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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공모전참가작 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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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최장르
작품등록일 :
2019.04.08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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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2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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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0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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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4화 북경(北京)

님의 침묵




DUMMY

010.


동지(冬至)를 한 달 앞두고 이례적인 한파가 몰아닥친다. 동지사(冬至使) 겸 주청사(奏請使)의 명단에 이름을 올린 성학은 급가(給暇)를 얻어 춘천을 방문한다. 대순은 성학의 큰절을 받으며 아들의 장도를 빈다.


“추위가 제법 무섭구나. 그래, 이번 사행의 규모는 어떠하냐?”

“비변사 제조 대감이 정사를 맡고, 홍문관 부제학 영감이 부사가 돼 이번 사행을 이끕니다. 서장관으론 교서관 교리가 임명됐고, 소자가 서장관 나리를 보좌하도록 어지를 받았습니다.”

대순은 입맛이 쓴 듯 연죽을 재떨이에 털면서 한숨을 쉰다.

“이번 사행의 목적은 단순히 연례적인 동지사와는 거리가 먼 듯하구나. 종반의 좌장 역을 맡는 비변사 제조 대감이 정사로 낙점을 받았다고? 아무래도 조대비와 대군이 합작해서 손을 쓴 것 같다.”

대순을 응시하던 성학이 서가 앞으로 바짝 몸을 숙인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님을 뵙고자 한 것이 그 때문입니다.”

“대군 쪽에서 선을 댔더냐?”

“그런 듯합니다. 사행 명단이 발표되기 이틀 전에 대군을 뵙습니다.”

“뭐라 더냐?”

“막말로 치부하기에는 그 내용이 워낙에 상세하여 마음이 쓰입니다. 국사가 막중하다느니, 조대비가 조선의 운명을 가를 친서를 썼다느니, 횡설수설하더군요. 그리고 소자한테는 북경에서 목격한 선진문물을 조대비전에 소상히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흥선군이 아닌 조대비전이라고? 자신을 뒷전에 앉힌 게 영 마음이 쓰이는군! 자칫 일이 틀어지면 안동김씨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속셈 아니더냐. 홍문관 부제학이라면 김좌근의 측근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아무쪼록 거리를 두는 게 좋겠다. 북경의 선진문물을 보고하는 게 임무라지만, 자칫 저쪽에서 보면 조대비와 선이 닿은 형세로구나. 저들이 못마땅하게 여겨 화를 자초할 수 있어. 각별히 유념해야 할 것이야.”

“아버님의 뜻을 잊지 않겠습니다.”


나란히 누운 부자는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이한다. 서둘러 봇짐을 챙기는 성학을 두고 대순은 슬쩍 뒤로돌아 코 고는 시늉을 한다. 성학은 조용히 방을 나선다. 간밤 수북이 내린 눈을 치우던 응삼이 넉가래를 싸리문에 세워두고 동구 밖까지 마중한다.


“서방님! 연행 중에 제일 고되다는 게 동짓날 떠나는 동지사라는데, 부디 건강하십시오.”

“내 걱정일랑은 말고 아버님께 소홀해서는 아니 된다.”

“그런 거라면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받아 두게.”

성학은 수결이 된 어음을 응삼이에게 건넨다.

“장작과 곡식을 두둑이 챙겨놓도록 해. 관상감 판관이 올해 추위는 혹독하기가 백두산 호랑이보다 무섭다고 하네.”

“예, 서방님! 동장군이 지레 겁먹고 비켜 가도록 요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랍니다. 염려하지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성학은 저만치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초가를 바라보며 말을 덧붙인다.

“이번 사행을 마치고 귀국하면 아버님께 꼭 기와집을 장만해드릴까 하네. 자네가 볕 좋은 곳으로 땅을 구했으면 하네.”

“그럼, 새집에는 행랑채도 들이겠네요? 색시를 구해놓을 테니, 걱정일랑은 압록강 건너 만주땅에 두고 오십시오!”

응삼이 너스레를 떨자 성학이 공연히 엄포를 놓는다.

“제사를 등지고 젯밥에만 신경 쓰겠다? 어디, 허접한 땅만 구하기만 해 봐! 내 가만 있지 않을 테다!”

“하하핫!”


