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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공모전참가작 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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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최장르
작품등록일 :
2019.04.08 16:31
최근연재일 :
2019.07.12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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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24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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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쪽

36화 마적(馬賊) 왕리

님의 침묵




DUMMY

298.


천황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초원의 대장장이가 만든 투박한 칼만 휘두르던 왕표는 오색칠보로 장식된 보검을 본 순간 동공이 흔들린다. ‘천황’이란 말은 그저 허투루 건네는 인사말 정도로 치부될 뿐이다. 흠뻑 넋이 나간 왕표는 류노스케가 설계한 잔꾀에 그대로 걸려든다.

가와무라의 배웅을 받은 왕표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보검이 든 함을 끌어안은 채 대기하던 마차에 오른다. 왕리와 가와무라는 잠시 로비에서 향후 일정에 대하여 간략히 의논한다.

왕리와 가와무라가 다음을 기약하는 악수를 나누고 막 돌아서려는 찰라 회전문이 바삐 돌면서 헌병대가 들이닥친다. 왕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회전문의 출구 앞에 서서 순서를 기다린다. 앞에 있는 부인이 회전문을 통과할 즈음 아베 중좌가 그를 저지한다.


“왕 대인의 막내아들, 왕리가 맞죠?”

아베 중좌의 고압적인 자세에 정작 거명된 왕리보다도 주변의 목격자들이 무르춤한다. 왕리는 어깨를 가볍게 들먹이며 대꾸한다.

“헌병대가 무슨 용건으로 나를······”

아베가 왕리의 뒷말을 가로챈다.

“수사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일본 헌병대는 이런 식으로 수사협조를 구한답니까? 다짜고짜 이게 무슨 행패요?”

아베는 속삭이듯이 나직이 말한다.

“경찰서로 연행할 수도 있어. 순순히 따르는 게 서로에게 좋을 거야.”

아베는 슬그머니 왕리의 허리춤을 더듬거린다. 화들짝 놀란 왕리가 그의 손길을 뿌리친다.

“영장도 없이 몸을 수색하다니 이게 무슨 짓이오?”

“영장? 얼마 전 이곳 대화호텔에서 벌어진 민간인 테러사건의 용의자한테는 영장이 필요 없지.”

왕리는 황망한 표정으로 아베를 쏘아본다. 주위에서 수군거리던 구경꾼들이 군복차림으로 로비에 등장한 장쉐량을 보곤 일제히 뒤로 물러선다. 잠시 상황을 파악한 장쉐량이 한걸음 나서며 아베 중좌를 나무란다.

“민간인들이 출입하는 호텔에서 헌병대가 웬 소란인가?”

아베는 장쉐량을 보곤 거수경례를 한 후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상좌님도 아시다시피 이곳 영빈실에서 테러가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용의자 특정에 실패하여 수사가 오리무중에 빠졌었는데, 유력한 단서가 발견됐습니다. 현장에서 수거한 증거 가운데 용의자 것으로 추정되는 탄환이 바로 그것입니다.”

“소란을 피울 정도로 탄환이 중요하단 말인가?”

“용의자가 쏜 탄환은 9밀리미터인데, 현재 독일제 ‘루거 P08’권총만이 9밀리미터 탄환을 쓰고 있습니다.”

장쉐량은 피식거리며 비아냥거린다.

“남자라면 오발이 잦은 8밀리미터 일본제 남부식 권총보다는 독일제 루거 P08을 택할 테지. 그런데 왜 하필이면 왕리 아우를 검문하는 건가?”

그제야 장쉐량은 왕리와 눈빛을 교환한다. 왕리는 그를 향해 목례를 한다.

“마적단이 독일제 ‘루거 P08’를 사용하고 있다는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그래서······”

장쉐량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가로챈다.

“하하핫! 그럼 나도 용의선상에 올랐겠는걸! 만주에서 말을 타 본 사내라면 의당 소신용으로 ‘루거 P08’을 차고 다니지. 그럼 나부터 수사에 협조하겠네.”

장쉐량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아 아베에게 내민다.

“상좌님! 수사에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사가 끝나는 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장쉐량은 손에 쥐고 있던 가죽장갑으로 손바닥에 내리치며 호기롭게 왕리를 부른다.

“왕리 아우! 난 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줄 알았군. 작은 아버님께 안부 전해주시게. 마유주 한상 거하게 봐달라고 말이야.”

장쉐량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너스레를 떤다. 얼떨결에 왕리가 대꾸한다.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류노스케는 2층으로 오르는 층계참의 난간에 서 있다. 그는 로비에서 벌어진 상황을 마치 오페라를 관람하듯이 외눈 안경까지 쓰곤 면밀히 관찰한다. 로비에서 장쉐량을 반갑게 맞이하며 접견실로 안내하는 가와무라가 류노스케에게 고갯짓으로 신호를 보낸다.

왕리가 허리춤에 꽂아둔 권총을 빼서 아베에게 건넨다. 아베는 헌병대를 인솔하고 회전문을 통해 호텔을 빠져나간다. 잔뜩 화가 난 왕리가 회전문을 밀치며 어둑해진 거리로 나선다.



299.


류노스케는 홀로 등장한 장쉐량을 보곤 실망한다. 하지만 대화가 진행될수록 장쉐량의 야망을 엿본 그는 적당한 파트너를 찾은 양 내심 기뻐한다.


“아버님이 중앙정치를 하시느라 바쁘셔서 저에게 이번 모임에 전권을 일임하셨습니다.”

“그러다마다요. 베이징의 혼탁한 정국을 이끄시는 장쭤린 성장께서 누추한 이곳까지 방문하실 짬이 나시겠습니까? 장쉐량 상좌께서 오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가와무라가 입에 발린 인사말로 상대를 안심시킨다. 장쉐량은 싫지 않은 듯 호탕하게 웃는다.

“그쪽에서는 아마 아버님보다는 내가 온 것을 내심 바라셨을 텐데요. 하하핫!”

“아니올시다. 저같이 일개 회사의 대표가 감히 국가 원수급인 성장님과 동석한다는 것은 꿈에도 못 꿀 일입니다. 허나 성장님의 아드님인 상좌님은 곧 왕자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저희로써는 성장님을 모신 것이나 진배가 없습니다.”

장쉐량은 고개를 젖히고 얼마간 웃다간 정색하며 되묻는다.

“은행가와 마적단 그리고 마지막으로 군벌이 선택된 것은 우연인가요, 아니면 의도된 건가요?”

짐짓 당황한 가와무라가 손사래를 치며 시치미를 뗀다.

“그럴 리가요. 아무래도 군벌 주둔지가 중원에 있다 보니······”

류노스케가 한걸음 앞으로 나선다.

“의도된 겁니다.”

장쉐량과 이사하라는 5초가량 눈싸움을 벌인다.

“일본에 가부끼란 연극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늘 나중에 등장하는 법이지요. 중국의 경극에서도 영웅은 마지막을 장식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류노스케의 알쏭달쏭한 수사법에서 저의를 갈파한 장쉐량은 은연중에 입꼬리 한쪽이 살짝 들린다.

“부산스럽게 인사치레는 그만두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류노스케는 이례적으로 양팔을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마치 자신이 쥔 패를 고의로 드러내면서 상대의 결정만을 기다리는 승부수를 띠운 듯하다. 탐욕과 의심에 가득 찬 상대를 대적하는 수단으로써 회유를 택한 기존의 방법에서 정공법으로 급선회하는 순간이다.

“전쟁터에서 적으로 만나는 것은 초짜들이나 하는 하책이라고 봅니다. 선수들은 피를 보기 전에 먼저 테이블에 앉습니다. 서로의 의중을 캐 본 뒤에 총을 들어도 늦지 않으니까요.”

류노스케의 말은 명백한 도발을 암시한다. 하지만 협상이란 여지를 남겨둔 모종의 계략이 숨겨져 있기도 하다.

“일본이 만주까지 진출한 연유가 있을 테고, 이 자리에서 굳이 나와 나란히 앉아 있는 이유도 있을 테니, 그쪽이 원하는 걸 듣고 싶군요.”

