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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공모전참가작 님의 침묵

웹소설 > 자유연재 > 대체역사, 드라마

완결

최장르
작품등록일 :
2019.04.08 16:31
최근연재일 :
2019.07.12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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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6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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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쪽

21화 천적(天敵)

님의 침묵




DUMMY

129.


진구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들은 타이요우는 헌병 보조원을 전원 소집하여 긴급 대책회의를 연다.


“깡촌에서 육혈포를 지닌 놈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도대체 춘천 바닥에 얼마나 많은 육혈포가 돌아다니고 있단 말이야!”

그가 테이블을 힘껏 내리치며 분통을 터트린다.

“경성에서도 구하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놈들의 손에 들어간 건지 모르겠습니다.”

진구가 무심히 답을 하자 타이요우가 노려본다.

“길거리에서 총 맞아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육혈포를 든 놈들을 잡아들여! 그리고 군내 곳곳에 검문소를 설치해. 남녀노소 불문하고 전부 검색하도록! 아녀자들 고쟁이 속까지 철저하게 수색하란 말이다! 알았나?”

“알겠습니다.”

모두가 한 입으로 대답한다.

“곧 경성에서 고위급 장성들이 줄줄이 올 거야!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온다면 어떻게 되겠어? 나나 네놈들이나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야! 똑바로들 하라고!”

“네!”


군내에서 볼일을 보던 미라는 전과 달리 검문이 강화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더욱이 곳곳에 나붙은 전단지를 보곤 소스라치게 놀란다. 서둘러 미천골로 돌아온 그녀는 수심이 가득하다.


“여보, 안색이 안 좋네.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어?”

경덕이 걱정 어린 투로 말을 건넨다.

“아무래도 청년단에서 일을 낸 것 같아요.”

“무슨 소리야?”

“군내 거리마다 철규와 아이들의 전단지가 나붙었어요.”

집히는 게 있는 듯 경덕은 한동안 호롱불을 바라본다.

“흠······, 다녀올 때가 있어. 늦지는 않을 거야!”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미라를 뒤로하고 경덕은 서둘러 집을 나선다.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산에 오른 경덕은 숯가마 앞에서 멈춘다. 잠시 뒤 건너편 가마 쪽에서 ‘뻐꾹, 뻐꾹’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가 ‘뻐꾹’ 소리로 화답하자 철규가 장작더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달호는 좀 어떠냐?”

“아니, 선생님이 그걸······?”

“군내 거리마다 상세하게 방이 붙었더구나.”

경덕은 꾸짖는 대신 공연한 말로 철규를 위로한다. 철규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돌린다.

“죄송합니다.”

“어찌 된 일이야?”

“놈들이 아녀자를 겁탈하는 현장과 우연히 맞닥뜨렸습니다.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사내로써 의당 할 일은 했다마는······, 앞으로가 문제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경덕은 허리를 숙이고 숯막 안으로 들어간다. 부상당한 달호가 벽을 등진 채 비스듬히 앉아 있다. 봉식과 준수가 그가 들어오자 일어선다.

“선생님, 뵐 면목이 없습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빨리 잊고, 별 탈 없도록 수습을 해야지. 그나저나 달호가 걱정이군!”

경덕이 달호에게 다가간다. 그가 억지로 허리를 곧추세우며 일어나 앉는다.

“이만하길 다행이구나!”

이마를 짚어본 그는 인진쑥이 담긴 봉지를 건넨다.

“총독이 심하면 열이 나는 법이다. 이걸 바르도록 해! 엽사한테 들러 얻어온 거야!”

경덕과 단원들 사이에 막간의 정적이 흐른다. 악화된 상황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마 대대적인 검거 작전이 펼쳐질 거야. 은신처를 옮기도록 해! 당분간 외출은 자제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연락해.”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일단 이번 고비를 잘 넘기는 게 중요해. 당분간 다른 생각을 하지 말자!”

“네!”

단원들의 답을 들은 뒤 경덕은 숯가마를 나와 숲속으로 사라진다.


나흘 뒤 헌병대 1개 소대와 헌병 보조원 이십여 명이 숯가마를 포위한다. 숲에 몸을 숨긴 타이요우가 숯가마를 정탐하며 현장을 지휘한다. 하루 전 망태기를 들고 산으로 사라진 소년을 수상쩍게 여긴 진구가 그 뒤를 밟았다. 혹시나 하며 뒤쫓았는데, 그곳에 숯가마가 있었고, 단원들의 정황이 포착되었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확인한 타이요우는 병력 배치가 끝났다는 수신호를 받고는 깔때기를 든다.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한가롭게 나뭇가지에서 쉬고 있던 새들이 날갯짓을 요란하게 퍼덕거리며 일제히 날아오른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목숨이 아깝거든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잠시 뜸을 주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다시 한번 반복한다. 헌병대장 카이토 중좌께서 순순히 체포에 응하는 자에 한해서는 선처를 보장한다고 약속했다. 손을 들고 투항하라! 선처를 보장한다!”


들창을 빼꼼 열고 곁눈질로 바깥 동정을 살피던 철규가 뒤를 돌아본다. 비장한 눈빛으로 동지들을 일별한 그는 작심한 듯하다.

“타이요우 놈과 협상을 해야겠어!”

준수가 허탈하게 웃으며 비꼰다.

“야, 믿을 놈을 믿어라! 그놈하고 협상한다는 것은 악마하고 거래하는 것과 뭐가 달라! 난 끝까지 저항할 거야!”

봉식이 준수의 편을 든다.

“선처를 보장한다고? 설령 카이토가 선처를 보장했다손 치더라도 타이요우, 그놈이 우릴 가만히 두겠냐고. 난 준수 말에 한 표!”

준수와 봉식이 서로의 주먹을 맞부딪친다. 철규가 머리채를 흔든다.

“총은 한 자루뿐이야! 무기가 있어야 헌병대를 상대로 싸울 거 아니야? 이럴 때일수록 냉정하게 판단하자!”

철규의 말에 아무도 대꾸하지 않는다. 얼마간 무언의 신경전이 지속되고, 비스듬히 벽에 기댄 채 신음하던 달호가 무거운 입을 뗀다.

“잡혀간다고 해도 산다는 보장은 없어! 차라리 개죽음을 당하더라도 여기서 투쟁하다 죽는 게 나! 그래야 나중에라도 강원도 산골 숯가마에서 격렬히 저항하다 순국한 투사란 소리라도 듣지 않겠어? 으윽!”

달호는 고통을 호소하며 옆으로 쓰러진다. 준수와 봉식이 그를 부축하며 일으켜 세운다.

“내가 시간을 벌 테니, 너희들은 달호를 데리고 비밀통로로 빠져나가!”

철규의 결단에 누구도 동조하지 않는다.

“무슨 소리야! 피로써 맹세한 사이에 동지를 놔두고 도망가란 말이야?”

준호가 발끈한다. 투항을 독려하는 타이요우의 목소리가 움막 안에 공명된다.

“일 분 안에 확답이 없으면 표적 사격을 하겠다.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


“시간 없어! 어떻게든 시간을 끌 테니, 제발 여길 떠나! 한 명이라도 살아서 개죽음은 면해야 할 거 아냐!”

철규는 절규하며 마지막 호소를 한다. 타이요우가 숫자로 압박을 가해온다.

“삼십 칠, 삼십 육, 삼십 호······, 전 대원은 움막을 향해 발포 준비! 이제 삼십 초 남았다!”

“제발 부탁이야! 더 지체했다가는 다 죽어!”

철규는 두 눈을 부라리며 관자놀이에 총부리를 겨눈다.

“그럼 여기서 나부터 죽겠다!”

철컥하고 공이가 뒤로 젖히는 소리를 듣자 울먹이던 봉식이 준수를 설득한다.

“철규 말을 듣자!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야 복수라도 할 거 아냐!”

“배반은 절대 못 해!”

준수가 저항하자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이 움찔한다.

“철규야! 알았다, 알았어! 네 말대로 할 테니, 제발 진정해! 준수야! 어서!”

“에잇!”

준수와 봉식은 달호를 어깨동무하고 바닥에 깔린 거적을 걷는다. 그들은 지하로 통하는 사다리를 타고 빠져나간다. 철규는 장작과 희나리로 바닥을 덮은 후 들창을 통해 밖을 주시한다. 헌병대들이 사방에서 좁혀 온다. 그는 맨 앞줄에 선 헌병을 향해 총을 발사한다. 헌병이 쓰러지자 총탄이 숯막을 향해 빗발친다.

