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처녀 재벌 입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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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초낙타
작품등록일 :
2019.04.02 16:00
최근연재일 :
2019.05.28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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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29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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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객점 책장사

조선의 풍운아 허균과 최고의 의협셰프 한극 콤비가 펼치는 밥의 전쟁. 아스라히 묻혀버린 그들의 웅혼한 의지(意志)가 현대의 절대미각 소녀 한그루에 의해 되살아난다.




DUMMY

제사를 마친 사람들이 봉분 주변의 풀밭에서 과일과 떡을 음복(飮福)했다.

정권과 누나들은 언덕의 소나무 그늘로 모여 앉았다.

한그루가 정희 남매 사이에 앉아 먼 곳을 가리켰다.


“저기 우리 선산 보이잖아? 조선 중기 때부터 400년 넘도록 18대를 이어져 내려온 씨족(氏族)의 역사야. 시대 순으로 묻혀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흔적을 보면 너무 신비하단 생각이 들어.”


정희와 정권이 부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매는 느껴보지 못한 혈통의 장구한 사다리였다.

이 땅의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헤아릴 수 없는 선조(先祖)의 사다리가 있을 터.

그러나 그 계통을 잘 지켜온 가문이 있고, 도중에 끊긴 가문도 있다.


정희, 정권 남매의 사다리는 너무 짧았다.

아버지 한 사람의 흔적뿐이었으니까.

그래서 한 씨 종가의 찬란한 역사가 늘 부러웠다.

둘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한그루가 말했다.


“우리 선산의 제사는 씨족 후손들만 모여 제사를 드리잖아? 그런데 너희 아버지는 우리 마을 모든 사람들이 함께 제사를 드리니까 정말 대단한 분이야. 우리 할아버지 18대를 능가하셨으니까.”


생각해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권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아버지의 묘를 돌아봤다.

정희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루 네가 우리더러 힘을 내라고 하는 말이라는 거 알아. 물론 우리 아버지께서 마을을 위해 애쓰셨겠지만 우리 가족이 가난하고 아이들이 어려서 제사 치를 형편이 아니었다고 하잖아. 마을 분들이 가엾게 여겨 돌봐주신 거라고 생각해. 반면 한그루 할아버지들께서는 까마득한 시절부터 우리 황등을 위해 선행을 베푸셨다고 들었어. 비교대상은 아냐.”


정희가 냉정하게 받아쳤다.

서로를 배려하는 한그루와 김정희는 여고생답지 않게 생각이 깊었다.

티격태격하는데 정권이 판정을 내렸다.


“수직적으로는 한그루 누나네 선산이 으뜸이고, 수평적으로는 우리 아버지 제사가 최고니까 무승부!”

“오오, 제법인데!”


누나들이 정권에게 엄지를 척 세워들었다.

황등 금암리 하늘은 그날따라 맑고 푸르렀다.

그날 밤 한그루는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비좁은 공간이지만 아늑해서 좋았다.

한그루는 모포에 엎드려 소동백 아저씨의 책 ‘빵의 지도’를 펼쳤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한극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었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역시나 조그만 스탠드 주황색 불빛아래서 책장을 펼치면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눈꺼풀이 덮이면서 망막의 실핏줄이 어른거렸다.

그리고 마포나루 송화객점이 망막의 스크린에 겹쳐졌다.


..........................................................


“송나라의 기운이 쇠해지자 북방의 오랑캐 거란의 요나라와 여진의 금나라가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그 무렵 천상에 봉인되었던 사악한 108 마성(魔星)이 지상으로 내려와 도적이 되었다. 이들은 양산박을 산채로 삼아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되는데 탐관오리들의 폭정에 시달린 백성들은 108 도적을 영웅으로 받들게 된다. 캬아~ 첫 장부터 심장을 뛰게 만드는 수호전이요. 누구나 읽기 쉽게 언문(한글)으로 필사한 책인데 한 권에 면포(綿布)로 두 필. 쌀은 네 말!”


송화 객점에 사람이 들끓으면서 자연스레 행상(行商)들이 스며들었다.

그 중 가장 재미를 보는 이가 서쾌(책장사) 임억이었다.


그는 마포의 객점에서 벌써 수호전 1권만으로도 수백 부의 책을 팔아먹었다.

어찌나 언변이 뛰어나고 상술이 기발한지 책을 들고 오는 족족 다 팔고 돌아갔다.


