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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공모전참가작 님의 침묵

웹소설 > 자유연재 > 대체역사, 드라마

최장르
작품등록일 :
2019.04.08 16:31
최근연재일 :
2019.06.13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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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8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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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쪽

25화 이민(移民)

님의 침묵




DUMMY

172.


호롱불 아래에서 저녁을 먹는 내내 침묵이 흐른다. 그릇에 닿는 젓가락 소리만이 간혹 적막한 공기를 가를 뿐이다. 경덕이 한 무릎 뒤로 물러서며 숭늉을 마신다. 그는 종이 한 장을 내밀고 무거운 입을 뗀다.


“낮에 우체부가 이걸 전하고 가더구나.”

인서와 수잔은 서로 시선을 교환한 뒤 전보를 훑어본다.

“드디어 하와이에 갈 길이 열렸어요! 부산항에 입항한 상선 아메리카호가 보름 뒤에 출항한다고 하네요. 서둘러야겠어요.”

기쁨의 눈물을 글썽이는 수잔과는 달리 이미 전보를 본 가족들의 표정은 침울하다. 벽에 등을 진 채 다리를 주무르던 인서의 표정도 시무룩하다.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잖아. 속히 치료하지 않으면 괴사가 일어나서 다리를 절단할 수도 있다고. 지금이라도 치료할 길이 생겨서 다행이야.”

수잔이 인서의 다리를 매만지며 위로하지만 인서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한다. 미라가 반닫이 궤의 윗널을 열고 깊숙이 손을 집어넣는다. 그러곤 천으로 감싼 뭉치를 꺼내 인호와 수잔 앞에 내놓는다.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틈틈이 모았다마는 노잣돈으로도 부족할 게야! 보태서 쓰도록 해!”

“어머니, 아니에요. 그동안 장사를 해서 모든 돈이면 부산까지 충분히 갈 수 있어요!”

수잔이 손사래를 치며 돈뭉치를 도로 미라에게 돌려준다. 경덕이 끼어든다.

“아들을 부탁하는 부모의 맘이라고 여기고 받아줘. 핏줄 하나 없는 이역만리에서 수잔 양한테 모든 걸 맡기는 부모의 심정이 오죽하겠어. 이렇게라도 해야지 우리 내외가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어.”

수잔이 눈물을 흘리며 봉투를 드는 순간 인서가 그녀의 손을 뿌리친다.

“전 안 갈 겁니다!”

그의 한 마디에 모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무슨 소리야? 다리를 절단하고 평생 불구로 살고 싶어?”

수잔이 버럭 화를 낸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다.

“비록 나라를 빼앗겼지만 부모형제까지 등지며 조국을 떠나고 싶지 않아!”

“영원히 떠나는 게 아니잖아? 수술을 받고 나은 후 다시 돌아와서 독립운동도 하고 부모님께 효도 하면 되잖아! 왜, 인제 와서 괜한 고집을 피워! 내가 그동안 무엇 때문에 고생을 했는데······”

수잔이 말을 채 잊지 못하고 흐느낀다. 미라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인다.

“당장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그러는 거니, 걱정하지 마! 곧 마음을 추스르면 나아질 거야!”

격앙된 인서가 미라의 말을 가로챈다.

“어머니! 전 가족을 두고 절대 조국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얼마간 인서를 홉뜬 눈으로 보던 수잔이 서류 한 장을 내민다.

“타이요우를 만났어요. 아버님한테도 안부 전하라며 으름장을 놓더군요. 그가 눈치를 챈 게 분명해요.”

인호가 슬그머니 서류를 펼쳐본다. ‘출두명령장’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씌어 있다. 놀란 나머지 경덕과 미라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인서는 올 것이 왔다는 듯 날숨을 길게 내쉰다.

“당장 내일이라도 짐을 싸서 떠나거라!”

인서는 경덕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의 눈빛이 이글거린다.

“내일 경찰서에 출두하겠습니다.”

“뭐라고? 너 지금 제정신이야! 그놈이 그냥 움직이겠어? 뭔가 꼬투리를 잡은 게 틀림없어! 얼굴에 칼을 맞은 뒤로 물불을 안 가린다고 하던데, 네가 감당할 상대가 아니야. 아버지 말씀대로 당장 떠나는 게 상책이야!”

인호의 충고에도 인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출두하지 않고 야반도주라도 하면? 그놈이 봐줄 거 같아! 아까 들었잖아? 아버지한테 안부 전하라는 말! 그놈은 나를 잡으려는 것보다 우리 가족을 멸족시키려고 안달 난 놈이라고. 나 때문에 가족한테 화를 입힐 순 없어!”


분을 견디지 못한 인서가 수잔의 손을 뿌리치고 절름거리며 문을 박차게 나간다.




173.


경찰서 지하의 취조실 안은 담배 연기로 자욱하다. 타이요우와 인서는 두 시간째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담배를 빡빡 피우던 타이요우가 전단지 한 장을 그에게 내민다.


“이게 누구일까? 네가 보기에도 낯이 익지?”

타이요우가 의도적으로 비아냥거리며 인서를 도발한다. 인서는 살포시 턱을 끌어당긴 채 건성으로 바라본다.

“모릅니다.”

“하여튼 한 씨 가문 작자들은 죄다 말이 짧아. 그렇게 삐딱하게 보지 말고 자세히 들여다보란 말이야!”

발끈한 그가 손바닥으로 넓적다리를 움켜쥔다.

“아악!”

새된 비명이 천장에 공명된다.

“빠가야로! 이래도 모르겠나?”

타이요우는 인서의 머리를 낚아챈 뒤 얼굴을 전단지를 밀착시킨다.

“모릅니다!”


두 사람의 윽박질과 비명이 고스란히 쇠창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잔에게 전달된다. 그녀가 순사들을 붙잡고 애면글면하며 하소연해보지만 죄다 모르쇠로 일관한다. 쇠창살을 부여잡고 안절부절못하던 그녀의 눈빛이 갑자기 되록되록한다. 그러곤 쏜살같이 주재소를 빠져나간다.



174.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의 춘천 지사장의 저택은 정원까지 갖춘 복층구조의 적산가옥이다. 어두운 골목에서 수잔이 적산가옥을 주시한다. 2층에 불이 켜지고 나카다가 커튼 뒤로 어른거리는 모습이 눈에 띈다. 경비원 두 명이 담배를 나눠 피우며 수다를 떨고 있다.

