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쿤제과의 마케팅 전략
조선의 풍운아 허균과 최고의 의협셰프 한극 콤비가 펼치는 밥의 전쟁. 아스라히 묻혀버린 그들의 웅혼한 의지(意志)가 현대의 절대미각 소녀 한그루에 의해 되살아난다.
광저우 중산대학(中山大學) 부속병원.
샨샨이 검은 정장 차림의 가드 두 명과 함께 병실에 들어왔다.
남편 린펑은 정물(靜物)처럼 누워 있었다.
“여보, 또 이겼어요! 제가 꼭 당신을 일어서게 할 테니까 포기하지 말아요.”
샨샨이 침대 가까이 다가가서 귀엣말을 건넸다.
린펑의 동공은 허공을 향한 채 움직임이 없었다.
샨샨은 남편의 깡마른 광대뼈를 어루만졌다.
중환자실의 면회시간은 30분.
그녀는 남편 옆에 바짝 붙어서 나직하게 노래를 불렀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기쁜 축제의 날
나는 꿈에도 잊지 못하는 그대와 얼굴을 맞대고
손잡을 시간을 얻네~
해와 달은 아홉 달에 한 번 만나지만
우리는 해와 달보다 만나기 어려워~
일 년에 한 번 신방에 들어가는 날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우렁이 물을 빨아들이듯 다정하게
서로 어깨를 꼭 맞대고
가녀린 풀잎이 원숭이를 품듯이
대숲가의 종려나무가 봄을 맞이하고
마을 가 대나무에 죽순이 솟아오르고
산 위에 타오르듯 붉은 꽃들이 피어나고
시냇가의 게 껍데기도 부드러워진다네~
내가 심장으로 사랑하는 그대여~
일 년에 한 번 그대를 만나니
우리의 사랑도 봄을 맞는다네~
샨샨 부부는 윈난성의 까마득한 오지 지눠산(基諾山) 출신이었다.
인구 2만여 명에 불과한 지눠족은 초근절창(草根絶唱-풀뿌리들의 빼어난 노래)으로 유명한 소수민족이다.
지눠족은 해마다 터무커(特慕克節) 축제를 연다.
일 년에 딱 한 번 열리는 민족 최대의 축제다.
한 해 농사의 시작을 알리고 조상들께 제사를 드리는 의식인데 이 날 젊은 남녀들은 평소 눈여겨 봐두었던 상대와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소수민족은 외부세계와 차단되어 종족번식에 있어 근친상간(近親相姦)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종족 안에서 남녀의 사랑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그 관습법으로 인해 지눠족 청춘들은 고통을 겪어야했다.
터무커 축제가 무르익어가는 밤에 청춘들은 이 노래를 목 놓아 울며 구슬프게 불렀다.
그들의 첫사랑은 대부분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지눠족 남녀는 가슴 속에 은밀한 첫사랑의 이름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오직 하루 터무커 축제의 밤은 사랑의 해방구(解放區)가 된다.
결혼을 한 사람들이라도 이 날은 옛 연인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
현실의 남편과 아내가 간섭할 수 없다.
오랜 관습이라 그냥 눈을 감아주는 것이다.
그러나 옛 사랑과 만나 그리움을 푼다한들 한(恨)까지 풀릴까?
현실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지 못한 옛 연인들은 이 날 직접 만든 허리띠 같은 정표(情表)를 교환한다.
그 정표를 평생 보관하다가 죽으면 무덤에 함께 묻는다.
다음 생애에서 다시 만나자는 의미로.
내가 심장으로 사랑하는 그대여~
일 년에 한 번 그대를 만나니
우리의 사랑도 봄을 맞는다네~
샨샨의 노래가 어찌나 구슬픈지 병실 출입구 쪽에 나란히 서 있던 가드들이 손등으로 눈가를 찍었다.
샨샨은 그들을 의식하지 않았다.
어차피 맹인의 눈에 보일 리도 없었다.
세상 아무 것도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샨샨은 오직 남편의 체취만 느끼면서 노래를 불렀다.
“나가시죠!”
가드(Guard)들이 벽시계를 보더니 샨샨을 일으켜 세웠다.
가벼운 체중의 샨샨이 사내들의 팔뚝에 휘감겨 공중으로 뜨다시피 했다.
그들에게 끌려가면서도 샨샨은 계속 노래를 불렀다.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지만 혹시라도 남편의 청각이 살아있다면 아내의 애끓는 노래를 들을 수도 있을 테니까.
광저우 리버사이드 호텔.
주강(珠江)이 내려다보이는 리버사이드 호텔 10층이 샨샨의 임시거처였다.
“샨샨, 다음 주 한 번만 더 출연하면 된다. 3연승을 하면 절대미각 마스터 타이틀을 획득하지. 그러면 린펑의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보내주겠다.”
룸의 응접테이블에 앉아있던 왕룽이 샨샨을 맞았다.
가드들이 왕룽에게 깍듯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알겠어요. 약속만 지켜줘요.”
샨샨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왕룽은 그런 샨샨이 못마땅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샨샨, 나에게 좀 고분고분할 수 없나? 당신 가족의 미래가 내 손에 달려있는데 말이야.”
