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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공모전참가작 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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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최장르
작품등록일 :
2019.04.08 16:31
최근연재일 :
2019.07.12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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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3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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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쪽

14화 암살미수(暗殺未遂)

님의 침묵




DUMMY

62.


후지하라는 암실에서 인화작업에 열을 올린다. 그는 현상액에 담겨 있는 인화지를 꺼내 흐르는 물에 수세한다. 막 수세를 마친 인화지는 사진 백여 장이 줄느런히 걸린 줄에 집게에 집혀 고정된다. 현상액과 어둠에 노출된 탓에 머리가 퀭한 그는 암실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쐰다.

그는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암실로 들어간다. 정동교회에서 치른 결혼식장면이 사진 백여 장 속에 순차대로 나열된다. 그는 사진을 들고 곧장 카지의 집무실로 향한다.


“대어를 낚았습니다.”

득의에 찬 후지하라가 사진 뭉치를 건네자 카지가 사진을 면밀히 살피기 시작한다.

“이거 정말 대물인걸! 신상원이 참석했다는 것은 곧 독립협회의 잔당이 뭔가를 도모하고 있다는 물증이 아닌가!”

“중위님께서 명령하신 관리들을 전수 조사한 내용입니다.”

카지는 후지하라로부터 서류철을 건네받고 훑어본다. 서류를 넘기던 그가 멈칫한다. 그러곤 탁자 위에 펼쳐진 사진 한 장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이제야 이자의 신분이 밝혀졌어! 내장원 2등주임관 한경덕!”

후지하라가 귀띔한다.

“한경덕은 현재 사직한 상태입니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담배를 입에 문다. 후지하라가 냉큼 성냥을 켠다. 그는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신 뒤 천천히 연기를 내뿜는다. 그의 동공에 비장한 기운이 어른거린다.

“맞아! 기억의 파편이 이제야 제자리를 잡는군! 사무엘 영결식 때 끝까지 남았던 자가 바로 한경덕이었어.”

후지하라가 돈버거와 관련된 사진을 가리킨다.

“과장님, 신부가 돈버거의 주인이 확실합니다.”

카지는 사진 두 장을 유심히 비교한다.

“돈버거의 주인인 박미라가 한경덕의 아내라니······, 구미가 당기는걸?”

책상 주위를 맴돌던 그가 회전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 빙그르르 한 바퀴 돈다.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를 풀 때마다 그는 회전의자에 의지하여 장고에 빠져들곤 하는데, 이번에는 너무 쉽게 풀린 나머지 스스로 흥분한 성싶다.

“헌병대에 정보과 인원을 보충해달라고 해야겠어.”


카지는 벌떡 일어나 칠판 앞으로 다가선다. 그러곤 신상원과 관련인물이 연계된 계보도에 사진을 붙이기 시작한다.

“독립협회 조직 서기 신상원과 내장원 2등주임관 한경덕 그리고 돈버거 사장인 박미라! 냄새가 나도 너무 나는데? 이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미련한 놈!”

그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는다.

“신상원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군. 관료 출신인 한경덕을 책사로 삼고, 박미라를 자금책으로 활용하여 다시 조직을 규합할 속셈이 틀림없어.”

그는 칠판 위에 굵게 글씨를 쓴다.

‘X-特急’

“앞으로 이들은 헌병대 정보과에서 직접 관리한다. 작전명은 ‘X-특급’이다. ‘X-특급’에 관한 모든 정보는 1급 보안사항이니만큼 외부로 누출돼서는 안 된다.”

“하이!”

“신상원, 한경덕, 박미라 세 명한테는 24시간 정보원을 붙이도록 해!”

“하이!”




63.


서구 열강은 극동아시아에서 제가끔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연합전선을 편다. 특히 서구 열강은 남하정책을 추진하는 러시아에게 한반도에서의 일정량의 이권을 할애하며 대륙침략을 꿈꾸는 일본을 견제하려고 한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은 잇단 외교정책의 실패와 외세와 결탁한 정치권의 부패로 국제적인 고립을 자초한다. 1899년 동해 포경권을 러시아에 빼앗긴 이후로 1900년에는 어업권과 인삼위탁판매권을, 이듬해 직산금광채굴권을 일본에게 허여한다. 1902년 일본은 일본제일은행권을 한국에 통용함으로써 한국에서 경제적인 우위를 선점한다.

1902년 러시아 공사관에 모인 러시아·독일·프랑스 3개국은 일본을 배제한 채 한반도에서의 이권침탈을 모의한다. 1903년 러시아는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龍巖浦)를 점령하고 조차할 것을 한국정부에게 요구한다.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발끈한 일본은 친일파 대신을 앞세워 극구 반대한다. 이른바 ‘용암포 사건’ 이후 러시아와 일본은 긴장 관계로 돌입한다.

고종 황제는 어전회의를 거부하며 내각이 승인한 열강의 이권침탈을 반대한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대신들은 서구 열강과 공모하여 뇌물을 두둑이 챙기곤 알량한 국부를 마구 반출시킨다. 프로이센풍의 대례복만이 황제의 상징일 뿐 대신들은 무소불위로 전횡을 일삼으며 보아란 듯이 황제의 권위를 농락한다.


열강의 이권침탈이 횡횡할 즈음, 정동의 명물 돈버거는 정보과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날로 번창한다. 돈버거점방은 외국인의 왕래가 빈번한 인천과 부산, 원산, 군산 등지에 잇달아 분점을 개설한다.

큰 성공을 거둔 미라는 계몽활동의 일환으로 교육사업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그녀는 교회와 공동으로 문을 연 학교의 개교식에 참석한다. 그녀는 만삭인 몸으로 목사와 함께 기념식수를 한다. 상원과 경덕은 신입생 앞에서 연설하는 미라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본다.


두 사람은 수업을 하고 있는 교실을 돌아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지방에 파견된 헌병대가 한성으로 집결 중이라고 하네.”

상원이 덥수룩한 수염을 매만진다.

“러시아가 용암포를 점령한 이후 궁지로 몰린 일본이 반격을 준비하나 봅니다.”

경덕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한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연합하여 일본을 배제한 채로 이권침탈을 모의했다니, 초조할 만도 하겠지.”

