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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공모전참가작 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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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최장르
작품등록일 :
2019.04.08 16:31
최근연재일 :
2019.07.12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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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28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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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쪽

45화 만저우리(滿洲里)

님의 침묵




DUMMY

367.


만저우리(滿洲里)는 소련과 만주의 경계선이 교차하는 국경도시다. 로마노프왕조의 차르 체제가 군림하던 1898년도에 러시아는 이곳에 시베리아철도와 둥칭(東淸)철도를 연결하는 교통도시를 구축한다. 처음에는 그저 교통요지로 여겨졌던 만저우리는 1924년 레닌 사후 집권한 스탈린이 군대를 주둔시키며 극동정책의 전초기지로 삼는다.

소련의 남하정책을 눈엣가시처럼 여긴 일본은 만주국군을 국경에 배치한다. 주요 국경에 전선이 형성되면서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된다. 소련도 일본의 대응에 뒤질세라 만저우리에서 실효적인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자국민을 이주시킨다.

본토에서 온 이주자뿐만 아니라 만주에서 망명한 만주인과 한인이 늘어나면서 만저우리에는 초등교육에서부터 고등교육까지 담당하는 교육기관이 날로 증가한다. 각 학교마다 순수 러시아계통의 백인뿐만 아니라 만주인과 한인, 몽골인까지 흡수하며 다양한 인종이 공존한다.

소비에트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는 소련은 자국문화정책을 고수하는 탓에 정치나 종교, 문화 등에 관해서 배타적이다. 따라서 교육은 철저하게 러시아의 언어와 문화, 역사 위주로 진행된다. 망국민의 자녀들이 자국의 정서를 익히기 위해서는 방과 후에 따로 학습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리쥔의 아내 슈란이 마적단의 부녀자들을 이끌며 망명생활을 꾸려나간다. 경덕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어 부녀자들이 돌보며 간호에 힘쓴다. 초희가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학교를 마치고 귀가할 즈음 슈란이 움막을 기웃거린다.


“대인 안에 계십니까?”

마른기침이 잦아든 뒤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움막 밖으로 새어 나온다.

“뉘시오?”

“슈란입니다.”

경덕이 문틈으로 수척한 민낯을 내보인다.

“바람이 찹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죠.”

슈란이 경덕을 부축하고 움막으로 들어가려고 할 즈음 또래와 재잘거리며 고샅길로 접어든 초희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와 경덕에게 안긴다.

“학교 잘 다녀왔습니다. 슈란, 아줌마! 안녕하세요?”

슈란은 초희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초희가 이번에도 받아쓰기 백점 받았다지?”

먼저 움막 안으로 들어선 초희가 침대에 걸터앉아 가방에서 공책을 꺼낸다.

“산수도 백점 받은걸요.”

경덕이 책갈피를 넘기는 초희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어젯밤 하얼빈에서 보따리상이 도착했습니다.”

슈란은 고개를 돌려 바깥을 살핀 뒤 조심스레 말을 보탠다.

“서 대장께서 책을 보내셨습니다.”

“나랏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경덕이 한글교본을 펼쳐본 뒤 초희를 부른다.

“초희야! 네가 일등 한 것을 오라비가 알았나보다.”

몽당연필의 심에 침을 바르던 초희가 건성으로 답한다.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여기 이렇게 증거가 있는데도?”

물끄러미 경덕을 바라보던 초희는 손에 책이 들려있는 것을 보곤 까무러치게 놀란다.

“정말이네! 오빠가 일등하면 한글책을 보내준다고 했잖아. 와, 신난다!”

초희가 신기한 듯 책을 펼쳐보고 싱글벙글한다. 물끄러미 초희를 바라보던 경덕이 슈란에게 속삭인다.

“별다른 소식은 없답니까?”

“장돌뱅이 말로는 만주철도가 정차하는 도시마다 검문검색이 부쩍 심해져 애를 먹었다더군요. 특히 하얼빈과 가까운 슈앙쳉바오역은 기차가 정차하지 않고 통과하는 바람에 수십 리를 걸어오느라 욕을 봤답니다.”

“슈앙쳉바오?”

경덕은 눈을 되록거리며 귀를 쫑긋 세운다. 슈란이 덧붙인다.

“만주국이 생긴 이후 일본 부자들이 거주하는 신흥도시라고만 들었습니다.”

“신흥도시라면 드나드는 물자며 인력이 상당할 텐데, 기차가 그냥 지나쳤다고?”

경덕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의구심을 드러낸다. 슈란도 의심쩍은 듯 입술을 비죽이 내민다.

“아무래도 이번 거병의 목적지가 슈앙쳉바오인 듯하오.”

“쌍봉계곡에 머물 때 남편이 여러 차례 슈앙쳉바오로 정찰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아무쪼록 의용군이 무탈하기를 빌 밖에요.”

경덕은 말을 마치자마자 쿨럭쿨럭 밭은기침을 쏟아낸다. 그의 입가에 피가 흥건하다. 각혈을 본 슈란이 얼른 수건으로 입을 닦아준다. 파르르 떨리는 눈자위가 유난히 누런빛을 띤다.

“대인, 어서 쉬십시오. 제가 냉큼 죽을 쑤어 오겠습니다.”

슈란이 서둘러 나간다. 초희는 물수건을 꼭 짠 뒤 누워있는 경덕의 이마에 올린다.

“아빠, 나 일등하면 건강해지기로 약속했잖아? 오빠는 약속을 지켰는데, 아빠는 왜 안 지켜? 나한테 혼나려고.”

심통이 난 초희가 눈을 흘기며 경덕을 타박한다. 경덕은 배시시 웃으며 초희의 조막손을 꼭 쥔다.

“초희한테 혼나려면 아빠가 건강해야 되는데······. 초희도 일등하지 못하면 아빠한테 혼꾸멍날 줄 알아!”

그가 종주목을 쥐고 정수리를 콕 쥐어박는 시늉을 한다. 초휘가 살짝 뒤로 물러서곤 양손을 꼭 쥔다.

“맨날 혼나는 사람이 누군데? 아빠면서······, 쳇! 얼른 기운 차리지 않으면 내가 정말 혼내준다, 알았지?”

