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독점  공모전참가작 님의 침묵

웹소설 > 자유연재 > 대체역사, 드라마

완결

최장르
작품등록일 :
2019.04.08 16:31
최근연재일 :
2019.07.12 16:22
연재수 :
134 회
조회수 :
22,122
추천수 :
411
글자수 :
1,432,999

작성
19.04.30 04:40
조회
113
추천
2
글자
35쪽

49화 추격전(追擊戰)

님의 침묵




DUMMY

제25장 이별(離別)



396.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관동군과 만주국군은 즉각 보복조치를 감행한다. 뤼순 비행장을 이륙한 폭격기 편대가 기수를 동북으로 튼다. 폭격기들이 지린성 상공으로 편대비행을 한다. 지린성은 둥베이의용군의 주축을 이룬 지린자위군의 본거지다.

폭탄창을 개방한 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한다. 폭격기가 지나가는 그림자를 따라 폭염이 치솟는다. 기수를 남쪽으로 돌린 폭격기는 독립군 기지와 한인촌을 연달아 폭격한다. 변변한 건물조차 없이 초가가 고작인 민가는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한다. 만주국군은 항일의용군에 가담한 전력이 있는 민가를 닥치는 대로 습격한다. 그들이 지나는 곳마다 주민들의 목이 마을 입구에 효수된다.


둥베이의용군에 가담한 지린자위군(吉林自衛軍)과 훙창대(紅槍隊), 헤이창대(黑槍隊),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의 지휘부의 몽타주가 만주 전역에 뿌려진다. 특히 카오펑린과 서광휘, 주찬, 지청천 등 주요 지휘관들의 사진이 ‘1급 전범자’로 분류되어 모든 도시의 벽에 나붙는다. 하단에는 각 군의 참모장과 지대장 그리고 부역자란 이름으로 ‘2급 전범자’로 낙인이 찍힌 이름이 오르내린다. 특이하게도 부역자 명단에는 빅터와 짱웨이, 핸더슨이 포함된다.

이백여 명을 헤아리는 전범자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다. 만주뿐만 아니라 국경 너머에서 악명을 떨치던 군벌들도 인간사냥꾼 대열에 합류한다. 관동군의 비호를 받는 대도회와 낭인들도 현지인을 고용하여 만주 전역을 이 잡듯 훑으며 인간사냥에 나선다.

관동군과 만주국군에 의해 자행된 1차 가해보다 인간사냥꾼들이 저지른 2차 가해가 민심의 동요를 불러일으킨다. 폭격과 습격으로부터 겨우 목숨을 보존한 생존자에 대한 살육과 강간, 고문 등의 일련의 복수극은 마지막 남은 영혼마저도 철저하게 짓밟는다. 그들의 만행을 피해 도주하는 행렬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연일 계속되는 폭격으로 주둔지를 상실한 둥베이의용군은 하루아침에 집을 잃은 떠돌이 신세로 전락한다. 가족의 생존을 확인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탈영병이 날로 들어난다. 둥베이의용군의 지휘부는 정찰기에 발각되기 쉬운 개활지를 벗어나기로 결정하고 위취엔웨이후(玉泉威虎)산으로 이동한다.

숲이 우거진 골짜기를 따라 기나긴 행렬이 이어진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슈앙쳉바오를 함락시킨 군대라고 하기엔 그 행색이 너무나 추레하다. 사기가 땅에 떨어진 탓일까. 발을 디딜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무성하게 이어질 뿐 수군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빅터가 어깨가 축 늘어진 병사들을 헤집으며 잰걸음을 놓는다. 저만치 앞서가던 서광휘의 뒷모습을 발견하곤 손을 뻗는다.


“형!”

뒤를 돌아본 광휘가 반색한다.

“무탈했구나. 걱정 많이 했다.”

“전선에 나간 사람이 후방을 걱정할 시간이 어디 있어. 그나저나 다친 데는 없어?”

“보시다시피······”

광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형제는 병사들 틈에 끼어 나란히 걷기 시작한다. “형! 아버님한테는 언제 갈 거야?”

“찾아봬야 하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네.”

빅터는 입을 비죽이 내민다.

“이 전쟁은 언제 끝날지도 모르잖아. 이번에 다녀오는 게 어때? 나도 머지않아 본국에서 복귀하라는 훈령이 올 거야.”

“만주 전역에 항일의용군의 수배전단이 나붙었어. 섣불리 길을 나섰다가는 체포되기 십상이야.”

“형이랑 나랑 고까짓 것 하나 못 따돌릴라고?”

“말처럼 쉽지가 않아.”

“형! 그럼 나 혼자라도 갈게. 지도에 점만 찍어줘!”

“인서야! 조금만 기다리자. 곧 지휘부에서 대대적인 공세작전을 취할 예정이야. 물론 내가 빠져서도 안 되고. 이번 대공세작전만 끝내면 꼭 같이 갈게.”

“형은 옛날부터 그놈의 대의명분이 먼저고 가족은 늘 뒷전이었잖아.”

“내가 그랬나? 미안하다.”

“누가 사과 듣자고 한 말이야?”

빅터는 길게 한숨을 내쉰다. 그러곤 퉁명스럽게 묻는다.

“그 잘난 대공세는 언제 시작하는데?”

“겨울이 오기 전에 시작할거야. 만주 겨울을 이길 군대는 없으니까.”

“그럼 이번에는 꼭 약속 지켜야 해!”

“그나저나 앞으로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이제 와서 무슨 형 노릇을 하려고 그래? 빨리 이번 작전이나 잘 마무리 져. 나도 하얼빈으로 돌아가서 본부와 연락을 취해봐야 알 수 있어.”

“그래, 다시 만날 때까지 무탈하자. 이렇게 널 만난 것만 해도 축복받은 일인데, 마음 놓고 즐기지 못하는 게 한스러운 따름이다.”

“형을 만난 것만 해도 크나큰 축복이야. 곧 아버님과 초희와 함께 좋은 시간 보낼 때가 올 거야. 그때까지 참자.”

“자식! 이럴 땐 꼭 네가 형 같다니까.”

광휘가 인서의 팔을 툭 친 뒤 어깨에 손을 두른다.

“어디에 있든 꼭 무탈해야 한다. 알았지?”

“형이나 신경 써. 난 적어도 폭탄이 떨어지는 전장에는 없으니까.”

“참, 깜빡할 뻔했다.”

