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건달유협전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이Soo
그림/삽화
라치(Rachi)
작품등록일 :
2019.04.03 23:23
최근연재일 :
2019.09.12 12:16
연재수 :
77 회
조회수 :
155,867
추천수 :
3,144
글자수 :
531,400

작성
19.07.2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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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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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글자
20쪽

#67-황제를 움직이는 여인

DUMMY

“서, 선배...진짜 갈 겁니까?”

“당연하지, 마! 우린 사채업자 아니냐?”


알바지옥의 잘못된 소개로 사채업에 발을 들이게 된 유협은 첫 수금일부터 불안함에 떨고 있었다. 이를 본 강불웅은 주먹을 쥐고 유협의 뒤통수를 내다갈겼다.

딱-


“아아악.”

“야이 새꺄. 수금 걷으러 가는 놈이 그렇게 쫄아가지고 채무자들이 잘도 돈을 갖다 바치겠다, 짜슥아.”

“아고...아니, 형님. 저 어제까지 대학생이었다고요. 삥 뜯는 건 학창시절 때도 못해본···”

“하아, 이 자식 보소? 삥 뜯다니? 우리가 삥을 왜 뜯어? 정당하게 빌려준 돈에 대한 이자를 받아내는 거야.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이라고. 아, 이 새끼 사채업의 기본이 안 되어 있는 놈일세?”


강불웅의 야단에 입이 삐쭉 나온 유협은 잠자코 그의 뒤를 따라 첫 수금자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이, 나 왔어. 문 열어!”


쾅쾅쾅-

강불웅의 주먹에 허름한 철제 대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삐걱댔다.


“빨랑 안 열어?


그의 재촉에 대문 안쪽에선 뭔가 미약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닫혀 있던 철문이 끼이익 소리와 함께 살짝 열렸다.


“뭐, 뭣하러 왔누? 아, 아직 나라에서 도, 돈이 안 들어왔는디···”


새하얀 백발의 할머니가 조심스레 대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아, 또 시작이네. 그 멘트는 어제 써먹었잖아? 오늘 25일. 노령연금 입금일인 거 다 알고 왔는데 이러기야?”

“아, 글쎄 아, 안 들어왔대두...”

“그럼 공단 가서 깽판 쳐볼까? 왜 아직도 안 넣었는지?”


살짝 열린 대문을 강하게 밀어 젖히며 들어간 강불웅은, 그 반동으로 엉덩방아를 찍은 할머니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뒤에서 이를 바라본 유협은 그의 카리스마에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있었다.


“할매, 자꾸 구라 치면 재미없어. 어제 오늘 2일치 이자가 5만원이야. 알아? 내일 오면 10만원이고. 그냥 좋게 말할 때 5만원내고 끝내.”


강불웅의 손가락에서 두둑두둑 소리가 났다.


*


“후루룩, 아이 해임 애 도르 저쓰여?(아니 행님 왜 돈을 줬어요?)”


점심을 먹기엔 이른 시간. 하지만 첫 수금일을 끝내고(?) 나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근처 국밥집에서 입 안 가득히 국밥을 말아 넣은 유협이 밥알을 튀기며 묻고 있었다.


“얌마, 다 먹고 얘기해.”

“오물오물, 그러니까 행님. 우리는 수금하러 갔는데 왜 돈을 더 주고 나왔냐고요.”


마치 할머니를 죽일 듯이 대문을 밀치고 들어간 강불웅은 할머니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더니 오히려 주머니 속에 10만원을 꺼내 건네고는 그 집에서 나와 유협과 함께 여기 식당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강불웅은 말없이 국밥이 담긴 그릇에 다대기를 넣고 있었다. 유협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계속해서 물었다.


“형님, 수금이 아니라 적선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사장님이 아시면 경을 치실 텐데요.”

“짜샤, 그냥 쳐 먹어. 다 이 형님이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그 말에 피식거린 유협은 다시 국밥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하여간, 겉보기와는 다르게 정이 많으시네요. 행님.”


쾅!

갑작스레 테이블을 세게 친 강불웅은 유협의 멱살을 잡았다.