“아무렴, 초희한테 혼나기 전에 기운 차릴 게. 그리고 초희야! 사람은 공부만 잘 해서는 안 돼! 사람이란 자고로 됨됨이가 올곧아야 해. 항상 선생님하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걱정하지 마, 아빠! 난 선생님 말씀도 잘 따르고 친구들하고도 잘 놀아! 아빠만 건강하면 좋겠어. 나한테 걱정거리는 아빠란 말이야!”


딸의 재롱에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몸을 옆으로 가눈다. 그의 눈가에 물기가 촉촉하다.



368.


만주국이 성립한 후 일본은 신징특별시(新京特別市)에는 수도경찰청(首都警察廳)을 설치하고, 펑텐(奉天)과 하얼빈(哈爾濱)에는 경찰국(警察局)을, 안둥(安東)과 지린(吉林), 치치하얼(齊齊哈爾) 등에는 경무처(警務處)를 신설하여 만주의 치안을 장악한다. 경찰청 산하 각 경찰국과 경무처에는 고도의 기밀성을 갖춘 정보부서를 두어 반체제 세력을 솎아내기 시작한다.

자고로 비밀경찰제도란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파시즘이 지배하는 전체주의국가나 독재정부체제에서 정치사찰을 목적으로 조직된 기구다. 대표적으로 스탈린의 ‘엔케베데’와 히틀러의 ‘게슈타포’가 이에 해당한다.

스탈린과 히틀러보다 일찍이 1911년도에 ‘특별고등경찰제(特別高等警察制)’를 도입한 일본은 자국에서 익힌 노하우를 한국과 만주에 전파하여 식민개척의 밑거름으로 활용한다.

신징의 수도경찰청에 설치된 특고과는 각 지방의 특고계를 관장하며 비밀경찰을 양성한다. 경찰청의 고문관으로 임명된 타이요우는 경성에서 온 특고형사들을 주요 도시의 경찰국의 교관과 주무관으로 파견한다. 특고형사로 특채된 대도회 조직은 공작과 고문 등의 기술을 익힌 후 공포정치의 하수인으로 악명을 떨친다.


대도회를 이끌던 리용은 하얼빈 경찰국의 특고과장으로 영전한다. 굶주린 늑대처럼 도시의 뒷골목을 전전하며 아편과 매춘으로 조직을 굴리던 일개 조직폭력의 두목이 경정으로 특채되며 하얼빈은 암흑시대를 맞이한다. 타이요우가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전신을 받은 그는 화려한 환영식을 준비한다.

타이요우는 유럽풍의 거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화려한 특급객차를 타고 하얼빈역에 도착한다. 관동군의 참모장 이상의 장성만이 탈 수 있는 특급객차가 도착하자 리용은 혀를 내두른다. 타이요우의 위상에 주눅이 든 그는 목석이라도 된 듯 옴짝달싹못한다. 플랫폼에 도열한 관악대와 기마대는 특별객차가 본선을 벗어나 측선으로 옮겨질 때까지 리용의 눈치만 살핀다.

마침내 조차장에 멈춘 특별객차가 분리된다. 객창의 커튼이 살짝 젖힌 틈으로 타이요우가 얼굴을 빠끔 내민다. 부동자세로 경례를 한 리용이 두 손을 번쩍 쳐든다. 관악대가 팡파르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기마대가 연주에 맞춰 말머리를 돌리는 순간 객창 속 타이요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도리질을 한다.

황망한 리용이 손사래를 치자 환영식의 식전 행사가 싱겁게 끝이 난다. 리용이 철도를 가로질러 특급객차로 달려간다.


“경시정님, 하얼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객차로 들어서자마자 리용은 거친 숨을 내뿜으며 인사말을 건넨다.

“빠가야로! 열차강도를 당해 발칵 뒤집혀졌는데 연주를 하다니, 지금 제정신인가! 게다가 이곳에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안중근한테 총을 맞은 사실을 벌써 잊었나? 제발 공부 좀 해라, 공부 좀! 어깨에 달린 계급장이 부끄럽지도 않나?”

멜빵차림의 타이요우는 아직 성이 풀리지 않은 듯 재차 불만을 터트린다.

“내가 이곳에 온다는 것을 광고라도 할 셈인가? 오늘 내가 독립군놈의 총에 맞아 암살을 당하면 좋겠냔 말이다!”

얼굴이 새하얘진 리용이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이미 역 밖에 경비병을 세워놓고 승객들의 출입도 통제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환영만찬이 차려진 호텔도 이중삼중으로 철통경비를 해두었습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한 의도가 오히려 빈축을 산다. 저잣거리를 주름잡던 시정잡배에서 관직까지 오르며 불세출의 무용담을 공유한 점에서 타이요우가 리용의 공명심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무고한 살생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한 탓에 늘 사위에 복수의 칼을 품은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은 성공의 또 다른 이면임을 잘 아는 그가 아닌가.

“자네의 선의를 무시하려는 게 아닐세! 나나 자네나 대로를 활보하며 마냥 희희낙락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잖아?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만몽영유권을 최전선에서 실행하는 비밀조직이란 사실을 잊지 말게! 알았나? 두 번 다시 빈틈을 보이면 용서치 않을 거야!”

리용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연신 머리를 조아린다.

“두 번 다시 경시정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환영식 따위는 집어치우고 경무국 정보담당관들을 소집해! 난 공식적으로 이곳에 온 적도, 머문 적도 없는 유령이야.”

“쥐도 새도 모르게 회의를 소집하겠습니다.”


리용이 객차를 나간 후 타이요우는 부하들과 하얼빈의 지도를 펼쳐놓고 머리를 맞댄다.



369.


청조(淸朝)시대부터 러시아와 교역이 활발했던 하얼빈은 만주동북지역에서 손꼽히는 무역도시로 성장한다. 시내를 관통하는 대로를 따라 목재와 벽돌로 지어진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이 즐비한 중앙대가(中央大街)는 일찍이 만주에 진출한 러시아인들의 거주지가 형성된 곳이다. 만주의 내로라하는 상류층과 사업가들이 붐비면서 중앙대가는 사교의 메카로 자리매김한다.

룽하오 중령이 주선한 둥베이의용군 측과의 만남은 중앙대가의 한복판에 있는 모던호텔에서 이루어진다. 외국인들의 사교장으로 유명한 모던호텔은 비교적 감시가 소홀한 편이다. 하루 종일 조찬을 시작으로 오찬과 만찬으로 이어지는 사교모임은 보드카와 코사크댄스가 판을 치는 파티에 이르러서야 막을 내린다. 따라서 분내를 폴폴 풍기는 꽃들과 그 주변부를 에두른 부나비들은 오직 본능에 충실한 짝짓기에 혈안이 된 나머지 구석진 테이블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장군님, 중원에서 온 손님들이 긴히 뵙자고 해서 모시고 왔습니다.”

