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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공모전참가작 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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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르
작품등록일 :
2019.04.08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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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4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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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29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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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쪽

47화 광휘와 빅터

님의 침묵




DUMMY

제24장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381.


독수리 둥지의 야영지 곳곳에 모닥불이 불타오른다. 어깨동무를 한 도선과 핸더슨은 보드카를 병째로 돌려 마신다. 거나하게 취한 두 사람은 이내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곯아떨어진다.

빅터가 모닥불로 다가와 물을 끼얹는다. 물벼락을 맞은 잉걸불이 연기를 내뿜으며 서서히 꺼진다. 이따금씩 암컷에게 구해하는 수컷 부엉이의 울음과 막사 안에서 새어 나오는 드르렁거리는 소리가 묘한 박자를 맞추며 밤의 정적을 흔든다.

냉기를 품은 해풍이 제법 쌀쌀하다. 스웨터를 걸쳐 입은 빅터가 항구의 불빛이 어룽거리는 절벽 쪽으로 걸어간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고 있다. 저만치 달빛을 받은 그림자가 주변을 압도하듯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빅터가 관목을 지나 절벽 쪽으로 다가간다. 바짓단이 웃자란 풀숲에 거치적거린다. 광희는 부스럭거리는 기척을 듣곤 잽싸게 허리춤에 찬 권총을 뽑아든다. 돌연 검은 막을 뒤집어쓴 듯 형체가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본 광휘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누구냐?”

광휘의 옆을 지키고 있던 독립이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린다. 덩달아 놀란 빅터가 헛기침을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총구의 공이가 ‘찰칵’하며 낸 기계음이 얼마간 또렷하게 들린다.

이윽고 빅터의 외마디가 터진다. 그것은 일종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절규나 다름없다.

“형!”

“나한테는 동생이 없다. 정체를 밝혀라!”

“나야, 형! 인서······”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는 혀에 말려 점차 잦아든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정체를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총알이 심장을 관통할 것이다.”

강경한 어조에 주눅이 든 빅터는 용기를 내어 달빛 앞으로 성큼 나선다.

“미천골 한경덕과 박미라의 첫째 아들 한인호를 찾아온 둘째 아들 한인서라고······”

울먹거리며 내뱉는 통에 물기가 밴 목소리가 상대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지금 뭐라고 했나? 한경덕? 박미라라? 어림없는 소리!”

광휘가 총을 겨눈 채 반걸음씩 다가간다. 일순 빅터란 사실을 알게 된 그가 호통을 친다.

“어쩐지 수상하다 했다. 한경덕을 입에 담을 줄이야. 관동군이 보낸 밀정이 바로 너로구나!”

방아쇠에 살포시 얹은 집게손가락이 움찔할 찰나 빅터가 두 팔을 위로 올린 채 울부짖는다.

“어차피 전쟁에 나선 몸! 언제 죽어도 죽겠지. 차라리 적의 손에 죽느니 형의 손에 죽는 편이 낫잖아. 어서 쏴!”

미치광이를 본 듯 어안이 벙벙한 광휘가 연신 도리질을 치며 눈앞의 광경을 부인한다. 그러나 지금껏 중국말을 구사하던 빅터의 입에서 또박또박 새어 나오는 한국말에는 친숙한 어감이 스며있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인력이 끌어당기는 듯 그는 청각을 동원하여 잊힌 기억을 되살린다.

“어머니가 정동에서 했던 음식점은?”

어느덧 광휘와 빅터의 거리는 눈가에 그렁그렁 차오른 물기가 보일 정도로 가깝다.

“돈······, 버······, 거!”

앙다문 입술을 비죽 내민 광휘가 의표를 찌르는 질문을 던진다.

“밀정이라면 그 정도 대답쯤은 쉬운 죽 먹기지. 정녕 네가 내 동생이라면 이것만은 잊지 않았을 테지. 내가 미천골 건넛방에서 밤마다 외우던 시가 뭐냐?”

비로소 빅터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거야말로 식은 죽 먹기로군. 형 때문에 잠결에서 듣던 시를 지금껏 잊어버리지 않고 있거든.”

그는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며 시를 읊기 시작한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으로 날아갔습니다······”

얼마간 빅터가 읊조리는 시를 듣고 있던 광휘도 화답을 하듯이 시를 암송한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두 사람은 얼싸안고 나머지 시를 암송한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인호와 인서로 돌아온 형제는 한동안 부둥켜안고 눈물로써 재회한다. 먼저 광휘가 운을 뗀다.

“왜 이제야 신분을 밝히는 거야? 동생을 못 알아본 못난 형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더냐? 이 못된 녀석!”

광휘가 어릴 적 버릇처럼 빅터의 가슴을 툭 친다.

“형을 형으로 부르지 못한 내 심정은 오죽했을라고? 형 목에 걸린 현상금이 얼마인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 괜히 아는 척했다가 신분이라도 노출되면 졸지에 형을 궁지로 내몰 것 같아서 조심 또 조심할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내 신분도 노출돼서는 안 돼. 탄로 나면 스파이로 몰려 외교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해. 지금 여기 온 것도 상부에서는 모르는 일이야.”

“자식, 눈치 하나는 여전히 빠르군. 그런데 네 다리는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너를 의심한 것 중 하나가 친숙한 얼굴인데, 걸음걸이가 너무나 멀쩡해서 그저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인서는 왼쪽 바짓단을 걷어 올린다. 그러곤 달빛 아래 환부를 내민다. 여전히 총이 관통한 부위가 또렷하다. 광휘는 동생의 환부를 어루만지며 눈시울을 붉힌다.

“파편을 제거하고 괴사된 조직을 도려냈어. 하마터면 평생 목발 신세를 질 뻔했는데, 수술도 잘 되고 악착같이 재활치료를 받은 덕에 기적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됐어.”

“독한 구석은 여전하군!”

광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피식거린다.

