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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공모전참가작 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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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최장르
작품등록일 :
2019.04.08 16:31
최근연재일 :
2019.07.12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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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22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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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쪽

33화 만주야사(滿洲野史)

님의 침묵




DUMMY

273.


방학을 맞은 인서는 상선에 올라 태평양을 건넌다.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곧장 인력거에 올라타 리차드 호텔로 향한다. 박용만은 그를 성대히 맞이한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바닷길은 잠잠하던가?”

“현해탄은 건널 때 태풍이 심했습니다만, 저만치 고국의 섬자락을 바라보며 위안을 삼았습니다.”

“역시 원대한 독립의 꿈을 지닌 투사다운 발언이군! 하하핫!”

“아직 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애송이에 불가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상투적인 인사말을 주고받은 뒤 용만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러곤 작심한 듯 나직이 말을 꺼낸다.

“보름 전에 경성을 다녀왔네. 지인을 통해 춘천 미천골을 수소문했지.”

인서가 눈동자를 되록거리며 관심을 표한다.

“가족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고 하더군. 남편은 아내와 사별한 뒤 장터를 떠돈다고 들었네. 안타깝지만 어머님이 돌아가신 듯하네.”

인서는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푹 내쉰다.

“혹시······”

용만이 말끝을 흐리자 인서가 궁금증을 드러낸다.

“다른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난감한 표정을 짓던 용만이 말을 잇는다.

“하여튼 자네를 위해 수소문한 것이나 들은 대로 전하겠네. 자네 아버님께서 어린애를 엎고 시장을 전전하며 젖동냥을 다닌다는 후문일세.”

“예? 그럴 리가요! 어머님 연세도 있으시고 건강도 안 좋은 편이시라······”

인서는 영 미덥지 않은 듯 그의 말을 허투루 듣는다. 사실 말을 전하는 용만도 제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더 이상의 언급을 회피한다. 그는 얼른 말을 돌려 분위기를 바꾼다.

“눈으로 보기 전에 소문은 그저 소문일 뿐이지. 그건 그렇고 자네 형의 이름은 거론하기조차 힘들 게 됐다네.”

화들짝 놀란 인서가 비로소 관심을 보인다.

“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용만은 자세를 낮추고 나직이 속삭인다.

“‘서······, 광······, 휘’란 이름은 이미 전설이 되어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수사의 대상에 오른다네. 한마디로 자네 형은 한민족의 정신적인 영웅이 되었단 말일세.”

인서가 의자를 바짝 끌어당겨 앉는다.

“‘서광휘’라니요? 저의 형의 이름은 ‘한인호’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자초지종부터 말씀해주세요.”

“‘한인호’가 ‘서광휘’라네‘

“네?”

“나도 들은 얘기라 진의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파다하게 퍼진 소문에 의하면 ‘한인호’가 ‘서광휘’가 틀림없네.”

“그럼, ‘한인호’든, ‘서광휘’든 살아 있답니까?”

“워낙 신출귀몰하여 행방은 묘연하지만 살아 있는 전설인 것만은 확실하네.”

두 남자가 고개를 주억거릴 즈음 왕 마담이 다가온다.

“뭐가 그리도 중하시길래 남자 두 분께서 머리를 맞대고 계십니까?”

“왕 마담! 잘 왔소! 그렇지 않아도 귀인을 소개하려던 참이오! 이쪽은 북경의 대본공사 사업을 참관하러 아메리카 나성에서 온 한인서라고 하오.”

인서는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인사를 한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핸섬하게 생기신 분을 알게 되다니, 저야말로 잘 부탁드릴게요. 호호호!”

살짝 이를 드러낸 채 웃던 왕 마담이 고개를 모로 튼다. 그러곤 관상이라도 보듯이 인서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낯이 익어요.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나요?”

“상해는 초행입니다.”

왕 마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 눈을 의심한다. 용만이 끼어든다.

“‘한인호’의 소식은 좀 들었습니까?”

왕 마담은 뒤로돌아 손님들을 일별한다. 의심쩍은 시선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입맛을 다신다.

“이제 더 이상 ‘한인호’란 이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용만보다 인서가 더 놀란 반응을 보인다.

“그게 무슨 말이오, 왕 마담!”

“이상한 일이 발생했어요. 1급 수배자 명단에 새로 등장한 이름이 ‘서광휘’라더군요. 만주에서 활동하는 투사라는데, 최근에 말을 타고 나타나 평양경찰서를 쑥대밭으로 만든 인물이랍니다.”

“그게 ‘한인호’랑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우리 쪽에서 관측한 바에 의하면 ‘한인고’가 ‘서광휘’로 개명해서 활동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근거 있는 관측이오?”

용만의 질문에 왕 마담이 엉뚱한 질문으로 대꾸한다.

“선생님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나야, 여기서는 ‘아메리카 팍’이잖소!”

“바로 그거랍니다.”

수긍이 간 듯 용만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왕 마담! 이 청년이 바로······”

그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왕 마담이 참견한다.

“‘서광휘’의 동생이죠?”

“어떻게 알았소? 역시 왕 마담의 눈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용만의 너스레를 듣는 둥 마는 둥하곤 왕 마담은 인서의 눈치를 살핀다.

“아까 ‘서광휘’란 이름이 언급되자 동공이 팽창하고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군요. 우리 쪽 사람들은 기억연상법을 이용해 상대의 반응을 보고 허점을 파헤치는 게 일이랍니다. 사실 인서 군이 들어올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한인호’, 아니 ‘서광휘’가 나타난 줄 알고 하마터면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거든요.”

인서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형님은 괜찮은 거죠?”

“만주 정의부 소속으로 활동한다고만 들었습니다. 더 이상은 알아도 말씀 못 드리는 점 양해바랍니다.”


인서는 찻잔을 매만지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경적을 울리며 달리는 차들과 바쁘게 오가는 행인들을 바라보는 표정이 시무룩하다. 가족의 생사를 알 길 없는 무성한 뜬소문에 머리가 복잡한 성싶다.



274.


열차탈출에 성공한 서광휘는 부하들과 함께 무사히 압록강을 건너 지린성의 기지로 귀환한다. 부쩍 자란 독립이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광휘의 품에 안긴다. 굵고 길게 쭉 뻗은 앞다리로 덥석 안기자 광휘가 비틀거린다. 광휘는 독립이와 함께 환영식에 참석한다.

비록 계획된 독립단과의 작전은 실패했지만 평양경찰서를 마비시킨 기습작전의 성공으로 대대적인 환대를 받는다. 정의부(正義府) 사령장 지청천은 환영식에서 대원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정의부는 이번 작전에서 선봉대가 궤멸되는 큰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서광휘 중위와 모철민 하사, 장영구 상병 그리고 끝까지 투쟁하다 명을 달리한 박선태 병장과 그 외 대원 모두에게 일계급 특진을 명한다.”

박수갈채가 쏟아지는 가운데 지청천 사령장은 대원들의 견장에 새로운 계급장을 달아준다. 대표로 화답에 나선 광휘는 명을 달리한 대원들의 이름을 차례로 거명한다.

“······오순영 상병, 이철진 병장, 나운석 하사, 박선태 병장, 최영철 하사, 김관진 중사! 잠시 순국한 대원들을 위해 묵념을 올리겠습니다. 일동 묵념!”

기지 내에 ‘독립군가’가 트럼펫으로 은은히 연주된다.

“일본군이 부르는 제 공식 이름은 ‘서광휘’입니다.”

곳곳에서 터져 나온 웃음으로 자칫 무겁게 흐를 분위기가 뒤바뀐다. 이윽고 ‘서광휘’, ‘서광휘’를 연호하는 함성이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관동군은 이제 한반도를 넘어 중국 대륙을 약탈하기 위해 만주에 대규모 병력을 증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적도 관동군인 이상 정신무장을 새롭게 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동지 여러분! 명을 달리한 순국선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을 합하여 독립의 그 날이 올 때까지 투쟁합시다!”

답사가 끝나자마자 대원들이 일제히 함성을 터트린다.

“서광휘, 서광휘!”

연호를 외치던 대원들이 달려들어 광휘를 허공 높이 헹가래를 친다. 그러곤 그를 무동을 태운 채 파오로 향한다.