팔걸이에 기댄 채 턱을 괸 카오펑린은 비뚜름히 앉아 상대를 관망한다. 넙데데한 턱살에 파묻히기라도 한 듯 부엉이처럼 이따금 눈만 끔뻑거릴 뿐 표정에 변화가 없다.

“미국해군정보국 소속 빅터 한 소령입니다. 고명한 장군님을 뵙게 돼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워싱턴에서는 장군님이 이끄는 둥베이의용군의 행보에 관심이 많습니다.”

빅터로부터 인사말을 들은 카오펑린이 허리를 곧추세우며 자세를 바로잡는다.

“워싱턴에서 관심을 보내준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 아메리카는 장제스와 친하다고 들었는데, 어찌 이리 먼 곳까지 왔는가?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군.”

그는 시를 읊조리듯이 중국어 특유의 사성(四聲)으로 활용해 부드럽게 말을 한다. 그러나 언중에 가시 돋친 뜻을 간파한 짱웨이가 정곡을 찌른다.

“장군님! 지금 난징정부의 상황은 전과 다릅니다.”

카오펑린이 눈을 부라리며 그를 쏘아본다.

“자네가 누군데 감히 뭘 안다고 난징정부를 입에 담는가?”

험악한 분위기를 감지한 빅터가 끼어든다.

“장군님, 짱웨이 중위는 난징정부의 정보국 수장 천청 장군이 보낸 연락장교입니다.”

카오펑린이 결기를 드러내며 불편한 심기를 분출한다.

“과연 난징정부는 삼천만 만주민족을 동포로 인정하지 않는 게 틀림없군. 동북군이 일본과 전쟁 중일 때 장제스는 ‘부저항 지시’를 내려 결정적으로 만주가 일본에 침략당하는 것을 방조하지 않았나? 난 지금도 동족이 할 짓은 아니라고 보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손발이 부들부들 떨려. 그런데 삼천만 만주민족이 대동단결하여 만주를 되찾으려고 하는데, 이제 와서야 사람을 보낸다? 그것도 겨우 코흘리개나 다름없는 천청 따위가 중위를 보내놓고 만주를 제대로 대접한다고 생색이라도 낼 속셈인가보지?”

코사크댄스에 따라 아코디언이 뿜어내는 리듬이 절정으로 치달았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격앙된 목소리 때문에 주위의 이목을 끌 뻔했다. 고개를 삐딱하게 쳐든 짱웨이가 코를 매만지며 카오펑린과 눈싸움을 펼친다.

“장군님,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장제스 주석이 봉건세습을 타파하고 중국을 통일할 때 장군은 무슨 도움을 주셨습니까? 장 주석이 중국대륙을 빨간 홍기로 물들인 공산군과 싸울 때는 뭘 하셨죠?”

짱웨이가 노골적으로 성미를 드러낸다. 빅터가 팔을 잡으며 저지한다. 카오펑린은 가소로운 듯 조소를 터트린다.

“중국 통일? 관동군이 만주를 집어삼켰다면 과연 장제스가 북경을 사수할 수 있었을까? 어림없는 소리! 관동군의 대륙침략을 온전히 막아낸 건 바로 삼천만 만주민족의 희생이 있어서 가능했어!”

술을 홀짝거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주시하던 룽하오가 비아냥거린다.

“중국 대륙을 호령하는 두 세력이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도 지금까지 중국이 통일되지 못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군요. 소령!”

룽하오가 자신을 향해 소리치자 빅터가 황망한 눈으로 응대한다.

“약속한대로 나머지 잔금이나 주시오. 난 환락가에 가서 애첩 젖무덤에 코나 박고 분내나 맡으렵니다. 일본놈들이 백주대낮에 자기 땅인 양 활보해도 끽 소리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놈의 통일 타령은? 에잇! 어서 잔금이나 치르시오.”

빅터가 핸더슨에게 턱짓을 한다. 핸더슨이 가방에서 돈뭉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룽하오는 주섬주섬 돈다발을 가슴팍에 넣고 단추를 채운다. 그는 마저 술잔을 비운 뒤 트림까지 거하게 한다. 그러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유유히 사라진다.

“장군님! 저와 짱 중위가 온 것은 둥베이의용군의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서 사전 절차로 온 겁니다. 의용군의 의중만 제대로 전달된다면 장군님의 격상에 맞는 특사가 따로 찾아뵐 겁니다.”

빅터가 의전을 언급하자 다소 누그러진 카오펑린이 의뭉한 미소를 짓는다.

“의용군의 의사를 타진한다? 그럼 우리의 작전이 외부에 노출될 수도 있다는 건데, 어떻게 자네를 믿고 중차대한 안건을 말하겠나?”

빅터가 고개를 끄덕인다. 핸더슨이 가방에서 봉투를 꺼낸다.

“이 안에 아메리카합중국의 국무장관 스팀슨이 서명한 밀서가 있습니다.”

빅터가 밀랍으로 봉인된 봉투를 카오펑린 쪽으로 내민다. 카오펑린이 봉인을 뜯고 밀서를 꼼꼼히 읽는다.

“흠! 미국 정보부와 난징정부가 정보업무를 협약하여 의용군을 돕겠다는 얘기군. 일본군과 전쟁하는 쪽은 우린데, 도대체 정보만 제공한다는 저의를 모르겠네. 우리한테 필요한 건 정보가 아닐세. 우리한테 당장 필요한 건 관동군이 보유한 무기보다 훨씬 뛰어난 최신식무기일 뿐이네.”

카오펑린은 여전히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상대의 의중을 살핀다.

“어떤 정부의 내정에도 불간섭한다는 것이 아메리카합중국의 공식적인 입장입니다. 따라서 무기를 제공할 수 없습니다.”

빅터가 단호한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 카오펑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뒤에 서 있던 부관이 그의 어깨에 코트를 얹어준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네. 오늘 만난 건 비밀로 해주게.”

그가 뒤로 돌아서려는 찰나 빅터가 거절할 수 없는 거래를 제시한다.