광휘가 목을 빼곤 목줄을 푼다. 목줄에서 가락지를 뺀 그가 빅터에게 내민다.

“이게 뭐야?”

가락지를 받아든 빅터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른다.

“형! 이건 어머니가 끼던 쌍가락잖아. 근데 왜 하나밖에 없어?”

“초희가 주더라고. 하늘에 계신 엄마가 지켜줄 거라며.”

“엄마를 본 적도 없는 애가······”

빅터가 말을 채 잊지 못한다.

“어머니는 초희를 통해서 우리 곁에 오신 거야.”

광휘가 빅터의 어깨를 다독거린다.

“형, 초희 말대로 엄마가 지켜주실 거야. 우리 가족이 다시 만날 때까지 가락지는 형이 갖고 있어.”

빅터가 가락지를 내밀자 광휘가 그의 손바닥을 오므린다.

“난 어머니의 정기를 충분히 받았어. 네가 잘 간직하고 있다가 초희 만나면 합을 맞춰. 그게 바로 우리 가족이 다시 만나는 정표니까.”


빅터와 광휘가 불끈 쥔 주먹을 서로 부딪친다. 빅터가 독립이의 귀때기를 부여잡고 얼굴을 맞댄다. 독립이가 혀를 날름거리며 빅터의 얼굴을 핥는다. 이윽고 행군을 알리는 호루라기가 요란하게 울린다.


“형! 사랑한다.”

“싱거운 자식! 남자끼리 무슨 놈의 사랑타령이야!

“제발 무탈해야 한다.”

“전설은 죽지 않아!”


말에 오른 광휘가 병사들의 행렬에 끼어 저만치 멀어져 간다. 길잡이라도 되는 양 독립이가 꼬리를 흔들며 총총히 앞서 나간다. 멀거니 보고 있던 빅터도 뒤돌아서 갈 길을 재촉한다.




397.


다음 날 폭격을 피해 계곡으로 은신한 카오펑린과 서광휘, 주찬를 포함한 각 군의 지휘관들이 임시로 만든 진지에 모여 대책회의를 한다.


“아군의 세력이 더 와해되기 전에 기강을 다잡고 슈앙쳉바오를 칩시다. 어차피 이래도 죽으나 저래도 죽을 텐데, 망설일 게 뭐가 있겠소?”

흙먼지를 뒤집어 쓴 장군의 발언에 카오펑린은 대꾸조차 않는다.

“장군님? 더 이상 숨을 데도 없습니다. 웬만한 마을은 초토화되어 식량은커녕 바람 피할 곳도 마땅치 않습니다. 그나마 온전한 마을도 의용군이 나타나면 다음 날 쑥대밭이 되기 일쑤라 촌장과 주민들이 곡괭이를 들고 의용군의 접근을 막고 있는 실정입니다. 차라리 이렇게 도망을 다닐 바에는 적과 정면승부를 벌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장군님! 결단을 내리십시오.”

대한독립군의 신숙 참모장이 카오펑린에게 결단을 촉구한다. 마지못해 듣고 있던 카오펑린이 고개를 모로 튼다. 그의 시선은 곧장 서광휘를 향한다. 서광휘가 앙다문 입을 뗀다.

“공격을 하자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시기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흠! 이렇게 마냥 앉아서 포탄에 맞아 죽으란 얘기군!”

훙창대의 사령관이 치뜬 눈으로 서광휘를 쏘아본다.

“성을 사수만 했어도 지금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오. 이게 다 철수하라고 한 서 대장의 오판 때문이오.”

헤이창대 참모가 노골적으로 도발한다. 카오평린이 참모장을 나무란다.

“지금 와서 누굴 탓해봤자 제 얼굴에 침 뱉기가 아닌가? 상대를 비방할 때가 아닐세. 묘책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말해보게.”

카오펑린은 핏기가 걷힌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짐짓 평정심을 유지하는 척한다. 주찬이 성큼 앞으로 나선다.

“공연한 말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금 문뜩 ‘집단지성과 벌의 생리’란 말이 떠오릅니다.”

한숨짓던 사람들이 눈을 되록거리며 주찬 쪽으로 시선을 집중한다.

“나는 유년 시절을 상하이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줄곧 만주를 떠돌며 지냈습니다. 상하이에서 학교에 다닐 때 ‘집단지성’이란 단어를 배웠고 만주에서는 ‘벌의 생리’를 터득하게 되었죠. 지금 우리가 당면한 난제를 해쳐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집단지성’이 필요할 때고, 그러기 위해서는 ‘벌의 생리’를 이용해야 합니다.”

생뚱맞게 궤변을 늘어놓는 그녀 앞에서 누구도 쉽사리 입을 놀리지 않는다. 그저 입을 벌린 채 이어질 말에 귀를 쫑긋 세운다.

“다수의 개체가 서로 협력하거나 경쟁을 통해 터득하게 된 문리가 바로 ‘집단지성’입니다. 여기에 ‘벌의 생리’를 대입해보면 답이 나옵니다. 즉, 벌은 서로 협력하여 집을 짓고 꿀을 따와 종족을 번식시킵니다. 천적인 말벌이 급습하면 서로 똘똘 뭉쳐 죽음을 불사하고 말벌과 싸웁니다. 물론 종족을 유지하는 대가는 참으로 혹독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개체의 거지반이 죽어야만 겨우 종족을 유지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벌들은 말벌과의 전투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면 미련 없이 벌집을 버리고 흩어져 각자 도생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한 마리라도 볕이 잘 들고 천적이 없는 명당을 발견하면 서로 연락을 취해 여왕벌을 데리고 와 새로운 터전을 만듭니다. 바로 이것이 동물학자들이 미개한 벌이나 개미들을 통해서 밝힌 ‘집단지성’이란 이론입니다. 작금에 처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벌의 지혜를 빌리는 길뿐입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신숙이 동조한다.

“그렇다면 지금 각자 도생하기 위해 흩어진 다음 후일을 도모하자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바싹 약이 오른 말벌을 피하는 방법은 맞서 싸우는 것보다 일단 피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지금 적들도 폭격기와 경전차를 동원해서 압박을 가해오고 있습니다. 예봉을 피하는 길은 도피밖에 없습니다.”

훙창대 사령관이 비아냥거리며 그녀를 힐난한다.

“고작 줄행랑을 치자는 게로군. 당신네 마적들이야 도주할 말이라도 있으니 가능하겠지만 보병이 태반인 홍창대는 어쩌란 말이오? 당신들이 편하게 도주할 수 있도록 총알받이가 되라는 말이오? 절대 동의할 수 없소!”