순식간에 움막을 뒤덮은 너와가 힘없이 공중으로 흩어진다. 철규의 간헐적인 저항도 이어진다. 십여 분이 흘렀을까.


“사격 중지!”

쓰러진 고목에 몸을 웅크린 채 지휘하던 타이요우가 권총을 휘저으며 명령을 내린다. 제자리에 포복한 헌병들의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당장 투항하지 않으면 숯막에 불을 놓겠다! 마지막 경고다! 투항하지 않으면 화형을 시키겠다!”


그의 말은 허공을 맴돌다 가뭇없이 사라진다. 총격을 받아 허물어진 숯막과 헌병대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마침내 타이요우가 턱짓으로 접근을 명령한다. 진구와 졸개들이 횃불을 들고 숯막으로 접근한다. 힘껏 내던져진 횃불들이 공중제비돌기하며 지붕과 벽에 불씨를 퍼트린다. 불꽃이 활활 타오르면서 숯막의 한 귀퉁이가 힘없이 주저앉는다.

타이요우가 권총을 높이 들고 한 바퀴 휘젓는다. 헌병들이 포위망을 좁히며 숯막을 에워싼다. 뒤에서 횃불을 든 타이요우가 뚜벅뚜벅 병사들을 뒤로 물리고 걸어간다. 그가 들창을 향해 횃불을 던진다. 들창 밖으로 불이 치솟는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세 사람은 숯막이 내려다보이는 둔덕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불길이 치솟는 걸 목격하곤 달호가 흐느끼기 시작한다. 봉식과 준수가 주먹을 깨물고 눈물을 삼킬 즈음 산 아래에서 간격을 두고 총성 두 발이 울려 퍼진다.

복부에 총상을 입은 철규는 안간힘을 다해 밖으로 뛰쳐나온다. 그는 전력을 다해 달리면서 타이요우를 향해 총알을 발사한다. 타이요우가 잽싸게 몸을 피한 탓에 빗나간 총알은 뒤를 따르던 헌병의 심장에 박힌다. 미친 듯이 달려드는 그를 보고 타이요우의 낯빛이 새하얗게 변한다.

철규가 방아쇠를 당겨보지만 이미 약실을 텅 비었다. 그가 타이요우에게 총을 던지려는 찰나 나무 위에서 대기하던 저격병이 방아쇠를 당긴다. 총격을 받은 철규는 일순 몸의 균형을 잃으며 연체동물처럼 바닥에 널브러진다.










제11장 천적(天敵)




130.


총탄 두 발을 맞은 철규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유지한다. 용케도 두 발 모두 장기와 혈관을 피해 관통한 탓에 근육이 손상된 것 외에는 치명상을 모면한다. 나머지 일행들도 도주에 성공한 듯했지만, 피 냄새를 맡고 추적한 사냥개에게 도주로가 발각되어 헌병대로 압송된다.

체포된 네 명은 각각의 취조실에서 별도의 신문을 받는다. 서로의 생존을 확인할 방법은 고문의 강도에 따라 제각각의 목청으로 복도에 울려 퍼지는 비명으로 유추할 뿐이다. 물구나무자세로 방치하거나 생니와 손톱을 뽑는 고문이 밤새도록 이어진다. 초반에 네 사람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조차 정신을 잃을지언정 모르쇠로 일관한다.

고문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체력의 한계를 드러낸 달호가 먼저 무기력하게 무너진다. 생존의 본능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한 까닭에 취조원은 수월하게 답을 얻는다.


“청년단의 총책은 한경덕이 맞지?”

“네.”

“암살용 권총을 구입하라고 사주한 것도, 자금을 조달한 것도 한경덕인가?”

“네.”

“주범 오철규을 도와 염달호 외 정봉식, 우준수 등 총 4인이 총독부 요인을 암살하기로 모의한 적이 있는가?”

“네.”


사흘 동안 뜬눈으로 지새운 그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기계적으로 답한다. 진술을 지켜본 봉식과 준수도 청년단의 배후로 경덕을 지명하라는 허위자백서에 지장을 찍기에 이른다.

옆방에서 취조를 받는 철규는 끝끝내 타협하지 않는다. 총알이 관통한 사입공 부위에 시뻘건 쇠붙이가 닿아 살을 태운다. 이미 총상으로 손상된 표피는 흔적도 없이 잉걸불 속으로 사라진다. 진피층에 불씨가 닿는 순간 혈관이 응축되면서 파괴된다. 주변의 세포가 괴사하기 시작하면서 내뿜는 누린내가 실내에 훅 끼친다. 역겨운 내가 진동하자 신참 보조원이 매스꺼운 듯 구석에 처박혀 헛구역질한다.


“일으켜 세워!”

진구의 명령이 떨어지면 부하들이 쓰러진 철규를 일으켜 세워 의자에 앉힌다.

“청년단의 수괴가 한경덕이고, 이번 모사의 주범이 너라고 이미 염달호, 정봉식, 우준수가 자백했어. 다 끝난 일 갖고 시간 끌지 말고 순순히 자백해. 망한 나라를 위해 개죽음당하지 말고 말이야!”

진구가 그의 턱을 쳐들고 악을 쓴다.

“난 한경덕, 염달호, 정봉식, 우준호란 사람을 모른다. 이번 일은 나 혼자 계획한 단독범행이다.”

“독한 놈!”

진구가 도리질하며 피를 닦던 수건을 바닥에 내던진다. 보조원이 시뻘겋게 달군 불쏘시개로 철규의 환부를 들쑤신다.

“난 대한의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선언한 투사다! 포로로서 정당한 대우와 재판을 원한다!”

고통을 참으며 끝까지 버티던 그도 마침내 까무룩 정신을 잃는다. 두어 차례 물세례가 가해지지만 철규는 비스듬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는 채로 꼼짝도 않는다.



인력거가 지하에 취조실을 둔 헌병대 청사 앞에서 멈춘다. 인력거에서 내린 타이요우는 청사 로비를 가로질러 곧장 2층의 계단을 성큼성큼 오른다. 그는 집무실 앞에서 옷을 여민 뒤 문을 두드린다.

“들어와!”

가라앉은 카이토의 목소리가 문틈으로 비어져 나온다. 책상에서 턱을 괸 채 앉아 있던 카이토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맞는다.

“총기로 무장한 괴한들을 생포했다지? 정말 큰일을 했어! 이번 총독부 고위관료들이 내려오면 이번 사건을 무사히 진압한 공으로 자네와 헌병 보조원들에게 훈포장을 추서할 생각이야!”

타이요우가 장화를 신은 다리를 밀착시키며 부동자세로 감사를 표한다.

“이번 작전은 카이토 대장님의 탁월한 영도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모든 영광을 카이토 대장님께 돌리겠습니다!”

“하하! 겸손하기까지 하다니, 자네의 가슴 속에 똬리를 찬 야망의 끝은 도대체 어디쯤인지 궁금하군!”

“대장님께서 이끌어주신다면 지옥불이라도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부담스러운 듯 카이토는 손사래를 친다.

“엄살도 지나치면 결례가 되는 법일세! 그건 그렇고 새롭게 드러난 사실이라도 있나?”

타이요우는 그에게 자백서를 건넨다.

“청년단의 배후로 한경덕이란 인물이 새로 등장했습니다.”

자백서를 훑어보던 카이토가 의심쩍은 투로 말한다.

“흠, 한경덕이라······. 처음 듣는 이름인데?”

타이요우가 준비된 듯 부연설명을 한다.

“춘천 일대에서는 덕망이 자자한 명문가의 자손입니다. 일찍 청년 급제하여 궁내부에서 요직을 지내다 돌연 퇴직하여 아리랑조직에 가담했다고 합니다. 신상원의 탈옥 사건과 연루되어 투옥한 전과가 있습니다.”

“신상원이라고 했나?”

“하이!”

“이토 히로부미 통감암살미수사건의 주동자가 아닌가? 그때 왼쪽 눈을 잃은 카지 류노스케 소좌가 나랑 육군사관학교 동기라네! 참 기막힌 인연이군!”

“대대로 정권에 항거하던 아주 못된 내력을 지닌 집안 출신입니다.”

