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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공모전참가작 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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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최장르
작품등록일 :
2019.04.08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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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2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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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5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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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쪽

19화 망국(亡國)

님의 침묵




DUMMY

114.


미천골의 옛집은 세월의 무상함을 증명이라도 하듯 살풍경하다. 한 씨 가문의 숨결이 살아 숨 쉬던 집은 이미 아닌 성싶다. 마당을 가로지른 덩굴은 주춧돌과 기둥을 휘감고 벽까지 가지를 쳤다. 촉수가 지나간 자리마다 균열이 생기고 버짐이 피듯 세월의 떼가 켜켜이 서려있다.

성학이 세상을 떠난 후 눈에 띄게 기운 가세가 몰락의 시작이었다면, 집안을 돌보지 않은 경덕의 처신은 가문의 쇠락을 부추긴 면이 있다. 그나마 집안일을 살피던 선달과 김 서방마저 죽자 주인 없는 집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변한 것은 이뿐만이 아닌 듯하다. 경덕 일가를 알아보고 단박에 달려온 아낙이 헐떡거리며 말을 잇는다.


“서방님, 아씨!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아낙은 한때 경덕의 집에 드난살이하던 유모다. 집 안을 살핀 뒤 유모는 원망 섞인 투로 저간의 사정을 늘어놓는다.

“저, 쳐 죽일 놈이 글쎄 일을 내고야 말았습니다. 서방님!”

“유모, 찬찬히 알아듣게 말을 해보세요.”

거두절미하고 실체를 궁금히 여긴 경덕이 유모의 발설을 돋운다.

“짐승의 탈을 뒤집어쓴 놈이 글쎄, 대감마님이 기거하던 사랑채에다가 살림을 냈지 뭡니······”

입에 담지 못할 불경이라도 되는 양 유모는 손사래를 치며 말을 채 잊지 못한다.

이번에는 경덕이 채근하고 나선다.

“유모! 저놈은 또 뭐고, 살림은 또 무슨 소리요?”

“민망스러워 입에 담기는 뭐하지만 이실직고하겠습니다. 청지기 아들 출세, 그놈이 무당의 딸을 불러들여 대감마님이 거하시던 사랑채에다 살림을 차렸습니다. 게다가 허구한 날 시정잡배들을 끌어들여 술판을 벌이기 일쑤였습니다.”


유모의 말은 참말이었다. 주인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라도 그 자리를 비켜 앉는 것이 인심인데, 출세의 작태는 빈축을 살만했다. 세상이 변하면서 인심 또한 변하는 것 같아 경덕은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경덕은 가족을 이끌고 대문으로 들어선다. 유모의 말대로 사랑채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보니, 남녀가 뒤섞여 노는 질탕한 소리가 분명하다. 얼굴이 달아오른 경덕은 아이들을 안채로 들인 뒤 서너 차례 헛기침한다. 낯선 낌새라도 차린 것일까. 오히려 성난 목소리가 마당까지 쩌렁쩌렁 울린다.


“도대체 어느 놈이 백주대낮에 신혼의 단꿈을 훼방 놓는 거여? 네 이놈을 가만두지 않겠다!”

“지나가는 장돌뱅일 텐데, 뭘 신경을 써. 어여 하던 일은 마저 끝내야지. 으흠······”

교태 섞인 여자의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별안간 무쇠손이 장지문을 와락 열어젖힌다. 툇마루에 한 발을 내디딘 사내의 복장이 야릇하다. 웃옷은 풀어헤쳐진 상태이고 급하게 추어올렸는지 아랫도리가 한 손에 쥐어져 있다. 한창 약이 오른 사내는 욕지거리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아니, 도대체 어느 잡놈이 남의 집을 제집처럼 들락거려?”

등을 돌리고 있던 경덕이 천천히 돌아선다. 그는 어색한 미소까지 지어 보인다. 어떡해서든지 큰 소리는 피해 볼 요량이다.

“출세야, 나다 나! 저잣거리에서 마주치면 몰라보겠구나!”

출세는 일순 제자리에 붙박인다. 선달이 죽은 뒤로 주인 행세를 하면서 인근 경작지의 소작료까지 챙기며 살아온 터였다. 제 발이 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철면피로 악명을 떨치던 그라지만 갑자기 나타난 주인을 보곤 그만 안절부절못한다. 맨발로 마당에 내려선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아니, 도련님 아니신가요! 기별도 없이 어인 일로······?”

“먼 길을 와서 지쳤으니 후에 차근차근 이야기하도록 하자!”

“편하실 대로 하십시오.”


애써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경덕은 안채로 사라진다. 출세의 가는 눈매가 심하게 요동친다. 그는 가래침을 마당에 내뱉은 뒤 사랑채로 든다. 방안에는 아직 식지 않은 육정이 그를 원하고 있다. 담배 한 쌈을 말아 쥔 그는 여인의 손길을 뿌리친다. 분이 가라앉지 않는 성싶다.


“염병하네! 이제 와서 주인 행세를 하겠다고!”

담배 맛조차 역한 듯 그는 남은 불씨를 암팡지게 비벼 끈다.

“그렇게는 아니 될걸! 암만 안 되고말고!”

젖무덤을 내민 채 그의 몸으로 파고드는 월화의 안달이 출세의 심기를 살살 긁기 시작한다.

“자기야! 우리같이 천한 것들이 뭔 힘이 있어. 주인이 나가라면 나갈 것이고, 죽으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해야 할 게 아니겠어?”

부릅뜬 눈이 그녀의 알몸을 훑는다. 싸늘한 기운이 훅 끼친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출세는 분풀이하듯 월화의 나신을 탐한다. 수 돌쩌귀라도 된 양 그는 암 돌쩌귀의 아귀를 옥죄듯 월화의 나신에 집착한다. 자지러지는 교성은 마치 앞으로 일어날 마찰을 경고라고 하듯이 정확히 안채를 향한다.

출세가 보인 도발적인 행동은 제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곳곳을 돌아다니며 흘레붙는 들개의 본능이 표출된 것과 다르지 않다.

경덕과 미라는 아들을 품에 안곤 귀를 틀어막는다. 얼마간 말짱 허공만 바라보는 먹먹한 시간이 흐른다. 이후로 경덕 일가와 출세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115.


일본은 안중근을 처형한 뒤 국제사회로부터 제국주의의 본성을 드러냈다는 비난에 휩싸인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이어 제2대 통감을 지낸 소네 아라스케는 1910년 5월 30일 병약하다는 이유로 전격 해임된다. 현역 육군대장이자 육군대신을 맡고 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제3대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합방정책이 급물살을 탄다.

현역 육군의 총수가 통감이 되면서 한반도는 그야말로 군사력을 앞세운 무단 통치의 대상이 된다. 한국경찰 3,200명과 일본경찰 2,000명 그리고 일본헌병 2,000명과 헌병 보조원 4,000명이 정예부대 2개 사단과 합동으로 전국 각지를 거미줄처럼 연계하여 한국인을 옥죄기 시작한다.


1910년 7월 23일 데라우치 통감은 ‘대한민보(大韓民報)’의 발행을 정지시키고,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판매를 금지하며 언론을 통제한다. 애국청년 이재명에게 습격을 당해 중상을 입은 이완용이 회복되자 데라우치 통감은 그를 총리대신으로 발탁하여 친일내각을 구성한다.

8월 18일 데라우치는 관저에서 이완용과 조중응과 함께 비밀리에 다듬은 병합조약의 초안을 내각회의에서 합의토록 의논한다.


8월 22일 한성 거리에 헌병들이 배치된다. 순종 황제는 군인들이 포위한 어전에서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條約)’에 대한 안건을 받아본다. 이미 권력을 잃은 순종 황제에게 안건을 올리는 것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총리대신 이완용이 주재하는 내각회의에서 한일합방조약에 관한 문서가 조인된다.

