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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공모전참가작 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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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최장르
작품등록일 :
2019.04.08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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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2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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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23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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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쪽

34화 주찬

님의 침묵




DUMMY

282.


만주의 겨울은 혹독하다. 나흘 동안 내린 폭설 때문에 기온은 급락하고 교통이 불가능하다. 엔진이 얼어붙으면서 기동력을 상실한 관동군은 모든 군사작전을 잠정 보류한다. 소강상태에 접어든 만주는 잠시 불안정한 휴식을 취한다.

특무대를 편성하라는 특명을 받은 광휘는 부대원을 선발하여 동계 훈련을 실시한다. 그러나 어른 키만큼 내린 폭설에 발목이 잡힌다. 동사자가 속출하고 동상이 만연한다. 지휘부는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훈련을 중단시킨다.

광휘는 파오에서 동계 훈련을 검토하고 있다. 전령이 눈을 뒤집어쓰고 파오 안으로 들어선다.


“대위님! 본부로 오시라는 명령입니다.”

“무슨 일인데?”

“사령장님이 직접 명하셔서 내막은 모르겠습니다.”

“알았다.”


그는 외투를 입고 파오를 나선다. 그는 펑펑 내리는 눈을 헤치며 희미한 불빛이 어른거리는 본부로 향한다. 지청천 사령장과 김도선 참모장이 그를 맞이한다.


“특무대 사기가 많이 떨어졌지?”

지청천이 그에게 찻잔을 건넨다.

“동사한 대원들을 암매장했습니다. 날이 풀리는 대로 양지에 묻어주기로 했습니다.”

“수고가 많네.”

“동계훈련으로 더 이상의 대원을 희생시켜서는 안 되네.”

“네!”

“김원봉 대장을 알겠지?”

사령장이 비스듬히 고개를 들고 상대와 눈을 맞춘다.

“약산 선생님이 아니십니까?”

“그렇다네. 김 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네. 장제스와 나는 일본군을 공동의 적으로 삼는 전략적 제휴에 동의한 바 있네. 그리고 미쓰야와 협정을 맺고 토벌대를 조직하여 독립군을 잡아들인 장쭤린도 우리와 원수지간이 아니던가? 앞으로 대일본무장투쟁의 전략을 전면 수정할 때가 왔네. 솔직히 관동군을 상대하기에 우리 병력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야. 따라서 국민당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일본제국을 협공한다면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지.”

숨을 고른 지청천이 이내 말을 덧붙인다.

“자네도 알다시피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한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시작하면서 관동군과 군벌은 극도로 긴장하고 있다네.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푸군사학교를 졸업한 김 대장은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이미 혁명군과 함께 북벌의 선봉에 섰네. 따라서 이번에 우리도 김 대장의 요청대로 혁명군에 군대를 파견할 생각이야. 자네가 이끄는 특무대를 선발하려고 하는데, 귀관의 생각은 어떤가?”

“충성맹서를 한 이상 사령장님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사령장은 잠시 참모장과 시선을 교환한 뒤 말을 잇는다.

“병력 파견에 관하여 김 대장과 협의하기 위해 참모장을 베이징에 급파하기로 했네. 자네가 참모장과 함께 다녀와야겠어.”

사령장의 설명은 상대의 동의를 구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이미 내정된 터라 대안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그는 토를 달지 않는다.

“준비하겠습니다.”



283.


베이징에 도착한 도선과 광휘는 황급히 자금성 서쪽에 자리한 원창 후통으로 모습을 감춘다. 주택가가 밀집한 후통은 거미줄처럼 골목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어 현지인조차도 가끔 길을 잃곤 한다.

후통에 거점을 마련한 박용만은 본격적으로 ‘대본공사사업’에 박차를 가한다. 정의부 사령장의 밀지를 품고 나타난 도선을 보곤 그가 반갑게 맞이한다.


“김원봉 동지한테 듣기로 정의부 사령장의 밀서가 곧 도착한다고 들었는데, 자네가 올 줄을 꿈에도 몰랐네.”

용만은 도선을 격하게 끌어안는다.

“친구! 이게 얼마만인가? 서양 물을 먹더니만 영국신사가 다 됐군!”

그는 말쑥한 정장차림을 한 용만을 위아래로 훑어본다.

“아무렴 상하이의 화류계를 평정한 ‘상하이 킴’만 할까? 하하핫!”

도선은 용만과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포옹을 나눈 후 광휘를 소개한다.

“나와 동행한 특무대 서광휘 중위일세!”

용만은 광휘의 눈동자를 얼마간 주시한다. 그러곤 머리채를 흔들며 잠시 잊고 있던 일을 떠올린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회포는 나중에 풀도록 하세. 대장님이 기다리시네. 자, 이리로······.”


용만은 두 사람을 안가로 안내한다. 비좁은 복도를 돌아 2층 계단을 오른다. 뒤를 살피던 용만이 도선에게 고갯짓을 한다. 경호원 두 명이 지키는 밀실로 도선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용만이 광휘에게 손짓을 보낸다.


“자, 우리는 사무실로 가서 기다리지.”

문을 열고 사무실에 들어간 두 사람은 얼마간 말이 없다. 먼저 용만이 의자에 비스듬히 앉으며 광휘에게 앉기를 권한다.


밀실에 들어선 도선은 원봉과 굳은 악수를 나눈다.

“먼 길을 오시느라 욕보셨소이다. 자, 이리로 앉으세요.”

원봉은 자리에 앉으며 인사말을 건넨다.

“물경 일백만 원에 육박하는 일본제국 최고의 현상금이 내걸린 김 대장님을 뵙겠다는 일념으로 힘들 줄도 모르고 내처 달려왔습니다. 하하핫!”

도선의 넉살에 긴장감이 완화된다.

“한쪽에서는 나를 잡겠다고 난리가 아닌데, 이렇게 반겨주는 동지가 있다니 살맛납니다. 하하핫!”

부관이 지도를 펼친다. 두 사람은 웃음기를 거둔 채 머리를 맞댄다.

“북벌이 진행될수록 군벌의 병력들이 이탈하고 있소. 장쭤린에 등을 돌린 일부 마적들이 벌써 혁명군에 가담할 의사를 타진해왔소. 만주진입작전이 개시되면 러산산맥을 끼고 만주로 출병할 계획이오. 정의부 군대는 마적과 합세하여 산해관으로 출동할 관동군의 선봉을 막아주셨으면 하오.”


두 사람이 밀담을 하는 동안 옆 사무실에서는 용만과 광휘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전설의 영웅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다니 영광이네.”

“과찬이십니다.”

“한인서를 아나?”

광휘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제 동생입니다만······”

“정말 형제의 인연이 박하구만. 보름만 일찍 왔더라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광휘는 턱을 모로 틀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제 동생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용만은 책상으로 다가간다. 그러곤 서랍에서 서류뭉치를 꺼낸다.

“이걸 보게나.”


서류뭉치를 건네받은 광휘는 사진을 발견하곤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가 손에 쥔 사진 속에는 인서와 수잔 그리고 부쩍 큰 헨리가 정답게 웃고 있다. 그리고 다음 사진을 본 순간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는 눈을 되록거리며 미천골을 떠올린다. 아련한 기억이 맹탕 허공에서 가물거린다. 수잔이 들고 다니던 카메라를 눈여겨보지 않았을 뿐이지, 그녀의 요구에 따라 마당 앞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한 때가 선연히 떠오른다.

평상에 앉아 수줍게 웃는 어머니와 근엄함 속에서도 미소를 짓는 아버지. 그리고 손사래를 치면서 카메라로 달려드는 어렴풋한 사내를 보면서 제 모습이란 걸 확인한 그는 참았던 눈물을 터트린다.


“제 동생이 확실하군요.”

“인서 군이 춘천 소식을 하도 궁금해 해서 내가 알아봤네.”

‘춘천’이란 단어에 귀가 쫑긋한 그가 눈물을 훔치며 되받는다.

“부모님은 어찌 지내시는지요?”

“백방으로 알아봤는데······, 어머님은 돌아가신 걸로 추정되네. 그리고 아버님은 어린 딸을 데리고 춘천을 떠났다고만 전해 들었네.”

“잘못 아신 게 아닙니까? 어린 딸이라뇨?”

