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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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령
작품등록일 :
2019.04.01 21:32
최근연재일 :
2019.07.31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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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28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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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제4장 - 왕의 길 - 3

DUMMY

“그것을 증명할 때까지 그대는 이 섬에서 단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소.”

조용했던 장내가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레이진의 시선은 발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잠시의 대치상황이 이어지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레이진이 발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를 잡아두겠다고? 당신이?”


발콘의 눈에는 나른 한 표정의 레이진이 더없이 건방져보였다.


“당신?”


발콘이 인상을 구기며 레이진을 노려본다. 그의 뒤에 서있던 세 명의 기사가 당장이라도 검을 빼들 듯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베네크과 오든도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발콘에게 향해있던 시선을 돌려 잠시 주위를 둘러본 레이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인가?”


그의 질문에 다시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발콘의 언사가 억지라는 사람들과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소곤거렸다. 가만히 중립을 지키는 자들과 레이진의 건방진 태도를 문제 삼으며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다.

다시 시끄러워진 실내에서 레이진이 고개를 저었다.

한심스러운 자들.

그때 바우안스가 장내를 정리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 발콘백작, 아리오스공작, 모두 진정하시오. 그리고 아리오스공작이 결백을 증명하는 일은 필요치 않소. 아리오스 공작의 말은 내가 보증을 서겠소. 내 이름을 걸고.”


잠시 바우안스를 바라보던 발콘이 크게 헛기침을 내뱉고서 자리에 앉았다.

아무리 임시로 대표를 맡고 있는 중이라고 하지만 대마법사 바우안스의 이름은 너무나 높았다.

자리에 앉은 발콘이 덧붙여 말했다.


“분명히 이 섬 어딘가에도 파이완의 세작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는 작은 것 하나라도 의심해야하오. 잠시 방심한 사이에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소. 자식도 가솔들도 영지민도! 그날의 교훈을 잊지 마시오.”


“오르신 말씀이외다.”


고개를 끄덕이며 바우안스가 레이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리오스공작도 발콘 백작의 심정을 이해해 주시오. 모두 견디기 힘든 절망을 겪은 후이니. 밤새 잠도 못 주무신 걸로 알고 있소. 아리오스공작, 오늘은 먼저 들어가 쉬셔도 되오.”


레이진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돌아서 밖으로 나왔다. 그의 모습에 다시 장내가 잠시 술렁거렸지만 그는 계의치 않았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습니까? 이러면 누가 이곳에 도와주러 온단 말입니까?”


오든이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게 말이네. 정치가 그런 거긴 하지만 지금이 정치를 할 시긴가? 하나같이 정신들이 나갔구만.”


침착한 베네크도 굳어진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차라리 잘됐어. 실체를 알고 나니 떠나기도 한결 홀가분할 거 같아.”


“떠나시려고요?”


오든도, 발콘의 말을 듣고 욱하는 감정이 솟아오르기는 했지만, 또 여기를 떠나 세 사람이 일을 도모한다는 건 다른 이유로 버거운 것이었다.

그렇다고 주군이 이런 푸대접을 받은 상황에 그를 말릴 수도 없는 일이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마음만 답답해졌다.


“당장 가자는 건 아니고.... 우선 좀 쉬면서 생각을 정리해 봐야겠어.”



* * * *


새벽 녁.

왕국군의 기지 안, 중앙 광장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길게 줄을 늘어선 사람들이 각자 손에 대바구니를 들고 조금씩 줄어드는 줄을 따라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마다 이곳에 정착한 주민들은 광장에서 그날 하루의 식료품을 보급 받았다.

왕과 대귀족이 아니라면, 그것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평등하게 나누어졌다.


올해 15살의 나이가 된 케로크는 아침마다 줄을 선 주민들에게 음식들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오늘 그가 나누어 줄 것은 사과.

앞에서부터 빵과 고기, 그리고 달걀을 받아오면 그가 마지막으로 사과 두 개를 바구니에 담아주고 오늘의 배식이 끝이 났다.

새벽에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야 하는 것이 고될 뿐, 로에나 왕국의 국민으로써 이곳에 피난 온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그는 보람을 느꼈다.