“하얼빈으로 오는 도중에 열차강도와 맞닥뜨렸습니다. 다행히도 일반 승객한테는 관심이 없더군요. 만주철도의 금고가 털렸다던데······”

그는 얼마간 상대에게 패를 고를 수 있는 말미를 준다. 치부라도 드러난 듯 카오펑린의 민낯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기다렸다는 듯 빅터가 앞에 놓인 말을 제거하고 장군을 부른다.

“군자금이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만······”

카오펑린이 등을 보인 채 서성거린다. 그의 속셈을 모를 리 없는 빅터가 귀가 솔깃한 거래를 제안한다.

“출처미상의 군자금이니만큼 절대 비밀을 보장해주셔야 합니다.”

찬찬히 돌아선 카오펑린이 애써 표정을 관리한다.

“원래 군자금은 흔적을 남겨서는 아니 되는 돈이지. 곧 실무진을 꾸려 사람을 보낼 테니, 그때 만나서 얘기하는 게 좋겠네.”

빅터가 그에게 명함을 넘겨준다.

“제가 묵고 있는 호텔입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군.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무사하길 바라네.”


카오펑린과 빅터는 취객들 틈을 뚫고 연회장을 떠난다.



370.


조차장을 중심으로 역사 주변은 삼엄한 경비가 펼쳐진다. 수상한 기척을 느낀 수색견들이 이따금 짖는 소리만이 들릴 뿐 환히 불 밝힌 특별객차 주위로는 적막이 흐른다.

하얼빈 경찰국의 특별고등경찰과 소속의 형사들과 만주국의 헌병장교와 대도회의 간부들이 타이요우를 에두른 채 마라톤회의를 진행한다. 객실 벽에 걸린 시계가 12시를 가리키며 요란하게 몸부림을 친다. 타이요우가 움푹한 눈자위를 매만지며 정보담당관의 보고를 경청한다.


“둥베이의용군에 독립군이 합류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내부에 심어놓은 정보원에 의하면 철저한 보안 속에 둥베이의용군의 수장 카오펑린이 수시로 독립군 인사들과 접촉한다고 합니다. 특이한 점은 마적단이 합류했다고 하는데, 예전과 달리 둥베이의용군보다 군령이 엄격하고 전투력이 향상됐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독립군의 이탈세력이 마적과 연계하여 군제를 재편한 듯합니다. 그리고 이번 열차강도도 마적과 서광휘가 개입됐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타이요우의 눈빛이 번뜩인다. 지난날 정양호에서 경덕 일행을 놓쳤던 일이 떠오른 까닭이다.

“마적이라면 내가 진 빚이 있지. 열차나 강탈하는 강도떼가 독립군과 빌어 붙어서 대일본제국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 만주 들개가 다 웃을 일이군.”

정양호의 아픈 기억을 공유하는 리용이 그의 비위를 맞춘다.

“경시정님! 당장이라도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놈들의 군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겠습니다.”

“소를 잡는 칼로 닭의 모가지를 쳐야 쓰겠나? 놈들이 꼬인다는 것은 곧 모종의 음모를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다. 게다가 그 중심에 독립군놈들이 개입됐다면 필시 불손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더 추이를 지켜본 후 일망타진한다. 정보과는 밀정을 늘려 놈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도록 하라!”

정보담당관이 장화 뒤꿈치를 붙이며 부동자세를 취한다.

“하이! 명령대로 실행하겠습니다.”

“특히 서광휘의 존재를 파악하도록 하라! 놈의 아비가 마적의 본거지로 사라졌다. 필경 서광휘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당장 조치하겠습니다.”

피곤에 찌든 타이요우가 입을 쩍 벌린 채 하품을 한다. 흘깃거리던 리용이 사진 몇 장을 테이블 위에 펼쳐놓으며 그의 눈치를 살핀다.

“이게 뭔가?”

“최근에 중앙대가에 위치한 모던호텔에서 찍은 사진들입니다.”

사진에는 차에서 내리는 카오펑린과 로비에서 빅터 일행과 만나는 장면이 찍혀 있다.

“이자는 둥베이의용군의 수장 카오펑린이 아닌가?”

“네, 맞습니다.”

“그런데 왜 이자가 한가롭게 호텔에서 동양인과 외국인을 만나는 거지?”

“아직 꼬투리를 잡지는 못했지만 무역업을 하는 사업가라고만 파악되고 있습니다.”

“둥베이의용군의 총수가 사업가를 만난다고? 캐 볼만 한 일이군.”

사진을 들여다보던 그의 눈빛이 유독 한 사람에 집착한다. 그러나 쉽사리 단초가 떠오르지 않는 듯하다. 타이요우는 입술을 비죽이 내민 채 고개를 젓는다. 덥수룩한 수염에 콧수염까지 기른 탓에 빅터의 인상착의는 언뜻 보아도 혼혈인을 의심케 한다.

“이자가 아직 하얼빈에 머물고 있는가?”

“하도 신출귀몰해서 이 때 이후로는 행방이 묘연합니다. 지금 백방으로 특고형사를 풀어서 수배 중입니다.”

“철저히 파악해서 빨리 신원을 파악하도록 해! 뭔가 냄새가 폴폴 나는 게 감이 안 좋아!”

“예!”

“그리고 서광휘 외에도 지청천이 이끄는 독립단이 하얼빈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다. 장제스의 심복 천청이 둥베이의용군 쪽에 손을 댄다는 정도도 있고. 관동군사령부에서도 이 점을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고 있다. 각 역과 주요 도로에 검문을 강화하라.”

“예!”

회의를 마친 특고형사와 헌병장교가 특별객차를 빠져나간다. 홀로 남겨진 타이요우가 잠옷으로 갈아입으며 테이블에 놓인 사진을 뚫어지게 주시한다.

“분명 알 만한 놈이야! 아무리 수염으로 위장했지만 이 눈빛만큼은 낯이 익단 말이지.”


일순 객창 안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화들짝 놀란 그가 살금살금 객창으로 접근한다. 어느새 그의 오른손에는 남부자동권총이 쥐어져 있다. 커튼을 걷으며 밖을 살피던 그가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확인한 뒤 한숨을 몰아쉰다.

수색견을 앞세운 경비병들이 객차 주위로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그가 비로소 안정을 되찾고 침대로 다가간다. 컹컹 짖어대는 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정적을 깬다. 타이요우는 권총을 배게 밑에 놓고 눕는다. 그는 하품을 늘어지게 한 뒤 손을 뻗어 램프의 줄을 잡아당긴다.