유년시절부터 늑대를 길들이며 야인으로 성장한 장쉐량이 간특한 류노스케의 속내를 모릴 리 없다. 정보장교로 잔뼈가 굵은 류노스케지만 그의 교활한 언변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양쪽을 번갈아보며 숨을 죽이던 가와무라가 끼어든다.

“오늘 뵙자고 한 사안은 정치적이거나 외교적인 문제를 다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만주의 평화와 발전을 위하여 유력인사를 모시고······”

장쉐량이 고개를 도리질하며 제 뜻을 전한다.

“만주의 유력인사라면 주운과 왕표만 한 인물이 없죠.”

“그야 물론이죠. 장쭤린 성장님이야 만주의 진정한 지배자이시죠.”

가와무라가 서둘러 매듭을 짓는다.

“잘 아시는군요. 그러니까 아버지를 대신한 저하고는 정치적인 사안과 외교적인 문제를 다루는 게 합당하지 않을까요?”

만만치 않다고 판단한 가와무라는 눈을 끔벅거리며 다음 수를 짜내기 위해 골몰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합시다. 가와무라 사장님은 형식상으로 참석하셨으니, 이제 류노스케 고문과 협상하겠습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졸지에 가면무도회에서 민낯이 되어버린 듯 가와무라는 낭패감에 사로잡힌다. 류노스케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가와무라를 등진 채 허리를 곧추세운다.

“만주의 통치권을 맡아주십시오.”

“그거야 이미······”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복심이 앞선 탓일까. 류노스케는 매의 눈으로 상대의 말을 가로챈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한다면 연합군대를 조직하여 양쯔강 이북과 베이징 외곽까지 진출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의 다음 목표가 있다면 어디가 되겠습니까?”

장쉐량은 약점이 드러난 듯 고개를 움츠린다. 선제공격에 성공한 류노스케는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죄송하지만 만주 군벌의 군사력만으로는 그들의 진출을 막을 수 없는 게 현실 아닙니까. 저희 쪽에서 뒷배를 받쳐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죠.”

달콤한 제안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군벌의 최대 걱정거리는 이미 만주에서도 세를 확장하기 시작한 국민당과 청년층과 지식층의 지지를 받는 공산당이다. 따라서 장쉐량은 류노스케가 내민 카드에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다. 애써 덤덤한 척 표정을 관리하던 그가 되묻는다.

“구체적으로 뭘 돕겠다는 거요?”

“신무기를 제공하고 경제 원조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필요하다면 군사고문을 파견하여 군벌의 조직과 체질을 강화할 용의도 있습니다.”

“좋소! 그럼 내 부탁을 말하리다.”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산중에 호랑이는 한 마리만 필요하오. 주운과 마적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우리 쪽하고만 연계할 것을 제안하오.”

“주운은 경제적인 파트너일 뿐입니다. 마적은 만주의 정서상 솎아낼 수 없는 상대가 아닙니까. 실질적인 정치, 외교적인 사안을 상좌님과 상의해서 처리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좋소! 그리고 또 하나······”

장쉐량이 잠시 머뭇거린다. 의중을 파악한 류노스케가 원하는 답을 준다.

“왕리의 처리 문제라면 헌병대한테 맡기는 쪽이 훨씬 승산이 큽니다. 상좌님이 직접 나서봐야 모양새도 빠지고, 민심도 흉흉해질 수 있으니······”

“역시 협상을 할 줄 아신다니까. 하하핫!”


장쉐량은 만주의 통치권과 방어권에 대한 실리를 얻은 반면에 일본 측은 만주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한다. 만주족으로부터 신망이 두터운 주운과 왕표를 포섭한 것도 성과 중의 하나로써 일종의 보험을 들어놓는 셈이다.

상대의 허점을 꿰뚫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던 류노스케와 장쉐량은 협상안에 만족한 듯 자축연을 연다. 접견실에 기모노차림의 기생들이 등장한다. 밤새 질펀한 술자리가 이어진다.




300.


도쿄의 육군성 참모본부로 복귀한 카지 류노스케는 국공합작을 예견하고 향후 만주에서의 일본의 입지를 강화하는 이른바 ‘만주공영화계획(滿洲共榮化計劃)’이란 장문의 보고서를 제출한다.


보고서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은 머지않아 성사될 것이다. 그들의 공동목표는 봉건적인 정치·사회를 개혁하여 분열된 국토를 하나의 중국으로 통일하는 데 있다. 종국에는 만주로 진출할 것이 확실하며 관동군과의 군사적 마찰이 불가피하다.

만주의 공영권(共榮圈)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국공합작에 필적할 만한 군사력의 확보가 중요하다. 대외적으로 ‘만철(滿鐵)’을 내세워 군벌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조치가 선행되어야 하고, 대내적으로는 관동군과 군벌의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국공합작 이후의 군사적인 징후에 대비해야 한다.

또한 심리전 차원에서 만주의 명망 높은 인사를 회유하여 유사시 불온세력의 대항마로 삼아야한다. 또한 국민당과 공산당의 지배권을 산해관(山海關) 이남으로 국한시켜 중국 본토와 만주를 분리시켜야 한다. 따라서 만주에서 관동군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공작정치가 요구되며 이를 위하여 정보부의 기능 강화가 절실하다.


극비문서로 분류된 류노스케의 보고서는 제국주의에 경도된 엘리트 군인을 중심으로 널리 유포된다. 군부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그는 한때 좌천을 당한 수모를 딛고 화려하게 부활한다.


고모토 중좌와 이시와라 소좌가 이끄는 청년 장교들이 그의 사무실을 방문한다.

“장군님이 작성하신 보고서는 대일본제국이 나아가야 할 미래상을 제시했다고 봅니다. 이에 청년 장교단은 장군님께 무한한 충성을 다짐합니다. 대일본제국이 세계를 선도할 그 날이 올 때까지 끝까지 따를 것을 혈서로써 맹세합니다.”

고모토 중좌가 청년 장교를 대표하여 핏빛이 선명한 두루마리를 류노스케에게 건넨다. 두루마리를 받아 본 류노스케가 장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다.

“제군들이 있어 대일본제국의 앞날은 밝다. 대륙 진출은 곧 대일본제국의 사활이 걸린 만큼 각자 최선을 다해 주길 바란다.”

한껏 상기된 뭇시선이 일제히 그의 동선에 따라 움직인다.

“고모토 중좌가 관동군 소속 작전과로 파견을 요청했다며? 참모본부의 정보과라면 육군 내에서도 요직 중에 요직인데, 관동군 작전과로 전출을 신청한 이유라도 있나?”

고모토가 한 발 앞으로 나와 부동자세를 취한다.

“장군님의 보고서를 읽는 순간 만주의 공영화에 이바지해야겠다는 사명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출신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류노스케가 얼마간 고모토를 응시한다. 의안과 맞닥뜨린 고모토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린다. 그는 고모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귀관이라면 틀림없이 만주에서 큰일을 할 거라 믿네.”

“부족한 소관을 인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고모토가 눈물을 글썽거린다.

“자, 편하게들 앉아. 내가 당장 귀관들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커피밖에 없다.”

류노스케는 커피 여섯 잔을 준비하여 장교들 앞에 놓는다. 그러곤 자리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린 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시와라 소좌!”

“하이!”

이시와라는 자세를 돌려 도도한 눈빛으로 류노스케의 의안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주눅이 든 고모토와는 달리 그는 긴장된 상황을 즐길 줄 아는 인물이다.

“귀관의 별명이 ‘육군 이단아’라는데, 맞나?”

“네!”

“이력이 나랑 비슷하군. 나도 한때 경성에서 근무했었네.”

“조선에서 독립군을 만주로 내쫓은 장군님의 무용담은 군부 내에서는 이미 전설로 통합니다.”

“독일 유학도 다녀왔다지?”

“네. 장군님이 묵었던 기숙사에서 지냈습니다.”

“하하하! 내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군!”

“영광입니다.”

“참모본부에 여러 차례 건의한 문건을 읽어봤네. 패기가 넘치더군. 그런데 너무 급진적이지 않나? 일부에서는 치기 어린 청년 장교의 궤변이라고 치부하던데······”

류노스케가 커피잔을 입에 대고 소리로만 마시는 시늉을 한다. 들숨을 복부까지 삼킨 탓일까. 이시와라의 군복이 팽팽하다.