두어 차례 마른기침을 삼킨 서광휘가 나선다.

“주찬 두목의 말씀이 옳습니다. 지금처럼 뭉쳐 다녔다간 더 큰 봉변만 당할 뿐입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게다가 기동력까지 갖춘 적에게 무리 지어 다니는 것은 스스로 목표가 되려는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각자 흩어져 도생하다가 때를 기다려 후사를 도모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상책입니다.”

헤이창대 참모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한다.

“초록은 동색이라더니만 전장에서 연합한 부대끼리 잘 노는 짓이군!”

“제가 이끄는 부대가 각 부대가 산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끝까지 뒤를 봐주겠습니다.”

서광휘의 뒤를 이어 주찬도 덧붙인다.

“마적단도 의용군이 안전 지역에 도착할 때까지 후방을 책임지겠습니다.”

얼마간 정적이 흐른다. 장군들은 저마다 안전한 탈출로를 선점하기 위해 골몰한다.

“서 대장! 그렇다면 다음 작전은 언제쯤이 되겠소?”

신숙이 묻는다.

“겨울철에 거병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담보하는 일이니만큼 그 전이 좋을 듯싶습니다. 각 부대가 자리 잡는 대로 연락병을 보내 기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카오펑린이 결론을 내린다.

“벌처럼 흩어집시다. 그리고 주둔지가 결정되면 서로 연락을 취해 연합할 방법을 모색합시다.”


어색하게 유지되던 침묵이 허공을 가르는 굉음과 함께 처참히 깨진다. 뒤미처 폭음과 함께 파편이 날아든다. 장성들은 제각기 안전한 곳을 찾아 납작 엎드린다. 연달아 폭격이 가해지면서 진지는 부지불식간에 폐허로 변한다.

폭탄 이십여 발이 산의 허리를 두 동강 낸 뒤에야 포격이 멎는다.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각자 병영으로 돌아간 지휘관들은 서둘러 병력을 이끌고 주둔지를 빠져나간다. 서광휘와 주찬은 병력이 전부 빠져나갈 때까지 계곡 입구를 엄호한다.



398.


장사치로 분장한 짱웨이가 먼저 시내로 잠입하여 정탐을 한 다음 매수한 인력거꾼을 약속 장소로 보낸다. 약속 장소에서 인력거를 탄 빅터와 핸더슨은 하얼빈의 로스키가 거주하는 민가로 잠입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곳곳에 나붙은 수배전단 때문에 외출은 엄두조차 못 낸다. 그나마 비슷한 중국인 사이에서 비교적 활동이 용이한 짱웨이가 빅터의 지령을 받고 신징 지부와 연락을 취한다.

전화기가 가설된 식당을 찾은 짱웨이는 주인에게 웃돈을 주며 전화기를 차지한다. 두둑한 돈을 받은 주인은 별다른 의심 없이 자리까지 내준다. 등 뒤로 지나가는 손님들을 뒤로한 채 짱웨이는 배짱 좋게 ‘2급 전범자’란 전단지에 실린 제 사진 아래에서 수화기를 붙잡는다. 그러곤 교환에게 신징 사무소의 전화번호를 알려준 뒤 기다린다.

잠시 후 전화가 연결되자 정확히 세 번 울리는 신호를 듣곤 끊는다. 그러곤 다시 전화를 연결하여 교환수에게 신징 사무소의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이렇게 하기를 다섯 번 한 다음 그는 교환수에게 상대방이 외출한 것 같다며 투덜거리곤 끊는다.

정확히 한 시간 후 전화기가 울린다. 신문을 들고 있던 그가 전화기로 다가가는 주인을 저지한다. 그러곤 씩 웃으며 수화기를 든다.


“여보세요?”

상대방의 저음이 들린다. 스미스 소령이다.

“영업사원 찬입니다.”

“불곰은 잡았나?”

“웬걸요. 하지만 불곰 가죽은 얻었습니다.”

“그럼, 철수해. 여기도 장사가 안 돼서 곧 문을 닫는다네. 그러니 본사에서 보세.”

“그럼, 곧 본사에서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짱웨이가 주인에게 수화기를 건네곤 급히 식당을 빠져나간다. 얼떨결에 수화기를 받은 주인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곤 전단지에 붙은 사진을 훑어보다가는 몸서리를 친다. 그는 수화기를 들고 교환수에게 하얼빈 경찰서를 연결하라고 큰소리를 친다.


네온이 불야성을 이룬 하얼빈 시내에 갑호 비상령이 내려진다. 역을 기준으로 도로마다 경찰차들이 사이렌을 울리며 바리게이트를 치고 검문을 강화한다. 뒷골목에 숨어 거리를 살피던 빅터가 난감을 표정을 짓는다. 골몰하던 핸더슨이 의견을 제시한다.


“소령님, 기차로 하얼빈을 빠져나가는 것은 포기해야겠습니다. 다른 이동수단을 찾아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빅터는 핸더슨의 말을 공연히 여기고 한숨을 폭 내쉰다.

“저렇게 검문이 심한데 무슨 수로 이동수단을 찾아!”

빅터의 말을 귓등으로 듣던 핸더슨이 고개를 빠꼼 내밀고 역 주변을 살핀다. 이윽고 그가 손가락을 튕기며 짱웨이 쪽으로 고개를 모로 튼다.

“짱 중위! ”

“왜?”

“저기 헌병대 건물 보이지?”

짱웨이가 목을 길게 뺀 채 역 바로 옆에 있는 헌병대의 건물을 샅샅이 훑어본다. 트럭 두 대 옆으로 말 십여 마리가 나란히 묶여 있다.

“내가 헌병과 경찰의 시선을 돌린 테니, 짱 중위는 말 세 마리를 탈취해.”

“뭐? 나보러 헌병대가 우글거리는 소굴로 제 발로 걸어가라고? 벽에 저렇게 수배전단으로 도배가 됐는데도?”

“걱정하지 마! 다 생각이 있으니까. 총소리가 나면 말을 탈취하고 주유소 앞으로 오기만 하면 돼.”

“핸더슨! 무모한 짓은 용납할 수 없어. 날이 밝는 대로 하얼빈 시계를 넘을 거야. 잠이나 푹 자도록 해.”