경덕은 주위를 둘러본 뒤 나직이 묻는다.

“그나저나 선생님께서 준비하시는 일은······?”

상원은 뒷짐을 지고 무심히 말을 잇는다.

“러시아 공사를 암살하여 일본의 소행으로 꾸밀 계획이네.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 등과 연대하여 ‘제2의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을 범인으로 몰아붙일 테지. 그렇게 되면 일본은 청일전쟁 때의 삼국간섭을 고스란히 되씹으며 조선에서 물러나게 될 거야.”

“대단한 지략입니다. 십 년 전 청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하마터면 청나라의 요동반도가 일본의 수중에 떨어질 뻔했지 않았습니까. 그때 일본이 요동반도를 집어삼켰더라면 조선도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당시 러시아가 주동이 된 삼국간섭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만주대륙은 일본의 속국이 됐겠죠.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두 사람은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대화를 이어간다.

“일본은 대륙진출의 야망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걸세.”

“그런데 일본이 쉽게 물러날까요?”

“러시아 공사가 암살되면 삼국이 결속하여 일본을 압박하도록 만들어야 돼. 일본도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 않겠지. 그들은 군대를 동원하여 정동의 외교가를 폐쇄할 게 분명해. 그 이후에 프랑스 공사를 암살할 계획이야. 그렇게 되면 상해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 극동함대가 한반도로 출동하겠지. 바다에서는 프랑스가 일본의 해군을 막고, 육지에서는 러시아군이 일본 육군을 압박한다면 일본도 철수하지 않곤 못 배길 거야.”

“그럼 거사일은?”

흥분이 극에 달한 듯 경덕의 얼굴이 붉게 상기된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파티가 있다고 하더군. 외국의 공사가 참여한 파티에서 국토를 마음대로 조차한 러시아 공사를 암살하여 국제 사회에 경종을 울릴 계획이야.”

상원은 비장한 각오를 밝힌 뒤 한일자로 굳게 입을 다문다.

“제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자네야말로 앞으로 중책이 주어질 테니, 이번 거사는 모른척하게.”


비밀결사체로 운영되는 탓에 ‘아리랑’의 조직원들조차 거사에 대한 내막은 알 길이 없다. 자칫 헌병대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다 보면 영혼까지 거래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감옥에서 숱하게 고문을 겪은 상원은 조직원 사이의 비밀을 조직체의 으뜸 강령으로 정해둔 것이다.




64.


일본 공사관은 경비 병력을 두 배로 증강한다. 하야시 곤노스케 일본 공사는 무사시와 카지를 배석시킨 가운데 당면한 현안에 대하여 논의를 한다.


“러시아함대가 따렌항을 출항했다고 하네.”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연합으로 냉가슴을 앓던 하야시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어렵게 말문을 연다.

“본국에서 무조건 러시아의 남진을 막으라고 훈령을 보내왔습니다.”

무사시가 덤덤하게 본국의 뜻을 전달한다.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를 조차하여 만주진출을 방해하더니, 도대체 이번에는 어디를 틀어막겠다는 거야?”

하야시는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분노를 터트린다.

“첩보에 의하면 함대가 출항하기 전에 일주일 치의 기름과 부식만 조달했다고 합니다. 그걸 감안하면 기항지가 남쪽의 항구가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무사시가 지도를 가리키며 의견을 제시한다.

“남쪽의 항구라면?”

하야시의 눈길이 한국전도의 남쪽에 머문다.

“아마 인천이나 군산이 아닐까요?”

무사시가 손가락으로 인천과 군산을 콕 집어 가리킨다.

“서해안을 완전 봉쇄하겠다는 속셈이군!”

하야시의 입 사이로 날숨이 새어 나온다.

“만약 러시아함대가 인천항에 정박하면 그것은 보나마나 아군의 함대를 견제하려는 조치일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군의 함대는 본국과의 보급망이 차단되어 발이 묶이게 됩니다!”

무사시의 답변을 듣고 있던 하야시가 고개를 모로 튼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좋은 방책이 없을까?”

하야시는 얼마간 팔짱을 끼고 골몰한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카지가 조심스레 의견을 내놓는다.

“삼국간섭의 틀을 깨야 하지 않을까요?”

“틀을 깬다?”

“러시아와의 일전을 불사할 것을 전제로 전략을 짤 필요가 있습니다. 유사시 러시아와 교전을 벌이면 삼국동맹을 체결한 독일과 프랑스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특히 상하이에 정박하고 있는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참전하게 되면 우리에겐 승산이 없습니다.”

“좋은 방안이라도 있나?”

“삼국동맹을 깨서 프랑스를 배제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인책이 필요한데······”

카지가 잠시 말끝을 흐린다. 하야시와 무사시가 안달이 난 듯 눈동자를 되록거린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프랑스한테 거부할 수 없는 양질의 금광이나 항만사용권 등 이권을 제공하는 겁니다. 그렇게 환심을 산 뒤 상하이에 정박하고 있는 극동함대의 발을 묶어 유사시 출동을 못 하도록 미리 손을 써둬야 합니다.”

“음······, 그거 참 묘책이군. 그런데 채굴권은 내가 프랑스와의 밀약을 통해 어떻게 해볼 수 있겠지만, 상하이에 있는 함대를 무슨 수로 발을 묶겠는가?”


카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호승심이 동할 때면 으레 표출되는 그만의 변신술이다.

“상하이에 파견된 정보장교가 사관학교 동기입니다. 사전에 동기한테 항만 인부를 포섭하여 파업을 하라고 지령을 내리면 됩니다.”

“어허! 요즘 청년장교들은 국제적으로 논다고 하더니만 동기의 덕을 톡톡히 보겠군!”

하야시가 감탄하며 카지를 칭찬한다.

“이래서 카지 중위가 정보전의 대가로 명성이 높은가 봅니다. 하하핫!”

무사시가 추켜세우자 카지의 어깨가 으쓱한다.

“전결권을 자네한테 일임할 테니, 어디 러시아의 남진을 막아보게! 이번 일이 잘 되면 내가 친히 황실에 훈장을 추서하겠네!”

“하이! 천황 폐하를 위해 이 한 몸 바칠 각오로 임하겠습니다!”