두 사람이 합을 이룬 호탕한 웃음소리가 입김과 더불어 광활한 하늘에 얼마간 깃들다 사라진다. 응삼은 성학을 동구 밖까지 배웅한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잔설 위에 가지런하다.



011.


1856년 10월 8일 광저우(廣州)에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청나라 관헌들이 장강(長江)에 정박하고 있던 영국 상선 ‘애로우호’에 승선한다. 관헌들은 승무원 12명을 해적 혐의를 뒤집어씌워 연행하는데, 그 과정에서 영국 국기가 강제로 내려진다. 영국 공사는 승무원의 송환과 영국 국기가 손상됐다는 점을 근거로 청나라 정부에 공개 사과를 요구한다.

홍콩 선적의 상선 ‘애로우호’는 선장만 영국인일 뿐 소유자와 승무원 모두 중국인이었다. 심지어 ‘애로우호’의 깃대에는 영국의 상징인 ‘유니언 잭’은 걸려있지도 않았다.

배의 선적 등록이 만료되어 영국과는 무관했지만, 대륙 진출의 야망을 호시탐탐 노리던 영국에게 일명 ‘애로우호사건(亚罗号事件, Arrow War)’은 청나라를 압박하는 구실을 제공한다.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을 기회를 엿보던 영국은 막대한 배상금과 사과문을 거절한 청나라를 향해 포문을 연다.


약탈자의 본성은 선과 진리와는 거리가 먼 악마와의 뒷거래다.

광저우 총독은 부랴부랴 승무원 전원을 석방하여 영국 영사관에 인계하는 절차를 밟는다. 그러나 본국으로부터 지령을 받은 영국 영사는 사전에 짜놓은 각본에 따라 승무원의 인계 절차를 차일피일 미룬다. 이로써 영국은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제2차 아편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영국 역사상 가장 불명예스러운 전쟁’이라며 비판하는 본국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프랑스와 연합하여 북상하며 차례로 중국의 해안 도시를 점령한다. 한편 태평천국혁명(太平天國革命)으로 난징(南京)이 점령당하는 내전에 휩싸인 함풍제(咸豊帝)는 설상가상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톈진(天津)까지 진격하자 러허(熱河)로 도주한다.

황제가 떠난 베이징(北京)은 강도에게 안방을 내준 꼴이다. 영국과 프랑스, 미국, 러시아의 4개국과 톈진조약(天津條約)을 체결하며 서구 열강에게 빗장을 푼 것도 모자라 베이징이 함락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함풍제(咸豊帝)가 러허(熱河)에서 병사한 뒤 어린 동치제(同治帝)가 대통을 이어받는다. 서태후(西太后)는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풍전등화의 벼랑에 선 청조(淸朝)를 수렴청정(垂簾聽政)한다. 안으로는 내란이 끊이지 않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겪으며, 마침내 청조는 앞마당까지 내주는 수모를 당한다.

광활한 대륙을 호령하며 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하던 청조가 몰락하는 일련의 과정은 이웃 나라인 조선과 일본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세도정치로 몸살을 앓던 조선과 열도를 벗어나려고 혈안이 된 일본은 청조의 몰락을 목도하면서 ‘역지사지(易地思之)’와 ‘타산지석(他山之石)’이란 상반된 접근방법으로 대응책을 마련한다. 단, 학습 효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두 나라 공히 내정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조선은 안타깝게도 청조의 몰락을 ‘쇄국(鎖國)’이란 명분으로 문호를 단단히 닫는 빗장으로 삼은 반면, 일본은 청조를 접수하는 조약체결의 과정을 식민개척의 예행으로 삼는다.


300여 명으로 구성된 사신단이 목격한 베이징의 모습은 실로 경이로움의 연속이다. 한양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철마차가 경적을 울리며 인파 사이를 헤치고 사라지면, 뒤미처 서역 상인을 태운 코끼리와 낙타의 무리가 거리를 가득 메운다.

변발한 군중 사이에서 벽안(碧眼)의 서양인이 거리낌 없이 마치 제 나라인 양 시내를 활보한다. 조선의 사신단이 더욱 놀란 것은 장발을 한 껑충한 이방인도 아니고, 집채만 한 생경한 동물도 아니다. 유교 경전을 치국과 수신의 본으로 떠받들어 온 조선의 관리들을 제자리에 붙박게 만든 것은 자금성의 위용을 무색하게 만든 군대의 행군이다.