“감히 대일본제국의 통치행위에 반기를 들다니, 괘씸하군! 증거는 충분하겠지?

물증도 없이 체포했다가 공연히 뒷말이 생길 수 있으니 주의하게!”

“염려 마십시오. 벌써 ‘조선총독부 고위관료 암살공모혐의’로 조서를 꾸며놨습니다.”

“암살공모혐의?”

“예. ‘데라우치총독암살미수사건’을 재탕할까 합니다.”

그의 잔꾀를 파악한 카이토가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역시 자네는 춘천 촌구석에서 썩기엔 아까운 구석이 있다니까! 하하핫!”

“청년단의 오철규가 중심이 되어 단원들과 총독부 고위관료 암살을 공모했으며, 그 배후에 수괴 한경덕이 이번 공모의 총책임자라는 쪽으로 수사 방향을 설정했습니다. 이미 물증으로 확보한 육혈포는 경성의 광통교 암시장에서 구입했다는 자백도 받아놓은 상태입니다.”

“완벽한 시나리오야!”

카이토는 절도 있게 박수를 세 번 친다. 우쭐한 타이요우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잠시 머문다.




132.


틀에 박힌 기획 수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물증과 증인이 확보된 상태여서 배후로 지목된 경덕의 자백만이 남아있다. 취조실에서 심문을 받던 철규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다. 철창 틈으로 피와 땀으로 뒤섞인 악취가 훅 끼친다.

경덕은 헌병 보조원에게 양팔이 포박된 채로 취조실 안으로 끌려 들어간다. 그는 철규를 알아보곤 와락 껴안는다. 흔들어보지만 철규는 꿈쩍도 안 한다.


“철규야, 철규야! 정신 차려!”

타이요우는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이죽거린다.

“감회가 새롭겠군! 스승과 제자, 아니 불온집단의 수괴와 행동대장의 조우라······. 활동사진에서나 나올법한 극적인 이야기야!”

그가 부하에게 고개를 까딱한다. 잠시 뒤 몸에 상처투성이인 달호와 봉식, 준수가 줄줄이 포승줄에 묶여 취조실로 끌려온다. 달호와 봉식, 준수는 경덕을 보곤 짐짓 시선을 피한다. 경덕은 일일이 세 사람을 어루만지면서 분통을 터트린다.

“뭘 잘못했기에 이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한 거냐?”

타이요우를 향한 그의 눈빛이 날카롭다.

“조선총독부 시행령에 의하면 치안을 담당하는 헌병과 헌병 보조원 외에는 그 어떤 누구도 총포류를 소유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죠.”

“그렇다면 불법무기 소지죄로 다루면 될 것 아니냐?”

“참,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시네. 이들은 단순히 총기를 소지한 게 아니라 조선총독부의 고위관리를 암살하려고 사전에 모의한 혐의로 체포된 겁니다!”

격앙된 듯 타이요우의 목소리가 취조실의 벽을 타고 웅웅거린다.

“나라를 빼앗긴 비탄에 젖어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모여 훗날을 도모할 수도 있지 않나? 어찌 같은 피를 나눈 동포가 되어 피 끓는 청년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단 말이야? 정녕 동포들한테 등을 돌릴 작정인 겐가? 후손한테 부끄러운 철면피 짓일랑 더 늦기 전에 그만둬라!”

타이요우는 혀를 빼문 채 경덕의 질타를 오히려 조롱거리로 삼는다.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할아버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실 텐데······. 썩고 문드러진 부패한 나라를 그나마 구원해준 것이 일본 천황님이 아닙니까? 나라꼴이 이 지경이 되도록 국가의 녹을 먹던 고관대작들은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답니까? 관직에 계셨던 서방님도 자유로울 수 없을 텐데요.”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들이 잘 했더라면 망국의 길로 접어들지 않았을 테지. 나 또한 한때 나랏일에 몸담았던 만큼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겠다. 청년들이 잘못된 길을 간 것은 내가 잘못 가르친 탓이다. 저들을 석방하고 나를 가둬라!”

타이요우가 실실거리며 비아냥거린다.

“서방님께서는 지금 누굴 석방하고 자시고 할 처지가 아닙니다! 이번 ‘조선총독부 고위관리암살’을 배후에서 모의한 주동자가 누군지나 아십니까?”

두 사람 사이에 얼마간 침묵이 흐른다. 타이요우는 피로 얼룩진 자백서를 경덕에게 건넨다.

“아직 인주도 마르지 않았으니 잘 보세요! 서방님께서 그토록 아끼던 제자들이 막후 주동자가 누구라고 자백을 했는가를······”

자백서를 훑어보던 경덕이 한숨을 내쉰다. 곁에서 바라보던 청년 세 명이 고개를 숙인 채 오열한다. 정신을 차린 철규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항변한다.

“선생님, 저놈 말을 믿지 마세요. 전부 날조된 거짓말입니다. 저희는 선생님을 언급한 적조차 없습니다.”

경덕이 그에게 접근하려 하자 헌병 보조원이 가로막는다.

“이제 서방님만 자백서에 날인하시면 이 사건은 마무리됩니다. 더 이상 곤욕을 치르지 않아도 되고요. 제가 윗선에 잘 말해서 선처를 부탁해보겠습니다. 물론 전과가 있어서 잘 될는지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선생님! 속지 마세요! 저놈은 악마나 다름없습니다. 동포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라고요!”

철규의 울부짖음에도 타이요우는 오히려 온화한 눈빛으로 넌지시 경덕을 바라본다.

“어서 찍으시죠!”

“내가 하지도 않은 일에 승낙할 수 없다.”

경직된 그의 표정과는 달리 타이요우는 여유만만하다. 이죽거리던 그가 준비된 일격을 가한다.

“청년단에 대한 내사를 하다 보니, 흥미로운 일이 한둘이 아니더군요. 미천골뿐만 아니라 양지골, 한밭터, 양수리 쪽까지 강습소를 은밀히 운영하던데······, 수상쩍게도 말입니다. 늘 그곳엔 박 선생님의 그림자가 다녀간 흔적이 있더라고요. 마음 같아선 두 분을 다 모셔다 신문을 해야 하는데, 그래도 저간에 쌓은 인간정리도 있고, 바깥에서 보는 눈도 있고 하니, 이번만큼은 양보하기로 했습니다.”

“냉혈한이 따로 없군!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촌사람들한테 글을 가르치는 게 그리도 잘 못 된 일이더냐?”

“누가 가르치는 걸 뭐라 한답디까? 듣자 하니 수업을 마칠 때 독립가를 부른다고 들었습니다. 헌병대에서 진즉에 알았더라면 사모님은 벌써 옥고를 치르고도 남았어요. 다 제 덕분인 줄 아십시오. 그러니 일을 더 크게 만들기 전에 순순히 자백하시는 게 서로 신상에 좋은 겁니다.”

“지금 협박하는 거냐? 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은 걸 했다고는 못 한다.”

“그럴 줄 알았습죠. 자, 얘들아! 서방님께서 한가로우신가 보다. 구경거리 좀 제공해드려라!”


타이요우가 휘파람을 불며 등을 돌린다. 헌병 보조원 두 명이 철규의 발목에 쇠사슬을 연결하여 천장에 매단다. 그러곤 물이 철철 넘치는 양동이로 가차 없이 물세례를 퍼붓는다. 이번에는 오들오들 떠는 그의 코에 물수건이 얹어진다. ‘꺼억꺼억’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듣던 경덕은 귀를 가린 채 도리질한다.

숨이 멎은 듯 거꾸로 천장에 매달린 몸이 대롱거릴 때마다 쇳소리가 삐걱거린다. 결심한 듯 경덕은 책상에 걸터앉아 휘파람을 불고 있는 타이요우 앞에 우뚝 선다. 화들짝 놀란 타이요우가 몸을 뒤로 젖힌다.


“저들을 석방하라! 그러면 지장을 찍겠다!”

그는 채찍으로 손바닥을 톡톡거리며 부하에게 명령한다.

“서방님, 말씀 잘 들었지? 저러고 밖에 나가면 강압수사라고 오해받을 수 있으니, 잘 씻겨서 내보내!

“예!”


쇠사슬이 풀리자마자 철규가 바닥에 철퍼덕 널브러진다. 세 사람이 달려들어 그를 부축한다. 어깨동무로 철규를 감싼 세 사람의 머리 위로 세찬 물세례가 가해진다. 무참히 짓밟히는 단원들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경덕은 등을 돌린다. 그러곤 주먹을 깨물고 눈물을 삼킨다.