“그나저나 한성의 상황은 요즘 어떤가?”

하야시의 질문에 카지의 입가에 비열한 웃음이 번진다.

“유력한 반역단체를 뒤쫓고 있습니다. 곧 일망타진하여 보아란 듯이 조선의 치안을 손아귀에 거머쥐겠습니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반역자를 색출하면 황제도 헌병대와 경무청의 위상을 높이 살 게 분명합니다. 그렇게 안심을 시킨 뒤 아군의 병력으로 궁을 포위해서 선점하면 삼국이 다시 간섭한다 하더라도 두려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격앙된 무사시가 웃음을 터트린 뒤 잔을 들어 건배를 제안한다.

“간빠이!”

“간빠이!”




65.


1904년 정동 외교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극동아시아에서 패권을 다투던 서구 열강은 일본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 연합전선을 형성한다. 청나라의 북양함대를 궤멸시킨 뒤 승승장구하던 일본은 대륙진출의 전초지인 인천에 대규모 함대를 파견한다. 이에 격분한 서구 열강은 연합함대를 결성하여 인천항에 급파하기로 결정한다. 국제정세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각국의 공사관이 몰려 있는 정동의 외교가에 긴장감이 감돈다.


옹기종기 처마가 잇닿아 있는 서촌은 무더운 더위에 한풀 꺾인 듯 고요하다. 마당을 서성이는 경덕의 등줄기에 땀이 차오른다. 연신 부채를 부치며 냉수를 벌컥벌컥 마셔보지만 타는 속내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 유모가 부엌에서 물이 담긴 놋대야를 들고 댓돌을 오른다.


“왜 이리 지체되는 거요?”

경덕은 초조한 듯 안절부절못한다.

“초산은 원래 다 그런 거랍니다.”

유모는 말을 남기곤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간다. 경덕은 문틈으로 신음이 새어 나올 때마다 바싹 마른 입술을 우물거린다.

속절없이 울어대던 매미가 숨을 고를 즈음 뉘엿뉘엿 땅거미가 깔린다. 귀뚜라미가 마루청 밑 음습한 곳에서 즉즉거리며 밤의 장막을 연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마당에 쏟아져 내린다. 서성거리는 경덕의 그림자가 갈피를 못 잡고 어칠비칠한다. 댓돌에 한쪽 발을 내딛고 기웃거리는 순간 대청마루가 울릴 정도로 우렁찬 울음소리가 터진다. 때마침 땀에 흠뻑 젖은 유모가 핏물이 흥건한 대아를 들고 나온다.


“산모는 어떻소?”

“건강하세요. 떡두꺼비 같은 아들도 무사하고요.”

“수고가 많으셨소.”

비로소 한숨을 돌린 경덕이 달을 바라보며 기도를 올린다. 상념이 교차한 탓일까. 그의 뺨에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조상님, 감사합니다. 험한 세상에 밀알이 되도록 잘 키우겠습니다.”


미라는 핼쑥한 얼굴에 옅은 미소를 담아 강보에 싸인 아기를 바라본다. 이윽고 경덕이 헛기침을 하며 안방으로 들어온다. 그녀가 몸을 가누려고 뒤척이자 경덕이 얼른 다가가 도로 누인다. 그러곤 강보를 들고 품에 안는다.

“여보, 고생 많았소. 이렇게 자식까지 안겨주니, 내가 복을 타고나긴 했나 보우.”

그는 미라의 이마에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준다.

“그게 언제 적 손수건인데 아직도 갖고 다니세요.”

그녀는 싫지 않은 듯 손수건에 이마를 맡긴다.

“다른 건 몰라고 이 손수건만큼은 닳고 헤지더라도 끝가지 간직해야지.”

“실없긴······”

두 사람은 살며시 손을 잡고 살포시 웃는다.

“하도 연락이 안 닿아서 혼자 애를 낳는 줄 알았어요. 이렇게 당신이 곁을 지켜주다니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미안해. 조직의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서 짬을 낼 수가 있어야지.”

“날씨도 무더운데, 아들도 볼 겸 며칠 쉬다가 가세요.”

그는 신기한 듯 아기를 뚫어져라 바라보곤 볼에 입을 맞춘다.

“당신한테 늘 미안했는데······, 이젠 아들한테도 미안하게 생겼네. 이번 생애에는 천상 좋은 가장이 되긴 틀렸어.”

“아들한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 더 잘해줘요. 그럼 되지, 뭐! 그나저나 선생님은 잘 계시지요?”

“워낙 신출귀몰한 분이라 아무도 행적을 몰라. 그저 큰일을 준비하고 있을 거라 짐작만 할 뿐이야.”

미라는 옴지락거리는 아기의 손을 만지작거린다.

“빨리 좋은 세상이 와서 다 함께 모여 살아야 할 텐데······”

“동지들이 노력하고 있으니 곧 그런 세상이 올 거야. 자, 그럼!”

그는 아내의 품에 조심스럽게 아기를 맡긴다. 그러곤 창백한 아내의 뺨에 입을 맞춘 뒤 벌떡 일어난다.

“여보 조심하세요. 집 걱정은 말고 몸 잘 돌보시고요.”

“걱정하지 마! 일이 끝나는 대로 달려올 테니, 당신이야말로 몸조리 잘 하고 있어!”


경덕이 안방을 나가자마자 미라가 고개를 돌린다, 그러곤 손수건을 꼭 움켜쥐고 흐느낀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손수건을 흠뻑 적신다. 유모가 들어와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그녀는 벽에 기댄 채 아기에게 젖을 물린다.

대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경덕은 이내 달빛이 길을 내준 골목을 따라 성큼성큼 서촌을 벗어난다.









제6장 춘투(春鬪)





66.


러시아정교회 소속의 성 니콜라스 정동성당이 개관 1주년을 맞이한다. 기념 미사에는 일본 공사를 제외한 주한 외교사절단이 전원 참석한다. 미사가 끝난 뒤 러시아공사가 주관하는 연회가 성당 안뜰에서 열린다.