“허락해주신다면 소관의 ‘최종전쟁론’을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빤히 바라보는 통에 류노스케는 입속에서 음미하던 커피를 삼키고 만다. 그는 입 주위를 닦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적인 석학들은 입을 모아 전쟁의 공포를 맛본 인류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은 평화밖에 없다며 전쟁불가론을 피력했습니다. 그러나 소관은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국과 패전국 모두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공장마다 탱크와 전함이 만들어집니다. 이는 곧 ‘제2차 세계 대전’이 언제든지, 어디에서든 일어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를 전제로 대일본제국이 지향해야 할 국가적 사명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제국을 지키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먼저 만주와 몽고를 침략하여 제국의 영토와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는 결코 대일본제국만의 권익을 위한 침략이 아닙니다.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기 위해서는 대일본제국을 중심으로 중국과 조선 3국이 연합하여 공존을 모색해야 합니다. 아시아의 이상국인 왕도낙토를 건국해야만 비로소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고, 제국의 번성을 구가할 수 있다고 봅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류노스케가 의심쩍은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침략이란 표현을 쓰면서 공존을 거론했는데, 수사학적으로 모순되지 않나?”

이시와라는 기다렸다 듯 당돌하게 되받아친다.

“문법적으로는 모순될지언정 정치공학적으론 전혀 문제될 게 없습니다. 지금껏 그런 선례가 없을 뿐이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런 선례를 창조하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게 아니겠습니까?”

군부에서도 호탕하기로 손꼽히는 류노스케라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궤변을 늘어놓는 그를 보곤 혀를 내두른다.

“소문대로 ‘육군의 이단아’가 맞군! 정치는 대의명분을 따르는 법이네. 그리고 국제사회의 눈치도 봐야 할 테고. 귀관의 뜻은 잘 알았네. 공연히 상부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를 바라네.”

“예, 명심하겠습니다.”


장교들이 돌아가고 난 뒤 류노스케는 창가로 다가간다. 그러곤 창문을 열고 차에 오르는 이시와라를 지켜본다.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강하면 부러지는 법이거늘······. 재목은 훌륭한데, 앞날이 험난하겠어.’


며칠 후 참모본부는 류노스케에게 ‘만주식민화계획’을 담당할 정보과 설립에 관한 전권을 일임한다. 인선 작업은 류노스케와 커피를 마신 청년 장교들이 대거 중용되면서 일단락된다. 그 가운데 고모토와 이시와라가 그의 참모로 발탁된다.

1928년 장쭤린을 폭사시켜 만주의 지각변동을 일으킨 ‘황고둔사건(皇姑屯事件)’의 주동자 ‘고모토 다이사쿠’와 음모와 책략의 달인으로 불리는 ‘이시와라 간지’는 속칭 ‘류노스케 사단’의 대표 주자로 분류되며 공작정치의 선봉에 선다.




301.


헌병대 차량 세 대가 흙바람을 일으키며 평원을 질주한다. 차량이 마적단이 진을 치고 있는 구릉으로 접근한다. 말에 오른 마적들이 공포탄을 쏘며 반격한다. 진영 입구에서 헌병대와 마적단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망원경으로 지켜본 왕리가 부리나케 파오로 달려간다. 곤히 자고 있던 주찬이 놀라서 깬다.


“대충 짐만 챙겨!”

화들짝 놀란 주찬은 주섬주섬 옷을 입곤 몇 가지 짐을 챙긴다. 그러곤 왕리를 따라 파오 뒤편으로 몸을 숨긴다. 왕리는 그녀가 말에 오르는 것을 돕는다.

“당분간 연락할 때까지 쌍봉계곡에 피신하는 게 좋겠어.”

주찬은 고삐를 잡고 말머리를 돌린다.

“아침부터 무슨 일인데요?”

“헌병대가 낌새를 챘어. 시간이 없어. 남은 짐하고 식량은 인편으로 곧 보낼 테니, 어서 출발해!”


왕리는 말 엉덩이를 세차게 때린다. 뒤를 돌아보며 아쉬운 표정을 짓던 주찬도 이내 자세를 바로잡고 고삐를 움켜진다. 말은 날랜 몸짓으로 파오를 요리조리 빗겨가며 진영을 빠져나간다. 차량이 급정거하는 소리를 듣곤 왕리도 재빨리 파오 안으로 숨는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가 싶더니 아베가 헌병들을 대동하고 파오 안으로 들이닥친다. 따라 들어온 마적들과 몸싸움이 벌어진다.


“나가 있어.”

왕리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마적들은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간다.

“아침부터 무례하게 무슨 짓이오?”

아베는 지휘봉으로 침상을 걷어내며 속속들이 살핀다. 그러곤 바닥에서 신발 한 짝을 발견한다.

“크기로 보건대 여자 것이 분명하군. 아직 이불에 온기가 있는 걸 보면 동침하던 여인이 있다는 얘기인데······, 어디로 빼돌리기라도 한 게야?”

“내가 뭐가 무서워서 여자를 빼돌리겠소. 허튼 수작은 그만두고 용건을 말하시오!”

아베는 그의 불만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듯 딴청을 피운다.

“지금이라도 주찬을 내놓으면 더 이상 여죄는 묻지 않겠다.”

“주찬? 주찬이 누구란 말이오?”

아베는 콧방귀를 뀌며 비웃는다.

“펑톈에서 자네와 주찬의 러브스토리를 모르는 사람도 있나?”

“말로는 안 되겠군. 얘들아? 밖에서 뭐 하니?”

왕리가 목청을 높인다. 마적들이 성큼 막사 안으로 들어온다. 헌병들이 총을 겨눈 채 뒷걸음질한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당장 이놈들을 독수리 밥으로 만들겠습니다.”

왕리의 부하 중 덩치가 큰 마적이 목청을 돋운다.

“실력행사를 하시겠다? 지금 그럴 입장이 아닌 것 같은데······”

아베는 왕리에게 영장을 펼쳐 보인다. 영장을 낚아채고 읽던 그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증거라도 있소?”

“도쿄 경시청 조사관까지 초빙해서 확인을 마쳤네. 자네 총에서 발사된 총탄과 현장에서 발견한 총탄의 탄조흔이 정확히 일치하더군.”

왕리가 반발한다.

“‘P-80 루거’권총이 어디 한 두 개라야 말이지. 더 이상 억지를 들어줄 수가 없군.”

아베가 사진 서너 장을 그에게 건넨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듯이 총열 안의 강선도 제각각이지. 자네 총열에서 찍은 강선이라네.”

왕리가 총열을 찍은 사진을 본다. 아베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부하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부하들이 왕리의 양쪽 팔을 붙잡는다. 마적들이 달려들어 왕리를 옹호한다. 아베가 총을 뽑아 허공에 발사한다.

“섣부른 짓 하지 마. 마적의 우두머리를 체포하는데, 우리만 왔을 것 같은가?”


대지를 흔드는 굉음과 함께 아우성치는 소리가 빗발친다. 처음 듣는 굉음에 놀란 마적들이 서둘러 밖으로 몰려나간다. 포박된 왕리는 파오를 짓밟으며 다가오는 경전차를 보곤 입을 다물지 못한다.

마적 두 명이 경전차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한다. 경전차에서 기관총이 난사된다. 집기와 장작더미가 삽시간에 공중으로 솟구친다. 마적들은 황급히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긴다.


“죄가 없으면 석방될 것이다. 부하들의 목숨이 아깝거든 무모한 짓은 삼가라 전하라!”


왕리는 부하에게 곧 오리라는 말을 남기곤 차량에 올라 진영을 떠난다.



302.


대화호텔 총격사건의 주요 용의자로 왕리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발이 없는 발이 되어 만주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펑톈에 기반을 둔 각 신문사들은 일제히 ‘마적단의 후계자 왕리 전격 체포’라는 제하로 머리기사를 쏟아낸다. 청년단이 중심이 된 민간단체는 경찰서 앞에서 연일 반대시위를 펼친다.

왕리가 체포된 직후 민심은 경찰의 강제수사에 의구심을 드러낸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은 속으론 쾌재를 부르며 겉으로는 낙담한 척한다.

