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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공모전참가작 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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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최장르
작품등록일 :
2019.04.08 16:31
최근연재일 :
2019.07.12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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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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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쪽

26화 님의 침묵

님의 침묵




DUMMY

제14장 님의 침묵


186.


종합병원에서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친 인서는 매일 와이키키 해변을 걷고 수영하며 재활에 힘쓴다. 목발에 의지하던 몸체는 제법 호전된 듯하다. 목발은 마치 불요불급한 맹장처럼 몸체와 엇박자를 내며 거추장스럽게 보일 정도다. 하지만 수술 부위의 근육이 부지불식간에 경련을 일으키는 통에 목발은 휴대품처럼 끼고 다닐 수밖에 없다.

쨍쨍한 햇볕에 노출된 해변은 손바닥만 한 그늘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나마 길차게 뻗은 야자수 밑동에 앉아야 겨우 대양으로부터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콧잔등에 맺힌 땀을 식힐 수 있다. 인호는 파도에 휩쓸려온 고목의 등걸에 걸터앉는다. 땀에 흠뻑 젖은 셔츠를 벗자 구릿빛으로 그을린 근육질의 몸매가 반들반들하다. 휴양지의 보고라 불리는 하와이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이다.

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는 그의 등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등나무로 엮은 피크닉 가방을 든 수잔이 양산을 받쳐 들고 다가온다. 펑퍼짐한 원피스로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볼록 나온 배와 엉거주춤한 걸음걸이로 짐작컨대 임신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듯하다.


“힘들게 뭐 하러 나왔어?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일어서려던 참인데······”

인서는 공연히 나무라면서도 벌떡 일어나 피크닉 가방을 건네받는다. 그러곤 한술 더 떠서 가방을 열고 비치타월을 꺼내 모래 위에 펼친다.

“어서 앉아!”

수잔은 인서의 부축을 받으며 비치타월 위에 앉는다. 한 손을 지렛대 삼아 등을 기댄 자세가 불편할 법도 하지만 구릿빛 몸매를 완상하는 그녀의 눈빛은 사랑으로 충만하다.

뭉덩뭉덩 샌드위치를 단숨에 먹어치운 그가 아이스티를 마시며 갈증을 해소한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허벅지를 베고 눕는다. 그러곤 그의 손을 잡아채 자기 배 위에 올려놓는다.

“아들인가 봐!”

“진짜네! 이 녀석 세상 구경 빨리 시켜달라고 발길질하는 것 좀 봐!”

신기한 듯 인서는 한동안 숨죽인 채 볼록한 배에 귀를 댄다.

“어라, 이것 봐라! 배불리 먹었는지 트림까지 다 하네? 이거 봐, 이거! 지금 막 하품한 거 맞지?”

수잔은 기가 찬 듯 양손을 뻗어 손사래를 친다.

“아이를 갖게 되면 부모들은 죄다 허풍쟁이가 된다더니만······, 그럼 내일쯤이면 뱃속에서 아빠, 엄마를 부르겠네! 밥 달라고! 쯧쯧쯧! 하여간 남자들이란······”

허리를 곧추세운 그가 정색하며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는다.

“틀림없이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어. ‘엄마, 아빠! 배불러서 졸음이 쏟아져요. 한 시간만 잘게요’라고······”

“으이구!”


그녀는 팔꿈치로 인서를 툭 치고는 도리질을 친다. 수평선을 가로지르는 배는 연거푸 밀려오는 물마루에 서서히 모습을 감춘다. 뱃고동 소리만이 모래톱에 부딪는 파도의 잔해 속에 잠시 머문 뒤 이내 사라진다.




187.


하늘을 떠받든 한 축이 폭삭 주저앉기라도 한 것일까. 열흘이 넘도록 장맛비가 그치지 않는다. 이따금 인류의 희망을 실은 방주가 안착할 양지를 비추기라도 하듯이 빛내림이 먹장구름을 뚫고 쏟아져 내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창졸간에 드러난 햇볕을 두고 사람들은 차라리 변죽이나 올리지 말 것을 타박하며 하늘을 원망한다.

태백산맥의 서쪽 줄기를 따라 북한강과 소양강 그리고 공지천이 합류하는 데에 터 잡은 춘천은 한마디로 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분지(盆地)의 지형이다. 태백산맥을 기점으로 장마전선은 남북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상습적으로 집중호우를 퍼붓는다.

도로는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다리는 유실되었으며 물에 젖은 집채는 힘없이 폭삭 내려앉기 일쑤다. 그나마 군내에는 구원의 손길이 잇따라서 다행이다. 신의 노여움이라도 산 듯 산사태가 휩쓸고 간 산간지역은 손쓸 재간이 없다. 할퀴고 파헤쳐진 곳은 인간의 접근을 허여하지 않는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동원령이 내려진다. 민관이 합세하여 흙더미를 씻어내자 춘천은 차츰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자치회를 소집한 인호는 무방비생태로 방치된 산간지역을 찾아 봉사 활동에 나선다.

장마가 끝난 뒤 무더위는 또 다른 재앙의 연속이다. 폐허 속에서 고온으로 숙성된 흙더미는 온갖 생명체를 창궐케 한다. 사방에 슬어놓은 파리 떼가 날아오르면서 봉사자들을 괴롭힌다.

천재지변과 맞선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다. 여름 방학을 반납하고 복구 작업에 매달린 결과는 졸지에 참사를 당한 시신을 수습하거나 솥단지나 요강, 숟가락 등 쇠붙이를 건진 것이 고작이다. 숯가마와 화전을 잃은 주민들은 강이 범람하여 진흙으로 뒤덮인 개활지를 찾아 떠난다. 산에 덧대고 살아온 저간의 정나미조차 미련이 없다는 듯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풍찬노숙이 기다리는 산 아래로 무작정 떠난다.


산사태 현장에서 산촌의 신산한 삶을 경험한 인호는 기존의 계몽 활동에 대해 회의를 품는다. 무지한 사람에게 글을 깨쳐 눈을 뜨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문명퇴치와 더불어 환경개선사업을 병행하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자치회는 잔류한 주민들을 도와 여름 방학이 끌날 때까지 산간마을을 순회하며 주거지 개선사업에 열을 올린다. 폐허가 된 초가를 허물고 땅을 돋아 주춧돌을 올리고, 기둥을 세운 뒤 지붕을 얻는다. 너른 땅을 골라 휴식처가 될 회관과 정자를 새로 짓는다. 홍수에 대비하여 마을을 가로지르는 수로를 정비하고 돌다리를 놓는다. 살풍경하던 폐허가 새로운 주거환경으로 거듭나자 떠났던 주민들도 소문을 듣고 하나둘씩 모여들어 팔을 걷어붙이고 돕는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 정자는 노인들이 한담을 나누며 쉼터로 삼고, 마을회관은 문맹을 벗어나려는 아이들의 학습장으로 변모한다.




188.


비 온 뒤에 땅은 굳는 법이라 했던가. 절망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본 듯 물난리를 겪은 주민들의 눈빛이 형형하다. 위기를 극복한 춘천 일대는 다시금 활기를 되찾는다.

1922년 신임 가토(加藤) 내각은 재정 긴축과 소비 절약 등을 담은 ‘경제정강(經濟政綱)’을 공포한다. 이에 기업인과 지식인은 경제독립과 자립경제를 내세워 국산품애용운동을 전개한다.

1924년 음력 정월 초하루를 기하여 전국에 전단이 뿌려진다. 각 도시마다 시민단체들이 가두연설과 시가행진을 통해 ‘조선물산장려운동(朝鮮物産獎勵運動)’을 대대적으로 선전한다.