371.


중앙대가의 끝자락에 자리한 보헤미안 호텔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각국에서 망명한 아나키스트나 혁명을 꿈꾸는 망국인이 주로 묵는 숙소다. 한마디로 뜨내기들이 장기 투숙하는 곳이라 숙박료도 저렴할뿐더러 투숙자끼리도 허물없이 지내는 통에 신분을 위장할 필요가 있는 빅터 일행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맞춤한 곳이다.

핸더슨은 낮부터 보드카에 찌든 투숙객들과 어울리며 동향을 파악한다. 신문을 든 채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짱웨이는 혹시 모를 밀정을 감시하기 위해 출입자를 관찰한다.

카오펑린의 부관을 먼저 알아본 짱웨이가 휘파람으로 새소리를 낸다. 술잔을 기울이던 핸더슨이 로비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짱웨이가 다가가 부관을 데리고 계단을 오른다. 헨더슨이 뒤를 따르며 미행자가 없는지를 살핀다.

핸더슨과 부관이 304호실로 들어간다. 짱웨이가 휘파람을 분다. 복도 끝에서 구두를 닦던 소년이 총총히 다가온다. 짱웨이가 지폐 한 장을 건넨다. 소년은 넙죽 목례를 한 뒤 통을 내려놓고 걸터앉아 망을 보기 시작한다.


“실무진이 꾸려졌습니다.”

부관은 빅터와 악수를 나누며 말을 덧붙인다.

“하얼빈 시내에 특고형사들이 쫙 깔렸더군요. 아무래도 하얼빈에서 회합하는 것은 위험이 따릅니다. 카오평린 장군께서 곧 차를 보내실 겁니다. 그럼 저와 함께 이동하여 실무진과 회동할 수 있습니다.”

“수고가 많소!”

빅터는 부관에게 악수를 청하곤 창가를 기웃거리는 핸더슨에게 명령한다.

“중위, 곧 떠날 차비를 하게.”

“예!”

핸더슨과 짱웨이가 짐을 챙기며 객실을 정리한다. 잠시 후 304호실의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든 짱웨이가 부관을 바꿔준다.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곤 재촉한다.

“차가 호텔 뒷문에 도착했답니다. 서두르시죠.”


일행은 짱웨이의 인솔에 따라 비상계단을 통해 뒷문으로 내려간다. 일행은 대기하고 있던 트럭의 짐칸에 잽싸게 올라탄다. 포장을 닫은 트럭은 유유히 골목을 빠져나가 중앙대가로 진입한다.

호텔 맞은편 옥상에서 망원경으로 관찰하던 밀정이 손을 흔들면 거리에 대기하고 있던 오토바이가 두 대가 시동을 걸고 트럭의 뒤를 따라붙는다. 짐칸의 포장을 들춰 밖을 살피던 부관이 미행을 확인하곤 운전석을 향해 신호를 보낸다.

기사는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급커브를 틀어 철길을 따라 질주한다. 건널목을 목전에 둔 기관사가 트럭을 발견하곤 황급히 기적을 울린다. 기사는 뒤질세라 가속을 하며 열차를 따라잡는다. 그러곤 운전대를 오른쪽으로 급히 돌린다.

오토바이에서 총알이 빗발친다. 순식간에 한쪽으로 쏠린 일행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트럭은 요란하게 울리는 정지신호등을 무시한 채 차단기를 부수고 가까스로 충돌을 면한다. 바투 뒤따라 붙은 오토바이 한 대가 기관차에 받혀 공중으로 치솟는다.

열차가 지나간 후 나머지 오토바이가 트럭을 뒤쫓는다. 진창을 달리던 트럭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평원을 가로지른다. 트럭이 곧장 야생마들 속으로 질주한다. 가축 떼가 양쪽으로 흩어지며 달아나기 시작한다.

총격을 가하며 뒤따라오던 오토바이가 야생마들을 피해 방향을 꺾다가 균형을 잃고 구덩이에 처박힌다. 오토바이는 헛바퀴를 구르며 흙탕물을 뒤집어쓴다. 저만치 사라진 트럭을 허탈하게 바라보던 밀정은 비포장도로를 따라 걷는다. 얼마간 걷다가 말을 타고 오는 목동과 마주친다. 밀정은 총을 들이대고 목동을 겁박한다. 밀정은 빼앗은 말에 올라 내달리기 시작한다.



372.


하얼빈역 조차장에 정차한 특급객차의 분위기가 험상궂다. 타이요우 앞에서 연신 고개를 조아리던 리용이 말을 더듬으며 저간의 사정을 설명한다.

“하얼빈 외곽까지 미행을 했지만 그만 열차사고가 나서 놓치고 말았답니다.”

“지금 남 얘기하듯이 말할 때야? 자네가 놓친 인간이 누구인지 알고나 하는 말이야? 빠가야로! 어깨에 단 계급장이 부끄럽지도 않나? 딴 것도 아니고 미행을 하라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뒤를 쫓았다고? 지금 제정신인가? 그놈들은 네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패를 돌리는 자들이라고?”

격분한 타이요우가 빅터와 그 일행이 찍힌 사진들을 냅다 리용의 얼굴에 던진다.

“첩자를 심어놓았으니 곧 전서구가 날아올 겁니다.”

“전서구? 비둘기를 통해 서신을 전달한단 말인가?”

나름대로 묘안을 짜냈다고 생각한 리용이 맞장구를 친다.

“네. 두 달 동안이나 전서구를 통해 의용군의 이동경로를 파악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의용군의 주둔지가 어딘데?”

“이번에 전서구가 오면 알 수 있습니다.”

“한심한 놈! 노아의 방주에서 씨앗을 물고 온 비둘기라도 되는 줄 알아? 그렇게 비둘기만 눈 빠지게 기다리면 허구한 날 뒷북만 치는 꼴이잖아?”

“이번에는 틀림없을 겁니다.”

“만약에 첩자 신분이 들통 나서 놈들이 역정보를 비둘기 다리에 매달아 흘리기라도 하면? 또 허탕을 치려고?”

“제가 옷을 벗겠습니다.”

“너 같은 깡패가 옷을 벗는다고 누가 콧방귀라도 뀔 것 같은가? 너 같은 머저리 때문에 내가 옷을 벗는단 말이다!”