연회가 무르익을 무렵 삼단 케이크가 등장한다. 주교와 공사 부부가 나란히 서서 케이크를 여러 조각으로 자른다. 러시아 공사는 박수를 받으며 폭죽 십여 발이 연결된 도화선 쪽으로 다가간다.

상원은 맞은편 옥상에서 숨죽인 채 망원경으로 성당을 관찰한다. 폭죽과 연결된 심지에 불이 붙으면 아홉 가닥은 온전히 화염을 내뿜으며 공중에서 불꽃을 터트릴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닥은 폭죽으로 위장한 다이너마이트에 점화되면서 폭발을 일으키도록 장치되어 있다.

마침내 러시아 공사가 성냥을 켜 심지에 불을 붙인다. 폭죽은 차례대로 공중으로 치솟아 공중제비를 돌며 불꽃을 수놓는다. 팡, 팡, 팡······, 연달아 폭죽이 터지자 참석자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터트린다.

참석자들이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입을 다물지 못할 즈음 여느 심지와 굵기가 다른 도화선이 피식거리며 마지막 폭약에 점화된다. 연회장은 ‘펑’하는 폭음과 함께 삽시간에 폭염에 휩싸인다. 경비병들이 뛰어들어 공사 부부를 담요로 감싼 뒤 현장을 빠져나간다. 피로 얼룩진 성당 뜰은 곳곳에서 새된 비명이 터지며 아수라장이 된다.


폭발을 지켜본 상원은 서둘러 옥상을 떠난다. 거리로 나선 그는 마차에 실려 황급히 현장을 떠나는 러시아공사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다. 상원의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공교롭게도 주교만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다.

다음 날 정동 외교가가 발칵 뒤집힌다. 하필이면 일본공사만이 불참한 자리에서 폭발이 발생했기 때문에 각국의 언론들은 일본이 사주했을 개연성을 노골적으로 지적한다. 게다가 성직자가 희생당한 사안인 만큼 서방의 언론들은 일제히 수위를 높여 미상의 테러단체를 향해 맹비난한다.





67.


공사관에서 하야시 공사와 무사시, 카지 등이 모여 긴급회의를 한다.

“아무래도 우리를 모함하기 위한 공작인 것 같습니다.”

무사시가 씩씩거리며 다리를 꼰 채 비스듬히 앉아 있는 공사에게 말한다. 하야시는 눈을 뜨곤 허리를 곧추세운다.

“러시아가 용암포를 점령한 이후 우리가 민감하게 반응한 게 사실 아닌가? 우리만 제외하고 기념 미사를 연 자리에서 폭탄이 터졌으니, 의심을 살 만도 하겠지. 아무리 우리 측에서 폭발사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들 믿으려 하지 않을 거야. 우리 쪽에서 진범을 잡아내서 누명을 벗는 수밖에 없어!”

하야시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체머리를 흔든다. 곁에서 지켜보던 카지가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공사님! 블랙리스트에 일순위로 오른 신상원이 최근 들어 돌연 자취를 감췄습니다. 시내 곳곳에 밀정을 풀어 감시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놈을 체포하여 닦달하면 이번 테러의 윤곽이 드러날 겁니다.”

공사는 귀가 솔깃한 듯 대뜸 조바심을 낸다.

“놈이 이번 테러를 모의한 증거라도 있나?”

“지금으로선 놈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제일 큽니다. 설령 없다손 치더라도 영혼까지 쥐어짜서 자백을 받아내겠습니다.”

그의 눈빛에서 살기가 번뜩인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무사시가 끼어든다.

“본국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조선의 내각을 접수하라는 훈령을 보내왔습니다. 공사님, 이럴수록 강경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일청전쟁 당시 삼국간섭으로 대륙 진출의 기회가 좌절된 치욕을 겪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또 삼국간섭에 꼬리를 내리면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낙오자로 전락하고 말 겁니다.”

“알았소! 난 내각과 외교관을 상대로 강경노선을 피력할 테니, 당신은 유사시 무력충돌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하시오.”

카지가 말을 마친 하야시 공사에게 신중히 당부한다.

“이번 테러는 단발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놈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제2의 삼국간섭을 이끌어내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조선에서 우리의 입지를 고립시키려는 게 놈들의 전략입니다. 앞으로 제2, 제3의 테러를 일으켜 외교가에 불신과 경쟁을 유도할 것이 뻔한 만큼 공사님도 경호에 각별히 신경 쓰셔야 합니다.”

“알겠네!”




68.


카지의 예견은 다음 날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하야시 곤노스케 일본공사는 아침부터 입궁하기 위해 일찍 서두른다. 군사고문관으로 파견된 무사시도 내각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있던 터라 공관 밖에서 하야시를 기다리고 있다.

평소와 달리 두 배로 증강된 헌병대가 공사 일행이 타고 갈 마차를 호위한다. 공사가 계단을 내려서자 무사시가 마차의 문을 연다. 공사가 마차에 오르고 무사시도 뒤따라 탄다. 마차가 기마대의 호위를 받으며 남산 기슭의 공사관을 벗어난다.

마차가 경성역 앞을 지날 즈음 통나무를 가득 실은 달구지가 길을 가로막는다. 밧줄이 끊어지며 통나무가 도로로 쏟아진다. 헌병들이 달려들어 통나무를 치운 뒤 소의 고삐를 쥐고 달구지를 도로 밖으로 빼낸다.

교통이 정리되고 마차가 다시 움직이려는 순간 청년 한 명이 마차를 향해 뛰어들며 총을 발사한다.


‘탕, 탕, 탕······’


총탄 세 발이 쩡 울리며 마른하늘에 여운을 남긴다. 활기차게 하루를 맞이한 거리의 풍경이 부지불식간에 얼어붙는다. 청년이 다가오는 것을 수상히 여긴 무사시가 총을 꺼내려는 순간 청년이 쏜 총알 한 발이 그의 가슴에 명중한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그가 공사를 껴안는 찰나 두 번째와 세 번째 총알이 그의 등에 박힌다.

피범벅이 된 하야시 공사가 깨진 안경을 고쳐 쓰곤 무사시를 흔들며 비명을 지른다. 헌병 장교가 도주하는 청년을 향해 소리친다.


“생포하라!”