“형, 근데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던데, 사실이야?”

“사실이야.”

“지인을 통해 백방으로 알아봤었어.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갓난아이를 업고 저잣거리에서 젖동냥을 하고 다니시더라고. 너무나 황당해서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어.”

“맞아. 우리한테 여동생이 생겼어. 아버지는 만주로 오셔서 전전하시다가 박 서방을 만나 겨우 목숨을 보존하실 수 있었다고 해.”

“윗마을 살던 박 서방?”

“응.”

돌연 풀숲에서 기척이 들린다. 광휘는 빅터의 어깨를 잡고 몸을 웅크린다.

“이곳에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해방구야. 돈이면 영혼도 팔아먹는 땅이니만큼 곳곳에 첩자가 널려 있어. 각별히 조심해야 돼.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


거나하게 취한 체코 병사가 절벽을 향해 소변을 본다. 몸을 떨던 병사가 사라지기를 기다린 뒤 두 사람은 막사 쪽으로 모습을 감춘다.



382.


비밀경찰과 관동군 정보국 소속의 요원들이 러시아 거주지를 중심으로 하얼빈에서 암약하는 밀수업자들을 샅샅이 수소문한다. 주로 아편과 무기를 밀거래하는 러시아 조직은 윗선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운영된다.

아편중독자의 소굴을 뒤집고 공급자를 추적하여 검거한 끝에 간신히 러시아 조직의 중간책과 선이 닿는다. 평원을 떠돌며 약탈을 일삼는 마적단에게 무기를 대주던 니콜라이는 온갖 협박과 회유에도 움츠리기는커녕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일곱 살부터 아버지를 따라 국경을 넘나들며 밀수를 배웠소. 그때부터 사귄 친구들이 지금 헤아려도 족히 천여 명이 넘소이다. 비록 내가 목숨을 잃는다손 치더라도 밀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소? 하하핫!”

턱살까지 출렁거리며 크게 웃는 바람에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한 그가 자세를 바로잡는다. 그러곤 가소로운 눈빛으로 리용 경시에게 되묻는다.

“지금껏 내가 대도회와 경찰서 그리고 만주국군한테 바친 뇌물이 얼마나 되는 줄 아시오? 줄 때는 군소리도 않더니만 이제 와서 뭐가 구려 닦달하려는 거요? 나를 잡아가두면 하얼빈에 사는 로스키들이 순순히 당할 줄 아오? 천만에 말씀! 하루아침에 폭동이 일어날 거요. 두고 보시오! 우리 로스키들은 동포애를 빼면 시체란 사실만 알고 계시오.”

팔짱을 낀 채 한일자로 입을 다문 그는 의자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드르렁거리며 코를 골기 시작한다. 혀를 차던 리용이 뒤로 물러선다. 쥰페이가 나서서 점잖게 상대를 타이른다.

“난 관동군 정보국 소속 쥰페이 코우 중좌라 하오.”

자는 척하던 니콜라이가 짝눈을 뜨곤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간을 본다.

“정보국이 언제부터 밀수꾼을 상대로 하셨나? 쳇!”

“정보국이 나설 만한 일이 생겼소. 도움될 만한 정보를 주면 당신의 밀무역에 대하여 눈감아 주는 조건이요.”

허리를 곧추세운 니콜라이가 담배를 요구한다. 반쯤 피우던 그가 입에 붙은 터럭을 내뱉는다.

“정보과라서 그러신가? 역시 밀수꾼의 생리를 잘 아시는군. 밀수꾼은 뼛속부터 거래의 본능이 피처럼 흐른다오. 마누라조차 조건만 맞으면 거래할 수 있단 말이오. 원하는 게 뭐요? 어디 들어나 봅시다.”

“무기상의 목록을 넘기시오.”

“뭐요? 나한테 지금 동족을 팔아넘기란 소리요?”

두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친 니콜라이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씩씩거린다.

“동족을 팔아넘기란 얘기가 아니오! 둥베이의용군과 무기를 거래한 무기상 이름만 알면 되오.”

“둥베이의용군한테 무기를 넘긴 게 어디 한둘인 줄 아시오?”

니콜라이는 등을 돌린 채 입을 앙다문다.

“최근에 서광휘가 소속된 단체가 무기상과 접촉했다는 정보가 있소. 그자의 이름을 넘기시오. 그러면 당신의 뒤를 봐주겠소.”

구미가 당긴 것일까.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가 눈을 끔벅거리며 쥰페이 쪽으로 얼굴을 내민다.

“관동군사령관의 직인이 찍힌 통행증을 주시오. 그러면 이틀 뒤 이름을 건네주겠소.”


이틀 뒤 니콜라이는 모던호텔 앞에 나타나 구두를 닦는다. 사복을 입은 쥰페이가 다가오자 신문을 읽던 그가 중절모를 살짝 든다. 쥰페이가 옆에 앉아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고 발을 내민다. 구두를 닦는 척하던 니콜라이가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곤 옆에 놓인 신문을 들고 유유히 사라진다.

니콜라이는 체흐 대령의 신분뿐만 아니라 무기의 이동 노선까지 상세히 다룬 자료를 제공한다. 긴급회의가 하얼빈 조차장에 마련된 특별객차에서 열린다. 한껏 고무된 타이요우는 상기된 표정으로 대원들을 격려한다.


“당장 병력을 밀수 노선으로 이동시켜! 관건은 놈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매복하여 일망타진하는 데 있다. 전원 사살해도 좋다. 단, 서광휘와 한인서만은 생포해라! 악질 형제한테 되갚을 빚이 아직 남아있다.”




383.


체코제 반자동소총 천여 정과 브루노 경기관총 50정, 박격포 30문 등과 실탄과 포탄이 마차 십여 대에 가득 실린다. 소만국경까지 체흐 대령의 부하들이 호송대를 꾸려 동행하기로 되어 있다. 말에 오른 체흐가 광휘와 굳은 악수를 나눈다.