혼다의 차가 문 앞에 멈춘다. 경비원들이 서둘러 차의 뒷문을 연다. 경비원이 트렁크에서 짐을 들고 혼다의 뒤를 따른다.

수잔은 잽싸게 2층을 향해 돌을 던진다. 잠시 뒤 나카다가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몸을 내민 채 아래를 두리번거리던 그가 껑충거리며 손을 흔드는 수잔을 발견하곤 반색한다. 나카다는 창문을 닫고 커튼 뒤로 사라진다.


수잔과 나카다는 천변을 거닌다.

“미안해! 따로 부탁할 곳이 없어서 찾아왔어!”

수잔이 머뭇거리다 말을 걸면, 나카다가 장난스럽게 응한다.

“두드려라, 그럼 열릴 것이다! 급할 땐 방법을 찾는 게 실용주의의 정신이 아니겠어? 늦은 시간에 나를 찾은 이유는?”

“부탁이 있어!”

“합당한 부탁이라면 들어줄 수 있지!”

“인서가 곤란하게 됐어!”

갑자기 나카다가 걸음을 멈춘다.

“흠! 역시 예상한 대로군!”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부탁하는 입장치곤 협박에 가까운걸!”

나카다의 말이 끝나자마자 수잔이 그를 와락 껴안는다. 그러곤 키스를 퍼붓는다. 얼마간 키스 세례를 받던 그가 팔을 뻗으며 거리를 유지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굳이 이럴 필요는 없어!”

무안해진 수잔이 고개를 숙인다.

“미안해! 너를 이용하려고 한 건 아니야!”


나카다는 흐느끼는 수잔의 어깨를 감싼다. 그러곤 길을 되돌아간다.





175.


경찰서 앞에 혼다의 차가 매연을 내뿜으며 정차하고 있다. 인력거에서 내린 타이요우가 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혼다가 창문을 내린다.

“어이, 아카키 형사!”

뒤를 돌아본 그가 조르르 차로 달려가 허리를 숙인다.

“아침부터 여긴 웬일이십니까?”

“어서 차에 타게!”

그가 차에 오른 후 혼다는 두어 차례 밭은기침을 하곤 말을 잇는다.

“인서란 학생을 구금하고 있다면서?”

“아니, 그걸 지사장님이 어떻게······?”

타이요우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자세한 건 묻지 말게. 증거가 있나?”

당황한 그가 잠시 머뭇거린 뒤 정색하며 대꾸한다.

“불령한 조센징한테 그까짓 증거가 뭐가 필요합니까?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지요.”

“영사관 딸이 관계가 됐나?”

“만약 혐의가 입증되면 영사관 딸도 같이 도주를 방조한 혐의로 입건하려고 합니다!”

“그게 말이야! 확실한 증거도 없이 미국 영사관의 딸을 건드리면 외교적으로 마찰을 빚을 수가 있네. 민감한 부분이니 신중히 처리해야 되네!”

“증거는 차고 넘칩니다. 인서란 놈이 ‘3·1만세사건’ 때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군중을 선동한 주동자로 보입니다.”

“보이다니? 그건 증거가 아니잖아?”

“저놈이 지금 다리를 절고 있는데, 당시 수사관의 말로는 추격전 도중에 놈이 헌병대한테 총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혼다의 관자놀이가 불거진다.

“흠, 그래? 그렇다면 그 상처가 총상인지 아닌지, 의사의 소견을 물으면 명확해지겠군!”

“그렇긴 하죠! 하지만······”

“혹시 미국 영사관에서 알기라도 하면 인권탄압이니, 강압 수사니, 뒤탈이 많을 거야.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총상 여부를 먼저 확인하는 게 좋을 거야!”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타이요우는 마지못해 그의 결정을 승낙한다.

“예, 뒤탈이 없는 게 좋겠죠! 단, 총상을 정확히 감식하기 위해 전투 경험이 있는 군의관을 전문위원으로 위촉하도록 하겠습니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



176.


인서는 총상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자혜의원에 입원한다. 무장한 순사 두 명이 병실을 지키고 있다. 군의관의 검진이 다음날로 잡힌 것을 알게 된 수잔은 서둘러 탈주 계획을 세운다.

수잔은 교교한 야음을 틈타 자혜의원의 뒷마당으로 숨어든다. 그러곤 허름한 창고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놓는다. 인화물질에 취약한 목재는 삽시간에 화염에 휩싸인다.

훨훨 타오르는 불길에 놀란 주민들이 양동이를 들고 불을 진화한다. 어느덧 병원 복도가 연기로 꽉 찬다. 환자들이 아우성을 치며 병원을 뛰쳐나간다. 당황한 순사들과 의료진이 뒷마당으로 달려간다. 그들은 펌프가 달린 수레를 끌고 와서 불을 끄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지만 이미 불길은 걷잡을 수가 없다.

어수선한 틈을 노리던 수잔은 잽싸게 병실로 들어가 인서를 부축하고 의원을 빠져나온다. 부상이 심한 인서는 의원 밖에서 풀썩 주저앉는다.

수잔은 시계를 보며 초조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요란한 굉음을 내며 사이드카가 거리 모퉁이를 돌아 의원 앞으로 다가온다. 나카다는 수잔을 도와 실신한 인서를 사이드카에 태운다. 그러곤 담요로 인서를 덮어준다. 수잔이 나카다 뒤에 올라타자 사이드카는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밤새 오솔길을 내달린 사이드카는 새벽녘에야 원주제일교회에 도착한다. 미국인 선교사 노블이 수잔을 맞이한다. 노블은 실신한 인서를 보고는 얼른 교회 안으로 옮긴다.


“내가 한 약속은 여기까지야! 지금부터는 네 운명에 따라야 해!”

나카다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고마워! 이 신세는 정말 잊지 않을게!”

“그나저나 어디로 갈 거야?”

“미안해! 말할 수 없다는 거 알잖아!”

“너는 내 인생에 있어서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거였어!”

“나도 너를 만난 걸 후회하지 않아! 다만······”

수잔이 머뭇거리자 그가 말을 끊는다.