뒤풀이가 한창인 파오 안에서 도선이 술이 든 잔을 젓가락으로 두들긴다. 일순 침묵이 흐른다.


“내가 처음 봤을 때 서광휘 중위, 아니 특진을 명받았으니 대위가 맞겠군. 학생신분이었다. 처음엔 그저 열정이 넘치는 열혈청년으로만 봤었는데, 지금은 전설적인 투쟁가로 성장한 모습에 감개가 새로울 따름이다. 허나 그때의 한인호 학생과 지금의 서광휘 대위는 눈빛만큼은 변함이 없다. 지금은 호랑이도 때려잡을 것 같은 외모지만, 전에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그저 한낮 애송이에 불과했었지. 하하핫!”

도선이 덥수룩한 광휘의 수염을 쓰다듬는다. 대원들이 탁자를 두드리며 웃음을 터트린다. 장병들을 일별한 도선이 갑자기 위장막으로 가려진 포장을 걷어 올린다. 각종 경기관총과 대포, 소총 등의 신무기가 기름을 먹은 채 번들거린다. 대원들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온다.

“해외동포가 보내온 신식무기다. 앞으로 무기가 없어서 전투에서 졌다는 말은 하지 말도록! 알겠나?”

“네!”

대원들은 앞 다투어 무기를 어루만지며 입을 다물지 못한다. 대원들을 뒤로한 채 도선과 광휘가 파오 밖으로 나간다.


“상해 왕 마담으로부터 연락이 왔네.”

“왕 마담님은 잘 계신가요?”

“물론 나의 영원한 피앙세는 잘 있다마다.”

도선은 잠시 오른손으로 입아귀를 쓰다듬는다. 선택의 귀로에서 주저할 때면 으레 나타나는 그만의 표식이다. 광휘가 모를 리 없다.

“왕 마담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리차드 호텔로 찾아온 청년이 자네를 쏙 빼닮았다고 하더군. 이름이 ‘한인서’라고 하네.”

“네?”

잘못 들은 듯 광휘는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묻는다.

“‘한인서’라고요?”

“그렇다네. 하와이에서 국민회를 이끄는 박용만 회장과 동행했다는 전언이네. 북경에서 추진 중인 대본공사현장 참관 차 방문 중이라더군. 박용만 동지랑 나는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의숙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지. 박 동지는 미국에서 군자금을 조달하며 우리를 돕고 있네. 자네가 허리에 찬 독일제 권총도 박 동지의 선물이라 볼 수 있지.”

도선의 말을 듣는 내내 광휘는 날숨을 반복적으로 길게 내쉰다.

“동생이 하와이에서 살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물론 그렇죠. 이번 평양에서도 내부 첩자에 의해 대원들이 비명에 갔습니다. 제 눈으로 보지 않는 이상 믿지 않겠습니다.”

“정히 자네 뜻이 그렇다면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네.”

도선이 그에게 플라스크를 건넨다. 광휘가 단숨에 보드카를 비운다.

“전설이 되더니만 술도 쌔졌군! 하하핫!”


환하게 웃는 도선을 뒤로하고 광휘는 휘영청 밝은 달을 한동안 응시한다. 그의 눈가에 촉촉한 눈물이 어룽거린다.









제18장 만주야사(滿洲野史)



275.


경의선의 종착지인 신의주역에서 내린 경덕은 한층 강화된 경비망을 보곤 국경지역이 가까웠음을 새삼 절감한다. 만주로 가긴 위한 여정은 그리 녹록치 않다. 신의주에서 국경 건너의 단둥(丹東)까지 가기 위해서는 압록강 철교를 건너야 한다. 모든 승객에 대한 철저한 검문이 이중삼중으로 실시된다.

통행증명서와 추천서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것으로 출경 허가가 떨어진다. 객차 안은 관동군으로 전입되는 군인이 대부분이고 간혹 고향을 등진 이주민과 국경무역을 하는 장사꾼이 눈에 띤다. 압록강 철교를 건넌 기차는 단둥에서 군인들과 무역상을 하차시키곤 곧장 만주의 얼이 담긴 도시 펑톈(奉天)으로 내쳐 달린다.

이슥한 시간에 펑톈역에 도착한 경덕은 까무룩 잠이 든 초희를 업고 역사를 벗어난다. 그는 선교사가 건넨 주소를 들고 역 마당에 길게 늘어선 인력거 행렬로 걸어간다. 십여 명의 호객꾼이 달려들어 서로 실랑이를 벌인다. 그가 건넌 쪽지는 인력거꾼들이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여러 갈래로 찢어진다. 강파르게 마른 사내가 인력거꾼들의 가랑이를 오가며 찢어진 쪽지 조각을 줍는다. 그러곤 잽싸게 경덕의 보따리를 잡아채며 이끈다.


“펑톈 선교회로 가면 되는군요. 어서 타세요. 요금은 선불입니다.”


비싸다고 여겼지만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흥정도 할 세 없이 앳된 청년이 지목한 인력거에 오른다. 청년은 힘껏 발을 구르며 저보다 큰 인력거를 요리조리 운전하며 역 마당을 용케도 벗어난다. 살짝 발을 걷어 올려 거리를 살피던 경덕은 긴 여독이 풀리는 듯 안도의 숨을 내쉰다. 화려한 네온으로 온통 불 밝힌 도시는 활력으로 넘친다. 초희를 끌어안은 그는 비로소 자유를 얻은 듯 거리 풍경을 감상한다.

발을 내리고 몸을 누인다. 저간의 장면이 주마등처럼 인력거 속도보다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막간의 상념은 울퉁불퉁한 길로 접어들면서 산산이 깨진다.


“다 왔습니다. 내리세요.”

인력거에서 내린 경덕은 입을 다물지 못한다. 온통 진흙탕인 길은 인적은 고사하고 들개들만이 요란하게 울부짖고 있다.

“여기가 선교회란 말이오?”

“네. 저기 불빛이 보이는 2층 건물이 선교회입니다.”

미심쩍은 듯 경덕은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나마 희미하던 불빛이 힘없이 꺼진다.

“아니, 여긴 선교회가 아니라 민가가 아니오!”


경덕은 버럭 화를 내며 고개를 돌린다. 인력거는 이미 맞은편 골목 쪽으로 꽁무니를 감췄다. 삽시간에 눈앞이 캄캄한 그는 잠에서 깬 초희를 안고 어른다. 시베리아를 넘어 남하한 대기는 밤이 되면서 더욱 성을 낸다. 살을 에는 바람은 뼛속까지 파고든다. 변변치 않은 홑껍데기가 전부인 그는 포대기를 꺼내 초희를 둘러맨다. 오도가도 못 하던 그는 어둠이 깔린 지평선 너머로 시선을 던진다. 마치 신기루처럼 어른거리는 불빛을 쫓아 정초 없는 발걸음을 옮긴다.

졸지에 낯선 이국땅에서 봉변을 당한 그는 오금을 저리며 허방을 딛기 일쑤다. 무릎까지 차오른 웅덩이에 빠지고 돌부리에 발목이 삐끗해도 처량한 망국민의 신세를 탓할 겨를이 없다. 그는 신열에 시달리는 초희를 위해 오로지 온기를 찾아 앞만 보고 총총히 큰길을 따라 걷는다.

단내를 풍기며 도착한 곳은 불운이 시작된 펑톈역이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던 그는 역에서 노숙을 하기로 결정한다. 포대기를 펼쳐 초희를 감싼 다음 품에 안는다. 그러곤 잔뜩 웅크린 채 잠을 청한다.

잠이 올 리가 없다. 혹여 딸이 깰까 봐 밭은기침을 삼킨다. 조심스레 몸을 가누며 자세를 바꿀 즈음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가까이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자신에게 바투 다가온 발걸음이 멈춘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너머로 불빛을 등에 진 그림자가 서성거린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초희를 안은 팔뚝이 넝쿨처럼 감긴다. 종종 부랑아들이 어린아이들을 납치하여 밀거래한다는 만주의 괴담이 이명처럼 귓가에 맴돈다.


“저고리를 입고 있는 걸 보니 조선사람 같은데······”

눈을 뜰까말까 망설이던 차에 나직이 들려온 한국어는 그를 더욱 혼란에 빠뜨린다. 자정을 훌쩍 넘은 야심한 시간에 익숙한 모국어일지언정 방심은 금물이다.