타이요우는 인주가 담긴 상자를 채찍으로 슬그머니 책상 모서리 쪽으로 내민다. 얼마간 바라보던 경덕은 체념한 듯 자백서에 지장을 찍는다. 헌병 보조원들에게 끌려 나가는 단원들이 거칠게 저항한다. 이윽고 두꺼운 철장이 닫히면서 단원들의 절규도 이내 잦아든다.




133.


철규는 변변한 재판도 받지 못하고 공개처형장에 세워진다.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총살을 당한다. 단순 가담자로 지목된 달호와 봉식, 준수는 10년의 강제노동형을 받고 신의주의 철도부설지로 이송된다. ‘총독부요인암살모의사건’의 배후로 거명된 경덕은 1년의 실형을 받고 투옥된다.


미라의 민낯이 파리하다. 흰 두루마기를 걸친 두 형제가 말없이 어머니의 표정을 살핀다.

“내일 아침 일찍 아버지를 면회하려면 새벽녘에는 춘천에 도착해야 된다. 늦기 전에 서두르도록 하자.”

“짐은 다 챙겼습니다.”

인호가 보자기를 챙겨 들고 인서는 미라를 부축하며 방을 나선다. 미라와 형제가 동네 어귀를 벗어날 즈음 타이요우 일당과 맞닥뜨린다.

“아니, 이게 누구랍니까? 박 선생님 아닙니까! 자제들과 함께 강습소라도 가시는 길이신가요?”

강습소란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미라가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를 외면한다. 그녀가 옆으로 비켜 걸음을 옮긴다. 타이요우가 게걸음을 치며 길을 막는다.

“방해하지 마라! 너랑 말 섞을 일이 없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서방님께서 독방을 쓰는 것도 제가 카이토 대장님께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어서 가능했던 겁니다.”

그는 스스로 공치사를 하며 거들먹거린다. 인호가 눈을 부릅뜨고 한 발 앞으로 나선다.

“어머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소? 방해하지 말고 비키시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넌지시 나무란다.

“인호 많이 컸는데? 어른들 말씀하시는 데 끼어들기도 하고 말이야!”

인호가 그의 팔을 밀친다.

“앞으로 우리 집안하고는 더 이상 얽히지 않았으면 합니다.”

“보자 보자 하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버릇이 없군!”

진구가 끼어들어 인호의 머리를 툭 건드린다. 인호는 진구를 일별한 뒤 고개를 돌려 타이요우를 주시한다.

“연이 다 했는데, 자꾸 부딪혀 봐야 좋을 게 없지 않습니까?”

인호의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진구가 주먹을 올린다.

“이제 컸다고 어른 흉내 내는 것 좀 보게? 이걸 확!”

미라가 큰 소리로 꾸짖는다.

“길 가는 행인한테 웬 행패냐? 동족한테 패악질을 부리려고 일본에 부역하려던 게냐? 썩 저리 비키지 못할까!”

타이요우가 진구를 만류한다.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다.”

진구가 혀를 빼물며 뒤로 물러선다. 타이요우가 미라에게 정중히 사과한다.

“이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오랜만에 뵙게 돼서 반가운 나머지 그만······”

그녀는 타이요우의 사과를 귓등으로 흘린다.

“얘들아 가자. 갈 길이 멀다.”

타이요우는 미라와 두 형제가 동네 어귀를 벗어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가 뻐근한 듯 목을 좌우로 꺾는다.

“아비나 어미나 자식까지 죄다 한통속이군!”

“형님, 손 좀 봐줄까요?”

“다 부질없어! 아까 들었잖아? 패악질 부리려고 이러냐고. 앞으로 우리도 달라져야 해. 부역자 소리를 들어야 쓰나? 자, 가자! 우리야말로 한 일이 태산이다.”


타이요우와 졸개들은 논두렁을 따라 들녘으로 향한다.



들녘마다 막바지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볏단을 높이 쌓은 노적가리가 군데군데 보인다. 농부들이 층층이 쌓아 올린 볏단더미에 매달려 새끼줄을 엮어 고정시킨다. 그러곤 짚을 꽈서 만든 지붕을 덮자 얼추 마지막 노적가리가 완성된다.

농부들이 농기구를 챙겨 들녘을 떠날 즈음 논두렁을 훌쩍 뛰어넘던 진구가 진흙탕에 헛발을 딛는다.


“이런 제기랄!”

“하하하핫!”

타이요우가 웃음을 터트린다.

“야, 이놈아! 논바닥도 다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길을 내주는 법이다!”

진구가 볏짚을 주어 흙투성이가 된 장화를 닦는다.

“어이, 진만이!”

졸개 두 명이 서로 두 팔을 붙잡고 가마를 만든다. 타이요우가 양팔 사이에 다리를 끼고 앉는다.

“어이, 진만이! 자네 땅 좀 밟겠네.”

타이요우의 큰 소리가 연거푸 들리는데도 진만은 못 본 체 딴전을 친다.

“아니, 저놈이 까마귀 고기를 통째 삶아 먹었나? 진만이? 나야 자식아!”

진만은 못 이기는 척 입술을 비죽이 내밀곤 흘깃거린다. 인간 가마에 앉은 타이요우가 내려서면서 인상을 찌푸린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

“아니, 귀한 분께서 깡촌엔 어인 일입니까?”

누가 들어도 비꼬는 투가 역력하다.

“자네랑 할 얘기도 남아있고······, 또 내가 이 땅에서 한때 아까운 청춘을 보내기도 하지 않았는가?”

그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동안 진만은 아랑곳하지 않고 동료들과 얘기를 나눈다.

“자, 오늘은 이만하고 돌아가자고. 내일은 할 일이 많으니 일찍들 나오게.”

“예, 내일 뵙죠!”

농부들이 인사를 하고 뿔뿔이 흩어진다. 홀로 남겨진 진만이 뒤돌아선다. 타이요우가 눈을 부라린다.

“시장바닥을 전전하며 동냥치로 살아온 놈이 꽤 살만한가 보군. 이제 내 말이 우습게 들리지?”

“논에서 일하는 농부한테는 길도 묻지 말라 했습니다.”

진만의 냉담한 반응에 그가 발끈한다.

“소귀에 경 읽기라더니······, 소처럼 일만 하더니 소라도 된 모양이지?”

“인간 구실 못하고 살 바에야 차라리 소가 되는 편이 훨씬 낫습죠. 으랴, 으럇!”

진만이 코뚜레에 연결된 줄을 잡아당긴다. 마른 짚을 되새김하던 소가 달구지를 끌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니, 저놈의 주둥이를 그냥 확!”

진구가 씩씩거리며 주먹을 내보인다. 타이요우가 고개를 젓는다.

“화는 이럴 때 내는 게 아니란다. 약이 바싹 오른 소한테 화를 내봐야 뿔에 받히기밖에 더하겠냐? 때론 시간이 약이라고 돌아갈 때도 있는 법이다.”

덜커덩거리며 논두렁을 빠져나가는 달구지를 바라보던 그가 큰소리로 외친다.

“어이, 진만이! 일전에 얘기해둔 거 잊지 말고 잘 기억해두게.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달구지에 탄 진만은 들은 체도 않고 공연히 소만 닦달한다.

“으랴, 으럇! 웬 똥개가 짖어대나? 왜 이렇게 시끄럽지. 어서 가자! 으럇!”

“그래, 옛정을 생각해서 오늘만은 봐준다. 마누라가 차려준 따듯한 밥상이 그리울 것이야. 실컷 처먹어둬라! 내가 다시 방문하는 날이 곧 네 제삿날이다. 이 물정 모르는 촌놈의 자식아!”


한동안 달구지를 바라보는 타이요우가 가소로운 듯 피식거린다. 부하들이 장화에 덕지덕지 붙은 진흙을 떼어낼 때까지 그는 담배를 피우며 허공을 바라본다.


“형님, 민심동향을 파악하는 게 꽤나 힘드시죠?”

진구의 말을 받아 타이요우가 무심히 답한다.

“그러게 말이다. 오랜만에 살던 동네에 와보지만 모든 게 낯설기만 하다.”

진구가 코를 벌름거리는 흉내를 내며 너스레를 떤다.