광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미천골에 사람까지 보내서 확인한 결과라네. 더 이상의 추측은 나로서도 불가능하네.”

광휘가 사진 여러 장을 보고 있을 때 노크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경호원이 용만에게 다가가 귀띔한다.

“알았네.”

경호원이 나가고 난 뒤 그는 광휘에게 말을 전한다.

“김 대장님이 뵙고 싶다고 하는군.”

“그런데······, 이 건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이르다 뿐인가. 인서 군이 혹시 자네를 만나면 전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네.”


밀실에서 작전을 숙의하던 원봉은 용만과 광휘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반갑게 맞이한다.

“영혼마저 홀리는 악귀처럼 생겼다고 회자되던데······, 전설 속 영웅치고는 미남이구만! 반갑네! 나 김원봉이야!”

광휘가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한다.

“수많은 전공을 남기신 대장님을 뵙게 되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많이 나누어 주십시오.”

“뭘 나눠달란 말인가?

“대장님의 모든 것을 닮고 싶습니다.”

“일천한 삶을 살아온 내가 살아있는 전설한테 나눠 줄 게 뭐가 있겠나? 오히려 이번 작전에서 자네의 무용을 보게 될 내가 감사할 따름이지.”

“독립의 밀알이 되겠습니다.”

“그럼, 자네 같은 용사가 있어서 조국의 미래는 밝다네. 오늘 같은 날 한 잔 안할 수 없지.”


원봉이 구둣발로 마루를 세 번 구른다. 잠시 후 경호원들이 술이 든 항아리를 들고 들어온다. 얼추 나이가 비슷한 원봉과 도선, 용만은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흥겨운 술자리를 갖는다.

슬그머니 밀실을 나선 광휘는 복도를 지나 옥상으로 올라간다. 적막한 민가에 달빛만이 교교하다. 그의 손에 쥐어진 사진 속에는 미라가 수줍게 웃고 있다. 총총히 박힌 별을 바라보던 그의 눈가에 물기가 촉촉하다. 나직이 ‘어머니’를 되뇌던 그의 뺨에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284.


청 황실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서구의 침략에 환멸을 느낀 쑨원(孫文)은 민족(民族), 민권(民權), 민생(民生)의 삼민주의사상(三民主義思想)의 기치를 내걸고 혁명을 주도한다. 하지만 젊은 혁명가의 꿈은 번번이 좌절된다. 거듭되는 봉기의 실패로 해외로 떠돌던 그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온다.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화교와 해외로 망명한 혁명 1세대는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를 결성하는 자리에서 쑨원을 지도자로 추대한다. 일본에서 그를 따르던 유학생들은 귀국하여 청조(淸朝)를 전복시키고, 서구 열강을 추방하며, 토지를 재분해할 것을 골자로 한 민주주의공화국의 건국이념의 초안을 다듬는다.

1911년 10월 우한(武漢)에서 봉기한 혁명의 횃불은 양쯔 강 유역을 따라 급속도로 번져간다. 한 달 만에 모든 성이 혁명파에 호응하여 청조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다. 1911년 12월 25일 쑨원은 그토록 그리던 조국의 땅을 밟는다. 14개 성(省)의 대표들로부터 대총통으로 선출된 그는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의 성립을 만방에 공포한다. 아울러 그는 공포식장에서 정부의 실권자인 총리대신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통 큰 협상안을 제안한다.


쑨원은 황제를 퇴위시키고 공화국 정부를 구성할 것과 수도를 난징(南京)으로 천도할 것을 조건으로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의 직을 이양하겠다고 호언한다. 이미 망조가 든 나라의 실질적인 권력자는 쑨원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하지만 쑨원과 위안스카이의 거래는 오래가지 않는다.

권력의 사냥꾼은 이상향을 꿈꾸는 혁명가의 약점을 파고든다. 사실 쑨원의 역량으로는 닳고 닳은 위안스카이를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병력도 부족할뿐더러 내란이라도 나면 서구 열강은 내정을 간섭하려 들 것이 틀림없다. 쑨원은 불가피하게 대총통의 직을 이양하면서까지 불안한 국내정세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굵직한 현안을 양보한다.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폐위시킨 위안스카이는 1912년 3월 임시총통에 취임한다. 그러곤 난징(南京)의 수도를 베이징(北京)으로 옮긴다. 이듬해 10월 초대 대총통에 오른 그는 다수당인 국민당을 해산시키고 열강과 차관협정을 맺어 정적을 제거한다. 또한 선거법을 개정하여 독재체제를 구축한다.


이상주의자가 꿈꾸던 신해혁명(辛亥革命)은 현실의 난관에 부딪혀 끝내 무산되기에 이른다. 한마디로 노련한 권력자와 노회한 정객들의 꼭두각시놀음에 들러리로 나선 격이다. 혁명에 실패한 쑨원은 다시 망명길에 오른다. 와해된 혁명세력은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을 조직하여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소수 정파로 전락한다.

권력의 미망(迷妄)에 사로잡힌 위안스카이는 1914년 새로운 왕조를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르려는 원대한 꿈을 품는다. 하지만 그를 지지하던 장군들이 새로운 독재체제의 탄생을 우려하면서 그의 오만한 꿈은 수포로 돌아간다. 정치적 상실감에 빠져 시름시름 앓던 그는 병을 얻어 사망한다.


일찍이 마적단을 탈퇴한 장쭤린은 청나라 군부에 투항하여 위안스카이로부터 장군의 칭호를 받은 바 있다. 대부 격인 위안스카이가 급사하자 장쭤린은 만주를 주름잡는 군벌로 성장한다. 중앙무대인 베이징에서까지 성공가도를 달리던 장쭤린은 더 이상 말을 타며 약탈을 일삼는 마적단의 두목이 아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관동군은 장쭤린을 주시하기 시작한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가 그를 찾아 일명 ‘미쓰야 협정’을 맺은 까닭도 중앙무대와 연이 닿는 그의 배경과 궤를 같이 한다.


위안스카이가 죽은 1916년으로부터 국공합작군이 북벌에 나선 1926년까지 중국은 전대미문의 무정부상태에 봉착한다. 혁명세력은 중앙권력의 공백을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한계점을 드러낸다. 각 지역의 맹주로 군림하던 군벌들이 난립하면서 무주공산이 된 중원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민의(民意)와 사상(思想)과는 무관하게 정치적 셈법과 경제적 득실에 따른 합종연횡이 횡행한다.

군벌의 부상은 위안스카이 정권이 빚어낸 불가피한 역사적인 산물이다. 부패와 무능에 빠진 중앙정부는 광대한 중국의 치안을 관리할 의지도 힘도 부족했다. 설령 지방정부에게 군량미를 지원한다손 치더라도 부패한 관리의 배만 불리는 꼴이다. 중앙정부는 궁여지책으로 지방 권력자에게 군사권과 조세권을 부여한다. 징발한 세금으로 군대를 양성하여 자치하라는 일종의 통치권을 인정한 셈이다. 황제도 없는 마당에 자치권까지 획득한 군벌들은 외세와 결탁하여 국부를 유출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군벌로는 영국과 미국을 등에 업은 쑨촨팡(孫傳芳)이 이끄는 즈리파(直隸派)와 차관까지 받으며 데라우치(寺內) 내각과 결탁한 안후이파(安徽派) 그리고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토벌대로 활약한 바 있는 장쭤린(張作林) 휘하의 펑톈파(奉天派)가 대표적이다.

1920년에 벌어진 안후이파와 즈리파 간의 안후이즈리전쟁(安徽直隷戰爭)에서 패배한 안후이파는 종족을 감춘다. 연합세력을 형성한 즈리파(直隸派)와 펑톈파(奉天派)는 속칭 북양정부(北洋政府)로 불리며 베이징에 똬리를 튼 채 서구 열강을 상대하며 무주공산의 맹주임을 자처한다.


중국으로 복귀한 쑨원은 1916년 광둥(廣東)에서 국민당정부를 수립한다. 그는 남부의 5개 군벌과 연합하여 중화민국을 건립하고자 한다. 그러나 남부 군벌과 서구 열강은 베이징을 장악한 북양정부만 상대하며 국민당정권을 애태운다. 1922년 6월 쑨원은 남부 군벌에게 배신을 당해 광저우에서조차 쫓겨나는 신세로 전락한다.

