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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공모전참가작 님의 침묵

웹소설 > 자유연재 > 대체역사, 드라마

완결

최장르
작품등록일 :
2019.04.08 16:31
최근연재일 :
2019.07.12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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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02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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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54화 향수병(鄕愁病)

님의 침묵




DUMMY

420.


이틀 동안 내린 눈으로 슈앙쳉바오는 솜이불을 덮은 듯하다. 설원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그러나 설원에 깃든 적막은 불길함을 수반한다. 시간은 더디게 흐른다.

관동군과 만주국군의 연합부대가 반격을 해올 법도 하건만 아무런 조짐이 감지되지 않는다. 성을 점령한 지 이틀째를 맞이한 초병들도 설원에 난반사되는 햇볕으로 설맹증(雪盲症)에 시달리며 피로도가 극에 달한다.

임시 지휘소에 모인 지휘관들도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금주령이 내려졌는데도 불구하고 실내는 몰래 마신 술로 구리텁텁한 내가 진동한다. 비딱하게 앉은 훙창대 사령관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광휘를 흘깃거린다.


“서 대장! 굴을 떠난 늑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라고 하지 않았소? 초병들도 설맹증에 걸려 누가 나타나도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별도 못할 판이오. 이제 경비병을 반으로 줄이고 월동채비나 합시다.”

카오펑린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광휘를 응시한다. 얼마간 창 너머의 설원을 보던 광휘가 한숨을 내쉰다.

“피로 흥건한 시체가 눈에 가려 안 보이니, 저도 딴 세상에 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왠지 불길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훙창대 사령관이 늘어지게 트림을 올리곤 혀를 끌끌 찬다.

“쯧쯧쯧! 걱정도 팔자라더니······. 하늘이 새하얗게 덮인 설원을 의용군에게 내린 축복이라고 생각하면 어떠시오? 일체개유심조라 하지 않았소?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렸소.”

훙창대 사령관이 가슴을 치며 눈을 흘긴다. 광휘는 짐짓 따가운 눈총을 피하려 애쓴다.

“불길한 예감이 빗나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밭은기침을 하던 카오펑린이 퀭한 눈으로 지휘관들을 일별한다.

“모든 상황이 기우에 그쳤으면 하는 게 나 또한 바라는 봐요. 추위에 지친 병사들이 성 안에서 겨울을 날 수만 있다며 무슨 일이라도 하겠소.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는 게 마음에 걸릴 뿐······”

카오펑린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기관총 소리가 대지를 뒤흔든다. 뒤미처 적의 기습을 알리는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린다. 기겁한 지휘관들이 독립이를 따라 밖으로 몰려나간다.


솜이불이 들썩이는 것처럼 움직임을 감지한 경비병이 눈을 깜빡거린다. 고개를 흔들며 재차 목표를 확인하지만 설맹증에 노출된 시력으로는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적이 준동하는 것으로 오인한 경비병은 몇 차례 암구호를 외친다. 아무런 답이 돌아오지 않자 경비병은 목표를 향해 기관총을 난사한다. 인근 경비초소에 있던 병사도 온통 백색의 설원 위에 흩뿌려지는 시뻘건 총알의 궤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총성이 성벽을 타고 쩌렁쩌렁 울린다. 더 이상의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는다. 경비대장은 정찰대를 투입한다. 피로 뒤덮인 현장에는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피륙이 사방에 흩어져있다. 두 동강이 난 뿔로 미루어 사슴임을 짐작할 따름이다.

한차례 소동을 빚은 성은 어느덧 어둠에 휩싸인다. 경비병이 교대를 한 후 취침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고즈넉한 진지에 잔잔하게 퍼진다. 마치 잘 우려낸 차향이 시나브로 오붓한 실내를 장악하듯이 그렇게 취침 나팔소리는 피곤에 지친 병사들의 향수병을 자극한다. 고향을 떠올리며 뒤척이던 병사들은 휘영청 밝은 달이 이지러지기 시작하자 집단 최면에라도 걸린 듯 혼곤한 잠에 빠져든다.

말들의 잠자리를 살피던 주찬이 마구간을 막 벗어날 즈음 구슬픈 하모니카 음조가 들려온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소리의 진원지를 탐색한다. 한국독립군 소속의 병사들이 모닥불 주위에 옹기종기 앉아 있다.