“앞으로 민심을 파악하는 허드렛일 정도는 들개한테 맡기세요. 아직 들창코가 쌩쌩합니다.”

타이요우가 단박에 질타를 한다.

“그래서, 청년단이 숯가마를 돌며 사격 연습한 것도 모르고 있었냐?”

“죄송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진구는 머리를 긁적이며 연신 굽실거린다. 타이요우는 한발 앞서 길을 재촉한다.

“자, 미천골은 이만하면 됐으니, 해지기 전에 사냥터나 둘러보고 가자.”

“네, 형님!”

“거참, 아까부터 계속 귀에 거슬리네. 아직도 시정잡배인 줄 아나? 형님이 뭐야, 형님이? 이 자식을 그냥!”

타이요우가 입술을 깨물며 버럭 화를 낸다.

“죄송합니다, 형님! 아니, 위원장님!”

“위원장이라? 얼마나 품위 있고 듣기 좋냐?”

“예, 위원장님!”

졸개들이 한 입이 되어 큰 소리로 복창한다.

“예, 위원장님!”



134.


미라와 두 아들은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면회실을 멀뚱거린다. 이윽고 철문이 열리고 경덕이 헌병의 감시를 받으며 들어온다.


“여보, 몸은 어때요?”

얼굴 곳곳이 상처투성이다. 미라는 창살 너머로 손을 뻗어 얼굴을 만지려고 한다. 헌병이 손을 뻗어 제지한다.

“재판은 재판장 마음에 달렸어. 그러니까 재판이 속계될 때까지 어머니 잘 모시고 있도록 해.”

두 아들을 일별한 뒤 경덕은 미라에게 시선을 돌린다.

“투옥된 게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앞으로 면회 오지 마. 날도 추워지는데······”

“당신도 참 애들 앞에서······. 솜옷을 넣었으니, 잘 챙겨 입으세요.”


헌병대 청사 지하실은 최소한의 통풍만 허락된 공간이다. 음습하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간혹 쥐들이 부지불식간에 발등을 오르내리기도 한다. 반면에 호랑이 사냥대회의 출정식이 열리는 헌병대 청사 앞은 인파로 떠들썩하다.

환영식을 겸한 출정식에는 브라스밴드까지 동원되어 성대하게 치러진다. 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의 요인들은 춘천군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는다. 시민대표로 나선 화동이 꽃을 전해주는 것으로 출정식은 막을 내린다.

카이토와 귀빈들이 탄 차가 출발하고 뒤미처 헌병대와 기자들을 태운 트럭이 그 뒤를 따른다. 타이요우와 헌병 보조원들이 탄 말들이 차량을 호위하며 길을 터준다.


타이요우의 사주를 받은 졸개들은 사냥이 개시되기 사흘 전에 미리 노루목마다 고의로 상처를 낸 짐승들을 묶어두었다. 피 냄새를 맡은 호랑이들이 어슬렁거리며 사냥터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실컷 배를 채운 호랑이들은 활동성이 현저히 떨어지며 그늘을 찾아 낮잠을 즐긴다.

일본은 섬나라의 특성상 육식동물이 흔치 않다. 따라서 잠에서 깬 호랑이들이 포효하는 모습과 맞닥뜨린 귀빈들은 사냥이란 목적을 상실한 듯 기념사진을 찍는 데에 열중한다.


“첫 발은 총감님께서 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카이토가 넌지시 제안을 한다. 멀찌감치 호랑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던 경무총감이 총을 받아든다.

“총감님, 여기 기념 총알을 준비했습니다.”

잽싸게 끼어든 타이요우가 총감의 이름이 새겨진 황금 총알을 건넨다.

“이렇게까지 준비할 필요는 없는데······”

총알을 장전하는 경무총감이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타이요우에게 선수를 빼앗긴 카이토의 시선이 곱지 않다.


‘탕아앙······’

경무총감이 쏜 총탄은 긴 여운을 남기며 계곡에 울려 퍼진다. 뒤미처 자작나무숲을 향해 총탄이 빗발친다. 일순 사냥터는 화약 냄새로 진동한다. 카이토가 주최한 사냥대회는 대성황을 이룬다. 사냥 내내 경성에서 온 요인들은 카이토와 타이요우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번 사냥대회를 정례화하기로 했다네. 조만간 총독 각하를 모시고 춘천을 다시 방문하기로 참석자 전원이 뜻을 모았네. 모두 자네들 덕분이야! 신세를 졌으니, 보답이 따를 것이야.”

한껏 상기된 경무총감에 이어 동양척식회사의 사장도 한마디 거든다.

“나 또한 호랑이를 무려 세 마리나 잡았네. 가만있으면 쓰겠나? 땅과 관련된 일이라면 언제든지 경성으로 연락을 주게. 열 일 제쳐두고 먼저 해결해줄 것을 약조하네. 하하하!”

“무한한 영광입니다.”

카이토에 이어 타이요우도 한 마디 보탠다.

“다음에는 백호를 잡으시도록 준비해놓겠습니다.”

“하하핫! 백호를 준비한다고?”

경무총감이 호탕하게 웃는다. 그가 한술 더 뜬다.

“말씀만 하신다면 용이나 공작이라도 대령하겠습니다.”

“하하핫! 말 한 번 시원하게 하는군! 이 친구 정말 마음에 들어!”

경무총감이 타이요우의 어깨를 다독인다. 귀빈들이 다가와 그에게 악수를 건넨다.


포획된 호랑이 십여 마리를 앞에 두고 기념사진을 찍은 요인들은 호랑이 가죽을 전리품으로 챙긴 뒤 개선장군인 양 차에 올라 사냥터를 떠난다.



사냥대회가 끝난 직후 카이토는 이완된 민심을 추스르기 시작한다. 그는 강경하게 대처해온 기존의 대민사업을 온건적인 방향으로 선회한다. 이는 갈수록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행세하는 타이요우를 견제하려는 숨은 의도도 반영된 복안이다.

춘천 군민을 포함하여 학생들은 연일 헌병대 앞에서 시위를 한다. 조작된 증거와 허위자백을 주장하며 경덕의 재심을 요구한다.

헌병대 청사 2층의 집무실에는 전과 달리 쇼군(將軍)의 투구와 갑옷 앞에 호랑이가 박제된 채로 포효하고 있다. 카이토와 타이요우가 창가에서 시위하는 군중을 내려다본다.


“쯧쯧쯧! 잡초 같은 것들. 겁을 주면 쥐구멍을 찾아 숨고, 풀어주면 여름철 쭉정이 자라듯 하는군!”

카이토가 혀를 차며 넌더리를 낸다. 타이요우가 맞장구를 친다.

“괘념치 마십시오. 조센징 기질이 원래 화롯불에 올려놓은 주전자 같아서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식습니다.”

“총독부 장군들이 돌아가서 망정이지, 저런 걸 봤으면 내 체면이 뭐가 됐겠나?”

“앞으로 쥐 죽은 듯이 잠잠해질 겁니다.”

“무슨 묘안이라도 있나?”

“한경덕을 조기 석방하는 겁니다.”

“뭐라고?”

“저들이 원하는 게 한경덕의 재심이고 석방 아니겠습니까? 재심을 하게 되면 경성의 고등법원까지 올라갈 테고, 언론이 낌새라도 차리면 한동안 시끄러울 게 불 보듯 뻔하죠. 따라서 조기에 석방해서 일단 저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겠습니다. 헌병대의 노선이 온건적으로 변했다는 걸 대외에 보여준 다음에······”

타이요우가 미소를 지으며 말꼬리를 흐린다. 잽싸게 그의 의중을 간파한 카이토가 되받는다.

“허허실실작전을 펴자는 얘기군! 느슨하게 풀어주는 척하면서 저들이 재결합할 때 심장에 비수를 꽂아 일망타진하자는 속셈이 아닌가?”

“옳습니다.”

박수를 세 번 친 타이요우가 번드르르한 콧잔등을 벌름거리며 아부를 떤다.

“늘 감탄하는 바입니다마는 뵐 때마다 대장님의 통찰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이 사람아! 자네의 잔머리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네! 하하핫!”

잔머리란 지적에 신경이 거슬린 타이요우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린다. 그러나 고개를 돌린 카이토와 시선이 마주치자 짐짓 태연한 척하며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한경덕 석방을 처리하기 전에 할 일이 많아서요.”