왕리의 맏형이자 마적단의 장자인 왕망은 밤새 말을 달려 왕표의 장막(將幕)을 방문한다. 막내아들의 체포 소식을 듣고 시금을 전폐한 왕표는 칭병(稱病)하고 막하(幕下)의 모든 일정을 취소한다. 왕망의 방문에도 왕표는 몸져누운 채 밭은기침만 쏟아낼 뿐 좀체 곁을 내주지 않는다.


“아버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왕리의 구명을 위해 제가 나서겠습니다.”

등을 돌린 왕표가 뒤척거리며 자세를 바로잡는다. 왕망이 다가가 돕는다. 보료에 등을 기댄 왕표가 개진개진한 눈으로 얼마간 왕표를 주시한다.

“형이라면 마땅히 동생을 거둬야지.”

“아버님 명을 받들겠습니다.”

“괜히 감정적으로 처리했다간 화를 부를 수 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요새 뭘 하고 다니길래 막하에서 볼 수 없는 게냐?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홍등가를 드나드는 건 아니냐?”

왕표는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버님도 참! 홍등가에 발길을 끊은 지도 일 년이 넘었습니다.”

왕표는 몸을 숙여 궤짝을 연다. 그러곤 돈다발 두 개를 꺼내 탁자 위에 던진다.

“일단 이 돈으로 변호사를 선임하고 재판에 대비해.”

“당장 왕리를 석방시키겠습니다. 그런데······”

왕망은 말끝을 흐리며 아버지의 눈치를 살핀다. 왕표 또한 아들의 시커먼 속내를 꿰뚫어 보듯 눈을 흘긴다.

“쯧쯧쯧! 말꼬리가 붙는 버릇은 여전하군. 그래 뭔지 한번 들어나 보자.”

“제 말이 영이 서기 위해서는 아버님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왕표는 탁자 위에 놓인 돈다발을 집어 들고 궤짝에 도로 넣는다. 그러곤 손을 부들부들 떨며 호통을 친다.

“동생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는 마당에 또 승계를 들먹이는군. 모자란 놈!”

되록되록 눈알을 굴리던 왕망이 두 주먹을 불끈 쥔다.

“도대체 제가 왕리보다 못한 게 뭡니까?”

“미욱한 놈! 고작 비교 상대가 막내 동생이냐? 부끄러운 줄 알아! 명색이 마적의 장자라면 장자답게 처신하란 말이다.”

“장자답게 처신할 테니, 장자로서 권위를 세워주세요!”

왕망은 빤히 아버지를 응시한다. 그의 눈빛에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나 애정과는 거리가 먼 분노와 질투가 들끓는다. 두 사람간의 눈싸움이 십여 초가량 이어진다.

“승계 문제는 원로회의의 고유권한이다. 네까짓 놈이 왈가왈부할 사안이 아니야!”

“섭섭합니다.”

“대관절 뭐가 섭섭하단 말이더냐?”

“원로회의에서 아버님이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후계자로 왕리를 적극 추천하셨다면서요?”

관자놀이가 불거진 왕표는 차마 입을 떼지 못한다.

“장자 승계의 법통을 깨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감히 네 놈이 신성한 원로회의에 첩자를 심어놨단 말이더냐? 에잇!”

왕표는 병풍 앞에 놓인 일본도를 뽑아든다. 그러곤 살기가 번뜩이는 칼끝으로 아들의 목을 겨눈다.

“한번만 더 승계를 언급하면 이 칼이 너의 목을 벨 것이야. 꼴도 보기 싫다. 썩 물러가!”

왕표가 거둔 칼을 칼집에 넣으려는 순간 왕망이 달려들어 칼을 빼앗는다.

“아버지는 결국 저를 불효자로 만드시는군요.”

왕망은 눈물을 흘리며 흐느낀다. 왕표는 눈을 부릅뜬 채 호되게 꾸짖는다.

“불효자 좋아하시네. 넌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자격도 없는 놈이야. 근본도 모르는 패륜아일 뿐이야!”

왕표가 고개를 도리질하며 혀를 찬다. 침상에 걸터앉아 막 등을 돌리려는 순간 왕망이 칼을 번쩍 치켜든다.

“저를 원망하지 마십시오. 저를 패륜아로 만든 건 아버님이시니까요.”


칼날이 왕표의 뒷목을 가른다. 시신은 두 동강이 난 채 침상 위에 나뒹군다. 혈조를 따라 솟구친 피가 휘장을 붉게 물들인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왕표는 졸지에 권력욕의 재물이 된다.

불길이 장막을 휘감는다. 왕망은 타오르는 장막 앞에서 울부짖으며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한다. 괴팍하고 잔인한 왕망의 성격을 잘 아는 터라 마적들은 왕표의 죽음에 대하여 따따부따 입을 놀리지 않는다.

다음날 왕망은 수족들을 대동하고 원로들이 거처하는 진영을 찾아다닌다. 마적단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원로들은 가차 없이 목을 벤다. 유치장에서 비보를 듣게 된 왕리는 사흘 동안 곡기를 끊고 바닥에 머리를 찧는다.



303.


왕리는 수척한 모습으로 재판정에 선다. 왕망이 선임한 변호사는 재판의 구색을 맞출 뿐 검사의 공소사실에 소극적인 자세로 임한다.


“재판장님, 도쿄 경시청의 료스케 조사관을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재판장은 검사의 신청을 수용한다. 증인선서를 마친 료스케 조사관이 증인석에 앉는다. 검사는 자료 사진을 판사에게 건넨 뒤 증인을 상대로 질문을 쏟아낸다.

“증거자료 3호로 제출된 이 총이 ‘P-80 루거’가 맞나요?”

“예.”

“그럼 증거자료 3호가 왜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되었는지 그 과정을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료스케는 허리를 곧추세우곤 담담한 어투로 증언한다.

“현장에서 수거한 탄환은 9밀리미터로써 증거자료 3호로 제출된 ‘P-80 루거’권총에서 사용하는 탄환과 구경이 같습니다. 총이 발사되면 탄환은 총열 내 강선을 통과하면서 회전력을 얻습니다. 이와 같이 명중률을 높이도록 고안된 강선은 총마다 각기 다르기 때문에 고유한 탄조흔을 남깁니다.”

판사를 흘깃거리던 검사가 한걸음 앞으로 나선다.

“마치 사람마다 지문이 다른 것처럼 총의 탄조흔도 특유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뜻이군요. 그렇다면 지문으로 특정인을 지목하듯이 탄조흔으로도 권총을 특정할 수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까?”

“그렇습니다. 과학적인 수사기법으로 얼마든지 증명이 가능합니다.”

“여기 조사관께서 제출한 사진이 있습니다. 현미경으로 증거자료 3호의 내부를 촬영한 게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럼 현장에서 발견된 탄환의 탄조흔과 증거로 채택된 3호 권총과의 탄조흔이 일치한다는 말씀입니까?”

“정확히 일치합니다.”

“재판장님, 여기 현장에서 수거한 탄환과 증거 3호로 제출된 ‘P-80 루거’권총과의 비교 사진을 증거자료로 제출합니다.”

검사가 건넨 사진을 받아든 판사는 콧잔등에 걸린 안경 너머로 유심히 살펴본다.

“증거로 채택합니다.”

검사는 피고석에 앉아 있는 왕리를 지목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증거자료로 제출된 3호 권총이 피고인의 소유가 맞나요?”

핏기가 걷힌 민낯은 병세가 완연하다. 하지만 마적의 후예답게 자세만은 꼿꼿하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현장에 마스크를 쓰고 나타났던 용의자를 사주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주한 적은 없다! 그러나 범인이 쏜 총과 같은 총을 소지하고 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럼 료스케 조사관의 증언을 부인한다는 뜻입니까?”

“그건 거증책임이 있는 검사님의 몫으로 넘기겠습니다.”

왕리는 체념한 듯 애매모호하게 답한다. 방청석에서 야유가 쏟아진다.

“존경하는 판사님! 과학적인 수사기법을 통해 증명한 물증조차 거부하는 피고에게 더 이상 질문하지 않겠습니다. 이상입니다.”