“서 대장, 내 말을 명심하게! 전쟁은 승자만 기억하는 법이란 사실을. 내 무기가 승자의 편에 선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네. 자네는 살아 있는 별이 아닌가? 하하핫!”

체흐는 호방한 웃음을 지으며 장도에 오르는 무기구매단을 응원한다. 광휘가 화답을 보낸다.

“전쟁은 승자만 기억하는 법이란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부디 이번 전쟁이 마지막이길 바랄 뿐입니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따름입니다. 장군님도 고국으로 돌아가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체흐가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날숨을 뱉어낸다.

“그러고 보니 나도 고향땅 보헤미아 평원을 떠난 지가 벌써 이십여 년이 다 돼가는군. 나도 여생은 보헤미아 평원에서 말을 달리며 보낼 생각이네. 자네도 부디 고국을 되찾아 고향으로 돌아가길 바라네, 무탈히 돌아가시게.”


체흐가 권총집에서 총을 꺼내 허공에 대고 총을 쏘기 시작한다. 호송대도 잇달아 공포를 쏘며 국경지역으로 마차를 인도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지름길은 쑹화강(松花江)의 지류인 무단장(牡丹江)을 가로질러야 한다. 그러나 광휘는 블라디보스토크 북쪽의 우수리스크를 경유하는 우회로를 선택한다. 소만국경을 넘을 즈음 비바람에 깎이고 닳은 경계석이 볼품없이 서 있다. 호송단은 광휘 일행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돌아온 길을 되짚어 말을 달린다.

리쥔이 줄느런히 늘어선 마차를 보곤 한숨을 폭 내쉰다. 그는 무심히 안장을 손보고 있는 광휘를 바라보며 혀를 찬다. 빅터와 핸더슨은 마치 활극영화라도 보듯이 두 사람의 무언극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대장님! 이걸 무슨 수로 기지까지 운송할 생각입니까?”

휘파람까지 불며 흥얼거리던 광휘가 리쥔에게 지나가는 투로 말한다.

“다 방법이 있으니까 눈이라도 좀 붙여요.”

“말이 열 마리면 마부도 열 명이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고작 네 명이잖아요. 대관절 어떤 묘수가 있기에 그리 유유자적합니까?”

“하하하! 만주를 호령하던 마적의 부두목께서 뭐 그리 앓는 소리를 하는 게요? 어디 무기 밀수를 한두 번 한답디까? 갈 길이 머니 정히 걱정이 된다면 말한테 먹이나 좀 주세요.”

리쥔이 구시렁거리며 말에게 건초더미를 던져준다. 지켜보던 핸더슨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빅터를 힐끔거린다.

“소령님, 그냥 이렇게 지켜보실 생각입니까? 마차 안에 실은 무기가 자그마치 1개 대대 병력의 전력인데, 저렇게 방치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다 형이 알아서 할 텐데, 뭐가 걱정이야!”

“예? 형이라고요?”

“쉬잇!”

빅터는 얼른 핸더슨의 입을 틀어막는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할 테니까, 당분간 잠자코 있어.”

영문을 알 수 없는 핸더슨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두어 시간가량이 지났을까. 개울 상류로부터 첨벙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온다. 세 사람은 낮은 포복자세를 취하며 총구를 겨눈다. 광휘는 바위 위에 올라 동태를 살핀다. 한 무리의 병력이 개울물을 가르며 나타난다.


“어이, 서 대장!”

독립이가 먼저 도선을 알아보곤 꼬리를 흔든다.

“형님, 왜 이렇게 늦었습니까?”

도선을 보곤 나머지 일행이 비로소 안도한다. 특히 리쥔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머리를 내두른다.

“어쩐지 술이라면 이고가지 못할망정 마시고 가는 분께서 술자리에서 안 보이더라니, 다 서 대장과 짬짜미를 하신 거군요.”

도선이 안장에서 폴짝 내린다.

“남의 귀에 들어가면 그게 어디 짬짜미인가? 하하핫!”

“그래도 귀띔이라도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목숨을 걸고 같은 배에 탄 사람끼리 정말 너무들 하시네.”

리쥔인 볼멘소리를 늘어놓는다. 광휘가 토라진 그를 다독인다.

“부두목을 의심해서 그런 게 아니란 걸 잘 아시잖아요? 원래 밀수의 세계에서는 영혼도 팔아먹는 법이라지 않소? 돈까지 지불했겠다, 무기도 받아왔겠다, 그들이 우리를 넘겨도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난 전투를 함께 치른 동지가 아니면 절대 믿지 않습니다.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면 용서하시오.”

“그건 그렇고, 앞으로 이동 계획은 뭡니까?”

리쥔을 달래듯이 광휘가 자세히 설명한다.

“이곳에서 선착장이 있는 곳까지 마차로 이동합니다. 그곳에서 무기를 뗏목에 싣고 마차는 목동들한테 싸게 넘길 겁니다.”

“뗏목으로 이동한단 말이오?”

“예! 그것이 관동군의 매복을 피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난 그것도 모르고 괜히 부아를 냈구먼. 어쩐지 우수리스크를 거쳐서 가는 게 수상쩍다 했소이다. 서 대장!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내 생각이 짧았소.”

리쥔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머리를 긁적인다.

“날이 새기 전에 서두릅시다.”


광휘의 명령에 따라 도선이 이끄는 독립군이 마차를 호송하며 이동하기 시작한다. 흔적을 지우기 위해 개울을 따라 한 마장쯤 이동하자 뗏목이 묶여 있는 선착장이 나타난다. 무기를 싣고 나서 일행이 독립이와 함께 뗏목에 오른다. 뗏목이 물살을 가르며 출발한다. 동시에 마차를 인수한 목동들도 선착장을 떠난다.



384.