“그만! 두 번째 남자는 되기 싫어! 난 단지 옛 우정을 생각해서 약속한 걸 지켰을

뿐이야!”

사이드카에 올라탄 그가 시동을 건다.

“편지할게!”

“인서 자식, 복도 많지! 쾌유하길 기도할게.”


사이드가가 사라진 길 위로 뿌연 흙먼지가 한동안 부유한다. 수잔은 멀거니 바라본 후 교회 쪽으로 잰걸음을 놓는다.




177.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기차를 이용하여 부산항에 도착한 수잔과 인서는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아메리카호’에 무사히 오른다. 육중한 상선이 뱃고동을 울리며 오륙도를 빗겨 먼 바다로 벗어날 즈음 자전거 한 대가 미천골의 어귀를 미끄러져 내달린다.

마루에 앉아 바느질을 하던 미라가 꾸벅 졸고 있다. 독경을 읊던 부자의 낭랑한 소리가 안채에서 흘러나온다. 미라는 몸서리를 치며 게슴츠레한 눈을 비비며 잠을 쫓는다.

한가로운 오후의 전경이 미철골에 펼쳐진다. 자전거를 탄 우체부가 경덕의 대문 앞을 서성거린다.


“별일 없으시죠? 세상이 하도 수상하이서 편지를 전하는 마음도 뒤숭숭합니다.”

한숨을 내쉬는 우체부에게 미라가 안부를 묻는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편지는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요즘 같아서는 편지보다는 무소식이 희소식인 거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미라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나서 관동지역에서만 사십만 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를 틈타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둥, 우물에 독을 탔다는 둥, 괴담이 퍼지면서 애꿎은 조선인 수천 명이 학살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세상이 아무리 일본이 좌지우지한다지만 죄 없는 양민한테 덤터기를 씌워 죽일 것까지야······, 쯧쯧쯧!”

손사래를 치며 낙담하던 우체부가 행랑 속을 뒤적거린다.

“어디 보자! 여기 편지가 있네요!”

미라가 우체부로부터 편지를 받아들곤 넋두리를 한다.

“그러게 세상이 조용할 날이 없네요. 언제나 평온한 세상이 오려는 지 아득하네요. 그나저나 누구한테 온 거지?”

“직인을 보아하니, 원주에서 온 거네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체부가 자전거에 올라 대문을 벗어난다. 미라가 편지의 안팎을 둘러본 뒤 안채로 향한다.


미라가 경덕과 인호 앞에 편지를 내민다. 인호가 봉투를 뜯어본다.

“수잔 양이 남긴 편지인데요.”

그가 편지를 읽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인호 오라버니!

상황이 급격하게 돌아가게 되어서 미리 편지를 써둡니다.

인서 씨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간호할 테니까요. 그리고 머지않아 우뚝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날 테니, 놀라지 마시고요. 도착하면 편지할게요. 다시 만날 때까지 모두 건강하시길 바라며······, 수잔 올림’


“몸도 성치 않은데······,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먹여 보냈어야 하는 건데······”

미라가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친다. 경덕이 슬그머니 그녀의 어깨를 감싼다.

“야무진 수잔 양이 있는데 뭘 걱정이야. 곧 있으면 잘 도착했다고 전보가 올 테니, 기다려봅시다!”




178.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민중의 항일의식은 최고조로 치닫는다. 이 가운데 ‘소작쟁의(小作爭議)’로 일컬어지는 농민들의 저항이 특히 두드러진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와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가 획책한 토지 수탈로 농민의 8할이 소작농으로 전락한다. 토지 수탈 이전에는 비록 자기 소유의 땅은 없을지언정 알량한 경작권만은 농민의 몫이었다. 하지만 농민의 삶의 근간이 되던 지주와 경작자 사이의 계약 질서가 한순간에 무너지면서 소작농은 노예의 신분으로 강등된다.

소작쟁의는 대량의 미곡을 확보하여 일본으로 반출하려는 수탈의 과정에서 발생한 최소한의 저항이다. 지진과 태풍으로 농산물의 수급이 불안정한 일본의 처지로 볼 때, 한반도의 너른 곡창지대는 포기할 수 없는 화수분인 셈이다. 따라서 안정된 수급을 위해서는 시장가격을 왜곡시켜 다량의 미곡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다. 한쪽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는 다른 쪽이 홀쭉해져야만 하는 이른바 ‘풍선효과’가 등장하면서 소작인이 불가피하게 희생양으로 떠오른다.

기존의 소작료는 대략 수확량의 3할을 지급하는 것이 상례였다. 미곡 수탈이 실행되면서 소작료는 수확량의 5할로 급등하고, 게다가 각종 세금과 비료 대금까지 농민에게 갹출케 하여 소작료는 거의 8할로 껑충 치솟는다. 소작인의 울분이 마침내 1924년 곡창지대로 유명한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에서 폭발한다.

1년여에 걸친 소작쟁의를 통해 4명이 옥고를 치르는 희생이 따르기도 했지만, 소작료를 4할대로 떨어뜨리는 소기의 목적도 달성한다. 암태도의 소작쟁의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농민운동을 촉발하는 기폭제의 역할을 한다.

‘3·1만세운동’ 이후 성난 민심에 놀란 총독부가 제2의 독립운동의 부활을 막기 위해 미봉책으로 소작료를 낮추는 유화정책을 펴긴 했지만, 그것은 분노로 들끓는 양민을 잠재우려는 기만전술에 불과하다. 치안을 관장하는 경무국(警務局)은 전국의 경찰서와 주재소에 내란과 소요를 선동하는 ‘불령선인(不逞鮮人)’을 사전에 색출하라는 지령을 비밀리에 하달한다.




179.


원인불명의 화재로 유력한 용의자가 홀연히 사라진 후 타이요우는 크게 격분한다. 총독부에서 수배한 범죄자를 검거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영광뿐만 아니라 출세의 보증수표와 다르지 않다.

태양이란 타이요우 이전의 이름 그대로 출세(出世)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눈앞에서 놓친 그는 스스로 태양이 되기로 작정한다.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한 그는 밀정(密偵)의 수를 대폭 늘려 비선조직의 정보망을 구축한다. 아울러 경무부가 하달한 소작쟁의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우체국을 통과하는 모든 편지와 전보를 검열하기 시작한다.


