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 바이델른 상단의 속사정 - 11
결국 상단의 수레를 하나 더 공수해 가져와서야 일행은 출발을 할 수 있었다. 리를리안가의 사륜마차가 중간에 자리를 잡았고 레이진 일행은 바이델른 상단의 제록이 탄 말을 호위하며 제일 앞줄에서 동행했다.
이미 베네크와 오든의 신위를 목격한 상단의 사람들은 그들의 합류를 반겼다.
리를리안가의 기사 다섯 명이 그들과 동행하고 있었지만, 그들 중 오러기사가 얼마나 될지도 모르고, 상단이 위험에 처했을 때, 베네크나 오든처럼 자신들을 위해 싸워줄지도 미지수였다.
온통 노란 풀잎이 덮인 평야가 눈앞에 펼쳐졌다.
붉은 점무늬 말을 타고 선두에서 나아가던 제록이 레이진 일행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센달쪽으로 여행을 다녀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누구를 특정해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니었지만, 베네크가 대답했다.
“우리는 이곳이 초행입니다.”
“베일경께서는 푸에린이 고향이십니까? 억양이 서부 쪽에 가까운 듯 합니다만?”
“예전에‘로에나스’에 잠깐... 있었습니다만, 푸에린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옛 수도에 계셨군요? 꽤 잘 나가셨던가 봅니다, 베일경?”
껄껄 웃는 제록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은 베네크가 대답을 피했다. 방심한 틈에 자신의 신분을 조금씩 실토한 꼴이 되었다. 노회한 상인과의 대화는 이래서 어려웠다.
제록이 그런 그를 모른 척, ‘로에나스가 예전만 한가요, 어디.’ 하며 다시 껄껄 웃었다.
오러를 제법 능숙하게 다루며,‘경’이라는 호칭에 자연스럽게 반응을 한다. 빌리스의 경우를 보면 알지만, 이 옆의 기사 베일은, 기사들이 풍기는 숨길 수 없는 기도를 확실하게 지니고 있었다.
수염을 문지르던 제록이 그를 더 이상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아 말을 돌렸다.
“이곳이 일명, 노란 물결의 대지입니다. 이 아름다운 길 때문에 예전에는 루지아로 관광을 오는 귀족분들도 제법 계셨답니다.”
이름그대로 그들의 앞에는 길게 이어긴 관도를 빼고는 노란색 풀잎들로 덮인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의 말을 받아 오든이 물었다.
“제법 관도가 잘 정비 되어 있네요. 여기도 마물들이 자주 나오나요?”
사실 그는 아버지의 편지를 들고 도망칠 때, 이곳을 지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이곳은 노란 풀잎들로 덮여 있었다. 그때는 지금보다도 더 짙은 노란풀잎들이 시야를 가릴 정도로 높게 자라나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때 같이 길을 가던 사람들도 그다지 마물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예전보다는 그 수가 늘었지만, 아직 푸에린의 황무지만큼은 아닙니다. 그래도 안심해서는 안 되지요. 그 보다는 요즘 들끓고 있는 도적들이 더 성가신 존재들입니다.”
“도적이요?”
레이진이 생소한 단어에 반응을 보였다.
중원에서는 도적들이 제법 존재했다. 민초들이 기근이나 폭정을 못 견디어, 혹은 범죄자들이 몸을 숨기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 도둑질을 일삼는 일이 잦았다.
그 중에는 무림세력만큼의 세를 이루어 자기들끼리 녹림이라 이름을 붙이기도 했고, 녹림쌍부와 같은 자칭 녹림의 왕이라는 걸물들이 등장할 때에는 녹림십팔채같은 제법 탄탄한 조직도 갖추어 천마신교조차 무시하지 못할 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은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미지의 대륙 유프레시아. 도적들이 세를 이루려고 해도 사람보다 마물을 견디기 힘들어 세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도시의 점조직이나 소매치기범같은 작은 조직들이 있을 뿐, 정부의 테두리를 벗어난 독자세력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흥미로운 이야기여서 레이진도 귀를 기울이게 됐다.