“내 가족의 미래는 내가 책임져요.”
“당신이 무슨 수로 밥을 먹고 살지? 남편은 사고를 당해 쓰러졌고, 당신은 앞이 보이지 않는 장애인인데?”
“고향으로만 보내주면 무슨 일을 해서라도 먹고 살 수 있어요.”
“고집스럽긴! 내 말만 잘 들으면 광저우에서 호의호식하고 살 수 있으니까 잘 생각해.”
“굶어 죽어도 좋으니까 윈난(雲南)으로 보내줘요.”
“아무튼 윈난으로 가든 미국으로 가든 다음 주 ‘오감 마스터’ 출연해서 우승만 하면 샨샨의 뜻을 들어주지.”
왕룽의 말을 더 듣기 싫었는지 샨샨은 자신의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왕룽은 가드들과 함께 룸을 빠져나갔다.
광저우 해방중로(解放中路) 라쿤(raccoon) 빌딩.
리버사이드 호텔과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왕룽의 회사가 있었다.
라쿤(너구리)은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이미지.
라쿤제과는 스낵류 제조회사로 광저우에서 떠오르는 기업이었다.
원래 라쿤제과는 판다 그룹의 방계회사였다.
판다의 창업자인 장웨란 여사는 두 아들 중 차남인 왕타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고 장남 왕룽에게는 라쿤제과를 맡겼다.
충동적이고 과격한 왕룽보다는 침착하고 섬세한 동생 왕타오가 대기업 CEO로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발생할 형제의 난(亂)을 염려해 왕룽에게 상당히 많은 부동산을 상속해주었다.
명예와 권한은 동생에게, 부(富)는 형에게 준 거였다.
그런데 유산 분배가 끝난 뒤부터 왕룽이 폭풍의 질주를 감행했다.
라쿤제과의 덩치를 키우면서 모기업 판다식품을 삼킬 작정이었다.
모친 장웨란 여사는 장남 왕룽의 경영능력을 저평가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의외였다.
왕룽은 굉장히 공격적으로 사업을 전개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제과업 태스크포스(task force,대책본부)팀을 꾸려 준비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라쿤을 성장시켰다.
왕룽이 라쿤을 맡아 시장에 내놓은 신제품은 거의 모두 히트를 쳤다.
비스킷, 빙과류, 스낵 류 모든 제품의 판매 그래프가 급상승했다.
확실히 왕타오의 판다 그룹 성장세를 능가하는 추이였다.
왕룽의 비밀병기는 여자였다.
약혼녀 클라라 황이 마케팅의 귀재였는데 홍보담당 이사를 맡아 맹활약 중이었다.
그녀는 언론매체를 절묘하게 활용해 소비자들에게 라쿤의 과자를 어필했다.
라쿤의 중독성 강한 로고송과 상품명은 중국 대륙 널리 알려졌다.
보이차 감별사 샨샨을 광저우까지 데려온 사람도 바로 클라라였다.
엄청난 액수의 광고비를 지불해 CF를 방영하는 것보다 시청률 최강의 예능 프로그램을 활용해 라쿤을 띄우려는 발상이었다.
“샨샨의 다음 상대는 한국에서 건너온 여학생이라고 해요. 만반의 준비를 해서 반드시 3연승을 거둬야 합니다.”
클라라가 왕룽에게 강조했다.
라쿤의 회장에게 훈수하는 그녀의 자세가 도도해보였다.
“여기는 중국 광저우야. 한국의 여고생이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지. 한국이라면 몰라도.”
“방송사에서 그런 점도 충분히 고려해서 프로그램을 준비할 거에요. 편파적이면 이겨도 감동이 없을 테니까.”
“어떤 미션이 주어져도 나는 샨샨이 거뜬하게 이길 거라고 믿어. 그 여자의 혓바닥은 모든 음식의 분자까지 측량하는 전자 미뢰가 촘촘히 깔려 있거든.”
“샨샨의 능력은 나도 신뢰해요. 하지만 상대가 한국인이라는 게 마음에 걸려요. 나라는 작은데 한국인들은 뭔가 좀 특별한 구석이 있어요.”
세계의 경찰로 불리는 절대강대국 미국과 G2로 어깨를 겨루는 중국.
그런데 그런 중국을 우습게 보는 나라가 한국이라고 했다.
축구를 비롯한 여러 스포츠 종목에서 한국은 중국의 앞을 가로 막곤 했다.
최근에는 한류 붐까지 일어나고 있는 실정, 한국인이라면 여고생이라 할지라도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다음 주 녹화 때까지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까 긴장해야 합니다.”
“알았어. 리버사이드 호텔에 감금해놓았으니까 걱정하지 마.”
클라라는 그래도 못미더운 눈치였다.
그녀는 절대미각 샨샨 마케팅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샨샨이 ‘오감 마스터’의 챔피언으로 등극하는 순간 마케팅의 절반이 성공하는 셈이었다.
이미 샨샨을 라쿤제과의 개발 팀 연구원으로 등록해놓았기 때문이다.
샨샨이 화제에 오르면 자연스럽게 직장 라쿤제과도 알려질 게 분명했다.
소설로 소통하는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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