무정부상태가 이어지면서 규범과 질서가 붕괴되는 총체적인 난국이 전국을 강타한다. 지식층은 무정부상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마르크스-레닌사상’을 적극 수용하기에 이른다.

사회 전반에 ‘마르크스-레닌사상’이 유포된 결과 1921년 7월에 중국공산당이 결성된다. 그 막후에는 줄곧 중국에서 강대국에 밀려 고전하던 소련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다. 소련은 상하이에 고립된 쑨원에게도 손을 내민다. 서구 열강으로부터 거듭 퇴짜를 맞은 쑨원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련의 원조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소련이란 공통의 후원자를 둔 국민당과 공산당은 북방의 군벌과 그 뒷배를 봐주는 제국주의를 척결하기 위해 1924년 1월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을 결성한다. 쑨원은 혁명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공산당원일지라도 개인자격으로 가입할 수 있도록 국민당의 문호를 개방한다. 마오쩌둥(毛澤東)을 포함한 공산당원 4명이 중앙집행위원의 후보로 선출된다. 이로써 ‘반(反)제국주의, 반(反)봉건주의, 반(反)군벌’이란 국공합작(國共合作)의 공동 목표가 수립된다.

중국의 통일을 위하여 군대가 절실했던 쑨원은 소련의 원조로 1924년 광저우에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를 설립한다. 모스크바에서 군사 교육을 받고 귀국한 서른일곱 살의 청년 장교 장제스(蔣介石)가 초대 교장으로 임명된다.

국민혁명군과 든든한 동맹국까지 갖춘 쑨원은 중국 통일이 눈앞에 온 듯 한껏 고무된다. 위기의식을 느낀 북양정부는 국민당과의 동맹을 타진하기 위해 쑨원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인다. 북양정부의 미온적인 자세로 협상은 끝내 결렬된다.

쑨원은 지병이던 간암이 악화되어 1925년 3월 12일 예순 살의 나이로 베이징의 병원에서 사망한다. 그는 눈을 감기 전에 장제스에게 ‘중국을 구하라’라는 유언을 남긴다. 장제스는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지도자의 반열에 오른다.


국공합작으로 혁명에 가속도가 붙은 장제스는 광둥성과 광시성을 점령하여 국민당에 복속시킨다. 힘을 받은 그는 마침내 중국의 통일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북양정부에 대하여 ‘북벌(北伐)’이라는 일종의 군사작전을 감행한다.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전개된 북벌(北伐)은 신해혁명 이후 자중지란에 빠져 답보상태에 머물고 있는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후속조치다.

북양정부를 이끄는 양대 군벌인 쑨촨팡(孫傳芳)이 이끄는 즈리파(直隷派)와 장쭤린(張作林)이 지휘하는 펑톈파(奉天派)는 북벌군에 맞서 거세게 저항한다. 그러나 부패하고 서로 대립하던 군벌들은 북진하는 북벌군에게 연패를 당하며 조직이 와해되는 위기에 처한다. 국공합작으로 조직된 북벌군이 승승장구할수록 노동운동과 농민운동도 급속도로 확산된다.

1926년 북양정부의 양대 산맥 가운데 하나인 즈리파(直隷派)는 장제스의 불벌군에게 완패를 당하고 소멸한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토벌대로 활약하면서 세력을 확장한 장쭤린은 처세의 달인답게 북벌군의 집중포화에도 용케 살아남는다.

1927년 베이징 잔류에 성공한 그는 서구 열강의 묵인 하에 공사관이 밀집한 구역으로 병력을 투입하여 혁명군의 배후인 소련을 탄압한다. 또한 일본과 결탁하여 베이징을 장악한 뒤 북양정부의 원수(元帥)로 등극한다.

우한(武漢)에 좌파 성향의 혁명정권이 수립된다. 좌파정권에 위협을 느낀 장제스는 1927년 4월 상하이를 거점으로 반공(反共) 우파 쿠데타를 감행한다. 이로써 국공합작은 결렬되고, 공산당은 불법단체로 낙인찍힌다.

졸지에 혁명의 파트너를 잃은 공산당은 토지혁명(土地革命)을 내걸고 농촌지역을 대상으로 세력 확장에 나선다. 장시성(江西省)에서 ‘중화소비에트’를 결성한 마오쩌둥(毛澤東)은 장제스의 난징(南京)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며 사실상 ‘제1차 국공합작’은 막을 내린다. 한솥밥을 먹던 어제의 동지는 더 이상의 동지도 친구도 아닌, 그저 적일뿐이다.

국공합작이 결렬된 1927년 7월 이후 중국은 10년에 걸친 내전에 돌입한다. 국민당의 추격을 피하며 장장 1만 5,000킬로미터의 대장정(大長征)에 나선 공산당은 정치적 사업에서 크게 득을 본다.

확고한 지도자로 자리매김한 마오쩌둥은 중국 전역을 돌며 공산주의를 전파하는 데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대장정(大長征)’이란 영웅적인 투쟁에 고무된 청년들이 대거 공산당에 입당하면서 세를 확장하는 데에도 기여한다.


장제스의 혁명군과 장쭤린의 군벌이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베이징을 두고 대치할 무렵 일본 본토를 발칵 뒤집힐 만한 이상 징후가 감지된다. 히로히토가 일본의 제124대 천왕으로 오른 이듬해인 1927년에 시중은행의 10퍼센트가 문을 닫는 이른바 ‘쇼와금융공황(昭和金融恐慌)’이 일본열도를 강타한다.

공황의 발생 요인은 두 가지로 축약된다. 외부적인 요인으로는 유럽 전체가 포화에 뒤덮인 제1차 세계대전을 들 수 있고, 내부적인 요인으로는 1923년 발생한 관동대지진이 꼽힌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반사 이익을 본 일본은 경공업 중심에서 중공업으로 전환하는 산업혁신을 경험하면서 강대국으로의 부상을 꿈꾼다. 그러나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결정되는 안정적인 경제성장이 아닌 외부의 수요에 의한 공급은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기 마련이다.

1920년부터 과열된 투자가 한풀 꺾이면서 물가가 폭등하고 주가가 폭락한다. 이른바 ‘반동공황(反動恐慌)’의 직격탄을 맞은 일본은 공황상태에 빠진다. 게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하면서 경제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의 길로 추락한다.

미증유의 대지진으로 경제가 파탄이 난 일본 정부는 부랴부랴 ‘재난 극복용 특별어음’이란 명목으로 특별자금을 시중에 방출한다. 특별어음의 규모가 급증하면서 통제가 불가능하게 되자 국회는 국채를 발행하여 어음을 정리하고자 한다. 하지만 대만은행을 통해 긴급 수혈한 다량의 자금이 지진으로 피해를 본 기업보다는 여당의 비호를 받는 ‘스스키 상회’란 대기업에 집중된 사실이 밝혀진다.

발끈한 야당은 자금의 정확한 규모와 지원 기업의 명단을 제출하라며 정부와 여당을 상대로 압박한다. 도쿄의 은행들이 지급불능에 빠졌다는 대장성 장관의 폭탄 발언으로 금융가는 발칵 뒤집힌다. 예금을 인출하려는 인파가 몰려들면서 은행은 줄줄이 파산한다. 정경유착의 대표적인 ‘스스키 상회’도 문을 닫기에 이른다.

일본열도를 강타한 금융공황은 조선에까지 영향을 미쳐 은행 휴업령이 발동된다. 궁지에 몰린 내각이 총사퇴하고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특별자금지원책을 발표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싶다. 하지만 시중에 풀린 막대한 자금은 고스란히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여 사회 전반에 경기 악화를 초래한다.

돈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봉급생활자들은 ‘궁민(窮民)’으로 전락하며 도시의 빈민촌으로 몰려든다. 설상가상으로 ‘쇼와금융공황(昭和金融恐慌)’은 1929년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불어 닥친 세계 대공황(大恐慌)까지 이어진다. 자원이 빈약한 일본 정부는 새로운 돌파구로 자원이 무궁무진한 만주를 선택하여 식민정책에 사활을 건다.



285.