핸더슨은 빅터의 명령도 무시한 채 골목을 뛰쳐나간다. 빅터가 말릴 틈도 없이 그는 곧장 역 맞은편에 있는 술집으로 기세 좋게 들어간다. 잠시 후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차와 헌병대가 술집 주변을 봉쇄한다.

리용 경시가 지휘를 하며 경찰들을 술집으로 접근시킨다. 이윽고 리용이 고개를 끄덕이자 무장경찰들이 술집 안으로 냅다 뛰어든다. 불과 이삼 초가량이 지난 뒤 부지불식간에 핸더슨이 술집의 창문을 깨고 길바닥에 나뒹군다. 그러곤 벌떡 일어나 경찰차의 연료통을 정조준한다. 총이 발사되자마자 경찰차가 폭발을 일으키며 불기둥이 치솟는다. 삽시간에 총격전이 벌어진다. 경황이 없는 틈을 타 핸더슨이 주유소 쪽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어라, 저 미친 놈! 정말 똘아이 맞네. 에이 씨!”


짱웨이가 구시렁거리며 헌병대 건물로 냅다 달린다. 그러곤 두 마리의 고삐를 틀어쥐고 말에 올라 달리기 시작한다. 짱웨이가 말을 몰고 온다. 빅터가 잽싸게 말에 올라 주유소 쪽으로 달린다.

핸더슨이 주유기를 향해 총을 쏜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주유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핸더슨이 제법 여유 있게 말에 오른다. 뒤미처 쫓아오는 경찰차들 앞으로 불이 번지면서 말들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유유히 시내를 벗어난다.



399.


하얼빈 조차장에 정차한 특별객차 안에서 대책회의가 열린다. 열독이 올라 벌겋게 달아오른 타이요우가 부하들을 다그친다.


“제 발로 기어들어온 놈들을 놓쳤다. 그러고도 너희들이 대일본제국의 충복이라 말할 수 있겠나?”

침통한 표정을 짓는 부하들은 차마 고개를 못 든다.

“놈들의 탈출 경로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압록강을 넘어 조선으로 가려 할 것이고, 두 번째는 다롄으로 가서 배편을 이용하려 할 것이다. 당장 국경수비대와 해안경비대에 연락하여 모든 교량과 선착장, 배, 도로 할 것 없이 검문을 강화하라고 지시하라. 리 경시는 다롄 쪽 추격대를 이끌고, 오 경부와 표 경부는 압록강 국경을 맡는다. 오 경부는 조선총독부와 연락하여 공조수사를 요청하도록! 정보부 소속의 영리한 놈들이니만큼 놈들보다 두 번, 세 번 더 생각하고 추격해야 한다. 알겠나?”

“예!”

리용과 오진구가 한 입이 되어 답한다.

“당장 뒤를 쫓지 않고 뭐하나?”


두 사람은 경례를 할 겨를도 없이 총총히 객실을 빠져나간다. 쥰페이와 미나토 그리고 나카다만 덩그러니 남은 회의실에 침묵이 흐른다. 타이요우는 그들을 무시한 채 지도 앞을 서성거린다. 세 사람은 그저 주인의 눈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그의 움직임에 맞춰 고개를 돌린다. 갑자기 지도 앞에 멈춘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어느 날 춘천에서 땡볕에 내린 소나기처럼 증발해버린 동생이 십여 년 만에 만난 형을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진다? 형제가 없어서 그런지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누가 대신 이 상황을 설명해주겠나?”

타이요우가 고개를 돌린다. 세 사람은 소금기둥이라도 된 양 눈동자만 되록거리며 서로 눈치만 본다. 미나토와 나카다를 번갈아보던 쥰페이가 망설인 끝에 자신 없는 목소리로 주절거린다.

“······일반 형제간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라고 봅니다. 소관이 추측하건대 형제간의 불화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마도 전세가 불리해지자 서로의 의견이 충돌했을 테고, 결국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각자 도생을 택하지 않았을까요?”

꾹 다문 입술을 실룩거리던 타이요우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뇌까린다.

“각자 도생이라? 형제간에도 살기 위해서는 각자 도생하는 길 말고는 없겠지. 의리도 없는 놈들. 한꺼번에 두 놈 다 체포하길 바랐는데, 쥐새끼처럼 각자 살겠다고 도망을 치다니······”

타이요우가 보드카를 꺼내 잔에 가득 따른다.

“한 잔씩 해.”

세 사람이 테이블에 앉아 잔을 든다.

“내 신조가 뭔 아나?”

익히 그의 잔인함을 알고 있는 세 사람은 애써 시선을 피한다.

“지옥이라도 현실을 즐겨라! 이게 바로 내가 터득한 신조라네. 전쟁에 이기는 방법이지.”

타이요우가 술잔을 들이켠 뒤 다시 빈 잔을 채운다. 장교 세 사람도 잔을 비운다. 빈 잔에 차례로 술이 가득 부어진다. 거나해진 타이요우가 술잔을 매만지며 속내를 털어놓는다.

“술이란 참 묘한 구석이 있어. 취하면 취할수록 정신이 혼미해지는 게 마치 가까이 다가갈수록 멀어지며 속을 태우는 여자라고나 할까?”

타이요우가 거추장스러운 듯 단추를 풀어헤친다.

“전쟁은 즐겨야 이기는 법! 자네들도 거추장스러운 단추를 풀게. 영 답답해 보이는 게 즐기는 표정들이 아니야.”

장교 세 사람도 단추 두어 개를 푼다.

“이번 전쟁에서 패한 이유를 곱씹어봤네. 우수한 병력과 무기를 갖고도 눈앞에서 놈들을 놓쳤어. 패장이 무슨 말을 하겠냐며 손가락질 할 테지만 이유를 알고 싶었어. 이유는 단 하나더군.”

세 사람이 그의 다음 말에 귀를 쫑긋 세운다.

“우리보다 놈들이 한 발 빨랐어. 오합지졸이라 얕봤던 거야. 놈들을 지휘하는 서광휘의 잔꾀에 놀아난 꼴이라니. 이번 전쟁을 치르면서 자네들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알고 싶군.”

쥰페이가 잔을 내려놓으며 헛기침을 삼킨다.

“소관 생각으로는 서광휘의 계략이 아군보다 훨씬 치밀하다고 봅니다. 놈이 슈앙쳉바오를 친 것 또한 철저한 계산 하에서 실행에 옮겼을 겁니다.”

호승심이 동한 타이요우가 눈을 치켜뜬다.