“쯧쯧쯧, 혹시 죽은 건 아니니? 코에다 손을 대보라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최소한 2인 이상의 복수라는 사실은 깨달은 경덕은 제 팔뚝을 힘껏 붙잡는다.

“쌔근쌔근 숨 쉬는 걸 보니, 아이 목숨을 붙어있는 것 같은데······”

젊은이가 손을 뻗어 코에 대려던 순간 경덕이 벌떡 몸을 일으킨다.

“뭐하는 수작이냐! 냉큼 물러서지 못할까!”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사내들이 놀라 뒤로 물러선다.

“아니, 살아 있었구먼!”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수염이 성긴 것으로 추측건대 얼추 경덕과 비슷한 연배인 듯하다.

“여보슈! 대관절 여기서 뭐 하는 거요? 어린계집애는 또 뉘구?”

중늙은이가 대뜸 화를 낸다.

“그건 당신네들이 알 바 아니오.”

경덕은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이틀 전에도 노숙하던 조선인 두 명이 동사해서 송장을 치렀수다. 여기서 변괴를 겪으면 뒤치다꺼리는 모두 우리가 도맡아서 하는 통에 영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수다.”

“불길하게 누가 동사를 한단 말이오?”

“누가 댁이 그런다고 했수? 하도 객사하는 조선인이 많아서 하는 푸념이외다.”

중늙은이가 등을 돌려 담배를 빡빡 피워댄다. 매캐한 연기가 낮게 깔리면서 초희가 마른기침을 하기 시작한다. 덩치가 좋은 사내가 거든다.

“보아하니 봉천이 초행길인 거 같은데, 어디 잘 데라도 있소? 우리는 역 근처의 마방에서 일하는 마부들이오. 인신매매단을 대하듯 하지 말시오. 아이도 열이 있는 것 같은데, 딱히 잘 곳이 마땅치 않으면 우리를 따라 오시든가. 편하지는 않지만 죽음을 몰고 다니는 바람만은 피할 수 있을 것이외다!”


초희의 이마에 손을 댄 경덕은 주저하지 않고 사내들의 뒤를 따른다. 마부들이 묵는 마방은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로변에 있다. 1층에는 십여 마리 말들이 묶여 있는 마구간과 짐을 쌓아둔 창고가 마련되어 있다. 2층에는 마부들이 쉴 수 있는 방이 있는데, 방이라기보다는 거적으로 바람막이를 한 다락과 같다.

몇몇 동포를 제외하곤 전부 만주족 차림새다. 길게 늘어뜨린 수염자락에선 기름기가 번들거리고, 마고자의 소매에선 덕지덕지 술 찌게미가 눌러 붙어 있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흔적을 저마다 지고 있는 까닭이다.

마부들이 제가끔 자리를 잡고 눕는다. 역에서 경덕을 눈여겨 본 성옥은 짚단을 이고 와서 다락 구석에 자리를 편다.


“누추하지만 이곳만한 곳도 없수다.”

“오해해서 미안합니다. 오늘 펑톈역에 도착했는데, 그만······”

경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옥이 말허리를 자른다.

“인력거꾼들이 몰려와 실랑이를 벌였을 테고······, 어수선한 틈을 타서 젊은 놈이 구세주처럼 나타났을 게요.”

“그걸 어떻게······?”

“그놈들은 죄다 한패거리외다. 만주에서도 펑톈은 누루하치가 나고 자란 성도가 아니오. 그래서 하루에도 기차가 몇 차례씩 만주뿐만 아니라 조선, 러시아에서 온 사람들을 실어 나릅니다. 그놈들은 그런 초짜들만 찾아서 그들만의 영업을 합니다. 마적단이 뒷배를 봐주고 있어서 일본 헌병들도 섣불리 제지를 못하는 실정이외다. 그래도 어리숙한 놈한테 걸려든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시오. 자칫 고약한 악질한테 걸렸으면 아이도 빼앗기고 목숨도 부지 못했을 거외다.”


저간의 사정을 들은 경덕은 물색없이 당할 뻔한 상황에 몸서리를 친다. 그러곤 쌔근쌔근 단잠에 곯아떨어진 초희를 보며 안도한다. 그는 성옥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뭐라고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부녀한테 정말이지, 은인이나 마찬가지······”

성옥은 드르렁거리며 코를 골기 시작한다. 천장을 바라보던 경덕도 연달아 하품을 쏟아낸 뒤 이내 곯아떨어진다.



276.


뤼순(旅順)에 자리한 관동군사령부 내 회의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각 부대에서 선발된 장교들은 의자에 앉은 채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윽고 회의실문이 열리고 류노스케가 타이요우를 대동하고 등장한다.

적막하던 회의실이 갑자기 요란하다. 장교들이 일사분란하게 기립한 탓에 뒤로 밀린 의자들이 삐걱거리며 심한 마찰음을 낸다. 너무 긴장한 탓일까. 몇몇 장교는 뒤로 넘어간 의자를 제자리에 세워놓은 뒤 동료들의 어깨와 선을 맞춘다.


“편히 쉬어!”

의자를 끌어당기는 마찰음으로 실내가 요란하다. 모두 착석하자 류노스케가 자리에 앉는다.

“귀관들은 본토와 조선 그리고 만주에서 선발된 최고의 장교다. 귀관들의 어깨에 대일본제국의 번영과 천황폐하의 영광이 달려있음을 명심하라.”

“하이!”

우렁찬 목소리가 천장에 공명된다.

“귀관들이 소집된 이유는 단 하나! 만주에서 대일본제국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녹록치 않다. 국민혁명군 총사령 ‘장제스’는 ‘제국주의와 매국 군벌을 타도하여 인민의 통일정부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하달하며 전군에 북벌 동원령을 내린 상태다. 타도 대상인 군벌 중에는 관동군의 지원을 받고 있는 만주 군벌파의 ‘장쭤린’도 포함된다. 이는 곧 만주에서 관동군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숨은 것이다. 그리고 첩보에 의하며 황푸군관학교를 나온 ‘김원봉’이 이끄는 병력이 국민혁명군에 가담하여 북벌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격양된 류노스케가 청년장교들을 일별한다. 전방 15도를 주시하는 눈빛에 흐트러짐이 없음을 확인한 류노스케가 흡족한 듯 말을 잇는다.

“‘서광휘’에 대해서 들었을 것이다. 그자는 상해에서 내 심장에 총을 겨누었다. 그리고 두 달 전에 평양경찰서를 습격하여 대일본제국의 심장부에 총을 겨누기도 했다. 만약 ‘서광휘’가 ‘김원봉’과 결탁하여 국민혁명군에 합류한다면 관동사령부로써는 집안에 적을 둔 꼴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귀관들은 앞으로 ‘서광휘’와 그가 소속된 조직을 일망타진하는 데 전원 투입된다.”

“하이!”

“다음은 군경합동검거반의 아카키 경부가 중간발표를 하겠다. 경청하도록!”

타이요우가 한 발 앞으로 나와 목청을 가다듬는다.

“이번 작전의 실패는 군경합동수사에 허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사로운 공명심을 앞세우면 합동수사의 의미가 퇴색한다. 상부에서 수립한 작전은 목숨보다 중한 것이니, 대의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타이요우는 제 뜻을 세뇌시키려는 듯 주위를 일별한다.

“조만국경지역의 집안, 관전, 훈춘이 독립군조직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평양경찰서에서 희생된 장병들을 위해 마을 세 곳을 본보기로 삼아 보복공격을 할 것이다. 작전에 차질이 없도록 철저히 준비하도록 한다. 이상!”

타이요우가 반 발짝 뒤로 물러선다. 류노스케가 한 발 앞으로 나선다.

“아카키 경부의 명령을 잘 수행하도록 하라. 알겠나?”

“하이!”

우측을 훑어보던 류노스케의 시선이 멈춘다.

“쥰페이 코우 대위!”

“하이!”

쥰페이는 벌떡 일어나 절도 있게 상석을 향해 몸을 튼다.

“‘서광휘’에 대하여 아는 바를 말하라!”

“본명은 한인호. 부 한경덕과 모 박미라 사이에 난 두 아들 중 장남입니다. 육척 장신에 호리호리한 편이고, 사상은 부모의 영향을 받아 반정부적 성향이 강합니다. 두뇌도 명석하고 지도력도 탁월하여 급우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습니다. 춘천고보 당시 저의 제자이기도 했습니다.”