1905년 러일전쟁 이후 관동도독부가 설치되면서 일본은 만주개척에 심혈을 기울인다. 당시의 만주는 권력의 암투가 진행되던 베이징정권으로부터 외면을 받던 시기다. 권력의 심층부가 등한시한다는 의미는 어느 정도 자치가 허용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청조(淸朝)가 몰락하던 1912년의 만주(滿洲)는 마적단을 이끄는 양대 파벌 왕표와 장쭤린이 분할하여 통치하는 형국이다. 말과 함께 살아온 마적단은 기마민족의 후예답게 약탈경제를 근간으로 삼는다. 기동력을 확보한 그들은 거칠 것 없이 만주 초원을 무대로 세력을 확장한다. 그들의 복속을 받지 않은 이상 마적단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무참한 살생과 파괴만이 난무한다.

왕표는 죽음의 사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며 공포의 화신으로 떠오른다. 그에게는 혈기왕성한 다섯 명의 아들이 있다. 어릴 적부터 말 위에서 젖을 먹고 자란 탓인지 모두들 호전적이고 성격이 과격하다. 다만 막내아들 왕리만은 성격이 온순하고 총기가 남달라 주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다. 마적단의 장래를 걱정하던 왕표는 일찌감치 왕리를 선교사가 운영하는 교육기관에 입학시켜 신학문을 배우게 한다.

왕표의 유일한 라이벌이던 장쭤린은 일찍이 중앙 진출을 꿈꾸며 한때 몸담았던 마적단을 전격 탈퇴한다. 러일전쟁 당시 토벌대를 이끌며 비밀리에 일본 측에 가담한 그는 관동군과 끈끈한 유대를 이어간다. 권력지향적인 그는 더 이상 마적단의 두목이 아닌 중앙무대를 곁눈질하는 명실공이 만주의 막후 실력자로 부상한다. 청조가 쇠하던 무렵 급기야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위안스카이의 부름을 받은 그는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베이징 진출에 성공한다.

군벌로 급성장한 그는 장남 장쉐량을 전투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후사를 도모하고자 한다. 아버지의 후광을 입은 장쉐량은 펑톈(奉天)을 자주 드나들며 사전에 반란세력을 견제하는 치밀함을 보인다.

장쭤린은 대총통 위안스카이의 지지를 뒷배로 삼아 권력을 쥐락펴락한다. 만주에서 무역을 하거나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그의 허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는 국경무역에 있어 독점권을 행사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군벌은 신식무기를 운용하며 제법 군대체제를 갖춘다.

군벌의 장쭤린이 합법적 루트를 통해 통치자금을 마련한 반면에 마적단의 왕표는 밀수품과 아편을 거래하며 군자금을 챙긴다. 심지어 열차를 습격하거나 은행을 터는 약탈도 마다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장쭤린이 만주의 낮을 지배하는 통치자였다면, 왕표는 만주의 밤을 지배하는 권력자인 셈이다.

한때 만주를 놓고 왕표와 경쟁하던 장쭤린은 중원으로 진출하면서 만주 일부에 국한된 왕표와는 달리 둥베이(東北)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시킨다.

황제를 꿈꾸던 위안스카이가 병사를 한 다음에도 장쭤린의 야망은 굽힐 줄 모른다. 그는 1919년 펑톈(奉天) 독군 겸 성장이 되면서 동북의 실권을 거머쥔다. 훗날 관동군의 하청을 받고 토벌대로 활동하던 그는 마침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와 협정 테이블에 마주앉는 위치에까지 오른다.


장쭤린과 왕표가 만주를 분할할 즈음 펑톈(奉天)은 둥베이(東北)의 중심지로 떠오른다. 둥베이의 경제와 행정 그리고 모든 부의 원천은 펑톈을 중심권역으로 하여 각 지역으로 뻗어 나간다.

이 무렵 상하이에서 금융과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주운이 만주에 등장한다. 그의 출현은 펑톈의 성장 동력과 궤를 같이 한다. 만주의 무궁한 잠재력을 예견한 그는 ‘부흥은행(復興銀行)’이란 간판을 내걸고 과감히 신세계에 도전장을 내민다.

부흥은행은 날로 번창한다. 변변한 금융기관 하나 없이 경제활동을 해오던 많은 상인들이 앞 다투어 부흥은행으로 몰려든다. 보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웃돈까지 얹어준다는 데에야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상인들은 저마다 점방의 구들장 깊숙이 숨겨놓았던 돈궤짝들을 이고 부흥은행의 문턱을 넘나든다. 사장된 돈이 세상의 빛을 보기 시작하면서 펑톈은 황금기를 구가한다.

부흥은행은 하루가 다르게 점포를 늘리고 대부업에도 손을 댄다. 주운은 만주에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펑톈의 유력한 지도자로 부상한다. 군벌과 마적단이 권력을 바탕으로 만주를 통치하였다면, 그는 탄탄한 사업적 기반으로 만주를 주무르기 시작한다.

주운에게는 ‘찬’이란 외동딸이 있다. 주찬은 어려서부터 사내아이 틈에서도 골목대장을 도맡아했을 정도로 성격이 활발하다. 주운은 딸의 야생마의 기질을 항상 걱정했지만 거친 대륙의 환경에도 굴하지 않는 당찬 모습을 보곤 안도한다.

주운이 등장한 이후 만주는 2강 구도에서 3두체제로 권력이 분할되는 팽창의 시기를 거친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봉건적 체제에 경제장치가 도입되면서 만주는 바야흐로 근대적인 체제로 접어든다. 경쟁과 공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군벌과 마적단의 힘겨루기에 염증을 느낀 청년층을 중심으로 개방적이고 선명한 발전논리가 힘을 얻는다. 특히 만주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하여 자본의 공정성이 부각된다. 은행가로 성공한 주운은 청년층의 신망을 얻으며 만주의 희망으로 떠오른다.


펑톈을 중심으로 3두체계가 자리잡아갈 무렵 식민지 개척에 심혈을 기울이던 일본은 펑톈을 거점으로 대규모 투자에 나선다. 러일전쟁의 전리품으로 뤼순(旅順)과 다롄(大連) 외에도 창춘(長春)과 뤼순(旅順)을 연결하는 남만주철도부설권까지 획득한 일본은 일명 ‘만철(滿鐵)’로 불리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를 설립하여 식민지개척의 첨병역할을 수행한다.

‘만철’은 철도사업뿐만 아니라 광업, 제조업, 호텔업 등 광범위한 분야에 관여하며 만주식민화작업을 수행하는 핵심 기관의 역할을 도맡는다. ‘만철’이 건설한 철도 주변에는 일본자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1킬로미터마다 군인 15명을 배치하였는데, 이는 만주를 식민지화하려는 일본의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예라 할 수 있다.

동북 3성을 통치하는 장쭤린의 자금줄 역할을 하던 일본은 만주 투자에 혈안이 된다. 외국인 투자금의 70퍼센트를 차지한 일본은 만주의 신흥 권력자로 등장하면서 서서히 마수를 뻗치기 시작한다. 민족주의에 눈을 뜬 지식인과 청년층이 주운을 지지하게 된 원인도 일본의 투자독식과 장쭤린과의 결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등의 전승국은 파리에서 평화회의를 개최한다. 이 회의에서 전승국은 독일이 조차하고 있던 산둥성을 일본에 양도하라는 보고서를 채택한다. 1919년 5월 4일 톈안먼(天安門)에 집결한 학생들은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에 반대하는 집회를 연다.

베이징을 장악한 군벌정부는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을 체포하며 민주주의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다. 이른바 ‘5·4운동’으로 불리는 학생운동은 톈진(天津), 상하이(上海), 난징(南京), 우한(武漢)으로 확산된다. 국산품 장려와 일본상품불매를 외쳤던 애국계몽운동은 군벌정부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노동자 파업과 상점 폐쇄 등의 거센 민중운동으로 돌변한다. 각계 단체가 연합하여 만든 통일전선조직이 전국의 주요 도시에 우후죽순으로 탄생한다. ‘5·4운동’의 여파는 만주의 심장 펑톈에도 거세게 불어 닥친다.



286.


여고 졸업반인 주찬은 선교회에서 청년회활동을 하면서 역사의식에 눈을 뜬다. 서구풍이 유행하던 상하이와 달리 만주는 척박하고 촌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녀에게 만주는 사춘기란 성장통을 안겨준 변태(變態)의 땅이기 때문에 자라면서 더욱 애착을 갖게 된다.