1924년의 봄은 편지 한 통과 함께 찾아온다. 우체부가 배달한 편지를 받아든 부부는 한동안 봉투의 안팎을 살핀다. 교회에서, 그것도 원주에서 온 편지는 딱히 주의를 끌지 못한 채 개봉된다.

소식지를 펼치는 순간 사진 한 장이 바닥에 떨어진다. 푸른 바다와 백사장을 배경으로 야자수 아래에서 다정한 남녀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하와이안 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동양 남성과 화사한 원피스에 빨간 립스틱을 바른 서양 여성은 공히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미라가 반색한다.


“여보! 이 사람들 인서와 수잔 맞죠?”

경덕은 사진을 들고 유심히 본다.

“맞아!”

“그동안 왜 소식이 없었는지 짐작이 가는 데가 있어요.”

미라의 말에 경덕이 수긍한다.

“그래서 이렇게 보낸 거군!”

부부는 울먹이다가는 이내 웃음을 짓곤 손을 맞잡는다.

“봐요! 목발을 짚고 있지 않잖아요? 대견하기도 하지!”

미라는 마치 실물을 쓰다듬기라도 하는 양 사진을 어루만진다.

“구릿빛으로 그을려 부모도 깜빡 속을 뻔했어!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야. 한시름 덜었네!”


편지와 전보에 대한 검열을 예상한 인서는 자칫 가족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두 단계를 거치는 일종의 신분세탁을 통하여 발신자를 은폐한다. 먼저 발신인의 정보가 드러나지 않도록 간략한 안부만 적은 편지가 원주교회의 선교사 노블에게 배달된다.

노블은 교회의 일정을 알리는 소식지 안에 태평양 너머에서 보내진 편지를 담아 미천골로 보낸다. 검열을 담당하는 우체국 실무자는 흔한 교회의 소식지로 알고 대수롭지 않게 배달통에 넣음으로써 편지가 전달될 수 있는 루트가 열린다.




180.


1924년에 개교한 춘천고보는 입학 때부터 신입생들이 둘로 나뉘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권력층의 자제로 구성된 일본 학생들은 기선 제압을 하기 위해 부유층 출신의 학생과 결탁하여 일반 학생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군림한다. 학생회도 둘로 갈린다. 용산고보를 휴학하고 도쿄에서 방황하던 나카다가 주류 학생회의 회장으로 선출되고, 배재학당을 휴학한 인호가 한국 학생들로 구성된 자치회의 회장에 선임된다.

여느 학생들보다 적게는 한두 살에서 많게는 네다섯 살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 주축이 된 학생회와 자치회는 교내 활동과 학내 활동을 두고 번번이 마찰을 빚기 일쑤다. 또래보다 만학의 길을 걷는 나카다와 인호는 각각 유도부와 태권도부를 통솔하면서도 두 집단 간의 충돌을 막는 데 일조한다.

하지만 춘천경찰서장 히로시의 아들 미나토가 대표로 있는 선도부가 한일 학생간의 충돌의 뇌관으로 부상한다. 미나토는 선도부라는 완장을 앞세워 사사건건 학생들의 꼬투리 잡아 망신을 주는가 하면 공공연히 폭력까지 행사한다. 선도부의 행동이 과격해지면서 한일 학생 간의 갈등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집안 대대로 덕망을 쌓은 덕에 춘천에 연고를 둔 사람이라면 한 씨 가문의 존재를 모를 리 없다. 게다가 조상들도 우국지사로 존경을 받았으며 계몽운동에 앞장선 까닭에 인호는 선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력은 식민사상을 고취하려는 학교 입장에서는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다

인호는 기울대로 기운 집안을 일으켜야 하는 장남의 역할에 충실하기로 마음을 다잡을 뿐 주위의 견제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초반에는 일부러 사소한 시비를 걸어오는 일본 학생들의 덫에 걸려 패싸움에 휘말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번번이 한국 학생들만 학칙을 위반했다는 사유로 정학을 받게 되자 그는 자치회의 회장직을 사퇴한다. 모든 불상사가 자기를 모함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아챈 그는 학업에만 전념한다.




181.


운동복을 입은 학생들이 청군, 백군으로 나뉘어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 백군의 인호가 역전골을 넣는 수간 수업을 마치는 종일 울린다. 인호가 백군 선수들과 어울려 교실로 몰려간다.

먼저 교실에 들어선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한발 비켜선다. 인호는 뒤집힌 책상을 발견하곤 멈칫한다. 그러나 그는 이내 침착하게 바닥에 널브러진 책들을 주어 가방에 넣는다. 책상을 정리하고 자리에 앉는데, 분필로 쓴 큼지막한 글씨가 눈에 띈다.


‘수업이 끝나면 학교 뒷산으로 와! 선도부장 미나토 오사무!’


선도부원들이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뒷산의 둔덕에서 담배를 돌려 피며 깔깔거리고 있다. 인호가 산을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던 미나토가 한 발 앞으로 나선다.


“겁쟁이인 줄 알았는데······, 아직 용기는 살아있나 보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부원들이 웃음을 터트린다.

“부장, 살살해! 늙어서 학교 다니기도 힘들 텐데, 봐줘야지! 하하하!”

부부장이 너스레를 떠는 가운데 인호는 미나토 앞으로 선뜻 나선다.

“용건이 뭐야?”

“야, 이거, 무서운걸! 미친개한테라도 물렸나? 겁대가리를 상실하셨군!”

미나토가 주위를 일별하며 도발한다.

“사람을 불러놓곤 말을 빙빙 돌려서야 쓰나? 시간 없어! 뭐야, 용건이?”

몸을 뒤틀며 근육을 이완시킨 미나토가 결투의 변을 늘어놓는다.

“자치회장직을 사퇴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아직도 실질적인 회장은 너라고 하더군! 산중에 호랑이 두 마리가 등을 맞대곤 살 순 없는 법! 내가 이기면 넌 자치회에서 영원히 손을 떼고, 네가 이기면 내가 선도부를 떠난다!”

미나토가 교복을 벗어 던진다. 가슴팍에 일장기가 선명한 도복이 드러난다.

“부장, 제발 한 손만 써! 전 일본 가라테 학생 챔피언이 두 손을 쓰면 체면이 안 서잖아!”