광휘가 부는 하모니카의 리듬에 맞춰 병사가 ‘희망가’를 부른다. 저음으로 시작된 노래는 병사들이 합세하면서 곧 합창이 된다. 울먹거리던 병사들은 저마다 눈가를 훔치며 애써 감정을 조절한다.


하모니카를 주머니에 넣은 광휘가 울먹이는 병사들의 어깨를 일일이 다독인다.

“밤이 깊었군. 고향으로 돌아갈 날도 머지않았어. 감기에 들지 않도록 이불 꽁꽁 싸매고 자.”

“대장님도 푹 주무십시오.”

소대장이 대표로 답한다.

“초소만 둘러보고 눈 좀 붙여야지.”


병사들이 자리에 누워 몸을 옹송그린다. 감정이 복받친 어린 병사들은 등을 돌린 채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쿨럭인다. 광휘는 병사들에게 이불을 덮어준 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주전자를 들고 막사를 떠난다. 초소로 가던 광휘가 뽀드득거리며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곤 뒤돌아선다.


“병사들의 향수병이 깊나봅니다.”

주찬이 다가오며 입김을 내뿜는다. 독립이가 꼬리를 치며 주찬에게 다가간다.

“유독 달이 밝은 밤이라 더 하네요. 그나저나 주 대장께서는 이 밤중에 웬일로?”

“마적한테 말은 곧 병사와 같은 존재죠. 마구간에 다녀오던 길입니다.”

“대장님의 말 사랑을 본받아야 할 텐데······”

“서 대장이 부하를 대하는 마음 같을까요?”


두 사람의 얼굴에 발그레한 미소가 번진다. 광휘와 주찬은 초소를 돌며 초병들에게 따듯한 차를 권한다. 순찰을 마친 두 사람은 나란히 눈밭을 걸으며 막사로 돌아온다.


“밤이 깊었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광휘가 먼저 인사말을 건넨다.

“내일도 오늘만 같기를 바랍니다. 그럼······.”

주찬과 광휘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곤 각자의 막사로 향한다.


온통 암흑천지일 것 같은 어둠은 어느덧 희붐히 밝아오는 먼동에 서서히 자리를 내준다. 우지끈 해가 치솟자 대지는 새로운 기운으로 충만하다. 기상 나팔소리가 요란하게 성내에 울려 퍼진다. 뒤미처 힘차게 투레질을 하며 여물을 먹던 말들이 마구간을 뛰쳐나와 활개를 친다.

분주한 숙영지의 하루 일과는 취사로 시작된다. 국과 밥이 끓는 솥단지 앞으로 반합을 든 병사들이 길게 줄을 선다. 취사병이 솥뚜껑을 연다. 찬 공기와 뒤섞인 김이 하얗게 기화되며 치솟는다. 밤새 굶주린 들개들이 코를 벌름거리며 주위로 몰려든다. 반합에 밥과 국을 가득 담은 병사들이 양지를 찾아 삼삼오오 둘러앉는다.

먼저 배식을 마친 병사들이 반합을 반쯤 비울 즈음 줄을 선 채로 배급을 기다리던 병사들이 고개를 들고 광활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해바라기라도 된 것일까. 병사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일제히 남쪽 창공으로 향한다.

고개를 쳐든 병사들의 눈빛에 공포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헤벌쭉 벌린 입에서 함성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몸집을 불린 폭격기 편대가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한다.

폭격기가 지나간 자리마다 융단폭격이 가해진다. 성은 삽시간에 폭염이 치솟고 화염에 휩싸인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사상자가 속출한다. 폭격기 편대가 사라지자마자 전차부대의 포격이 시작된다.

의용군이 박격포로 반격을 개시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전세가 관동군 쪽으로 기운다. 전력상 이동이 용이한 경전차를 매번 포판을 매고 이동해야하는 박격포로 대적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항력이다.

관동군과 만주국군의 연합부대가 성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해온다. 혼비백산한 초병들이 진지를 포기하고 성곽으로 피신한다. 전열을 가다듬은 의용군은 간헐적으로 반격을 하며 겨우 성을 사수한다.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지휘관들이 지하실로 모인다.


“이러다간 전멸합니다. 당장 철수합시다.”

이마에 파편을 맞은 훙창대 사령관이 수건으로 피를 틀어막으며 새된 소리를 지른다. 주찬이 버럭 화를 낸다.