양국의 대표로 조약에 날인한 이완용과 데라우치는 거센 국민적 저항이 두려운 나머지 조약체결을 숨긴다. 그러곤 도심의 집회를 철저히 막고 원로대신들을 가택에 연금한 뒤에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條約)’을 기습적으로 반포한다.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는 양국 간에 특수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의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이 선책이라고 확신하여, 이에 양국 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 일본국 황제폐하는 통감 자작 데라우치를, 한국 황제폐하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각기의 전권위원으로 임명한다.’


‘한일병합조약’의 전문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황제와 국민은 아무런 결정권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주권국가로서의 지위를 박탈함과 동시에 일본군의 속국으로 삼으려는 고도로 계산된 계략이 숨겨진 탓이다.

조문 8개조 가운데 제1조와 제2조에서 한국이 주권국임을 포기하는 내용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는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기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한국을 일본제국에 완전히 병합함을 승낙한다.’


고작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원문과 단지 8개 조항으로 구성된 한일병합조약에 의해서 27대에 걸친 조선왕조 519년이란 영욕의 세월은 1910년 8월 29일 단말마(斷末魔)의 비명조차 내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가뭇없이 사라진다.




116.


낙향한 이후로 미천골에서 처음 맞이하는 한 씨 일가의 여름나기는 고난의 연속이다. 해의 주기에 따라 일과가 결정되는 두메산골의 생활은 도회지에서 살아온 삶과는 사뭇 다르다. 특히 미라의 농촌 정착기는 눈물겹다. 남편과 두 아들이 혼곤한 잠에 빠져있을 무렵 닭들은 여지없이 횃대 위에서 날개를 퍼덕인다.

동이 틀 무렵 수탉이 여러 홰 울기 시작한다. 잠에서 깬 미라는 부스스한 머리를 주섬주섬 뒤로 넘기며 이부자리를 걷는다. 그러곤 슬그머니 방을 나선다. 아궁이에 불을 지핀 뒤 간밤에 불린 쌀이 든 솥을 앉힌다.

밥물이 넘쳐흐르면 깜빡 졸던 그녀가 서둘러 불쏘시개로 잔불을 헤집는다. 얼추 밥이 다 될 무렵 안방에서 기침 소리가 들린다. 마루로 나선 경덕은 우두둑우두둑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편다. 밤새 이완된 뼈마디가 자리를 잡으면 비로소 그는 우물가로 다가가 냉수 한 사발을 들이켠다.

얼마 전 가타부타 말도 없이 집을 나간 출세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마당을 쓸던 그가 사랑채 문을 연다. 방바닥은 덜렁 옷 몇 가지만 나뒹굴 뿐 썰렁하다.

상이 다 차려질 즈음 두 아들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다. 그러곤 배고픈 속사정을 눈빛으로 호소한다. 단출한 밥상에 둘러앉은 가족은 소소한 기쁨으로 하루를 맞이한다. 반쯤 물러앉은 경덕이 숭늉을 마시는데, 툇마루에 묶어두었던 누렁이가 요란하게 짖어댄다.


두레를 이끄는 행수가 섬돌 앞에서 거친 숨을 몰아쉰다.

“서방님, 서방님!”

경덕은 마루로 나서며 눈을 되록거린다.

“아니, 행수가 아침나절부터 어인 일인가?”

“큰일 났습니다, 서방님!”

“호랑이가 뒤를 쫓기라도 한 게야? 왜 이리 아침부터 숨이 넘어가는가?”

행수를 맡으며 마을의 대소사를 제 일처럼 다루는 오 참봉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잇는다.

“어저께 오일장이 선다고 해서 읍내에 갔더랬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아침부터 장이 열리기는커녕 개 한 마리도 얼씬 않더란 말입니다. 배도 고프고 해서 주막으로 갔는데······”

일설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오 참봉이 슬그머니 뒤를 돌아본다. 소문을 듣게 몰려온 주민들이 마당 안을 기웃거린다.


이상한 낌새를 차린 경덕이 고개를 모로 틀곤 말을 재촉한다.

“어허, 이 사람이! 변죽만 올리지 말고 실상을 얘기하시게!”

“주막에 갔더니만 글쎄 한성에서 막 도착했다는 장돌뱅이 앞으로 사람들이 몰려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여기처럼 말입니다.”

그는 잠시 뒤를 돌아본 뒤 말을 잇는다.

“그치 말로는 내각총리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이 합병조약에 조인을 했다고 합니다. 반란이 무서워 쉬쉬하다가 결국 순종 황제께서 마지못해 ‘한일합방조약’을 선포했다고 합니다.”

고개를 빼 들고 귀동냥을 하던 노인이 참견한다.

“무식쟁이라 말뜻을 모르겄는데, 뭐라고? 합병이라면 누구랑 누구랑 합친다는 거 아니여?”

경덕은 노인의 말을 무시한 채 홉뜬 눈으로 행수를 꼬나본다.

“뭐라고? 지금 금방 합방이라고 말을 한 겐가?”

화들짝 놀란 행수가 무르춤하며 턱을 끄덕인다.

“네, 그렇습니다요!”


부엌에 서서 행수의 말을 듣고 있던 미라가 숭늉이 든 쟁반을 떨어뜨린다. 일순 뭇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한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주섬주섬 그릇을 주우며 흐느낀다. 까닭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리송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눈치를 살핀다. 잠시 뒤 안방에서 갓과 상복차림을 한 경덕이 댓돌을 딛는다. 행수와 주민들이 두 갈래로 길을 터준다. 마당에 우뚝 선 그는 눈을 감곤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얼마간 정적이 흘렀을까. 섬광이 번쩍 마른하늘을 가르더니, 바투 하늘에서 우레가 친다. 이윽고 굵직한 장대비가 요란하게 내리기 시작한다.


“아이고, 아이고! 억조창생의 조선왕조가 무너졌다니, 이 망국의 한을 어이하면 좋을 거나! 꺼억, 꺼억!”


경덕은 비를 맞으며 서녘 하늘을 향해 절을 하며 목 놓아 곡을 한다. 서로 눈길을 주고받던 사람들도 얼떨결에 젖은 땅에 무릎을 꿇고 통곡하기 시작한다. 한일합방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미천골은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된다.




117.


전국에서 상복을 입은 백성들이 만장(輓章)을 들고 대한제국의 주검을 실은 상연(喪輿)의 뒤를 따르며 망국의 한을 울부짖는다. 여름이 다 가도록 나라를 읽은 백성의 분노와 슬픔은 좀체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자결하는 의사(義士)들이 속출하고 곳곳에서 열사(烈士)들이 들고일어난다. 미리 만반의 태세를 갖춘 일본은 군대를 앞세워 슬픔에 사로잡힌 망국민들을 철저하게 짓밟는다.

저항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작전이 한반도 전역에서 저인망식으로 펼쳐진다.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설움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하던 항일투사들은 헌병대의 사냥개에 내몰려 쫓겨나 듯 조국을 떠난다. 그들은 하루아침에 국적 불명의 방랑자가 되어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떠돌아다닌다.


9월이 되어서야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한풀 꺾인다. 경덕은 두 아들을 데리고 산에 오른다. 경덕은 멀리 백두대간의 준령 사이로 굽이도는 남한강의 지류를 바라보며 숨을 고른다. 뒤편 양지바른 둔덕에 비석이 서 있다. 그는 두 아들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며 말을 잇는다.


“인호, 인서는 잘 들어야 한다.”

“네, 아버지!”

인호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경덕에게 대꾸한다. 장난기가 동한 인서는 건성으로 고개만 까딱할 뿐 팔랑거리며 주변을 휘젓는 나비에게 온정신을 쏟는다.

“한때는 이곳 묘에서 내려다보이는 땅이 전부 한 씨 문중 것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척박한 황무지를 개간하여 기름진 옥토로 일구어 놓으신 것이다. 이 애비가 너희들만 할 때, 할아버지께선 땅은 경작하는 자에게 돌아가야 한다며 옥토의 반을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해 주셨다. 앞으로 명심해야 한다. 항상 소유의 반은 남과 나눠야 한다는 조상의 지혜를 잊지 않도록 말이다.”

