기라는 걸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수기장부를 지하철보관함에 넣은 후, 곧바로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긴장된 작업이 끝났으니 지금쯤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져 있을 겁니다.”


“잔금 통장의 비밀번호는 알려 주셨나요?”


“예. 하정태의 숙소 우편함에 넣어 두었고, 잔금 중 일부는 이미 인출을 했습니다. 다행히 백만 원만 인출을 했습니다. 비밀번호가 맞는지 궁금했던 모양이에요. 나머지 7900만 원은 아직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잠시 후에 비밀번호를 변경해 두겠습니다.”


“그렇게 조치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지금으로선 신귀출을 잡을 킬러가 하정태밖엔 없는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잔금은 두 배로 늘리세요. 아니, 세 배나 네 배라도 상관없습니다. 하정태가 요구하는 대로 주세요. 물론 계약금은 20프로 이상 주면 안 됩니다. 계약금이 많아지면, 일은 늦어지게 마련이니까요.”


“알겠습니다, 컨덕터님. 한데 저희 야간 팀에서 진행해 오던 프로젝트는 어떻게 할까요? 이번 작업을 본격적으로 지원하자면 기존 건은 부득이 유예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기존 프로젝트는 정상적으로 진행하세요. 주간 3팀과 4팀이 무번 포터와 공조하고 있으니까 야간 팀까지 지원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사항들만 마무리하시고 인수인계하면 됩니다. 작업경과는 양쪽 메신저 모두에게 상세히 설명해 주시고요. 어쨌든 수고 많으셨습니다. 또 뵙죠.”


“예. 또 뵙겠습니다. 컨덕터님.”


전화가 끊겼다. 컨덕터는 음성변환 장치가 내장된 전화기를 탁자 위에 그대로 둔 채 의자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단전 위에 올리고 눈을 감았다. 물론 명상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버릇이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조건반사처럼 그 자세가 나오곤 했다.


판이 점점 시끄러워지고 있다. 그리고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소란과 번잡은 클럽과 클럽의 모체인 펀드에서 가장 혐오하는 상황들이다. 그분께서 참아줄 수 있는 한계는 아마 여기까지이리라. 하지만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여기에서 한 치라도 벗어나게 된다면...... 아, 생각만 해도 두렵고 소름 끼치는 일이다. 효용을 잃은 구성원이 삭제되는 것은 한 번도 변한 적 없는 클럽의 불문율이다.


‘그래도 설마 나를......’


마음 깊은 곳에서 작은 반발심과 함께 조금은 낙관적인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은 늘 그렇듯 더욱 깊은 곳으로 추락하는 시커먼 현기증뿐이었다. 아니다, 이러다가 죽는 거다. 결국은 이런 착각과 오만 때문에 죽는 것이다. 살려면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그분의 아바타일 뿐, 그분이 아니다. 착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고도의 지시에 따라 고도의 옷을 입고 고도의 자리에 앉아있는 대리인일 뿐, 진짜 고도는 아닌 것이다.


더 늦어져서는 안 된다. 그분께서 손수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순간부터 모든 것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임계점을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 전에 무조건 수습해야만 한다. 그래야 내가 산다. 자, 이제 일의 경과를 다시 한 번 복기해 보자. 상황을 요약하고 정리해 보자. 문제의 단순화는 해결의 단서를 찾아주는 비법 중의 비법이니까.


일이 본격적으로 꼬이기 시작한 것은 검찰 정보통 출신인 강지표가 황만수의 변호를 맡게 되면서부터였다. 황만수가 강지표에게 기대를 걸었던 것은 그의 지검장 경력이었다. 수도권의 한 도시에서 지검장을 하다가 1년 전에 퇴직을 한 그에게는 아직 전관예우의 약발이 짱짱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지표는 황만수와의 상담이 진행되면서 이상한 점을 느끼기 시작했다. 조원중으로부터 리베이트를 수수한 혐의로 기소된 그는 정작 본건보다는 오히려 4년 전에 사망한 반병근과의 연루 건을 더욱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때 대검의 범죄정보기획관이었던 강지표는 황만수의 두려움 뒤에 제 3의 집단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강지표는 그때부터 아주 위험한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황만수로부터 웨이팅클럽에 대한 정보를 계속 캐내는 한편, 검찰 정보라인에 남아있는 인맥을 활용하여 웨이팅클럽의 행적을 좇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검찰 조직 내에도 클럽의 요원이 침투해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가 클럽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로부터 클럽에서도 그와 황만수를 본격적으로 사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에 대한 감시가 밀착되면서 그간 막연한 의심뿐이던 이원재의 수기장부 원본이 실재하고 있음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웨이팅클럽과 클럽의 모체인 펀드에는 동시에 비상이 걸렸다. 클럽의 콤바인 요원이자, 모체 펀드의 아시아 지사장이었던 이원재의 수기장부는 양 조직을 동시에 와해시킬 수도 있는 키 스톤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고도는 아주 오래간만에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고도의 대리인이자, 클럽의 실무를 총괄하는 컨덕터라 해도 고도가 육성으로 지시를 전달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이번 사안 속에는 모든 것을 단번에 날려버릴 치명적인 파괴력이 잠재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도는 조직의 모든 인력과 자원을 동원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상황을 조속히 수습하라고 주문했다. 완전한 조급증에 사로잡힌 것은 그때부터였다. 진즉에 삭제시켰어야 했을 신귀출을 다시 킬러로 쓴 것도 그런 조급증 때문이었다.


클럽의 용병이라 할 수 있는 킬러들은 철저한 소모품이다. 그들 대부분은 클럽에서 발주한 용역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소모되었고, 설령 몇 번의 용역에서 용케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클럽의 비밀이 너무 많이 노출되었다 싶으면 강제로 삭제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하지만 신귀출은 유난히 운수가 좋았다. 클럽에서는 그가 모르는 사이에 몇 차례 제거작업을 시도했지만, 묘한 우연에 의해 모두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아주 공교로운 시기에 황만수 건까지 터지게 된 것이다.


신귀출은 당시로선 입에 꼭 맞는 떡처럼 여겨졌다. 그처럼 까다로운 작업을 신속하게 처리할 킬러를 물색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신귀출을 다시 사냥개로 썼던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수였다. 그 개는 너무나 사납고 끈질기고 영악하다. 토끼몰이를 시킬 때에는 더 없는 미덕들이 개를 삶아야 할 시점에서는 오히려 지독한 난관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더욱 그 개는 이제 독이 오를 대로 올라있는 상태이다. 빨리 숨통을 끊어놓지 않으면 제 꼬리에 붙은 불을 온 동네에 퍼뜨려놓을 살아있는 화약덩이인 것이다. 서둘러야 한다. 무엇을 하든 우선은 움직여야 한다. 가만히 앉아 있을 시간은 절대 아니다.


컨덕터는 무엇에 놀란 사람처럼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탁자 위에 올려둔 구식 휴대폰의 폴더를 열고 0번을 눌렀다. 무번 포터 김형섭을 직접 호출하는 단축키였다. 컨덕터가 포터와(비록 간부급으로 분류되는 무번 포터라고는 해도) 직접 통화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가롭게 클럽의 관례나 따지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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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오발탄-3 +2 19.04.08 164 4 13쪽
10 오발탄-2 +4 19.04.07 182 4 13쪽
» 오발탄-1 19.04.06 178 4 19쪽
8 청부-2 19.04.05 189 4 17쪽
7 청부-1 +2 19.04.04 196 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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