뚜벅뚜벅 다가온 류노스케는 쥰페이의 어깨를 다독이곤 걸음을 옮기며 말을 잇는다.

“코우 대위를 선발한 이유를 모두 알겠지?”

“하이!”

“제아무리 ‘서광휘’가 신출귀몰하고 변신에 능하다할지라도 여기에 있는 코우 대위의 매의 눈은 피하기 어렵다. 따라서 쥰페이 코우를 이번 ‘서광휘’ 체포전담반의 연락장교로 임명하다. 앞으로 상세한 진척 상황은 타이요우 경부와 코우 대위를 통하여 긴밀히 처리하도록 하라!”

“하이!”


잔뜩 상기된 장교 틈에서 쥰페이가 타이요우 쪽을 흘깃거린다. 비죽 입술을 내밀며 고래를 모로 튼 타이요우가 쥰페이를 의식한다. 타이요우가 고개를 까닥거리며 가소롭다는 듯 웃는다. 일순 그와 눈을 마주친 쥰페이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거둔다.


“오늘은 특별히 관동군사령관께서 연회를 베푸신단다. 전원 장교구락부로 모여서 회포를 풀도록 하라! 이상!”

류노스케가 문으로 다가가면 타이요우가 잽싸게 문을 연다. 류노스케가 나간 뒤 타이요우는 쥰페이를 향해 손가락으로 경례하는 시늉을 하곤 문을 쾅 닫는다.

장교들은 혀를 내저으며 긴장을 푼다. 그러곤 옆에 있던 장교 한 명이 쥰페이에게 질문을 던진다.

“대위님! 아카키 경부를 아십니까? 소문으로는 한 번 물면 놔주지 않는 인간사냥개라던데, 맞습니까?”

“‘서광휘’를 잡는 데 사냥견이면 어떻고 경주견이면 어떤가? 잡기만 하면 되는 거지!”

질문을 던진 장교는 머쓱하며 머리를 긁적인다.

“연회가 장교구락부에서 일곱 시에 시작된다. 늦지 말도록 하라!”

“하이!”

쥰페이가 절도 있는 걸음으로 회의실을 나간다. 숨통이 트인 듯 장교들은 목을 옥죄던 단추를 풀곤 날숨을 내뱉는다.

“그나저나 출세의 지름길이라는 정보부로 차출 된 건 잘 된 일이지만, 어째 층층이 시어머니가 버티고 있어서 마음고생을 꽤나 할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야! 육사 동기 말로는 아카키 경부가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하더라고. 저 인간 눈 밖에 난 경찰서장도 당장 모가지가 날라 간다잖아! 일개 위관급 장교 목은 파리보다 못한 거 아냐?”

“젠장, 경력을 쌓아서 견장에 별 하나 붙이러 왔다가 종노릇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장교들은 푸념은 늘어놓은 뒤 하나둘씩 회의장을 빠져나간다.



277.


여러 날 동안 딱딱한 좌석에 의지한 채 이동한 탓일까. 잠에서 깬 경덕은 얼마간 공간을 지각하기 위해 온 신경을 한 데 모은다. 그러곤 텅 빈 다락에서 낯선 환경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명령조의 중국어가 오가는 사이사이 익숙한 사투리가 들린다. 아마 푸념조의 사투리로 추측건대 중국인 관리자의 명령이 성가신 성싶다.

경덕은 난간에 기대어 창고를 내려다본다. 어렴풋이 본 간밤의 기억보다 창고의 규모는 훨씬 크다. 가득 짐을 실은 마차가 쉴 새 없이 드나든다. 하역(荷役)에 매달린 인부들은 대부분 더벅머리나 상투를 튼 조선인들이다. 그들은 과피모(瓜皮帽)를 쓴 관리자들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바삐 돌아가던 현장에 긴장이 흐른다. 어젯밤 잠자리를 제공한 성옥이 총총히 창고 안으로 들어선다. 비단에 수를 놓은 치파오 차림에 담비 가죽을 덧댄 훈초피모(薰貂皮帽)를 쓴 사내가 다리를 절름거리며 그 뒤를 따른다.

난간에서 내려다보니 언뜻 보아도 화려한 훈초모피 주위로 과피모 여럿이 모여드는 형국이다. 뭔가 얘기를 주고받은 후 훈초모피가 앞장을 선다. 과피모들이 그 뒤를 따른다. 마치 접시들이 마방을 식탁으로 삼아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활기찬 일상을 엿보던 그가 기침소리를 듣곤 다락으로 향한다. 딸의 눈곱을 떼어주고 식은 미움을 한술 떠서 먹이는데,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가 고개를 돌릴 즈음 성옥이 서글서글한 눈매로 얼굴을 내민다.


“기침 하셨습니까? 간밤에 많이 추웠죠?”

“아닙니다. 덕분에 바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별 소리 다 하십니다. 그나저나 화주님께서 손님이 있다고 하니, 같이 식사를 하자네요.”

“예? 저를요?”

“네! 얼른 내려오세요.”


망설이던 끝에 그는 초희를 안고 계단을 내려간다. 창고 옆에 마련된 식당에서는 이미 인부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성옥 앞에 자리를 잡은 경덕은 한식이 차려진 것을 보곤 입안 가득히 흥건한 군침을 삼킨다.

“드셔보십시오. 만주 땅이 거칠긴 해도 조선 농부가 갈고 닦은 터에서 키운 채소라 먹을 만합니다.”

“이리 융성한 대접까지 받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드렛일이라도 관계없습니다. 밥값을 할 수 있도록 뭐든지 맡겨만 주십시오.”

인사말을 건넨 그는 밥을 씹어 초희에게 먹인다. 그러곤 한술 떠서 허기진 배를 채운다. 그릇을 반쯤 비울 무렵 한 입 뭉덩 베물고 씹던 성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밥을 먹던 인부들도 두리번거리며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화주님!”

어찌할 바를 모르던 성옥이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은 화주(貨主)를 부축한다. 느닷없는 상황에 경덕도 놀란 눈치다.

“화주님, 어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화주의 얼굴을 살피던 성옥은 뒤로 물러선다. 바닥에 떨어진 훈초피모를 밟고 일어선 화주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다. 성옥을 뒤로 물린 화주는 두 팔을 앞으로 뻗으며 경덕 쪽으로 다리를 절며 다가간다.

“서방님! 서방님!”

까닭을 알 리 없는 인부들은 화주와 경덕을 번갈아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수군거린다. 경덕은 숟가락을 땅바닥에 떨어뜨린다. 그러곤 정신이 아뜩한 듯 도리질을 친다.

“누구신지······, 혹시 사람을 잘못 본 건 아니신지······”

황망한 나머지 경덕은 말을 잊지 못한다. 무릎을 꿇은 화주가 울먹이며 답한다.

“서방님, 저 진만이옵니다. 미천골 한 씨 가문에서 머슴살이를 한 박진만이라고요. 흐흐흨!”


그가 진만을 몰라본 것은 당연하다. 두둑한 뱃살이며 넙데데한 턱살은 여지없이 상인의 자태가 몸에 배었을 뿐만 아니라 입언저리를 덮은 수염은 영락없이 만주족의 인상을 품기고 있다. 게다가 진만은 안경까지 쓰고 있다. 그가 알고 있는 모습과는 전혀 이질적이다.


“서방님! 이래도 저를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진만은 안경을 벗곤 경덕의 손을 얼굴에 가져다댄다. 진만의 손에 이끌려 얼굴을 어루만지던 경덕은 끝내 눈물을 터트리고 만다.

“자네가 맞군! 진만이, 자네가 맞아!”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던 두 사람은 사무실로 자리를 옮긴다.

“다시 한번 보게나!”

경덕은 퉁퉁 부은 얼굴을 요리조리 살핀다. 진만이 분명하다

“이게 생시란 말인가? 타지에서 자네를 만난다는 게 꿈이 아니고 뭐겠는가?”

“생시랍니다. 저는 미천골의 상머슴이었던 박진만이고, 서방님은 한 씨 가문의 후손이자 궁내부 참서관을 지내신 한경덕이십니다.”