소총을 어깨에 걸머멘 6척 장신의 군대는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황제만이 다닐 수 있다는 오문(午門)의 중앙로를 가로질러 성안으로 진군하는 것이 아닌가. 아연한 사신 일행은 저마다 입을 다물지 못한다. 먹장구름에 휩싸인 청조의 운명을 예견하듯 모래폭풍이 몰려와 순식간에 자금성을 집어삼킨다.


어둑해지고 나서야 사행단은 회동관(會同館)에서 행장을 푼다. 이튿날 외교문서인 표문과 자문을 전달받은 예부(禮部) 상서(尙書)가 황제에게 조선 연행사의 입경을 고한다. 황제는 장도의 사행을 무사히 마친 조선의 사행단에게 하마연(下馬宴)을 베풀어 융숭하게 대접하라는 명을 내린다.


“3천 리가 넘는 장도를 무탈하게 수행한 공을 치하하여 황제 폐하께서 친히 산해진미와 친선주를 하사하셨다. 오늘만큼은 실컷 먹고 마시고 즐기도록 하라!”

예부 상서(尙書)가 잔을 들자 정사가 선창을 한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사행단이 정사를 따라 일제히 한 목소리를 낸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이국적인 감흥에 젖은 탓일까. 사행단은 신문물에 대한 설렘과 호기심에 젖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다. 여독에 곯아떨어진 일부는 꿈결에서 기골이 장대한 서양군인과 집채만 한 코끼리에게 쫓기는 모양이다. 가위에 눌린 듯 사지를 웅크린 채 단말마(斷末魔)의 비명을 지르는 잠꼬대가 이곳저곳에서 목격된다.

자시(子時)를 알리는 호각소리가 야심한 정적을 흔들어 깨운다. 간혹 들리는 신음소리 외에 객실은 쥐 죽은 듯하다. 동료들이 까무룩 잠에 빠져있을 무렵 성학만이 몸을 뒤척거린다. 대륙에 부는 변화의 바람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인다. 하지만 분주한 일상에서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불손한 기운이 명확히 감지된다.

성학은 낮에 본 행인들의 무관심과 무표정을 잊을 수 없다. 두려움과 공포에 길들여진 육신은 영혼이 없는 그저 몸뚱이에 불과한 존재다. 그러고 보니 베이징을 가득 채운 활기는 남의 옷을 걸친 듯 겉도는 느낌이다. 성학은 부스스 몸을 떤다.


베이징에서 공식일정의 첫날을 맞이한 사행단은 초췌한 모습 일색이다. 베이징 체류 일정을 관리하는 상서(尙書)와 정사가 면담을 마치고 단 위에 선다. 상서와 정사를 배석시킨 채로 부사가 점호를 시작한다. 열을 맞춘 단원들이 긴장한 시선으로 단상을 주시한다.


“예부 상서와 정사 대감께서 연행사의 일정을 조율했다. 곧 황명이 떨어질 것이다. 각 부서는 차질 없이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그리고 여기 계신 상서 대신께서 황제 알현 시 모든 절차와 예법을 설명할 것이다. 잘 숙지하도록 하라!”

“예!”

상서가 앞으로 나와 헛기침을 한다.

“천안문을 지나면 박석이 깔린 중앙광장이 나온다. 그 끝에 황제가 집무를 보시는 태화전이 있다. 태화전의 처마가 살짝 보이기만 해도 기침조차 함부로 해서도 아니 되고, 고개는 바닥을 향할 것이고, 시선은 앞사람의 등을 벗어나서는 아니 된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조하(朝賀)’라는 꽤 까다로운 의식을 거친다. 이를 위한 연습이 여러 차례 거듭된다. 조하가 다가오자 모든 관원은 의관을 꺼내 동정을 새로 달고 인두질로 각을 세운다. 사행단의 고관들은 거울 앞에서 코털과 수염을 정리하느라 분주하다.