“그렇게 하게.”


서둘러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타이요우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카이토가 아랫입술을 깨문다. 그러곤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주의해야 할 인물이야. 벌써 내 심중을 파악하고 선수를 치고 있잖아. 이제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얹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밥상을 독차지하겠다고 나서겠어. 경계해야 해!’


카이토가 창밖을 내다본다. 그는 부하들의 비호를 받으며 군중을 헤치고 지나가는 타이요우를 발견하곤 눈을 가늘게 뜬다.



135.


하얗게 서리까지 뒤집어쓴 노적가리만이 휑뎅그렁하게 남겨진 들녘은 유난히 을씨년스럽다. 트럭 한 대가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들판을 지나 어디론가 바삐 사라진다. 논배미 끝자락에 면한 민가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트럭 뒤에서 헌병 보조원 한 무리가 내린다. 타이요우는 보조석에 앉아 담배를 꼬나물고 있다. 그는 휑한 들판 쪽으로 얼마간 시선을 고정한다. 그는 부를 축적할 만큼 한 터라 땅에 대해 별다른 욕심은 없다. 다만 그가 미천골의 중턱에 자리한 들판에 유독 눈독을 들이는 것은 개인적인 원한에서 유래한다.


그에게 있어서 진만은 늘 극복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청지기에서 쫓겨난 원인을 진만의 탓으로 돌려 제 허물을 덮으려는 얄팍한 보상심리가 작용한 까닭이다. 사실 진만은 달이 이지러지는 첫새벽부터 일어나 땅거미가 내려앉는 어스름이 되어서야 비로소 허드렛일에서 벗어나곤 했다. 반면에 출세는 어두워지기도 전에 대문 밖을 나가 잔뜩 취해서야 이슬을 밟으며 귀가하기 일쑤였다.

진만은 동면을 준비하는 동물처럼 차곡차곡 곳간을 채워나갔다. 출세는 곶감 빼먹듯 곡식에 손을 대며 차츰차츰 곳간을 좀먹었다. 이를 알게 된 경덕은 소출이 좋은 땅뙈기를 진만에게 떼어줬다.

평소 입버릇처럼 금싸라기 땅을 제 것이라 떠들고 다녔던 출세는 이에 앙심을 품게 된다. 성실한 노력의 대가로 진만에게 주어진 땅에 온갖 저주와 악담을 퍼부으며 가출했던 그는 언젠가는 반드시 땅을 되찾겠다고 한 약속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그가 돌아왔다. 출세가 아닌 타이요우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추수가 끝난 농가는 겨우내 먹거리를 장만하기 위한 손길로 분주하다. 원주댁과 품앗이를 온 부녀자 두 명이 절구통에 달라붙어 씨름을 하고 있다. 부녀자가 모락모락 김을 내뿜는 삶은 콩 한바가지가 절구통에 부으면, 공이를 높이 쳐든 원주댁이 힘껏 내리친다. 공이질로 콩이 으깨지면 기다렸다는 듯 팔을 걷어붙인 아낙이 속엣 것을 꺼내 네모반듯하게 빚어 평상 위에 가지런히 놓는다. 늦가을 볕에 메주가 식어갈 즈음 마당 안이 소란스럽다.


“대농의 집은 역시 다르구먼! 동구 밖에서도 메주 쑤는 냄새가 진동을 하니 말이야!”

진구가 부하들과 마당으로 들어서며 걸걸하게 떠든다. 질겁한 부녀자들이 손을 탈탈 털며 뒤로 물러선다. 진구가 삶은 콩을 한 움큼 집어 먹는다. 졸개들은 놀란 토끼처럼 무르춤한 부녀자들에게 다가가 농지거리를 늘어놓는다.

“지주는 어디 갔나?”

진구가 들개처럼 코를 벌름거리며 집안 곳곳을 둘러본다. 눈을 부릅뜬 원주댁이 쏘아붙인다.

“살림집 처음 봤수? 뭘 그리 발정난 개처럼 킁킁거리며 넘의 집을 훑는 거요! 기분 상하게스리······, 퉷!”

그녀는 입속을 가르랑거리곤 가래를 솎아 내뱉는다. 체면이 깎인 진구가 발끈하며 으름장을 놓는다.

“이 여편네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어디서 입방정을 떨어? 이걸 확!”

그가 손을 드는 순간 불쑥 나타난 진만이 그의 손을 제압한다.

“이 자식이 어디서 남의 부인한테 손을 올려? 그냥 확 손모가지를 꺾어놓을까 보다!”

순식간에 손목이 비틀어진 진구가 잽싸게 꼬랑지를 내리며 고통을 호소한다.

“아야야, 아야야! 알았어, 알았다고. 우리 말로 하자!”

“이 자식이 덜 익은 쌀겨를 먹었나? 어디서 반말이야?”

“아아, 아아아! 말로 하셔요, 말로! 애들이 보는 앞에서 이러면 내 체면이 구겨지잖아요? 제발 이거 놓고······”

진구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박수 소리가 들려온다. 터벅터벅 마당으로 들어선 타이요우가 가소로운 듯 웃는다.

“근동에서 최고의 부농이란 소릴 듣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군. 소보다 힘이 세다는 건 내 진즉에 알고 있었다마는, 아직 박진만은 죽지 않았어!”

그를 쏘아보는 진만의 콧잔등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아직도 우리 사이에 볼 일이 남았소?”

“말로 할 때 알아들어야지, 이 사람아! 코흘리개도 내 별명이 ‘과부제조기’라고 하던데, 꼭 내가 여기까지 와야 말을 들을 텐가?”

“일 없수다!”

진만이 진구의 비튼 팔을 푼다. 그가 팔을 감싸며 바닥에 나뒹군다.

“분명 말했을 텐데, 내 별명이 과부제조기라고?”

타이요우가 정색하며 그를 노려본다.

“손가락이 쇠스랑처럼 굳어지는 고통을 참아가며 자갈을 고르고 돌을 퍼 날랐소. 십여 년 넘게 가꾼 땅을 호락호락 넘길 것 같았으면 애저녁에 팔아치웠을 거요!”

진만의 입장은 완강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타이요우가 반전을 꾀한다.

“얘들아, 부농께서 순순히 응하지 않으시겠단다!”

“예, 지회장님!”


졸개들이 다짜고짜 메주가 널린 평상을 뒤집어엎고, 절구통을 번쩍 들어 바닥에 메다꽂는다. 혼비백산한 아낙들이 줄행랑을 치고 원주댁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기 시작한다. 점점 눈꺼풀이 커지면서 흰자위가 뒤집힌 진만이 헛간으로 달려가 쇠스랑을 손에 쥔다. 그러곤 닥치는 대로 집기를 집어 던지는 헌병 보조원들 쪽으로 달려든다.


“에잇, 이놈들! 오늘이 너희 제삿날인 줄 알아라!”

쇠스랑을 높이 치켜든 그가 진구를 내리찍을 찰나 총성이 마른하늘에 메아리친다. 일순 진만과 진구, 졸개들이 소금기둥처럼 굳은 채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옛정을 생각해서 후한 값을 치러서 동양척식회사에 팔아준다고 했지? 쇠스랑으로 위협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타이요우는 진만의 주위를 돌며 마치 어린아이 달래듯 설득한다. 쇠스랑을 높이 쳐든 진만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금방이라도 손에 쥐어진 쇠스랑이 타이요우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힐 기세다.

“그따위 소리하려거든 썩 내 앞에서 꺼져! 평생 땅 하나 믿고 살아왔다는 것을 네놈이 더 잘 알 텐데······. 뚝심 하나로 살아온 내가 선선히 땅을 내줄 것 같아? 천만의 말씀!”

타이요우도 물러서지 않는다.

“조선 팔도 어디를 가나 일장기가 나부끼고 있어. 이를테면 총독부가 마음만 먹으면 조선 팔도에서 못하는 일이 없다는 말이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후한 값을 쳐줄 때 어서 넘겨!”

진만의 눈빛에 살기가 스친다. 햇빛을 받은 쇠스랑이 허공에서 반짝거린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그 누구도 내 땅에 발을 디딜 수 없다! 허튼짓을 했다간 피를 보게 될 거다!”


