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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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령
작품등록일 :
2019.04.01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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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31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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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5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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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 루벤의 어린영주 - 2

DUMMY

외손자는 자신의 딸과 똑 닮아있었다. 그의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아슬린백작의 눈에 결국 눈물이 고였다.

야만족과의 전투로 한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그가 보여주는 눈물이어서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들의 심금을 더욱 세차게 울렸다.

검을 놓은 탓인지 외손자의 몸은 검가의 직통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말라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되었다. 건강하게 살아 돌아왔으니... 아리오스가의 대를 이을 수 있으면 된 것이야.”


외할아버지의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간간히 분홍빛을 비치며 변했다. 어머니의 얼굴이 투영 된 외할아버지의 모습에 레이진도 가슴 깊은 곳에서 깊은 울렁임이 느껴졌다.

한동안 그의 마음속을 잠식하던 전생과의 괴리가 외할아버지와의 만남으로 해소되는 듯 했다.


잠시 외손자를 바라보며 감성에 젖었던 아슬린 백작이 자신의 뒤에선 금발의 청년을 소개했다.


“레이진. 인사하거라. 곧 우리 아슬린가를 물려받아 새로 영주가 될 루마로 젠 아슬린 이다.

청년이 얼굴가득 환한 미소를 띠운 채 악수를 청했다.


“루마로요. 반갑소. 아리오스경. 아버님께서는 아리오스가의 비보를 늘 안타까워 하셨지. 이리 살아 돌아와 아버님의 짐을 덜어주니 나또한 기쁘기 그지없구려.”


레이진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청년은, 그러나 본인이 숙부의 자리에 있기 때문인지 목소리부터 저음으로 깔리며 시종일관 어색한 말투로 그를 대했다.

자신의 손을 강하게 움켜잡는 어린 숙부를 담담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지만, 레이진의 속마음은 어딘가 편하지가 않았다.

외할아버지. 아슬린 백작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어머니의 남동생이 한 명, 있었지만, 어린나이에 전장에서 목숨을 잃고 할아버지는 더 이상 자손을 보지 않고 홀로 영지를 다스려왔다.

이제 육십을 갓 넘긴 나이, 내단을 지닌 아슬린백작의 육체는 범인보다 훨씬 더 건강하니 현역에서 물러나기에는 아직 이른 듯한데, 이렇듯, 양자를 들여 일찍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무리 애를 써도 반갑게 다가오지 않았다.


처음 보는 어린 숙부가 낯선 탓인가?

상념에 젖은 외손자를 아슬린 백작이 깨웠다.


“그 동안 어떻게 지낸 게냐?”


자리를 잡고 앉아, 레이진이 지난 이야기를 짧게 전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아슬린 백작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지만, 그의 눈빛 속에는 조금씩 분노의 기운이 떠오르고 있었다.


“파이완은 왕의 그릇이 아니거늘...”


누가 뭐라고 해도 아리오스가문은 로에나를 대표하는 제일의 가문.

아리오스가문의 멸문이 곧 로에나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아쉬운 건, 그 후대가 파이완이라는 사실.

그러나 아슬린가문의 가주는 왕조의 변화 따위에는 관심을 두고 않는 것이 전통이다. 그가 다시 한 번 레이진을 향해 격려를 보냈다.


“고생이 많았구나. 나도 로에나의 독립군이 조직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만...”


“그로인해 제 소문이 퍼지고 있는 모양이예요. 저를 사칭한 자들까지 등장을 하고 있으니.”


“너를 사칭한 자?”


아슬린 백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되물었다.

외할아버지가 왜 모르시지?


레이진이 의아해 하며, 설명을 이어가려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루마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요 근래 영지 주변에 그런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


아슬린 백작이 역시나 처음 듣는다는 듯, 루마로에게 되물었다.


“아버님께서 심려하시지 않을까 걱정되어 제 선에서 소탕작전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루마로를 바라보던 아슬린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일은 따로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해라. 영지 주변에서 아리오스가의 소영주가 욕을 먹고 있다면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그런 놈들이 왕국 전체에 퍼져있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레이진의 안위에도 자칫 위험이 전해질 수도 있어.”


“네!”


루마로가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아슬린백작이 다시 물었다.


“취임식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루마로가 레이진에게 눈길을 보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입을 뗐다.


“제른 자작가는 총사를 보냈고, 휘르잔자작가에서는 소영주가 영주님을 대신해서 길을 떠났다고 연락을 해왔습니다. 아마 내일 쯤 도착할 것 같습니다.”


“흥!”


아슬린 백작이 인상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썩을 매국노 놈들...”


그들은 수천 년 동안 이곳 아프산맥을 넘는 마물들을 처리하며 살아왔다. 그것은 로에나왕국 그 이전부터 계속 되어 오던 일로, 그들은 늘 왕조와는 상관없이 본인들의 터전을 지키며 세상일과는 무관하게 살아왔다. 그래서 아슬린가문은 대대로 중립을 표방했고, 어떤 왕조도 그것을 트집을 잡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의로움과 옳음의 기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공왕의 즉위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권력을 잡는 방법을 지지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거기다 그의 딸과 가족들이 그로 인해 희생 되었다면 더 곱게 넘어갈 수는 없었다.

아슬린백작이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레이진의 청록색 눈동자를 바라본다.


“그래 이제 어찌할 계획이냐? 어디 마땅히 의탁할 곳은 있더냐?”


“우선 부모님 묘역에 다녀온 후에 말씀드릴께요. 당분간 할아버지께 신세를 져야 할 듯한데 허락해 주시겠어요?”


순간, 루마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일부러 그를 도발한 터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레이진은 그의 표정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무슨 섭섭한 소리더냐. 네 집이라고 생각하고 편히 지내거라.”