타이요우는 체흐 대령의 밀거래 경로로 밝혀진 국경지역으로 병력을 출동시킨다. 관동군사령관으로부터 통행증을 선물로 받은 니콜라이가 그들을 이끈다. 하얼빈과 블라디보스토크의 중간에 위치한 무단장(牡丹江)의 상류를 둘러본 타이요우가 흡족한 미소를 머금는다. 그러곤 장화를 신은 채로 점벙거리며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속으로 들어간다. 무릎까지 물이 차오르는 곳에서 멈춘 그가 부하들을 부른다.


“코우 중좌! 리 경시! 오 경부!”

세 사람이 잰걸음으로 달려온다.

“필시 무기 실은 마차가 건너려면 무릎까지 물이 차는 곳은 피할 게 분명하다. 탄약에 물이 닿지 않게 하려면 적어도 여기보다는 상류 쪽이 도강 지점이다. 저기, 저기 그리고 저기에 기관총을 걸어라. 그리고 저기 바위 뒤에 생포조를 매복시키도록 하라!”


세 사람은 병력을 이끌고 타이요우가 지시한 곳에 병력과 무기를 배치한다. 타이요우와 니콜라이는 상류가 내려다보이는 숲에 은신하며 무기밀매단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린다.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다. 만 이틀이 넘도록 죽치고 기다렸지만 목을 축이려는 사슴과 호랑이만이 간혹 모습을 드러낼 뿐 기척은 온데간데없다. 부아가 끓어오른 타이요우가 인내심에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니콜라이!”

졸고 있던 그가 침을 닦으며 눈자위를 비비적댄다.

“놈들이 나타났습니까?”

“지금 잠꼬대할 상황이 아니다. 놈들한테 가짜 정보를 받은 게 아닌가?”

“천만에 말씀입니다. 체흐 대령과 직접 연락이 닿는 접선책한테서 힘들게 얻은 정보입니다. 틀림없습니다. 제 목숨이 달린 일을 어찌 허투루 하겠습니까?”

“오늘 중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넌 나한테 죽는다.”

정신이 번쩍 든 니콜라이가 목을 길게 빼고 숲과 연결된 오솔길을 주시한다. 태양이 중천에 걸려 뙤약볕이 내리쬘 즈음 덜컹거리는 수레바퀴소리가 정겹게 들려온다. 곧이어 마차 열 대가 떼를 지어 물을 건너기 시작한다.

“보십시오. 놈들이 나타났지 않습니까?”

“시끄러워!”

타이요우는 권총을 든 오른손을 높이 쳐들고 때를 기다린다. 마지막 마차가 개울을 건너자마자 단발의 총성이 긴 여운을 남기며 울려 퍼진다. 매복된 병사들이 기관총을 난사한다. 수류탄이 작렬하며 선두에 선 마차를 산산조각이 난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타이요우가 눈을 부라리며 일성을 터트린다.

“사격중지!”


의아한 표정을 짓던 니콜라이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친다. 의당 있어야 할 응사가 없는 것으로 짐작컨대 속임수에 당한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매복조들이 총을 겨눈 채 그나마 성한 마차로 접근한다.

거친 손길이 마차의 포장을 걷어낸다. 마차 안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된 시체만이 나뒹군다. 타이요우가 다가와 마찬 안을 살핀다. 텅 빈 것을 본 그가 격분하며 다음 마차의 포장을 걷는다. 다음 마차도 휑하다. 뒤를 돌아본 그가 지그시 명령한다.


“니콜라이를 잡아와!”

머지않아 니콜라이가 손목이 묶인 채로 끌려온다.

“버러지만도 못한 놈! 로스키 불곰을 믿은 내가 원망스럽다!”

“경시정님! 이건 뭐가 잘못 돼도 아주 잘못 된 겁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놈들이 매복을 알고 미리 노선을 바꾼 것이 확실합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제가 직접 놈들의 은신처를 알아내겠습니다.”

“한 번 속으면 그건 미련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나 두 번 속으면 그건 죄악이다. 내 사전에 두 번이란 단어는 없다.”

니콜라이가 애걸복걸하며 울부짖는다.

“경시정님! 제가 거짓 정보를 알았다면 왜 여기까지 따라왔겠습니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제발!”

“네 정보가 진짜든 가짜든 관심 없다. 모든 건 결과가 말해준다. 결국 내가 쥐새끼 같은 놈들의 잔꾀에 놀아난 꼴이 되고 말았다. 나에게 치욕을 안긴 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니콜라이가 개울가로 뛰어든다. 허우적거리는 그를 노려보던 타이요우가 총을 연사한다. 열 발의 탄환 가운데 대여섯 발이 피둥피둥한 몸체에 박힌다. 니콜라이의 시신은 세찬 물길에 휘감겨 쏜살같이 떠내려간다.

차량과 장갑차가 위장막을 깔아뭉개며 숲에서 나온다. 타이요우가 터벅터벅 걸어가 차에 오를 즈음 오 경부가 쪼르르 다가가 무릎을 끓고 장화에 묻은 진흙을 손으로 닦아낸다. 뒤에서 보고 있던 리용의 눈동자에 불꽃이 홧홧 타오른다. 이윽고 타이요우가 차에 오른다. 차량과 장갑차들이 그 뒤를 따라 계곡을 벗어난다.

상공을 선회하던 독수리무리가 차례를 기다리며 착륙을 시도한다. 먼저 도착한 까마귀 떼가 개울에 반쯤 잠긴 말의 시체에 앉아 부리를 다듬는다.




385.


뗏목은 무사히 무단장(牡丹江) 하류에 도착한다. 대기하고 있던 트럭 다섯 대에 무기가 옮겨진다. 광휘가 1호차에 올라 직접 운전대를 잡는다. 빅터가 조수석에 앉는다.