새로운 의식에 기반을 둔 시각에서 만주가 유린되는 것을 목도한 그녀는 ‘5·4운동’ 이후 더욱 심화된 일본의 탄압과 약탈에 몸서리를 친다. 그것은 일종의 구태(舊態)에 저항하는 반동의 몸부림이자 신문물을 향한 동경의 손짓이다.

‘만주청년독립단’을 조직한 주찬은 경찰과 일 년이 넘도록 숨바꼭질을 하며 암약한다. 경찰도 물증이 없는 이상 펑톈 최고의 부호가 사는 저택을 막무가내로 수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녀가 다니는 학교도 사회지도층의 딸들이 다니는 만큼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다. 경찰은 번번이 눈앞에서 그녀를 놓치기 일쑤다.


집사와 세 명의 하녀가 시중을 드는 저녁자리는 부녀가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십여 명이 족히 앉고도 남을 커다란 식탁 위로 샹들리에의 불빛이 웨지우드 식기에 반사되어 사방으로 난반사된다.

주찬은 식사하는 내내 줄곧 고개를 들지 못한다. 식기에 부딪는 나이프와 포크의 마찰음이 평소의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거리가 먼 탓이다. 주운은 종종 나이프를 세워 접시의 바닥을 무두질하듯이 비벼대며 일부러 거슬리는 소음을 내곤 한다. 불편한 심기가 청각적으로 주찬에게 전달되기를 의도한 간접적인 의사표현이다.


“펑톈 경찰서 고등계 형사란 자가 찾아왔더구나.”

졸지에 관객이 된 집사와 세 명의 하녀가 동시에 침을 삼킨다. 일순 침묵이 흐르면서 괘종시계의 초침만이 또박또박 공간을 지배한다. 고개를 든 주찬이 초상화처럼 근엄한 인상을 짓고 있는 주운을 멀거니 쳐다본다.

“고등계가 뭐하는 곳이길래 아빠를 찾죠?”

주운은 고개를 모로 튼 채 딸을 빤히 응시한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모르는 게 많구나. 그럼 애비가 가르쳐주마. 경찰서에는 여러 부서가 있단다. 그중에서 고등계란 정치범과 사상범을 다루는 무시무시한 곳이란다.”

아버지의 의중을 파악한 주찬은 눈치를 보며 한 박자 늦게 반응을 보인다.

“정치범? 사상범? 칫! 사기꾼이나 위조범이면 몰라도 왜 왔대? 할 일이 대게 없나보네.”

주운은 시큰둥한 척하는 딸의 대꾸를 듣는 둥 마는 둥 곧바로 본론을 꺼낸다.

“너에 대해서 묻더구나.”

“나를? 왜요?”

“낸들 알겠니. 그래서 내가 이렇게 되묻을 수밖에 없구나. 통일전선조직과 연관이 된 거니? 그쪽만은 절대 안 된다. 사회주의계열이라 자칫 관련이 되면 애비 힘으로도 어쩔 도리가 없어. 앞으로 또 다시 고등계에서 찾아오면 특단의 조치를 취할 테니, 그리 알아!”

“아빠! 무슨 소리예요? 하나밖에 없는 딸을 그렇게 못 믿으세요? 그리고 특단의 조치라뇨?”

“영국 영사를 통해 이미 런던 기숙학교를 물색해두었다. 서류가 준비되는 대로 떠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둬!”

“아빠!”


주운은 딸을 본체만체하며 식당을 나선다. 거실까지 쫓아간 주찬은 아버지가 침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곤 한숨을 내쉰다. 얼마간 서성거리던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간다. 컹컹 짖던 개에게 다가간 그녀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정시킨다. 그러곤 저택의 창살문을 빼꼼 열고 바깥 동정을 살핀다. 길 건너편에서 지켜보고 있던 여학생 네 명이 재빨리 저택 안으로 숨어든다.

주찬과 친구들은 지하 창고에서 동이 틀 때까지 등사기를 밀며 일본의 만행과 만주의 독립을 호소하는 전단지를 제작한다.

이튿날 평온하던 펑톈은 곳곳에 뿌려진 전단지로 뒤숭숭한 하루를 맞이한다. 헌병대와 경찰들이 시내 곳곳에 배치되어 검문검색을 강화한다.



287.


베이징대학에 재학 중이던 왕리는 ‘5·4운동’이 일어나자 톈안문 앞에서 일본의 21조 요구 파기와 산동반도의 반환 그리고 친일 관료의 파면 등을 요구하며 반정부시위를 이끈다. 격렬한 시위 도중 체포된 그는 시위주동자로 분류되어 5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 한때 장쭤린과 마적단을 이끌며 호형호제하던 왕표는 왕리가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곤 한달음에 펑톈으로 달려간다.

이십대 중반에 상교(上校)로 임명된 장쉐량은 펑톈에 머물며 연락장교로 활동한다. 베이징에 상주하는 장쭤린과 연이 닿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환심을 사야한다는 게 펑톈 사교계에 떠도는 불문율이다. 군벌이 베이징을 장악한 이후로 그의 위세도 덩달아 치솟는다. 그의 거처에는 항상 민원을 들고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만주족은 예로부터 부족장의 아들이 태어나면 다른 부족장을 초대하여 대부로 삼는 풍습을 따른다. 따라서 장쭤린에게 왕리는 아들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장쉐량의 속내는 질투심으로 불타오른다. 총기가 남달랐던 왕리는 일찍이 베이징으로 유학을 간 수재였다.

총 쏘기와 사냥을 즐기던 장쉐량은 늘 말쑥한 차림에 창백한 얼굴을 한 왕리를 손톱 언저리에 난 거스러미처럼 불편한 존재로 여겨왔다. 두 살 터울이 나는 사이였지만 그는 어른들이 잠시 한눈을 팔 때면 으레 왕리를 동생으로 보살피기는커녕 종의 자식처럼 홀대했다. 툭하면 매질로 못살게 구는 것도 모자라 제 허물을 덮어씌우는 데에 방패막이로 삼았다.


“아니, 마적단을 이끌고 지역을 관리하시느라 바쁘신 분이 어인 일로 누추한 이곳까지 찾으셨는지요?”

장쉐량은 아버지뻘인 왕표를 눈을 내리깔며 노골적으로 이죽거린다. 왕표는 노여운 심기를 애써 감추며 태연한 척한다.

“장 상교! 내가 어디 못 올 때라고 왔는가? 자네 부친께서 내 다섯 형제의 대부였고, 나 또한 자네의 대부였으니, 우리는 가족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허허헛!”

대범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왕표의 웃음소리가 공허하게 잦아든다.

“다 지나간 얘기이긴 하지만 그렇긴 하죠. 그런데 대인께서 저를 찾아오신 용무가······?”

상대의 의중을 간파한 그는 일말의 예를 갖추는 듯 왕표에게 말미를 열어둔다. 자존심이 땅에 떨어진 왕표는 질끈 아랫입술을 깨물곤 두 주먹을 불끈 쥔다.

“얼마 안 되지만 받아두게.”

그는 테이블 위에 금괴 두 덩어리를 올려놓는다. 장쉐량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왕리가 베이징 경찰서에 수감되었다고 들었네.”

금괴를 매만지던 장쉐량은 혀를 차며 건성건성 대꾸한다.

“쯧쯧쯧. 저도 들었습니다. 수재만 들어간다는 대학에 갔으면 하라는 공부를 할 것이지, 왜 정부를 반대하는 시위를, 그것도 주동을 하다니요.”

그는 금니를 드러낸 채 금괴의 귀퉁이를 깨무는 시늉을 한다.

“이정도 순도라면 펑톈에서 건물 한 채를 족히 사고도 남을 텐데······”

빈정거리는 꼴을 더 보기 싫었던지 왕표가 서두른다.

“이건 선금이네. 왕리가 무사히 방면되면 건물 두 채 값을 더 내주겠네.”

그는 귀가 솔깃한 듯 눈꼬리가 치솟는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숨을 고른다.

“대인, 그게 말입니다. 저야 옛정을 생각해서 당장이라도 경찰서에 사람을 보내 아우를 데려오고 싶습니다만······, 아우의 죄가 워낙에 커서 손 쓸 방도가 저로써도 막막합니다.”