큰 홍수를 겪은 탓에 나무마다 매미의 탈피각이 마른버짐처럼 나붙어있다. 여름의 끝자락은 짝을 찾아 나선 매미의 자지러진 울음소리로 더욱 어수선하다. 시민회관은 ‘만해(卍海) 한용운’을 보려고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3·1만세운동’ 이후 3년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죽다가 살아온 땡중 한용운이올시다!”

하카마 위에 단젠을 걸쳐 입은 폼이 영락없이 일본사람이다. 그는 시장통에서나 통할 법한 걸쭉한 입담으로 청중을 사로잡는다.

“‘3·1만세운동’ 이후 사이토 마코토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무단정책을 문화정책으로 바꾼다 하였소! 근데, 그게 어디 말이 좋아 ‘문화’지, 헌병이 경찰로 둔갑하여 민간인에 대한 사찰은 전보다 더 맹렬하게 진행되고 있소이다! 그래서 사이토 총독한테 당장 민간인에 대한 사찰령을 폐지하라고 큰소리 좀 쳤더니만, 글쎄 이제는 아예 가는 곳마다 경무부 소속의 고등계 형사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나야 이미 버린 몸이라 또 징역을 보낸다면야 콩밥을 먹을 의향도 있습니다만, 혹여 여러분들은 땡중 말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고초를 치르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내킴 없는 그의 발언에 청중들은 순사들이 보는 앞에서도 파안대소를 터트린다.

“전국을 돌며 순회연설을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외다. 독립을 주장하면 난, 이 자리에서 포승줄에 묶여 연행될 것이 뻔합니다.”

군중 뒤에 숨어서 연설을 듣던 타이요우가 ‘독립’이란 말에 귀를 쫑긋 세운다. 곳곳에 배치된 사복 순사들이 연신 뒤를 돌아보며 그의 명령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는 ‘끄응’, 불편한 심기를 삼키면서 고개를 내젓는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왔냐면 장사 좀 하러 온 것이외다!”

그는 갑자기 하카마와 단젠을 벗어던진다. 그러곤 보자기를 풀어헤쳐 두루마기를 주섬주섬 입는다. 웅성거리던 청중은 숨죽인 채 다음 이어질 행위에 주목한다.

“아무리 세상이 왜풍으로 바뀐다손 치더라도 우리 것만 한 것이 어디 있겠소? 아니 그렇소? 그리고 나막신을 신으면 통풍이 잘 돼 무좀에 걸리지 않는다지만, 진흙에 박히면 빠지지도 않고, 술 한 잔 걸치고 몰래 숨어들라치면 따깍, 따깍 소리가 나는 통에 마누라한테 문전박대를 당하기 십상이오. 도대체가 이놈의 것은 뭣에 쓴답디까? 아궁이에 처넣어 군불이나 때면 모를까······”

그는 나막신을 번쩍 들어 바닥에 내동댕이치곤 짚신을 높이 쳐든다.

“난 무좀에 걸려 발꼬락이 문드러진다손 치더라도 이 짚세기를 신고 팔도강산을 유랑할 것이외다! 우리 것보다 더 좋은 것이 뭐가 있겠소! 우리 것이 좋은 것이오!”

장내는 한바탕 박장대소가 터진다. 바투 우렁찬 합창이 이어진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오!”

“우리 것은 좋은 것이오!”


군중의 폭발력이 임계치에 닿았다고 판단한 타이요우가 순사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사복 순사들이 군중을 밀치며 강단 앞으로 포위망을 좁혀간다. 위기감을 느낀 한용운은 가슴속에서 한 장의 쪽지를 꺼내 펼친다.

“풍기를 문란하고 시위를 선동한 불령선인으로 이틀 감방에 갇힐 텐데, 가기 전에 시나 한 수 읊고 가겠소!”

그는 장난기를 거둔 채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읊기 시작한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앞줄에 앉은 여인이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친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찬물을 끼얹은 듯 청중은 그의 날숨에 맞춰 들숨을 조절한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눈을 감은 채 시를 듣고 있던 타이요우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시인이 힘주어 발음한 ‘정수박이’란 단어에 고등계형사의 눈동자가 번쩍 뜨인다. 그러곤 큰소리로 사복 순사들을 다그친다.

“시를 가장하여 선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당장 잡아 들여!”

순사들이 득달같이 강단으로 뛰어오른다. 시인은 끝까지 마지막 삼행을 놓지 않는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은 현장에서 체포된다. 단상에 오른 청년들이 순사들과 뒤엉켜 옥신각신한다. ‘탕······’ 갑자기 단발의 총소리가 천장에 공명된다.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고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총을 빼든 순사들이 뒷걸음치면서 시인과 함께 강당을 빠져나간다.

어수선한 틈을 타 바닥에 떨어진 쪽지를 입수한 인호는 밤새 ‘님의 침묵’을 등사기로 복사한다. 그날 밤 춘천 일대에 ‘님의 침묵’이란 인쇄된 종이가 나붙는다.




189.


백구가 끙끙거리며 늦게 귀가하는 인호를 맞이한다.

“쉬잇! 부모님들 깨시면 안 돼! 어서 자!”

인호는 백구를 쓰다듬어주곤 달빛이 교교한 마당을 가로질러 슬그머니 건넛방으로 든다.


다음 날 아침 가족은 밥상을 마주하고 앉는다. 미라가 허겁지겁 밥을 먹는 인호를 조목조목 뜯어본다. 거뭇거뭇한 손등을 발견하곤 에둘러 묻는다.

“늦게 들어온 게로구나. 자정이 지나도록 기다리다 겨우 잠들었다.”

“어머니는 참! 제가 뭐 어린애인가요?”

“어린애가 아니라서 더 걱정이 된다.”

“어제 시민회관에서 한용운 선생의 강연이 있었어요.”

“옥고를 치러서 성치 않으실 텐데······, 여전하시든?”

호기심이 동한 경덕이 거든다.

“예, 듣던 대로 입담이 청중을 들었다 놓았다 하시더라고요. 배꼽을 잡았다가도 눈물을 훔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네 손등에 묻은 검댕이는 뭐니?”

미라의 반격에 인호가 대수롭지 않은 듯 손등을 벅벅 문지른다. 하지만 기름때가 번져 거무튀튀한 반경이 오히려 늘어난다.

“아, 이거, 등사기 먹물이에요. 한용운 선생이 순사들한테 끌려가기 전에 시를 한 수 읊었는데, 기가 막히더라고요. 그래서 시를 등사판으로 밀어 군내에 뿌렸어요.”

“쯧쯧쯧!”

미라는 뒤로돌아 사기 호롱의 뚜껑을 열고 기울인 뒤 행주에 기름을 축인다. 그러곤 인호의 손등을 제 무릎에 올려놓고 닦는다.

“꿩 잡는 게 매라고 하지 않니. 자고로 기름때도 기름으로 지워야 흔적이 남지 않는다.”

휘발성이 탁월한 석유가 닿자 손톱에 낀 거무튀튀한 때까지 말끔히 사라진다. 본래 제 때깔로 돌아온 것을 목도한 인호는 끈적끈적한 점액질이 한순간에 기화되어 무화된 물리적 반응에 혀를 내두른다.

“뭐든지 어머니 손길이 닿아야 온전하네요.”

“밤새 뿌린 전단지가 지금쯤은 경찰서장 책상에도 올라있을 거다. 청년과 학생을 상대로 검문이 심할 게야. 마저 더 닦도록 해!”

행주를 건네받은 인호는 꼼꼼히 양손의 때를 벗기고 닦아낸다.




190.