검사가 자리에 돌아가 앉는다.

“최종 선고공판은 13일에 속개하겠습니다.”

판사는 법봉을 두드린 후 법정을 빠져나간다.



304.


왕망을 옹위하는 ‘왕망파’는 원로들과 왕리의 추종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한다. 이로써 왕표 사망 이후 내홍을 겪던 마적단은 권력승계를 완수한다. 원로 중에 끝까지 의리를 지킨 왕표의 책사 차해리는 가솔을 데리고 마적단을 떠난다. 그는 깊은 골짜기에 똬리를 틀고 산채(山寨)를 연다.

간신히 몰살을 피한 ‘왕리파’도 제가끔 다른 길을 찾아 주찬의 흔적을 뒤따른다. 소련과 접한 국경으로부터 남북으로 길게 뻗은 대싱안링산맥(大興安嶺山脈)의 험준한 쌍봉계곡에 도착한 마적은 고작 이십여 명 남짓을 헤아릴 뿐이다.


권좌를 찬탈한 왕망은 아버지의 치적을 지우기 위한 작업에 병적으로 집착한다. 왕표의 흔적은 드넓은 평원의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왕망의 기행이 거듭될수록 평원을 등지는 이탈자가 속출한다. 이는 곧 마적단의 입김이 닿는 경계가 축소되는 것을 의미한다. 조공과 세금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마적은 재정난에 허덕인다.

향락과 여색에 빠진 왕망은 영지와 동지를 등한시한 채 아예 거처를 펑톈의 대화호텔로 옮긴다. 장막(將幕)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각종 진귀한 집기와 보물이 고스란히 특실에 차려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눈에 띄게 줄어든 세수에다 왕망의 씀씀이가 커지면서 마적은 궁핍을 면치 못한다.

왕표가 모아둔 보물이 암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평원을 질주하던 말들이 가축시장에서 헐값에 거래된다. 급기야 숙박료까지 밀리는 지경에 이른다. 궁지에 몰린 왕망은 귀가 솔깃한 제안을 받는다.

장쉐량은 관동군의 정보부와 도모하여 대도회(大刀會) 회장 리용을 내세워 아편중독자로 전락한 왕망을 회유한다.


“왕 대인! 이미 펑톈의 번화가는 일본 낭인들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왕 대인과 제가 합작해서 뒷골목이라도 장악해야 그나마 만주족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턱을 바짝 끌어당긴 리용은 치뜬 눈으로 보료에 기댄 채 누운 왕망을 주시한다.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왕망은 멋쩍은 듯 입을 헤벌쭉 벌리곤 질질 흐르는 침을 소매로 닦는다.

“펑톈이 죄다 일본판인데, 헌병의 사주를 받는 낭인들이 가만히 있을라고?”

예측한 답이 돌아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리용이 되받는다.

“선대인께서 ‘만철’의 가와무라 사장을 긴히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왕망에게는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다. 그가 버럭 화를 낸다.

“죽은 사람 얘기는 왜 꺼내는 거야?”

리용은 바투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인다.

“헌병대 끗발이 제아무리 쌘다한들 어디 만주의 돈줄과 조직을 한손에 틀어쥔 가와무라 사장만큼이나 하겠습니까?”

입을 비죽이 내민 채 눈곱을 땐 왕망이 건성건성 묻는다.

“그 사람이 나 같은 아편중독자를 만나줄까? 소문으로는 장쉐량과 밀접하다고 들었는데?”

리용은 병풍 앞에 놓인 보검을 눈짓으로 가리킨다.

“일본 전통의 칠보 보검을 받았다는 건 천황께서 친히 선물을 하사했다는 징표가 아니겠습니까? 가와무라 사장도 선대인과의 약조도 있고 하니, 대인의 부탁이라면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비스듬히 앉아 있던 왕망이 자세를 고쳐 앉는다.

“그래, 무슨 부탁을 하면 된다는 겐가?”

“뒤를 봐달라고 하십시오.”

“무슨 뒤를?”

“제가 물건을 댈 테니, 대인께서는 제 뒤를 봐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대인의 뒷배를 가와무라 사장이 봐준다는 소문만 퍼트리면 일본 낭인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겁니다.”

문리가 어두운 왕망은 곧이곧대로 듣는 편이라 복잡한 셈법은 질색한다.

“도대체 무슨 물건이기에 그리도 복잡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게!”

얼마간 뜸을 들이던 리용이 주변을 둘러본 뒤 조심스레 귀띔한다.

“아편입니다.”

“뭐라고? 지금 아편이라고 했나?”

왕망은 하마터면 물고 있던 물부리를 떨어뜨릴 뻔했다.

“네! 아편입니다.”

종지부를 찍듯 또박또박 말을 마친 그가 왕망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안압이 치솟은 듯 왕망은 눈을 감곤 골몰한다. 잠시 후 그가 메마른 입술에 침을 바른다.

“그게 돈이 되는 사업이라고 들었네만······, 당국에 잡히면 극형으로 다스리는 중죄 아닌가?”

“큰돈 되는 사업치고 목숨을 담보하지 않은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더욱이 가와무라 사장의 뒷배가 필요한 겁니다.”

왕망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번들거린다.

“좋네. 내가 가와무라 사장을 만나보지. 물건은 확실하지?”

“이르다 뿐이겠습니다.”

리용은 안주머니에서 여러 겹으로 싼 뭉치를 꺼낸다. 그는 여러 겹으로 싼 포장지를 벗긴다. 거무튀튀한 진액이 퀴퀴한 내를 풍긴다. 왕망은 흠칫 놀라며 손을 떨기 시작한다. 퍼뜩 가로채곤 코를 킁킁거리며 신음을 낸다.


“상품 중의 상품이로다!”


그는 물부리에 아편 진액을 야멸차게 틀어박곤 숨을 들이켠다. 혼곤한 잠에 빠진 듯 그는 보료에 기댄 채 지그시 눈을 감는다.

친일파 인사로 조직된 대도회(大刀會)는 리용이 관리하는 어용단체다. 장쉐량의 심복인 그는 장쉐량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도록 전면에 나서서 짓궂은 일을 도맡아 처리한다. 그는 왕망을 아편 사업에 끌어들이라는 장쉐량으로부터의 지령을 받고 치밀하게 수행한다.

아편을 싸게 공급함으로써 눈엣가시인 마적단의 세력을 와해시킴과 동시에 지하경제를 통해 통치자금을 확보하려는 장쉐량과 가와무라의 계략은 그대로 적중한다. 왕망은 속수무책으로 그들의 마수에 걸려든다.



305.


재판은 이례적으로 빠르게 진행된다. 주범이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총기를 제공한 혐의가 인정된 왕리는 강제노역 10년에 처하는 중형이 선고된다. 왕리를 포함하여 중범죄자들이 탄 트럭이 호송차의 통제를 받으며 북만주의 철도현장으로 향한다.

평원을 벗어난 호송차량의 행렬이 구릉지역으로 접어든다. 선두 차량이 매캐한 매연을 뿜어내며 울퉁불퉁한 비탈길을 간신히 오른다. 차량이 꼬리를 물고 고갯마루를 넘을 즈음 통나무 십여 개가 맹렬한 기세로 굴러 떨어진다. 부지불식간에 나타난 장애물에 혼쭐이 난 기사들이 운전대를 꺾으며 안간힘을 다해보지만 역부족이다. 통나무를 피하려다가 전복되거나 충돌한 차량들이 연기에 휩싸여 옴짝달싹 못 한다.

헌병들이 피를 흘리며 뒤집힌 차에서 내린다. 멀쩡한 헌병들이 중상자를 밖으로 끌어내려는 순간 사방에서 총알이 빗발친다. 교전이라고 할 것도 없이 일방적인 집중포화가 십여 분가량 이어진다. 어디선가 세찬 휘파람소리가 잇달아 들린다. 총성이 이내 멎는다.

총을 든 주찬이 현장으로 다가간다. 마적 이십여 명이 설치류인 양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호송을 담당하던 헌병들은 전원 몰살당한다. 철갑을 덧댄 호송차에 갇힌 재수들은 괴성을 지르며 차벽을 두드린다. 뒤집혀진 호송차에 다가간 주찬은 굳게 닫힌 자물통을 향해 총을 발사한다. 마침내 뒤엉켜 있던 죄수들이 엉금엉금 기어 나오기 시작한다.