제 직함을 들은 경덕은 왈칵 눈물을 쏟는다.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서로의 얼굴을 탐하던 두 사람은 몇 차례 가쁜 숨을 몰아쉬곤 평정을 되찾는다.

“아니, 자네가 여긴 어인 일인가?”

“서방님. 언젠가 댁에서 문안인사를 드린 기억이 나십니까?”

“이르다 뿐인가.”

“그날 이후 전국을 떠돌다 이렇게 만주까지 흘러들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있었던 얘기는 들어 알고 있네! 그러면 지금 다리를 저는 것도······”

진만은 오른쪽 정강이를 주무르며 말을 잇는다.

“그 당시 숨통을 콱 끊어놨어야 하는 건데······. 제가 지금도 이 다리만 생각하면 분통이 터집니다.”

“아무튼 살아주어서 고마우이······.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진만은 경덕을 마치 부모와 상봉한 듯 곡진히 대한다. 문틈과 창문 너머로 큰절을 올리는 것을 지켜보던 동포들은 콧잔등이 시큰거린 듯 눈시울을 훔친다. 진만은 성옥을 향해 눈을 질끈 감는다. 성옥은 창문에 커튼을 치고 문을 닫고 나간다.


잠이 든 초희를 보곤 진만이 묻는다.

“서방님, 큰 도련님이 장가를 드셨군요?”

초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소를 짓던 경덕은 버럭 퉁바리를 놓는다.

“아니, 내가 나이를 들었다고 무시하는 게야? 어디를 봐서 우리 초희가 손녀딸로 보인단 말인가?”

공연히 핀잔을 들은 진만이 머쓱해하며 머뭇거린다.

“그렇다면······, 손녀딸이 아니라면 혹시 늦둥이를 보시기라도······?”

어느 틈엔가 초희가 잠에서 깬다. 경덕은 초희를 품에 안고 얼굴을 부비며 대꾸한다.

“아무렴, 우리 딸이고말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이라네.”

“네······?”

혹시나 했던 일이 기정사실로 확인되자 눈이 휘둥그레진 진만은 그만 기함하고 만다.

“따님이시라고요?”

“그렇다네. 초희를 안아보겠나?”

얼떨결에 초희를 건네받은 진만은 가누는 폼이 여간 어색한 듯하다.

“서방님, 그럼 마님께서는······?”

“하늘의 시샘이 컸지 뭔가. 이렇게 예쁜 딸의 재롱도 보지 못하게 하늘이 거두셨다네.”

진만으로부터 울먹이던 초희를 건네받은 경덕은 도리질을 하며 어른다.

“아하, 죄송합니다, 서방님! 이놈의 주둥이가 호기심이 동해서 그만······”

경덕은 아이를 팔그네를 태우며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괜찮네. 이렇게 어여쁜 여식을 남겨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네.”

진만이 거든다.

“저한테도 아씨가 생겼으니 경축할 일입니다. 오늘밤은 성대한 잔치를 열까 합니다. 황량한 만주에서 서방님과 아씨를 만난 것은 제에게는 크나큰 홍복이니 당연히 축하해야죠. 하하핫!”

“자네 뜻이 정히 그러하니 따르도록 하겠네.”

두 사람은 초희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다.

“서방님, 큰 도련님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상해로 건너갔다는 소식만 들었네만, 그 이후로는 감감무소식이네.”

진만은 정색하며 되묻는다.

“혹시 ‘서광휘’란 이름은 들어보셨습니까?”

경덕의 눈빛이 갑자기 돌변한다.

“경의선 열차 안에서 ‘서광휘’란 사람과 마주쳤네.”

“예? ‘서광휘’와 마주쳤다고요?”

“정확히 말하자면 마주쳤다기보다는 그자가 내 무릎 아래로 몸을 숨겼다고 해야지. 헌병과 총격전이 벌어져서 잠시 객차 안으로 피신했다네.”

“서방님! 바로 그 ‘서광휘’가 큰 도련님이십니다!”

되록되록 눈알을 굴리던 경덕이 진만을 쏘아본다.

“지금 뭐라고 했나? 그게 참말인가?”

“틀림없습니다. 독립군한테 군자금을 전달하는 동지한테 들었습니다. 상해에서 영사를 피격한 뒤 만주로 피신하여 정의군에 합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근에 평양경찰서를 급습하여 일본군의 간담을 싸늘하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서광휘’, 아니 한인호, 큰 도련님입니다. ‘서광휘’가 ‘한인호’란 말입니다.”

경덕은 저고리에 손을 넣곤 구겨진 쪽지를 꺼낸다. 그러곤 그에게 건넨다.

“이 사람이 ‘서광휘’가 맞나?”

수배전단지를 펼쳐든 진만이 입을 다물지 못한다.

“맞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 ‘서광휘’입니다. 서방님의 큰 아드님이 확실합니다.”

경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눈물을 삼킨다.

“내 무릎에 머리를 파묻은 아들을 못 알아보다니······, 과연 내가 아비의 자격이 있단 말인가?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이더냐!”


경덕은 꺼이꺼이 목 놓아 울기 시작한다. 진만은 울음을 터트린 초희를 품에 안고 다독이며 숨죽여 운다. 창고 밖에서 내막을 엿들은 성옥과 동포들도 몸을 들썩이며 눈물을 흘린다.



278.


말 백여 마리가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집안(集安)의 저잣거리를 가로지른다. 집안(集安)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만주족은 느닷없이 나타난 마적단에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찬다. 그도 그럴 것이 자고로 만주족과 마적단은 유목민을 조상으로 둔 같은 뿌리의 후손이다. 따라서 토지에서 정착을 하는 만주족과 초원에서 유목을 하는 마적단은 혈연으로 맺은 관계여서 아무런 기별도 없이 백주대낮에 나타날 리가 만무하다.

마적단은 집안(集安) 언저리에 거주하는 한인촌을 급습한다. 집과 학교에 불길이 치솟고 도주하는 남자들은 모조리 총탄세례를 받는다. 겁에 질린 여자들은 닥치는 대로 겁탈의 대상이 된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타이요우가 약탈의 현장을 망원경을 통해 지켜보고 있다. 그가 옆에 서있는 쥰페이에게 명령한다.


“이만하면 됐다. 철수하도록!”

“예!”


쥰페이가 허공을 향해 총을 발사한다.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말 떼는 두 갈레로 나뉘어 일제히 달아나기 시작한다. 활활 타오르는 마을을 바라보는 타이요우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차에 오른다. 마적단으로 분장한 토벌단은 득달같이 내달려 관전(寬甸), 훈춘(琿春)에 있는 한인촌을 휩쓴다. 불과 나흘 만에 세 곳의 조선족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279.


마적단이 마을을 약탈하여 한국인의 씨를 말린다는 소문은 만주 전역으로 발 없는 말이 되어 퍼져나간다. 관동군과 군벌로 조직된 토벌대에 쫓겨 위세가 예전만 같지 않지만 그래도 마적의 전통을 지키는 왕리에게도 흉흉한 소식이 전달된다.

집안(集安)은 마적을 은퇴한 원로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따라서 집안(集安)은 마적에게는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조상신을 모시는 시제가 열리는 날, 그는 주찬과 함께 장돌뱅이로 분장하여 부락으로 숨어든다.


“아니, 이게 누군가? 형님의 막내아들······”

왕리는 퍼뜩 삼촌의 입을 막고 귓속말로 속삭인다.

“삼촌, 죄송합니다.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짐짓 놀란 듯 삼촌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너한테 할 말이 없다. 너를 지지했었어야 하는데······. 나중에서야 왕망, 그놈이 형을 살해했다는 걸 알고 땅을 치고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마적의 장자는 왕표가 아니겠느냐? 산 중에 호랑이는 한 마리만 있어야 되느니라. 으흠!”

왕망을 지지하며 뒷돈은 챙긴 삼촌은 제 과오를 덮으려고 에둘러 왕망을 두둔한다.

“과거를 들추어서 무엇에 쓴답니까? 잘못된 게 있으면 바로 잡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모든 건 사필귀정이란 아버지의 말이 오늘 따라 생생하게 들리는 듯합니다.”

‘사필귀정’이란 말에 등골이 오싹한 듯 삼촌은 애써 시선을 피한다.

“저, 결혼했습니다.”

주찬이 삼촌을 향해 목례를 한다. 훑어보던 삼촌이 마지못해 인사말을 건넨다.