“이제 와서 그게 할 소리요? 어디로 철수를 한단 말이오!”

흙투성이가 된 카오펑린이 애걸하듯 광휘 쪽으로 시선을 던진다.

“서 대장! 어찌 하면 좋겠는가?”

광휘의 동공이 심하게 요동친다. 예의 초를 다투는 결정과 맞닥뜨린 때마다 나타나는 반응이다. 그가 주찬을 바라본다.

“주 대장님!”

“말만 하십시오.”

“급히 마적단을 이끌고 적의 허리를 끊어주셔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소.”

주찬이 지하실을 빠져나간다.

“고 대위!”

고준봉 중대장이 한 발 앞으로 나선다.

“귀관은 성을 빠져나가 독립군을 이끌고 전차 부대의 후방을 친다.”

“알겠습니다.”

고 대위가 서둘러 떠난다.

“대장군님은 병력을 각 성문에 배치하고 적의 침략을 막아주십시오.”

“알겠······”


카오펑린이 대답을 채 마치기도 전에 ‘슈-웅’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실 천장에 폭탄이 명중한다. 삽시간에 천장이 무너져 내린다.




421.


정동 다방은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손님들로 북적인다. 다방을 찾는 손님들을 대게 ‘모던 보이’와 ‘룸펜’으로 불리는 두 부류로 나뉜다.

동경 유학을 다녀와 은행이나 상사를 다니며 소위 ‘모던 보이’로 거론되는 ‘부르주아파’와 일본에 부역하지 않겠다며 무정부주의자를 지향하는 일명 ‘룸펜’을 자처하는 ‘프롤레타리아파’가 서로 앙숙인 양 툭하면 마찰을 빚는다. 주전자가 끓고 있는 난로를 기준점으로 우측에는 부르주아파가, 좌측에는 프롤레타리아파가 앉아 서로를 힐난한다.

말쑥한 정장에 포마드를 잔뜩 바른 ‘모던 보이’들은 틈만 나면 번드르르한 머릿결을 고정시키느라 가끔 손을 드는 버릇이 있는 반면에 허름한 차림에 장발을 한 ‘룸펜’들이 손을 드는 경우는 엽차를 더 달라는 행동이다.


분을 덧칠한 희멀건 얼굴에 빨간 입술은 유난히 눈에 띄어 뭇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룸펜 측에서 부르주아파 쪽에 눈을 흘기며 손을 든다. 껌을 소리 나게 씹던 세츠미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다가간다. 그녀는 잔에 뜨거운 물을 콸콸 붓곤 매몰차게 돌아선다.

모던 보이와 룸펜의 사이에 빈 테이블이 하나 있는데, 이곳은 신성불가침한 곳인 양 항상 자리가 텅 비어있다. 설령 자리가 없다손 치더라도 섣불리 그곳을 차지하는 손님은 없다. 경성에서 내로라하는 고등계 형사들이 드나들며 생긴 관행이다.

‘삐걱’하는 소리와 함께 비바람이 문틈으로 냅다 몰아친다. 고등계 형사는 늘 그렇듯이 등장부터 남다르다. 비에 흠뻑 젖은 진구는 초췌한 몰골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괄시하는 이는 없다. 그가 옷을 털면서 자리에 앉는다. 세츠미가 눈웃음을 치며 다가온다. 지켜보는 뭇시선이 부러운 듯 바라본다.


“오라버니! 왜, 이렇게 뜸했어?”

진구는 바짝 다가앉는 그녀의 엉덩이를 찰싹 때린다.

“잠자리에서 보면 됐지, 뭘 성화야?”

“원앙침낭으로 이부자리를 깔아놓으면 뭐 하누? 님이 와야 말이지.”

그녀가 코웃음을 치는데도 진구는 어림도 없는 표정이다.

“위스키 더블! 그리고······”

그가 음침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세츠미가 입술을 비죽이 내민다.

“모루히네가 떨어졌을 때만 나를 찾아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는 멈칫한다. 그러곤 생각이 미쳤는지 퉁명스럽게 한 마디를 남긴다.

“조 경부란 사람이 여러 번 전화했어. 4시에 온다나, 어쩐다나?”

“뭐?”

진구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걸어가는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입술을 깨문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진구가 벽시계를 본다. 시계 바늘이 정확히 4시를 가리키며 품고 있던 종달새가 튀어나와 정확히 네 번을 울곤 쏙 들어간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세찬 바람이 진구가 앉아 있는 자리까지 불어 닥친다.