유년시절 동냥치로 시작해 꼬박 스무 해를 머슴살이를 살며 장만한 집이며 논이다. 그는 목숨보다 더 귀한 땅을 삼켜버리겠다며 달려드는 타이요우의 염치가 죽도록 미웠다. 두 사람의 대거리를 지켜보던 졸개들은 오금이 저렸는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선다. 그러나 타이요우만은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다.


“정히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이제 너의 운명은 내 손을 떠났다. 나를 원망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조만간 동양척식회사 소속의 야쿠자들이 떼거지로 들이닥칠 텐데, 그때 가서 후회하지나 마!”



137.


타이요우의 예견은 이튿날 바로 실천된다. 이른 아침 토지수용을 위한 일련의 절차가 강제로 집행된다. 토지조사국 소속의 건장한 사내들이 트럭 두 대에서 내린다. 사냥개까지 풀어놓은 그들은 마구잡이로 논이며 밭에 빨간 깃발이 달린 말뚝을 박는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사내가 진만에게 다가와 서류 한 장을 내민다.


“이게 다 뭐냐?”

“미천골 일대의 땅이 철도 부지로 선정되어 공용 목적으로 수용되었음을 통보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곳은 동양척식회사 강원지부의 관리대상으로 편입되었습니다. 강제집행절차를 방해하는 등의 수용을 거부하는 일체의 행동은 토지관리법 위반으로 처벌됨을 알려 드립니다.”

진만은 서류를 갈기갈기 찢어 땅바닥에 뿌린다.

“누구 마음대로 땅을 수용해? 엄연히 땅주인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진만과 원주댁이 달려들어 말뚝을 뽑아 보지만 사내들에게 번번이 제압당한다. 진만은 미친 듯 사내들과 몸싸움을 벌인다. 근동에서 장사로 소문이 난 그였지만 한꺼번에 달려든 사내들 앞에서는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진만은 공무집행방해죄로 체포되어 헌병대로 압송된다.


“그러게 내가 뭐라 그랬어? 순순히 말로 할 때 들었으면 보상금이라도 받았을 텐데, 말이야! 이 사람아! 제발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맞게 살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괜히 원주댁 생과부 만들지 말고 여기에 지장이나 찍고 가! 내가 손을 써놨으니, 돈 몇 푼이라도 챙길 수 있을 거야. 원주댁 굶기지 말고! 쯧쯧쯧!”

취조실에서 나타난 타이요우는 만신창이가 된 그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약을 올린다.

“알아들었다. 그만 닦달해라. 자고로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고 들었다. 언젠간 너희한테도 시련이란 게 찾아올 것이다. 두고 보자!”

“하하핫! 이 양반아, 정신 차려! 얼음판 팽이보다 더 팽팽 돌아가는 게 작금의 세상이야! 무슨 놈의 미래 타령을 해! 오늘 중으로 풀려나려면 어서 여기에다 지장이나 찍어!”


타이요우가 실실거리며 취조실을 나선다. 홀로 남겨진 진만은 눈을 감은 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그가 오른손 엄지에 인주를 묻혀 서류에 지장을 찍는다.



헌병대 청사 밖에서 원주댁이 서성거린다. 타이요우가 나타나자 조르르 달려간다. 인력거에 오르는 그가 성가신 듯 바라본다.


“그러게 진즉에 내 말을 들었어야지! 인제 와서 울고불고 난리를 치면 난들 어쩌라고?”

“다 제가 고집을 피워서 그런 겁니다. 다시는 그럴 일이 없을 테니, 이번 한 번만 눈감아 주세요, 나으리!”

그가 눈시울이 붉은 원주댁을 내려다보며 귀찮다는 듯 투덜거린다.

“지장을 찍으면 오늘 중으로 나올 거야. 좀 있으면 대장님 퇴근 시간이다. 여기서 추레하게 서 있지 말고 국밥집에서라도 기다려!”

그는 회중시계를 본 뒤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땅바닥에 내던진다.

“늦었다! 춘천옥으로 가자!”

“네!”


원주댁은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목 놓아 울기 시작한다. 거지가 슬쩍 다가와 지폐를 주워 도망친다. 어느덧 헌병대 청사에 불이 켜진다. 가로등 아래서 종종걸음을 치던 원주댁이 멈칫한다. 자세히 보니 진만이 다리를 절룩거리며 계단을 내려서고 있다.

와락 끌어안은 두 사람은 한동안 흐느낀다. 이윽고 눈물을 멈춘 두 사람은 거리를 벗어난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두 사람을 비춘다. 경덕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아내의 어깨에 의지한 채 힘겹게 걸음을 옮긴다.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유난히 서글퍼 보인다. 아내의 여윈 손을 꼭 잡고 걷던 그가 달을 올려다본다.


“여보, 난 여한이 없어!”

“왜, 나를 만난 게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어?”

원주댁이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을 애써 참으며 웃음을 짓는다.

“유치장 안에서 문뜩, ‘내가 여태껏 살아온 힘이 무얼까’란 생각이 떠오르더라고.”

“그게 나란 말이지?”

두 사람은 눈물을 머금은 눈빛을 마주보며 웃는다.

“땅만 믿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란 얘기지. 바로 당신이란 걸 비로소 깨달았어!”

원주댁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곤 네스레를 떤다.

“살다 살다 별일이네. 무뚝뚝하기론 장승보다 더한 사람이 거리에 내앉게 돼서야 철이 든 모양이네!”

“하하핫! 내가 뭐가 걱정이겠어. 나한테는 원주댁이 있는걸!”

“그러게 뭐가 걱정이유! 나한텐 울산바위보다 꿈쩍도 하지 않는 황소 같은 낭군이 있는걸!”

진만은 아내의 어깨를 감싼다. 그러곤 작정한 듯 속내를 내비친다.

“여보. 우리 떠납시다. 훨훨 나는 기러기처럼 아무도 없는 만주에 가서 삽시다. 그곳에서는 땅을 빼앗길 일도 없다고 들었소.”

진만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뜨거운 눈물이 피로 얼룩진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아무렴 만주가 생죽음을 당하는 이곳보단 더 하겠소? 여보, 난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를 거예요.”

“여기선 고생만 시켰는데, 만주에 가선 질리도록 호강시켜줄게!”

“언제인지 귀띔이나 해주시구려. 호강하러 간다는데, 맨손으로 갈 수는 없지 않겠소.”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남긴 했지. 일만 성사되면 그길로 당장 떠납시다.”