부원들의 일방적인 응원을 받은 미나토가 허공에 당수를 휘젓는다. 그러곤 가라테의 기본동작으로 마무리한다.

“내가 이기면 앞으로 한국 학생들을 괴롭히지 마라!”

“역시 노인네들은 말이 많단 말이야! 이얏!”

별안간 기합을 지르며 미나토가 달려든다. 슬쩍 한 발 뒤로 물러선 인호가 한쪽 다리를 들고 흔들며 택견의 방어 자세를 취한다.

“어쭈! 낙법 좀 쓰는데?”

미나토가 잽싸게 손을 뻗으며 찌르기를 시도한다. 이번에도 인호는 상체를 뒤로 젖히며 손쉽게 공격을 피한다. 당황한 미나토의 자세가 꼬이기 시작한다. 택견을 수련한 인호는 낭창낭창 자리를 옮겨가며 동선이 큰 가라테의 허점을 노려 공격한다. 인호가 발차기로 미나토의 안면을 연달아 강타한다. 치욕을 당한 미나토가 부원들을 일별하며 구원을 요청한다.

“애들아, 안 되겠다! 저런 뱀 같은 놈은 다구리를 놓아야 해!”

미나토가 악을 쓰며 부원들을 부추긴다. 부원들이 인호에게 엉겨 붙어 몰매를 놓기 시작한다. 일순 십여 명에 둘러싸인 인호는 방어를 해보지만 역부족이다. 그는 간신히 바위 아래로 몸을 굴려 피한다. 그리곤 미나토가 벗어놓는 교복에서 선도부장의 완장을 거머쥔다.

“앞으로 한국 학생들을 괴롭히지 마라! 이 완장은 내가 당분간 보관한다!”

인호는 사뿐히 뛰어올라 쓰러진 고목의 등걸을 박차고 홀연히 사라진다. 어안이 벙벙한 부원들은 주먹을 쥐고 분통을 터트린다.

“우리가 너무 얕잡아 본 거야! 저 새끼 집안이 춘천에서 명문가라잖아! 신중했어야 했어.”

부부장이 낙담하며 고개를 흔든다. 다른 부원이 거든다.

“그나저나 내일 아침에 저놈이 완장을 차고 등교하면 어쩌지? 훈육 교사한테 우리 모두 단체 기합을 받을 게 뻔하잖아. 이런 개망신을 당하다니!”

미나토가 버럭 화를 낸다.

“다구리를 당했으니 함부로 까불지는 못할 거야! 걱정하지 마!”




182.


선도부가 교문 앞에 두 줄로 선 채로 등교하는 학생들의 복장을 검사한다. 간혹 교사들이 등교할 때마다 선도부는 일제히 부동자세를 취하며 거수경례를 한다. 미나토가 한복에 제모만 걸친 앳된 학생을 닦달한다.


“내 말이 우습나?”

“아닙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한복을 입고 다니나? 조센징이 그렇게 자랑스럽나?”

한국 학생은 질겁하여 어눌하게 대답한다.

“다음부터······, 교복을······”

“조센징이 그렇게 자랑스럽나?”

선도부가 재차 다그치는 순간 한복차림의 인호가 끼어든다.

“아침인데, 어지간히 좀 해라!”

선도부는 미나토를 중심으로 빙 둘러선다.

“감히, 선도부에 도전을 하다니······, 무모한 놈!”

미나토가 나직이 말한다. 입술을 실룩거리던 그가 주섬주섬 뭔가를 꺼낸다.

“함부로 건들지 않기로 한 걸 잊었나?”

그가 완장을 들고 미나토의 가슴을 툭툭 건드린다. 바짝 약이 오른 미나토가 아랫입술을 꽉 다문 뒤 속삭인다.

“승부도 내지 않고 뒤꽁무니가 빠지게 도망간 놈이 누군데?”

선도부원들이 저만치 걸어오는 쥰페이를 발견하곤 미나토에게 곁눈질을 한다.

“부장! 훈육교관이야!”

“앞으로 볼 일이 있으면 비겁하게 떼로 몰려오지 말고 혼자 찾아와! 언제든지 대결해줄게!”

인호가 넌지시 나무라자 미나토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미나토가 완장을 가로채려는 순간 쥰페이가 다가온다.

“아침부터 분위기가 삭막하잖아! 무슨 일인가?”

인호와 미나토 사이에서 완장을 쥔 두 주먹이 옥신각신하다가 그만 완장이 바닥에 떨어진다.

“완장이 바닥에 떨어졌네. 누구나 선망하는 선도부장인데, 완장 간수를 잘 해야지? 자, 받아!”

인호가 미소를 머금은 채 완장을 건넨다. 새하얗게 질린 그가 황망한 표정을 짓는다.

“보기 좋군! 서로 부족한 게 있으면 돕고 지내야지!”

쥰페이가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인호는 슬그머니 고개를 숙인 뒤 서둘러 교실로 향한다.




183.


군내 사찰을 돌던 타이요우가 차 옆에서 삐뚜름히 선 채 어딘가를 주시한다. 그는 순사 두 명이 보고하는데도 건성으로 들으며 턱을 모로 튼다. 고개는 연신 주억거리고 있지만, 동공은 여전히 한곳을 좇는다.

“알았네! 불령선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을 수시로 탐문해서 보고하도록!”

“하이!”


그는 차의 지붕을 손으로 톡톡 치면서 휘파람을 분다. 얼굴을 빠꼼 내민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차를 몰아 그의 뒤를 따른다. 껄렁거리며 시장으로 접어든 그는 일부러 일정 거리를 두기 위해 딴청을 피운다.

좌판에 벌인 물건 중에서 사과 하나를 집어 든 그는 한 입 뭉텅 베어 물고 씹기 시작한다. 깨금발로 고개를 빼들고 전방을 살피던 그가 갑자기 주머니에서 지전 한 장을 꺼내 휙 내던지곤 잰걸음을 놓는다.


흰 적삼에 검정 통치마를 받쳐 입은 미라가 어물전에서 상인과 흥정을 벌이고 있다.

“거래 한 두 번 하우!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대?”

눙치는 모습이 영락없이 여염집 아낙이다.