“정확하군!”

진구가 본체만체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고등계 형사라면 시간은 칼같이 지켜야지.”

명철이 답한다.

“날씨도 변덕스러운데 무슨 일이야?”

“놈이 곧 움직일 것 같아.”

“여기 위스키 더블, 두 잔!”

진구와 명철이 뒤를 돌아본다. 찬일은 큰 소리로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는다.

“가을에 웬 장맛비래?”

진구는 찬일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무슨 근거로?”

진구의 목소리에 분노가 스며있다.

“음악회를 여는 것이 확실해. 제물포에서······”

진구의 눈빛이 번뜩인다. 세츠미가 다가와 위스키 석 잔을 놓고 간다. 명철과 찬일이 그녀의 뒤태를 보며 군침을 흘린다.

“자네가 여기를 뻔질나게 드나드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

찬일의 말에 진구가 질색한다.

“집어치워.”

위스키 잔을 단숨에 비운 진구가 찬일을 쏘아본다.

“뭘 그렇게 민감하게 굴어. 자네 요새 너무 까칠한 거 아냐?”

진구가 찬일의 멱살을 잡는다.

“여기까지 온 게 다 누구 덕인데, 함부로 입을 놀려?”

명철이 간신히 두 사람을 뜯어말린다. 진구가 담배를 꼬나물곤 묻는다.

“근거는?”

명철도 위스키 잔을 비운 뒤 테이블에 양팔을 괸 채 나지막이 속삭거린다.

“이걸 보게. 공사 부인이 전화통을 붙자고 법석을 떤 게 허풍은 아니란 얘길세.”

그가 음악회의 초대장을 내민다. 진구가 초대장을 손에 쥔다. 움푹한 눈이 경련을 일으킨다. 그는 갑자기 욕지기가 치민 듯 구토를 하기 시작한다. 세츠미가 포르르 다가와 진구의 입가를 닦아준다. 세치미의 손길을 뿌리친 진구가 명철을 쏘아본다.

“음악회가 언제야?”

“삼 일 후······”


진구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고 성큼성큼 걸어간다. 명철과 찬일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고개를 젓는다. 세츠미가 총총걸음으로 따라간다. 그러곤 슬쩍 주사기를 건넨다. 진구는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422.


진눈깨비가 내리는 정동에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진다. 온화한 조명이 알록달록한 낙엽과 어울려 만추(晩秋)의 정서를 물씬 풍긴다. 돌담길을 따라 세를 키운 바람이 칼날이 되어 앙상한 가지를 뒤흔들고 거추장스러운 낙엽을 솎아낸다.

인적이 뜸한 돌담길을 걷는 진구는 연신 마른기침을 토한다. 손수건으로 입을 닦던 그가 흥건한 핏덩이를 보곤 대수롭지 않은 듯 손수건을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공사관들이 즐비한 외교가를 지나친 그는 미국공사관이 훤히 보이는 맞은편 골목으로 급히 몸을 숨긴다. 핏기가 걷힌 창백한 민낯에도 눈빛만큼은 섬광을 내뿜듯 형형하다.

진눈깨비를 맞아 옷이 젖은 그가 옷깃을 여민다. 오한이 나는 듯 심하게 몸을 떨다간 공사관의 2층을 주시하던 시선을 거둔다. 그러곤 주섬주섬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다. 주사기를 손에 쥔 그가 팔을 걷어붙이고 고무줄로 팔뚝을 묶는다. 손을 쥐락펴락하자 푸르스름한 정맥이이 불거진다. 그는 주사바늘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린 다음 가차 없이 정맥에 주사기를 꽂는다.

눈동자에 힘이 풀리면서 흐리멍덩해진다. 얼마간 옹송그리고 있던 그가 잔뜩 움츠렸던 어깨를 펴며 몸을 재게 놀린다. 마력(魔力)을 빌어 활력을 되찾은 듯 동공을 최대한 팽창시킨 그가 공사관의 2층 서재를 뚫어지게 쏘아본다.


마력이 임계치에 다다른 것일까. 악마의 유혹이 현실화되는 환영이 그의 눈앞에 펼쳐진다. 그것은 ‘주화입마(走火入魔)’, 즉 기가 뻗친 나머지 일정 수준을 넘어 도를 지나친 일종의 환각이 구현되는 과정이다.