아랫입술을 힘껏 깨문 진만의 광대뼈가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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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134화 악마의 최후 +3 19.07.12 166 1 16쪽
133 133화 고귀한 죽음 +1 19.07.11 90 1 12쪽
132 132화 무지개 +1 19.07.10 90 1 13쪽
131 131화 차관협정(借款協定) +2 19.07.05 98 1 14쪽
130 130화 반공포로석방 +1 19.07.01 112 2 13쪽
129 129화 한일회담 +1 19.06.29 110 2 15쪽
128 128화 폭탄테러 +1 19.06.26 120 2 13쪽
127 127화 카츄샤 +1 19.06.24 107 2 13쪽
126 126화 의사 왕룽 +1 19.06.23 106 3 17쪽
125 125화 빅터 한 재단 +2 19.06.19 116 3 13쪽
124 124화 인천상륙작전 +1 19.06.13 143 2 15쪽
123 123화 메모리 가든 +1 19.06.12 114 2 15쪽
122 122화 겹생 +3 19.06.10 112 2 16쪽
121 121화 하와이 +1 19.06.07 121 3 14쪽
120 120화 소령 맥나마라 +4 19.06.06 126 2 15쪽
119 119화 한초희 +1 19.06.05 130 2 14쪽
118 118화 맥아더 원수 +1 19.06.04 123 2 14쪽
117 117화 기만방송 +1 19.06.03 120 2 13쪽
116 116화 코리안 커넥션 +1 19.06.01 131 2 12쪽
115 115화 잠수함 +1 19.05.30 174 2 13쪽
114 114화 6.25 전쟁 +1 19.05.29 147 2 12쪽
113 113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특명 1호 ‘폭풍’ +1 19.05.21 128 2 11쪽
112 112화 금괴수송작전 +1 19.05.19 165 2 10쪽
111 111화 '암호명 A-1' +1 19.05.18 120 2 13쪽
110 110화 악연(惡緣) +1 19.05.17 120 2 14쪽
109 109화 마지막 미션 +1 19.05.16 120 2 12쪽
108 108화 애치슨 라인 +1 19.05.15 118 2 12쪽
107 107화 연적(戀敵) +1 19.05.15 137 2 12쪽
106 106화 독살(毒殺) +1 19.05.14 131 2 12쪽
105 105화 마돈나 다방 +2 19.05.13 137 2 15쪽
104 104화 한국은행 +1 19.05.11 137 2 14쪽
103 103화 비밀거래 +1 19.05.10 160 2 12쪽
102 102화 남미이주작전 +1 19.05.10 154 2 13쪽
101 101화 트루먼 독트린 +1 19.05.10 126 2 11쪽
100 100화 숙명의 라이벌 +1 19.05.10 132 3 18쪽
99 99화 Jane Doe +2 19.05.10 130 2 13쪽
98 98화 앙숙, 이승만과 김구 +1 19.05.10 130 2 12쪽
97 97화 반도호텔 +1 19.05.10 126 2 13쪽
96 96화 좌익과 우익 +1 19.05.09 126 2 13쪽
95 95화 조선인민공화국 +1 19.05.09 131 2 17쪽
94 94화 일본패망(日本敗亡) +1 19.05.09 137 2 12쪽
93 93화 원자폭탄 +1 19.05.09 127 2 13쪽
92 92화 김일성 +1 19.05.09 134 1 14쪽
91 91화 독수리 작전 +1 19.05.09 132 1 14쪽
90 90화 이승만 +1 19.05.09 120 1 14쪽
89 89화 비밀요원 나타샤 +1 19.05.09 114 2 15쪽
88 88화 OSS(미국전략사무국) +2 19.05.09 120 2 16쪽
87 87화 승전(勝戰) +1 19.05.09 114 2 14쪽
86 86화 진주만공습 +1 19.05.08 116 1 16쪽
85 85화 갈라예프 +2 19.05.08 115 2 16쪽
84 84화 채권(債券) +1 19.05.08 120 2 11쪽
83 83화 다카키 마사오 +1 19.05.08 133 2 12쪽
82 82화 광복군(光復軍) +1 19.05.08 114 2 13쪽
81 81화 육군정보학교 +2 19.05.08 115 2 11쪽
80 80화 홍콩행 +1 19.05.07 123 3 13쪽
79 79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3 19.05.07 113 2 12쪽
78 78화 김원봉과 김구 +1 19.05.07 112 2 16쪽
77 77화 까레이스키 +3 19.05.07 111 2 12쪽
76 76화 탈출(脫出) +1 19.05.07 116 3 9쪽
75 75화 박정희와 최태민 +1 19.05.07 121 2 9쪽
74 74화 중일전쟁(中日戰爭) +1 19.05.07 115 2 13쪽
73 73화 강제이주 +3 19.05.06 110 1 12쪽
72 72화 마루타 +1 19.05.06 110 1 12쪽
71 71화 막후 실력자 +1 19.05.06 110 2 13쪽
70 70화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등장 +1 19.05.06 110 1 15쪽
69 69화 천황결사옹위청년단 +1 19.05.05 112 1 15쪽
68 68화 후흑학(厚黑學) +1 19.05.05 118 1 13쪽
67 67화 경몽장(耕夢莊) +1 19.05.05 113 1 12쪽
66 66화 학교(學校) +1 19.05.05 113 1 8쪽
65 65화 국제연맹(國際聯盟) +1 19.05.05 113 1 19쪽
64 64화 나타샤 +1 19.05.05 112 1 11쪽
63 63화 보고서 +1 19.05.05 113 1 11쪽
62 62화 시인과 영웅 +2 19.05.04 123 2 15쪽
61 61화 탄생의 비밀 +2 19.05.04 114 2 18쪽
60 60화 국경수비대 +1 19.05.03 113 2 13쪽
59 59화 제네바협약 +4 19.05.03 118 2 18쪽
58 58화 명백한 운명 +1 19.05.03 112 1 16쪽
57 57화 미두취인소(米豆取人所) +1 19.05.03 115 1 12쪽
56 56화 생포(生捕) +1 19.05.02 113 2 13쪽
55 55화 참패(慘敗) +1 19.05.02 112 2 14쪽
54 54화 향수병(鄕愁病) +1 19.05.02 113 2 18쪽
53 53화 음악회 +1 19.05.02 113 2 18쪽
52 52화 들개 진구 +1 19.05.02 117 2 24쪽
51 51화 가락지 +3 19.05.02 117 2 26쪽
50 50화 덫 +1 19.05.01 120 1 28쪽
49 49화 추격전(追擊戰) +1 19.04.30 114 2 35쪽
48 48화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1 19.04.30 118 2 39쪽
47 47화 광휘와 빅터 +3 19.04.29 117 2 33쪽
46 46화 특별수사본부(特別搜査本部) +4 19.04.29 116 2 41쪽
45 45화 만저우리(滿洲里) +4 19.04.28 110 3 35쪽
44 44화 폭풍전야(暴風前夜) +1 19.04.28 111 3 37쪽
43 43화 Boys, be ambitious! +1 19.04.27 113 2 39쪽
42 42화 만주국(滿洲國) +5 19.04.27 121 2 38쪽
41 41화 만몽영유계획(滿蒙領有計劃) +1 19.04.26 121 3 25쪽
40 40화 재회(再會) +1 19.04.26 118 3 30쪽
39 39화 빅터 한 +1 19.04.25 121 3 49쪽
38 38화 박진만 +2 19.04.25 130 3 45쪽
37 37화 정보국 5과 +3 19.04.24 138 3 51쪽
36 36화 마적(馬賊) 왕리 +2 19.04.24 135 3 49쪽
35 35화 삼두정치(三頭政治) +2 19.04.23 137 3 42쪽
34 34화 주찬 +1 19.04.23 133 3 51쪽
33 33화 만주야사(滿洲野史) +2 19.04.22 131 3 50쪽
32 32화 서광휘 +2 19.04.22 134 3 47쪽
31 31화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 +2 19.04.21 160 4 47쪽
30 30화 미쓰야협정(三矢協定) +4 19.04.21 135 4 46쪽
29 29화 출산(出産) +3 19.04.20 145 4 43쪽
28 28화 밀항(密航) +2 19.04.20 134 4 45쪽
27 27화 불령선인(不逞鮮人) +1 19.04.19 135 4 43쪽
26 26화 님의 침묵 +1 19.04.19 141 4 48쪽
25 25화 이민(移民) +2 19.04.18 152 4 39쪽
24 24화 회자정리(會者定離) +2 19.04.18 140 5 44쪽
23 23화 여걸(女傑) 수잔 +5 19.04.17 144 4 46쪽
22 22화 3·1 만세운동 +5 19.04.17 147 4 44쪽
» 21화 천적(天敵) +1 19.04.16 146 5 49쪽
20 20화 아카키 타이요우(赤木太陽) +4 19.04.16 150 5 52쪽
19 19화 망국(亡國) +4 19.04.15 160 3 49쪽
18 18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3 19.04.15 165 3 46쪽
17 17화 한성진격작전(漢城進擊作戰) +4 19.04.14 161 4 49쪽
16 16화 의병전쟁(義兵戰爭) +4 19.04.14 165 4 43쪽
15 15화 춘투(春鬪) +5 19.04.13 177 3 47쪽
14 14화 암살미수(暗殺未遂) +4 19.04.13 186 3 37쪽
13 13화 결혼(結婚) +3 19.04.12 267 6 42쪽
12 12화 돈버거 +9 19.04.12 245 7 44쪽
11 11화 대한제국(大韓帝國) +2 19.04.11 270 7 45쪽
10 10화 김출세(金出世) +7 19.04.11 294 8 42쪽
9 9화 낙향(落鄕) +4 19.04.10 311 8 42쪽
8 8화 혁파안(革罷案) +4 19.04.10 324 9 41쪽
7 7화 증기자동차 +2 19.04.09 378 12 22쪽
6 6화 2차 사행(使行) +2 19.04.09 381 12 24쪽
5 5화 견문록(見聞錄) +5 19.04.08 430 13 19쪽
4 4화 북경(北京) +1 19.04.08 525 11 19쪽
3 3화 만남 +1 19.04.08 645 12 15쪽
2 2화 1차 사행(使行) +2 19.04.08 941 13 14쪽
1 1화 파락호(破落戶) 이하응 +17 19.04.08 1,820 1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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