며칠 뒤 마침내 조하하라는 황명(皇命)이 떨어진다. 관복으로 정성스레 예를 갖춘 정사와 부사가 대기하고 있던 말에 오른다. 황실 근위대가 호위를 하며 사행단을 인솔한다. 자금성 앞에 도착하자마자 근위대가 해자(垓字) 밖의 하마석을 딛고 말에서 내린다. 정사와 부사도 호위대를 따라 말에서 내린다.

천안문을 통과한 뒤 박석이 깔린 너른 광장에 들어선 순간 사행단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진다. 한꺼번에 병사 9만 명을 사열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광장에 압도당한 것이다. 사행단은 멀찌감치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태화전의 붉은 처마와 맞닥뜨리곤 마치 죄인이라도 된 양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


성대한 환영식이 끝나고 사행단을 이끈 정사와 부사, 서열관이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태화전으로 입궁한다. 어린 동치제(同治帝)가 서태후(西太后)와 나란히 앉아 그들을 맞이한다. 서태후가 사신 일행을 접견하는 동안 어린 황제는 환관의 등에 올라 말놀이에 열중한다.

정사가 서태후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나전칠기로 십장생을 새긴 패물함과 조대비가 친필로 작성한 서신을 전한다. 서태후는 패물함을 열어보곤 만면에 화색을 띈다. 서랍을 열 때마다 금과 옥으로 만든 노리개와 비녀, 가락지 등의 온갖 장신구가 화려한 빛을 발산한다.

서태후는 거울 앞에서 장신구를 일일이 머리와 귀, 목에 걸어보며 마냥 즐거워한다. 사실 조대비는 서태후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철저하게 여심을 공략하기로 작정했는데, 그것이 그대로 적중한 성싶다.

서태후가 길게 자란 손톱이 치렁치렁한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늙은 환관이 조대비의 친서를 펼쳐 읽기 시작한다. 친서에는 오백 년 전통의 종묘사직과 조선왕조의 법통을 잇기 위해서는 오직 이 씨 성을 가진 왕손만이 다음 대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조대비는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을 염두에 두고 후사를 도모코자 청나라 황제의 윤허가 절실했고, 이는 안동김씨를 견제하려는 사전 포석이고도 하다.

서태후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에 낀 가락지와 귀에 건 귀걸이를 빼서 도로 패물함에 넣는다. 한마디로 조선의 정치 상황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의사표현이다.

환관이 서태후 대신 양국의 우호를 다짐하는 선언문을 낭독하는 것으로 사신단과 황제의 공식전인 의례는 막을 내린다.



012.


서태후를 알현하고 난 후 사행단에게 베이징의 주요 시설들을 시찰할 기회가 주어진다. 대포와 신식 총을 만드는 무기창을 비롯해 서책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인쇄소와 서구식 교육을 받는 교육기관들이 그 주요 시찰대상이다.

사행단이 무기창과 인쇄소의 신기술에 혀를 내두를 즈음, 성학은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머물며 수업을 참관한다. 영어와 수학 공식이 빼곡한 칠판 옆에는 지구본과 현미경, 천체망원경 등 각종 과학 장비들이 즐비하다. 학구적인 성학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선망의 대상이다.

음악실을 기웃거리던 그가 경쾌한 풍금 소리에 맞춰 어깨를 들썩인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는데, 빨간 공이 그의 발 앞으로 또르르 굴러온다. 모자를 쓰고 납작한 막대기를 든 아이들이 올망졸망 모여 갓을 쓴 그를 신기한 듯 바라본다. 성학은 제법 덩치가 큰 아이에게 공을 던진다. 아이들은 제가끔 운동장으로 흩어져서 자리를 잡는다.

그는 난생 처음 접한 ‘크리켓’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냅다 달려와서 공을 던지자 우뚝 서 있던 아이가 막대기를 휘두른다.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가로지르는 공을 따라 아이들이 달려가기 시작한다.

그가 던지고 치고 달리는 ‘크리켓’의 과정을 보며 경기의 법칙을 어림잡아 헤아릴 즈음 불쑥 해를 등진 그림자가 그를 에워싼다. 그나마 덩치 큰 사내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오줌을 지릴 뻔했다.

벽안의 사내는 성학이 쓴 갓에 관심을 보인다. 사내가 말을 건네는데, 성학은 무슨 말인지 도통 종잡을 수가 없다. 다만 자신에게 우호적인 인사말을 건넨다는 정도만 짐작할 뿐이다.

