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처녀 재벌 입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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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초낙타
작품등록일 :
2019.04.02 16:00
최근연재일 :
2019.05.28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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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9.04.26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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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쪽

소년 황등파의 리더

조선의 풍운아 허균과 최고의 의협셰프 한극 콤비가 펼치는 밥의 전쟁. 아스라히 묻혀버린 그들의 웅혼한 의지(意志)가 현대의 절대미각 소녀 한그루에 의해 되살아난다.




DUMMY

한 집 마당을 사이에 두고 살았어도 한그루와 정희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한 건 처음이었다.

정희네 가족이 드러나지 않게 낯을 가렸다.

아마 정희 엄마가 자식들을 그렇게 가르쳤으리라.


한그루 가족이 여러모로 마음을 썼지만 한 가족으로 어울리기는 어려웠다.

가능하면 종가의 신세를 지려 하지 않았다.

결벽증에 가까운 엄마의 성격이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부모와 언니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한그루는 부족한 게 없었다.

책과 학용품이 넘쳤다.

그래서 정희에게 살짝 나눠주곤 했는데 그런 호의를 부담스러워했다.


“오늘 정희, 정권이 너희들에게 건네줄 게 있다.”


그루 아버지가 벽장에서 나무상자를 꺼내왔다.

뚜껑을 여니 색바랜 한지(韓紙)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네 증조부의 서찰(書札)이다. 그동안 우리 가문이 간직해 온 유물인데 이제 너희들이 성장했으니 물려주마.”


아버지는 조심스레 서찰을 꺼내 읽어주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들어봤지? 우리가 지금 사는 호남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너희 증조부는 농민군을 거병한 남접의 지도자였단다. 학식이 높아서 동학군의 포고문(布告文)과 통문(通文)을 담당하셨다고 전해진다. 지금 이 문서는 동학군이 조정에 제시한 폐정개혁안이다.”


한자로 적힌 문서라 아이들은 알아보기 어려웠다.

동학군의 폐정개혁안은 정부에 시정을 요구하는 건의서다.


1. 동학교도와 정부는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2. 탐관오리 숙청

3. 횡포한 부호 처벌

4. 불량한 유림과 양반 처벌

5. 노비문서 소각

6. 7종의 천인에 대한 대우 개선, 백정이 쓰는 평량갓(平凉笠)을 없앤다.

7. 과부 재가 허락

8. 이름 없는 잡세 폐지

9. 인재 등용, 문벌 타파

10. 일본과 간통하는 자 엄벌

11. 공사채(公社債) 면제

12. 토지 평균 분작


아버지는 3,4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대목을 잘 봐라. 부자와 양반들을 처벌하자는 주장이다. 그 당시 우리 한씨 종가는 황등에서 가장 많은 땅을 가진 가문이었단다. 농민군의 타도 대상이었지.”


아이들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집안의 내력과 역사의 결합은 언제 들어도 흥미로운 법이다.


“그런데 우리 집은 무사했어. 우리 가문과 교분을 나누었던 네 증조부께서 불량한 부자가 아니고 농민들 편이라고 변호해주셨단다.”


정희, 정권 남매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한그루, 한송이, 한떨기 자매는 정희 남매에게 고마운 눈빛을 보냈다.


아버지는 두 가문의 뜨거운 연대(連帶)에 관해 계속 들려주었다.


“우리 가문을 혁명의 불길에서 구해준 거지. 동학혁명이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좌절됐을 때 너희 증조부께서는 장렬하게 자결하셨다. 그리고 남은 식솔들이 이 황등으로 온 거야.”


증조부는 세상을 뜻대로 바꾸지 못하고 떠나면서 한 씨 종가에 가족을 의탁했다.

서로를 구원해준 쌍방 배려였다.

그 뒤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만했다.


그때부터 정희 가족은 한 씨 종가 문간채에 뿌리를 내리고 산 거였다.

무려 4대째를!


“또 증조부님 뿐만 아니라 네 조부님도 한국전쟁 때 우리 종가를 지켜주셨어.”