“켁켁켁. 해, 행님···”

“마, 똑똑히 들어라. 우리 같은 사채업자들은 정 같은 건 떼놓고 사는 거다. 내가 그 할마시한테 돈을 준 건 내일 받을 돈을 배로 받기 위함이고. 그 할매는 매달 25일에 돈이 꼽히는 마르지 않는 우리 돈줄 중에 하나니까. 알겠냐?”


죽일 듯이 노려보며 멱살을 잡은 그를 보고서야 오늘 처음 일 해봤던 유협은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어떤 것인가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혀, 형님. 이, 이것 좀 놓고...켁켁.”

“마음 독하게 먹으라고. 짜슥아.”


노려보던 눈빛과 함께 멱살을 잡았던 손을 거둔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몇 시냐?”

“하아하아, 11시 58분입니다. 혀, 형님.”

“뭐?”


시간을 들은 강불웅의 표정은 놀람과 걱정이 공존하는 표정이었다. 이어 좌불안석으로 눈동자가 이리저리 돌아가면서 숟가락을 쥔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눈치 채지 못한 유협이 조용히 물었다.


“아, 아무래도 전 이 일에 적성이 잘 안 맞는 거 같은데...어쩌죠, 형님?”


시간을 들은 뒤로 자기만의 상념에 빠져 있던 강불웅은 유협의 물음에 성의 없는 말투로 툭 던졌다.


“적성 안 맞음 때려쳐야지. 혹 아냐? 가서 마누라 될 여자나 잘 만나면 인생이 다시 펴질지.”


*


“큭큭큭. 정말이라니까. 아니 천하에 우리 원공로만한 영웅이 또 어딨겠어?”

“핫핫핫! 아니아니. 폐하께서 이리도 영민한 줄 알았다면 이 원공로, 어찌 이 수춘 촌구석에 쳐박혀 있었겠습니까? 당장에라도 달려가 장안에서 폐하를 뵈었을 텐데 말입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유협은 원술의 술잔에 연신 술을 따랐다.


“자자, 이거 마시고 기분을 더 올려보자고.”

“아니아니, 폐하께서 어린 나이임에도 영웅호색하시니 이 원모가 크게 개안했습니다. 크핫핫.”

“장안의 장락궁보다 여기 시녀들이 더 이쁜 것 같으니 이야말로 원술 네 덕이 나보다 높아서 가능한 거 아냐? 나보다 더 황제 같은데.”

“아니아니, 폐하께서 그런 소리를 하시면 이 원모가 뜨끔 합니다? 핫핫핫.”


‘아니, 이 새끼가···’


농을 주거니받거니 하는 와중 본심이 튀어나와버린 원술의 말에, 유협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하지만 멀리서 가후와 담화를 나누고 있는 채염을 힐끔거리고는 다시 억지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내 기분이 좋으니 한마디 할게. 난 예전부터 천하에 나 이외에 누군가 황제가 된다면...그건 원술 네가 될 거라 생각했어.”


한창 웃으며 술을 마시던 원술은 느닷없는 황제의 말에 술잔으로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유협과 시선을 마주쳤다.


“아...니아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폐...하?”

“천하가 오죽 넓어야 말이지. 나 하나로는 뭐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

“그, 그래서요?”

“일이 좀 정리되면 우리 원술, 너한테 황제자리를 좀 넘겨줄까 하는데···”

“아니아니, 폐, 폐하 어찌 그, 그런 말씀을···”


하고 손사래를 치는데 입가는 웃고 있는 원술을 보자니 울화가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낀 유협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은 말고.”

“아니아니, 왜요?”


이 자식이...방금 손사래 쳐놓고는 대번에 본색 나오는 거 보소?


“야! 생각을 해봐라. 지금 내가 너한테 황제자리를 넘기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냐?”

“아니아니, 예주의 백성들이 만세를 불러주지 않을까요?”


이 망할 자식이···


“나참, 이 새끼 술이 왜 이렇게 약한 거야? 취해서 여기 대가리가 안 돌아가냐?”


겉모습과는 다르게 감정이 격앙된 유협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휘이 돌리면서 본연의 말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던 원술의 표정도 점차 굳어져 갔다.