“예, 아버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형제는 저 멀리 할아버지가 개간했다는 평야를 바라본다. 경덕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형제와 평야를 번갈아 본다.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이마에 와 닿았다. 조상의 손길이라도 되는 양 경덕은 활개를 펴고 바람에 몸을 내맡긴다. 형제는 아버지의 몸짓을 힐끔거리며 흉내를 낸다.


경덕은 성묘를 마치고 마을을 방문한다. 낙향한 뒤로 제대로 마을 원로들에게 인사를 못했기 때문에 찾아 나선 길이다. 그가 온다는 기별을 받은 향교는 평소 한 씨 집안과 친분이 있는 원로들로 북적인다.

사당의 제를 주관하는 양 진사와 서당의 훈장을 지낸 최 진사가 원로를 대표해서 그를 맞이한다. 원로들과 경덕은 정중히 인사를 나눈 다음 술상이 마련된 사랑채로 자리를 옮긴다. 술잔이 몇 순배 돌자 한 씨 문중의 미담이 화두에 오른다.


“그래도 대사간 대감께서 미천골로 오신 후로 우리 마을이 크게 번성한 거야!”

“그렇다마다. 옛적에 외지사람들은 미천골이라면 숯가마에서 숯이나 굽는 오지쯤으로 알았다니깐? 장터에서도 미천골에서 왔다면 손가락질을 받기 일쑤였지.”

“어른신들 말씀이 백번 지당하십니다. 동부승지 대감께서 황무지를 개간하지 않았다면 어디 미천골에 인적이 닿기나 했을까요?”

미천골에서 잔뼈가 굵은 원로들은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칭찬 일색이다. 그러나 흐뭇한 자리는 이내 무겁게 내려앉고 만다. 얼마간 여흥이 지속할 무렵 경덕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허 참봉이 씩씩거리며 눈을 부라린다.

“도련님은 모르실 겁니다. 선달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오늘같이 좋은 날 뭐 하러 궂은 얘기를 꺼내는가? 술이 된 것 같으니 오늘은 그만 물러가는 것이 좋을 듯 허이.”

짐짓 허 참봉의 주사를 염려하던 양 진사가 선을 긋는다. 참봉은 턱을 모로 틀곤 진사를 쏘아보며 대거리한다.

“진사 어르신! 도대체 뭐가 무서워 쉬쉬한답니까?

“어허, 이 사람이 도가 지나치군!”

최 진사가 그를 나무란다. 그러나 허 참봉은 개의치 않고 목소리를 돋운다.

“도련님은 아셔야 합니다. 그토록 명망이 자자하던 한 씨 문중이 작금에 와서, 왜 이렇게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지 말입니다. 도련님은 아셔야 한다고요. 꺼······억!”

걸쭉하게 트림을 한 그가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작정한 듯 나선다.

“풍을 앓던 선달이 몸져눕자 청지기 김 서방도 병을 얻었습죠.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선달이 돌아가시고 김 서방도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졸지에 줄초상을 당하자 청지기 자리는 대를 이어 출세가 맡고, 진만이 마름이 되어 황무지를 관리하게 됐습죠,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을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맞아! 출세, 그 녀석만 가사를 탕진하지 않았더라도 선달님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을 텐데······.”

최 진사가 연신 곰방대에 불씨를 당기며 혀를 끌끌 찬다.

“풍이란 게 어디 쉽게 고쳐지누? 다 소용이 닿는 침과 약재가 있는 법인데······”

황 노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기다렸다는 듯이 허 생원이 노인의 말을 받는다.

“그렇습죠. 어디 풍이란 것이 무당을 불러다 굿을 한다고 낫는 병인갑쇼?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 나서도 시원찮을 판에 팔도 무당을 전부 불러다 굿을 벌였으니, 쯧쯧쯧!”

모두가 혀를 차며 당시의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그래도 처음에는 출세가 팔을 걷어붙이고 하는 척은 했다네. 차도만 보였어도 굿판까지 벌이지는 않았을 게야.”

양 진사가 도리질하며 당시를 회상한다.

“그랬습죠. 출세, 그놈도 처음에는 어떡해서든지 선달의 풍을 고쳐보려 했습죠. 그러나 병색이 차도가 보이지 않자 고약한 무당의 꾐에 넘어가 그만 땅문서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죠. 돈도 써본 놈이 쓴다고 동전 몇 닢에 탁배기 잔이나 기울이던 놈이 문서를 보니까 눈깔이 확 뒤집힌 게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진만이 나머지 소작지라도 관리했기 망정이지, 그마저도 출세 손에 넘어갔다면 오늘날 도련님 신세가 어찌 될 뻔했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침이 마르도록 장광설을 늘어놓던 허 참봉은 단박에 술잔을 비운다.

경덕의 가족이 낙향하여 그나마 조석으로 끼니 걱정은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진만의 덕이 크다.

“진만이라면 장터를 떠돌다 서양 신부를 따라 미천골로 들어온 동냥치가 아닌가?”

게 중에 나이가 지긋한 양 진사가 희미한 기억을 떠올린다.

“이르다 뿐입니까? 민란으로 부모를 잃고 동냥치로 생활해서 그렇지, 마음 씀씀이며, 행동이 똑 소리 나지 않습니까. 출세 놈하고는 본질이 달라도 하늘과 땅처럼 다릅죠.”

한 씨 집안의 일이라면 속속들이 꿰고 있는 허 참봉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진만이 장리를 놓아 이식을 취했다 하는데, 그게 참말인가?”

최 진사의 말에 이번에도 허 생원이 참견한다.

“저도 처음에는 망둥이가 뛰니 꼴뚜기도 뛰는 줄 알았습죠. 그런데 장리를 꿔 쓴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니, 소문하고는 거리가 멀다, 이 말입니다. 초근목피로 보릿고개를 나는 사람들한테 춘궁기에 곡식을 대고 가을에 거둬들이는데, 그 이자가 여느 장리하고는 반에 반도 못 미쳤다고 합니다. 샘터골에선 진만의 장리를 쓰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모두들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한목소리로 칭찬하더이다.”

“정승의 인심이 후하면 그 집의 개를 보고도 절을 한다더니만, 진만이 꼭 그 짝이군. 허허허!”

황 노인이 무릎을 치며 끼어든다.

“그랬었군요. 저는 땅문서가 온전하기에 출세에 관한 이야기가 풍문인 줄만 알고 있었습니다.”

허 참봉이 눈알을 슴뻑거리며 매조지를 짓는다.

“소작지를 팔아먹은 출세 놈을 살린 것도 진만이고, 도련님 가문의 소작지를 그나마 사들인 것도 진만입죠. 출세, 그 놈은 진만이 죽을 때까지 업고 다녀도 은공을 갚으려면 멀었습니다. 절대 상종해서는 아니 될 몹쓸 놈입죠.”


그저 묵묵히 소처럼 일만 하는 머슴으로 기억되던 진만이 한 씨 가문의 명맥을 지킨 장본인이라니. 그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지낸 경덕은 한없이 자신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들지 못한다. 진만에 대한 이야기는 취기가 동한 허 참봉의 입담을 통해 밤새 이어진다.



118.


마을의 원로들로부터 전후 사정을 알게 된 경덕은 미천골을 돌며 가문의 땅에 대하여 속속들이 파헤친다. 조사가 얼추 이루어진 뒤 그는 출세와 진만을 안채로 불러들인다. 집안 대소사의 내막을 따져 공(功)이 있으면 상을 내리고, 과(過)가 있으면 추궁이 뒤따를 것이다.


“그간 가문 살림을 맡아주어서 뭐라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네. 우리 집안의 가세가 기운 것은 두말할 것 없이 후손인 내 불찰이 컸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렇게나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자네들의 정성이 남달랐기 때문이지. 그래서 오늘 그 고마움을 표하기로 했네.”