“떠돌이 신세라고 들었네. 한때 마적단의 세가 하늘을 찌를 때가 있었지. 그때 시집왔더라면 온갖 부귀영화는 다 누렸을 텐데······, 쯧쯧쯧.”

혀를 차던 그가 왕리를 보고 한 마디 덧붙인다.

“산채라도 열면 연락하거라. 말이라도 보내 줄 테니······”


어느덧 시제가 끝난 부락은 온통 축제마당으로 뒤바뀐다. 이슥한 밤이 되기를 기다려 폭죽이 하늘을 수놓으며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왕리와 주찬이 어색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즈음 말 이십여 마리가 술집 앞에 멈춘다.


“요새 마적단의 규율이 예전 같지 않구먼.”

못마땅한 삼촌이 혀를 차며 눈살을 찌푸린다.

“삼촌,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왕리가 의아한 듯 묻는다.

“예전에는 전쟁에 나가는 위급상황에서조차도 조상신 앞에 말머리를 돌려 예를 다하는 게 마적의 범절이거든······, 요즘 마적들은 본체만체도 않고 흙바람만 남기고 사라지더구나.”

“아직도 마적의 규율을 어기면 죽음으로 다스립니다. 설마 그럴 리가요?”

“얼마 전에 저놈들이 저잣거리를 휩쓸고 지난 뒤 한인촌이 몰살당했는데도 내 말을 믿지 않는 거냐?”

왕리가 버럭 화를 낸 삼촌을 보곤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러곤 예리한 눈빛으로 술을 마시는 무리들을 관찰한다.

“삼촌, 저들이 마적이라고 하던가요?”

“보면 모르냐? 저렇게 차려 입었는데도 마적이 아니라고 할 테냐?”

“죄송합니다만 제 부하들이 아닙니다.”

“형하고도 등을 돌린 놈이 무슨······, 에잇!”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삼촌을 뒤로하고 거리로 나선 왕리는 주위를 경계하며 떠들썩한 술집으로 접근한다. 주찬이 바짝 뒤를 따른다.


“여보, 당신보다는 내가 더 낫겠어요.”


주찬은 왕리가 말릴 틈도 없이 치맛단을 걷어 올리곤 마구간으로 숨어든다. 말의 안장과 고삐를 확인하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마적들이 쓰는 마구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제 눈을 의심하던 그녀는 말들을 살피며 미심쩍은 흔적을 살핀다.

비좁은 공간에서 말들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터라 배 주위를 간과했던 그녀가 한곳을 주시한다. 엉덩이를 차인 말들이 한 곳으로 내몰린다. 덩그러니 남겨진 말을 관찰하는 시선이 매섭다. 등자를 매만지던 그녀가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든다. 그러곤 단박에 끈을 자른다.


‘흠······, 귀신을 속일지언정 내 눈은 못 속이지. 군화를 신은 네놈들한테 마적단의 등자가 발에 맞을 리가 없지. 아마 손거스러미처럼 성가셨을 거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그녀가 마구간을 벗어난다. 그러곤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던 왕리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280.


경덕은 진만의 집으로 초대를 받는다. 원산댁을 잃은 아픔을 잊지 못하는 듯 옷차림과는 달리 집안은 온통 한식(韓式)으로 차려져 있다. 성옥 내외가 만든 한국식 음식이 상 한가득 오른다. 술잔이 오가는 사이에 잠이 온 초희가 칭얼거린다.


“아기씨는 저희 부부가 모시고 잘 테니, 두 분은 편히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성옥 내외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아이를 안고 나간다. 거나해진 경덕과 진만은 빈 잔에 술을 채우며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눈다.

“춘천에서 모든 걸 잃고 떠났는데, 이렇게 대성한 것을 보니 여간 대견한 게 아니야.”

“이 모든 게 서방님과 어르신들을 모신 덕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평소 어르신들께서 강조하신 성실과 정직이 몸에 밴 탓에 앞만 보고 달렸더니, 양손에 재물과 명성이 쥐어지더군요.”

“사람도 참! 그게 어디 배운다고 되는 건가? 다 타고난 자네 성품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지.”

“쥐뿔도 없는 저한테 만주는 기회의 땅이었습죠.”

고개를 돌려 술잔을 단숨에 비운 진만은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조선을 떠돌다 마침내 압록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무일푼의 부랑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몸을 쓰는 일밖에 없더군요. 그래서 닥치는 대로 몸을 팔았습니다. 농사를 짓는 것보다 짐을 나르는 게 품삯이 높다는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봉천역으로 갔습죠. 일이 넘쳐나더군요. 하루에 세 사람 몫을 하다 보니 목돈이 쥐어졌습니다. 돈 버는 재미가 쏠쏠할 무렵 희귀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건’이란 말에 귀를 쫑긋한 경덕이 턱을 내밀고 몰입한다.

“사건이라니?”

“뿔난 망아지가 느닷없이 나타나서는 글쎄 지나가던 차를 냅다 들이박는 게 아니겠습니까? 문짝이 찌그러져서 안에 탄 사람들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많이 상했든가?”

“연기가 나고 불이 붙어서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겁에 질린 구경꾼들이 뒤로 물러서는데, 두고 볼 수가 없어서 겁도 없이 뛰어들었습죠. 문짝이 워낙에 꾸겨져서 꼼짝도 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문짝을 뜯어버렸습니다.”

스스로 대견한 듯 그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팔뚝에 난 화상을 내보인다. 그는 눈을 끔벅거린 뒤 경덕이 채워준 술잔을 단숨에 비운다.

“뒷자리에 탄 두 사람을 차례대로 업어다가 역에 눕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쪼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폭발과 함께 차가 공중으로 치솟더라고요.”

“천만다행이네! 자네 같은 의인이 나서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횡사할 뻔하지 않았나?”

“전 그저 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차에 탄 사람이 북만주 최고의 화주의 부인과 딸이더라고요.”

“옳지! 연약한 여인을 구했으니, 남편이 가만있지 않았을 테지.”

경덕은 고수라도 된 양 추임새를 넣으며 무용담을 이끈다.

“맞습니다요. 다음날 화주가 찾아와 같이 일해보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화주 덕분에 봉천역에서 취급하는 모든 화물의 전매권을 따냈습니다.”

“그렇고말고! 인간이라면 은혜를 갚아야 하는 법!”

“부자는 하늘이 낸다고 하더니만 화주를 만난 다음부터 부와 명성이 저절로 쌓이더라고요. 눈만 뜨며 마차가 불어나고 마침내 트럭까지 사게 되었습니다.”

“자네는 정말 하늘에서 낸 인물이네. 대견허이!”

두 사람은 잔을 높이 들고 건배한다.

“돈을 벌고 나니까 고향생각이 간절해지더군요. 그래서 동포들이 사는 정착촌에 학교도 지어주고 전주한테 땅을 사서 무상 배분했습니다. 그리고 독립군조직에 군자금도 대게 되었습니다.”

“자네야 말로 의인이고 애국자일세! 모두들 일제에 아부하며 일신의 안녕을 꾀할 때, 자네는 혈혈단신으로 동포를 돕고 독립군을 지원하고 있지 않은가!”

“아직 멀었습니다. 저는······”

진만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린 뒤 나지막이 말을 잇는다.

“‘서광휘’를 돕고자 백방으로 소소문하고 있습니다.”

“인호 말인가?”

“예, 서방님! 도련님이야말로 조선의 희망이자 만주의 영웅이십니다.”

“모든 재산을 도련님의 군자금으로 내놓아도 아깝지 않습니다.”

“고마우이!”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의 뺨에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281.


번화가 중심에 자리한 대화(大和)호텔은 펑톈(奉天)에 주둔하고 있는 각국의 외교관이나 사업가들의 발길이 빈번한 곳이다. 호텔을 개장한 요시무라는 자국민을 우대한다. 만주에 눈독을 들인 본토의 투자자들을 끌어 모으는 데 성공한 그는 만주의 신흥부자로 떠오른다.

말 이십여 마리가 호위하는 화려한 마차가 등장하자 도로가 마비된다. 만주의 최대 군벌 장쭤린은 창밖으로 손을 흔들며 구경꾼들에게 화답하는 데 공을 들인다. 그는 공식적인 모임이 있을 때마다 줄곧 위세와 존엄을 과시하기를 즐긴다.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가 타던 황실마차를 모방해서 만든 마차가 그의 공치사에 적극 활용된다.