‘땡그랑, 땡그랑······’

종소리에 맞춰 교사가 출석부를 들고 당부의 말을 남긴다.

“요새 불령선인이 활개 치고 다닌다고 한다. 이럴 때일수록 제군들은 한눈팔지 말고 학업에 힘쓰도록······, 알겠나?”

“예!”

“이상!”

교사가 미닫이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훈육교사와 선도부들이 들이닥친다.

“복장 및 두발 검사를 하겠다!”

전과 달리 쥰페이는 강압적인 어조로 학생들을 압박한다. 불시의 검사를 앞두고 학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자, 양팔을 모두 앞으로 뻗도록 한다, 실시!”

어리둥절한 학생들은 영문도 모른 채 양팔을 뻗는다.

“손바닥이 잘 보이도록 두 손을 내민다, 실시!”

쥰페이와 선도부들은 학생들의 손바닥을 촘촘히 검사한다.

인호 차례가 되자 유심히 그의 손을 뒤집어보는 쥰페이. 별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한 그는 교단으로 걸어간다. 그러곤 쪽지 하나를 꺼낸다.

“최근에 ‘님의 침묵’이란 시가 춘천 일대에 나돌고 있다. 군내 기관장이 모인 회의에서 ‘님의 침묵’은 문학을 가장한 선동 문구로 규정을 내렸다. 따라서 앞으로 이러한 불온선전물은 보지도 말고 몸에 지니지도 말아라! 알겠나?”

“예!”

밀물처럼 들이닥친 선도부는 썰물이 되어 옆 교실로 이동한다.




191.


사흘째 한용운과 대치하고 있는 타이요우는 골머리를 앓는다. 단단히 욕을 보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러나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서장의 귀띔이 이명처럼 들리는 탓에 그는 장애라도 앓듯이 이따금 머리를 쥐어짠다.


“대중을 선동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 그럼 당장 석방해주겠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땡중이 염불이나 할 것이지, 건방지게 시 따위를 읊고 지랄이야!”

타이요우가 두 손으로 책상을 내리쳐보지만 ‘님의 침묵’을 읊조리는 그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딴청을 피운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시인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타이요우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한다. 타이요우가 이를 갈며 분통을 삼킨다. 진구가 취조실로 들어와 그에게 귓속말을 전한다.

“히로시 서장님이 뵙자고 합니다.”

옆방에서 취조실 안을 들여다보던 히로시 서장이 고개를 도리질하며 방금 나온 타이요우를 재촉한다.

“경찰서 밖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어. 무턱대고 잡아둘 수도 없잖아. 딱히 법을 적용할 만큼 위반사항도 없거니와 워낙 거물이라 섣불리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골칫덩이가 따로 없군!”

“다시는 풍기문란이나 선동을 못 하게끔 반쯤 녹초를 만들어서 보내는 게 어떨까요?”

“총독부에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악질을 자네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다시 춘천에 나타나면 시위 주동자로 처벌한다고 엄포를 놓고 석방해!”

“취조가 아직 안 끝났는데, 석방하라고요?”

“안타깝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어.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가 뭐가 있나? 시끄러운 건 딱 질책이야!”

“그럼 밀정이라도 붙이겠습니다.”

“알아서 해!”




192.


석방된 직후 한용운은 깊은 계곡과 험준한 산세로 둘러싸인 설악산으로 입산한다. 속세의 연을 끊고 출가를 결심케 한 사찰을 찾아 저간의 부침을 추스르기 위함이다. 그가 백담사에서 머문다는 소식을 접한 인호는 주말을 맞아 길을 나선다.

시간이 정지한 듯 사찰 마당은 적막하다. 계곡을 따라 불어오던 골바람이 일주문을 거치면서 거세진다. 마당을 휘젓던 바람은 기둥을 타고 공포에서 회오리를 친다. 에너지를 응축한 바람이 돌파구를 모색한다. 이윽고 방향을 튼 바람은 처마 자락으로 빠져나간다. 처마 끝에 잔뜩 웅크리고 있던 풍경이 요란한 소리를 낸다.


‘댕그랑, 댕그랑, 댕그랑······’


제 몸을 떨며 풍경이 내는 소리는 속세를 견제하는 일종의 사자후(獅子吼)와도 같다. 또한 속세의 터럭으로부터 벗어나 번뇌와 번민을 구도하는 불가의 엄숙한 문단속이기도 하다.

대웅전 앞에서 합장한 뒤 인호는 발길을 돌려 행자방을 기웃거린다. 짚신이 놓인 섬돌을 보곤 멈칫하는데, 행자방 안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어서 들어오시게!”

인호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섬돌을 오른다. 방안에는 지그시 눈을 감은 시인이 가부좌를 틀고 염주를 돌리고 있다. 인호는 상대가 보든지 말든지 넙죽 큰절을 한다.


“춘천고보에 재학 중인 한인호, 인사 올립니다.”

“험한 길을 오시느라 욕 봤네. 하하핫!”

스님은 청년을 향해 호탕하게 웃는다.

“여기까지 온 곡절이 무언가?”

잠시 뜸을 들인 인호는 작정한 듯 입을 뗀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인호가 내처 묻는다.

“님은 정녕 민초를 저버린 겁니까?”

우묵한 하관을 따라 성긴 흰 수염을 어루만지는 손이 움찔한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시로 답을 대신한 시인이 염주를 돌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흠······, 세상의 모든 자리는 회자정리의 순리를 따르는 법인 게지!”

실망한 표정이 역력한 인호가 발끈한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습니다.”

또박또박 힘주어 시를 읊은 그가 뒤미처 되묻는다.

“선생님, 그렇다면 이 구절에서 말하는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붓는다는 것은 단지 암울한 현실을 회피한 미망에 불과하단 말씀입니까?”

“난 자리가 있으면 든 자리가 있듯이, 이별은 곧 새로운 만남을 의미하지 않겠나?”

시인은 제 시로 갈무리를 한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시에 숨겨진 희망의 불씨를 본 듯 인호는 반색한다.

“거자필반, 즉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죠?”

“어허, 성질도 급하긴······. 님이 돌아오느냐, 마느냐는 자네 하기 나름 아닌가? 하하핫!”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인호는 마지막 구절을 읊은 뒤 간절한 눈빛으로 동의를 구한다.

“침묵의 진정한 의미는 공허한 부재가 아닌 미래의 희망을 암시하는 거죠?”

선문선답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듯 스님은 염주를 건 손을 합장한다.

“그건 온전히 자네 몫일세! 불가에서는 ‘살불살조살부살모’란 말이 있네.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 하며, 심지어 부모까지도 만나면 죽여야 한다고 하네. 매미가 성충이 되기 위해서 탈피하듯이 진정한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속세의 연과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남을 뜻하는 말일세.”

얼마간 골몰하던 인호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받들겠습니다. ‘님’을 맞이하기 위해 기꺼운 마음으로 거듭나겠습니다.”


인호는 큰절을 올린다. 스님은 그저 묵묵히 염주를 돌리며 불경을 암송한다. 문을 닫고 마당으로 나온 그는 다시 한 번 행자방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를 한 뒤 일주문을 빠져나간다.




193.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암울한 현실 속에서 방황하는 청년에게 이정표를 삼는 계기로 작용한다. 백담사에서 돌아온 인호는 자치회의 활동을 기반으로 시민단체와 결탁하여 제2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한다.

자치회가 운영하는 독서회는 여느 때와 사뭇 다른 분위기다. 인호는 한용운과의 독대를 소개하며 ‘님’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깨달음을 전한다.