헌병 한 명이 무릎을 꿇은 자세로 청년을 항해 총구를 조준한다. 총구를 벗어난 세 발 가운데 한 발이 청년의 허벅지를 관통한다. 청년은 한 발을 질질 끌며 발버둥을 치지만 얼마 가지 못해 길바닥에 널브러진다.

청년은 땅바닥에 나뒹구는 총을 주워 입속에 넣는다. 그가 막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뒤쫓아 온 헌병이 세차게 발길질을 한다. 군홧발은 정확히 청년의 턱을 강타한다. 총과 치아 네 개가 공중으로 솟구친다.




69.


헌병대로 압송된 청년은 취조실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다. 상처투성이가 된 그와 소매를 걷어 붙인 카지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진다.


“소속이 어디야?”

의자에 묶인 청년은 정신이 혼미한 듯 충혈된 눈을 희번덕거린다. 후지하라가 다가와 양동이에 가득 찬 물을 그의 얼굴에 퍼붓는다. 카지가 잠시 정신이 돌아온 청년에게 다가선다. 그러곤 머리끄덩이를 움켜지고 뚫어지게 주시한다.

“사주한 놈이 누구야? 어서 말해!”

청년은 또랑또랑 빛나는 눈빛으로 카지를 노려본다. 그러곤 야멸치게 쏘아붙인다.

“소속도 없고 사주한 자도 없다! 난, 그저 대한제국의 백성으로 국토를 찬탈한 원흉의 가슴에 총탄을 박았을 뿐이다. 네 나라 땅에 침입자가 있다면 네 놈도 똑같이 행동했을 텐데······, 뭘 더 캐묻는단 말이더냐? 시간 낭비하지 말고 사상범의 신분으로 당당하게 죽을 수 있도록 재판에 회부하라!”


청년은 손톱, 발톱이 모조리 뽑히고 횡격막이 파열되는 가혹한 고문을 당한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밭은기침을 할 때마다 핏덩어리에 갈라진 입술 사이로 줄줄 흘러내린다.

“독종의 끝이 죽음인지 아나? 천만의 말씀! 독종의 말로는 결국 자기 입으로 동료를 팔아먹게 돼 있어!”

카지가 고개를 돌리자 두꺼운 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린다. 헌병들이 청년의 노모를 데리고 취조실로 들어온다. 노모는 의자에 묶인 채 혼절한 아들을 알아보곤 흐느끼기 시작한다. 노모는 카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한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시오! 그럼, 내가 뭐든지 다 하겠소!”

카지는 애걸복걸하는 노모를 밀친다. 노모는 바닥에 널브러지고 쪽진 머리는 풀어헤쳐진다. 그는 노모의 성긴 머리채를 쥐고 질질 끌며 청년 앞으로 다가간다. 후지하라가 청년의 얼굴에 물세례를 퍼붓는다. 청년은 간신히 고개를 쳐들고 몽롱한 눈빛으로 앞가림을 한다. 청년은 희미한 형상이 또렷해지자 노모를 확인하곤 몸을 부르를 떤다.

“입을 열지 않으면 네 식솔 모두를 네 놈처럼 똑같이 짓이겨줄 테니, 똑똑히 보거라!”

헌병 두 명이 달려들어 노모에게 뭇매를 가한다. 청년이 몸부림을 치며 절규한다. 까무룩 혼절했던 노모가 정신이 돌아온 듯 아들을 보곤 눈물을 흘린다.

“사주한 놈이 누구야?”

청년이 체머리를 흔들며 악을 쓴다.

“독한 놈!”

카지가 턱짓을 하자 헌병 한 명이 노모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벌린다. 다른 헌병이 겸자를 들고 구강 안으로 욱여넣는다. 그러곤 무지막지하게 겸자를 비틀어 어금니를 뽑아낸다.

“어서 말해! 너의 소속이 어디고, 누가 사주했는가를?”

체머리를 흔들던 청년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부르짖는다.

“독한 조센징 족속! 악살이 나야 정신을 차리겠군. 이봐!”

카지가 헌병을 바라본다. 팔을 걷어붙인 헌병이 다시 겸자를 노모의 구강 안으로 밀어넣는다. ‘우직’하는 소리와 함께 반대편의 어금니가 뿌리째 뽑힌다. 노모의 새된 비명과 청년의 절규가 철문 틈으로 새어 나가 복도의 회랑을 타고 공명된다.


그러곤 몸을 결박한 채 니퍼로 앞니를 뽑는다. 까무룩 혼절했던 청년이 비명에 정신을 차린다.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알아본 그가 절규를 터트린다. 카지가 그의 입을 틀어쥐며 다그친다.

청년이 발버둥치는 바람에 의자가 쓰러진다. 고문을 당하는 노모를 차마 볼 수 없었던 청년은 고개를 바닥에 처박는다. 후지하라가 달려들어 그의 얼굴을 억지로 노모 쪽으로 돌린다. 이번에는 엄지손가락의 손톱이 공중에 피를 뿌리며 뽑힌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노모는 결국 피가 낭자한 바닥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쓰러진다.


카지는 청년의 결박을 풀어주고 헌병들과 함께 철장 밖으로 나간다. 청년은 엉금엉금 기어서 피범벅이 된 노모의 얼굴을 끌어안고 통곡한다. 청년은 밤새도록 꺼이꺼이 목 놓아 울부짖는다.


이튿날 청년은 노모를 살리는 조건으로 백지 한 장을 넘긴다. 백지에는 ‘아리랑’이란 조직명과 ‘신상원’, ‘봉원사’란 세 단어가 덩그러니 적혀 있다.




70.


무사시가 죽은 이후 카지 중위는 헌병대의 실질적인 권력자로 부상한다. 카지는 동이 틀 무렵 헌병대를 이끌고 봉원사로 이동한다.

한성의 안산 기슭에 가람을 튼 태고종의 본찰 봉원사(奉元寺)는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 3일천하로 정변이 막을 내린 뒤 한때 은신한 뒤로 개혁의 요람으로 알려진 곳이다.