경덕은 함에서 땅문서 두 장을 꺼낸다. 순간 출세의 눈가에 광채가 번뜩인다.

“이 땅은 일 년 농사를 잘 지으면 한 식솔이 먹고도 남을 정도로 소출이 넉넉한 땅이네. 일찍이 할아버지께선 이 땅을 집안을 일으킬 명당이라 말씀하시곤 했지. 그리고 이 밭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 팔면 집 한 칸 족히 장만할 수 있을 것이야.”

군침을 삼키던 출세는 고개를 자라목처럼 움츠린다. 하지만 경덕의 온화한 시선은 그가 아닌 진만 쪽으로 향한다.

“박 서방, 저간의 얘기는 다 들어 알고 있네. 이 정도면 자네 식솔들이 살아가는 데 별 어려움은 없을 것이야.”

“아닙니다, 도련님! 제가 감히 어떻게 대감마님께서 애지중지하던 땅을 받는단 말씀입니까. 당치도 않습니다. 제발 그것만은 거두어 주십시오.”

진만은 경덕의 호의를 완강히 거절한다. 독기를 품은 출세가 두 사람의 대화에 아금받게 끼어든다.

“아니, 서방님! 그것이 어떤 땅인데 미련한 진만이한테 맡긴단 말씀입니까? 해를 넘기기도 전에 쑥대밭이 되고 말 겁니다.”

경덕은 출세의 존재를 잊은 듯 본체만체한다. 그는 여전히 진만을 향해 서글서글한 시선을 보낸다.

“냉큼 넣어두게! 마음 변하기 전에 어서 가서 집터를 고르지 않고 무얼 그리 꾸물거리는 겐가?”

땅문서를 받아든 진만은 큰절을 하며 고마움을 표한다. 잠시 후 진만이 땅문서를 들고 방을 나서자 경덕은 함을 매몰차게 닫아버린다. 크게 낙담한 출세는 고개를 돌리곤 짐짓 경덕이 들으라는 투로 입엣말로 중얼거린다.

“주인 없는 집안을 죽어라 지켜줬더니만 은공은 고사하고 쥐뿔도 없군!”

경덕은 치솟은 노기를 다스리며 냉정하게 대한다.

“부모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내 불효가 막심하여 더는 재산이 축난 이유를 추궁하지 않겠다. 그러나······”

약이 바싹 오른 출세가 말허리를 자르며 대거리한다.

“서방님! 장터 사람들이라면 모두 다 알 겁니다. 선달 어른의 병구완을 위해 제가 얼마나 백방으로 뛰어다녔다는 것을 말입니다. 소처럼 일만 하는 진만이 녀석에게는 그리 아끼시던 문전옥답까지 상으로 내주시면서, 그래, 풍 맞은 환자를 살려보겠다고 발이 부르트게 돌아다닌 소인에게는 밭 한 뙈기조차 아깝단 말씀입니까?”

“네, 이놈! 감히 어디서 선달 어른을 들먹이느냐? 정히 네가 한 일을 아직도 모른다고 발뺌할 셈이더냐?”

“서방님, 정말 너무 하십니다. 제가 문서에 손을 댄 것은 사실이나, 그 모두 선달 어른의 허락이 없었던들 가능이나 한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흑심이 있었다면 땅을 팔아도 벌써 팔아먹고 경성으로 도망갔지, 뭐 하러 다 쓰러져 가는 집구석에 남았겠습니까?”

출세는 작정한 듯 눈을 부라리며 조목조목 따진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거라. 더는 들을 말이 없을 듯하다.”

“가지요, 갑니다! 오늘은 이렇게 물벼락 맞은 개꼴이 되어 물러갑니다! 하지만 할아버님이 저한테 지어주신 출세란 이름에 걸맞게 꼭 출세해서 돌아오겠습니다. 그때 가서 진정 누가 개꼴을 당하는지 두고 보십시오!”


쾅, 장지문을 박차고 나선 출세는 대청마루에 놓인 자리끼를 걷어찬다. 봉변을 당한 주전자가 마당에 경박한 소리를 내며 나뒹군다. 그 길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솟을대문을 발길로 걷어차고 나간다.

경덕은 마루에 서서 동구 밖을 벗어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본다. 산허리에 석양이 걸리자 주위는 온통 붉은 기운으로 물든다. 활화산 같은 그의 성미가 못 미더운 것인지, 경덕은 얼마간 땅거미가 젖어들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한다.


미라의 목소리가 안방에서 들린다.

“인호야, 밤바람이 차구나. 아버지 안으로 모시고 오너라.”

“예!”

마루로 나온 인호가 멀거니 달을 바라보는 그에게 다가간다.

“아버지,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국이 식어갑니다.”

“하루해가 이리도 짧으니 달빛이 오늘따라 더 영롱하구나! 그래, 어서 안으로 들자!”


인호가 마루까지 나와 재촉하자 그는 마지못해 안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스산한 바람이 잠시 처마 밑에서 소용돌이를 치곤 이내 사라진다.




119.


설거지를 마치고 나온 미라가 서둘러 옷매무시를 가다듬는다. 그러곤 부엌과 마루 사이의 물림간에 놓인 보자기를 주어든다. 호롱불이 어른거리는 창살문 안에서는 아버지를 따라 경을 읊는 두 아들의 목소리가 낭랑하다.


“여보, 다녀올게요.”

물림간에 면한 쪽문이 빼꼼 열리면서 인서가 투정을 부린다.

“나도 엄마 따라가면 안 돼?”

경덕이 슬그머니 인서의 팔을 잡아끈다.

“엄마는 공부하러 가는 길이야. 넌 형이랑 공부해야지.”

“칫!”

토라진 인서가 고개를 돌린다. 경덕이 비죽 얼굴을 내밀며 미라에게 당부한다.

“밤이 깊으니 조심히 다녀오구려.”

“네.”


미라는 서둘러 집을 나선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산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촌락을 훤히 비춘다. 고샅길을 벗어난 주민 여러 명이 저만치 언덕 끝 초가집으로 잰걸음을 놓는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진만의 집에서 한글강습소가 열린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배움에 뜻을 둔 학생 이십여 명이 사랑채에 모여 미라의 등장을 반갑게 맞는다.


“다들 안녕히 지내셨지요?”

“네!”

“요새 바빠서 그런지 숙제도 해오지 않고 게으름 피우는 학생이 많아요.”

벌써 들창 아래 자리를 잡은 김 노인은 졸기 시작한다.

“추수가 끝나가니깐 수업도 일주일에 두 번으로 늘리고 숙제도 많이 내줄 겁니다.”

미라가 공연히 으름장을 놓자 여기저기서 꾀병을 앓듯 푹푹 한숨 소리가 터진다.

“선생님, 배우면 세상을 편히 산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야, 그랬지?”

“그런데, 왜 선생님은 우리한테 숙제를 주시나요?”

“그거야 까먹지 말고 내 것으로 만들라는 뜻에서지.”

“한글강습소에 와서 동무들과 함께 배우는 건 재밌지만, 왜 숙제만 하면 잠이 쏟아지고 눈꺼풀이 내려앉는 걸까요?”

앞줄에 앉은 아이들의 맹랑한 질문에 폭소가 터진다.

“이 맹추야! 그거야 네가 밥상을 물리자마자 숙제를 해서 그렇지?”

뒷줄에 앉은 청년이 아이에게 꿀밤을 먹이며 나무란다.

“배우고 익히면 좋은 세상이 온다고 하는데, 숙제 없는 세상은 언제 오려나? 아, 숙제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어라!”

중간에 앉아 있던 소녀가 익살스럽게 푸념을 늘어놓자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자, 이제 그만하고, 책을 폅시다. 오늘은 한글의 말본 즉, 말의 구성과 규칙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사랑채 맨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은 진만의 가족도 행여 놓칠세라 미라의 입 모양을 따라 하며 한글을 익히는 데 열중한다. 학구열에 불타는 학생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적막한 촌락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잔뜩 술에 취한 출세가 비칠거리며 언덕을 넘는다. 그는 숨을 고르며 잡풀 위에 오줌을 눈다. 그러곤 잠시 몸을 부르르 떨다가 멈칫한다. 밤공기를 타고 전해오는 인기척을 접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전에 그가 느껴보지 못한 훈훈한 인간의 정이 넘치는 소리였다.