“이 양반은 저녁나절 주둥아리로만 객점 하루 장사를 거둬 가네.”


송화가 얄밉다는 듯 눈을 흘겼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임억이 거둬 온 면포와 쌀자루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산가지(算木)를 헤아려 은자(銀子)로 바꿔 주었다.


“수호전을 구하기 위해 일부러 객점에 온다는 사람도 한둘이 아닐 텐데 구박은 하지 마시구려. 책을 좋아하는 손님치고 무뢰배는 없잖소.”


허튼 소리는 아니었다.

책장사 서쾌가 드나드는 송화 객점은 다른 곳에 비해 비교적 조용하고 격조가 있는 편이었다. 임억이 책 소개를 하면 모든 식객들이 소리를 죽인 채 국밥을 먹으며 귀를 세웠다.


책을 만들어 파는 업인지라 임억은 아는 것도 많았고 세상 물정도 빨리 읽었다.

고관대작에서부터 청루의 기생에 이르기까지 거래하면서 인맥도 나무뿌리처럼 이리저리 엉켜있었다.


식객과 나그네들은 임억을 통해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갔다.

객점에서 임억은 때로 광대였다가 때로 전령(傳令) 역할도 맡아 누구에게나 반가운 존재였다.


가져온 책을 다 팔고 은자를 챙겨 괴춤 주머니에 넣고 난 임억이 개운한 얼굴로 팽나무 평상에 앉아 장터국밥을 시켜 먹었다.


“수호전은 앞으로 몇 권까지 나오는 거요?”


객점 방에서 나온 상투머리 사내가 평상으로 다가와 물었다.

아까 면포 스물 두 필을 치르고 책 열한 권을 샀던 개성의 보부상(褓負商)이었다.


“중국 원본은 120부외다. 헌데 조선 언문으로 풀어 쓰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몇 부로 나눠 엮어야 할지 아직은 결정된 바 없소이다.”


“설마 120부로 쪼개 팔지는 않겠지. 개성과 황해도 인근에 수호전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적지 않소. 길게 끌면 중간에서 우리 상인들만 애를 먹으니 스무 권 정도로 압축해서 만들어주면 좋겠소. 그렇게만 해준다면 내 오십 권씩 떼어 가리다.”


임억은 국밥을 퍼먹으면서 머릿속으로 책값을 계산했다.

개성은 한양 다음으로 큰 시장이었다.

거리가 먼 평양보다도 자금 회전이 빨랐고 고객들의 수준도 높은 편이었다.


“알겠소이다. 다음 달 보름에 송화객점에서 봅시다. 그리고 중국 소설도 좋지만 조선의 소설도 한양의 여인들한테 제법 먹히는데 그때 맛보기로 가져 가보시오.”

“조선의 소설은 어떤 것들이 있소?”


“중국 소설이 영웅담이라면 조선 소설은 사랑 이야기외다.”

“사랑 이야기라?”


“지금 신묘한 필력을 지닌 작가가 ‘월하정인(月下情人)이라는 소설을 집필하고 있는데 서얼 출신 도령과 대갓집 외동딸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작품이오. 미리 주문을 하면 서로 편하지 않겠소?”


“달빛 아래 연인들이 어떤 사랑을 나눌지 궁금하구려. 제목이 아주 좋소. 주는 대로 가져 갈 테니 최대한 확보해주시오. 지금 객점에 책값을 미리 지불해놓고 가겠소.”


개성의 상인들은 판단이 서면 망설임이 없었고, 계산이 빠르고 명쾌했다.

신용도 좋아서 팔도의 여각, 객점, 주막에서 외상거래가 가능했다.

또 팔도에 거래망이 깔려 있어 전파력이 대단했다. 그들과 손을 잡으면 소설책을 전국에 널리 깔 수 있을 것이다.


송화객점에서 입도선매(立稻先賣)로 책값을 두둑하게 챙긴 서쾌 임억은 객점 뒤란으로 돌아 별채로 갔다.


초가로 지은 별채는 나그네들의 숙소였는데 대낮에는 객점의 요리사 한극과 칼자 달단이 머무르는 쉼터였다.


“한 감관 계슈?”


임억이 부르자 별채에서 한극이 문을 열고 나왔다.


“객점이 오늘따라 소란하다 했더니 임자가 또 한바탕 입담을 발휘한 모양이군.”