“소매로 파는 것을 꼭 저렇게 도매가로 달라고 생떼를 쓴다니까? 많이 사지도 않으면서······”

입을 비죽이 내민 상인이 투덜거리면서도 돈을 건네받는다.

“여기 있수다! 바깥양반이랑 오순도순 구워 자시고 짭조름한 밤 보내슈!”

“호호홋! 남의 부부 속사정까지 간섭한다니까!”

상인이 굵은 소금을 뿌린 뒤 미라에게 자반고등어를 내민다.

“많이 파세요! 다음 장에 또 들를게요.”

“살펴 가시우!”


자반고등어를 손에 든 미라가 시장통을 막 벗어날 즈음 타이요우가 길을 막아선다.

“태평양 건너로 도주한 막내아들은 잘 지낸답디까?”

치뜬 눈으로 타이요우를 노려보던 그녀가 도리질을 친다.

“고등계 형사로 승진했다고 들었는데, 그리도 할 일이 없소? 아녀자 뒤나 졸졸 밟고!”

그는 양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이죽거린다.

“큰아들도 춘천고보에서 꽤나 싸움질을 하고 다닌다는데······, 그토록 명망 높은 집안에서 가정교육은 영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군요.”

“형제가 태평양에서 수영을 하든, 학교에서 쌈박질을 하든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오!”

“그렇지! 고등계 형사가 한낱 학생들 뒤나 캐고 다녀야 쓰나? 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 테니 잘 들으시오. 독립운동 한답시고 나서는 날에는 나, 타이요우가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말이오!”

“그럼, 나도 한 가지 경고하리다! 형제의 장래를 막는 자가 있다면 나도 두고만 보고 있지 않겠소!”

미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꼿꼿한 자세로 그를 지나쳐 걸어간다. 실실거리던 그가 뒤를 따르던 차에 오른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게 여전히 매력 있단 말이야!”

“예? 저 말입니까?”

기사가 제 말인 듯 섣불리 나섰다가 빈축을 산다.

“이런 물색없긴! 넌 그 놈의 주둥이가 문제야! 닥치고 어서 출발해!”

타이요구가 기사를 흘겨보며 퉁바리를 준다.

“예!”


속도를 높인 차가 웅덩이를 지나치며 흙탕물을 튀긴다. 흙탕물은 고스란히 걸어가던 미라의 치마에 얼룩을 남긴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휘저으며 한숨을 내쉰다.




184.


학생 십여 명이 도서관에서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있다. 여느 과외 활동부서와는 달리 한 명이 문에 선 채 보초를 서고 있다. 복도를 두리번거리던 학생이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낸다.

나카다가 목을 가다듬고 책을 펼친다. 책갈피 안에 ‘다이묘 데모크라시’라고 적힌 제본이 끼어있다. 등사기로 인쇄하여 엮어 만든 제본은 잉크가 번져 한눈에 보기에도 조악하기 그지없다.


“예습은 다 해왔지?”

나카다가 주위를 일변한다. 뭇시선이 동조하는 듯 눈꺼풀을 끔벅인다.

“공지했다시피, 오늘은 ‘다이묘 데모크라시’와 ‘실용주의’에 대하여 연관성을 토론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자, 오늘은 누구 차례지?”

맞은편에 앉아 있던 기타로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제본을 펼쳐 든다.

“일본은 지금 제국주의로 치닫고 있어. 일부에서는 민의를 차단하려는 군부를 비판하고, 심지어 조선의 식민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어. 하지만 난 그런 장밋빛 이상론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해! 나도 일본 제국주의의 신민인 이상 무조건 정부의 시책에 반대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잖아! 따라서 현 정책을 개량할 새로운 방법론을 찾기 위한 차원에서 실용주의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봐!”

비스듬히 턱을 괴고 앉아 연필을 굴리던 하루토가 말을 받는다.

“기타로 의견에 찬성해! 도쿄에 있을 때 ‘다이묘 데모크라시’ 운동에 참여했다가 헌병에 끌려가는 형을 본 적이 있었어.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는 양분법으로 편을 갈라 싸운 뒤 어느 한쪽이 승리를 했다고 쳐! 그렇다면 승자들이 샴페인을 터트릴 때 누군가는 어둠 속에서 칼을 갈지 않을까? 여기 모인 우리처럼 말이야! 그래서 나는 기존의 이론이나 정책을 뒤엎는 혁명적인 방법이 아닌, 대화와 타협을 통해 발전을 꾀하는 점진적인 방법이 옳다고 봐! 그런 정신이 진정으로 실용주의가 탄생한 배경이 아닐까?”

빙그르르 돌던 연필이 손가락 사이를 벗어나 책상 위를 구른다. 일제히 뭇시선이 쏟아지자 쑥스러운 듯 하루토가 샐쭉 웃는다.

“미안! 토론의 실용성을 방해해서!”

하루토의 너스레에 함박웃음이 터진다.

“나카다 형! 난 아직 어려서 밤새도록 읽었는데도 모르겠어. 쉽게 설명 좀 해줘! 그래야 집에 가서 두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아.”

천재란 소리를 들으며 조기 입학한 뮤지는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인다.

“존 듀이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실용주의적인 실험을 통해서 성취할 수 있다고 봤어. 미국은 알다시피 유럽의 여러 민족에서 이주한 백인과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잡혀 온 흑인들로 구성된 연합 국가잖아? 따라서 국가의 범위를 확장하고 구성원의 뜻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소외된 채 살아온 흑인이나 여성을 사회의 공동체 속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거야. 소외계층에게도 ‘우리의 나라’라는 소속감을 높여서 공동의 목표를 실현할 기회를 주자는 거지. 그것이 곧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의 가장 근간인 것이고.”

뮤지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궁금증을 드러낸다.

“우리 일본은 하나의 민족으로 구성됐잖아? 그럼 누굴 공동체 속에 포함시켜야 하지?”

짐작한 듯 감히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는다. 천천히 일별한 나카다가 마저 운을 뗀다.

“작금의 조선과 만주가 좋은 예가 될 듯해. 조선과 만주는 식민통치에 반발하며 독립을 주장하고 있잖아! 언제까지 그들을 총칼로 지배할 수 있을 것 같니? 난 회의적이야. 미국에서 소외받던 흑인을 사회에 편입해서 구성원이 된 것처럼 우리도 조선과 만주의 시민을 일본제국의 신민과 동등하게 대접하며 포용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것만이 건전한 일본의 발전을 꾀하는 방법이고, 그렇게 해야 진정으로 ‘다이묘 데모크라시’의 정신이 구현되는 길이야!”