“선생님께서는 ‘살불살조살부살모’를 강조하시면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 하며, 심지어 부모까지도 만나면 죽여야 한다고 하셨어. 오직 진정한 자유는 속세의 연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때라고 하셨지.”

수염발이 갓 잡혀 코밑이 거무스름한 경수가 눈알을 되록거린다.

“회장! 부처나 조사는 만난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매일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부모를 어떻게 죽인단 말이야?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한용운은 미친 땡중이라잖아? 그 인간한테 너무 경도되면 우리도 미쳐버리는 게 아닐까?”

맞은편에서 경수의 말을 듣던 칠복이 고개를 내젓는다.

“야, 이 꼬맹아! 정말 호래자식이 되고 싶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누가 누굴 죽여? 어휴, 답답해!”

칠복은 제 가슴을 소리 나도록 몇 차례 친다. 인호는 씩 웃고 만다.

“어라! 쟤네 뭐야? 왜 이리로 오는 거지?”

교실 뒤에서 망을 보던 학구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크게 떠든다. 학생들이 창가로 다가가 복도를 기웃거린다. 나카다가 대여섯 명의 학생을 이끌고 다가온다.

“야, 재빨리 책 펴놓고 자리에 앉아!”

학생들이 제가끔 태연한 척 책을 보는 시늉을 하는 가운에 교실 문이 드르륵 열린다.

“독서 서클이 한 학교에 두 개 있다는 건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해! 일본 문학을 소개할 테니, 한국 문학을 소개해주라! 문학에는 이념이나 체제의 장벽이 없다고 하잖아!”

나카다의 제안을 듣던 인호가 나쁘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 예술은 하나니까 말이야!”

흔쾌히 승낙한 인호를 바라보는 몇몇은 마지못해 억지웃음을 짓는다.


서로 악수를 나눈 뒤 나카다가 고개를 까딱하자 무지가 교실 뒤로 가서 망을 본다. 나카다는 가방에서 인쇄물을 꺼내 펼쳐 보인다. 한국 학생들은 저마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입을 다물지 못한다. 밤새도록 등사기를 돌려 길거리에 뿌린 장본인들이 바로 자기들이기 때문이다.

“누가 만들어서 뿌린 건 상관없어! 어렵게 구해서 읽어봤는데, 훌륭한 시더라고! 이해 못 한 단어가 있어서 그런데, 해석 좀 부탁해!”

당황한 기색을 거두어들인 인호가 자상하게 묻는다.

“어느 부분이 이해가 안 되는데?”

나카다는 인쇄물을 외면한 채 서성이며 시를 읊기 시작한다. 토시 하나도 틀리지 않고 암송하는 나카다를 바라보는 시선이 둘로 갈린다. 감탄한 시선은 물끄러미 바라보지만 두려워하는 쪽은 실눈을 뜨고 견제한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습니다’에서 ‘눈물의 원천’은 절대적인 존재로부터 배신당한 느낌이랄까? 그런데 ‘슬픔의 힘을 옮겨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붓는다’고 하잖아? 여기서 슬픔을 극복하고 재회의 기쁨을 승화시키는 것 같아! 그리고 다음 연에서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는데, 여기선 불교의 윤회 사상이 느껴져. 세상은 돌고 도니까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된다는 희망의 불씨가 살아 있잖아? 정말 감동적인 시야. 그런데 궁금한 점은 ‘님의 침묵’에서 ‘님’은 정녕 무얼 의미하는 걸까? 정녕 사랑하는 연인? 아니면 궁극의 부처님?”

나카다의 날카로운 해석에 학생들이 혀를 내두른다. 팔짱을 끼고 있던 인호가 얼마간의 침묵을 깨고 나카다에게 답한다.

“물론 시에서 쓰이는 단어는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어. 그러나 내가 본 ‘님의 침묵’에서 ‘님’은 향기도 없고, 실체도 없는 무형의 존재 즉, 마음속에서만 존재하는 무한, 무량의 개념이랄 수 있지. 그건 바로······”

뭇시선이 인호의 입에 모아진다. 특히 나카다의 눈길이 휘둥그레지면서 답을 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내 나라’, 일본에게 빼앗긴 ‘내 조국’이야!”

일순 교실 안의 공기가 급격히 냉각된다. 한국 학생들은 소금기둥이라도 된 양 마비된 상태로 눈만 껌벅인다. 일본 학생들은 봉인이 뜯긴 금기를 접한 듯 안절부절못한다. 어색한 분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나카다가 수습에 나선다.

“물론 빼앗긴 조국일 수도 있지. 그렇지만 이 시는 엄연히 감수성에 호소하는 측면이 강해! 아마도 시인은 첫사랑의 추억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게 아닐까?”

주변을 일변한 나카다가 바투 말을 잇는다.

“참!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의 그 달달함과 애틋함을 너희들은 아직 모르지? 아무튼 ‘님의 침묵’은 온전히 첫사랑을 못 잊는 연정이 담긴 사랑의 세레나데라고 생각해!”


인호는 나카다의 심정을 이해한 듯 고개를 주억거린다. 시에 담긴 의미를 폭로하거나 비판할 이유가 있다면 굳이 제 발로 찾아올 이유가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잠시 경성으로 시계추를 돌려 영채와의 달콤했던 키스 장면을 떠올린다.

독서회는 양측 학생의 우의를 확인하는 자리가 되어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학생들이 장난을 치며 교정을 가로지른다. 교무실로 가던 미나토가 무리 사이에서 나카다를 보곤 눈을 부릅뜬다.


“아니, 학생회장 나카다가 인호 패거리들과 어울린다? 이거 꽤나 재밌는 그림이 나오겠는걸!”

그는 의뭉한 웃음을 짓곤 교무실로 향한다.



194.


주일을 맞은 교회는 신도들로 북적거린다. 선교사의 선창에 따라 신도들이 눈을 감고 기도문을 암송한다. 주위를 살피던 몇몇 사람들이 강단을 장식한 커튼 뒤로 속속 사라진다. 성품을 보관하는 창고는 시민단체의 대표들을 수용하기에는 비좁다.


“상하이임시정부에서 파견된 김도선 동지입니다.”

선교가 소개를 마치자마자 대표들이 손을 내밀어 도선에게 악수를 청한다.

“기독교단체 대표 장선규입니다.”

“불교청년단을 이끌고 있는 박강식입니다.”

“춘천고보 학생대표 한인호입니다.”

“여성단체대표 엄희자입니다.”

대표들과 일일이 굳은 악수를 나눈 도선이 본론을 꺼낸다.

“그동안 여러분이 모아주신 독립자금은 임시정부가 심혈을 기울인 군사학교 운영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마련해주신 거금은 만주에 새롭게 신설되는 군관학교의 장비를 구입하는 데 쓰일 겁니다. 다시 한 번 임시정부의 내각을 대표해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한껏 고무된 시민대표들의 표정이 밝다.

“총독부의 조직적인 방해로 물산장려운동도 여의치 않습니다. 조선 백성의 단결을 보여줄 획기적인 운동이 필요한 때입니다. 좋은 계획이 있으면 의견을 개진해주십시오.”

도선은 대표들을 일별한다. 하지만 선뜻 나서는 이가 없다. 주위를 둘러본 인호가 나선다.

“제2의 만세운동을 펼칠까 합니다.”

“만세운동?”

도선이 되묻는다.

“학생이 전면에 나서서 만세운동을 일으키면 경찰들도 섣불리 강제진압은 하지 않을 겁니다.”

선교사가 걱정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렇다고 학생들한테만 피를 강요할 수는 없지. 교구의 동의를 구해보겠네.”

“여성단체도 나서겠습니다.”