왕리는 부상을 입은 죄수들을 밀치며 차량 밖으로 빠져나온다. 마적들은 허공에 총을 쏘며 환호성을 지른다. 주찬을 알아본 왕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아낀다. 부하가 말을 이끌고 왕리 앞에 멈춘다. 그러곤 고삐를 건넨다. 말에 오른 왕리는 마적들과 함께 황급히 현장을 떠난다. 남겨진 죄수들은 헌병들의 옷과 가죽장화, 총기 등을 탈취하느라 정신이 없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마적들이 이슥한 쌍봉계곡의 품에 안긴다. 배고픔에 지친 늑대들이 능선을 배회하며 울부짖는다.

산채에 도착한 마적들이 군불을 떼기 시작한다. 왕리와 주찬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말을 아낀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네.”

짐짓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거리던 왕리가 침묵을 깬다.

“고맙다는 인사는 사양할게요. 빚을 갚았을 뿐이니까요.”

주찬은 짐짓 태연한 척한다.

“그렇다면 이제야 동등한 자격으로 한 배를 탄 게로군.”

“무슨 말씀인지?”

“아마 모르긴 해도 며칠 뒤에 우리 두 사람의 사진이 실린 전단지가 만주 전역에 나붙을 거야.”

왕리는 뒷말을 흐리며 얼마간 골몰한다. 부하가 다가와 부르는데도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두목!”

“······”

“두목!”

“근데 왜 내가 두목인가?”

왕리는 얼떨결에 되묻는다.

“마적의 적통은 당연히 선대인께서 생전에 정해주신 두목이 이으셔야지요.”

“고맙네. 그나저나 아버님의 장례식은 어떻게 치렀나?”

“장막이 전소돼서 유골조차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왕망은 더 이상 마적의 두목도 아니고 내 형도 아니다. 네 이 두 손으로 놈의 멱을 따고야 말겠다. 흐흐흨.”


왕리는 두 주먹으로 땅을 내려치며 목 놓아 곡(哭)을 한다. 아버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밤새도록 이어진다. 배고픔에 지친 늑대 무리도 꼬리를 감춘 채 쌍봉계곡을 떠난다.



306.


왕리와 주찬의 목에는 공히 고액의 현상금이 내걸린다. 만주에서 내로라하는 조직이 전부 달려들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특히 왕망파 소속의 마적단은 정당성을 회복하려는 차원에서 왕리를 역적으로 내몰아 평원을 이 잡듯 훑고 다닌다.

왕리파가 은신처로 삼던 쌍봉계곡도 위험에 노출된다. 마적들은 이삼년마다 엄격한 규율의 성인식을 치른다. 소년들은 무리를 지어 신성한 기운이 흐르는 성지(聖地)를 찾아 몇 달 동안 순례한다. 저마다 소년에게는 말과 무기와 약간의 소금만이 주어진다.

풍찬노숙은 예삿일이고 굶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가장 어려운 난관은 물을 구하지 못하는 것이다. 황량한 벌판에서 소금으로 연명하다 결국 끼니를 거른 채 집단으로 아사한 경우도 간혹 발생한다.

시행착오를 겪던 무리는 샛별을 나침반으로 삼아 방향을 잡고, 사냥술을 익혀 허기를 달랜다. 마침내 덤불에 조롱박을 매달아 밤새 맺힌 이슬을 얻는 데에 성공한다. 비로소 자신감을 되찾은 무리는 성지 순례를 무사히 마치고 부쩍 성장한 모습으로 복귀한다. 쌍봉계곡은 여러 성지 가운데 하나다. 따라서 마적이라면 한번쯤은 거쳤을 터였고, 기억을 되살린다면 충분히 찾아올 법하다.


왕리는 부하를 이끌고 대싱안링산맥(大興安嶺山脈)의 정상에 오른다. 풍수적으로 쌍봉계곡은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의 지맥으로 둘러싸인 형국이다. 산세가 험준하고 웅장하며 봉우리는 용솟음치는 것처럼 치솟아 가파르다.

그중에서도 금닭이 알을 품은, 일명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 불리는 움푹한 명당에 쌍봉계곡의 너른 터가 자리한다. 이렇듯 쌍봉계곡은 지리적으로 자연이 빚어낸 천혜의 요새와도 같은 곳이다.

꼼꼼히 지형을 파악한 왕리는 쌍봉계곡으로 통하는 노루목 세 곳을 눈여겨본다. 그러곤 부하를 시켜 폭약을 설치한다. 짐을 꾸린 부녀자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 쌍봉계곡은 폭염에 휩싸인다. 쏟아져 내린 돌무더기와 나무가 쌓이면서 쌍봉계곡에 듬직한 빗장이 걸린다.


주찬이 왕리를 따라 광활한 하늘 아래를 정처 없이 떠돌 때, 펑톈의 경제를 도맡아온 부흥은행에도 시련이 찾아온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의 막대한 잉여금을 관리하는 일본은행이 펑톈에 진출하면서 가와무라와 주운 간에 맺은 협정은 파기된다.

사실 주운도 ‘만철(滿鐵)’ 사장 가와무라가 건넨 서식을 책상 어딘가에 던져놓고 본 적도 없다. 말하자면 협정 자체가 강행 규정도 따로 없고, 불이행에 따른 손해배상 등도 적시되지 않은 일종의 요식 행위에 불과했기 때문에 따로 보관할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대화호텔의 테러 사건 이후 부흥은행을 찾는 고객들의 발길이 뚝 끊긴다. 헌병대가 지키고 있는 은행의 문턱을 자신 있게 넘어설 고객은 그리 흔치 않다. 패물이나 집문서를 맡기고 대출을 받기 위해 찾는 악성 고객이 대부분인지라 서슬 퍼런 헌병대의 눈빛만 봐도 들을 돌리기 일쑤다.

주운은 일본은행의 만주 진출을 식민자본의 침략이라며 맹렬히 성토한다. 그는 은밀히 항일단체에 군자금을 전달한다. 항일단체에 군자금을 기부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는 수사의 물망에 오른다.

고객의 이탈은 부흥은행의 자본의 잠식을 부추긴다. 가와무라의 회유와 헌병대의 겁박에 못 견딘 큰손들이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하면서 급기야 부흥은행은 파산을 맞기에 이른다. 투자자들에게 저택까지 압류당한 불세출의 사업가 주운은 끝내 서재 천장에 허리띠를 묶고 목을 맨다.


마적들은 소금과 밀가루 등의 생필품을 사기 위해 정기적으로 마을을 찾곤 한다. 남장한 차림으로 시장에 들른 주찬은 내색은 하지 않지만 부흥은행의 간판을 보는 걸로 불효를 갈음한다. 그녀는 말안장에 오도카니 앉아 남녘 하늘을 바라보며 입엣말로 아버지를 되뇐다. 그녀가 말머리를 돌리려는 순간 성난 사람들이 부흥은행 쪽으로 몰려간다. 그녀의 낯빛이 점점 새하얗게 변한다.

파죽지세로 은행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집기며 서류들을 문 밖으로 내던진다. 그러곤 불까지 지른다. 활활 타오르는 불빛은 성난 사람들의 얼굴에 어른거린다.

부흥은행의 파산과 아버지의 자살이라는 뜻밖의 소식을 접한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안장 위에서 정신을 잃는다. 마적들이 황급히 그녀의 말고삐를 잡아채곤 간신히 마을을 빠져나간다.



307.


권력에 눈먼 형의 비수에 횡사한 왕표의 막내아들 왕리. 그리고 일본의 강압으로 끝내 자살을 선택한 비운의 사업가 주운의 딸 주찬. 두 사람은 공히 교활한 음모와 부정한 알력으로부터 권력과 부와 아버지까지 찬탈당하는 상실감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왕리와 주찬은 서로를 위무하며 공동운명체로 거듭 태어난다.