정희 할아버지의 소문은 오래전부터 황등 사람들에게 불온한 안개처럼 떠돌았다.

그분은 전쟁 당시 덕유산을 드나들며 빨치산 활동을 하다 월북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6.25 때 인민군 치하에서 부르조아로 찍한 한 씨 종가를 결사적으로 지켜준 은인이라고 했다.


“너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이유를 알겠니?”


아버지가 정희, 정권에게 물었다.

남매는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증조부는 동학 혁명군, 조부는 빨치산, 시대를 잘못 만나 척박한 운명을 걸머진 분들이다. 그러나 당신들 판단에 따라 불의에 항거하신 분들이지. 그리고 고비 때마다 우리 종가를 지켜주신 은인들이야. 너희 할아버님들이 아니었으면 지금 이 기와집도 진작 불타서 사라졌을 거야. 그러므로 너희 가족은 이 집에서 편하게 살 자격이 충분해.”


한그루 자매들이 박수를 쳤다.

아버지가 상자를 정권에게 밀어줬다.


“정권이가 가장이니까 잘 보관해야 한다.”


정권은 얼떨결에 상자를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지금도 잘하고 있지만 송이, 떨기, 그루 너희들은 정희와 정권이를 형제, 자매로 여기고 더 아껴줘야 한다.”

“네!!!”


아버지가 정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권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정희 누나가 그냥 공부를 잘하는 게 아니야. 네 김씨 가문 혈통이 대단한 거지. 그러니까 정권이 너도 마음만 먹으면 누나 못지않게 잘할 수 있을 거야. 오늘부터라도 마음 다져 잡고 조상님들 부끄럽지 않게 공부를 해봐라.”


정권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 방의 모든 누나들이 정권을 향해 주먹을 쥐어 보이며 응원했다.


“아후!”


정권이 부담스러운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녀석은 이런 훈훈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는 스타일.

중3인데도 전형적인 나쁜 남자 캐릭터였다.


같은 또래 중에서는 황등의 주먹짱이었고, 큰 도시 익산까지도 주름잡겠다고 기웃거렸다.

보통 키와 체격인데도 몸이 날래고 배짱이 두둑했다.


엄마가 당근밭 농사로 피땀 흘려 번 돈의 상당 액이 치료비나 보상 및 합의금으로 쓰일 정도였다.

한 마디로 시한폭탄과도 같은 아이였다.


그래도 막돼먹진 않아서 나름 협객을 지향했다.

불의(不義)에는 결사항전, 의리는 최선으로 지킨다며 소년 황등파를 이끌었다.


그러나 집에서는 아주 온순했다.

한그루나 정희 누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었다.

그래서 누나들은 정권을 착한 동생으로 여겼다.

물론 나쁜 소문은 들었지만.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공부는 늦은 것 같습니다. 대신 할아버지들께 부끄럽지 않은 남자로 당당하게 살겠습니다.”


솔직한 녀석이었다.

누나들이 킥킥 웃었다.

그러자 정권이 그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누나들 항상 그림자처럼 호위무사로 지키고 있는 거 모르죠? 누나들한테 접근하는 놈들 전부 차단하느라 힘들어요.”


누나들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어쩐지 예전에는 남학생들 연애편지 쪽지도 제법 날아왔고 학교 파하고 나오는 길이면 미행하는 그림자도 느껴졌었는데 최근에는 이상하게 허전했다.


한송이와 한떨기가 동시에 정권을 쏘아보았다.


“정권아, 우리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네가 왜!!!”

“누나들을 지켜주고 싶으니까.”


“아놔, 앞으로는 지켜주지 않아도 돼. 우리도 연애를 즐길 때야. 그걸 왜 막니?”

“안돼요. 시집갈 때까지 지켜줘야죠.”


“싫어, 그냥 너는 공부에 도전하라구.”

“대한민국 중학생들이 전부 공부에 열중하면 어쩝니까? 분야별로 골고루 퍼져야지.”


“네 분야가 뭔데?”

“의리!”


모두 까르르 웃었다.