“불교청년단들이 학생들의 뒷배를 책임지겠소!”

침묵으로 일관하던 도선이 덧붙인다.

“나 또한 임시정부와 긴히 상의해서 제2의 만세운동을 돕겠소. 단, 독립단체의 모든 조직을 동원하여 일시에 대규모로 봉기하도록 계획을 짭시다. 그래야 총독부도 함부로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오.”

“제2의 만세운동의 횃불이 조선팔도로 번지는 그날을 위해서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상기된 인호를 보곤 모두 다가와 어깨를 다독거린다. 도선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속삭인다.

“자네가 있어서 대한의 앞날은 밝네! 큰 뜻이 있으면 언제든지 상하이로 건너오게. ‘리차드 호텔’ 마담한테 ‘상하이 킴한테 물건을 전할 게 있다’고 귀띔하면 나와 연락이 닿을 걸세!”

“네!”




195.


자전거를 타고 고샅길을 지나던 우체부가 빨래를 널고 있는 미라를 보곤 멈춘다. 그는 행랑에서 소식지를 꺼낸다.


“원주교회에서 소식지가 도착했습니다.”

‘소식지’란 말에 미라는 종종걸음으로 우체부를 맞이한다.

“매번 이렇게 촌구석까지 편지를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출하실 텐데, 잠깐만요!”

편지를 받은 그녀는 부엌으로 가서 찐 옥수수를 챙겨온다.

“시장기를 잠깐 속일 수는 있을 거예요.”

“아이구! 마침 어디서 구수한 냄새가 나서 꼬르륵, 배꼽시계가 울리기 직전이었는데······. 고맙습니다.”

우체부는 옥수수를 먹으면서 자전거를 타고 길모퉁이로 사라진다. 그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미라는 총총히 마루에 오른다.

“여보, 여보!”

그녀는 벌컥 문을 열고 안채로 든다. 봉투를 뜯자 소식지 갈피에 사진 한 장이 들어있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꽃을 든 수잔과 턱시도 차림으로 갓난아기를 안은 인서는 다소 엉거주춤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태평양 건너에서 사진을 보고 있을 부모의 벅차오르는 심정을 짐작이나 한 듯 신혼부부의 표정은 잔뜩 긴장한 상태다. 사진을 보는 순간 부부는 서로의 눈을 번갈아 보며 제 눈을 의심한다.


“아니, 이게 뭐야? 애들이 결혼했단 말인가? 아이도 낳은 모양이네요. 어머나, 이렇게 기특할 수가······, 이역만리에서도 용케 잘 지내고 있나 봅니다.”

환히 웃는 내내 미라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배어있다. 한동안 사진을 바라보던 경덕의 뺨에도 기쁨의 눈물이 흐른다.

“불효자 놈 같으니! 아직 엄마, 아버지가 이렇게 멀쩡한데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들어 놓다니······”

“여보! 정말 우리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거유? 이런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미라는 경덕을 껴안고 울먹인다.

“허어! 할머니가 된 게 뭐 그리 좋다고!”

경덕도 덩달아 눈시울을 훔친다.

“그나저나 아기가 아들 맞죠?”

미라의 말에 경덕이 맞장구를 친다.

“아무리 서양이 우리네와 문화가 다르다손 치더라도 사내애한테 치마를 입히는 법은 없겠지. 바지를 입은 것을 보니 고추가 틀림없어!”

“내 손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놈 참 늠름하게 생겼네요.”


두 사람은 한동안 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며 사진을 뚫어져라 보고 또 본다.




196.


춘천의 번화가는 군청과 경찰서를 중심으로 둘로 나뉜다. 한쪽은 시장을 끼고 형성된 전통적인 거주지 형태를 띠고 있고, 맞은편은 새로 조성된 왜풍(倭風) 일색의 유흥가와 일본인 정착지가 주를 이룬다.

둘러 나뉜 번화가는 서로 문화적 차이로 인해 의식주(衣食住)가 확연히 대비된다. 양 문화는 군청 앞에서 염도가 다른 물이 잠시 한데 뒤섞이는 기수역의 와류를 잠시 형성하곤 이내 제자리로 돌아가는 형국이다. 이를테면 필요 이상의 접촉은 양측 모두 꺼린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파로 북적이는 번화가는 응축된 에너지를 지닌 채 지극히 절제된 긴장을 유지한다.

유독 서점만큼은 한국과 일본 학생이 뒤섞여 문전성시를 이룬다. 고서가 빼꼭한 서가 틈에서 인호가 책을 보는 척하고 있다. 춘천농업학교의 대표가 책을 고르면서 그를 흘깃거린다.


“학생 회의에서 조선 학생 전체는 동맹파업에 동참하기로 했어. 봉기 일자가 정해지면 연락 줘!”

농업학교의 대표가 슬쩍 자리를 뜬다. 야학을 운영하는 여교사가 반대편에서 다가온다.

“춘천뿐만 아니라 원주의 야학들도 참여하기로 했어요. 연락주세요!”

무명 적삼에 검정 통치마를 입은 그녀가 서가를 돌아 사라지면 남루한 복장을 한 사내가 주위를 살피며 기웃거린다.

“동맹파업에 적극 참여하기로 한 동지들의 뜻을 대신 전하러 왔소!”

우락부락한 사내와 마주한 인호는 말을 얼버무린다.

“처음 보는 분이신데······, 사람 잘못 본 게 아니신지······”

사내는 어깨를 툭 치며 말을 잇는다.

“조합대표가 부상을 당해서 대신 왔소.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적의를 거둔 인호가 손을 내밀곤 악수를 청한다.

“형님한테 안부 전해주십시오. 올빼미가 울면 찾아뵙겠다고······”

“또 봅시다! 그럼······”

사내가 서가 사이를 비스듬히 비켜나가자마자 경수가 숨을 헐떡이며 그를 찾는다.

“유도부들이 떼로 몰려왔어!”

“그쪽에서 먼저 보자고 했으니까, 할 말이 있겠지. 가자!”

인호는 무심한 표정으로 서점을 벗어난다.


서점 앞에 모인 택견부들이 절도 있는 걸음으로 활보하는 유도부를 보곤 수군거린다. 유도부를 인솔하고 나타난 나카다가 걸음을 멈춘다. 서점을 사이에 두고 얼마간의 긴장이 흐른다.


“택견부에서 도전장을 보냈다는데, 그 장본인이 인호, 너야?”

나카다는 보스의 기질을 갖춘 인물이다. 비록 시를 좋아하고 철학을 논하는 감수성의 소유자일지라도 단체를 맡은 이상 물러설 의향이 없는 듯하다.

“무슨 소리야? 이 쪽지를 보낸 게 누군데?”

인호는 쪽지를 높이 쳐든다. 나카다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럼, 누가 우리 둘 사이를 이간질이라도 한다는 거야?”

“그거야, 나는 모르는 일이지!”

두 사람이 본의 아니게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 서점 맞은편에 있는 찻집의 문이 활짝 열린다. 그러곤 미나토가 선도부원들을 거느린 채 거리로 나선다.

“왜? 독서회가 아니라서 서먹한가 보지?”

미나토가 이죽거리자 나카다가 일침을 가한다.

“선도부가 교내 활동이나 잘 할 것이지, 학생 간에 싸움을 붙여?”

미나토가 한 걸음 바짝 다가선다.

“내가 오죽하면 이렇게 했겠니? 너희 둘이 명색이 학교의 대표를 맡고 있는데, 선도부의 말발이 통하겠어? 자고로 한 학교의 대표는 단 한 명만 인정한다! 오늘 이 자리에서 승부를 가르자!”