왕리와 주찬의 첫 작품은 아버지를 저세상으로 보낸 불구대천지 원수에 대한 복수극이다. 그들은 대평원을 무대로 열차를 습격하는 강도로 돌변하여 활극에서나 볼 수 있는 무용담을 펼친다.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면서 만주의 교통은 마비된다. 질척한 웅덩이는 늪으로 변해 차량을 통째로 집어삼키기 일쑤고, 지반이 무너지면서 궤도를 탈선한 열차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전력공급에 차질을 빚으면서 밤은 암흑천지가 된다. 전신주가 유실되면서 연락이 두절되는 곳이 태반이다. 망연한 사람들은 그저 먹장구름에 뒤덮인 하늘을 원망하여 장마철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헌병 네 명이 현금운송차량의 앞뒤를 지키고 서 있다. 잠시 후 일본은행의 직원들이 현금이 든 행랑 대여섯 개를 차량에 싣는다. 두꺼운 철문이 닫히고 매캐한 연기를 내뿜은 운송차량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헌병들은 사이드카에 올라 앞뒤에서 운송차량을 호위한다.

운송차량이 펑톈의 중심가를 막 벗어나 기차역으로 향한다. 우레와 함께 번개가 번쩍거린다. 시퍼런 번갯불이 사이드카를 운전하는 헌병의 보안경에 어른거린다. 우중충한 날씨 탓에 전조등을 켠 사이드카가 커브를 돌 즈음 마적 한 병이 기름에 젖은 볏단에 담배꽁초를 던진다. 삽시간에 불길이 치솟는다.

두 마리 말이 활활 타오르는 볏단을 양편에서 끌며 사이드카를 향해 돌진한다. 가까스로 볏단을 피한 사이드카가 곤죽이 된 웅덩이에 고꾸라진다. 뒤미처 달려오던 트럭이 급정거한다. 트럭은 이미 관성에 이끌려 중심이 무너진 상태다. 그대로 상가로 돌진한 트럭은 흰 연기를 내뿜으며 뒤집힌다.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마적들은 헌병들을 제압하곤 신속히 금고가 탑재된 화물칸에 폭약을 설치한다. 도화선은 불티를 날리며 예정된 시간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뇌관에 근접한다.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리며 점점 다가온다. 폭음과 동시에 불기둥이 치솟는다. 화물칸의 쇳덩이가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행랑을 안장에 얹은 마적들은 빗발치는 총격을 뒤로하고 돈다발을 거리에 흩뿌린다. 돈을 줍기 위해 거리로 뛰어든 행인들은 온통 흙탕물을 뒤집어쓴 채 한데 뒤엉킨다. 어둑해진 지평선 너머로 점점이 흩어진 마적들은 어둠 저편으로 자취를 감춘다.


현금수송차량이 강탈당한 이튿날에도 비는 억수로 퍼붓는다. 비상이 걸린 경찰서와 헌병대는 유실된 전신주를 세워 두절된 통신망을 복구한다. 현금차량강탈사건의 수사부가 설치된 경찰서에 경찰서장과 헌병대장 그리고 수사관들이 모여 머리를 맞댄다.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가 날갯죽지가 꺾인 새처럼 몇 차례 퍼드덕거리곤 맥없이 멈춘다. 겨드랑이가 흥건히 젖은 서장이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본다. 이윽고 희미한 빛을 발하던 전등마저 두어 차례 깜빡이더니 꺼진다. 일순 실내에 두려움이 엄습한다. 빛이라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동공이 내뿜는 안광(眼光)만이 유일하다.

서장이 수사과장에게 턱짓을 한다. 과장이 수화기를 들고 교환수를 재촉한다. 그러나 ‘뚜우~~~’하는 먹통이 된 신호음만 무심히 들린다. 전기도 끓기고 통신도 두절된 수사부가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대화호텔 로비에 무장한 마적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로비를 가로질러 계단을 오른다.

두건을 쓴 사내들은 복도를 지키고 있던 왕망의 부하들을 손쉽게 제압한다. 특실에 있던 부하들도 아편에 찌들어 불청객의 방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두건을 벗은 왕리가 뚜벅뚜벅 왕망 앞으로 다가간다. 환영에 빠진 왕망은 실실 웃으며 왕리에게 알은체를 한다.


“내 동생 왕리야! 아버지를 뵈러 왔니? 아버지는 편히 계신다. 하하핫!”

“아버지를 죽인 죄인이 제정신으로 산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왕리야! 기억하니? 너한테 말 타기를 가르친 사람이 바로 나 아니냐? 이리 오렴! 형이 말이 될 테니, 어서 내 등에 올라 타라!”

비틀거리며 다가오던 그가 등롱을 건드려 넘어뜨린다. 그는 무릎을 꿇고 한 손을 휘저으며 왕리를 부른다.

“왕리야! 내 동생 왕리야! 이리오렴!”

“구제불능이군.”

“어서, 이리 와! 형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왕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젖는다. 그는 손에 든 칼을 허리춤에 꽂곤 권총을 뽑아든다.

“내 손에 더러운 피를 묻힐 순 없지.”

왕망은 여전히 애타게 왕리를 찾는다.

“아우야! 형이 여기 이렇게 있잖니? 어서 등에 타거라. 저 너른 만주 벌판의 바람을 가르며 달려보자꾸나.”

“나를 원망하지 마라! 모든 것이 다 네가 지은 업보라 생각해라. 이 총탄은 구천을 헤매고 있는 아버지의 영혼을 위한 것이다.”

‘탕’, 총탄이 왕망의 가슴에 박힌다. 침대에 비뚜름히 몸을 기댄 왕망이 피를 토하며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이번 총탄은 형제애를 저버린 동생의 복수다.”


‘탕’, 두 번째 총성이 왕망의 이마에 박힌다. 바닥에 널브러진 왕망을 뒤로한 채 왕리는 마적들과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간다. 뒤를 쫓는 헌병들과 교전이 펼쳐진다. 옥상에서 기다리고 있던 주찬이 호텔 뒷골목으로 밧줄을 내던진다.