리용은 잽싸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

“그것만은 절대 아니 됩니다. 경시정님께서 옷을 벗으시면 대도회는 파산하고 맙니다. 제발 그 말씀만은 거둬주십시오.”

타이요우는 정강이를 붙들고 우는 그의 팔을 걷어찬다. 그러곤 몸 둘 바를 모르는 헌병 중좌를 거명한다.

“미즈라 중좌!”

“하이!”

“신분이 노출된 걸 안 이상 놈들은 하얼빈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을 거야. 따라서 하얼빈을 기점으로 기차가 서는 모든 역에 사복조를 배치하여 24시간 감시하라! 그리고 놈들의 끄나풀이나 탈영병이 드나들 만한 모든 윤락가와 도박판, 숙소에 비밀경찰을 침투시켜 이 잡듯 뒤져서라도 정보를 캐내!”

그는 미즈라 중좌에게 빅터와 핸더슨, 짱웨이가 찍힌 사진을 건네며 명령한다.

“수배전단을 뿌리도록! 그리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한 낭인패한테 전하라! 인간사냥을 시작한다고 말이다.”

“당장 조치하겠습니다.”

“리용!”

무릎을 꿇고 있던 그가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한다.

“자네도 대도회의 모든 지부에 연락해서 인간사냥철이 시작됐다고 알려! 미즈라 중좌가 목을 지키고 대도회가 토끼몰이를 한다. 알겠나?”

“목숨을 걸고 처리하겠습니다.”

“난 내일 신징 사령부로 가서 하얼빈의 상황을 보고할 것이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매조지를 짓지 못하면 내가 직접 너희 옷을 벗길 것이야.”


두 사람은 굽실거리며 고개를 들지 못한다. 타이요우는 지휘봉으로 작전지도를 가리키며 사냥지역을 자세히 설명한다. 리용과 미즈라가 그의 명령을 받고 돌아간다. 홀로 남은 타이요우는 작전판에 빅터와 광휘의 사진을 큼지막하게 붙여놓고 중얼거린다.


‘틀림없어. 이놈은 한인서가 확실해. 허접한 것들이 의지할 데라곤 핏줄밖에 더 있겠나? 천륜에 이끌려 놈은 북으로 형과 아비를 만나러 온 게야!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을 테다. 이번에야 말로 내 눈으로 한 씨 가문의 멸문을 지켜보고 말 테다.’


눈을 부릅뜬 그가 두 주목을 불끈 쥐고 작전판에 걸린 사진을 냅다 후려친다.



373.


미행을 따돌리고 밤새 달린 트럭이 도착한 곳은 하얼빈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위취엔웨이후(玉泉威虎)산이다. 트럭은 울창한 숲으로 반시간가량을 더 들어가서야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멈춘다.

포장을 걷고 트럭에서 내린 빅터는 제 눈으로 목도한 광경을 못 믿는 듯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한다. 족히 수천 명이 넘는 군대가 길차게 뻗은 침엽수림을 배경으로 경사진 구릉을 따라 빼꼭히 진을 치고 있다.

빅터 일행은 부관의 안내를 받고 구릉을 오른다. 중턱에 똬리를 튼 군막은 산림지대 너머의 지평선과 맞닿은 개활지까지 훤히 내려다볼 수 있어 지휘소와 요새를 겸하고 있다. 부관이 급히 군막으로 뛰어 들어간다.

잠시 후 전투복 차림의 카오펑린이 실무진을 대동하고 빅터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다.


“총격전이 있었다고 들었네. 하마터면 중요한 날에 피를 볼 뻔했군.”

카오펑린이 불룩한 배를 내민 채 손을 내민다. 악수를 나눈 빅터가 화답한다.

“듣던 것보다 둥베이의용군의 군영이 대단하군요.”

“이곳에 모인 의용군은 선발대에 불과하네. 지금 이십만이 넘는 대군이 북만주로 모이고 있다네. 만주 벌판을 가득 메울 대군이 머릿속에 그려지겠는가? 하하핫!”

거들먹거리며 호탕하게 웃던 그가 실무진을 소개한다.

“리 장군은 의용군의 총참모장을 맡고 있네. 그리고 양 장군은 야전사령관이고, 첸 대령은 군수와 병기를 담당하네. 이분은 마적단을 이끄는 주찬 대장이고, 그리고 여기 의용군의 작전참모를 맡고 있는 서 대장일세.”

카오펑린의 소개를 받으며 일일이 악수를 나누던 빅터가 서 대장 앞에서 소금기둥처럼 얼어붙는다. 의아한 듯 광휘는 고개를 갸웃하며 뻗은 손을 거두며 머쓱해한다. 겨우 손끝을 내밀어 악수를 나눈 빅터가 카오펑린 쪽으로 다가간다.

“소령! 실무는 앞으로 서 대장과 논의하면 되네. 서 대장이야말로 만주의 전설이 아닌가? 서 대장은 러시아 군벌과도 선이 닿아있기 때문에 무기조달에 전문가랄 수 있지.”

“장군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멀리선 온 친구를 접대하는 만주의 풍습대로 그날 밤 군막 안에서는 연회가 열린다. 여러 차례 술잔을 주고받는 내내 빅터는 서 대장과 등을 돌린 채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있다.

빅터 아니, 인서는 형, 인호를 단박에 알아봤다.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수배전단을 통해 익혔을 뿐더러 비록 상처투성이의 얼굴이지만 형형한 눈빛만큼은 여전의 형을 쏙 빼닮았다. 그리고 하얼빈행 객차 안에서 우연히 열차강도를 목격했던 장면이 번연히 떠올랐다. 그가 반신반의하던 의구심에 종지부를 찍는다.

시신경을 통해 머릿속 인지체계로부터 확증까지 받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들끓는 혈육의 감정은 차마 드러내기를 저어한다. 치명적인 독을 품은 가시에라도 쏘인 듯 좀체 안면근육이 옴짝달싹하지 않는다.