성학은 친선의 징표로 갓을 벗어 사내에게 건네준다. 신기한 듯 갓을 요모조모 살펴보던 사내가 냅다 교회 쪽으로 잰걸음을 놓는다. 역관으로 근무하는 친구에게 장난삼아 배운 영어 몇 마디가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Hey, boy!’

사내가 돌아보지 않자 난감한 성학이 눈알을 되록거린다.

“저 등치면 소년은 아니겠지? Hey, man!”

여전히 못 들은 척하는 사내를 향해 성학이 소리친다.

“야, 이놈아! 내가 써보라고 준 거지 갖고 튀라고 줬냐? 저런 날강도 같은 놈을 봤나!”

귓바퀴가 벌겋게 달아오른 성학이 교회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조금 전 갓을 들고 사라진 사내가 무리를 이끌고 밖으로 나온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다가온 사내들에게 둘러싸인 성학은 아뜩한 듯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한다.

“Can you speak English?”

“······a little······”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술자리에서 장난삼아 역관 동료에게 몇 마디 배운 게 전부인 터라 밑바닥이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다. 실제로 외국인과 말을 섞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혀가 말려들고 동공이 퀭하다.

“Did you come from Corea?”

“Yes!”

또 답을 하고 말았다. 큰일이다. 뒤미처 돌아올 질문에 대꾸할 단어가 바닥났다. 숫자와 인사말 몇 가지가 고작인데, 에두른 서양인들은 호기심이 발동한 듯하다.

“You look so smart!”

성학은 도리질치며 최후의 발악을 한다.

“I don't know! I don't know! I don't know!”

선교사들은 그의 반응에 폭소를 터트린다.


비록 체구는 왜소하지만 기개 하나만은 육척 장신에 굴할 그가 아니다. 그가 눈을 부릅뜨고 두리번거리는데도 선교사들은 마냥 신기한 듯 방긋방긋 웃는다. 호되게 꾸지람을 하고 싶어도 영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교회 쪽에서 다가오는 기척은 성학에게는 구원의 손길이나 다름없다. 선교사들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희끗희끗한 수염을 늘어뜨린 채 십자가를 목에 건 신부가 성학의 앞에서 멈춘다. 정중히 그와 목례로 인사를 나눈 신부가 어눌하지만 또박또박 조선말로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예수회 소속 신부 요셉이라고 합니다.”

조선말을 들으니 체증이 가신 듯 성학은 안도의 숨을 내쉰다. 선교사에게 갓을 전달받은 신부가 그에게 건네며 하얀 이를 내보인다.

“나는 오년 전 조선 땅에 머문 적이 있습니다. 물론 관아의 탄압 때문에 2년밖에는 있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이국땅에서 조선인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돼서 무척 반갑습니다.”

성학은 친절하게 대하는 신부를 보곤 안심한다.

“이렇게 조선말을 하는 외국인을 보니, 저야말로 ‘thank you’, 아니, 감사합니다.”

그는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온 영어를 잽싸게 거두어들인다. 요셉은 겸연쩍은 듯 어깨를 으쓱하는 그를 보곤 배시시 웃는다.

“영어를 잘 하시네요. 그럼, 지금부터 영어로 할까요?”

“이놈의 입이 방정이구먼!”

성학은 멋쩍은 듯 손으로 가볍게 입을 두드린다.

“하하핫! 조선에서 유쾌한 선비가 오셨군요!”


성학은 두 달간의 체류 기간 동안 일과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부리나케 선교회로 달려가곤 한다. 그는 서양문명의 편리함과 우수성을 몸소 익히고자 귀찮을 정도로 신부들을 찾아다니며 질문을 쏟아낸다. 특히 요셉과 성학은 토론이 있는 날이면 긴 밤을 하얗게 지새우곤 한다.

성학은 원인과 결과의 인과관계를 엄격히 검증하는 과학적 사고에 유달리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는 선진문물의 유용성을 체험한 후로 서양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이 편협한 세계관으로부터 기인한 점을 깨닫는다.