“아니아니, 폐하야 말로 취한 것 같군요. 말이 조금 심하시···”

“내가 장안도 아니고 여기 수춘에 와서 네 놈한테 황제자리를 넘긴다고 하면? 천하의 제후들이 아, 그렇군요 하고 인정하고 넘어가줄 거 같아? 너도 동탁처럼 반원술연합군 한번 뒈지게 당하고 싶냐? 아, 왜 생각이 없어?”


원술이 욱하는 듯하자 본론을 먼저 꺼내며 그의 입을 막아버린 유협은 재차 생각할 여지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황제를 유인해와 강제로 선위했다고 누명이라도 쓰면? 너 감당할 자신 있냐? 서주에 유비를 품은 도겸, 연주에 조조, 형주에 유표, 사례주에 이각과 곽사야. 잘 생각해 임마.”


원술은 황제의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머릿속으로는 그 말에 반박할 내용은 없는지 맹렬히 계산중이었다.


“자자, 술 맛 떨어지게. 주변 정리가 확실하게 끝나야 황제자리를 넘기는 것도 고민해볼만 하지. 애써 선위했는데 네가 꼴까닥해버리면 나는 이제 누구랑 이 술잔을 나눠야 하는 거야? 안 그래?”


말없이 어금니만 꽉 깨물고 있는 원술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한 유협은 그의 귓가로 조용히 속삭였다.


“나한테 맡겨. 주변 청소 깔끔하게 해줄 테니까. 그 때까지 나 믿고 조용히 백성들이나 어떻게 다스릴지 잘 생각해두라고. 원소 놈 같이 가문의 이름이나 팔아먹고 황제알기를 좆같이 아는 후레자식과는 다르잖아, 너는.”


귓속에 울린 황제의 속삭임은 원술의 언짢음을 한방에 날려 보내는 한 여름날의 얼음물과 같았다.


*


“아니, 이게 어찌된 영문입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폐하께서 원공로를 가만둘 성정이 아니신데 어찌하여 저렇게 태도가 바뀌실 수가 있으신 겁니까?”


가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채염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폐하께서야 이리로 움직일지 저리로 움직일지 예측이 불가한 물 속의 고기와 같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의 성정이란 그리 쉬이 바뀌지 않는 법인데···”


풀리지 않는 의구심을 가득안고 상념에 잠겨 있는 가후를 바라보며 채염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실은 이리로 오기 전 폐하께선 저와 대화를 나누셨었습니다.”

“오! 역시 채태사님의 뭔가 조언이 있었었군요. 대체 어떤 대화였기에 저 고집 센 폐하를 움직이셨습니까?”


존경의 눈빛으로 채염을 보며 감탄한 가후는 그 비법을 보채기 시작했다. 채염은 자신의 앞에 차려진 상에서 청경채 볶음 한 젓가락을 집어 들고는 입으로 가져갔다. 가후는 애타는 심정으로 음식을 곱게 먹고 있는 그녀를 눈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오물거리며 입 속의 음식을 삼킨 채염은 뿌듯함이 담긴 미소로 입을 떼었다.


“폐하께서 악취장군을 포박하고 우리를 구출하신 다음의 일입니다.”


*


“폐하, 정녕 이대로 원술을 만나러 가실 겁니까?”


귓속을 파고든 청아한 음성에 회귀하기 전 처음 사채업을 시작했을 때의 추억에서 깬 유협은 창밖으로 고개를 쭉 내밀었다.


유협이 악취를 포박하고 수춘성으로 원술을 만나러 가는 때, 꽁꽁 묶여있는 악취는 황충의 곁에 잡혀 있었다. 그런 황충이 마부로 있는 마차엔 붉은 말 두 마리가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입에 재갈이 물려 말도 하지 못하는 악취가 불같은 눈으로 마차 안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때마침 고개를 내민 유협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가라앉아 있던 그의 감정이 다시 격앙되기 시작했다. 마차로 다시 내밀었던 고개를 빼서 채염을 바라봤다.


“당연하지. 내 이 새끼 모가지를 비틀어야 이 성이 풀리겠어.”

“그렇게까지 해서 원술을 친들 무엇이 달라지는 것입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저 새끼 안 보여?”