서광휘가 동생을 알아보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선 그들은 통역 없이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에 의당 빅터 조차도 중국인의 피가 흐르는 화교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광휘 자신도 중국 대륙을 떠돌며 익힌 중국어가 입에 밴 터라 빅터가 구사하는 광둥어를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인 탓이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형을 흘깃거리던 빅터는 머리를 쥐어짠다. 과연 형의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 벌어질 경우의 수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보헤미안 호텔부터 미행을 당한 사실이 감정을 옥죈다. 필시 의용군 내부에 침입한 첩자와 내통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군막 안에서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다. 줄곧 이곳까지 동행한 부관의 소행은 절대 아니다. 그가 배신을 결심했다면 굳이 목숨을 걸고 추격전을 벌이느니 차라리 호텔에서 자신과 일행을 넘겼거나 사살했을 것이다. 참모장과 대령의 짓이라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둥베이의용군의 현황을 속속들이 파악한 그들이 뭐가 모자라 한낱 정체 모를 장교들을 상대로 모험을 건단 말인가. 그렇다면 특정한 소속도 없이 평원을 떠돌던 마적 두목 주찬? 그녀를 의심하기에는 그녀의 이력이 너무나 화려하다. 짱웨이를 통해 들은 정보로 볼 때 그녀는 일본의 모함으로 아버지와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잃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느꼈던 살기는 온전히 일본을 향한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혹시 만주의 전설이라는 서광휘가?’


빅터가 의심에 찬 눈초리로 광휘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돌연 그의 동공이 전류에 감전이라도 된 양 팽창한다. 연회가 시작된 이후로 줄곧 군막 주변을 마음대로 드나드는 단 한 사람이 눈에 띤다.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당직병은 카오펑린 외에 작전도와 중요서류가 놓인 책상에 손을 댈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목표가 특정된 직후 그는 온통 신경을 당직병 쪽에 맞춘다. 당직병은 유독 카오펑린과 서광휘의 주위를 맴돌며 술이나 차를 따르거나 재떨이를 비우며 자연스럽게 접근한다. 그의 존재는 마치 투명인간처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심지어 카오펑린은 담뱃재를 바닥에 떨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당직병이 조르르 다가와 용케도 담뱃재를 받아낸다.

의구심의 실마리가 풀릴 즈음 불콰해진 카오펑린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의용군의 장군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추며 카오펑린의 비위를 맞춘다. 주찬과 핸더슨, 짱쩌위가 마지못해 장군들의 손에 이끌려 춤사위를 펼친다. 광휘와 빅터 만이 화톳불을 마주한 채 탐색전을 펼치듯 간혹 어색한 미소를 교환한다.