미나토의 도발을 등에 업은 유도부원이 나카다에게 압박을 가한다.

“회장! 선도부장 말이 옳아! 춘천고보는 일본제국의 시행령으로 설립됐잖아? 따라서 당연히 학생회는 우리가 차지해야지!”

난감한 나카다가 주위를 일별한다.

“나카다! 회장직이 부담스럽다면 나한테 맡겨!”

미나토가 호기롭게 나카다를 도발한다.

“너희들은 빠져! 나와 인호 둘이 해결하겠다! 한인호! 대결하겠나?”

인호는 나카다와 미나토를 번갈아본 뒤 조건을 내건다.

“학생회장을 건 너희들의 내분에 끼고 싶지는 않지만, 더 이상 지저분한 이지메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 대결을 받아들이겠다. 오늘 이후로 조선 학생에 대하여 어떠한 이지메도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라! 더 이상 군말하기 싫다.”

얼마간 침묵이 이어진다. 구경꾼들이 제법 모여든 탓에 일본 학생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더 이상의 이지메는 없다고 약속해라!”

인호의 추궁에 나카다가 단박에 받는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대결한다는 것이 내키지는 않지만 조건을 수용한다. 앞으로 이지메는 절대 없다!”

“미나토! 너도 약속해!”

눈치를 보던 미나토가 마지못해 약속한다.

“사무라이는 한 입으로 두 말 하지 않는다.”

인호는 일부러 군중을 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인다.

“여기 모인 너희들이 증인이 되어야 한다. 앞으로 춘천고보에서 이지메가 사라진단다. 왜냐하면 오늘의 승리는 내 몫이니까!”


구경꾼들과 학생들이 빙 둘러선 가운데 나카다와 인호가 서로를 정탐하며 대련 자세를 취한다. 유도를 연마한 나카다는 상대의 어깨를 잡기 위해 차츰 거리를 좁혀온다. 택견으로 단련한 인호는 발차기의 타격점을 찾아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 나카다의 양손과 인호의 오른발이 몇 차례 허방을 헤집는다.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던 쥰페이가 군중에 가로막힌다. 호기심이 동한 그가 고개를 쳐들고 싸움을 지켜본다.

발차기를 피한 나카다가 오른손을 뻗어 잽싸게 인호의 옷깃을 낚아챈다. 그러곤 순식간에 업어치기를 시도한다. 나카가의 손길을 뿌리친 인호가 공중제비를 돌며 다리를 벌린다. 그러곤 어느 틈에 나카다의 목에 양발을 걸치고 옥죄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뒤엉켜 한 바퀴를 돈다. 팔이 뒤틀린 나카다와 바닥에 등짝을 찧은 인호는 가까스로 서로의 올가미를 풀고 다시 입식 자세를 취한다.

쌍방 간의 날카로운 일합이 무위로 끝난 직후 두 사람은 숨을 몰아쉬며 상대의 허점을 찾기 위해 견제한다. 먼저 약점을 노출한 쪽은 나카다다. 발차기를 피할 요량으로 고개를 바짝 끌어당긴 채 팔을 뻗는 순간 뒤로 물러서던 인호가 몸을 휙 돌리면서 돌려차기로 응수한다. 전광석화와 같이 이단 옆차기의 발끝이 나카다의 오른쪽 뺨을 강타한다.

일순 핏줄기가 공중에 흩뿌려진다. 나카다는 땅바닥에 꼬꾸라진다. 실신한 듯 그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일본 학생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곤 상황을 부인하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휘젓는다.

다급한 호루라기 소리가 가까이 들려오자 구경꾼들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유도부원들은 나카다를 부축하곤 사라진다. 미나토는 얼굴을 찌푸리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한다. 인호와 택견부도 뭇사람 틈에 섞여 자취를 감춘다.




197.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맺으면서 전리품으로 러시아가 조차하던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인수한다.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아우르는 관동주(關東州)에 관동도독부를 두어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한다. 1919년 도독부가 폐지되고 천황 직속의 관동군사령부가 뤼순(旅順)에 설치된다.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는 민간인이 늘어나고 공출을 위한 철도망이 확충되면서 관동군사령부는 자국민과 철도망의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워 군대를 대폭 증강시킨다. 물론 자국민과 철도망을 보호한다는 일본의 명분은 허울에 불과하다. 명분의 실상은 가상의 적인 소련을 견제함과 동시에 만주에 눈독을 들이는 미국을 따돌리려는 고도의 전략적 차원에서 수립된 ‘만주식민화계획’의 일환일 뿐이다.

안정된 식량자원과 군수물자를 조달할 전천후 병참기지로써 만주를 낙점한 일본은 본토로부터 자국민과 군대를 대거 이동시킨다. 게다가 대농장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할 수단으로써 한국인의 만주이주를 적극 권유한다.

허허벌판에 도시가 들어서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으로 일정 규모 이상의 인구의 유입과 그들을 수용할 거주지가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지리적으로 외부와의 교류가 원활하지 않으므로 자체적으로 생산과 소비, 유통, 교역 등의 경제활동이 보장되어야 한다.

일본으로 볼 때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할 수 있는 방안은 값싼 임금에도 생산성이 뛰어난 한국인의 노동력이 유일하다. 일본은 그저 뒷짐을 진 채 치안을 담당한다는 명분하에 군대를 파견하여 새로운 터전을 찾아 부푼 희망에 젖은 한국인을 관리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전국방방곡곡의 주요 시장마다 모집관들은 무지한 민초들을 상대로 망상을 주입하는 데 열을 올린다. 기와집과 문전옥답이 기다린다는 미망에 사로잡힌 민초들은 철새의 귀향길을 따라 낯선 땅으로 정처 없이 떠난다. 장교들도 학교를 순회하며 황국신민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더벅머리 청년들을 꼬드긴다.

모집관이 다녀간 직후 학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불안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망국의 상실감에 허우적거리던 학생들은 반듯한 제복을 입고 황국신민이 된 모습을 그리며 입대원서에 기명날인한다. 춘천 군내는 이주와 입대하는 분위기로 어수선하다. 교회에 모인 시민대표들의 표정도 침울하다.


“춘천에서만 이주에 서명한 가구가 오백을 헤아린다고 합니다. 입대를 지원한 학생들도 백여 명을 훌쩍 넘겼다고 들었습니다. 이러다간 독립이 되더라도 백성이 없는 나라가 될 게 뻔하지 않습니까?”

여성단체 대표가 혀를 내두르며 하소연을 한다.

“만주나 간도의 사정도 여기와 별반 다를 게 없소. 관동군의 토벌 작전으로 이미 독립투사들은 모조리 쫓겨나 소만국경지역에서조차 설 자리가 녹록치 않았다 들었소. 그저 요설에 속아 고향을 등지는 백성들의 삶이 애달플 뿐이오.”

목사는 물기가 밴 목소리를 애써 삼킨다.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나라를 되찾아야 합니다.”

단호한 입장을 내놓는 인호에게 불교청년단 대표가 되묻는다.

“좋은 방안이라도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게! 나라를 되찾는 일이라면 시민단체가 나서서 물심양면으로 돕겠네.”

“이미 춘천의 학생대표와 야학, 노동자단체에서 제2의 만세운동을 위해 동맹파업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역시 젊은이는 패기가 있어야 돼! 그래 봉기는 어느 일자로 잡을 겐가?”

목사의 재촉에도 인호는 신중을 기한다.

“여러 단체가 동맹하는 일이라 봉기 일자는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여기 계신 시민 대표께서는 각계 인사들과 접촉하여 동맹파업의 정당성을 설득해주십시오. 봉기 일자는 결정되는 대로 통보하겠습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니, 신중히 처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무쪼록 준비되는 대로 알려주게! 교구와 각계 인사들과 접촉하여 봉기 당일에 동맹파업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내도록 준비해놓겠네.”