고깝다는 어투로 묻는 유협이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그곳엔 고개를 내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포박된 악취가 있었다. 하지만 채염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방금까지 저 새끼 때문에 함거에 갇혔던 걸 그새 잊은 거냐고. 나의 기지가 아니었으면 다들 원술한테 잡혀가서 그 목 위에 있는 물건이 뎅강 했을텐데 그런 소릴 왜 하는거야?”

“폐하, 찬찬히 생각해보시지요. 지금 이렇게 원술을 만나서 그를 어찌 처단하시렵니까?”

“그거야 가서 생각해보지 뭐.”

“폐하, 원술을 치기로 마음을 먹으셨다면 결국 할 수 있는 방법은 기습 뿐일 텐데, 그럼 세 가지의 문제가 생깁니다.”

“세 가지의 문제?”

“첫번째. 저 포로가 된 악취장군을 미끼로 원술을 만난다고 치면 어찌 그의 본거지인 수춘성에서 피해 없이 잡을 수 있겠으며, 두번째. 원술을 만에 하나 잡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를 처단한다면 지금 이 인원으로 수춘성에서 어찌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세번째. 천운이 발생하여 수춘성을 빠져나온다고 해도 폐하께서 원술을 처단했다는 소문이 나돌면 천하의 그 어떤 제후가 폐하를 받아들이려 하겠습니까?”

“원술 이 자식이 역적 짓을 하지 않느냐? 너도 겪었잖아! 우리 모두 죽을 뻔 했다고.”

“폐하를 뫼시려 했지 처단하려 하진 않았습니다. 그리고...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천하의 어느 제후가 원술과 다르게 행동하겠습니까? 걸어 다니는 옥새가 자신의 마당을 지나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으드득.

어금니를 꽉 깨문 유협은 감정에 복받쳐 그녀의 말에 부정하려 애썼으나 마땅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폐하, 도성에 계실 적엔 분명 영민하셨습니다. 스스로 황제라는 자리의 이점을 잘 살리시며 동탁과 이각, 곽사 등의 폭정에도 유들하게 황실을 이끌어가셨습니다. 천하삼분, 각 주자사들을 직접 키워 황실의 운영을 책임지겠다는 큰 목표까지도. 하지만 최근 들어 천도를 다시 실행하신다고 한 시점부터 뭔가 모르게 감정적이고 급해 보이십니다. 관직임명에서부터 지금 원술군의 처리까지. 좀 더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현실을 바라보실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채염의 말을 듣고 보니 스스로 또 다른 회귀자인 장연과 자신이 차고 있는 노란 목걸이 등을 의식하면서부터 조금씩 조바심이 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유협은 그녀 앞에서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그래도 저번에 진도 녀석 구슬려서 황군을 창설하는 것은 내, 내가 좀 잘했지 않냐?”

“그것도 결과만 따지면 폐하의 잘한 일처럼 보이십니다만 실상은 감정적이고 급한 처리셨습니다.”

“뭐?”

“정확하게 짚어보자면 진도라는 자는 사상자가 난 전쟁을 일으킨 자였고 그의 군대는 황건적이었습니다. 관직을 내리시며 싸움자체를 막으신 것은 얼핏 최고의 선택인 듯 보이나 제가 보기엔 뒷일을 고려치 않고 앞만 본 결정이라 생각합니다.”

“서론이 길다. 결론이 뭐야?”


자신이 나름 일처리를 잘했다고 생각했던 일을 지적당하자 퉁명스러워진 유협은 냉소적으로 그녀를 대했다. 채염은 황제의 그런 기미를 눈치 챘지만 이미 입 밖으로 꺼낸 말이었기에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유리한 싸움이었습니다. 굳이 관직을 주지 않더라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관직을 수여한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아십니까? 먼저 쳐들어온 적에게 관직을 주신 겁니다. 그것도 황실에서 주적으로 선포한 황건적, 비록 잔당이지만 도적떼들의 수장에게 말입니다. 이제 천도하는 그날까지 폐하께서 움직이는 곳마다 황건적의 잔당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왜냐고요? 관직을 받기 위해서죠. 이미 선례를 만드셨는데 그들이 뭣하러 도적질을 하겠습니까? 폐하를 덮쳤다가 적당한 때 항복하면 관직을 주고 끝낸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그건 너무 앞서 생각하는 거 아니야? 일이 그렇게까진···”

“폐하. 폐하께서는 천하의 황제이십니다.”