행자 두 명이 밤새 이슬이 내린 경내를 쓸고 있다. 사찰 주변의 풀숲에 몸을 웅크린 헌병대 세 개조는 입김을 내뿜으며 초조하게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암자에서 기침소리가 들린다. 상원은 이부자리를 걷고 여닫이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다.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지저귀던 새들이 풍경소리에 놀라 날갯죽지를 펴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바람이 처마 밑으로 사납게 들이닥친다. 풍경은 몸체를 떨며 ‘댕댕댕’ 요란하게 울린다. 일순 불길한 낌새를 차린 상원의 눈빛이 번뜩인다. 그는 본능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하며 댓돌 위로 발을 내딛는다.

그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암자 뒤에 매복하고 있던 헌병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를 박석 위에 내리꽂는다. 헌병대에게 습격을 당한 상원은 곧장 헌병대사령부로 압송된다.


취조실은 바닥에 핏자국이 선명하고 벽에는 각종 고문기구가 걸려 있다. 취조실의 공기는 적혈구가 산화되면서 내뿜는 구리텁텁한 악취로 숨 쉬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한 시간가량 방치된 상원은 지그시 눈을 감고 의자에 앉아 있다. 그러나 악취는 살아 있는 유기체가 되어 스멀스멀 그의 몸체를 휘감는다. 관자놀이가 불거지고 동공이 팽창하면서 마른침이 입안에 흥건하다. 매스꺼운 나머지 그는 헛구역질이 하기 시작한다.

그가 쿨렁거리던 위액을 쏟아낼 즈음 육중한 철문이 열린다. 카지가 소매로 코를 막으며 헌병들과 안으로 들어선다.


“신출귀몰하는 신상원도 어쩔 수 없군!”

카지가 탁자에 다리를 올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댄다.

“암살범이 무사시를 저격하라고 지령을 내린 인물로 너를 지명했다. 그러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순순히 자백하는 게 서로한테 좋을 거야.”

그가 헌병에게 턱짓을 한다. 헌병이 종이와 연필을 상원에게 내민다.

“나는 불법으로 국토를 침탈한 적군을 상대로 항거한 대한제국의 결사단체 ‘아리랑’ 소속의 의용군이다. 따라서 나에게는 국제법에 입각하여 정치범으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

카지가 탁자를 힘껏 내리치며 벌떡 일어난다. 그러곤 그의 앞을 서성거리며 윽박지른다.

“또, 또, 또 그놈의 정치범 타령이군! 조센징은 정치범 말고 다른 단어를 모르나보지? 너희들은 그냥 선량한 사람을 백주대낮에 죽인 극악무도한 살인범일 뿐이야!”

“내 나라, 내 조국이 잘못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약소국이란 이유만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국권을 침탈한 너희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존재다. 긴말하지 않겠다. 국제법에 따라 정치범으로 대우해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한다.

상원은 완강하게 저항하며 뜻을 굽히지 않는다. 잔뜩 약이 오른 카지가 호통을 친다.

“네가 암살을 사주해서 죽인 사람은 민간인이야! 어디서 정치범을 운운하나?”

상원은 눈을 부릅뜨고 카지를 노려본다.

“난 전쟁에 참여한 군인의 신분이다. 그리고 내가 암살을 사주한 대상은 일본이 파견한 전쟁요원이 아니더냐?”

“넌 그저 하야시 공사를 암살하려다 민간인을 죽인 실패한 테러범에 불과해!”

“민간인? 총탄에 죽은 무사시란 작자가 언제부터 민간인이더냐? 그가 대한제국의 군사고문이었던 사실은 세상이 다 알고 있어!”

카지가 움찔하며 입술을 깨문다. 상원은 눈을 감으며 마지막 말을 남긴다.

“국제법에 따라 정당한 재판을 받을 때까지 진술을 거부하겠다.”

“정동성당폭파사건도 네가 한 짓이지? 다 알고 있다. 네 놈이 러시아 공사를 살해하여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한 것도 알고 있어. 러시아를 자극해서 독일과 프랑스와 연합하여 삼국간섭을 꾀하려 한 게 아닌가?”

상원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

“러시아 공사 대신 무고한 주교가 현장에서 즉사했다. 정동폭파사건도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 넌 민간인과 종교인을 죽인 인류의 적이자 패배자일 뿐이야.”


상원은 온갖 고문과 회유에도 아랑곳 않고 단식에 돌입한다. 정동성당폭파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검거됐다는 기사가 연일 신문의 머리기사를 장식한다. 러시아 측에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공조수사를 요청한다. 일본은 자국민의 살해사건으로 검거한 범죄인은 자국의 법에 따라 재판해야한다는 이유를 들어 러시아의 요청을 거부한다. 러시아가 개입하게 될 경우, 자칫 상원은 정치범으로 인정될 소지가 크다. 그렇게 되면 국제법정에 나선 그가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리는 것쯤은 코흘리개도 짐작이 가능한 일이다.


일본은 상원을 ‘살인교사 및 범죄단체조직죄’란 죄명으로 일반 재판으로 넘기려고 한다. 러시아 공사가 주축이 된 외교관들이 일본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다. 일본이 증인을 제거함으로써 정동성당폭탄사건의 배후를 은폐하려는 속셈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의외의 난관에 봉착한 일본은 상원의 신병 처리를 두고 골몰한다. 독방에서 단식하던 상원은 ‘국제법상의 정치범에 관한 처우’를 인용하며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거듭 요청하지만 번번이 좌절된다.


외교관을 상대로 한 일련의 테러가 비밀결사단체 ‘아리랑’의 소행으로 밝혀졌으며 현재 그 수괴가 헌병대에 체포되어 수사를 받고 있다는 기사가 장안에 화제로 떠오른다. 상원의 검거로 ‘아리랑’조직은 위축된다.

철창 사이로 빗긴 달빛이 누워 있는 상원을 내리비춘다. 비록 몸체는 강파르고 얼굴은 야위었지만 표정만큼은 열반을 앞둔 수도승처럼 평온하다. 독방을 비추던 달은 교교한 빛을 내뿜으려 서촌의 밤하늘을 밝힌다.

검은 그림자가 한옥이 즐비한 민가의 담을 훌쩍 뛰어넘는다. 젖을 물린 미라는 인기척을 알아채곤 황급히 아기를 이불로 덮어 숨긴다. 그러곤 바깥의 동정을 살핀다.