“도대체 죄가 뭐길래 자네처럼 실권자가 엄살을 부리는 게야?”

“통일전선조직에 가담한 정황이 드러났다고 하더군요.”

“통일전선조직? 그게 뭔가?”

“사회주의······, 아니, 공산주의는 들어보셨죠?”

일순 왕표의 민낯이 새하얗게 변한다. 무학자인 그도 왕을 부정하고 재산을 백성에게 분배한다는 공산주의의 사상을 들을 바 있다. 만주의 왕처럼 살며 중앙의 왕이 되고자 혈안이 된 장쭤린의 입장에서 볼 때, 공산주의는 제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척결해야할 대상이 아니던가. 더 이상 물러설 때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금니를 번뜩거리며 배시시 웃는 장쉐량 앞에 무릎을 꿇는다.


“금괴 다섯 덩어리를 더 내놓겠네. 자네도 알다시피 왕리는 마적단의 미래일세. 그리고 어릴 때 왕리는 자네와 함께 말 등에 올라 평원을 달리며 자라지 않았는가? 이렇게 늙은이가 무릎까지 꿇으며 빌지 않나. 제발 부탁하네.”

장쉐량이 어금니를 질끈 깨문다. 이가 부딪는 소리가 입술 사이로 비어져 나온다. 왕표가 흐느끼는 울음소리는 그에게는 그저 파리가 윙윙거리는 소음에 불과하다. 갑자기 그의 동공이 확장된다. 추측건대 뇌의 회전이 멈추고 여러 상수들을 한데 짜깁기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에 돌입한 성싶다. 그는 제 셈법이 들통 나지 않도록 입매를 오므리며 생색을 내듯 근엄한 어조로 결정사항을 통보한다.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직접 베이징으로 달려가 아버님을 뵙고 친히 말씀드릴 사항입니다. 대인께서 이렇게 무릎까지 꿇으시니 저로서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군요. 초원에 가서 기다리십시오. 오늘 당장 베이징으로 떠나겠습니다.”

“고맙네.”


장쉐량은 왕표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운다. 그러곤 숙소 밖까지 배웅한다. 왕표가 탄 마차에 저만치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그가 고개를 쳐든다. 파란 창공을 올려다보던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뒤 환하게 웃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288.


교정을 걸어가던 주찬이 담장 밖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미루나무 뒤에 숨어있던 하녀가 총총히 다가온다. 공히 큰 기하며 잘록한 허리는 누가 봐도 쌍둥이로 착각할 만하다.

“오늘 코스는 대화호텔과 백화점이야.”

하녀가 혀를 빼물며 놀란다.

“예? 거기는 일본인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잖아요. 들키면 어쩌려고······. 저 은행장님한테 야단맞으면 어떡해요?”

주찬이 윽박지른다.

“아버지한테 잘리는 건 내가 막아줄 수 있어. 그런데 나한테 잘리면 누가 널 막아줄까?”

“저는 무조건 아가씨 편이지요. 그런데 호텔과 백화점은 일본인 소굴이라서 두려워서······”

주찬은 그녀에게 지폐를 두둑이 건넨다.

“너랑 입씨름할 시간 없어. 내가 뭐라고 했지?”

하녀가 주눅이 든 목소리로 답한다.

“말은 No! 돈은 팍팍!”

“옳지! 그래야 도도한 은행가 딸로 알지. 그리고 입술은 더 빨갛게 발라야겠다.”

하녀가 입술을 내밀자 그녀가 립스틱으로 덧칠한다.

“됐어. 어른 가 봐!”

“네! 집에서 뵐게요.”


하녀는 마치 주찬이라도 된 양 거만한 걸음으로 대기하고 있는 차에 오른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찬은 어느새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사라진다. 펑톈 시내를 몇 바퀴를 돌며 미행을 따돌린 주찬은 우뚝 솟은 종탑 아래 교회로 모습을 감춘다.

만주 각 지역에서 청년단을 이끄는 대표들이 속속 선교회로 모인다. 감시의 눈을 피해 모인 터라 아홉시를 넘어서야 성원을 이룬다. 주찬이 기조연설을 위해 연단에 오른다.


“여러분, 어려운 발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둥에 비스듬히 기댄 채 턱을 끌어당긴 왕리가 그녀를 응시한다.

“만주의 독립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두 달 전 감형을 받고 2년 6개월 만에 베이징 형무소를 출옥한 왕리는 선교사의 권유로 집회에 참여한다.

“거사일이 드디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민주주의계와 사회주의계 청년단 모두 이번 기회에 만주독립을 위해 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만주의 발전을 이끌 수 있습니다. 분열과 내분은 만주독립의 적입니다.”

왕리는 그녀의 호소력에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린다.

“청년회는 총 세 개조로 나눠 가두행진을 할 겁니다. 오전 10시에 청사 앞에 집결하여 만주학생을 대표하는 청년단의 성명으로 관동군의 즉각 철수와 침탈자원 회수 및 친일 관료 파면을 골자로 하는 10개조를 발표할 겁니다.”

청중 가운데 앉아 있던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든다.

“일본 경찰과 군벌 앞잡이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무력충돌이라도 발생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무력충돌을 걱정하는 뭇시선이 일제히 한일자로 굳게 다문 주찬의 입을 주시한다. 돌발 질문에 당황한 그녀가 잠시 머뭇거린 뒤 답을 내놓는다.

“그럴 확률이 농후합니다. 폭력을 행사할 빌미를 얻고자 경찰은 고의적으로 시비를 걸어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정정당당하게 무폭력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다소 피해를 입더라도 저들이 원하는 무력출동만은 피해야합니다.”

어디선가 답변을 불신하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무폭력은 혁명가의 덕목이 아닙니다. 혁명은 무장봉기가 기본입니다. 자유란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지 않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청년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 뒤 주찬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무폭력은 무능의 소치입니다. 혁명만이 만주의 독립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옳소!”

사회주의계열의 학생들이 찬성하면서 장내는 둘로 나뉜다.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수습할 겨를도 없이 양편은 삿대질을 하며 서로를 성토한다. 주찬의 만류에도 청중은 이미 이성을 잃은 듯 서로에게 적의마저 드러낸다. 묵묵히 지켜보던 왕리가 뚜벅뚜벅 중앙을 가로질러 연단에 오른다. 그러곤 냅다 일성을 터트린다.

“여러분! 혁명이고 뭐고 만주독립을 위해서는 우리부터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잠시 행동을 멈춘 뭇시선이 연단을 향한다.

“적은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습니다.”

청중들이 꾸지람을 들은 학생처럼 모두 어깨를 움츠릴 즈음 문이 벌컥 열린다. 청년이 강당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다.


“목사님, 헌병대가 떴어요!”


단원들은 목사의 안내를 받으며 일사불란하게 비상구로 피신한다. 주찬은 교회 곳곳에 흩어져 있는 전단지를 남김없이 챙기기 시작한다. 헌병대 소속 차량들은 이미 교회 앞마당 깊숙이 들어섰다. 사이렌 소리에 맞춰 조명이 어지럽게 유리창에 비친다. 다급해진 주찬은 비상구로 향할 시간을 놓치고 만다. 숨을 만한 곳을 살피던 그녀는 본당 구석에 초연히 앉아 있는 왕리와 마주친다.


“어서 몸을 피하세요.”

왕리의 말에 주찬이 얼떨결에 대꾸한다.

“같이 가셔야죠.”

“늦었습니다. 뒷일은 내가 맡겠습니다. 어서······”


왕리는 전깃불을 소등한다.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 강당이 심해처럼 적막한다. 채광창을 통해 틈입한 처연한 달빛만이 왕리의 머리맡을 비춘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간절히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다.

돌계단을 오르는 군인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돌계단 다음은 바로 본당으로 향하는 문이다. 문까지 거리는 어른 보폭으로 다섯 발짝도 안 되는 지척이다.

당황한 주찬은 얼른 강단 위로 뛰어올라 커튼 뒤로 숨는다. 커튼이 제자리를 잡는 사이 주찬과 왕리는 어둠속에서도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다. 이윽고 총검을 든 헌병들이 득달같이 들이닥친다.


“불을 켜라!”