소리를 뒤쫓는 그의 걸음이 빨라진다. 어느덧 발걸음이 환하게 켜진 진만의 집 앞에 닿는다. 삽살개가 으르렁거리자 그는 얼른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오징어 다리를 휙 던진다. 삽살개가 오징어 다리를 물고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간다. 그는 슬그머니 사랑채로 접근한다.

사랑채 안에서는 수업이 한창이다. 후끈 달아오른 열기로 미라와 학생들은 콧잔등에 땀이 맺히고 낯빛이 발그레하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건 위정자들의 잘못도 크지만, 백성이 무지한 탓도 있습니다. 따라서 하루속히 빼앗긴 나라를 독립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무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미라가 목소리를 높이자 상기된 듯 뭇 시선이 초롱초롱 빛난다.

“오늘은 독립문 정초식에서 배재학당 생도들이 부른 '성자신손 오백년'을 배우도록 합시다. 자, 내가 부르면 한 소절씩 따라 익히세요.”

“네!”

목소리를 가다듬은 미라가 또박또박 선창하면 모두 따라 한다.

“성자신손 오백 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본국일세.”

“성자신손 오백 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본국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충군하는 일편단심 북악 같이 높고, 애국하는 열심의기 동해같이 깊어.”

“충군하는 일편단심 북악 같이 높고, 애국하는 열심의기 동해같이 깊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툇마루에서 숨죽인 채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출세가 멈칫한다. 진만의 아내가 장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얼떨결에 놀란 그는 폴짝 담을 넘어 어둠 속으로 숨는다. 노래가 끝이 나고 박수가 터진다. 수업을 마친 미라가 마당으로 나와 일일이 학생들과 악수를 나눈다.

이를 지켜보는 출세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하다. 고개를 끄덕이던 그의 눈가에 기괴한 빛이 번뜩인다. 그러곤 혼잣말을 늘어놓으며 언덕 아래 무당집 쪽으로 사라진다.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노래는 좋구만. 허나 지금 세상이 어느 판국인데, 대한사람 타령이야? 경덕의 마누라가 몹쓸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을 꼬투리 잡았으니, 언젠가 유용하게 쓸 데가 있을 테지. 흐흐흣!’





제10장 냉혈한(冷血漢) 김출세




120.


고향의 품은 배반하는 법이 없다. 성공한 자에게는 가슴을 열어 맞아주고, 부침을 겪는 자에게는 두 팔을 벌려 보듬어준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심신이 피폐했던 경덕에게도 고향은 너른 품으로 맞아준다. 특히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후유증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건강을 회복한 그는 맨 먼저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키기 위한 재정비에 나선다. 청지기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출세를 내쫓으면서 방치했던 소작지를 정리한다. 집 근처에 남은 논과 밭은 직접 경작하기로 한다. 한때는 청지기와 머슴을 두고 집안일을 삼고, 따로 마름을 두어 소작을 붙이기도 했다.

소작지를 정리한 뒤 자경(自耕)을 하게 되자 머슴과 마름을 둘 형편이 못 된다. 따라서 집 안팎의 허드렛일과 농사일은 온전히 그의 몫으로 남는다.

붓만 잡던 손이라 처음에는 모든 게 서툴렀다. 농작물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그는 차츰 농사에 눈을 뜨게 되며 재미를 붙인다.

서서히 집안의 틀이 자리를 잡아갈 무렵 그는 아리랑단원들과 했던 약속을 떠올린다. 아내가 운영하는 한글강습소를 도와 본격적으로 농촌계몽운동을 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이제 집안일도 제자리를 되찾고 몸도 좋아졌으니, 경성에서 못 이룬 뜻을 펼칠 때가 됐다고 생각해. 그래서 당신을 도와 강습소를 활성화하여 단원들을 모을까 생각하는데······”

두 아이가 잠든 곁에서 바느질하던 미라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본다.

“당신 생각을 누가 말리겠어요. 강습소도 규모가 커져서 혼자 힘으론 벅차기도 하고······, 어린아이 고사리 손이라도 필요하죠.”

“강습소를 기반으로 농촌계몽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는 게 어떨까? 당신이 교육을 맡고 내가 조직을 꾸린 뒤 경성에서 활동하는 아리랑조직과 연계하는 거야. 독립투쟁의 불씨를 살려 전국조직망으로 발전시킨 다음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무장단체와도 연합하는 거지. 그럼 농촌계몽운동이 일본제국을 몰아내는 독립전쟁에 밀알이 되지 않겠어? 내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해.”

남편의 비장한 모습을 본 미라는 흐뭇한 미소로 답한다.

“나라를 되찾는 일이라면 뭔들 못하겠어요? 저도 마지막 일이라 여기고 끝까지 당신을 따를 거예요.”

“고마워, 여보!”

경덕은 미라에게 다가가 가볍게 입을 맞춘다.

“그런데 요새 춘천의 사정이 심상치 않더라고요.”

“춘천에도 헌병들이 들쑤시고 다니는가 보지?”

“낮에 춘천에 갔다가 샘터골에서 강습소를 운영하는 김 선생을 만났어요. 경성을 다녀왔다는데, ‘데라우치암살미수사건’이 터져서 거리에 온통 헌병들이 쫙 깔렸답니다. 그래서 협회 사람들도 못 만나고 발길을 돌렸다고 들었어요. 우리도 조심해야 할 거예요. 듣자 하니 벌써 춘천 헌병대에서 불온선인을 색출한다는 명단이 돌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흠······”

경덕은 날숨을 길게 내쉰다. 그의 이맛살이 깊게 주름진다.




121.


1910년 10월 1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가 조선총독부의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다. 헌병경찰제도에 기반을 둔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전면에 내세운 그는 취임 일성으로 총독부의 눈엣가시로 등장한 독립운동단체의 말살을 강조한다. 특히 그는 서북지역에서 활동하는 단체를 주요 탄압의 대상으로 삼는다.

1907년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신채호(申采浩) 등은 국권회복의 기치를 내걸고 항일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한다. 그들은 평양과 정주에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했으며 국외에 무관학교와 독립군기지를 만들어 독립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민회의 본거지가 된 평안도와 황해도를 포함한 서북지역은 총독부의 관심대상 갑호지역이다.

데라우치 총독은 1910년 12월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한다는 구실로 평양(平壌), 선천(宣川), 신의주(新義州) 등의 서북지역에 주둔하는 군대를 차례로 방문한다. 시찰을 마친 그가 돌아온 뒤 경성에 이른바 ‘데라우치암살미수사건’에 관한 괴소문이 파다하게 나돈다.


‘데라우치암살미수사건’의 전모는 대강 이렇다.

안중근(安重根)의 사촌인 안명근(安明根)은 하얼빈에서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후 안 씨 일족을 겨냥한 감시의 눈을 피해 서간도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무장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자 한 그는 국경을 넘나들며 군자금을 조달한다. 그가 군자금을 모으러 다니던 중에 신천을 방문하는데, 거기에서 만난 민병찬이 밀고하여 1910년 1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체포된 그는 거액의 군자금과 권총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 경찰은 데라우치를 암살하기 위한 증거물이라며 군자금과 무기를 압수한다. 고문 도중에 그가 신민회(新民會) 소속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일본 경찰은 곧장 경무총감부에 보고한다.

체포되기 전 천주교를 믿던 그는 빌렘신부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한다. 12월 27일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는데, 그때를 노려 대륙침략의 수뇌부를 폭살하겠다고 고해한다. 이 거사는 조선의 독립을 위한 숭고한 독립투쟁임을 강조한 그는 살인을 금하는 천주교의 교리에 반한 양심의 고백을 통해서 부담을 덜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부는 뮈텔 주교를 찾아가서 안명근의 계획을 고자질한다. 질겁한 뮈텔 주교는 총총걸음으로 경무총감부의 계단을 오른다.