따라서 서양의 개방 요구에 대하여 무작정 폐쇄정책으로 일관하는 수구적인 자세로는 조선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데에 의기의식을 느낀다. 성학은 요셉을 통해 세계를 재패한 서양 제국의 비약적인 발전이 과학과 기술에 기반을 둔 ‘산업혁명’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깊이 고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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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104화 한국은행 +1 19.05.11 99 2 14쪽
103 103화 비밀거래 +1 19.05.10 104 2 12쪽
102 102화 남미이주작전 +1 19.05.10 111 2 13쪽
101 101화 트루먼 독트린 +1 19.05.10 88 2 11쪽
100 100화 숙명의 라이벌 +1 19.05.10 89 3 18쪽
99 99화 Jane Doe +2 19.05.10 90 2 13쪽
98 98화 앙숙, 이승만과 김구 +1 19.05.10 90 2 12쪽
97 97화 반도호텔 +1 19.05.10 86 2 13쪽
96 96화 좌익과 우익 +1 19.05.09 85 2 13쪽
95 95화 조선인민공화국 +1 19.05.09 89 2 17쪽
94 94화 일본패망(日本敗亡) +1 19.05.09 90 2 12쪽
93 93화 원자폭탄 +1 19.05.09 87 2 13쪽
92 92화 김일성 +1 19.05.09 91 1 14쪽
91 91화 독수리 작전 +1 19.05.09 89 1 14쪽
90 90화 이승만 +1 19.05.09 88 1 14쪽
89 89화 비밀요원 나타샤 +1 19.05.09 82 2 15쪽
88 88화 OSS(미국전략사무국) +2 19.05.09 88 2 16쪽
87 87화 승전(勝戰) +1 19.05.09 83 2 14쪽
86 86화 진주만공습 +1 19.05.08 86 1 16쪽
85 85화 갈라예프 +2 19.05.08 81 2 16쪽
84 84화 채권(債券) +1 19.05.08 87 2 11쪽
83 83화 다카키 마사오 +1 19.05.08 100 2 12쪽
82 82화 광복군(光復軍) +1 19.05.08 81 2 13쪽
81 81화 육군정보학교 +2 19.05.08 80 2 11쪽
80 80화 홍콩행 +1 19.05.07 87 3 13쪽
79 79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3 19.05.07 82 2 12쪽
78 78화 김원봉과 김구 +1 19.05.07 81 2 16쪽
77 77화 까레이스키 +3 19.05.07 79 2 12쪽
76 76화 탈출(脫出) +1 19.05.07 85 3 9쪽
75 75화 박정희와 최태민 +1 19.05.07 89 2 9쪽
74 74화 중일전쟁(中日戰爭) +1 19.05.07 82 2 13쪽
73 73화 강제이주 +3 19.05.06 79 1 12쪽
72 72화 마루타 +1 19.05.06 78 1 12쪽
71 71화 막후 실력자 +1 19.05.06 79 2 13쪽
70 70화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등장 +1 19.05.06 80 1 15쪽
69 69화 천황결사옹위청년단 +1 19.05.05 82 1 15쪽
68 68화 후흑학(厚黑學) +1 19.05.05 83 1 13쪽
67 67화 경몽장(耕夢莊) +1 19.05.05 83 1 12쪽
66 66화 학교(學校) +1 19.05.05 85 1 8쪽
65 65화 국제연맹(國際聯盟) +1 19.05.05 84 1 19쪽
64 64화 나타샤 +1 19.05.05 85 1 11쪽
63 63화 보고서 +1 19.05.05 85 1 11쪽
62 62화 시인과 영웅 +2 19.05.04 96 2 15쪽
61 61화 탄생의 비밀 +2 19.05.04 86 2 18쪽
60 60화 국경수비대 +1 19.05.03 84 2 13쪽
59 59화 제네바협약 +4 19.05.03 88 2 18쪽
58 58화 명백한 운명 +1 19.05.03 84 1 16쪽
57 57화 미두취인소(米豆取人所) +1 19.05.03 86 1 12쪽
56 56화 생포(生捕) +1 19.05.02 84 2 13쪽
55 55화 참패(慘敗) +1 19.05.02 85 2 14쪽