아슬린 백작이 루마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루마로와는 나이도 비슷하고, 이제 영지의 일을 거의 이 아이가 맡아하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에게 말하거라. 루마로 자네도 레이진을 도와주는데 가문의 힘을 아끼지 말게.”


루마로가 담담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숙부님.”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루마로를 바라보는 레이진이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 * *


“한 달 전쯤인가 소문이 돌더니, 어느 날부턴가 가짜들이 판을 치더군. 자네의 소문을 조사하던 나도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어.”


금발의 청년이 고상한 자태로 양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레이진이 자신의 앞에 앉은 청년, 루마로 숙부를 바라본다.

나이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그러나 벌써 어엿한 내단을 생성한 제법 타고난 신체에 얼굴도 조각처럼 준수했다.

여섯 살에 부모를 잃은 그를 아슬린 백작이 직접 데려와 기사로 훈련을 시키고, 가문의 양자로 까지 들였다. 그야말로 외할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이 자리까지 선 사람이었다.

레이진이 마지막으로 루벤을 방문했던 때는 열 살 무렵. 그때는 그의 존재를 일지 못했다.

와할아버지의 사정도, 루마로의 성정도 무엇 하나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인데, 계속해서 머릿속 한 구석을 자꾸만 건드리는 이 불쾌한 기운은 무얼까?

내가 예민한 걸까?


“부모님 묘역을 참배해야겠지?”


레이진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의 유해를 영지로 모셔 온 것이 5년 전이지. 아슬린가의 가문묘역에 두 분을 모셨네. 당시에 아버님의 명령으로 자네의 비석도 세웠지. 내일 아침 식사를 마치고서 나와 함께 가세.”


다시 양고기를 썰어 입에 넣으려던 그가 동작을 멈추고서 얼굴 가득 측은한 빛을 내비치며 덧붙였다.


“어린나이에 고난의 시간을 겪었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나. 조금 더 일찍 찾아오지 않고...”


잠시 말을 끊은 그가 레이진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말을 이었다.


“허긴... 일찌감치 검을 놓았다지?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이던가? 가문이 잘못되려면 여러 가지 문제들이 겹치기 마련이지. 하여간 약한 몸을 끌고 이리 찾아오느라 정말 고생했네.”


레이진이 다시 한 번 감사인사를 전하고는 말을 돌렸다.


“영주 취임식이 3일 후던가요?”


“그렇네, 아버님께서도 연세가 있으시니, 이제 내가 본격적으로 도와드릴 생각이네.”


레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숙부를 많이 의지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가 모처럼 밝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더욱 노력해야지. 그래, 자네, 언제 나와 대련이라도 한번 하세. 큰일을 할 사람이 내단이 없다고 검술을 놓아서야 되겠나? 여기 있는 동안은 내가 지도를 해주겠네. 검가를 이을 사람이니 검을 아주 놓으면 안 돼.”


레이진이 가볍게 웃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리오스...”


레이진의 눈치를 살피며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일행 중에 붉은 머리를 한 여성분이 한 분 더 계시던데....”


“아! 헤라님 말씀이군요.”


“아... 해라. 이름이 해라로군. 그녀가 혹시 우리 가문과 연관이 있는가?”


레이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머리카락이 부럽다며 따라 변장을 한 것일 뿐.


“그녀는 아슬린가문과는 상관이 없는 분입니다. 그저... 타고 난 붉은 머리세요.”


“그렇군.”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 * *


아슬린 가문의 묘역은 영주성, 뒤편 언덕 위에 역시나 소박한 비석하나씩만 세워진 채로 마련되어 있었다.

천 년을 넘게 이어온 가문의 가족묘임에도 그 역시 그들의 성정처럼 소박했다.

수십 개의 비석들이 언덕을 덮고 있는 한쪽 구석에, 투박한 돌로 만들어진 타원형의 비석 세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기 자신의 비석을 내려다보며 레이진이 고개를 숙였다.

그를 따라 베네크도 오든도 헤라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역시나 담담히 추모의 시간을 보낸 레이진이 세 사람을 바라본다.

아침 일찍 자신과 함께 움직이겠다던 루마로는 보이지 않았다.

레이진이 가족 묘역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베네크경, 오든.”


레이진이 두 사람을 불렀다.


“두 사람은 먼저 타노아로 떠나서 그곳의 사정을 알아봐 줘. 칼트는 베네크경 혼자 만나보고, 절대로 칼트를 완전히 신뢰하면 안 돼. 베네크경은 다른 사람이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고, 오든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접근해 봐. 볼튼의 기사로 들어가도 괜찮고.”


원래 부모님의 묘를 들린 후에 모두 같이 떠나기로 했지만, 지금 이 불쾌한 기분을 털어내지 않고 떠나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두 사람에게 그가 덧붙여 말했다.


“나는 영주 취임식이 지난 후에, 조금 더 머물다가 헤라님과 타노아에서 합류하도록 할게.”


미간에 근심을 담고 생각에 잠겼던 베네크가 겨우 입을 연다.


“타노아까지 말을 달려도 열흘은 걸릴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헤라님의 실력을 알잖아? 나도 최대한 조심해서 갈게.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 절대로 무리하지 마. 볼튼은 쉬운 상대가 아니야.”


두 사람이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헤라를 바라보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드리겠소.”


베네크의 말을 이어 오든도 덧붙였다.


“내게는 국왕보다도 소중한 분이십니다.”


오든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거 같았다. 헤라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마세요.”


대체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두 사람이 더 걱정이지 레이진은 걱정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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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제 10 장 - 타노아의 작은 일상들 - 1 +1 19.06.29 817 2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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