하얼빈 북쪽에 주둔하고 있는 의용군의 기지까지 이동하려면 곳곳에 도사린 난관을 무사히 통과해야만 한다. 광휘는 혹시 모를 적의 매복을 피하기 위해 험준한 길로 접어든다. 트럭들은 1호차가 낸 길을 따라 울퉁불퉁한 산길을 오른다. 트럭들이 시커먼 매연을 내뿜으며 간신히 가파른 오르막길을 기어오르자마자 곧바로 내리막길이 기다리고 있다.


“형, 점점 길이 험해지는데, 알고 가는 거겠지? 난 형만 믿어!”

빅터는 애써 태연한 척한다. 그러나 그의 민낯은 새하얗게 질려있다.

“수많은 전쟁터를 떠돌면서 터득한 문리가 딱 하나 있어. 생판 모르는 낯선 땅에서도 별자리만 보고도 길을 찾는 방향감각이야.”

“뭐야? 인간 나침반이란 얘기잖아!”

“인간 나침반? 그거 괜찮은걸! 하하핫!”

“형은 경성에 살 때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늘 혼자 다녔잖아. 오죽했으면 어머니께서 한길동이라고 하셨을까?”

“그랬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하던 광휘가 눈을 치뜬다. 그러곤 상기된 억양으로 캐묻는다.

“그런데 나를 어떻게 알아봤어?”

부지불식간에 허를 찔린 듯 인서가 머뭇거린다. 그러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무심히 대한다.

“만주에서 사람이 셋만 모이는 장소에는 죄다 현상수배전단이 붙어있던데, 뭘?”

“그래도 쉽게 알아 볼 수 없었을 텐데······?”

“사실 서광휘란 인간은 구면이야!”

갑자기 웅덩이가 나타나자 광휘가 핸드를 급히 틀어 간신히 빗겨 지나친다.

“구면이라니? 나를 미행이라도 했단 말이야?”

“신출귀몰하는 만주의 전설을 감히 누가 미행을 해? 우연히 기차 안에서 봤을 뿐이지.”

인서가 시큰둥하게 말꼬리를 흐린다.

“기차 안······?”

여전히 미심쩍은 듯 광휘가 제 기억을 되짚어본다.

“하얼빈으로 가는 객차 안에서 기차를 강탈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어.”

의구심이 풀린 듯 광휘가 계면쩍은 미소를 지으며 너스레를 떤다.

“아무리 종적을 감추려 해도 그놈의 전설 딱지는 뗄 수가 없다니까. 유명세 때문에 그림자조차 함부로 드리울 수는 신세라니······, 아! 서광휘! 그대는 정녕 귀신이더냐, 인간이더냐!”

“어련하시겠어요? 얼마나 유명세를 치르면 서광휘가 나타났다고 신고를 하는 통에 경찰서 업무가 마비가 되겠냐고요!”

“하하핫! 남아가 한 번 태어나서 그 정도는 해야지 콧방귀를 뀐다는 축에 끼지. 안 그런가? 한 소령!”

“한 씨 가문에 불세출의 영웅이 태어났으니, 가문의 영광이고말고. 하하핫!”

형제가 우스갯소리로 분위기를 전환한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한다. 길이 하도 덜컹거리는 바람에 대화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눈 좀 붙여! 갈 길이 멀어!”

“뭐라고?”

“좀 자라고. 아직 멀었어.”

빅터가 운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고개만 끄덕인다. 험로를 따라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한 뒤에야 비로소 트럭 행렬이 평지로 들어선다. 이미 사위는 칠흑 같은 어둠에 갇혀 괴괴하다.

“제수는 잘 지내?”

잠이 온 탓일까. 창문을 열고 머리를 흔들던 광휘가 뜬금없이 가족사를 묻는다.

“수잔은 지금 헨리랑 같이 경성에 와 있어.”

“제수랑 조카가 경성에 있다고?

“어떻게 그렇게 됐어.”

“신분이 노출되면 위험하잖아?”

“그렇게 만류해도 듣지 않더라고.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영어 교수로 일해.”

“그럼 정동에 있다는 말이네.”

“어머니의 돈버거를 잊지 못하는지 정동을 벗어나지 못하네. 하하핫!”

“어머니의 돈버거를 어떻게 잊겠냐?”

광휘가 빅터의 어깨를 툭 건드린다. 형제는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가 순화된 감정을 교류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눈에 밟히는 아버지가 사무친 탓에 형제는 잠시 숨을 고른다. 먼저 말문을 꺼낸 쪽은 빅터다.

“형, 아버지는 언제 뵐 수 있을까? 너무나 보고 싶어. 많이 고생하셨을 텐데······”

그는 채 말을 마치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인다.

“이번 작전을 끝내고 찾아뵙자.”

“건강하시지?”

“여전하셔.”

광휘는 낙마한 이후로 몸져누워 병상을 지키는 아버지의 소식을 차마 입에 담지 못한다.

“초희라고 했지?”

“응. 얼마나 예쁜지 모르겠어. 어머니를 쏙 빼닮았거든.”

“몇 살이야?”

광휘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 듯 크게 숨을 내쉰다.

“일곱 살이야.”

“우리 헨리랑 동갑이네? 하하핫! 고모랑 조카가 동갑이라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초희가 실어증을 앓았어.”

“시장을 전전하며 동냥젖을 먹고 컸다는데 오죽하겠어. 아버지 고생이 무척 크셨을 텐데······. 형, 우리처럼 불효자가 또 있을까?”

“세상 천지에 우리처럼 불효를 저지른 형제는 없을 거야. 속히 아버지를 고향땅 미천골로 모시고 초희랑 오순도순 사는 게 꿈이다.”

“비록 어머니는 안 계시지만 가족 모두 모여서 살아야지. 꼭 그렇게 만들자고!”

눈시울이 달아오른 형제가 주먹을 마주친다.

“어머니가 당신 목숨 대신 낳은 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야. 우리가 힘을 합쳐 초희를 끝까지 키워야 해. 그것만이 어머니한테 저지른 불효를 갚는 길이야.”