54 54화 향수병(鄕愁病) +1 19.05.02 82 2 18쪽
53 53화 음악회 +1 19.05.02 84 2 18쪽
52 52화 들개 진구 +1 19.05.02 88 2 24쪽
51 51화 가락지 +3 19.05.02 88 2 26쪽
50 50화 덫 +1 19.05.01 86 1 28쪽
49 49화 추격전(追擊戰) +1 19.04.30 85 2 35쪽
48 48화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1 19.04.30 90 2 39쪽
47 47화 광휘와 빅터 +3 19.04.29 85 2 33쪽
46 46화 특별수사본부(特別搜査本部) +4 19.04.29 85 2 41쪽
45 45화 만저우리(滿洲里) +4 19.04.28 81 3 35쪽
44 44화 폭풍전야(暴風前夜) +1 19.04.28 83 3 37쪽
43 43화 Boys, be ambitious! +1 19.04.27 85 2 39쪽
42 42화 만주국(滿洲國) +5 19.04.27 89 2 38쪽
41 41화 만몽영유계획(滿蒙領有計劃) +1 19.04.26 87 3 25쪽
40 40화 재회(再會) +1 19.04.26 85 3 30쪽
39 39화 빅터 한 +1 19.04.25 87 3 49쪽
38 38화 박진만 +2 19.04.25 93 3 45쪽
37 37화 정보국 5과 +3 19.04.24 100 3 51쪽
36 36화 마적(馬賊) 왕리 +2 19.04.24 98 3 49쪽
35 35화 삼두정치(三頭政治) +2 19.04.23 96 3 42쪽
34 34화 주찬 +1 19.04.23 91 3 51쪽
33 33화 만주야사(滿洲野史) +2 19.04.22 95 3 50쪽
32 32화 서광휘 +2 19.04.22 95 3 47쪽
31 31화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 +2 19.04.21 106 4 47쪽
30 30화 미쓰야협정(三矢協定) +4 19.04.21 102 4 46쪽
29 29화 출산(出産) +3 19.04.20 106 4 43쪽
28 28화 밀항(密航) +2 19.04.20 99 4 45쪽
27 27화 불령선인(不逞鮮人) +1 19.04.19 103 4 43쪽
26 26화 님의 침묵 +1 19.04.19 108 4 48쪽
25 25화 이민(移民) +2 19.04.18 121 4 39쪽
24 24화 회자정리(會者定離) +2 19.04.18 108 5 44쪽
23 23화 여걸(女傑) 수잔 +5 19.04.17 108 4 46쪽
22 22화 3·1 만세운동 +5 19.04.17 108 4 44쪽
21 21화 천적(天敵) +1 19.04.16 109 5 49쪽
20 20화 아카키 타이요우(赤木太陽) +4 19.04.16 113 5 52쪽
19 19화 망국(亡國) +4 19.04.15 121 3 49쪽
18 18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3 19.04.15 123 3 46쪽
17 17화 한성진격작전(漢城進擊作戰) +4 19.04.14 127 4 49쪽
16 16화 의병전쟁(義兵戰爭) +4 19.04.14 126 4 43쪽
15 15화 춘투(春鬪) +5 19.04.13 134 3 47쪽
14 14화 암살미수(暗殺未遂) +4 19.04.13 140 3 37쪽
13 13화 결혼(結婚) +3 19.04.12 216 6 42쪽
12 12화 돈버거 +9 19.04.12 193 6 44쪽
11 11화 대한제국(大韓帝國) +2 19.04.11 212 7 45쪽
10 10화 김출세(金出世) +7 19.04.11 232 8 42쪽
9 9화 낙향(落鄕) +4 19.04.10 245 7 42쪽
8 8화 혁파안(革罷案) +4 19.04.10 258 8 41쪽
7 7화 증기자동차 +2 19.04.09 307 11 22쪽
6 6화 2차 사행(使行) +2 19.04.09 306 12 24쪽
5 5화 견문록(見聞錄) +5 19.04.08 345 13 19쪽
» 4화 북경(北京) +1 19.04.08 426 11 19쪽
3 3화 만남 +1 19.04.08 533 12 15쪽
2 2화 1차 사행(使行) +2 19.04.08 763 12 14쪽
1 1화 파락호(破落戶) 이하응 +17 19.04.08 1,461 1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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