“고맙습니다, 목사님!”


대표들은 일일이 인호의 두 손을 잡고 결의를 다진다.





198.


1902년 12월부터 이민이 금지되던 1905년까지 제물포항을 통해 하와이의 사탕수수농장으로 떠난 이민자는 7,200여 명에 달한다. 초창기 이민 1세대들의 삶은 그야말로 노예와 같은 생활과 다를 바 없었다.

이민자들은 ‘루나’라 불리는 ‘십장’들에게 채찍 세례를 당하며 첫닭이 울기도 전인 새벽 다섯 시에 농장으로 출근한다. 그들은 해가 진 뒤에야 비로소 허름한 창고로 돌아와 그물침대에 몸을 기탁하곤 까무룩 혼곤한 잠에 빠져든다.

그들은 비록 육체적인 노예일지언정 감정적인 노예는 아니다. 감정이 복받칠 때마다 그들은 마치 의식을 치르듯이 검붉은 낙조가 펼쳐진 언덕을 오른다. 그러곤 서녘 하늘을 배경으로 저마다의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떠올리며 망국민의 설움을 달랜다.

‘플랜테이션’이라 불리는 기업적인 집단농장에서 말단의 노동자였던 이민 1세대들은 모진 삶을 억척스럽게 극복한다. 이역만리의 타국에서 터를 잡기 시작한 그들은 자녀들의 성장과 함께 교육과 사업에 힘을 쏟는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한인촌이 건설되고 학교와 교회 등이 잇따라 건립된다. 이민자들의 공동체가 활성화되면서 독립에 대한 열망도 상승한다.

박용만이 이끄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는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임시정부의 외교를 담당하는 ‘구미외교위원회(歐美外交委員會)’의 위원장인 이승만은 국제외교를 통해 독립을 성취해야 한다고 맞선다. 이러한 시각차로 인해 하와이에 근거지를 두고 해외 독립투쟁을 주관하던 두 단체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하와이에서 성공적으로 총탄을 제거한 인서는 목발 없이도 보행이 가능할 정도로 건강이 호전된다. ‘3·1만세운동’ 당시 탑골공원에서 기습적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청년이 하와이에 왔다는 소문은 간호보조사로 일하던 한국인의 입을 통하여 동포 사회에 퍼진다. 마지막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에 있을 무렵 한 언론인이 그를 방문한다.

‘신한국보(新韓國報)’의 주필 박용만이 그를 찾아온 이유는 진한 동포애에 이끌린 병문안이라기보다는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확인절차에 따른 요식행위의 성격이 짙다.


“일설에 의하면 자네가 ‘3·1만세운동’ 당시 탑골공원의 연단에 올라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이역만리에서 동포를 처음 대하는 인서는 다소 황망한 듯 기우듬히 누워 입술을 비죽이 내민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호승심이 동한 용만이 고개를 까딱거리자 목에서 둔탁한 소리가 난다. 기자의 본능이 드러날 때면 으레 저도 모르게 발현되는 공격성향인 셈이다. 그는 허투루 말끝을 흘리며 상대의 허점을 노린다.

“아시다시피 하와이는 일본판이라네. 일본 거류민의 수는 조선 동포의 수십 배가 넘어. 따라서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곳에서도 일본 거류민과 동포 사이에 마찰이 심했다네. 만약 자네가 당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이었다면······, 일본영사관이나 언론이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저의를 갈파한 인서가 얼마간 홉뜬 눈으로 상대를 노려본다.

“난 이미 결혼한 몸으로 아내가 있고, 또 자식이 있습니다. 공연히 이국땅에서까지 구설에 오르고 싶지 않습니다. 조용히 살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만 돌아가 주세요.”

인서는 단호히 거절하며 돌아눕는다. 때마침 병실에 들어온 수잔이 수상한 기류를 감지하곤 의아해한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럼 이만!”

서둘러 나가는 용만을 뒤로하고 수잔이 인서에게 다가간다.

“무슨 일이야? 자기 기분이 엉망이잖아!”

“신경 쓸 거 없어! 병실을 잘못 찾은 모양이야!”

“그래?”

“헨리는?”

“보모한테 맡겼지.”

수잔은 대수롭지 않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들고 온 꽃을 꽃병에 꽂고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다.

“날씨가 너무 화창해. 자기가 얼른 퇴원하면 헨리랑 해변을 거닐 거야. 그리고 난 모래사장에 누워 부자지간의 밀애를 보며 질투의 화살을 보내게 될 테지. 뭐, 그렇지만 괜찮아! 둘 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니까!”