화려한 마차가 대화호텔 앞에 멈춘다. 연이어 만주를 7등분하여 관할하는 지도자들이 속속 도착한다. 연회장에 마련된 회의석상을 두고 초원에서 달려온 지도자 일곱 명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말을 아끼고는 있지만 금방이라도 불평이 쏟아질 것만 같다.

이윽고 호텔 사장 요시무라가 장쮜린과 그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을 대동하고 회의장으로 입장한다. 그 옆으로 관동군 헌병대장과 펑톈 영사가 배석한다. 상석에 비스듬히 앉은 장쭤린은 주위를 일별한다.


“먼 길을 오느라 수고가 많았소.”

축 늘어진 눈가의 와잠(臥蠶)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킨다. 지도자 사이의 이견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듯하다.

“이번에 처리할 안견은 최근에 만주에 떠돌고 있는 흉흉한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서요.”

일곱 명 가운데 유독 마적단을 거느린 세 명을 훑어보던 그가 넙데데한 턱살을 출렁거리며 입을 뗀다.

“듣자하니 이번에 집안, 관전, 훈춘을 연달아 약탈한 사건이 마적단의 소행으로 추측된다던데, 혹시 오해를 살 만한 일은 하지 않았소?”

소만 국경지대의 밀무역을 관장하는 마적단의 두목이 불편한 기색을 토로한다.

“형님, 말씀이 지나치지 않습니까? 설령 마적단이 저지른 일이라 칩시다. 그렇다면 내부에서 다뤄야 할 일인데, 굳이 일본군 장교와 영사가 배석한 자리에서 이 일을 거론하는 저의가 뭡니까? 심히 불쾌합니다.”

장쩌린은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두목을 쏘아본다.

“경무국장 미쓰야와 내가 맺은 ‘미쓰야 협정’은 아직 유예하오. 따라서 일본 측 대표가 참석한 것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부당하오. 그리고 독립군과 내통했다는 한인촌의 약탈은 어찌 보면 그들이 자초한 결과라고 볼 수 있소. 다만, 약탈한 대상자가 마적단이란 소문이 돌고 있으므로 그 오명을 벗기기 위한 회의라는 것을 명심하시오.”

그가 단호하게 못을 박자 얼마간 강요된 침묵이 흐른다. 사실 참석자들은 독립군을 체포하여 보상금을 두둑이 챙긴 바 있다. ‘미쓰야 협정’의 혜택을 톡톡히 본 것이다.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말석에 앉은 주찬이다. 나이가 가장 어리고 게다가 유일한 홍일점인 그녀는 소장파를 대변하기로 작정한 듯하다.

“마적단의 소행이라고 단정을 지을 만한 물증이라도 있습니까?”

그녀는 장쭤린과 일본 측 대표를 번갈아본다. 헌병대장이 대답한다.

“안타깝지만 여러 곳에서 마적단을 봤다는 목격자들이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일갈한다.

“증언이 아니라 물증이 있냐고 물었소.”

헌병대장은 얼버무린다.

“아직 물증은 확보되지······”

그녀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일침을 가한다.

“내가 물증을 제시하겠습니다.”

그녀는 가방에서 등자 두 개를 꺼내 일부러 ‘쾅’ 소리가 나도록 탁자에 올려놓는다. 뭇시선이 탁자에 놓인 등자를 향한다.

“헌병대장에게 묻겠습니다.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마적들이 쓰는 마구의 일종인지 아십니까?”

안경을 끼고 유심히 보던 헌병대장이 고개를 가로로 젓는다.

“모르겠습니다.”

“잘 보십시오. 마적들은 군화를 신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있는 이 등자는 일본군대가 본토에서 대량으로 구입한 기마전투용 등자입니다. 등자 바닥에 ‘대정 십사년 나가사키제철’이란 글자가 선명하군요. 다시 말해 1925년도에 나가사키 제철에서 생산되었다는 명백한 물증입니다. 우리가 쓰는 등자는 보시다시피 아무런 표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호기심이 동한 참석자들이 가까이 다가와 등자 바닥을 확인한다. ‘대정 십사년 장기제철작(大正 十四年 長崎製鐵作)’이란 한자가 또렷하게 음각되어 있다.

“다시 묻습니다. 마적단으로 보이는 한 무리가 왜 아무런 표식이 되어 있지 않은 등자 말고 일본에서 생산된 등자를 사용하고 있을까요?”

뒤통수를 맞은 듯 일본 대표들은 전전긍긍한다.

“이번 집안, 관전, 훈춘의 약탈사건은 마적단을 빙자한 일본군대의 소행이 확실합니다. 이 사건의 진위가 명명백백하게 밝혀지지 않는 이상, 마적단은 만주평의회를 탈퇴하겠소.”

회의 내내 줄곧 홉뜬 눈으로 주찬을 지켜보던 장쉐량이 한걸음 앞으로 나선다.

“듣고 보니, 주찬 두목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소. 그러나 확실한 물증이 나오기 전에 일본군의 소행으로 몰아붙이는 식의 발언에는 동의할 수 없소.”

그러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장쭤린과 귓속말을 나눈다. 얼마간 고개를 주억거리며 아버지의 말을 듣던 그가 결론을 내린다.

“일본 측과 공동으로 조사할 것을 제안하오. 그러니 당분간······”

장쉐량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찬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게 더 빠를 거요.”

“주찬 두목! 경솔하게 행동하지 마시오.”

장쉐량의 만류에도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회장을 빠져나간다. 소장파 두 명도 그녀의 뒤를 따른다. 장쭤린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쥐고 있던 잔을 내던진다. 그러곤 일본 대표를 쏘아본다.

“이제 공은 당신들한테 넘어갔소이다. 만약 저 등자가 사실이라면 나도 좌시하지 않겠소. 조만간 만주평의회의 회원들이 납득할 만한 물증을 갖고 오기 바라오.”