정권이 누나들과 이처럼 따뜻한 시간을 보낸 것도 드문 일이었다.


그날 저녁 식탁은 참 훈훈했다.

한 씨 종가에 얹혀사는 정희, 정권에게 떳떳한 자긍심을 심어준 아빠가 고마웠다.


소년 황등파의 리더 정권이 수면 아래서 누나들을 그물처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이 대견스러우면서도 너무 재미있었다.


쬐끄만 중학생 녀석이!




소설로 소통하는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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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4

  • 작성자
    Lv.4 청라64
    작성일
    19.04.28 08:21
    No. 31

    가문의 대를 이어 의리를 지키는 모습이 참 아름답게 그려집니다..
    사람을 중시하는 뿌리가 계속 이어져 내려가길 소망합니다~^^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초초낙타
    작성일
    19.04.28 18:19
    No. 32

    온 세상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살면 갈등이 없을 텐데요.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3 wi******..
    작성일
    19.04.29 12:07
    No. 33

    ㅋㅋ 저도 저런 듬직한 남동생이 있다면...좋겠어요.
    그루는 든든한 이모에 언니들, 속 깊은마음 나누는친구에 호위무사까지..ㅋㅋ
    세상 부러울것 없겠어요^^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초초낙타
    작성일
    19.04.29 13:57
    No. 34

    그렇게 사랑을 받고 자란 이가 남을 배려할 줄도 아는 듯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 ks******
    작성일
    19.04.29 21:26
    No. 35

    저 시절쯤에 만나면 밥먹었냐가 인사였는데 몇대를 같은 상황으로 지낸다는게 보통 배려와 염려가 아니면 있을수없는일을 그루아버지는 해내셨네요
    정권이 남매가 올바를수밖에없고
    그루 자매가 올바를수밖에 없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초초낙타
    작성일
    19.04.29 21:30
    No. 36

    아버지라는 이름이 어머니보다는 무겁지만...자기희생은 숙명이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djsejr
    작성일
    19.04.30 00:50
    No. 37

    역사 속에서 늘 소외되고 힘든 집단들이 어느 순간 흐름을 바꾸고는 했지요. 동학과 빨치산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좋건 나쁘건 획을 그은 사건이구요. 한 가족의 역사에 우리네 근현대사의 흐름을 담아내셨네요. 정희,정권 남매는 보통의 후손들과는 달리 소외되고 힘든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 그루 세자매와 행복하고 평탄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대하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초초낙타
    작성일
    19.04.30 01:06
    No. 38

    djsejr님은...얼굴 한 번 뵙고 싶은 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 mi******
    작성일
    19.05.03 08:35
    No. 39

    공부는 늦었지만 의리의 정권이~~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지 궁금하네요~~그래도 누나들 연애편지는 받게 해주지...ㅋ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초초낙타
    작성일
    19.05.03 12:56
    No. 40

    그러게 말입니다.ㅋㅋㅋ연애편지가 얼마나 달콤한 선물인데......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 asdk511
    작성일
    19.05.04 15:21
    No. 41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이군요!! 정권의 이야기는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요ㅎㅎ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초초낙타
    작성일
    19.05.05 01:55
    No. 42

    정권이도 훗날 한그루와 함께 하게 될 겁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 ja****
    작성일
    19.05.09 00:29
    No. 43

    깊은 사연이 있는 두 집안이었군요 서로가 지켜주는 공생의 과계라... 오늘날 이런 일이 많다면 사회가 이리 각박하진 않을텐데 말이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초초낙타
    작성일
    19.05.09 02:33
    No. 44

    LG그룹이 럭키와 금성 구씨와 허씨 가문 동업그룹이죠. 그래서 여의도 쌍둥이 빌딩, 야구 마스코트 또한 쌍둥이로 지었습니다. 그들의 우정은 LG, GS로 나뉘었어도 두 그룹 다 잘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믿음과 신뢰는 그 어떤 가치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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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밥은 마음이다 +48 19.04.20 621 47 8쪽
16 다국적 상인들의 식탁을 차려라! +46 19.04.19 788 48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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