“공국이 들어선 이후로 그런 자들이 종종 나타나지요. 주로 대도시와 대도시를 잇는 관도를 중심으로 산적들이 출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파이완공국에 반기를 든 옛 로에나국의 반군들이 대부분일거라 추축합니다만, 자세한 정체는 아직 밝혀진 게 없답니다.”
얼굴을 찌푸리며 그가 덧붙여 말했다.
“우리 같은 상단 일을 하는 사람에는 마물만큼 껄끄러운 자들지요.”
제록이 설명을 끝마쳤을 때, 뒤쪽에서 작은 소요가 일어나더니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심해지고, 곧 상단이 움직임을 멈췄다.
제록을 향해 청년 한 명이 급히 뛰어왔다.
“리를리안가의 영애께서 잠시 마차를 세우셨습니다.”
“흠.”
제록이 눈가를 찌푸리며 말을 돌렸다. 리를리안가의 마차로 다가간 그가 마차를 살피고 있는 중년의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갈색의 덥수룩한 턱수염을 기른 중년의 기사가 어딘가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맞았다.
이번 센달행에 책임을 맡고 있는 리를리안가문의 브리스라는 이름의 기사였다. 옛, 리를리안이 후작의 직위를 지닌 로에나왕국시절에는 30명이 넘는 오러기사들이 있었으나, 가주가 변절을 한 이 후로, 그 수가 급격히 줄어 이제는 4명만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들 중에도 여전히 갈등을 하고 있는 기사들이 남아있었는데, 이 천방지축인 영애가 그 이유의 한 부분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이에게 그 속내를 내보일 수는 없는 일.
“영애께서 새로 구한 마차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고 하시오. 마차를 급히 마련하다보니 조금 문제가 생긴 것이니, 잠시만....”
그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꺅!
마차의 문이 열리며 검은색 시녀복을 입은 여인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마차에서 굴러 떨어졌다.
마차 문 앞에 선 줄리어가 여인을 향해 소리쳤다.
“넌, 센달에 도착할 때가지 마치에 탈 생각은 하지도 마!”
오른쪽 귀 한 편에서부터 흘러내려온 흑색 머리카락을 거칠게 빗어 넘기며 쓰러져있는 시녀를 향해 눈을 흘긴 줄리어가 문을 세차게 닫아 버렸다.
말에서 내린 기사 하나가 시녀를 일으켜 세웠다. 시녀는 얼굴 가득 원통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었다.
‘도대체가...’
아마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머리를 손질하던 시녀가 실수를 저지른 모양이었다. 제록이 어찌해야 하나, 알 수가 없어 기사 브리스를 돌아보니 그 역시 얼굴가득 노기를 띠운 채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제록이 고개를 저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5분 후 출발합시다.”
그 후, 상행은 계속 되었지만, 그와 비슷한 이유로 마차는 몇 번, 더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귀족의 행사에 토를 달수는 없는 일.
마차에서 세 번째 시녀가 쫓겨날 때쯤, 마차는 거대한 석상이 반쯤 묻힌 채 노란 들풀들에 싸여 유적답지 않게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옛 유물 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야영준비를 합시다.”
보통 점심 때 쯤 이곳에 도착해 1시쯤에는 출발을 해야 했는데, 계속 늦어지다 3시간 넘은 시간에 도착을 하고 말았다. 시간은 어중간해졌지만, 식사를 빨리 끝낸다고 해도 다음 유적까지 해지기 전에 도착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고 유적이 아닌 길에서 노숙을 한다는 건 그들로써는 금기 사항. 어쩔 수 없이 천막을 치고, 점심 겸 저녁 준비를 했다.
“작년 가을에도 이러시더니...., 내일은 조금 일찍 출발을 합시다.”