흥분한 탓일까. 나카다가 뿜어낸 날숨이 사위에 훅 끼친다. 일면 수긍을 하면서도 대놓고 속내를 드러낼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이 얼마간 지속된다. 의당 거센 반론이 제기될 법도 하지만 크나큰 암석에 가로막힌 듯 먹먹한 침묵이 흐른다.

보초를 선 학생도 아연하여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는 하마터면 복도 끝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을 놓칠 뻔했다. 뚜벅뚜벅 다가오는 소리를 감지한 그가 창틈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는 이내 소스라치게 놀란다.

“떴다, 떴어! 훈육 사관이 나타났어!”

학생들은 재빨리 자리를 정돈한다. 제본은 가방 속이나 교복 속으로 숨겨진다. 이윽고 훈육 사관이 여닫이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온다.

“춘천고보의 우등생이 모였다는 토론회라, 뭔가 다르긴 다르군!”

쥰페이는 흐뭇하게 웃으며 학생들의 어깨를 두드린다.

“제군들이 있어서 대일본제국의 미래는 밝다!”

나카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한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제군들을 가르치는 내가 더 영광이지! 하지만······”

쥰페이가 뒤돌아선 뒤 서성거린다. 학생들은 마치 벽화에 그려진 화석처럼 표정이 굳어진다.

“대일본제국의 동량이 되려면 지식을 탐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체력이다!”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을 삼킨 나카다의 관자놀이가 불거진다.

“명심하겠습니다!”

“자,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귀가하도록!”

“하이!”


독서회의 일행이 일제히 가방을 챙겨 도서관을 나설 무렵 막내 뮤지가 그만 가방을 떨어뜨린다. 쥰페이가 다가와 가방을 들어 건넨다. 뮤지가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데, 교복 속에 꾸겨 넣었던 제본이 바닥에 힘없이 툭 떨어진다.


“등사기로 만든 책을 보다니! 쯧쯧쯧! 내가 교장 선생님께 부탁해서 책을 구입하도록 할 테니, 목록을 제출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쥰페이의 동공이 확장된다.

“‘다이묘 데모크라시’?”

울먹이는 뮤지를 뒤로하고 나카다가 나선다.

“뮤지는 아무 잘못 없습니다. 도쿄에 머물 때 형이 보던 걸 들고 와서 잠깐 빌려준 겁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학생들은 일별하는 쥰페이의 눈길을 애써 외면한다.

“‘다이묘 데모크라시’라면 정부가 금서로 지정한 불온서적이잖아?”

침묵이 이어진다. 뮤지는 자신을 질책하며 숨죽여 운다. 종유석에 매달린 물방울처럼 굵은 눈물이 마룻바닥에 똑똑 듣는다.

“역시 춘천고보의 인재들이 확실하군! 나도 육사 시절에 탐독하다가 발각되어서 일주일 동안 완전 군장한 채로 운동장을 돌았던 적이 있었지! 하하핫! 여기에서 동지들을 만나다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나?”

쥰페이가 뮤지에게 제본을 건네주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불온서적은 반입이나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학칙 위반으로 처벌 대상이다. 정 읽고 싶다면 집에서 읽도록! 알겠나?”

“하이!”


회원들은 양발의 뒤꿈치를 붙인 채 쥰페이를 향해 거수경례를 한다. 학생들이 종종걸음을 치며 복도를 벗어난다. 미소를 짓고 바라보던 쥰페이가 문을 닫고 복도를 가로지른다.




185.


호롱불에 비친 자반고등어가 유난히 번들거린다. 경덕은 잠자코 밥을 먹는 아들의 밥 위에 살 한 점을 올려준다.

“학교생활은 할 만하니?”

“몇 년 만에 공부하려니까 머리에 쥐가 날 판이에요.”

미라가 상에 숭늉을 올려놓는다.

“동생뻘 되는 아이들이랑 겨루려니 힘이 부치겠지. 인서가 있었으면 같이 다니고 좋으련만······”

괜한 소리를 꺼냈다는 뒤늦은 후회가 바투 옅은 날숨이 되어 새어 나온다.

“어머니도 참!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하잖아요. 인서는 똘똘해서 사막 한가운데서도 살아올 녀석이에요. 게다가 ‘여친’하고 같이 있잖아요. 혹시 알아요? ‘여친’을 쏙 빼닮은 딸을 낳아 기르고 있을지도 모를걸요. 그놈 참! 내 동생이지만 용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로망스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하와이에 살다니······”

인호는 숭늉을 마시며 입맛을 다신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경덕이 입술을 오물거린다. 궁금증이 동한 듯하다.

“나이가 스물을 넘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나저나 ‘여친’은 뭐냐?”

“아,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 줄임말이 유행인데, ‘여자 친구’를 줄여서 ‘여친’이라고 부르더라고요. 뭐, 저도 입에 붙지는 않지만 급우들하고 어울리다보니 저절로······”

곁눈질을 하던 미라가 인호에게 핀잔을 준다.

“좋은 말을 일부러 왜 줄인다니? 그럼 본래의 의미가 반감되잖아! 참 요즘 애들은 별나다니까.”

밥상을 뒤로 물린 미라가 슬쩍 경덕과 인호의 눈치를 살핀다.

“낮에 타이요우와 마주쳤는데······, 그렇지 않아도 인서에 관해 묻더군요. 인서에 대해서도 줄줄이 꾀고 있는 모양이고, 인호의 일거수일투족도 죄다 알고 있는 눈치였어요.”

심기를 거슬린 듯 경덕은 허투루 헛기침을 한다.

“그 작자야, 우리 집안일이라면 열 일 제쳐놓고 나서잖아. 넌 각별히 거동에 조심해야 한다. 모름지기 남자란 큰일을 도모하더라도 뒤탈이 날 일을 남겨둬서는 아니 되는 법이야!”