뚱한 표정의 유협을 마주본 채염은 또박또박한 말투로 말했다.


“황제는 매사의 모든 일에 명분이 있어야하고 신하들이 납득할 수 있어야 하며 백성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어야 합니다. 폐하께서 저의 조언을 앞서 생각한다고 말씀하신다면 폐하의 그 위치, 황제라는 무게를 가벼이 여기신다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유협은 참으로 입을 떼고 싶었지만 대꾸할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


그래, 이제야 알았다.

내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외모에 혹했었지만 왜 점점 거리감이 생겼는지.

좋아하는 것 같은데 왜 결혼생각이 안 들었는지.

정말 뛰어난 재녀고 사리분별이 정확한 여자다.

그러니 태사전에서 그렇게 날 몰아붙이며 가르치려 애썼겠지.

다른 여인이었다면 어찌됐든 황제인 내 눈에 띄기 위해 용을 썼을 건데.

그래서일까,

난 어느 순간 그녀를 여자가 아닌 인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여자 가후.


내 옆의 조언자, 길라잡이. 하지만 내 여자라는 느낌이 엷다.

아마 둘러말하는 것, 포장해서 하는 말보다 뼈 때리는 직언을 주로 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말이야...

나는 내 잘난 맛에 사는 놈인데.

나를 위해서라는 건 알겠는데, 내가 원하는 건 그런게 아니야.

그저 내 얘기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웃어주면...그러면 안 되겠냐?

어차피 이 시대 모든 일은 내 머릿속에 있어.

아, 물론 그 장연인가 뭐시긴가 하는 나 같은 회귀자 놈 빼고.

그 놈 생각하니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리네.

뭐, 아무튼···

내가 예지니 관상이니 뭐니하면서 이야기해줬잖아.

왜 내 능력을 믿지 못하고 그렇게 가르치려고만 드는거야?


고개 숙인 그녀는 나의 이런 속마음도 모른 채 대답이 떨어질 때까지 그대로 망부석처럼 있을 태세다.

하아,

머릿속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한다고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저러다 목 엄청 뻐근할 텐데···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인 듯하다.

그녀가 바라는 것. 그것에 대해···



“그래, 네가 이렇게 날 닦달해서라도 결국 말하고 싶은 게 이거냐? 원술을 포섭하라는...뭐, 그런 거?”

“더 깊게 생각하십시오. 어차피 조맹덕에게 가시겠다면서요? 그럼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제후들을 폐하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 제2의 동탁을 막는 길임을 명심하시지요. 앞으로의 폐하는 제위에 오르셨던 그 어린 폐하가 아니십니다. 폐하의 다음 말에겐 처음 말처럼의 방심은 없을 것입니다.”


하아, 끝까지 할 말 없게 만드네...



번외)



“꺼내드릴까요?”


씨익 웃으며 놀리듯 물어오는 검은 복면인에게 감옥에 갇혀 있던 주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농담할 상황이 아닌데요, 능장군. 이거 백부에게 관직 선물 하나 챙겨주려다 폐하께 밉보이고 이렇게 갇혀 있는 상황이라서요. 원자사와도 껄끄럽게 되었고 말이죠. 아, 이런 결과는 나답지 않은데···”


자조 섞인 중얼거림을 내뱉은 주유는 창살 밖에서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능조에게 물었다.


“지금 황제와 원자사의 상황은 어떻죠? 여기 올 때까지는 황제가 원자사를 완전 처단할 기세였는데 말이죠.”

“뭐라고요? 그게 사실입니까? 어...지금 상황과는 완전 반대되는데요?”


놀란 표정으로 오히려 물어오는 능통의 눈빛은 주유에게 커다란 혼돈을 건네주었다.


“바, 반대라니요?”

“지금 술판 벌어지고 난리 난걸요. 누가 보면 오랜만에 만나는 지기라도 된 듯이 서로 으쌰으쌰 하면서 화기애애합니다.”