“야심한 밤에 누구냐?”

미라가 가슴을 졸이며 소리친다. 일순 장지문이 쓰윽 열리면서 경덕이 들어선다. 장돌뱅이로 분장한 그는 아기를 가슴에 품은 뒤 서둘러 불을 끈다.

“선생님이 체포됐어.”

경덕이 한숨을 내쉰다.

“저도 낮에 신문을 봤어요.”

미라가 나직이 소곤거린다.

“‘아리랑’이란 이름까지 나온 걸 보면 조직의 실체가 드러난 게 아닐까? 시내 곳곳에 헌병들이 깔려 검문을 하더라고.”

창호지로 스며든 달빛이 아이의 얼굴에 어른거린다.

“실체가 드러났다면 헌병대가 점방으로 들이닥쳤을 텐데, 아직 그런 기미는 없어요.”

미라의 말을 듣곤 경덕이 묻는다.

“참, 점방은 어때?”

“일본 낭인들이 툭하면 와서 행패를 부리곤 하죠. 고기를 대주는 상인도 여전히 찾기 힘들고요. 그리고 집주인이 점방을 빼달라고 몇 번 찾아왔어요. 주인 말로는 일본 상인들 등쌀에 못 견디겠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새로 헌병대장이 된 카지가 뒤에서 조종하는가 봐요.”

“갈수록 큰일이군! 선생님도 부재중인데 자금줄마저 끊긴다면, 그야말로 ‘아리랑’은 설 자리를 잃을지 모르겠어.”

“여보, 마음 졸이며 살지 말고 차라리 다 정리하고 고향에 내려가는 게 어때요? 야학을 하면서 계몽운동을 펼치는 것도 나라의 미래를 위하는 길이잖아요.”

“물론 그것도 나쁘진 않지. 그러나 선생님이 지금껏 꾸려온 ‘아리랑’을 당장 그만두면 훗날을 도모하기가 쉽지 않아. 미력이나마 내가 나서서 와해된 조직을 규합해야 돼.”

“헌병대가 서슬 퍼렇게 달려들 텐데, 걱정이네요.”

“상동교회도 이제 안전하지 못하니 거점을 옮겨야겠어. 당분간 은둔하며 조직원들을 찾아볼 생각이야. 당신도 부디 몸조심 잘 하고 있어.”

“집 생각일랑 마시고 조심히 다니세요.”


미라는 돈이 든 두툼한 봉투를 경덕에게 건넨다. 경덕은 아기의 뺨에 볼을 비빈 뒤 미라에게 입을 맞춘다. 그리곤 봉투를 가슴께에 깊이 넣고는 방을 빠져나간다.

경덕은 왕래가 잦은 전차역이나 먹자골목에서 조직원과 접선을 하며 회합을 꾀한다. 며칠 뒤 독립문 앞으로 보부상을 가장한 조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선생님을 이감시킨다는 정보를 빼냈습니다.”

‘아리랑’조직의 인천지부장을 맡고 있는 김 동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을 흘린다.

“어디로 이감시킨답니까?”

경덕은 양쪽 소매에 손을 집어넣고 서성거리며 묻는다.

“외국 공사들이 황제한테 하도 재수사를 하라고 압력을 가하니까, 헌병대 지하실 독방에 계신 선생님을 경무청 감옥서로 이감하려는 듯합니다.”

“경무청 감옥서라······?”

말을 되뇌던 경덕의 눈주름이 깊어진다.

“한 동지! 놈들이 이감할 때 습격해서 선생님을 탈출시키는 것이 어떻소? 선생님이 안 계시니 점조직으로 운영되는 조직이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앞장설 테니, 선생님을 탈출시킵시다!”

혈기왕성한 김 동지가 눈을 부라리며 힘주어 말한다.

“감옥소는 경비가 삼엄하기로 유명하지 않소? 이감할 때가 아니면 영영 선생님을 뵐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김 동지 말에 전적으로 찬성하오!”

수원지부장 박 동지가 동조한다.

“나도 적극 찬동하오. 선생이 계셔야 앞으로의 거사도 진행할 수 있지 않겠소? 한 동지 생각은 어떠시오?”

해주지부장 조 동지가 경덕의 의견을 재촉한다. 경덕은 조직원들과 천천히 눈을 마주치곤 얼마간 골몰한다. 드디어 그가 굳게 다문 입을 연다.

“좋소! 선생님을 탈출시킵시다. 김 동지는 정확한 이감 날짜를 알아내시오. 나와 다른 동지들은 세부적인 탈출 계획을 짜겠소.”


탈출 계획을 세운 조직원들은 순찰을 도는 헌병을 발견하곤 서둘러 자리를 피한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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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11 mail510
    작성일
    19.04.14 02:09
    No. 1

    우리삶에도 항상 금일 매진 연속이길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1 mail510
    작성일
    19.04.14 02:10
    No. 2

    앗 근데 요전화랑 좀 겹치는데 의도 하신건지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1 최장르
    작성일
    19.04.14 03:06
    No. 3

    오메... 59, 60, 61 단란이 겹쳤네요. 업데이트 하다가 그만 실수롤 저질렸습니다. 매의 눈으로 봐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실수투성이를 만회하도록 더욱 주의해서 올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죄송혀유~~~ 꾸벅...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1 mail510
    작성일
    19.04.14 03:06
    No. 4