“어떤 근거로 놈의 계략을 높이 평가하는 건가?”

“놈은 최정예 아군이 철도를 이용하여 출동할 것을 예견했습니다. 철도는 운송이 편리한 반면에 대규모 병력이 이동하기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걸 갈파했던 거죠. 따라서 치고 빠지기에 슈앙쳉바오만한 곳도 없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대규모 병력이 열차로 이동할 것을 미리 예견했다? 제아무리 기동력을 갖춘 경전차도 열차에서 하역할 시간이 걸린다는 것까지 계산에 두었단 얘기군.”

“그렇습니다. 애초에 기동 여단이 육로로 이동하였다면 놈은 절대 슈앙쳉바오를 공격 거점에 포함시키지 않았을 겁니다.”

“설득력 있는 해석이야. 유격전에 능한 놈이라 치고 빠지는 시간을 철저하게 고려했을 거야.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타이요우가 미나토와 나카다를 일별한다. 미나토는 그저 입술 사이로 숨을 고르며 고민하는 척한다. 불콰해진 나카다가 허리를 곧추세운다. 쥰페이와 미나토가 기겁한다. 미나토가 슬그머니 나카다의 소매를 잡아끈다. 하지만 벌써부터 벼르고 있던 나카다의 행동을 저지하기에는 늦은 감이 있다.

“추동력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추동력?”

타이요우는 잠시 눈알을 되록거리며 ‘추동력’이란 단어에 골몰한다. 그러나 선뜻 떠오르는 의미가 없다. 나카다는 그러려니 하고 마저 말을 잇는다.

“전쟁은 대의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명분이 희박하더라도 만들어내야 합니다. 즉, 추동력을 스스로에게 부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려운 단어들이 등장하자 다소 어리둥절하던 타이요우가 짐짓 알은체를 한다.

“그래서?”

“이번 작전의 대의명분은 둥베이의용군을 무력화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추동력이 힘을 받지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게 뭔가?”

이상한 낌새를 차린 쥰페이와 미나토가 인상을 찌푸린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적을 상대할 철저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번 작전은 오로지 적이 아닌 서광휘를 생포하도록 추동력이 부여된 점이 패전의 원이라고 확신합니다.”

“나카다 쇼 대위!”

나카다는 피곤한 듯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무심히 답한다.

“네.”

“귀관의 말인즉슨 패전의 이유가 나한테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군. 그 뭐야? 추동력인지 뭔지, 서광휘의 생포에 맞춰지다보니 이번 전쟁이 탄력을 못 받았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렇게 들으셨습니까? 꼭 그런 뜻만은 아닙니다. 그렇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경시정님을 음해할 의도는 없습니다.”

타이요우가 벌떡 일어나 권총을 뽑아들고 나카다의 관자놀이를 겨눈다. 나카다는 실실 비웃으며 총구를 피하지 않는다.

“이 자식이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이젠 상투까지 틀어쥘 작정이구만! 좋다. 내가 서광휘를 생포하려고 추동력을 잃었다손 치자. 그러면 눈앞에서 놈을 놓친 네 놈은 도대체 무슨 추동력으로 그렇게 행동한 거야! 혹시 네 놈이 서광휘 놈과 내통이라도 한 게 아닌가?”

일순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험악해진다. 쥰페이와 미나토가 제각기 타이요우와 나카다의 편에 서서 뜯어말린다. 그러나 약이 바싹 오른 타이요우와 전혀 물러서지 않으려는 나카다는 서로 눈을 부라리며 막무가내다.

“햇병아리 대위 주제에 감히 나한테 훈수를 둬?”

쥰페이가 애걸복걸하며 그의 비위를 맞춘다.

“경시정님! 취해서 하는 말입니다. 제발 진정하십시오. 미나토! 뭐 하나? 당장 쇼 대위를 데리고 나가!”

미나토가 쇼를 부축하고 나간다. 쥰페이가 물 잔을 건넨다.

“경시정님! 물 좀 드시고 노기를 가라앉히십시오. 미친놈이 무슨 말을 못 합니까?”

“저 자식은 총살감이야. 당장 데리고 와!”

타이요우가 물 잔을 객창에 내던진다. 객창이 쫙 갈라지며 유리찬의 파편이 사방으로 튄다.

“날이 밝는 대로 경시정님께 한 행동을 엄중히 문책하겠습니다. 제발 진정하십시오. 이번 일은 소관이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타이요우의 입에서 끊임없이 상욕이 쏟아져 나온다. 눈치를 살피던 쥰페이가 슬그머니 객차를 빠져나간다. 홀로 남겨진 타이요우가 씩씩거리며 테이블에 놓인 술병과 잔을 양손으로 밀어버린다. 객차 바닥에 유리조각이 나뒹군다.

다음날 나카다는 중위로 강등되어 뤼순형무소로 발령이 난다. 타이요우는 쥰페이와 미나토가 나카다를 배웅하는 장면을 객실 커튼 사이로 지켜본다.




400.


둥베이평원(東北平原)으로 접어든 일행은 개울가에서 잠시 쉬기로 한다. 밤새 달려 기진맥진한 말 세 마리가 개울가에 목을 처박고 목을 축이다. 갈증을 해소한 말들이 천변에 핀 들풀을 뜯어먹는다.


“소령님, 머지않아 추적대가 사방에서 쫓아올 텐데, 어디로 가실 예정입니까?”

핸더슨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묻는다.

“일단 도시를 경유하는 방법은 피할 생각이야.”

망원경으로 지평선을 관찰하던 짱웨이가 제안을 한다.

“소령님, 육로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난징으로 가려면 창춘이나 펑톈을 지나 대륙의 관문이라 불리는 산하이관을 통과해야만 가능한데, 그곳에는 관동군의 정예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군사기지가 포진해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최선의 방법은 육로를 벗어나 배편을 이용하는 길 뿐입니다.”

핸더슨이 고목나무 밑동에 걸터앉아 딴죽을 건다.

“배를 몬 적이라도 있어? 호숫가에서 쪽배라면 모를까, 난 없어. 험난한 황해를 건너야 하는데, 찬송가만 부른다고 바다가 저절로 길을 내줄 리도 없잖아. 게다가 배는 어떻게 구하려고? 혹시 훔치자는 얘기는 아니겠지?”

“말을 훔치자고 제안을 한 게 누군데? 이제 와서 착한 사마리안처럼 군다고 누가 구원의 손이라도 내밀어 줄까 봐? 천만의 말씀!”