주유의 낯빛은 어두워졌다. 작금의 상황은 자신이 애초에 계획했던 결과와는 완전 반대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꺼내주세요. 다른 방안을 강구해봐야 되니까.”

“맨입으로?”


다시 처음의 뺀질한 눈빛으로 돌아온 능조는 주위를 여유롭게 살폈다.


“한 식경내로 보초자가 올 텐데...흐음. 어쩐다, 내일 다시 와서 꺼낼 걸 생각해볼까나.”

“저번에 드렸었던 딸랑이보다 더 몸집이 큰 놈이 한 마리 있습니다. 어때요?”


어쩔 수 없다는 말투로 어깨를 으쓱한 주유의 흥정에, 복면으로 가려진 능조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가늘게 길어진 눈매를 볼 때 웃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뭐, 그렇다면야...주공자의 말을 믿고 저도 목숨을(?) 걸고 열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끼이이익-

들고 있던 열쇠로 손쉽게 감옥의 문을 연 능조는 밖으로 나가는 문을 가리켰다.


“빨리 나가야 할 겁니다. 곧 옵니다. 보초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주유가 감옥을 나서려 할 때,


“헌데 어디로 가실 겁니까? 백부님에게 가려면 저를 따라 가시면 됩니다만?”


주유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지었다.


“이 주공근, 한번 목표로 삼은 일은 꼭 해내고야 말지요. 반드시 백부에게 관직을 받아갈 터이니 강동으로 가시려거든 제 각오를 꼭 전달해주시죠.”


느긋한 능조를 두고 감옥을 나선 주유는 마치 눈앞에 황제가 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조사했던 황제의 성정이었다면 분명 원자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텐데. 헌데 오히려 그와 지기를 만난 듯이 어울렸다? 어린 황제가 정치를 알기 시작했다는 것인가. 음, 과연 황제의 각성일까, 아님 누군가의 조언인가. 뭐, 어찌되었든 간에 나야 방식을 바꾸면 되는 거니까.”


감옥을 나선 그의 그림자는 복도를 지날수록 점점 작아져갔다.


작가의말

*늦었습니다.

끝맺음이 마음에 안 들어서 2편을 합치는 날엔 어김없이 공지했던 날을 넘기게 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 여포가 등장할 시점이 다가오는 관계로 잠시 진도를 멈추고 외전이었던

[근육을 읽는 소녀 2, 3이 먼저 연재될 예정입니다. 오는 주말에 맞춰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따라서 68화는 다음주에 연재됩니다.


*kdagon님 Cigar6님 tk님 댓글 정말정말 감사드립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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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외전2-근육을 읽는 소녀2-흉선생투 +2 19.07.27 566 7 10쪽
» #67-황제를 움직이는 여인 +2 19.07.23 709 15 20쪽
68 #66-내가 누구냐? +4 19.07.18 692 17 17쪽
67 #65-제가 바로 주유입니다 +2 19.07.12 772 14 19쪽
66 #64-정보를 드리겠습니다 +4 19.07.08 806 19 21쪽
65 #63-아니아니 +3 19.07.04 860 24 18쪽
64 #62-폐하는 재밌는 분입니다 +4 19.06.30 916 25 17쪽
63 #61-대담 +4 19.06.26 931 18 16쪽
62 #60-아니, 갑자기요? +3 19.06.22 964 19 15쪽
61 #59-드리워진 먹구름3-가후 문화 +4 19.06.18 965 16 15쪽
60 #58-드리워진 먹구름2-진도 숙지 +6 19.06.15 948 20 18쪽
59 #57-드리워진 먹구름1 +2 19.06.08 1,060 23 15쪽
58 #56-장안을 떠나는 황제 +6 19.06.05 1,074 26 16쪽
57 #55-또요? +11 19.06.03 1,111 26 16쪽
56 #54-관직개편 +4 19.05.31 1,155 26 20쪽
55 #53-부족한 재정은 삥으로 메운다 +4 19.05.28 1,200 33 14쪽
54 외전2-근육을 읽는 소녀1 +3 19.05.26 1,306 24 10쪽
53 #52-달빛이 딱 맞게 무르익었네 +9 19.05.25 1,310 30 15쪽
52 #51-달빛이 무르익을 때3 +2 19.05.25 1,303 28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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