2층 서재의 커튼이 바람에 나부낀다. 빅터가 반쯤 몸을 내놓고 담배를 피기 시작한다. 얼마간 흰 연기를 밖으로 내뿜던 빅터가 고개를 숙여 느닷없이 자신을 노려본다. 치뜬 눈은 점점 커지더니 괴수의 형상으로 변한다. 그러곤 목을 길게 빼고 사자후(獅子吼)를 토한다.

괴수의 도발에 호승심이 동한 그가 악다구니를 쓰며 총부리를 겨눈다. 거리를 사이에 두고 핏발 선 시선이 충돌한다. 괴수는 돌연 창문을 닫고 꼬리를 감춘다. 진구는 고래고래 고함을 친다. 그러곤 성큼성큼 공사관의 담장을 훌쩍 뛰어넘는 괴력을 발휘한다. 그는 황급히 넝쿨을 타고 벽을 기어오른 다음 창문에 서서 안을 살핀다.

흐릿하지만 가방에 짐을 싸고 있는 자가 빅터임이 확실하다. 진구는 단박에 총을 치켜들고 창문을 부순다. 산산조각이 난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세찬 바람에 커튼이 나부끼며 진구의 몸을 휘어 감는다. 깜짝 놀란 빅터가 반응하기도 전에 진구가 서재로 뛰어든다.


“한인서! 이제야 제대로 알아보겠군.”

벌겋게 혈안이 된 진구가 벽을 등지고 있는 빅터를 향해 총을 겨눈다. 약발이 떨어진 듯 진구는 이따금 아래턱을 소리가 나도록 크게 벌리며 흔든다.

“급히 짐을 싸는 걸 보니 밀항이라도 하려는 겐가?”

눈을 부릅뜬 빅터가 대거리한다.

“전화를 도청한다고 하더니만 용케도 알아냈군. 그래, 너 같은 매국노가 판치는 꼴이 보기 싫어 내 나라, 내 땅을 떠나기로 했다.”

진구가 몸통을 흔들며 파한대소를 터트린다.

“하하하! 내 나라, 내 땅이란다. 조선이 지도에서 없어진 지가 언제인데 내 나라, 내 땅을 찾아!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나라를 떠나면서 너 같은 매국노를 한 놈이라도 처단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될 뿐이다.”

“매국노 타령을 하려면 조선을 망조가 들게 만든 네 아버지 같은 먹물들한테나 해라. 아무렴 우리처럼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촌놈한테 매국자란 멍에를 씌우는 게 가당키나 한가? 우리는 그저 썩어빠진 조선을 새 나라로 만든 대일본제국에 일꾼이 됐을 뿐이다. 어리석은 놈!”

진구가 허리춤에서 수갑을 꺼내 진구 앞으로 던진다.

“시시껄렁한 말싸움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 네 놈 때문에 면직된 불명예를 회복하려면 한시가 급하다. 얼른 수갑을 차!”

빅터가 머뭇거리자 그가 총을 들고 겁박한다.

“난 셈이 밝지 못하다. 셋을 셀 동안 어서 네 손을 결박하라.”