헌병 대위가 오장에게 명령한다. 잠시 뒤 불이 들어온다. 여전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왕리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부하들이 본당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수색하는 동안에 대위가 뚜벅뚜벅 왕리에게 다가간다. 연단으로 오른 조장이 총검으로 커튼 뒤를 찌르는 순간 왕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뭣들 하는 짓이냐! 제국주의가 아무리 강성하다한들 신성한 교회를 모독할 권리는 없다!”

커튼 뒤에 숨어있던 주찬은 꼼짝없이 총검에 찔릴 판이었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대위가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선다.

“이게 누구신가? 마적단 두목의 막내아들 왕리가 아니신가?”

“그렇소.”

“이런, 이런······. 만주의 거물께서 이 시간에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보면 모르오. 기도를 드리고 있지 않소.”

“누가 그럴 몰라서 하는 말인가? 우린 지금 항일청년단의 비밀집회가 열리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출동하는 길인데······, 혹시?”

“밖에 묶여있는 말을 보고도 하는 말이요? 내가 여기서 기도를 드린 지 한 시간이 지났지만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소. 그리 알고 더이상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말고 돌아들 가시오.”

왕리와 헌병장교는 서로 조금도 양보하는 기색이 없다. 얼마간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인다. 잠시 후 시선을 돌린 장교가 애꿎은 부하를 불러 세운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샅샅이 뒤졌지만 집회를 한 흔적은 못 찾았습니다. 허위신고가 들어온 것 같습니다.”

“대일본제국의 헌병이 허위신고나 받고 출동한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이야?”

대위는 오장의 정강이를 세차게 걷어찬다.

“왕리! 지금은 그냥 돌아가지만 나중에 볼 기회가 생긴다면 오늘처럼 그냥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다! 몸조심해라. 그리고 부흥은행의 딸 주찬이란 계집을 보면 전하라. 내 손으로 꼭 잡고 말겠다고!”

“마음대로 하시오.”


헌병을 태운 트럭이 사라질 때까지 왕리는 창가 앞을 서성거린다. 커튼 뒤에 숨어있던 주찬이 그에게 다가간다.

“하마터면 큰일을 치를 뻔했어······”

주찬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인상을 쓰며 아랫배를 움켜쥔다. 아랫배 부위가 피로 흥건하다.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으흑······”


얼굴에 핏기가 걷힌 그녀가 앞으로 쓰러지려는 찰라 왕리가 잽싸게 두 팔로 끌어안는다. 의자에 주찬을 눕힌 왕리는 상처 부위를 확인하곤 제 옷을 벗어 응급처지를 한다. 그러곤 그녀를 업고 교회를 빠져나와 말에 오른다.

왕리는 주찬을 말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준다. 저택의 묵직한 쌍바라지문 앞에 도착하자 왕리는 말에서 내리는 주찬의 하마를 돕는다.


“정말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왕리가 상처부위를 보며 고래를 내젓는다.

“이 몸으로 병원에 갔다가는 당장 체포되고 말 거예요. 그나저나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왕리가 부축하려고 손을 내민다. 그녀가 손사래를 친다.

“아버지가 아시면 난리 나요. 이쯤에서 돌아가시는 게 좋으실 거예요. 제가 알아서 할 게요.”

유럽풍으로 박공지붕까지 얹은 저택을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진다.

“첨탑에 갇힌 공주를 구하는 유럽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성보다 더 으리으리하군요.”

주찬이 시큰둥하게 답한다.

“아라비안나이트에서 나오는 이야기군요. 저도 봤어요. 하지만 영화에서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르답니다. 온화한 불빛을 내뿜는 저택 안은 기척은 없고 냉기만 가득하거든요.”

“그럴 리가요?”

그가 고개를 기우뚱할 찰나 1층 커튼으로 그림자가 얼씬거린다.

“얼른 숨어요!”

얼떨결에 납작 엎드린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서로의 심장박동소리가 들릴 정도로 어깨를 맞댄다. 오히려 수줍어하는 쪽은 왕리다. 당황한 나머지 앞만 주시하는 그의 입술에 도발적인 입술이 겹쳐지며 촉촉한 열기가 훅 끼친다. 달콤한 입맞춤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커튼 너머로 서성거리는 그림자가 영 불편한 탓일까. 주찬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응접실 쪽을 두리번거린다.

“불시 점검이 시작될 시간이에요. 이만 가 볼게요.”

쌍바라지문을 소리 나지 않게 열고 들어간 그녀는 2층으로 연결된 줄을 잡아당긴다. 창문을 열어보던 하녀가 놀라서 황급히 내려온다.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저택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왕리는 말에 올라 밤거리를 쏜살같이 달린다. 승용차 안에서 왕리와 주찬을 목격한 장쉐랑은 주먹을 불끈 쥐고 등받이를 힘껏 내리친다.

“저 자식이 사람구실을 하라고 석방시켜줬더니, 감히 주찬을 넘봐!”

왕리가 탄 말이 펑톈의 부호들이 모여 사는 부촌을 막 벗어날 즈음 단발의 총성이 밤하늘의 정적을 흔든다.

“주찬이 너 같은 마적한테 어울리기나 할 것 같아? 흐흐흣!”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짓는 장쉐랑의 눈언저리가 파르르 떨린다. 왠지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어디 두고 보자! 내 앞길을 막는 자는 그 누구도 용서치 않겠다.”


성이 풀리지 않은 듯 그는 권총을 허공에 대고 연달아 발사한다. 하나둘씩 저택 창가에 불이 켜지고 잠옷차림의 주민들이 현관 앞으로 나와 동향을 살핀다. 뭇시선은 주운의 대저택 쪽을 향한다.

차량 두 대가 야수의 입김을 내뿜듯이 시동을 켠 채로 그르렁거리고 있다. 차에서 내린 경호원들이 손짓을 하며 주민들을 돌려보낸다. 차 안에 탄 인물이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임을 확인한 주민들은 제대로 경위도 묻지 않고 집안으로 돌아간다.