뮈텔 주교로부터 제보를 받은 아카시 경무총감은 얼마간 골똘히 궁리한다. 눈꺼풀이 포르르 떨리는 것을 보면 머릿속 셈법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성싶다. 정답을 구한 것일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곧장 총독실로 향한다.


“총독님! 그토록 바라던 숙원사업을 단번에 해결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데라우치는 입을 비죽이 내밀며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다.

“단번에? 숙원사업을?”

“그렇습니다, 총독님!”

“지금 내가 생니 두 개를 뽑혀 고생하는 줄 알기나 하나?”

“어디 알다 뿐입니까?”

자신만만한 자세가 못 미더운지, 데라우치가 의심쩍은 눈으로 그를 흘겨본다.

“총독께서 어금니를 뽑으신 건 치통 때문이 아니라 바로 서북지역에서 출몰하는 독립군들 때문이 아닙니까?”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군. 못 맞췄더라면 당장 구둣발로 정강이를 걷어찰까 했는데······, 어디 한번 들어보지.”

“총독부의 골칫거리인 신민회를 엮을 묘안을 찾았습니다.”

“기독교 단체와 연관되어 있어서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국제사회로부터 항의가 빗발칠 텐데······?”

“외국 언론들도 꼼짝 못 할 방법을 찾습니다.”

“흠! 변죽만 올릴 셈인가?”

“안중근의 사촌 동생 안명근이란 놈이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잡혔지 않습니까?”

“그렇지.”

“근데 그놈이 고문을 못 참고 자신이 신민회 소속이라도 실토했습니다.”

“그래서?”

“그놈은 이미 총독님 암살미수사건으로 구속 중이지 않습니까?”

왼쪽 눈초리가 치켜 올라가면서 데라우치의 얼굴이 비대칭적으로 일그러진다. 그 상태에서 5초가량이 지난 뒤 그가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튕긴다.

“그러니까 안명근은 단순한 암살미수사건의 범인이고, 그 배후에 신민회가 모든 거사를 조종했다?”

“하이! 총독님의 생각과 제 생각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하하하!”

두 사람은 굳게 악수를 하며 통쾌한 웃음을 터트린다.


총독 데라우치와 경무총감 아카시가 의기투합하여 조작한 일명 ‘105인 사건’은 전국에 대대적인 검거 열풍을 불러일으킨다.

1910년 11월 황해도 북서부의 안악(安岳) 지방에서 활동하던 160여 명의 민족운동가가 체포된다. 그 가운데 김구(金九), 김홍량(金鴻亮), 한순직(韓淳稷), 배경진(裵敬鎭) 등 18명은 내란미수와 모살미수 등의 혐의가 적용돼 기소된다. 1911년 1월에는 독립군기지 창건을 주도한 양기탁(梁起鐸), 임치정(林蚩正), 주진수(朱鎭洙) 등 신민회의 간부 16명이 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된다. 조작 사건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해 9월 관서(關西) 지방까지 확대되어 유동열(柳東說), 윤치호(尹致昊), 이승훈(李昇薰), 이동휘(李東輝) 등 민족운동가 6백여 명이 구금한다.

조작 사건의 결과 조선총독부 초기의 식민화정책에 가장 걸림돌이었던 신민회가 강제 해산되기에 이른다. ‘105인 사건’ 이후 전국에 무단통치의 공포가 확산되며 독립운동의 열기가 위축된다.




122.


‘105인 사건’이 일어난 이후 본토에서 쫓겨난 독립투사들은 지하에 숨어서 비밀결사체를 만들거나 만주나 연해주 등 해외로 이주하여 무장단체를 결성하여 독립투쟁의 명맥을 유지한다.

불령선인(不逞鮮人)을 솎아낸 총독부는 무단통치의 초석을 마련하기 위해 재정사업에 박차를 가한다. 총독부는 식민정책의 상징적인 의미로 국토를 찬탈하여 재정을 확보하는 토지수탈에 첫 삽을 꽂는다.

1912년 토지조사령이 전국에 발표된다. 문중의 공유지와 소유 불분명한 토지 및 미신고지 등은 무조건 국유지로 간주하여 총독부에 귀속하는 초유의 토지수탈이 강행된다.

일제의 수탈정책은 대부분 산으로 둘러싸여 경작지가 부족한 강원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 여파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경작지로 만든 미천골에도 여지없이 불어 닥친다. 토지조사를 한다는 명목 하에 토지조사국 직원들이 나타나자 마을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경덕은 뒤꼍에서 채마를 가꾸고 있다. 헐레벌떡 한 무리의 장정들이 마당으로 뛰어 들어온다.

“서방님, 서방님!”

다짜고짜 경덕을 찾던 진만이 숨을 고른 뒤 안채를 기웃거린다.

“도련님, 서방님 못 보셨습니까?”

방에서 나온 형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어, 조금 전까지 마당에서 낫을 갈고 계셨는데?”

인호의 말이 채 끝나지도 전에 뒤꼍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린다.

“한창 바쁠 텐데, 진만이가 어인 일이야?”

경덕이 나타나자 장정들이 넙죽 인사를 한다. 반 박자 먼저 고개를 든 진만은 다급하다.

“서방님! 큰일 났습니다. 헌병을 앞장세운 일인들이 마을 곳곳에 말뚝을 박고 깃발을 세우며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울먹이던 사내가 누런 종이를 내밀곤 울분을 터트린다.

“땅을 부쳐 먹으려면 신고를 해야 한다는데, 저희같이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무지렁이가 무슨 수로 문턱 높은 관을 드나든단 말입니까요. 제발 불쌍한 저희를 거두어 주십시오, 서방님!”


순진한 농민들은 땅을 떼인다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에 그만 넋을 잃고 만다. 애면글면 경덕에게 하소연을 해보지만, 정작 크나큰 피해를 본 사람은 그들보다 경덕이다. 문중 땅 가운데 거지반이 황무지를 개간한 것이므로 손 쓸 여력도 없이 송두리째 총독부에 헌납한 꼴이다.

말뚝이 박히고 깃발이 펄럭이는 곳마다 그 땅은 온전히 총독부가 차지한다. 무지한 탓에 서류 미비와 기일 내 미신고로 인해 소유권을 상실하는 일이 부지기수로 속출한다. 앉아서 당할 일이 아니라 판단한 경덕은 우선 마을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임시방편이기는 하지만 등기에 필요한 기재항목들을 일일이 적어준다. 마치 그림을 그리듯 마을 사람들은 그가 적어준 이름과 주소를 반복하여 머릿속 깊이 되새긴다. 그나마 미라에게서 글을 깨친 몇몇 주민들은 어깨너머로 방법을 곁눈질하곤 스스로 서류에 필요한 항목을 채워 넣는다.


토지수탈의 바람이 불면서 미천골의 민심도 예전 같지 않다. 우선 울분에 못이긴 농민들의 일탈이 심상치 않다. 술로 한탄의 세월을 보내다 홧김에 자살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깊은 산골로 숨어들어 화전민으로 돌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촌심의 이반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계층 간의 돈독했던 유대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비교적 안정된 삶을 누리던 지주들은 세상의 변화에 관대한 편이다. 춘천에 입성한 일본인들도 식민화 정책에 따따부따 말이 없는 지주들에게는 호의적으로 대한다. 이리 차이고 저리 떠밀리는 쪽은 힘없고 무지한 민초들의 몫일 따름이다.

끈끈한 유대관계의 붕괴는 경덕에게도 악재로 작용한다. 총독부의 비호를 받으며 소작을 붙여온 지주들의 눈에는 농촌을 계몽한다며 돌아다니는 그가 곱게 보일 리 없다. 지주들의 반발은 예상보다 거세다. 불화의 골이 깊어갈 즈음 근동의 지주들이 향교에 모여 대책 마련에 골몰한다.