    오메 ㄷ ㄷ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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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96화 좌익과 우익 +1 19.05.09 89 2 13쪽
95 95화 조선인민공화국 +1 19.05.09 91 2 17쪽
94 94화 일본패망(日本敗亡) +1 19.05.09 92 2 12쪽
93 93화 원자폭탄 +1 19.05.09 89 2 13쪽
92 92화 김일성 +1 19.05.09 93 1 14쪽
91 91화 독수리 작전 +1 19.05.09 91 1 14쪽
90 90화 이승만 +1 19.05.09 89 1 14쪽
89 89화 비밀요원 나타샤 +1 19.05.09 83 2 15쪽
88 88화 OSS(미국전략사무국) +2 19.05.09 89 2 16쪽
87 87화 승전(勝戰) +1 19.05.09 85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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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81화 육군정보학교 +2 19.05.08 80 2 11쪽
80 80화 홍콩행 +1 19.05.07 87 3 13쪽
79 79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3 19.05.07 8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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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77화 까레이스키 +3 19.05.07 79 2 12쪽
76 76화 탈출(脫出) +1 19.05.07 85 3 9쪽
75 75화 박정희와 최태민 +1 19.05.07 89 2 9쪽
74 74화 중일전쟁(中日戰爭) +1 19.05.07 82 2 13쪽
73 73화 강제이주 +3 19.05.06 80 1 12쪽
72 72화 마루타 +1 19.05.06 78 1 12쪽
71 71화 막후 실력자 +1 19.05.06 79 2 13쪽
70 70화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등장 +1 19.05.06 80 1 15쪽
69 69화 천황결사옹위청년단 +1 19.05.05 82 1 15쪽
68 68화 후흑학(厚黑學) +1 19.05.05 83 1 13쪽
67 67화 경몽장(耕夢莊) +1 19.05.05 83 1 12쪽
66 66화 학교(學校) +1 19.05.05 85 1 8쪽
65 65화 국제연맹(國際聯盟) +1 19.05.05 84 1 19쪽
64 64화 나타샤 +1 19.05.05 85 1 11쪽
63 63화 보고서 +1 19.05.05 85 1 11쪽
62 62화 시인과 영웅 +2 19.05.04 96 2 15쪽
61 61화 탄생의 비밀 +2 19.05.04 86 2 18쪽
60 60화 국경수비대 +1 19.05.03 84 2 13쪽
59 59화 제네바협약 +4 19.05.03 88 2 18쪽
58 58화 명백한 운명 +1 19.05.03 84 1 16쪽
57 57화 미두취인소(米豆取人所) +1 19.05.03 86 1 12쪽
56 56화 생포(生捕) +1 19.05.02 84 2 13쪽
55 55화 참패(慘敗) +1 19.05.02 85 2 14쪽
54 54화 향수병(鄕愁病) +1 19.05.02 83 2 18쪽
53 53화 음악회 +1 19.05.02 84 2 18쪽
52 52화 들개 진구 +1 19.05.02 89 2 24쪽
51 51화 가락지 +3 19.05.02 88 2 26쪽
50 50화 덫 +1 19.05.01 86 1 28쪽
49 49화 추격전(追擊戰) +1 19.04.30 85 2 35쪽
48 48화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1 19.04.30 91 2 39쪽
47 47화 광휘와 빅터 +3 19.04.29 85 2 33쪽
46 46화 특별수사본부(特別搜査本部) +4 19.04.29 85 2 41쪽
45 45화 만저우리(滿洲里) +4 19.04.28 82 3 35쪽
44 44화 폭풍전야(暴風前夜) +1 19.04.28 83 3 37쪽
43 43화 Boys, be ambitious! +1 19.04.27 85 2 39쪽
42 42화 만주국(滿洲國) +5 19.04.27 89 2 38쪽
41 41화 만몽영유계획(滿蒙領有計劃) +1 19.04.26 87 3 25쪽
40 40화 재회(再會) +1 19.04.26 85 3 30쪽
39 39화 빅터 한 +1 19.04.25 87 3 49쪽
38 38화 박진만 +2 19.04.25 93 3 45쪽
37 37화 정보국 5과 +3 19.04.24 100 3 51쪽
36 36화 마적(馬賊) 왕리 +2 19.04.24 98 3 49쪽
35 35화 삼두정치(三頭政治) +2 19.04.23 97 3 42쪽
34 34화 주찬 +1 19.04.23 93 3 51쪽
33 33화 만주야사(滿洲野史) +2 19.04.22 97 3 50쪽
32 32화 서광휘 +2 19.04.22 98 3 47쪽
31 31화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 +2 19.04.21 107 4 47쪽
30 30화 미쓰야협정(三矢協定) +4 19.04.21 102 4 46쪽
29 29화 출산(出産) +3 19.04.20 106 4 43쪽
28 28화 밀항(密航) +2 19.04.20 102 4 45쪽
27 27화 불령선인(不逞鮮人) +1 19.04.19 103 4 43쪽
26 26화 님의 침묵 +1 19.04.19 108 4 48쪽
25 25화 이민(移民) +2 19.04.18 121 4 39쪽
24 24화 회자정리(會者定離) +2 19.04.18 108 5 44쪽
23 23화 여걸(女傑) 수잔 +5 19.04.17 108 4 46쪽
22 22화 3·1 만세운동 +5 19.04.17 108 4 44쪽
21 21화 천적(天敵) +1 19.04.16 109 5 49쪽
20 20화 아카키 타이요우(赤木太陽) +4 19.04.16 114 5 52쪽
19 19화 망국(亡國) +4 19.04.15 123 3 49쪽
18 18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3 19.04.15 126 3 46쪽
17 17화 한성진격작전(漢城進擊作戰) +4 19.04.14 128 4 49쪽
16 16화 의병전쟁(義兵戰爭) +4 19.04.14 127 4 43쪽
15 15화 춘투(春鬪) +5 19.04.13 135 3 47쪽
» 14화 암살미수(暗殺未遂) +4 19.04.13 143 3 37쪽
13 13화 결혼(結婚) +3 19.04.12 218 6 42쪽
12 12화 돈버거 +9 19.04.12 194 6 44쪽
11 11화 대한제국(大韓帝國) +2 19.04.11 214 7 45쪽
10 10화 김출세(金出世) +7 19.04.11 235 8 42쪽
9 9화 낙향(落鄕) +4 19.04.10 252 7 42쪽
8 8화 혁파안(革罷案) +4 19.04.10 265 8 41쪽
7 7화 증기자동차 +2 19.04.09 312 11 22쪽
6 6화 2차 사행(使行) +2 19.04.09 310 12 24쪽
5 5화 견문록(見聞錄) +5 19.04.08 353 13 19쪽
4 4화 북경(北京) +1 19.04.08 437 11 19쪽
3 3화 만남 +1 19.04.08 540 12 15쪽
2 2화 1차 사행(使行) +2 19.04.08 777 12 14쪽
1 1화 파락호(破落戶) 이하응 +17 19.04.08 1,492 1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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