두 손으로 탁자를 내려친 장쭤린은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연회장을 벗어난다. 뒤미처 헛기침을 하며 눈을 흘기던 회원들마저 자리를 떠난다. 요시무라와 헌병대장 그리고 영사만이 남아 입을 비죽이 내민 채 사태의 경중을 헤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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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134화 악마의 최후 +3 19.07.12 80 1 16쪽
133 133화 고귀한 죽음 +1 19.07.11 46 1 12쪽
132 132화 무지개 +1 19.07.10 46 1 13쪽
131 131화 차관협정(借款協定) +2 19.07.05 55 1 14쪽
130 130화 반공포로석방 +1 19.07.01 61 2 13쪽
129 129화 한일회담 +1 19.06.29 73 2 15쪽
128 128화 폭탄테러 +1 19.06.26 77 2 13쪽
127 127화 카츄샤 +1 19.06.24 71 2 13쪽
126 126화 의사 왕룽 +1 19.06.23 69 3 17쪽
125 125화 빅터 한 재단 +2 19.06.19 87 3 13쪽
124 124화 인천상륙작전 +1 19.06.13 106 2 15쪽
123 123화 메모리 가든 +1 19.06.12 83 2 15쪽
122 122화 겹생 +3 19.06.10 82 2 16쪽
121 121화 하와이 +1 19.06.07 91 3 14쪽
120 120화 소령 맥나마라 +4 19.06.06 95 2 15쪽
119 119화 한초희 +1 19.06.05 97 2 14쪽
118 118화 맥아더 원수 +1 19.06.04 95 2 14쪽
117 117화 기만방송 +1 19.06.03 92 2 13쪽
116 116화 코리안 커넥션 +1 19.06.01 102 2 12쪽
115 115화 잠수함 +1 19.05.30 131 2 13쪽
114 114화 6.25 전쟁 +1 19.05.29 112 2 12쪽
113 113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특명 1호 ‘폭풍’ +1 19.05.21 104 2 11쪽
112 112화 금괴수송작전 +1 19.05.19 131 2 10쪽
111 111화 '암호명 A-1' +1 19.05.18 95 2 13쪽
110 110화 악연(惡緣) +1 19.05.17 94 2 14쪽
109 109화 마지막 미션 +1 19.05.16 95 2 12쪽
108 108화 애치슨 라인 +1 19.05.15 94 2 12쪽
107 107화 연적(戀敵) +1 19.05.15 104 2 12쪽
106 106화 독살(毒殺) +1 19.05.14 97 2 12쪽
105 105화 마돈나 다방 +2 19.05.13 106 2 15쪽
104 104화 한국은행 +1 19.05.11 106 2 14쪽
103 103화 비밀거래 +1 19.05.10 122 2 12쪽
102 102화 남미이주작전 +1 19.05.10 121 2 13쪽
101 101화 트루먼 독트린 +1 19.05.10 96 2 11쪽
100 100화 숙명의 라이벌 +1 19.05.10 102 3 18쪽
99 99화 Jane Doe +2 19.05.10 97 2 13쪽
98 98화 앙숙, 이승만과 김구 +1 19.05.10 101 2 12쪽
97 97화 반도호텔 +1 19.05.10 94 2 13쪽
96 96화 좌익과 우익 +1 19.05.09 96 2 13쪽
95 95화 조선인민공화국 +1 19.05.09 98 2 17쪽
94 94화 일본패망(日本敗亡) +1 19.05.09 99 2 12쪽
93 93화 원자폭탄 +1 19.05.09 96 2 13쪽
92 92화 김일성 +1 19.05.09 99 1 14쪽
91 91화 독수리 작전 +1 19.05.09 98 1 14쪽
90 90화 이승만 +1 19.05.09 96 1 14쪽
89 89화 비밀요원 나타샤 +1 19.05.09 89 2 15쪽
88 88화 OSS(미국전략사무국) +2 19.05.09 94 2 16쪽
87 87화 승전(勝戰) +1 19.05.09 91 2 14쪽
86 86화 진주만공습 +1 19.05.08 92 1 16쪽
85 85화 갈라예프 +2 19.05.08 88 2 16쪽
84 84화 채권(債券) +1 19.05.08 96 2 11쪽
83 83화 다카키 마사오 +1 19.05.08 107 2 12쪽
82 82화 광복군(光復軍) +1 19.05.08 89 2 13쪽
81 81화 육군정보학교 +2 19.05.08 89 2 11쪽
80 80화 홍콩행 +1 19.05.07 94 3 13쪽
79 79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3 19.05.07 89 2 12쪽
78 78화 김원봉과 김구 +1 19.05.07 87 2 16쪽
77 77화 까레이스키 +3 19.05.07 85 2 12쪽
76 76화 탈출(脫出) +1 19.05.07 92 3 9쪽
75 75화 박정희와 최태민 +1 19.05.07 96 2 9쪽
74 74화 중일전쟁(中日戰爭) +1 19.05.07 91 2 13쪽
73 73화 강제이주 +3 19.05.06 86 1 12쪽
72 72화 마루타 +1 19.05.06 85 1 12쪽
71 71화 막후 실력자 +1 19.05.06 85 2 13쪽
70 70화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등장 +1 19.05.06 85 1 15쪽
69 69화 천황결사옹위청년단 +1 19.05.05 89 1 15쪽
68 68화 후흑학(厚黑學) +1 19.05.05 89 1 13쪽
67 67화 경몽장(耕夢莊) +1 19.05.05 89 1 12쪽
66 66화 학교(學校) +1 19.05.05 91 1 8쪽
65 65화 국제연맹(國際聯盟) +1 19.05.05 91 1 19쪽
64 64화 나타샤 +1 19.05.05 91 1 11쪽
63 63화 보고서 +1 19.05.05 92 1 11쪽
62 62화 시인과 영웅 +2 19.05.04 101 2 15쪽
61 61화 탄생의 비밀 +2 19.05.04 92 2 18쪽
60 60화 국경수비대 +1 19.05.03 91 2 13쪽
59 59화 제네바협약 +4 19.05.03 95 2 18쪽
58 58화 명백한 운명 +1 19.05.03 91 1 16쪽
57 57화 미두취인소(米豆取人所) +1 19.05.03 93 1 12쪽
56 56화 생포(生捕) +1 19.05.02 92 2 13쪽
55 55화 참패(慘敗) +1 19.05.02 91 2 14쪽
54 54화 향수병(鄕愁病) +1 19.05.02 91 2 18쪽
53 53화 음악회 +1 19.05.02 92 2 18쪽
52 52화 들개 진구 +1 19.05.02 95 2 24쪽
51 51화 가락지 +3 19.05.02 94 2 26쪽
50 50화 덫 +1 19.05.01 92 1 28쪽
49 49화 추격전(追擊戰) +1 19.04.30 91 2 35쪽
48 48화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1 19.04.30 96 2 39쪽
47 47화 광휘와 빅터 +3 19.04.29 91 2 33쪽
46 46화 특별수사본부(特別搜査本部) +4 19.04.29 91 2 41쪽
45 45화 만저우리(滿洲里) +4 19.04.28 88 3 35쪽
44 44화 폭풍전야(暴風前夜) +1 19.04.28 89 3 37쪽
43 43화 Boys, be ambitious! +1 19.04.27 91 2 39쪽
42 42화 만주국(滿洲國) +5 19.04.27 94 2 38쪽
41 41화 만몽영유계획(滿蒙領有計劃) +1 19.04.26 93 3 25쪽
40 40화 재회(再會) +1 19.04.26 91 3 30쪽
39 39화 빅터 한 +1 19.04.25 93 3 49쪽
38 38화 박진만 +2 19.04.25 99 3 45쪽
37 37화 정보국 5과 +3 19.04.24 108 3 51쪽
36 36화 마적(馬賊) 왕리 +2 19.04.24 104 3 49쪽
35 35화 삼두정치(三頭政治) +2 19.04.23 103 3 42쪽
34 34화 주찬 +1 19.04.23 103 3 51쪽
» 33화 만주야사(滿洲野史) +2 19.04.22 104 3 50쪽
32 32화 서광휘 +2 19.04.22 104 3 47쪽
31 31화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 +2 19.04.21 119 4 47쪽
30 30화 미쓰야협정(三矢協定) +4 19.04.21 108 4 46쪽
29 29화 출산(出産) +3 19.04.20 115 4 43쪽
28 28화 밀항(密航) +2 19.04.20 109 4 45쪽
27 27화 불령선인(不逞鮮人) +1 19.04.19 110 4 43쪽
26 26화 님의 침묵 +1 19.04.19 114 4 48쪽
25 25화 이민(移民) +2 19.04.18 127 4 39쪽
24 24화 회자정리(會者定離) +2 19.04.18 114 5 44쪽
23 23화 여걸(女傑) 수잔 +5 19.04.17 114 4 46쪽
22 22화 3·1 만세운동 +5 19.04.17 117 4 44쪽
21 21화 천적(天敵) +1 19.04.16 117 5 49쪽
20 20화 아카키 타이요우(赤木太陽) +4 19.04.16 122 5 52쪽
19 19화 망국(亡國) +4 19.04.15 130 3 49쪽
18 18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3 19.04.15 132 3 46쪽
17 17화 한성진격작전(漢城進擊作戰) +4 19.04.14 133 4 49쪽
16 16화 의병전쟁(義兵戰爭) +4 19.04.14 133 4 43쪽
15 15화 춘투(春鬪) +5 19.04.13 143 3 47쪽
14 14화 암살미수(暗殺未遂) +4 19.04.13 150 3 37쪽
13 13화 결혼(結婚) +3 19.04.12 225 6 42쪽
12 12화 돈버거 +9 19.04.12 204 6 44쪽
11 11화 대한제국(大韓帝國) +2 19.04.11 227 7 45쪽
10 10화 김출세(金出世) +7 19.04.11 247 8 42쪽
9 9화 낙향(落鄕) +4 19.04.10 266 7 42쪽
8 8화 혁파안(革罷案) +4 19.04.10 277 8 41쪽
7 7화 증기자동차 +2 19.04.09 323 11 22쪽
6 6화 2차 사행(使行) +2 19.04.09 327 12 24쪽
5 5화 견문록(見聞錄) +5 19.04.08 368 13 19쪽
4 4화 북경(北京) +1 19.04.08 461 11 19쪽
3 3화 만남 +1 19.04.08 564 12 15쪽
2 2화 1차 사행(使行) +2 19.04.08 824 13 14쪽
1 1화 파락호(破落戶) 이하응 +17 19.04.08 1,584 1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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