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의 제국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을령
작품등록일 :
2019.04.01 21:32
최근연재일 :
2019.07.31 21:32
연재수 :
82 회
조회수 :
120,908
추천수 :
2,088
글자수 :
472,916

작성
19.04.27 19:28
조회
1,645
추천
29
글자
12쪽

제4장 - 왕의 길 - 2

DUMMY

어쩐 일인지 날개가 지워진 드래곤이 그려진 나무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을 연 기사는 레이진에게는 눈길 한 번을 주지 않고 그가 방안으로 들어서기를 기다렸다.


방은 생각보다 작았다.

창은 모두 붉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고, 대신 벽과 탁자 위에 듬성듬성 놓인 희미한 촛불이 방을 겨우 밝히고 있었다.

습한 공기 속에, 곰팡이 냄새와 살 썩은 냄새가 섞여 풍겨오고, 그 속에 레이진의 코끝을 자극하는 익숙한 향이 느껴졌다.

푸에린의 소영주 자일의 매음굴에서 풍기던 향.

그러나 레이진의 시선은 한 곳, 얇은 휘장이 사방을 두르고 있는 침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침대 위에서 검은 실루엣이 몸을 일으켰다.

휘장 속 실루엣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자 침대 앞의 휘장이 양쪽으로 걷힌다. 두 명의 시녀가 침대에서 할 걸음씩 물러났다.

발가벗은 채, 피가 잔뜩 묻은 하얀 천으로 음부만을 가린 금발머리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헝클어진 금발로 얼굴의 반을 가린 남자가 드러난 한 쪽 눈을 치켜 뜬 채 앞에 선 레이진을 노려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루지아트 폰 로에나

로에나 왕국의 제1서열 왕위계승권자인 왕세자.

레이진을 응시하던 루지아트의 입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레이진. 살아있었구나.”


레이진이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신 레이진 아이오스, 리아누스의 땅, 왕국의 주인 루지아트 폰 로에나 전하를 뵙나이다."


루지아트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검은 대나무파이프를 입에 문다. 파이프를 숨끝까지 빨아 낸 후, 다시 검은 연기가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자네 집도 홀딱 타버렸다더니 용케 멀정하군. 몸은 괜찮은가?”


“네, 다행이 ...”


루지아트가 큭큭, 하며 가래가 끊는 소리로 웃었다.


“좋아, 축복받은 게야. 오러 따위야 없으면 어때. 다친 데만 없으면 된 거지.”


뭐가 우습다고 그는 숨이 넘어갈 듯 배를 잡고 웃었다. 그리 한 참을 웃다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를 보게.”


그가 금발의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자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 반쪽이 드러났다. 이마에서부터 볼까지 마치 얼굴 반쪽이 사라진 듯 움푹 들어가 있고 눌러 붙어 한쪽 눈은 떠지지 않았다.

한참을 웃어대던 루지아트가 대나무 파이프를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시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시녀가 급히 대나무파이프에 불을 붙여 루지아트에게 건넸다.


“그리 불쌍하게 보지 마라.”


레이진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는 전혀 그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뭐랄까 아무런 감정없이 너무 덤덤해서 스스로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어릴 때부터 제법 친하게 지냈으며, 아밀리아공주의 오라비가 되는 사람인데. 어찌 이리 무감각할 수 있는 건지.

이것도 레이진과 독고진의 감정이 충돌을 일으키는 부작용인 걸까?


잠시 상념에 젖은 사이 루지아트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밥은 혼자 먹는다. 똥 오줌을 못가려....크크... 그렇지!”


자신의 무릎을 치며 또 웃기지도 않은 헛웃음을 웃어댔다. 그의 손이 다리를 칠 때마다 삐적 마른 다리가 힘없이 흔들린다. 허리를 굽힌 채 배를 잡고 웃어대던 그의 뭄이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시녀가 달려와 간신히 바로 잡아 앉히니 루지아트가 그런 시녀의 얼굴을 손으로 세게 밀쳐내며 대나무파이프를 흔들었다.