“심려 끼쳐 드리지 않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알아챈 인호가 어금니를 앙다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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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94화 일본패망(日本敗亡) +1 19.05.09 50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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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82화 광복군(光復軍) +1 19.05.08 48 2 13쪽
81 81화 육군정보학교 +2 19.05.08 49 2 11쪽
80 80화 홍콩행 +1 19.05.07 51 3 13쪽
79 79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3 19.05.07 49 2 12쪽
78 78화 김원봉과 김구 +1 19.05.07 47 2 16쪽
77 77화 까레이스키 +3 19.05.07 45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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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75화 박정희와 최태민 +1 19.05.07 52 2 9쪽
74 74화 중일전쟁(中日戰爭) +1 19.05.07 46 2 13쪽
73 73화 강제이주 +3 19.05.06 46 1 12쪽
72 72화 마루타 +1 19.05.06 46 1 12쪽
71 71화 막후 실력자 +1 19.05.06 50 2 13쪽
70 70화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등장 +1 19.05.06 49 1 15쪽
69 69화 천황결사옹위청년단 +1 19.05.05 53 1 15쪽
68 68화 후흑학(厚黑學) +1 19.05.05 51 1 13쪽
67 67화 경몽장(耕夢莊) +1 19.05.05 50 1 12쪽
66 66화 학교(學校) +1 19.05.05 51 1 8쪽
65 65화 국제연맹(國際聯盟) +1 19.05.05 52 1 19쪽
64 64화 나타샤 +1 19.05.05 51 1 11쪽
63 63화 보고서 +1 19.05.05 52 1 11쪽
62 62화 시인과 영웅 +2 19.05.04 52 2 15쪽
61 61화 탄생의 비밀 +2 19.05.04 53 2 18쪽
60 60화 국경수비대 +1 19.05.03 53 2 13쪽
59 59화 제네바협약 +4 19.05.03 57 2 18쪽
58 58화 명백한 운명 +1 19.05.03 54 1 16쪽
57 57화 미두취인소(米豆取人所) +1 19.05.03 54 1 12쪽
56 56화 생포(生捕) +1 19.05.02 54 2 13쪽
55 55화 참패(慘敗) +1 19.05.02 56 2 14쪽
54 54화 향수병(鄕愁病) +1 19.05.02 54 2 18쪽
53 53화 음악회 +1 19.05.02 54 2 18쪽
52 52화 들개 진구 +1 19.05.02 56 2 24쪽
51 51화 가락지 +3 19.05.02 57 2 26쪽
50 50화 덫 +1 19.05.01 57 1 28쪽
49 49화 추격전(追擊戰) +1 19.04.30 57 2 35쪽
48 48화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1 19.04.30 63 2 39쪽
47 47화 광휘와 빅터 +3 19.04.29 60 2 33쪽
46 46화 특별수사본부(特別搜査本部) +4 19.04.29 57 2 41쪽
45 45화 만저우리(滿洲里) +4 19.04.28 59 3 35쪽
44 44화 폭풍전야(暴風前夜) +1 19.04.28 57 3 37쪽
43 43화 Boys, be ambitious! +1 19.04.27 58 2 39쪽
42 42화 만주국(滿洲國) +5 19.04.27 64 2 38쪽
41 41화 만몽영유계획(滿蒙領有計劃) +1 19.04.26 62 3 25쪽
40 40화 재회(再會) +1 19.04.26 60 3 30쪽
39 39화 빅터 한 +1 19.04.25 62 3 49쪽
38 38화 박진만 +2 19.04.25 64 3 45쪽
37 37화 정보국 5과 +3 19.04.24 71 3 51쪽
36 36화 마적(馬賊) 왕리 +2 19.04.24 68 3 49쪽
35 35화 삼두정치(三頭政治) +2 19.04.23 68 3 42쪽
34 34화 주찬 +1 19.04.23 67 3 51쪽
33 33화 만주야사(滿洲野史) +2 19.04.22 69 3 50쪽
32 32화 서광휘 +2 19.04.22 69 3 47쪽
31 31화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 +2 19.04.21 77 4 47쪽
30 30화 미쓰야협정(三矢協定) +4 19.04.21 75 4 46쪽
29 29화 출산(出産) +3 19.04.20 81 4 43쪽
28 28화 밀항(密航) +2 19.04.20 76 4 45쪽
27 27화 불령선인(不逞鮮人) +1 19.04.19 75 4 43쪽
26 26화 님의 침묵 +1 19.04.19 80 4 48쪽
» 25화 이민(移民) +2 19.04.18 94 4 39쪽
24 24화 회자정리(會者定離) +2 19.04.18 80 5 44쪽
23 23화 여걸(女傑) 수잔 +5 19.04.17 84 4 46쪽
22 22화 3·1 만세운동 +5 19.04.17 82 4 44쪽
21 21화 천적(天敵) +1 19.04.16 81 5 49쪽
20 20화 아카키 타이요우(赤木太陽) +4 19.04.16 82 5 52쪽
19 19화 망국(亡國) +4 19.04.15 92 3 49쪽
18 18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3 19.04.15 92 3 46쪽
17 17화 한성진격작전(漢城進擊作戰) +4 19.04.14 95 4 49쪽
16 16화 의병전쟁(義兵戰爭) +4 19.04.14 95 4 43쪽
15 15화 춘투(春鬪) +5 19.04.13 97 3 47쪽
14 14화 암살미수(暗殺未遂) +4 19.04.13 106 3 37쪽
13 13화 결혼(結婚) +3 19.04.12 158 6 42쪽
12 12화 돈버거 +9 19.04.12 142 6 44쪽
11 11화 대한제국(大韓帝國) +2 19.04.11 154 7 45쪽
10 10화 김출세(金出世) +7 19.04.11 167 8 42쪽
9 9화 낙향(落鄕) +4 19.04.10 174 7 42쪽
8 8화 혁파안(革罷案) +4 19.04.10 178 7 41쪽
7 7화 증기자동차 +2 19.04.09 214 10 22쪽
6 6화 2차 사행(使行) +2 19.04.09 209 11 24쪽
5 5화 견문록(見聞錄) +5 19.04.08 239 11 19쪽
4 4화 북경(北京) +1 19.04.08 302 11 19쪽
3 3화 만남 +1 19.04.08 389 12 15쪽
2 2화 1차 사행(使行) +2 19.04.08 560 12 14쪽
1 1화 파락호(破落戶) 이하응 +17 19.04.08 1,092 1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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