빅터는 목구멍까지 치솟는 감정을 억누른다. 그는 자리를 피하기로 결정한다. 좀 더 추이를 살핀 뒤 안전이 확보되기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그는 거나해진 술자리를 등지고 슬그머니 군막을 빠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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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134화 악마의 최후 +3 19.07.12 45 1 16쪽
133 133화 고귀한 죽음 +1 19.07.11 24 1 12쪽
132 132화 무지개 +1 19.07.10 30 1 13쪽
131 131화 차관협정(借款協定) +2 19.07.05 43 1 14쪽
130 130화 반공포로석방 +1 19.07.01 46 2 13쪽
129 129화 한일회담 +1 19.06.29 65 2 15쪽
128 128화 폭탄테러 +1 19.06.26 60 2 13쪽
127 127화 카츄샤 +1 19.06.24 61 2 13쪽
126 126화 의사 왕룽 +1 19.06.23 59 3 17쪽
125 125화 빅터 한 재단 +2 19.06.19 80 3 13쪽
124 124화 인천상륙작전 +1 19.06.13 93 2 15쪽
123 123화 메모리 가든 +1 19.06.12 75 2 15쪽
122 122화 겹생 +3 19.06.10 75 2 16쪽
121 121화 하와이 +1 19.06.07 82 3 14쪽
120 120화 소령 맥나마라 +4 19.06.06 87 2 15쪽
119 119화 한초희 +1 19.06.05 90 2 14쪽
118 118화 맥아더 원수 +1 19.06.04 88 2 14쪽
117 117화 기만방송 +1 19.06.03 84 2 13쪽
116 116화 코리안 커넥션 +1 19.06.01 95 2 12쪽
115 115화 잠수함 +1 19.05.30 121 2 13쪽
114 114화 6.25 전쟁 +1 19.05.29 104 2 12쪽
113 113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특명 1호 ‘폭풍’ +1 19.05.21 98 2 11쪽
112 112화 금괴수송작전 +1 19.05.19 121 2 10쪽
111 111화 '암호명 A-1' +1 19.05.18 90 2 13쪽
110 110화 악연(惡緣) +1 19.05.17 88 2 14쪽
109 109화 마지막 미션 +1 19.05.16 90 2 12쪽
108 108화 애치슨 라인 +1 19.05.15 88 2 12쪽
107 107화 연적(戀敵) +1 19.05.15 95 2 12쪽
106 106화 독살(毒殺) +1 19.05.14 91 2 12쪽
105 105화 마돈나 다방 +2 19.05.13 96 2 15쪽
104 104화 한국은행 +1 19.05.11 100 2 14쪽
103 103화 비밀거래 +1 19.05.10 106 2 12쪽
102 102화 남미이주작전 +1 19.05.10 112 2 13쪽
101 101화 트루먼 독트린 +1 19.05.10 89 2 11쪽
100 100화 숙명의 라이벌 +1 19.05.10 90 3 18쪽
99 99화 Jane Doe +2 19.05.10 91 2 13쪽
98 98화 앙숙, 이승만과 김구 +1 19.05.10 93 2 12쪽
97 97화 반도호텔 +1 19.05.10 89 2 13쪽
96 96화 좌익과 우익 +1 19.05.09 89 2 13쪽
95 95화 조선인민공화국 +1 19.05.09 91 2 17쪽
94 94화 일본패망(日本敗亡) +1 19.05.09 92 2 12쪽
93 93화 원자폭탄 +1 19.05.09 89 2 13쪽
92 92화 김일성 +1 19.05.09 93 1 14쪽
91 91화 독수리 작전 +1 19.05.09 91 1 14쪽
90 90화 이승만 +1 19.05.09 89 1 14쪽
89 89화 비밀요원 나타샤 +1 19.05.09 83 2 15쪽
88 88화 OSS(미국전략사무국) +2 19.05.09 89 2 16쪽
87 87화 승전(勝戰) +1 19.05.09 84 2 14쪽
86 86화 진주만공습 +1 19.05.08 86 1 16쪽
85 85화 갈라예프 +2 19.05.08 81 2 16쪽
84 84화 채권(債券) +1 19.05.08 88 2 11쪽
83 83화 다카키 마사오 +1 19.05.08 100 2 12쪽
82 82화 광복군(光復軍) +1 19.05.08 81 2 13쪽
81 81화 육군정보학교 +2 19.05.08 80 2 11쪽
80 80화 홍콩행 +1 19.05.07 87 3 13쪽
79 79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3 19.05.07 82 2 12쪽
78 78화 김원봉과 김구 +1 19.05.07 81 2 16쪽
77 77화 까레이스키 +3 19.05.07 79 2 12쪽
76 76화 탈출(脫出) +1 19.05.07 85 3 9쪽
75 75화 박정희와 최태민 +1 19.05.07 89 2 9쪽
74 74화 중일전쟁(中日戰爭) +1 19.05.07 82 2 13쪽
73 73화 강제이주 +3 19.05.06 79 1 12쪽
72 72화 마루타 +1 19.05.06 78 1 12쪽
71 71화 막후 실력자 +1 19.05.06 79 2 13쪽
70 70화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등장 +1 19.05.06 80 1 15쪽
69 69화 천황결사옹위청년단 +1 19.05.05 82 1 15쪽
68 68화 후흑학(厚黑學) +1 19.05.05 83 1 13쪽
67 67화 경몽장(耕夢莊) +1 19.05.05 83 1 12쪽
66 66화 학교(學校) +1 19.05.05 85 1 8쪽
65 65화 국제연맹(國際聯盟) +1 19.05.05 84 1 19쪽
64 64화 나타샤 +1 19.05.05 85 1 11쪽
63 63화 보고서 +1 19.05.05 85 1 11쪽
62 62화 시인과 영웅 +2 19.05.04 96 2 15쪽
61 61화 탄생의 비밀 +2 19.05.04 86 2 18쪽
60 60화 국경수비대 +1 19.05.03 84 2 13쪽
59 59화 제네바협약 +4 19.05.03 88 2 18쪽
58 58화 명백한 운명 +1 19.05.03 84 1 16쪽
57 57화 미두취인소(米豆取人所) +1 19.05.03 86 1 12쪽
56 56화 생포(生捕) +1 19.05.02 84 2 13쪽
55 55화 참패(慘敗) +1 19.05.02 85 2 14쪽
54 54화 향수병(鄕愁病) +1 19.05.02 82 2 18쪽
53 53화 음악회 +1 19.05.02 84 2 18쪽
52 52화 들개 진구 +1 19.05.02 88 2 24쪽
51 51화 가락지 +3 19.05.02 88 2 26쪽
50 50화 덫 +1 19.05.01 86 1 28쪽
49 49화 추격전(追擊戰) +1 19.04.30 85 2 35쪽
48 48화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1 19.04.30 90 2 39쪽
47 47화 광휘와 빅터 +3 19.04.29 85 2 33쪽
46 46화 특별수사본부(特別搜査本部) +4 19.04.29 85 2 41쪽
» 45화 만저우리(滿洲里) +4 19.04.28 82 3 35쪽
44 44화 폭풍전야(暴風前夜) +1 19.04.28 83 3 37쪽
43 43화 Boys, be ambitious! +1 19.04.27 85 2 39쪽
42 42화 만주국(滿洲國) +5 19.04.27 89 2 38쪽
41 41화 만몽영유계획(滿蒙領有計劃) +1 19.04.26 87 3 25쪽
40 40화 재회(再會) +1 19.04.26 85 3 30쪽
39 39화 빅터 한 +1 19.04.25 87 3 49쪽
38 38화 박진만 +2 19.04.25 93 3 45쪽
37 37화 정보국 5과 +3 19.04.24 100 3 51쪽
36 36화 마적(馬賊) 왕리 +2 19.04.24 98 3 49쪽
35 35화 삼두정치(三頭政治) +2 19.04.23 96 3 42쪽
34 34화 주찬 +1 19.04.23 91 3 51쪽
33 33화 만주야사(滿洲野史) +2 19.04.22 95 3 50쪽
32 32화 서광휘 +2 19.04.22 95 3 47쪽
31 31화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 +2 19.04.21 106 4 47쪽
30 30화 미쓰야협정(三矢協定) +4 19.04.21 102 4 46쪽
29 29화 출산(出産) +3 19.04.20 106 4 43쪽
28 28화 밀항(密航) +2 19.04.20 100 4 45쪽
27 27화 불령선인(不逞鮮人) +1 19.04.19 103 4 43쪽
26 26화 님의 침묵 +1 19.04.19 108 4 48쪽
25 25화 이민(移民) +2 19.04.18 121 4 39쪽
24 24화 회자정리(會者定離) +2 19.04.18 108 5 44쪽
23 23화 여걸(女傑) 수잔 +5 19.04.17 108 4 46쪽
22 22화 3·1 만세운동 +5 19.04.17 108 4 44쪽
21 21화 천적(天敵) +1 19.04.16 109 5 49쪽
20 20화 아카키 타이요우(赤木太陽) +4 19.04.16 113 5 52쪽
19 19화 망국(亡國) +4 19.04.15 121 3 49쪽
18 18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3 19.04.15 124 3 46쪽
17 17화 한성진격작전(漢城進擊作戰) +4 19.04.14 127 4 49쪽
16 16화 의병전쟁(義兵戰爭) +4 19.04.14 126 4 43쪽
15 15화 춘투(春鬪) +5 19.04.13 134 3 47쪽
14 14화 암살미수(暗殺未遂) +4 19.04.13 141 3 37쪽
13 13화 결혼(結婚) +3 19.04.12 216 6 42쪽
12 12화 돈버거 +9 19.04.12 193 6 44쪽
11 11화 대한제국(大韓帝國) +2 19.04.11 212 7 45쪽
10 10화 김출세(金出世) +7 19.04.11 233 8 42쪽
9 9화 낙향(落鄕) +4 19.04.10 246 7 42쪽
8 8화 혁파안(革罷案) +4 19.04.10 258 8 41쪽
7 7화 증기자동차 +2 19.04.09 307 11 22쪽
6 6화 2차 사행(使行) +2 19.04.09 306 12 24쪽
5 5화 견문록(見聞錄) +5 19.04.08 348 13 19쪽
4 4화 북경(北京) +1 19.04.08 433 11 19쪽
3 3화 만남 +1 19.04.08 536 12 15쪽
2 2화 1차 사행(使行) +2 19.04.08 770 12 14쪽
1 1화 파락호(破落戶) 이하응 +17 19.04.08 1,468 1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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