짱웨이와 핸더슨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빅터가 나선다.

“짱 중위! 의견을 말해 보게.”

“다롄에는 난징 정부 쪽 요원이 파견되어 있습니다. 일본 본토에서 실어 나르는 병력과 군수물자를 정탐하기 위해서죠. 그 요원하고 접선만 되면 배를 쉽게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짱웨이가 시큰둥하게 앉아 있는 핸더슨을 보며 들으라고 큰 소리로 덧붙인다.

“황해를 손바닥처럼 잘 알고 있는 마도로스도 포함해서 말이죠.”

핸더슨이 꼬박꼬박 따져 묻는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우리도 영사관과 연락만 되면 배가 아니라 잠수함이라도 보내줄걸?”

“그럼 자네가 직접 나서지 그래? 껑충한 키에 큼지막한 파란 눈을 가졌으니 잘도 찾겠지. 물론 관동군의 눈에도 쉽게 띄겠지만······”

“이 조그만 한 놈이 입만 살아가지고······”

핸더슨이 주먹을 쥐고 벌떡 일어난다. 빅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다.

“지금 애들처럼 주먹다짐이나 할 처지가 아니잖아. 짱 중위의 제안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인 것 같다. 1차 목표는 다롄으로 정한다. 말이 배를 채우는 즉시 이곳을 떠난다.”


핸더슨과 짱웨이가 풀을 뜯고 있는 말 위에 안장을 얹는다. 말에 오른 세 사람의 그림자가 석양을 등지고 길게 드리워진다. 잠시 뒤 말 세 마리는 검붉은 장막 속으로 점점이 되어 사라진다.



401.


관동군 예하 기동여단은 북만주 일대의 민가를 급습하여 닥치는 대로 한국인을 유린한다. 특히 항일의용군에게 숙영지를 제공한 마을은 본보기로 삼아 초토화시킨다. 서광휘와 주찬이 이끄는 부대는 어디서든 환영은 고사하고 기피의 대상이 된다.

카오펑린의 본대와 합류한 서광휘와 주찬은 야간행군을 통해 마침내 싼장평원(三江平原)을 횡단하여 마지막 보루인 쌍봉계곡으로 향한다.

옥수수 가루 한 주먹으로 하루를 버티며 뜬눈으로 행군한 의용군은 몹시 탈진한 상태다. 의용군은 쌍봉계곡에 도착하자마자 곤죽이 되어 널브러진다. 그들에게 군율을 강조하고 절도 있는 행동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절대적인 휴식이 필요한 의용군에게 쌍봉계곡은 그야말로 지상낙원이나 마찬가지다. 주찬은 동굴 깊숙이 저장해둔 비상식량을 개방하여 굶주린 병사들의 배를 채운다.

어느 정도 원기를 되찾은 의용군들이 훈련에 참가하기 시작한다. 저하된 사기를 우려한 서광휘가 직접 나서 재식훈련을 관장한다. 훈련이 끝난 뒤 의용군들은 소총을 분해하여 기름을 치고 닦고 느슨해진 가늠쇠를 조인다.


대규모의 병력이 머문 자리는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설령 발자국이 남지 않는 부엽토나 모레 위를 지났다손 치더라도 대규모의 병력이 이동한 자리는 땅이 꺼지기 일쑤다. 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터럭이 사방에 흩뿌려지면서 군견의 코를 자극한다.

싼장평원(三江平原)에 거대한 숙영지가 자리를 잡는다. 관동군의 제44군 예하 독립전차 제9여단에 기동 제1여단이 합류하면서 둥베이의용군의 목을 옥죄는 작전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다.

숙영지 위를 선회하던 정찰기의 조종사가 상자를 투하한다. 낙하산이 펼쳐지고 바람을 따라 낙하하던 상자가 숙영지를 조금 벗어난 초원에 안착하다. 상자를 회수한 사병이 숙영지 중앙에 자리한 지휘소로 달려간다.

잠시 뒤 각 여단의 지휘관과 참모장이 지휘소로 모인다. 관측장교가 돋보기를 들고 사진을 판독하고 있다. 팔짱을 낀 타이요우와 지휘관들이 관측 장교의 어깨 너머를 기웃거린다. 이윽고 길게 띠를 형성하며 평원을 가로지르는 의용군의 모습을 촬영한 항공사진 십여 장이 벽에 나붙는다.


“사진을 판독한 결과 의용군이 향하는 곳은 하얼빈에서 북쪽으로 오백 킬로미터, 소만 국경으로부터 백 킬로미터 떨어진 대싱안링산맥의 쌍봉계곡입니다.”

관측장교가 사진 속에서 대싱안링산맥(大興安嶺山脈)이 겹겹이 둘러싼 쌍봉계곡을 지목한다. 확신에 찬 타이요우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지도를 콕 집어 가리킨다.

“내가 전차부대로 구성된 선봉대를 이끌고 쌍봉계곡을 봉쇄할 테니, 히데유키 여단장은 기동타격부대를 이끌고 이곳과 이곳에 매복하시오. 그리고 유시오 장군은 전차부대를 선봉대의 후방에 배치하시오. 폭격기가 폭격을 개시하면 의용군은 독에 든 쥐가 되어 하는 수 없이 계곡 입구로 기어 나올 것이 뻔하지 않소. 그때를 기다려 유시오 장군의 전차부대가 적군의 중앙을 포격하고, 히데유키 장군이 측면을 협공하면 의용군은 머지않아 투항해올 것이오.”

잔뜩 상기된 타이요우의 얼굴에 기름기가 번들거린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히데유키 여단장이 의문을 제기한다.

“대싱안링산맥은 험준하기로 정평이 난 곳입니다. 접근도 용이하지 않을뿐더러 전차를 전개하기도 쉽지 않은 곳입니다. 쌍봉계곡 주위를 한 번 더 정찰한 다음 작전을 전개하는 게 좋겠습니다.”

타이요우의 민낯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혹시 쥐새끼들의 생리를 알고 있소?”

히데유키가 고개를 가로 젓는다.