“이게 없으면 살 수가 없다. 그 고통을 누가 알까? 그런데 이 약까지 제국에 다 넘긴다는군. 저 파이완 개새끼는....”


떨리는 손으로 대나무 파이프를 힘껏 빨아 마시고서 그가 레이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레이진 이제부터 네가 아리오스가의 가주다. 아리오스 공작.”


레이진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성은은 무슨, 왕도 아닌데. 가문의 반지는 잃어버렸겠지? 아반 노인네한테 반지 하나 맞춰달라고 해.”


“성은이...”


“시끄럽다. 물러가라. 밖에 있는 계집은 네가 좀 처리해 줘. 꼴도 보기 싫으니.”


레이진이 고개를 들었다.

이미 총기를 잃은 눈.

입 사이로 흐르는 침을 닦아내고 있는 시녀를 밀쳐내며 루지아트가 그녀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겨우 중심을 잡고 선 시녀가 새로 마약에 불을 붙였다.

파이프를 입에 문채 침대에 몸을 기대고 눕는 루지아트를 바라보다 문득, 오래전 아밀리아공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기사가 못되다니 아쉬워. 레이진.

- 죄송합니다.

- 아니, 레이진이 미안해 할 일이 아니야. 다만, 우리 큰오라버니 대에 아리오스의 힘이 약해진다는 게....

- 큰 오라버니시라면, 루지아트 전하말씀입니까?

- 응, 그분이 왕위에 오르시면 로에나는 제국에 이리 끌려다니 진 않을 거라고...

- 국왕폐하께서 들으시면...

- 아바마마께서 하신 말씀이야.



레이진이 자신을 바라보지도 않는 루지아트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고서 일어나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침대에 몸을 눕히던 루지아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부탁이 하나 있다 레이진.”


레이진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한참동안 기침을 내뱉느라 루지아트는 금방 말을 잇지 못했다. 루지아트의 시선은 천장의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옛정을 생각해서 말이다. 레이진.”


시녀가 건네는 마약을 깊게 빨아 마신 그가 검은 연기와 함께 말을 뱉었다.


“다음에 올 때는 제발 나를 죽여다오.”




문이 닫혔다. 레이진은 한동안 닫힌 문을 응시하고 서 있었다.

로에나 왕국에 희망은 없다.

내일 타노야로 떠난다.

레이진이 결정을 내렸다

그런 레이진의 결심을 알 리 없는 기사는, 루지아트와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것인지 눈빛마저 달라져 있었다. 조금 전, 강압적이던 태도는 사라지고 고개를 숙이고서 가만히 서 있었다.

고개를 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저대로 한동안 서 있겠지.

그런 기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레이진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줄리어 넷 리를리안이 레이진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아리오스 공작.”


“네.”


그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을 마치자 그녀의 시선이 닫힌 문으로 옮겨갔다.


“난 만나주려고도 하질 않으시네요.”


순간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입술을 깨물며 잠시 온몸에 힘을 쥐어 짠 그녀가 다시 레이진에게로 고개들 돌렸다.


“아직 심신이 회복 되지 않으셔서 그럽니다. 강한 분이시니 일어나실 거예요.”


흘러내려 온 검은 머리카락을 몇 번, 매만지는 사이, 눈가의 눈물은 사라져 있고, 떨리는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 여인은 대체 무슨 허상을 쫓고 있는 것일까?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레이진에게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어보인 그녀가 말없이 몸을 돌렸다.

어느새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당당한 걸음으로 나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제야 줄리어 넷 리를리안의 모습이 비로소 제대로 보였다.

다시 아밀리아공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 오러 같은 건 필요 없어. 레이진. 줄리어 언니를 봐. 그런 것 없이도 저리 강할 수 있잖아? 줄리어 언니가 루지아트 오라버니와 함께 할 테니. 로에나는 영원할 거야.