오늘도 그는 친절한 미소와 함께 사과를 나누어줬다.

줄어드는 사과를 보니 이제 곧 끝이 날 것 같았다.

그가 피곤한 기색을 지우며 얼굴을 들어 인사를 건네려다 입을 닫았다.

갈색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여인이 푸른색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가가 찌푸려졌다. 심술이 난 그가 벌레가 먹어 잔뜩 썩어 들어간 사과 두 개를 집어 쓰레기를 버리듯, 여인의 바구니 안으로 던져 넣었다.

사과 하나가 여인의 계란 위로 떨어지며 달걀이 깨졌다. 설상가상으로 다른 하나의 사과는 바구니의 끝에서 튕겨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여인이 그의 얼굴을 노려보며 서 있었지만, 그는 모른 척, 다음 사람에게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잠시 자신을 응시하던 여인이 긴 한숨과 함께 허리를 숙였다. 그때 그녀보다 먼저 다가온 누군가가 바닥에 떨어진 사과를 주워 여인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사과를 건네받은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앞에 붉은 머리카락의 청년이 서있었다.

청년의 청록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을 달싹거리다 입을 닫은 그녀가 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청년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이보시오! 길을 막고 있을 거요?”


괜히 심술이 난 케로크가 청년에게 핀잔을 섞어 말했다.

자신을 돌아보는 청년의 청록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갑자기 가슴이 쿡, 막혀오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으로 가슴을 몇 번 쓸어내렸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다시 고개를 드니 이미 눈앞에 청년은 사라지고 없었다.

바구니를 내미는 노파에게 사과를 건네는 그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광장을 빠져나온 여인은 깨진 달걀물이 흐르는데도 지체하지 않고 언덕길을 올랐다.

산이라고 부르기에는 낮은, 섬의 언덕 위에서는 지금도 집을 짓기 위해 나무를 베어내고 있었다.

곳곳에 놓인 통나무들을 피해 거침없이 걸어가던 그녀가 결국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잠시 서서 숨을 고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쫓아 올 거야?”


그제야 뒤에서 그녀를 따라 걷던 청년, 레이진도 입을 열었다.


“난 섬을 둘러보는 중이야. 난 어제 여기 왔거든.”


여인이 잠깐 고개를 돌려 레이진을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익숙한 듯, 능숙하게 언덕을 올라 그녀가 언덕 꼭대기에 홀로 서 있는 작은 오두막집 안으로 들어갔다. 레이진이 채 따라 붙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세차게 문을 닫아 잠갔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닫혔던 문이 조금 열렸다. 여인이 문 앞에 선 레이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하자는 거야?”


“오랜만이잖아, 우리. 인사 정도는 해도 되지 않아? 에르난디!”


여인이 문틈으로 레이진의 청록색 눈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잠시 뒤 큰 한숨소리와 함께 문이 열었다.


레이진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여인, 에르난디의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바우안스의 오두막만큼이나 정갈한 살림살이로 채워진 오두막이었다.

모양 없이 대충 만들어진 네모 난 탁자 위에 방금 배식을 받아온 바구니가 놓여있고, 그 옆에는 닦다만 장검 한 자루와 가죽 갑옷이 포개어진 채 놓여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쪽 벽에도 각기 다른 모양의 검들이 나란히 걸려있고, 방패와 창들이 가지런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여인의 집이라고는 생각되어지지 않게, 집 안에는 각종 무기들로 가득 차있었다.

집을 둘러보고 있는 레이진을 놓아두고 에르난디는 문 옆, 작은 공간에서 만들어진 마구간으로 들어가 혼자 고개를 내밀고 있는 백마에게 여물을 먹였다. 먹이를 주고, 백마의 털을 빗질해 주는 에르난디를 레이진은 가만히 의자에 앉아 바라봤다.


오랜 시간을 백마에게 쏟아 붙고 나서야 마구간을 나온 에르난디가 탁자 위에 놓인 바구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또 그렇게 잠시동안 탁자를 정리하던 에르난디가 빵 하나를 레이진에게 내밀었다.