인서는 혼잣말로 떠드는 수잔을 뒤로하고 자는 척한다. 그러나 감긴 눈썹이 일정 간격을 두고 씰룩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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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134화 악마의 최후 +3 19.07.12 194 1 16쪽
133 133화 고귀한 죽음 +1 19.07.11 105 1 12쪽
132 132화 무지개 +1 19.07.10 100 1 13쪽
131 131화 차관협정(借款協定) +2 19.07.05 110 1 14쪽
130 130화 반공포로석방 +1 19.07.01 121 2 13쪽
129 129화 한일회담 +1 19.06.29 125 2 15쪽
128 128화 폭탄테러 +1 19.06.26 132 2 13쪽
127 127화 카츄샤 +1 19.06.24 117 2 13쪽
126 126화 의사 왕룽 +1 19.06.23 118 3 17쪽
125 125화 빅터 한 재단 +2 19.06.19 125 3 13쪽
124 124화 인천상륙작전 +1 19.06.13 160 2 15쪽
123 123화 메모리 가든 +1 19.06.12 124 2 15쪽
122 122화 겹생 +3 19.06.10 121 2 16쪽
121 121화 하와이 +1 19.06.07 130 3 14쪽
120 120화 소령 맥나마라 +4 19.06.06 135 2 15쪽
119 119화 한초희 +1 19.06.05 140 2 14쪽
118 118화 맥아더 원수 +1 19.06.04 132 2 14쪽
117 117화 기만방송 +1 19.06.03 128 2 13쪽
116 116화 코리안 커넥션 +1 19.06.01 139 2 12쪽
115 115화 잠수함 +1 19.05.30 188 2 13쪽
114 114화 6.25 전쟁 +1 19.05.29 156 2 12쪽
113 113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특명 1호 ‘폭풍’ +1 19.05.21 134 2 11쪽
112 112화 금괴수송작전 +1 19.05.19 174 2 10쪽
111 111화 '암호명 A-1' +1 19.05.18 127 2 13쪽
110 110화 악연(惡緣) +1 19.05.17 126 2 14쪽
109 109화 마지막 미션 +1 19.05.16 127 2 12쪽
108 108화 애치슨 라인 +1 19.05.15 124 2 12쪽
107 107화 연적(戀敵) +1 19.05.15 144 2 12쪽
106 106화 독살(毒殺) +1 19.05.14 140 2 12쪽
105 105화 마돈나 다방 +2 19.05.13 143 2 15쪽
104 104화 한국은행 +1 19.05.11 146 2 14쪽
103 103화 비밀거래 +1 19.05.10 169 2 12쪽
102 102화 남미이주작전 +1 19.05.10 164 2 13쪽
101 101화 트루먼 독트린 +1 19.05.10 134 2 11쪽
100 100화 숙명의 라이벌 +1 19.05.10 140 3 18쪽
99 99화 Jane Doe +2 19.05.10 139 2 13쪽
98 98화 앙숙, 이승만과 김구 +1 19.05.10 136 2 12쪽
97 97화 반도호텔 +1 19.05.10 134 2 13쪽
96 96화 좌익과 우익 +1 19.05.09 134 2 13쪽
95 95화 조선인민공화국 +1 19.05.09 141 2 17쪽
94 94화 일본패망(日本敗亡) +1 19.05.09 145 2 12쪽
93 93화 원자폭탄 +1 19.05.09 133 2 13쪽
92 92화 김일성 +1 19.05.09 143 1 14쪽
91 91화 독수리 작전 +1 19.05.09 142 1 14쪽
90 90화 이승만 +1 19.05.09 129 1 14쪽
89 89화 비밀요원 나타샤 +1 19.05.09 122 2 15쪽
88 88화 OSS(미국전략사무국) +2 19.05.09 127 2 16쪽
87 87화 승전(勝戰) +1 19.05.09 122 2 14쪽
86 86화 진주만공습 +1 19.05.08 124 1 16쪽
85 85화 갈라예프 +2 19.05.08 123 2 16쪽
84 84화 채권(債券) +1 19.05.08 130 2 11쪽
83 83화 다카키 마사오 +1 19.05.08 140 2 12쪽
82 82화 광복군(光復軍) +1 19.05.08 121 2 13쪽
81 81화 육군정보학교 +2 19.05.08 123 2 11쪽
80 80화 홍콩행 +1 19.05.07 132 3 13쪽
79 79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3 19.05.07 119 2 12쪽
78 78화 김원봉과 김구 +1 19.05.07 118 2 16쪽
77 77화 까레이스키 +3 19.05.07 118 2 12쪽
76 76화 탈출(脫出) +1 19.05.07 125 3 9쪽
75 75화 박정희와 최태민 +1 19.05.07 128 2 9쪽
74 74화 중일전쟁(中日戰爭) +1 19.05.07 123 2 13쪽
73 73화 강제이주 +3 19.05.06 116 1 12쪽
72 72화 마루타 +1 19.05.06 116 1 12쪽
71 71화 막후 실력자 +1 19.05.06 116 2 13쪽
70 70화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등장 +1 19.05.06 116 1 15쪽
69 69화 천황결사옹위청년단 +1 19.05.05 123 1 15쪽
68 68화 후흑학(厚黑學) +1 19.05.05 126 1 13쪽
67 67화 경몽장(耕夢莊) +1 19.05.05 119 1 12쪽
66 66화 학교(學校) +1 19.05.05 120 1 8쪽
65 65화 국제연맹(國際聯盟) +1 19.05.05 119 1 19쪽
64 64화 나타샤 +1 19.05.05 119 1 11쪽
63 63화 보고서 +1 19.05.05 120 1 11쪽
62 62화 시인과 영웅 +2 19.05.04 129 2 15쪽
61 61화 탄생의 비밀 +2 19.05.04 121 2 18쪽
60 60화 국경수비대 +1 19.05.03 119 2 13쪽
59 59화 제네바협약 +4 19.05.03 124 2 18쪽
58 58화 명백한 운명 +1 19.05.03 118 1 16쪽
57 57화 미두취인소(米豆取人所) +1 19.05.03 122 1 12쪽
56 56화 생포(生捕) +1 19.05.02 120 2 13쪽
55 55화 참패(慘敗) +1 19.05.02 119 2 14쪽
54 54화 향수병(鄕愁病) +1 19.05.02 120 2 18쪽
53 53화 음악회 +1 19.05.02 122 2 18쪽
52 52화 들개 진구 +1 19.05.02 126 2 24쪽
51 51화 가락지 +3 19.05.02 129 2 26쪽
50 50화 덫 +1 19.05.01 132 1 28쪽
49 49화 추격전(追擊戰) +1 19.04.30 121 2 35쪽
48 48화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1 19.04.30 126 2 39쪽
47 47화 광휘와 빅터 +3 19.04.29 127 2 33쪽
46 46화 특별수사본부(特別搜査本部) +4 19.04.29 124 2 41쪽
45 45화 만저우리(滿洲里) +4 19.04.28 118 3 35쪽
44 44화 폭풍전야(暴風前夜) +1 19.04.28 119 3 37쪽
43 43화 Boys, be ambitious! +1 19.04.27 127 2 39쪽
42 42화 만주국(滿洲國) +5 19.04.27 135 2 38쪽
41 41화 만몽영유계획(滿蒙領有計劃) +1 19.04.26 132 3 25쪽
40 40화 재회(再會) +1 19.04.26 133 3 30쪽
39 39화 빅터 한 +1 19.04.25 139 3 49쪽
38 38화 박진만 +2 19.04.25 144 3 45쪽
37 37화 정보국 5과 +3 19.04.24 147 3 51쪽
36 36화 마적(馬賊) 왕리 +2 19.04.24 146 3 49쪽
35 35화 삼두정치(三頭政治) +2 19.04.23 145 3 42쪽
34 34화 주찬 +1 19.04.23 143 3 51쪽
33 33화 만주야사(滿洲野史) +2 19.04.22 140 3 50쪽
32 32화 서광휘 +2 19.04.22 143 3 47쪽
31 31화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 +2 19.04.21 168 4 47쪽
30 30화 미쓰야협정(三矢協定) +4 19.04.21 142 4 46쪽
29 29화 출산(出産) +3 19.04.20 154 4 43쪽
28 28화 밀항(密航) +2 19.04.20 143 4 45쪽
27 27화 불령선인(不逞鮮人) +1 19.04.19 142 4 43쪽
» 26화 님의 침묵 +1 19.04.19 149 4 48쪽
25 25화 이민(移民) +2 19.04.18 159 4 39쪽
24 24화 회자정리(會者定離) +2 19.04.18 150 5 44쪽
23 23화 여걸(女傑) 수잔 +5 19.04.17 151 4 46쪽
22 22화 3·1 만세운동 +5 19.04.17 154 4 44쪽
21 21화 천적(天敵) +1 19.04.16 154 5 49쪽
20 20화 아카키 타이요우(赤木太陽) +4 19.04.16 161 5 52쪽
19 19화 망국(亡國) +4 19.04.15 169 3 49쪽
18 18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3 19.04.15 172 3 46쪽
17 17화 한성진격작전(漢城進擊作戰) +4 19.04.14 169 4 49쪽
16 16화 의병전쟁(義兵戰爭) +4 19.04.14 174 4 43쪽
15 15화 춘투(春鬪) +5 19.04.13 186 3 47쪽
14 14화 암살미수(暗殺未遂) +4 19.04.13 202 3 37쪽
13 13화 결혼(結婚) +3 19.04.12 279 6 42쪽
12 12화 돈버거 +9 19.04.12 260 7 44쪽
11 11화 대한제국(大韓帝國) +2 19.04.11 282 7 45쪽
10 10화 김출세(金出世) +7 19.04.11 304 8 42쪽
9 9화 낙향(落鄕) +4 19.04.10 323 8 42쪽
8 8화 혁파안(革罷案) +4 19.04.10 337 9 41쪽
7 7화 증기자동차 +2 19.04.09 396 12 22쪽
6 6화 2차 사행(使行) +2 19.04.09 399 13 24쪽
5 5화 견문록(見聞錄) +5 19.04.08 446 14 19쪽
4 4화 북경(北京) +1 19.04.08 548 12 19쪽
3 3화 만남 +1 19.04.08 674 13 15쪽
2 2화 1차 사행(使行) +2 19.04.08 985 14 14쪽
1 1화 파락호(破落戶) 이하응 +17 19.04.08 1,909 2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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