“괜히 불평불만 모르고 잘 사는 아랫것들한테 무엇 하러 국문을 깨치게 하는 게야? 왜 화를 자초하려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니까!”

“아무래도 한 씨 문중에 사악한 기운이 흐르는 듯하오. 그렇지 않고서야 도백에다 동부승지까지 줄줄이 당상관을 배출한 가문에서 어찌 아랫것들 편을 드는 패륜아가 나올 수 있단 말이오?”

“옳소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한들 신분의 귀하고 천함이 하늘의 이치이거늘, 하루아침에 아랫것과 통언하는 꼴은 이 두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오.”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당장 집으로 쳐들어가 질서를 파괴하는 작자를 응징합시다. 그래야 다시는 이런 불경한 일이 생기지 않을 것 아니오?”


어느덧 사위는 어둠에 휩싸인다. 노기충천한 지주들은 향교를 나선다. 횃불을 앞세운 기나긴 행렬이 경덕의 집 앞까지 이어진다. 역시 먹고사는 일이란 과거의 인정과는 무관한 별개의 것이다. 성학이 낙향했을 때부터 두터운 친분을 쌓아오던 지주들은 어제의 동지가 아닌 오늘의 적으로 돌변한다.


“뭣들 하느냐? 이 집에 사악한 자가 기거한다지 않더냐. 냉큼 그자를 끌어내도록 하라!”

성학과 반상(盤上)의 정을 나누던 김 대감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이윽고 힘깨나 쓰게 생긴 장정이 나서자 한 무리가 그 뒤를 따른다. 순식간에 빗장이 걸린 솟을대문이 우지끈 뻐개져 나간다. 부지불식간에 봉변을 당한 경덕이 맨발로 마당에 선 채 무리를 막아선다.

“양천골 대감님께서 이 밤에 어일 일이십니까?”

“경덕은 들으라! 정녕 네가 마을 원로들이 방문한 이유를 몰라서 묻는 게냐?”

“대감님, 저의 불찰이 있으시면 하명해 주십시오. 당장 시정하겠습니다.”

“시끄럽다! 네 조부와 친분이 남다른 탓에 짐짓 모른 채 해왔다마는, 듣자 하니 아랫것들을 선동하여 마을의 질서를 해한다는 데 그게 사실이더냐?”

비로소 지주들이 방문한 사유를 알게 된 그가 정중히 자세를 취한다.

“대감님! 그 일이라면 오해가 있습니다. 소상히 말씀 올리겠습니다. 토지대장이란 것이 새로 발급되었는데, 일부 농부들 중에 아직 글을 깨치지 못한 관계로 제대로 등록을 못했습니다. 농부한테 땅을 빼앗는다는 뜻은 곧 목숨을 끊으라는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노구를 부르르 떨던 김 대감이 노발대발한다.

“듣기 싫다! 어디서 함부로 발칙한 세 치 혀를 놀리려 드느냐?”

“대감님!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이미 갑오년에 신분의 구별이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네, 이놈! 정히 그러하다면 신분이 평등한 경성에서 살면 되지, 왜 신분 고하가 유지되는 시골까지 내려와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게냐?”

“대감님! 부디 온정을 너그러이 베푸시어 모든 백성이 하나가 되어 경술의 국치를 씻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니, 이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누굴 나무라 드느냐?”

“나라 잃은 백성이 양반, 상놈을 따져 무엇에 쓰겠습니까? 일제에 협력하여 자신만 호위호식하며 살면 그만이란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제아무리 할아버님과 형제애를 나눴다손 치더라도 대감님의 뜻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팽창한 동공에 횃불이 반사되어 이글거린다. 그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노인을 쏘아본다. 김 대감은 턱을 덜덜거리며 지팡이를 들어 허공을 휘젓는다.

“명색이 과거에 급제하여 나라의 녹까지 먹은 선비가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앞으로 한 씨 문중과는 모든 연을 거둘 테니, 그리 알라!”

“뜻대로 하십시오!”

경덕이 완강하게 나오자 노인은 그만 땅바닥에 주저앉고 만다. 뒤에 있던 양 진사가 한발 나선다.

“정이 그렇다면 미천골을 떠나는 수밖에야. 옛말에도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 하지 않던가? 조만간 선산의 조상 묘도 이관하는 것이 좋을 듯하네!”

경덕은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지주들의 방문은 최후통첩을 하러 온 것이지, 협상을 하러 온 것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저 막무가내로 나오다 제풀에 지치길 바랄 뿐이다.

“뭣들 하느냐? 대감님을 모시지 않고!”


무안한 양 진사는 괜히 서 있는 장정들에게 호통을 친다. 김 대감은 장정들에게 부축을 받으며 일어선 양 진사의 뒤를 따라 대문 밖을 나선다.

훤히 밝히던 횃불이 사라지자 마당은 달빛만이 교교하다. 형제를 데리고 나온 미라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슬그머니 어깨를 어루만진다.


“하나로 합심해도 모지랄 판인데, 어찌 저렇게 편을 가르는지 모르겠어요.”

“영혼이 가난한 사람들이라 그래. 손에 쥐고 있는 게 전부라 믿기 때문에 절대로 자기 것을 남과 나누려고 생각조차 못 하는 거지. 오늘따라 달이 참 밝네!”