“먹을래?”


레이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딱 네 몫이잖아. 근데 왜 줄을 서서 배식을 받아 먹어?”


“그게 왜?”


“어제 회의에는 참석했잖아?”



어제, 회의석상에는 이 섬 안에 있는 모든 귀족들이 참석했다. 그리고 그녀도 구석자리였지만, 한 편에 놓인 자신의 이름표가 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비록 다른 귀족들처럼 여타의 호위나 가신들도 없이 홀로 앉아 있었지만 분명 버젓이 회의에 참석한 것이었다.

적어도 모두 그녀를 귀족으로 인정한다는 뜻.

그렇다면 그녀는 귀족의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에르난디는 잠시 입을 다물고서 서 있었다. 할 말이 없어서다.


“내가 편하면 된 거지. 넌 못된 버릇이 생겼네.”


“신선하다. 보통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은 죽었다 살아 돌아왔다며 반기는데...”


“어제 봤잖아.”


에르난디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반가워, 레이진, 어제도 너 보러갔었어. 믿어지지 않아서.”


“응,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 근데 널 여기서 본 것도 사실 만만치 않게 믿어지지 않는 걸. 에르난디 덴 아루카.”


레이진의 아버지, 아리오스공작이 한 팔을 잃은 이후, 로에나의 유일한 소드마스터였으며, 그날, 파이완 공작을 도와 파이완을 왕으로 세우고 왕국을 무너트린 배신자 베론 덴 아루카공작. 그리고 그의 딸 에르난디.


“비난을 하려면 해. 이젠 귀에 못이 박혔어.”


에르난디가 눈을 흘겼다.


“아니! 전혀 그런 의도는 아니야. 에르난디. 그냥 널 여기서 보게 될 줄을 몰랐으니까. 어떻게 된 거야?”


“보는 대로... 집을 나왔다.”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레이진이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 시선을 피해 혼자 창밖을 응시하다가, 괜히 다시 긴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그녀가 탁자 위에 올린 두 손을 꼭 쥐었다.


“아침에 배식을 하던 그 어린아이는 바우안스님의 영지민이였데. 아버지가 식당을 했다나...? 영지가 습격을 당했을 때, 가족이 모두 죽었대. 그 때, 바우안스님의 영지를 쳐들어간 사람이 우리아버지였어. 바우안스님의 아들과 손자, 손녀 그의 가솔들, 영지의 영지민들을 모두 우리 아버지가 죽였어. 소드마스터나 되는 사람이... 정말이지...”


말을 할수록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난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 아버지가 조국을 배신했다는 게...”


탁자 위에 놓인 주먹 쥔 그녀의 두 손도 부르르 떨렸다. 굳은살이 잔뜩 베긴 거칠어진 손이 레이진의 눈에 들어왔다. 검을 들어 본 자는 안다. 저만큼의 굳은살이 의미하는 노력의 크기를.


여인임에도 그녀는 검을 들었다. 그녀의 남자형제들도 모두 그녀의 노력에 혀를 내둘렀다. 불과 몇 년 전, 그녀의 오라비들이 오러를 느끼기 전까지 그들 중 누구도 에르난디를 당해내지 못했다. 그녀는 아버지처럼 멋진 기사가 되고 싶었다.



“우습게도 말이야. 레이진. 어제 회의에 참석한 건, 다른 이유였어.”


레이진의 청록색 눈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쓸쓸함이 피어났다.


“난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어. 너의 숙부, 볼튼 아리오스가 너희 가족에게 그리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파이완에게 붙었다는 말을 듣고 나서, 있잖아. 내 마음이 조금 편해지더라.”


“그래서 그걸 확인하려고?”


“응.”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일그러진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이해해.”


에르난디가 레이진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이해해?”


“응, 충분히.”


그녀가 굳은살이 낀 거친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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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제 10 장 - 타노아의 작은 일상들 - 1 +1 19.06.29 817 20 12쪽
68 제9장 - 반격을 시작할 때 - 10 +2 19.06.27 792 20 10쪽
67 제9장 - 반격을 시작할 때 - 9 +2 19.06.25 798 1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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