레이진이 다시 한 번, 루지아트의 방문을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줄리어의 뒤를 따르며 그가 낮게 되뇌었다.


“줄리어, 만약 당신이 그를 돌려놓을 수 있다면.”




* * * *


마을 광장에 우둑 서 있는 세 개의 저택 중에 오른 쪽 저택 3층에 제법 넓은 회의실이 있다. 그곳이 오랜만에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다.

길게 늘어 선 탁자에 각각의 이름표가 붙어 있고, 대표로 앉은 사람 뒤에는 서 너 명의 가신들이 호위하듯 서서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이 앉아있는 탁자 맞은편에 놓인 단상으로 붉은 로브를 입은 노마법사가 걸어와 섰다. 하얗게 센 수염을 손으로 몇 번 쓰다듬고서 그가 입을 열었다.


“의기로운 로에나 왕국의 투사 여러분. 갑작스럽게 모이시라 부탁을 드리게 되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안이 사안인 지라, 한시도 늦출 수가 없어 이리 시간을 빼앗게 되었습니다. 거듭 죄송한 말씀을 드리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노마법사 바우안스가 말을 마치자 소란스럽던 장내의 소음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자 바우안스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아시다시피 5년 전 화마로 인해 일가족이 목숨을 잃었다 전해진, 아리오스가에서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데아르젠 덴 아리오스공작각하의 아드님인 소영주, 레이진 아리오스가 살아 돌아왔습니다. 조금 전, 루지아트 전하로부터 공작 위를 수여받으셨으니, 이제 아리오스가의 가주가 되시겠지요. 그리고 그와 함께 안 좋은 소식도 들으셨겠지요? 그날의 참극을 일으킨 범인이 밝혀졌습니다. 아시다피 볼튼 아리오스. 데아르젠공작각하의 동생인 그가 그날의 참극을 벌인 범인임을 레이진 덴 아이오스 공작이 증언했습니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일 텐데도 장내가 떠들썩해졌다. 잠시 뜸을 들인 바우안스가 맨 앞좌석에 오든과 베네크의 호위를 받으며 앉아있는 레이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아리오스 공작을 소개하겠습니다.”


레이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둘러봤다. 사람들의 시선이 레이진에게 모여들었다. 그다지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루지아트 왕자님으로부터 새로 아리오스가의 가주로 승인 받은 레이진 덴 아리오스공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레이진이 말을 마치자마자, 레이진의 끝 쪽, 좌석에 앉은 노인이 손을 들어 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반갑소. 레이진경. 나는 칸세르의 영주 발콘 백작이오.”


칸세르는 아리오스의 옛 영지 타노아와 지역을 맞대고 있는 곳이었다.

그가 백작이 되었나?

자작으로 알고 있었으나 백작이 되었다니 그런 거겠지.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레이진을 향해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헌데 이상한 것이 있소. 레이진경.”


처음에는 그렇다고 해도 두 번째까지 아리오스공작의 호칭을 쓰지 않았다. 베네크와 오든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로는 볼튼 덴 아리오스경은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모진 고문을 받았다고 하오. 그것은 여러 증언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고. 지금도 타노아에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오.”


그의 말에 다시 장내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말을 이었다.


“그대는 그대의 증언에 증명을 할 만한 것을 내어 주어야 하지 않겠소?”


레이진의 시선이 단상 아래 바우안스에게로 향했다. 이곳에 오기 전 바우안스가 한 말이 떠올랐다.


- 루지아트 왕세자를 아직 왕위에 올리지 못했네. 왕세자가 왕위를 거부하는 것도 있지만, 루지아트 왕세자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세력들 때문이네. 그들은 시우르토 라는 자를 왕위에 앉히려고 하네. 전 전대 로에나 왕의 셋째 아드님의 서자의 자식일세.