“난 어릴 때부터 쥐새끼들과 함께 살았소. 그래서 쥐새끼들의 생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소. 쥐새끼들은 비록 더듬이는 없지만 귀신도 울고 갈 남다른 촉을 지녔소. 다시 말해 상대로부터 위협이 가해질 징조가 엿보이면 쥐새끼들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사라진다오. 땅으로 꺼지든 하늘로 치솟든 한 번 놓치면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단 말이오. 그런데 지금 비행기를 띄워 놈들을 정찰하자는 거요? 그렇게 하면 굳이 촉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삼척동자도 먼저 눈치 채고 도망갈 게 뻔하지 않소?”

한바탕 꾸지람을 들은 히데유키 여단장이 시선을 피한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시오 소장이 우려를 나타낸다.

“경시정의 뜻은 알겠소이다. 그러나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소.”

타이요우가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유시오 소장을 쏘아본다. 주눅이 든 유시오가 마른기침을 삼킨 뒤 제목소리를 낸다.

“쌍봉계곡은 불과 소만국경지역에서 백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소. 만약 의용군의 일부가 국경을 넘어간다면 아군도 그 뒤를 쫓을 테고, 그렇게 되면 소련군이 개입하지 않겠소? 소련군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피하라는 게 도쿄 육군성의 입장이오. 확전을 방지하는 측면에서 이번 작전만큼은 신중을 기해야한다고 생각하오.”

타이요우가 실소를 터트리며 두 장군을 번갈아 일별한다.

“지금 독 안에 쥐가 들었는데도 옆집을 걱정하다니 유감이오. 정히 옆집 사정이 우려된다면 당당히 요구하면 될 터인데 뭐가 걱정이오! 우리 곡간을 턴 쥐새끼가 당신네 집으로 갔으니, 쥐가 먹은 알곡을 토해내라고 하면 되지 않소? 귀찮으면 우리가 직접 쥐를 잡아주겠다고 하면 될 것을······. 용기가 없는 거요, 아니면 소련군이 무서운 거요?”

유시오 소장의 이마에 식은땀이 방울방울 맺힌다.

“교전 수칙에 입각하여 혹시 모를 확전을 방지하기 위해 지휘관으로서의 입장을 밝혔을 뿐입니다. 개의치 마십시오.”

“두 장군께서는 내가 하라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오. 승리하면 그 공로는 두 장군께 돌리겠소. 만약 패배하면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소. 알겠소이까?”