빅터는 훌쩍거리는 코를 팽 풀어낸 뒤 말을 잇는다.

“당연하지. 그나저나 초희는 지금 어때?”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어. 전혀 말을 못하는 애가 글쎄 나를 보고 오빠라고 하면서 말문이 트인 거야. 지금은 학교에서 똑똑한 축에 들어. 자식, 누굴 닮아서 그리 똑똑한지······”

“원래 늦둥이에다 말이 더딘 애들 중에 천재가 난다고 하잖아.”

“그래, 난 애들을 키워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형, 사진 없어?”

“막사에 두고 왔어. 기지에 돌아가면 보여줄게.”


빅터는 가족이라도 상봉한 듯 해맑게 웃으며 창밖을 내다본다. 어스름 새벽이 물러나며 불그스름한 아침 햇살이 그의 얼굴에 어른거린다.



386.


하얼빈 조차장으로 돌아온 타이요우는 조선총독부에서 차출한 특고형사를 특별객차로 불러들인다. 오진구와 조명철, 표찬일이 상황판을 뚫어져라 주시하는 타이요우 앞에 부동자세로 서 있다.

칼날에 베인 왼쪽 뺨을 어루만지던 타이요우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분을 삭이지 못할 때마다 치솟은 화가 상처 부위에 벌겋게 열꽃을 피운다. 그는 가려움증을 참지 못하고 상처 부위를 벅벅 긁기 시작한다. 얽은 상피세포가 금방 선홍색으로 물든다. 오진구가 얼른 손수건을 꺼내 건넨다. 손수건으로 왼쪽 뺨을 닦아내자 핏기가 비친다.


“내가 자네들은 보자고 한 건 조센징은 조선 토종이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무단장 매복이 실패로 돌아간 건 전적으로 로스키놈들을 믿었던 내 불찰이 크다. 영악하고 포악하기 짝이 없는 불곰을 믿다니······”

그는 핏기가 선명한 손수건을 움켜쥔다. 경련이 일어난 왼쪽 뺨을 실룩거린 뒤 주먹으로 힘껏 테이블을 내리친다.

“하얼빈 홍등가에 아편에 찌든 독립군의 탈영병들이 있다는 정보다. 돈이 얼마든지 들어도 좋다. 그놈들을 포섭하여 의용군에 침투시켜 독립군의 동선을 추적하면 머지않아 서광휘와 한인서의 꼬리도 드러날 것이다.”


타이요우의 명령에 따라 표찬일이 탈영병으로 위장하여 홍등가로 숨어든다. 오진구와 조명철은 표찬일의 배후를 맴돌며 그를 보호함과 동시에 표적을 물색한다. 표 경부가 돈을 뿌리며 환심을 사기 시작하자 돈이 떨어진 아편중독자들이 꾸역꾸역 모여든다. 그 가운데 두 명이 포섭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소동기와 강호철은 홍등가를 벗어나 표찬일이 마련해준 곳으로 거처를 옮긴다. 표찬일은 두 사람이 요구할 때마다 조건 없이 거액을 내준다. 두 사람은 하얼빈에서 내로라하는 요정을 드나들며 돈을 펑펑 쓴다. 매일 기녀 십여 명과 어울리며 하는 짓이라곤 순도 높은 아편에 찌든 채 혼숙하며 먹고 마시고 욕정을 탐하는 게 고작이다.

금병매의 타락한 주인공인 서문경이라도 되는 양 주지육림에 빠져 환상에 젖어 살던 소동기와 강호철은 돌연 봉변을 당한다. 입속의 혀처럼 굴던 기생들이 돈이 떨어지자 문전박대를 한 것이다.

하루아침에 거지꼴 신세가 된 그들의 앞에 시트로엥 자동차가 멈춘다. 흑표범처럼 검은색 광택을 뿜어내는 자동차 앞에서 그들은 노예처럼 손을 내밀며 구걸을 한다. 뒷좌석의 창문이 스르륵 내려진다. 중절모를 쓴 표찬일이 방긋 웃으며 그들을 반긴다.


“아니, 여기서 뭐하고 있나? 어서 타시게. 우리는 한민족 아닌가?”

어리둥절한 두 사람은 얼떨결에 뒷좌석에 올라탄다.

“엊그제만 해도 아편굴에서 뒹굴던 자네가 아니니? 이렇게 미끈한 차를 타고 다니면 여자들이 줄을 선다는데 맞는 말이니?”

소동기가 가죽 시트를 어루만지며 묻는다.

“이르다 뿐인가.”

조바심을 치던 강호철이 끼어든다.

“대관절 무슨 일을 하길래 하루아침에 이렇듯 신세가 좋아졌누?”

“다 그런 일이 있다네.”

“무슨 일이네? 우리도 좀 껴주라우.”

표 경부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가방을 열어 펼친다. 가방 안에는 돈다발이 차고 넘친다.

“나, 정보부 밑에서 일해. 밀정이야.”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며 적의를 드러낸다.

“이사람들이 순진하기는······, 탈영한 주제에 일말의 애국심이 남아 있나 보지?”

“그건 아니지만 서리, 밀정은 좀 그렇지 않네?”

“서광휘 알지? 그놈만 잡으면 이 돈은 아무것도 아니야. 놈이 있는 정보만 캐다 주면 고래등 같은 집에서 첩 열 명은 족히 데리고 살 수 있어. 아편은 말 할 것도 없고.”

표 경부가 아편흡입기를 건넨다.

“이거 정말 상품 중에 상품이구만? 바로 홍콩까지 간다 아니니?”

서너 차례 흡입을 한 동기가 흰자위를 번득거리며 어눌한 어조로 또박또박 말을 잇는다. 동기를 지켜보던 호철의 시선이 파르르 떨리며 볼멘소리를 늘어놓는다.

“홍콩은커녕 만주도 벗어난 적이 없는 종간나 새끼가 뻥치고 자빠졌구만.”