지금 이곳에 모인 인원이 서른 명, 모두 왕당파를 지지하다 파이완 공왕에게 쫓겨 온 자들이었다.

섬 전체에 들어선 인원이 이천 명 정도이고 그중 서른 명 정도의 귀족.

그리고 오러기사가 오십 명이 채 되지 못했다. 멸문하기 전 아리오스가문에만 오러 기사가 백 명이 넘었다.

고작 이 만큼의 인원으로 공왕에게 대항해야 하는 상황에 여기서 세력싸움이라니.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레이진이 발콘을 바라보며 말했다.


“발콘 경! 내가 그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어찌 되는 겁니까?”


레이진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그가 말했다.


“그것을 증명 할 때 까지, 그대는 이 섬에서 단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소.”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천마의 제국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주기 변경공지 입니다. 19.05.27 265 0 -
공지 연재주기 공지, 감사인사드립니다. 19.04.13 1,737 0 -
82 제 11 장 - 점의 고양이와 왕국의 운명 - 1 +1 19.07.31 419 12 13쪽
81 제 10 장 - 타노아의 작은 일상들 - 13 +1 19.07.27 382 13 14쪽
80 제 10 장 - 타노아의 작은 일상들 - 12 +1 19.07.25 372 10 13쪽
79 제 10 장 - 타노아의 작은 일상들 - 11 +1 19.07.22 399 13 15쪽
78 제 10 장 - 타노아의 작은 일상들 - 10 +2 19.07.19 498 15 13쪽
77 제 10 장 - 타노아의 작은 일상들 - 9 +1 19.07.16 513 11 12쪽
76 제 10 장 - 타노아의 작은 일상들 - 8 +1 19.07.12 538 12 17쪽
75 제 10 장 - 타노아의 작은 일상들 - 7 +1 19.07.12 559 12 14쪽
74 제 10 장 - 타노아의 작은 일상들 - 6 +1 19.07.09 559 11 16쪽
73 제 10 장 - 타노아의 작은 일상들 - 5 +4 19.07.07 618 12 13쪽
72 제 10 장 - 타노아의 작은 일상들 - 4 +1 19.07.04 697 12 14쪽
71 제 10 장 - 타노아의 작은 일상들 - 3 +2 19.07.03 768 13 13쪽
70 제 10 장 - 타노아의 작은 일상들 - 2 +1 19.07.01 696 16 12쪽
69 제 10 장 - 타노아의 작은 일상들 - 1 +1 19.06.29 817 20 12쪽
68 제9장 - 반격을 시작할 때 - 10 +2 19.06.27 792 20 10쪽
67 제9장 - 반격을 시작할 때 - 9 +2 19.06.25 798 17 12쪽
66 제9장 - 반격을 시작할 때 - 8 +1 19.06.23 852 17 14쪽
65 제9장 - 반격을 시작할 때 - 7 +1 19.06.22 835 18 11쪽
64 제9장 - 반격을 시작할 때 - 6 +1 19.06.21 815 17 12쪽
63 제9장 - 반격을 시작할 때 - 5 +1 19.06.19 919 19 13쪽
62 제9장 - 반격을 시작할 때 - 4 +1 19.06.18 907 17 13쪽
61 제9장 - 반격을 시작할 때 - 3 +1 19.06.18 961 21 16쪽
60 제9장 - 반격을 시작할 때 - 2 +1 19.06.14 998 20 12쪽
59 제9장 - 반격을 시작할 때 - 1 +2 19.06.13 1,101 21 14쪽
58 제8장 - 타노아의 주인 - 9 +2 19.06.10 1,033 21 15쪽
57 제8장 - 타노아의 주인 - 8 +1 19.06.08 1,143 22 13쪽
56 제8장 - 타노아의 주인 - 7 +1 19.06.07 1,034 23 12쪽
55 제8장 - 타노아의 주인 - 6 +2 19.06.05 999 22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