고개를 숙인 두 장군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튿날 동이 트자마자 경전차를 앞세운 선봉대가 쌍봉계곡으로 향한다. 그 뒤를 이어 기동여단과 독립전차여단이 제가끔 매복지로 지정된 곳으로 떠난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님의 침묵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34 134화 악마의 최후 +3 19.07.12 166 1 16쪽
133 133화 고귀한 죽음 +1 19.07.11 90 1 12쪽
132 132화 무지개 +1 19.07.10 90 1 13쪽
131 131화 차관협정(借款協定) +2 19.07.05 98 1 14쪽
130 130화 반공포로석방 +1 19.07.01 112 2 13쪽
129 129화 한일회담 +1 19.06.29 110 2 15쪽
128 128화 폭탄테러 +1 19.06.26 120 2 13쪽
127 127화 카츄샤 +1 19.06.24 107 2 13쪽
126 126화 의사 왕룽 +1 19.06.23 106 3 17쪽
125 125화 빅터 한 재단 +2 19.06.19 116 3 13쪽
124 124화 인천상륙작전 +1 19.06.13 143 2 15쪽
123 123화 메모리 가든 +1 19.06.12 114 2 15쪽
122 122화 겹생 +3 19.06.10 112 2 16쪽
121 121화 하와이 +1 19.06.07 121 3 14쪽
120 120화 소령 맥나마라 +4 19.06.06 126 2 15쪽
119 119화 한초희 +1 19.06.05 130 2 14쪽
118 118화 맥아더 원수 +1 19.06.04 123 2 14쪽
117 117화 기만방송 +1 19.06.03 120 2 13쪽
116 116화 코리안 커넥션 +1 19.06.01 131 2 12쪽
115 115화 잠수함 +1 19.05.30 174 2 13쪽
114 114화 6.25 전쟁 +1 19.05.29 147 2 12쪽
113 113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특명 1호 ‘폭풍’ +1 19.05.21 128 2 11쪽
112 112화 금괴수송작전 +1 19.05.19 165 2 10쪽
111 111화 '암호명 A-1' +1 19.05.18 120 2 13쪽
110 110화 악연(惡緣) +1 19.05.17 120 2 14쪽
109 109화 마지막 미션 +1 19.05.16 120 2 12쪽
108 108화 애치슨 라인 +1 19.05.15 118 2 12쪽
107 107화 연적(戀敵) +1 19.05.15 137 2 12쪽
106 106화 독살(毒殺) +1 19.05.14 131 2 12쪽
105 105화 마돈나 다방 +2 19.05.13 137 2 15쪽
104 104화 한국은행 +1 19.05.11 137 2 14쪽
103 103화 비밀거래 +1 19.05.10 160 2 12쪽
102 102화 남미이주작전 +1 19.05.10 154 2 13쪽
101 101화 트루먼 독트린 +1 19.05.10 126 2 11쪽
100 100화 숙명의 라이벌 +1 19.05.10 132 3 18쪽
99 99화 Jane Doe +2 19.05.10 130 2 13쪽
98 98화 앙숙, 이승만과 김구 +1 19.05.10 130 2 12쪽
97 97화 반도호텔 +1 19.05.10 126 2 13쪽
96 96화 좌익과 우익 +1 19.05.09 126 2 13쪽
95 95화 조선인민공화국 +1 19.05.09 131 2 17쪽
94 94화 일본패망(日本敗亡) +1 19.05.09 137 2 12쪽
93 93화 원자폭탄 +1 19.05.09 127 2 13쪽
92 92화 김일성 +1 19.05.09 134 1 14쪽
91 91화 독수리 작전 +1 19.05.09 132 1 14쪽
90 90화 이승만 +1 19.05.09 120 1 14쪽
89 89화 비밀요원 나타샤 +1 19.05.09 114 2 15쪽
88 88화 OSS(미국전략사무국) +2 19.05.09 120 2 16쪽
87 87화 승전(勝戰) +1 19.05.09 114 2 14쪽
86 86화 진주만공습 +1 19.05.08 116 1 16쪽
85 85화 갈라예프 +2 19.05.08 115 2 16쪽
84 84화 채권(債券) +1 19.05.08 120 2 11쪽
83 83화 다카키 마사오 +1 19.05.08 133 2 12쪽
82 82화 광복군(光復軍) +1 19.05.08 114 2 13쪽
81 81화 육군정보학교 +2 19.05.08 115 2 11쪽
80 80화 홍콩행 +1 19.05.07 123 3 13쪽
79 79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3 19.05.07 113 2 12쪽
78 78화 김원봉과 김구 +1 19.05.07 112 2 16쪽
77 77화 까레이스키 +3 19.05.07 110 2 12쪽
76 76화 탈출(脫出) +1 19.05.07 115 3 9쪽
75 75화 박정희와 최태민 +1 19.05.07 121 2 9쪽
74 74화 중일전쟁(中日戰爭) +1 19.05.07 115 2 13쪽
73 73화 강제이주 +3 19.05.06 110 1 12쪽
72 72화 마루타 +1 19.05.06 110 1 12쪽
71 71화 막후 실력자 +1 19.05.06 110 2 13쪽
70 70화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등장 +1 19.05.06 110 1 15쪽
69 69화 천황결사옹위청년단 +1 19.05.05 112 1 15쪽
68 68화 후흑학(厚黑學) +1 19.05.05 117 1 13쪽
67 67화 경몽장(耕夢莊) +1 19.05.05 113 1 12쪽
66 66화 학교(學校) +1 19.05.05 113 1 8쪽
65 65화 국제연맹(國際聯盟) +1 19.05.05 113 1 19쪽
64 64화 나타샤 +1 19.05.05 112 1 11쪽
63 63화 보고서 +1 19.05.05 113 1 11쪽
62 62화 시인과 영웅 +2 19.05.04 123 2 15쪽
61 61화 탄생의 비밀 +2 19.05.04 114 2 18쪽
60 60화 국경수비대 +1 19.05.03 113 2 13쪽
59 59화 제네바협약 +4 19.05.03 118 2 18쪽
58 58화 명백한 운명 +1 19.05.03 112 1 16쪽
57 57화 미두취인소(米豆取人所) +1 19.05.03 115 1 12쪽
56 56화 생포(生捕) +1 19.05.02 113 2 13쪽
55 55화 참패(慘敗) +1 19.05.02 112 2 14쪽
54 54화 향수병(鄕愁病) +1 19.05.02 113 2 18쪽
53 53화 음악회 +1 19.05.02 113 2 18쪽
52 52화 들개 진구 +1 19.05.02 117 2 24쪽
51 51화 가락지 +3 19.05.02 117 2 26쪽
50 50화 덫 +1 19.05.01 118 1 28쪽
» 49화 추격전(追擊戰) +1 19.04.30 114 2 35쪽
48 48화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1 19.04.30 118 2 39쪽
47 47화 광휘와 빅터 +3 19.04.29 117 2 33쪽
46 46화 특별수사본부(特別搜査本部) +4 19.04.29 116 2 41쪽
45 45화 만저우리(滿洲里) +4 19.04.28 110 3 35쪽
44 44화 폭풍전야(暴風前夜) +1 19.04.28 111 3 37쪽
43 43화 Boys, be ambitious! +1 19.04.27 113 2 39쪽
42 42화 만주국(滿洲國) +5 19.04.27 121 2 38쪽
41 41화 만몽영유계획(滿蒙領有計劃) +1 19.04.26 121 3 25쪽
40 40화 재회(再會) +1 19.04.26 118 3 30쪽
39 39화 빅터 한 +1 19.04.25 120 3 49쪽
38 38화 박진만 +2 19.04.25 130 3 45쪽
37 37화 정보국 5과 +3 19.04.24 138 3 51쪽
36 36화 마적(馬賊) 왕리 +2 19.04.24 135 3 49쪽
35 35화 삼두정치(三頭政治) +2 19.04.23 137 3 42쪽
34 34화 주찬 +1 19.04.23 133 3 51쪽
33 33화 만주야사(滿洲野史) +2 19.04.22 131 3 50쪽
32 32화 서광휘 +2 19.04.22 134 3 47쪽
31 31화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 +2 19.04.21 160 4 47쪽
30 30화 미쓰야협정(三矢協定) +4 19.04.21 134 4 46쪽
29 29화 출산(出産) +3 19.04.20 145 4 43쪽
28 28화 밀항(密航) +2 19.04.20 134 4 45쪽
27 27화 불령선인(不逞鮮人) +1 19.04.19 135 4 43쪽
26 26화 님의 침묵 +1 19.04.19 141 4 48쪽
25 25화 이민(移民) +2 19.04.18 152 4 39쪽
24 24화 회자정리(會者定離) +2 19.04.18 140 5 44쪽
23 23화 여걸(女傑) 수잔 +5 19.04.17 144 4 46쪽
22 22화 3·1 만세운동 +5 19.04.17 147 4 44쪽
21 21화 천적(天敵) +1 19.04.16 145 5 49쪽
20 20화 아카키 타이요우(赤木太陽) +4 19.04.16 150 5 52쪽
19 19화 망국(亡國) +4 19.04.15 160 3 49쪽
18 18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3 19.04.15 165 3 46쪽
17 17화 한성진격작전(漢城進擊作戰) +4 19.04.14 161 4 49쪽
16 16화 의병전쟁(義兵戰爭) +4 19.04.14 165 4 43쪽
15 15화 춘투(春鬪) +5 19.04.13 177 3 47쪽
14 14화 암살미수(暗殺未遂) +4 19.04.13 186 3 37쪽
13 13화 결혼(結婚) +3 19.04.12 267 6 42쪽
12 12화 돈버거 +9 19.04.12 245 7 44쪽
11 11화 대한제국(大韓帝國) +2 19.04.11 270 7 45쪽
10 10화 김출세(金出世) +7 19.04.11 294 8 42쪽
9 9화 낙향(落鄕) +4 19.04.10 311 8 42쪽
8 8화 혁파안(革罷案) +4 19.04.10 324 9 41쪽
7 7화 증기자동차 +2 19.04.09 378 12 22쪽
6 6화 2차 사행(使行) +2 19.04.09 381 12 24쪽
5 5화 견문록(見聞錄) +5 19.04.08 430 13 19쪽
4 4화 북경(北京) +1 19.04.08 525 11 19쪽
3 3화 만남 +1 19.04.08 645 12 15쪽
2 2화 1차 사행(使行) +2 19.04.08 941 13 14쪽
1 1화 파락호(破落戶) 이하응 +17 19.04.08 1,820 19 12쪽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최장르' 작가를 후원합니다!

  • 보유 골드: 0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