그를 따라 미라와 두 아들이 나란히 선 채 고개를 들어 달빛을 바라본다. 푸르스름한 달빛에 물들기라도 한 듯 부부와 형제의 민낯에 형형한 기운이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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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134화 악마의 최후 +3 19.07.12 161 1 16쪽
133 133화 고귀한 죽음 +1 19.07.11 89 1 12쪽
132 132화 무지개 +1 19.07.10 88 1 13쪽
131 131화 차관협정(借款協定) +2 19.07.05 96 1 14쪽
130 130화 반공포로석방 +1 19.07.01 111 2 13쪽
129 129화 한일회담 +1 19.06.29 108 2 15쪽
128 128화 폭탄테러 +1 19.06.26 118 2 13쪽
127 127화 카츄샤 +1 19.06.24 106 2 13쪽
126 126화 의사 왕룽 +1 19.06.23 105 3 17쪽
125 125화 빅터 한 재단 +2 19.06.19 115 3 13쪽
124 124화 인천상륙작전 +1 19.06.13 141 2 15쪽
123 123화 메모리 가든 +1 19.06.12 113 2 15쪽
122 122화 겹생 +3 19.06.10 111 2 16쪽
121 121화 하와이 +1 19.06.07 120 3 14쪽
120 120화 소령 맥나마라 +4 19.06.06 125 2 15쪽
119 119화 한초희 +1 19.06.05 128 2 14쪽
118 118화 맥아더 원수 +1 19.06.04 122 2 14쪽
117 117화 기만방송 +1 19.06.03 119 2 13쪽
116 116화 코리안 커넥션 +1 19.06.01 130 2 12쪽
115 115화 잠수함 +1 19.05.30 173 2 13쪽
114 114화 6.25 전쟁 +1 19.05.29 146 2 12쪽
113 113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특명 1호 ‘폭풍’ +1 19.05.21 127 2 11쪽
112 112화 금괴수송작전 +1 19.05.19 164 2 10쪽
111 111화 '암호명 A-1' +1 19.05.18 118 2 13쪽
110 110화 악연(惡緣) +1 19.05.17 118 2 14쪽
109 109화 마지막 미션 +1 19.05.16 118 2 12쪽
108 108화 애치슨 라인 +1 19.05.15 117 2 12쪽
107 107화 연적(戀敵) +1 19.05.15 136 2 12쪽
106 106화 독살(毒殺) +1 19.05.14 130 2 12쪽
105 105화 마돈나 다방 +2 19.05.13 136 2 15쪽
104 104화 한국은행 +1 19.05.11 136 2 14쪽
103 103화 비밀거래 +1 19.05.10 158 2 12쪽
102 102화 남미이주작전 +1 19.05.10 153 2 13쪽
101 101화 트루먼 독트린 +1 19.05.10 125 2 11쪽
100 100화 숙명의 라이벌 +1 19.05.10 131 3 18쪽
99 99화 Jane Doe +2 19.05.10 129 2 13쪽
98 98화 앙숙, 이승만과 김구 +1 19.05.10 129 2 12쪽
97 97화 반도호텔 +1 19.05.10 125 2 13쪽
96 96화 좌익과 우익 +1 19.05.09 125 2 13쪽
95 95화 조선인민공화국 +1 19.05.09 130 2 17쪽
94 94화 일본패망(日本敗亡) +1 19.05.09 136 2 12쪽
93 93화 원자폭탄 +1 19.05.09 126 2 13쪽
92 92화 김일성 +1 19.05.09 133 1 14쪽
91 91화 독수리 작전 +1 19.05.09 131 1 14쪽
90 90화 이승만 +1 19.05.09 119 1 14쪽
89 89화 비밀요원 나타샤 +1 19.05.09 113 2 15쪽
88 88화 OSS(미국전략사무국) +2 19.05.09 118 2 16쪽
87 87화 승전(勝戰) +1 19.05.09 113 2 14쪽
86 86화 진주만공습 +1 19.05.08 115 1 16쪽
85 85화 갈라예프 +2 19.05.08 114 2 16쪽
84 84화 채권(債券) +1 19.05.08 119 2 11쪽
83 83화 다카키 마사오 +1 19.05.08 132 2 12쪽
82 82화 광복군(光復軍) +1 19.05.08 113 2 13쪽
81 81화 육군정보학교 +2 19.05.08 114 2 11쪽
80 80화 홍콩행 +1 19.05.07 121 3 13쪽
79 79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3 19.05.07 111 2 12쪽
78 78화 김원봉과 김구 +1 19.05.07 110 2 16쪽
77 77화 까레이스키 +3 19.05.07 107 2 12쪽
76 76화 탈출(脫出) +1 19.05.07 113 3 9쪽
75 75화 박정희와 최태민 +1 19.05.07 119 2 9쪽
74 74화 중일전쟁(中日戰爭) +1 19.05.07 113 2 13쪽
73 73화 강제이주 +3 19.05.06 108 1 12쪽
72 72화 마루타 +1 19.05.06 107 1 12쪽
71 71화 막후 실력자 +1 19.05.06 107 2 13쪽
70 70화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등장 +1 19.05.06 107 1 15쪽
69 69화 천황결사옹위청년단 +1 19.05.05 110 1 15쪽
68 68화 후흑학(厚黑學) +1 19.05.05 115 1 13쪽
67 67화 경몽장(耕夢莊) +1 19.05.05 111 1 12쪽
66 66화 학교(學校) +1 19.05.05 111 1 8쪽
65 65화 국제연맹(國際聯盟) +1 19.05.05 111 1 19쪽
64 64화 나타샤 +1 19.05.05 110 1 11쪽
63 63화 보고서 +1 19.05.05 111 1 11쪽
62 62화 시인과 영웅 +2 19.05.04 121 2 15쪽
61 61화 탄생의 비밀 +2 19.05.04 112 2 18쪽
60 60화 국경수비대 +1 19.05.03 111 2 13쪽
59 59화 제네바협약 +4 19.05.03 115 2 18쪽
58 58화 명백한 운명 +1 19.05.03 110 1 16쪽
57 57화 미두취인소(米豆取人所) +1 19.05.03 113 1 12쪽
56 56화 생포(生捕) +1 19.05.02 111 2 13쪽
55 55화 참패(慘敗) +1 19.05.02 110 2 14쪽
54 54화 향수병(鄕愁病) +1 19.05.02 111 2 18쪽
53 53화 음악회 +1 19.05.02 111 2 18쪽
52 52화 들개 진구 +1 19.05.02 115 2 24쪽
51 51화 가락지 +3 19.05.02 115 2 26쪽
50 50화 덫 +1 19.05.01 116 1 28쪽
49 49화 추격전(追擊戰) +1 19.04.30 111 2 35쪽
48 48화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1 19.04.30 116 2 39쪽
47 47화 광휘와 빅터 +3 19.04.29 115 2 33쪽
46 46화 특별수사본부(特別搜査本部) +4 19.04.29 114 2 41쪽
45 45화 만저우리(滿洲里) +4 19.04.28 108 3 35쪽
44 44화 폭풍전야(暴風前夜) +1 19.04.28 109 3 37쪽
43 43화 Boys, be ambitious! +1 19.04.27 111 2 39쪽
42 42화 만주국(滿洲國) +5 19.04.27 117 2 38쪽
41 41화 만몽영유계획(滿蒙領有計劃) +1 19.04.26 117 3 25쪽
40 40화 재회(再會) +1 19.04.26 116 3 30쪽
39 39화 빅터 한 +1 19.04.25 117 3 49쪽
38 38화 박진만 +2 19.04.25 127 3 45쪽
37 37화 정보국 5과 +3 19.04.24 136 3 51쪽
36 36화 마적(馬賊) 왕리 +2 19.04.24 133 3 49쪽
35 35화 삼두정치(三頭政治) +2 19.04.23 135 3 42쪽
34 34화 주찬 +1 19.04.23 131 3 51쪽
33 33화 만주야사(滿洲野史) +2 19.04.22 129 3 50쪽
32 32화 서광휘 +2 19.04.22 131 3 47쪽
31 31화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 +2 19.04.21 157 4 47쪽
30 30화 미쓰야협정(三矢協定) +4 19.04.21 132 4 46쪽
29 29화 출산(出産) +3 19.04.20 143 4 43쪽
28 28화 밀항(密航) +2 19.04.20 132 4 45쪽
27 27화 불령선인(不逞鮮人) +1 19.04.19 133 4 43쪽
26 26화 님의 침묵 +1 19.04.19 139 4 48쪽
25 25화 이민(移民) +2 19.04.18 150 4 39쪽
24 24화 회자정리(會者定離) +2 19.04.18 137 5 44쪽
23 23화 여걸(女傑) 수잔 +5 19.04.17 142 4 46쪽
22 22화 3·1 만세운동 +5 19.04.17 145 4 44쪽
21 21화 천적(天敵) +1 19.04.16 143 5 49쪽
20 20화 아카키 타이요우(赤木太陽) +4 19.04.16 148 5 52쪽
» 19화 망국(亡國) +4 19.04.15 157 3 49쪽
18 18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3 19.04.15 163 3 46쪽
17 17화 한성진격작전(漢城進擊作戰) +4 19.04.14 159 4 49쪽
16 16화 의병전쟁(義兵戰爭) +4 19.04.14 162 4 43쪽
15 15화 춘투(春鬪) +5 19.04.13 175 3 47쪽
14 14화 암살미수(暗殺未遂) +4 19.04.13 184 3 37쪽
13 13화 결혼(結婚) +3 19.04.12 264 6 42쪽
12 12화 돈버거 +9 19.04.12 243 7 44쪽
11 11화 대한제국(大韓帝國) +2 19.04.11 265 7 45쪽
10 10화 김출세(金出世) +7 19.04.11 291 8 42쪽
9 9화 낙향(落鄕) +4 19.04.10 307 8 42쪽
8 8화 혁파안(革罷案) +4 19.04.10 319 9 41쪽
7 7화 증기자동차 +2 19.04.09 373 12 22쪽
6 6화 2차 사행(使行) +2 19.04.09 378 12 24쪽
5 5화 견문록(見聞錄) +5 19.04.08 425 13 19쪽
4 4화 북경(北京) +1 19.04.08 521 11 19쪽
3 3화 만남 +1 19.04.08 642 12 15쪽
2 2화 1차 사행(使行) +2 19.04.08 933 13 14쪽
1 1화 파락호(破落戶) 이하응 +17 19.04.08 1,810 1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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