장쉐량은 대저택 2층을 환히 밝힌 주찬의 방을 한동안 주시한다. 반쯤 열린 차창으로 보드카를 벌컥벌컥 들이켜던 그가 마침내 곯아떨어진다. 눈치를 살피던 기사는 코고는 소리를 확인하곤 부촌을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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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134화 악마의 최후 +3 19.07.12 75 1 16쪽
133 133화 고귀한 죽음 +1 19.07.11 39 1 12쪽
132 132화 무지개 +1 19.07.10 43 1 13쪽
131 131화 차관협정(借款協定) +2 19.07.05 54 1 14쪽
130 130화 반공포로석방 +1 19.07.01 60 2 13쪽
129 129화 한일회담 +1 19.06.29 72 2 15쪽
128 128화 폭탄테러 +1 19.06.26 74 2 13쪽
127 127화 카츄샤 +1 19.06.24 70 2 13쪽
126 126화 의사 왕룽 +1 19.06.23 68 3 17쪽
125 125화 빅터 한 재단 +2 19.06.19 86 3 13쪽
124 124화 인천상륙작전 +1 19.06.13 103 2 15쪽
123 123화 메모리 가든 +1 19.06.12 82 2 15쪽
122 122화 겹생 +3 19.06.10 81 2 16쪽
121 121화 하와이 +1 19.06.07 90 3 14쪽
120 120화 소령 맥나마라 +4 19.06.06 94 2 15쪽
119 119화 한초희 +1 19.06.05 95 2 14쪽
118 118화 맥아더 원수 +1 19.06.04 94 2 14쪽
117 117화 기만방송 +1 19.06.03 91 2 13쪽
116 116화 코리안 커넥션 +1 19.06.01 100 2 12쪽
115 115화 잠수함 +1 19.05.30 130 2 13쪽
114 114화 6.25 전쟁 +1 19.05.29 111 2 12쪽
113 113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특명 1호 ‘폭풍’ +1 19.05.21 103 2 11쪽
112 112화 금괴수송작전 +1 19.05.19 129 2 10쪽
111 111화 '암호명 A-1' +1 19.05.18 94 2 13쪽
110 110화 악연(惡緣) +1 19.05.17 93 2 14쪽
109 109화 마지막 미션 +1 19.05.16 94 2 12쪽
108 108화 애치슨 라인 +1 19.05.15 93 2 12쪽
107 107화 연적(戀敵) +1 19.05.15 103 2 12쪽
106 106화 독살(毒殺) +1 19.05.14 96 2 12쪽
105 105화 마돈나 다방 +2 19.05.13 105 2 15쪽
104 104화 한국은행 +1 19.05.11 105 2 14쪽
103 103화 비밀거래 +1 19.05.10 120 2 12쪽
102 102화 남미이주작전 +1 19.05.10 120 2 13쪽
101 101화 트루먼 독트린 +1 19.05.10 95 2 11쪽
100 100화 숙명의 라이벌 +1 19.05.10 101 3 18쪽
99 99화 Jane Doe +2 19.05.10 95 2 13쪽
98 98화 앙숙, 이승만과 김구 +1 19.05.10 99 2 12쪽
97 97화 반도호텔 +1 19.05.10 93 2 13쪽
96 96화 좌익과 우익 +1 19.05.09 94 2 13쪽
95 95화 조선인민공화국 +1 19.05.09 97 2 17쪽
94 94화 일본패망(日本敗亡) +1 19.05.09 98 2 12쪽
93 93화 원자폭탄 +1 19.05.09 95 2 13쪽
92 92화 김일성 +1 19.05.09 98 1 14쪽
91 91화 독수리 작전 +1 19.05.09 96 1 14쪽
90 90화 이승만 +1 19.05.09 95 1 14쪽
89 89화 비밀요원 나타샤 +1 19.05.09 88 2 15쪽
88 88화 OSS(미국전략사무국) +2 19.05.09 93 2 16쪽
87 87화 승전(勝戰) +1 19.05.09 90 2 14쪽
86 86화 진주만공습 +1 19.05.08 91 1 16쪽
85 85화 갈라예프 +2 19.05.08 87 2 16쪽
84 84화 채권(債券) +1 19.05.08 95 2 11쪽
83 83화 다카키 마사오 +1 19.05.08 106 2 12쪽
82 82화 광복군(光復軍) +1 19.05.08 88 2 13쪽
81 81화 육군정보학교 +2 19.05.08 88 2 11쪽
80 80화 홍콩행 +1 19.05.07 93 3 13쪽
79 79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3 19.05.07 88 2 12쪽
78 78화 김원봉과 김구 +1 19.05.07 86 2 16쪽
77 77화 까레이스키 +3 19.05.07 84 2 12쪽
76 76화 탈출(脫出) +1 19.05.07 91 3 9쪽
75 75화 박정희와 최태민 +1 19.05.07 95 2 9쪽
74 74화 중일전쟁(中日戰爭) +1 19.05.07 90 2 13쪽
73 73화 강제이주 +3 19.05.06 85 1 12쪽
72 72화 마루타 +1 19.05.06 84 1 12쪽
71 71화 막후 실력자 +1 19.05.06 84 2 13쪽
70 70화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등장 +1 19.05.06 84 1 15쪽
69 69화 천황결사옹위청년단 +1 19.05.05 88 1 15쪽
68 68화 후흑학(厚黑學) +1 19.05.05 88 1 13쪽
67 67화 경몽장(耕夢莊) +1 19.05.05 88 1 12쪽
66 66화 학교(學校) +1 19.05.05 90 1 8쪽
65 65화 국제연맹(國際聯盟) +1 19.05.05 90 1 19쪽
64 64화 나타샤 +1 19.05.05 90 1 11쪽
63 63화 보고서 +1 19.05.05 90 1 11쪽
62 62화 시인과 영웅 +2 19.05.04 100 2 15쪽
61 61화 탄생의 비밀 +2 19.05.04 91 2 18쪽
60 60화 국경수비대 +1 19.05.03 90 2 13쪽
59 59화 제네바협약 +4 19.05.03 94 2 18쪽
58 58화 명백한 운명 +1 19.05.03 90 1 16쪽
57 57화 미두취인소(米豆取人所) +1 19.05.03 92 1 12쪽
56 56화 생포(生捕) +1 19.05.02 91 2 13쪽
55 55화 참패(慘敗) +1 19.05.02 90 2 14쪽
54 54화 향수병(鄕愁病) +1 19.05.02 90 2 18쪽
53 53화 음악회 +1 19.05.02 91 2 18쪽
52 52화 들개 진구 +1 19.05.02 94 2 24쪽
51 51화 가락지 +3 19.05.02 93 2 26쪽
50 50화 덫 +1 19.05.01 91 1 28쪽
49 49화 추격전(追擊戰) +1 19.04.30 90 2 35쪽
48 48화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1 19.04.30 95 2 39쪽
47 47화 광휘와 빅터 +3 19.04.29 90 2 33쪽
46 46화 특별수사본부(特別搜査本部) +4 19.04.29 90 2 41쪽
45 45화 만저우리(滿洲里) +4 19.04.28 87 3 35쪽
44 44화 폭풍전야(暴風前夜) +1 19.04.28 88 3 37쪽
43 43화 Boys, be ambitious! +1 19.04.27 90 2 39쪽
42 42화 만주국(滿洲國) +5 19.04.27 93 2 38쪽
41 41화 만몽영유계획(滿蒙領有計劃) +1 19.04.26 92 3 25쪽
40 40화 재회(再會) +1 19.04.26 90 3 30쪽
39 39화 빅터 한 +1 19.04.25 92 3 49쪽
38 38화 박진만 +2 19.04.25 98 3 45쪽
37 37화 정보국 5과 +3 19.04.24 107 3 51쪽
36 36화 마적(馬賊) 왕리 +2 19.04.24 103 3 49쪽
35 35화 삼두정치(三頭政治) +2 19.04.23 102 3 42쪽
» 34화 주찬 +1 19.04.23 102 3 51쪽
33 33화 만주야사(滿洲野史) +2 19.04.22 102 3 50쪽
32 32화 서광휘 +2 19.04.22 103 3 47쪽
31 31화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 +2 19.04.21 115 4 47쪽
30 30화 미쓰야협정(三矢協定) +4 19.04.21 106 4 46쪽
29 29화 출산(出産) +3 19.04.20 112 4 43쪽
28 28화 밀항(密航) +2 19.04.20 107 4 45쪽
27 27화 불령선인(不逞鮮人) +1 19.04.19 108 4 43쪽
26 26화 님의 침묵 +1 19.04.19 112 4 48쪽
25 25화 이민(移民) +2 19.04.18 125 4 39쪽
24 24화 회자정리(會者定離) +2 19.04.18 112 5 44쪽
23 23화 여걸(女傑) 수잔 +5 19.04.17 112 4 46쪽
22 22화 3·1 만세운동 +5 19.04.17 115 4 44쪽
21 21화 천적(天敵) +1 19.04.16 115 5 49쪽
20 20화 아카키 타이요우(赤木太陽) +4 19.04.16 120 5 52쪽
19 19화 망국(亡國) +4 19.04.15 128 3 49쪽
18 18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3 19.04.15 130 3 46쪽
17 17화 한성진격작전(漢城進擊作戰) +4 19.04.14 131 4 49쪽
16 16화 의병전쟁(義兵戰爭) +4 19.04.14 131 4 43쪽
15 15화 춘투(春鬪) +5 19.04.13 141 3 47쪽
14 14화 암살미수(暗殺未遂) +4 19.04.13 147 3 37쪽
13 13화 결혼(結婚) +3 19.04.12 222 6 42쪽
12 12화 돈버거 +9 19.04.12 201 6 44쪽
11 11화 대한제국(大韓帝國) +2 19.04.11 223 7 45쪽
10 10화 김출세(金出世) +7 19.04.11 242 8 42쪽
9 9화 낙향(落鄕) +4 19.04.10 263 7 42쪽
8 8화 혁파안(革罷案) +4 19.04.10 274 8 41쪽
7 7화 증기자동차 +2 19.04.09 321 11 22쪽
6 6화 2차 사행(使行) +2 19.04.09 324 12 24쪽
5 5화 견문록(見聞錄) +5 19.04.08 365 13 19쪽
4 4화 북경(北京) +1 19.04.08 455 11 19쪽
3 3화 만남 +1 19.04.08 559 12 15쪽
2 2화 1차 사행(使行) +2 19.04.08 817 13 14쪽
1 1화 파락호(破落戶) 이하응 +17 19.04.08 1,571 1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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