또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지면 안 된다. 제록의 말을 들은 브리스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진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상행 사람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 먼 평야로 옮겼다. 오래된 석조 기둥에 기대앉아 노란 대지 위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곁으로 오든이 다가왔다.
“세상은 참 불공평한 것 같아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오러검사가 되고 나니까. 상단사람들이 식사당번에서 제외를 시켜줍니다.”
하하, 하고 웃던 레이진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럼, 내가 가야하는 거 아니야?”
“아참! 소영주님도....”
그 사이 음식을 준비하던 바이델른상단의 무리들 속에서 베네크가 바이델른상단의 짐꾼 두 사람과 함께 식판을 들고 다가왔다.
“같은 오러기사인데 베일님은 식판을 들고 다니시네?”
“아, 진짜!”
벌떡 일어난 오든이 베네크에게로 뛰어가 식판을 받아들었다.
잘 구어 진 염소 다리가 세 개 담겨있었다. 적포도주도 한 병과 제법 신선한 과일도 몇 개나 있었다.
“포도주까지 주네. 그래서 출세를 하라는 건가 봐요.”
“너무 고깝게만 생각하지 마라. 오든, 오러기사이기 때문에 받는 것도 있지만, 마물을 만나거나 상단이 위험에 처했을 때, 그들을 지켜주는 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야. 그러니 그때 잘 하면 된다.”
베네크의 말에 오든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리를리안 가문의 마차 주위에서 또다시 줄리어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걸 나보고 먹으라는 것이냐?”
머리에 노란 치즈스프를 뒤집어쓴 시녀가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앉아 있었다. 그 앞에 콧김을 씩씩 내 뿜으며 소리를 지르고는 내쳐 자신의 앞에 펼쳐진 수건까지 집어 던진 줄리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마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 여자 또 시작했네.”
오든이 신경질적으로 고기를 뜯었다. 염소를 두 마리 잡았다고 했는데 세 개의 다리가 자신들에게 와있었다. 특혜는 엄청 난 특혜였다.
“저러니 저 나이에 결혼도 못하고 있지. 스물일곱이라던가?”
“스물다섯.”
레이진이 스프를 떠넘기며 말했다.
“잘 아시나봐요?”
“몇 번 본 적이 있지.”
“원래 저랬어요?”
오든의 물음에 레이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글쎄? 예전 일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때는 다들 어렸고, 지금은 시대도, 각자의 처지도 모두 변했다. 딱히 탓을 할 이유도 없었다.
“허긴 다른 귀족 앞에서는 안 그러겠죠.”
“로에나 왕국에 망조가 들기는 들었던 모양입니다.”
또 다시 어느 틈에 나타난 제록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오든이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이다 레이진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였다.
오든과 베네크 옆에 껴 앉은 그가 포도주병을 들어 나무잔에 따라 마셨다.
“자작영애의 성격은 매번 겪으면서도 적응이 되질 않는군요.”
“바이델른 상단을 자주 이용하나봐요?”
오든의 질문에 그가 다시 포도주를 나무잔에 따르며 말했다.
“아! 모르시는군요. 저희 바이델른 상단이 센달의 영주 레이델 가의 소유입니다. 리를리안가와는 사돈 간, 이죠. 줄리어영애의 외할아버지십니다. 레이델 자작이.”
새로 알게 된 사실에 놀라고 있는 세 사람에게 그가 덧붙여 말했다.
“파이완공왕에게 바친 수만골드를 바이델른이 보태주었습니다. 리를리안가에게는 가문의 은인인 샘이죠.”
또 다시 목소리를 낮춰 말을 속삭이고는 제록이 다시 덧붙였다.
“뭐 그 덕분에 저희 상단이 지금은 3대 상단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어딘가, 씁쓸한 표정으로 자랑을 늘어놓은 그의 애매한 눈빛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 작가의말
또 늦었네요...
제 3장이 너무 긴네요. 속제목을 바꾸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