동기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흡입기가 든 손으로 호철의 팔뚝을 톡톡 건드린다.

“이 간나야. 구룡 반도를 불야성으로 밝힌 활동사진을 본 적 있잖니? 거기가 바로 홍콩이 아니니. 무지렁이를 욕하면 내 입만 아프지! 너를 동무로 둔 내가 반푼이다.”

뒷좌석에 삐딱한 자세로 침을 흘리던 동기가 팔을 움츠린다. 군침을 삼키던 호철이 잽싸게 그의 손에 쥐어진 흡입기를 가로챈다. 그러곤 손을 떨며 서서히 들이마신다. 얼마간 흐른 뒤 호철은 희미한 목소리로 표 경부에게 묻는다.

“그건 동지를 팔아넘기는 거 아니니? 아무리 돈도 좋고 아편도 좋지만 그건 좀 그렇다.”

흡입기를 들이마신 동기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호철을 꼬드긴다.

“이 종간나야! 조국이 밥 먹어줄 것 같니? 일본이 망할 것 같냔 말이다. 만주까지 넘어간 마당에 무슨 놈의 조선 타령이니? 난 표 동지처럼만 살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우.”

금단현상이 온 듯 손을 벌벌 떨던 호철이 흡입기를 뺏어 허겁지겁 깊이 들이쉰다. 그러곤 헤벌쭉거리며 동기의 의견에 동조한다.

“간나새끼, 비뚤어진 입으로 말은 바로 하는구나. 조국이 언제 삼시 세 끼 강냉이 죽이라도 챙겨준 적이 있간? 까지 것 한 번 왔다가는 인생, 이번 참에 팔자 한 번 고치자우.”