옥상 입구에 설치된 폭탄이 터진다. 왕리와 주찬은 부하들과 함께 밧줄을 타고 호텔을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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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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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134화 악마의 최후 +3 19.07.12 212 1 16쪽
133 133화 고귀한 죽음 +1 19.07.11 112 1 12쪽
132 132화 무지개 +1 19.07.10 105 1 13쪽
131 131화 차관협정(借款協定) +2 19.07.05 115 1 14쪽
130 130화 반공포로석방 +1 19.07.01 126 2 13쪽
129 129화 한일회담 +1 19.06.29 130 2 15쪽
128 128화 폭탄테러 +1 19.06.26 138 2 13쪽
127 127화 카츄샤 +1 19.06.24 121 2 13쪽
126 126화 의사 왕룽 +1 19.06.23 123 3 17쪽
125 125화 빅터 한 재단 +2 19.06.19 129 3 13쪽
124 124화 인천상륙작전 +1 19.06.13 164 2 15쪽
123 123화 메모리 가든 +1 19.06.12 128 2 15쪽
122 122화 겹생 +3 19.06.10 125 2 16쪽
121 121화 하와이 +1 19.06.07 135 3 14쪽
120 120화 소령 맥나마라 +4 19.06.06 139 2 15쪽
119 119화 한초희 +1 19.06.05 144 2 14쪽
118 118화 맥아더 원수 +1 19.06.04 136 2 14쪽
117 117화 기만방송 +1 19.06.03 133 2 13쪽
116 116화 코리안 커넥션 +1 19.06.01 144 2 12쪽
115 115화 잠수함 +1 19.05.30 197 2 13쪽
114 114화 6.25 전쟁 +1 19.05.29 160 2 12쪽
113 113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특명 1호 ‘폭풍’ +1 19.05.21 138 2 11쪽
112 112화 금괴수송작전 +1 19.05.19 181 2 10쪽
111 111화 '암호명 A-1' +1 19.05.18 131 2 13쪽
110 110화 악연(惡緣) +1 19.05.17 130 2 14쪽
109 109화 마지막 미션 +1 19.05.16 132 2 12쪽
108 108화 애치슨 라인 +1 19.05.15 128 2 12쪽
107 107화 연적(戀敵) +1 19.05.15 149 2 12쪽
106 106화 독살(毒殺) +1 19.05.14 145 2 12쪽
105 105화 마돈나 다방 +2 19.05.13 148 2 15쪽
104 104화 한국은행 +1 19.05.11 151 2 14쪽
103 103화 비밀거래 +1 19.05.10 174 2 12쪽
102 102화 남미이주작전 +1 19.05.10 169 2 13쪽
101 101화 트루먼 독트린 +1 19.05.10 138 2 11쪽
100 100화 숙명의 라이벌 +1 19.05.10 144 3 18쪽
99 99화 Jane Doe +2 19.05.10 144 2 13쪽
98 98화 앙숙, 이승만과 김구 +1 19.05.10 140 2 12쪽
97 97화 반도호텔 +1 19.05.10 138 2 13쪽
96 96화 좌익과 우익 +1 19.05.09 138 2 13쪽
95 95화 조선인민공화국 +1 19.05.09 145 2 17쪽
94 94화 일본패망(日本敗亡) +1 19.05.09 149 2 12쪽
93 93화 원자폭탄 +1 19.05.09 139 2 13쪽
92 92화 김일성 +1 19.05.09 148 1 14쪽
91 91화 독수리 작전 +1 19.05.09 148 1 14쪽
90 90화 이승만 +1 19.05.09 135 1 14쪽
89 89화 비밀요원 나타샤 +1 19.05.09 129 2 15쪽
88 88화 OSS(미국전략사무국) +2 19.05.09 134 2 16쪽
87 87화 승전(勝戰) +1 19.05.09 128 2 14쪽
86 86화 진주만공습 +1 19.05.08 130 1 16쪽
85 85화 갈라예프 +2 19.05.08 129 2 16쪽
84 84화 채권(債券) +1 19.05.08 136 2 11쪽
83 83화 다카키 마사오 +1 19.05.08 146 2 12쪽
82 82화 광복군(光復軍) +1 19.05.08 129 2 13쪽
81 81화 육군정보학교 +2 19.05.08 128 2 11쪽
80 80화 홍콩행 +1 19.05.07 137 3 13쪽
79 79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3 19.05.07 126 2 12쪽
78 78화 김원봉과 김구 +1 19.05.07 123 2 16쪽
77 77화 까레이스키 +3 19.05.07 123 2 12쪽
76 76화 탈출(脫出) +1 19.05.07 130 3 9쪽
75 75화 박정희와 최태민 +1 19.05.07 135 2 9쪽
74 74화 중일전쟁(中日戰爭) +1 19.05.07 128 2 13쪽
73 73화 강제이주 +3 19.05.06 124 1 12쪽
72 72화 마루타 +1 19.05.06 122 1 12쪽
71 71화 막후 실력자 +1 19.05.06 122 2 13쪽
70 70화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등장 +1 19.05.06 126 1 15쪽
69 69화 천황결사옹위청년단 +1 19.05.05 129 1 15쪽
68 68화 후흑학(厚黑學) +1 19.05.05 132 1 13쪽
67 67화 경몽장(耕夢莊) +1 19.05.05 124 1 12쪽
66 66화 학교(學校) +1 19.05.05 126 1 8쪽
65 65화 국제연맹(國際聯盟) +1 19.05.05 126 1 19쪽
64 64화 나타샤 +1 19.05.05 126 1 11쪽
63 63화 보고서 +1 19.05.05 126 1 11쪽
62 62화 시인과 영웅 +2 19.05.04 138 2 15쪽
61 61화 탄생의 비밀 +2 19.05.04 132 2 18쪽
60 60화 국경수비대 +1 19.05.03 127 2 13쪽
59 59화 제네바협약 +4 19.05.03 132 2 18쪽
58 58화 명백한 운명 +1 19.05.03 125 1 16쪽
57 57화 미두취인소(米豆取人所) +1 19.05.03 129 1 12쪽
56 56화 생포(生捕) +1 19.05.02 129 2 13쪽
55 55화 참패(慘敗) +1 19.05.02 126 2 14쪽
54 54화 향수병(鄕愁病) +1 19.05.02 129 2 18쪽
53 53화 음악회 +1 19.05.02 130 2 18쪽
52 52화 들개 진구 +1 19.05.02 131 2 24쪽
51 51화 가락지 +3 19.05.02 134 2 26쪽
50 50화 덫 +1 19.05.01 137 1 28쪽
49 49화 추격전(追擊戰) +1 19.04.30 126 2 35쪽
48 48화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1 19.04.30 132 2 39쪽
47 47화 광휘와 빅터 +3 19.04.29 133 2 33쪽
46 46화 특별수사본부(特別搜査本部) +4 19.04.29 130 2 41쪽
45 45화 만저우리(滿洲里) +4 19.04.28 123 3 35쪽
44 44화 폭풍전야(暴風前夜) +1 19.04.28 124 3 37쪽
43 43화 Boys, be ambitious! +1 19.04.27 132 2 39쪽
42 42화 만주국(滿洲國) +5 19.04.27 140 2 38쪽
41 41화 만몽영유계획(滿蒙領有計劃) +1 19.04.26 137 3 25쪽
40 40화 재회(再會) +1 19.04.26 139 3 30쪽
39 39화 빅터 한 +1 19.04.25 144 3 49쪽
38 38화 박진만 +2 19.04.25 157 3 45쪽
37 37화 정보국 5과 +3 19.04.24 154 3 51쪽
» 36화 마적(馬賊) 왕리 +2 19.04.24 156 3 49쪽
35 35화 삼두정치(三頭政治) +2 19.04.23 152 3 42쪽
34 34화 주찬 +1 19.04.23 149 3 51쪽
33 33화 만주야사(滿洲野史) +2 19.04.22 147 3 50쪽
32 32화 서광휘 +2 19.04.22 150 3 47쪽
31 31화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 +2 19.04.21 177 4 47쪽
30 30화 미쓰야협정(三矢協定) +4 19.04.21 151 4 46쪽
29 29화 출산(出産) +3 19.04.20 162 4 43쪽
28 28화 밀항(密航) +2 19.04.20 150 4 45쪽
27 27화 불령선인(不逞鮮人) +1 19.04.19 149 4 43쪽
26 26화 님의 침묵 +1 19.04.19 157 4 48쪽
25 25화 이민(移民) +2 19.04.18 167 4 39쪽
24 24화 회자정리(會者定離) +2 19.04.18 158 5 44쪽
23 23화 여걸(女傑) 수잔 +5 19.04.17 160 4 46쪽
22 22화 3·1 만세운동 +5 19.04.17 161 4 44쪽
21 21화 천적(天敵) +1 19.04.16 161 5 49쪽
20 20화 아카키 타이요우(赤木太陽) +4 19.04.16 169 5 52쪽
19 19화 망국(亡國) +4 19.04.15 177 3 49쪽
18 18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3 19.04.15 179 3 46쪽
17 17화 한성진격작전(漢城進擊作戰) +4 19.04.14 176 4 49쪽
16 16화 의병전쟁(義兵戰爭) +4 19.04.14 182 4 43쪽
15 15화 춘투(春鬪) +5 19.04.13 194 3 47쪽
14 14화 암살미수(暗殺未遂) +4 19.04.13 210 3 37쪽
13 13화 결혼(結婚) +3 19.04.12 287 6 42쪽
12 12화 돈버거 +9 19.04.12 270 7 44쪽
11 11화 대한제국(大韓帝國) +2 19.04.11 290 7 45쪽
10 10화 김출세(金出世) +7 19.04.11 316 8 42쪽
9 9화 낙향(落鄕) +4 19.04.10 337 8 42쪽
8 8화 혁파안(革罷案) +4 19.04.10 355 9 41쪽
7 7화 증기자동차 +2 19.04.09 414 12 22쪽
6 6화 2차 사행(使行) +2 19.04.09 419 13 24쪽
5 5화 견문록(見聞錄) +5 19.04.08 466 14 19쪽
4 4화 북경(北京) +1 19.04.08 572 12 19쪽
3 3화 만남 +1 19.04.08 699 13 15쪽
2 2화 1차 사행(使行) +2 19.04.08 1,031 14 14쪽
1 1화 파락호(破落戶) 이하응 +17 19.04.08 2,003 2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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