“월하정인을 미리 팔았다고 어르신께 전해주시오.”


임억이 괴춤에서 은자를 꺼내 한극에게 건넸다.

한극은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고 은자를 받았다.


“거참, 이야기를 팔 수 있다니 놀랍군!”

“시대의 흐름을 타야 부자가 되지요. 국밥 몇 그릇보다 책 한 권 값이 비싸다는 걸 눈으로 보셨지 않소? 허균 어르신께 재촉 좀 해주시오.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분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소이다. 조조익선(早朝益善 다다익선(多多益善) 우하하하!”


부탁도 유쾌하게 전하는 임억이었다.




소설로 소통하는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작가의말

또 조선시대로 넘어갑니다.

한극과 허균 임억 트리오의 활약.

그들의 삶과 이상이 오늘의 한그루에게 양분이 될 수 있을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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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4

  • 작성자
    Lv.4 청라64
    작성일
    19.04.30 07:19
    No. 31

    어제밤 읽었지만 오늘 아침에 읽으니 또 새롭네요~~^^
    이따 출근해서 틈나면 또 읽어야겠어요..
    새로운 인물등장도 흥미롭습니다~~^^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초초낙타
    작성일
    19.04.30 11:53
    No. 32

    청라64님, 4월 한달 즐겁게 만났네요^^ 더 건강한 5월 맞이하시길.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3 ks******
    작성일
    19.05.01 23:15
    No. 33

    송화객점이 또 등장했네요
    생기넘치는곳
    등장인물도 늘어나고 앞으로
    또~놀라운 이야기가
    계속될것같습니다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초초낙타
    작성일
    19.05.02 05:47
    No. 34

    자꾸 벌리기만 해서 죄송합니다.ㅎㅎㅎ 그래도 순수처녀가 재벌에 입문하기 위한 복선과 사다리니까 그러려니 읽어주시길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4 hr*****
    작성일
    19.05.04 01:10
    No. 35

    새로운 인물이 또 등장했네요! 매 화를 거듭할수록 흥미진진한데요?? : D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초초낙타
    작성일
    19.05.04 07:15
    No. 36

    살금살금 걸어가보지요. 이 스토리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ㅎㅎㅎ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4 asdk511
    작성일
    19.05.04 23:44
    No. 37

    트리오의 사업활약이 재벌입문에 영향을 미칠지 기대가 됩니다ㅎㅎㅎ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초초낙타
    작성일
    19.05.05 01:55
    No. 38

    아마도 힘을 합치게 되겠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djsejr
    작성일
    19.05.06 23:39
    No. 39

    여기에 모이는 댓글러분들 대단하십니다. 댓글과 답글을 읽는 재미가 상당하네요. 기발하신 분, 유장하신 분,그림이나 역사에 조예가 상당하신 분들이 만드는 댓글 잼나게 읽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초초낙타
    작성일
    19.05.07 02:55
    No. 40

    그러게요.예상치 못한 댓글테러입니다. 작가들은 이런 테러를 좋아하지요. 문피아에서 가장 예쁜 방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 mi******
    작성일
    19.05.09 22:31
    No. 41

    정권의 판정 ㅋㅋㅋ솔로몬같네요 ㅋㅋ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초초낙타
    작성일
    19.05.09 23:27
    No. 42

    ㅋㅋ그러게요. 정권이가 싸움질만 하는 일진은 아니라니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 ja****
    작성일
    19.05.11 15:56
    No. 43

    개인적으로 새롭게 알게되는 한자성어 조조익선~~ 우리민족의 특성을 잘 나타태는 한자 같아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초초낙타
    작성일
    19.05.12 05:42
    No. 44

    소설에서 만들어낸 조어(造語)입니다. ㅎㅎ혹시라도 사자성어로 오인하지 마시길...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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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화객점 책장사 +44 19.04.29 527 40 8쪽
25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버지 +38 19.04.28 508 39 7쪽
24 소년 황등파의 리더 +44 19.04.26 548 4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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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은(銀)의 전쟁 +48 19.04.22 629 40 8쪽
19 사랑은 부활한다 +36 19.04.21 659 40 14쪽
18 북관(北關함경도) 가는 길 +35 19.04.20 614 43 10쪽
17 밥은 마음이다 +48 19.04.20 621 47 8쪽
16 다국적 상인들의 식탁을 차려라! +46 19.04.19 788 48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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