두 사람은 흡입기를 돌려가며 점점 무너져간다. 마침내 두 사람이 뒷좌석에 서로 뒤엉켜 널브러진다. 표 경부가 혀를 차며 비웃는다. 시트로엥 세단이 매연을 내뿜으며 거리를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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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127화 카츄샤 NEW 16시간 전 8 2 13쪽
126 126화 의사 왕룽 +1 19.06.23 18 3 17쪽
125 125화 빅터 한 재단 +2 19.06.19 40 3 13쪽
124 124화 인천상륙작전 +1 19.06.13 52 2 15쪽
123 123화 메모리 가든 +1 19.06.12 43 2 15쪽
122 122화 겹생 +3 19.06.10 43 2 16쪽
121 121화 하와이 +1 19.06.07 51 3 14쪽
120 120화 소령 맥나마라 +4 19.06.06 53 2 15쪽
119 119화 한초희 +1 19.06.05 54 2 14쪽
118 118화 맥아더 원수 +1 19.06.04 57 2 14쪽
117 117화 기만방송 +1 19.06.03 57 2 13쪽
116 116화 코리안 커넥션 +1 19.06.01 66 2 12쪽
115 115화 잠수함 +1 19.05.30 79 2 13쪽
114 114화 6.25 전쟁 +1 19.05.29 66 2 12쪽
113 113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특명 1호 ‘폭풍’ +1 19.05.21 71 2 11쪽
112 112화 금괴수송작전 +1 19.05.19 81 2 10쪽
111 111화 '암호명 A-1' +1 19.05.18 67 2 13쪽
110 110화 악연(惡緣) +1 19.05.17 65 2 14쪽
109 109화 마지막 미션 +1 19.05.16 66 2 12쪽
108 108화 애치슨 라인 +1 19.05.15 66 2 12쪽
107 107화 연적(戀敵) +1 19.05.15 66 2 12쪽
106 106화 독살(毒殺) +1 19.05.14 68 2 12쪽
105 105화 마돈나 다방 +2 19.05.13 66 2 15쪽
104 104화 한국은행 +1 19.05.11 75 2 14쪽
103 103화 비밀거래 +1 19.05.10 75 2 12쪽
102 102화 남미이주작전 +1 19.05.10 85 2 13쪽
101 101화 트루먼 독트린 +1 19.05.10 64 2 11쪽
100 100화 숙명의 라이벌 +1 19.05.10 65 3 18쪽
99 99화 Jane Doe +2 19.05.10 66 2 13쪽
98 98화 앙숙, 이승만과 김구 +1 19.05.10 65 2 12쪽
97 97화 반도호텔 +1 19.05.10 62 2 13쪽
96 96화 좌익과 우익 +1 19.05.09 61 2 13쪽
95 95화 조선인민공화국 +1 19.05.09 66 2 17쪽
94 94화 일본패망(日本敗亡) +1 19.05.09 62 2 12쪽
93 93화 원자폭탄 +1 19.05.09 60 1 13쪽
92 92화 김일성 +1 19.05.09 65 1 14쪽
91 91화 독수리 작전 +1 19.05.09 63 1 14쪽
90 90화 이승만 +1 19.05.09 61 1 14쪽
89 89화 비밀요원 나타샤 +1 19.05.09 60 2 15쪽
88 88화 OSS(미국전략사무국) +2 19.05.09 62 2 16쪽
87 87화 승전(勝戰) +1 19.05.09 61 2 14쪽
86 86화 진주만공습 +1 19.05.08 61 1 16쪽
85 85화 갈라예프 +2 19.05.08 60 2 16쪽
84 84화 채권(債券) +1 19.05.08 63 2 11쪽
83 83화 다카키 마사오 +1 19.05.08 73 2 12쪽
82 82화 광복군(光復軍) +1 19.05.08 58 2 13쪽
81 81화 육군정보학교 +2 19.05.08 59 2 11쪽
80 80화 홍콩행 +1 19.05.07 63 3 13쪽
79 79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3 19.05.07 60 2 12쪽
78 78화 김원봉과 김구 +1 19.05.07 58 2 16쪽
77 77화 까레이스키 +3 19.05.07 56 2 12쪽
76 76화 탈출(脫出) +1 19.05.07 64 3 9쪽
75 75화 박정희와 최태민 +1 19.05.07 66 2 9쪽
74 74화 중일전쟁(中日戰爭) +1 19.05.07 57 2 13쪽
73 73화 강제이주 +3 19.05.06 57 1 12쪽
72 72화 마루타 +1 19.05.06 57 1 12쪽
71 71화 막후 실력자 +1 19.05.06 60 2 13쪽
70 70화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등장 +1 19.05.06 59 1 15쪽
69 69화 천황결사옹위청년단 +1 19.05.05 62 1 15쪽
68 68화 후흑학(厚黑學) +1 19.05.05 61 1 13쪽
67 67화 경몽장(耕夢莊) +1 19.05.05 62 1 12쪽
66 66화 학교(學校) +1 19.05.05 64 1 8쪽
65 65화 국제연맹(國際聯盟) +1 19.05.05 62 1 19쪽
64 64화 나타샤 +1 19.05.05 63 1 11쪽
63 63화 보고서 +1 19.05.05 64 1 11쪽
62 62화 시인과 영웅 +2 19.05.04 64 2 15쪽
61 61화 탄생의 비밀 +2 19.05.04 63 2 18쪽
60 60화 국경수비대 +1 19.05.03 63 2 13쪽
59 59화 제네바협약 +4 19.05.03 66 2 18쪽
58 58화 명백한 운명 +1 19.05.03 63 1 16쪽
57 57화 미두취인소(米豆取人所) +1 19.05.03 65 1 12쪽
56 56화 생포(生捕) +1 19.05.02 63 2 13쪽
55 55화 참패(慘敗) +1 19.05.02 64 2 14쪽
54 54화 향수병(鄕愁病) +1 19.05.02 63 2 18쪽
53 53화 음악회 +1 19.05.02 62 2 18쪽
52 52화 들개 진구 +1 19.05.02 65 2 24쪽
51 51화 가락지 +3 19.05.02 64 2 26쪽
50 50화 덫 +1 19.05.01 65 1 28쪽
49 49화 추격전(追擊戰) +1 19.04.30 64 2 35쪽
48 48화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1 19.04.30 71 2 39쪽
» 47화 광휘와 빅터 +3 19.04.29 67 2 33쪽
46 46화 특별수사본부(特別搜査本部) +4 19.04.29 67 2 41쪽
45 45화 만저우리(滿洲里) +4 19.04.28 66 3 35쪽
44 44화 폭풍전야(暴風前夜) +1 19.04.28 65 3 37쪽
43 43화 Boys, be ambitious! +1 19.04.27 66 2 39쪽
42 42화 만주국(滿洲國) +5 19.04.27 70 2 38쪽
41 41화 만몽영유계획(滿蒙領有計劃) +1 19.04.26 68 3 25쪽
40 40화 재회(再會) +1 19.04.26 67 3 30쪽
39 39화 빅터 한 +1 19.04.25 71 3 49쪽
38 38화 박진만 +2 19.04.25 72 3 45쪽
37 37화 정보국 5과 +3 19.04.24 80 3 51쪽
36 36화 마적(馬賊) 왕리 +2 19.04.24 75 3 49쪽
35 35화 삼두정치(三頭政治) +2 19.04.23 75 3 42쪽
34 34화 주찬 +1 19.04.23 73 3 51쪽
33 33화 만주야사(滿洲野史) +2 19.04.22 74 3 50쪽
32 32화 서광휘 +2 19.04.22 76 3 47쪽
31 31화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 +2 19.04.21 83 4 47쪽
30 30화 미쓰야협정(三矢協定) +4 19.04.21 82 4 46쪽
29 29화 출산(出産) +3 19.04.20 88 4 43쪽
28 28화 밀항(密航) +2 19.04.20 83 4 45쪽
27 27화 불령선인(不逞鮮人) +1 19.04.19 83 4 43쪽
26 26화 님의 침묵 +1 19.04.19 86 4 48쪽
25 25화 이민(移民) +2 19.04.18 100 4 39쪽
24 24화 회자정리(會者定離) +2 19.04.18 86 5 44쪽
23 23화 여걸(女傑) 수잔 +5 19.04.17 91 4 46쪽
22 22화 3·1 만세운동 +5 19.04.17 88 4 44쪽
21 21화 천적(天敵) +1 19.04.16 90 5 49쪽
20 20화 아카키 타이요우(赤木太陽) +4 19.04.16 93 5 52쪽
19 19화 망국(亡國) +4 19.04.15 101 3 49쪽
18 18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3 19.04.15 101 3 46쪽
17 17화 한성진격작전(漢城進擊作戰) +4 19.04.14 103 4 49쪽
16 16화 의병전쟁(義兵戰爭) +4 19.04.14 103 4 43쪽
15 15화 춘투(春鬪) +5 19.04.13 106 3 47쪽
14 14화 암살미수(暗殺未遂) +4 19.04.13 114 3 37쪽
13 13화 결혼(結婚) +3 19.04.12 167 6 42쪽
12 12화 돈버거 +9 19.04.12 152 6 44쪽
11 11화 대한제국(大韓帝國) +2 19.04.11 166 7 45쪽
10 10화 김출세(金出世) +7 19.04.11 181 8 42쪽
9 9화 낙향(落鄕) +4 19.04.10 190 7 42쪽
8 8화 혁파안(革罷案) +4 19.04.10 191 7 41쪽
7 7화 증기자동차 +2 19.04.09 235 10 22쪽
6 6화 2차 사행(使行) +2 19.04.09 234 11 24쪽
5 5화 견문록(見聞錄) +5 19.04.08 263 12 19쪽
4 4화 북경(北京) +1 19.04.08 331 11 19쪽
3 3화 만남 +1 19.04.08 426 12 15쪽
2 2화 1차 사행(使行) +2 19.04.08 604 12 14쪽
1 1화 파락호(破落戶) 이하응 +17 19.04.08 1,176 1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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