빅터는 수갑을 들고 손목에 채운다. 진구가 전화기가 있는 협탁으로 다가간다. 그러곤 수화기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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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97화 반도호텔 +1 19.05.10 140 2 13쪽
96 96화 좌익과 우익 +1 19.05.09 140 2 13쪽
95 95화 조선인민공화국 +1 19.05.09 148 2 17쪽
94 94화 일본패망(日本敗亡) +1 19.05.09 153 2 12쪽
93 93화 원자폭탄 +1 19.05.09 141 2 13쪽
92 92화 김일성 +1 19.05.09 149 1 14쪽
91 91화 독수리 작전 +1 19.05.09 149 1 14쪽
90 90화 이승만 +1 19.05.09 137 1 14쪽
89 89화 비밀요원 나타샤 +1 19.05.09 130 2 15쪽
88 88화 OSS(미국전략사무국) +2 19.05.09 135 2 16쪽
87 87화 승전(勝戰) +1 19.05.09 129 2 14쪽
86 86화 진주만공습 +1 19.05.08 132 1 16쪽
85 85화 갈라예프 +2 19.05.08 130 2 16쪽
84 84화 채권(債券) +1 19.05.08 137 2 11쪽
83 83화 다카키 마사오 +1 19.05.08 147 2 12쪽
82 82화 광복군(光復軍) +1 19.05.08 130 2 13쪽
81 81화 육군정보학교 +2 19.05.08 129 2 11쪽
80 80화 홍콩행 +1 19.05.07 138 3 13쪽
79 79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3 19.05.07 127 2 12쪽
78 78화 김원봉과 김구 +1 19.05.07 124 2 16쪽
77 77화 까레이스키 +3 19.05.07 124 2 12쪽
76 76화 탈출(脫出) +1 19.05.07 131 3 9쪽
75 75화 박정희와 최태민 +1 19.05.07 138 2 9쪽
74 74화 중일전쟁(中日戰爭) +1 19.05.07 130 2 13쪽
73 73화 강제이주 +3 19.05.06 125 1 12쪽
72 72화 마루타 +1 19.05.06 124 1 12쪽
71 71화 막후 실력자 +1 19.05.06 123 2 13쪽
70 70화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등장 +1 19.05.06 127 1 15쪽
69 69화 천황결사옹위청년단 +1 19.05.05 131 1 15쪽
68 68화 후흑학(厚黑學) +1 19.05.05 133 1 13쪽
67 67화 경몽장(耕夢莊) +1 19.05.05 126 1 12쪽
66 66화 학교(學校) +1 19.05.05 128 1 8쪽
65 65화 국제연맹(國際聯盟) +1 19.05.05 127 1 19쪽
64 64화 나타샤 +1 19.05.05 127 1 11쪽
63 63화 보고서 +1 19.05.05 127 1 11쪽
62 62화 시인과 영웅 +2 19.05.04 140 2 15쪽
61 61화 탄생의 비밀 +2 19.05.04 133 2 18쪽
60 60화 국경수비대 +1 19.05.03 128 2 13쪽
59 59화 제네바협약 +4 19.05.03 133 2 18쪽
58 58화 명백한 운명 +1 19.05.03 126 1 16쪽
57 57화 미두취인소(米豆取人所) +1 19.05.03 131 1 12쪽
56 56화 생포(生捕) +1 19.05.02 131 2 13쪽
55 55화 참패(慘敗) +1 19.05.02 128 2 14쪽
» 54화 향수병(鄕愁病) +1 19.05.02 131 2 18쪽
53 53화 음악회 +1 19.05.02 132 2 18쪽
52 52화 들개 진구 +1 19.05.02 132 2 24쪽
51 51화 가락지 +3 19.05.02 135 2 26쪽
50 50화 덫 +1 19.05.01 138 1 28쪽
49 49화 추격전(追擊戰) +1 19.04.30 127 2 35쪽
48 48화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1 19.04.30 134 2 39쪽
47 47화 광휘와 빅터 +3 19.04.29 134 2 33쪽
46 46화 특별수사본부(特別搜査本部) +4 19.04.29 131 2 41쪽
45 45화 만저우리(滿洲里) +4 19.04.28 124 3 35쪽
44 44화 폭풍전야(暴風前夜) +1 19.04.28 125 3 37쪽
43 43화 Boys, be ambitious! +1 19.04.27 133 2 39쪽
42 42화 만주국(滿洲國) +5 19.04.27 141 2 38쪽
41 41화 만몽영유계획(滿蒙領有計劃) +1 19.04.26 138 3 25쪽
40 40화 재회(再會) +1 19.04.26 140 3 30쪽
39 39화 빅터 한 +1 19.04.25 145 3 49쪽
38 38화 박진만 +2 19.04.25 159 3 45쪽
37 37화 정보국 5과 +3 19.04.24 156 3 51쪽
36 36화 마적(馬賊) 왕리 +2 19.04.24 158 3 49쪽
35 35화 삼두정치(三頭政治) +2 19.04.23 155 3 42쪽
34 34화 주찬 +1 19.04.23 150 3 51쪽
33 33화 만주야사(滿洲野史) +2 19.04.22 148 3 50쪽
32 32화 서광휘 +2 19.04.22 151 3 47쪽
31 31화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 +2 19.04.21 179 4 47쪽
30 30화 미쓰야협정(三矢協定) +4 19.04.21 152 4 46쪽
29 29화 출산(出産) +3 19.04.20 164 4 43쪽
28 28화 밀항(密航) +2 19.04.20 151 4 45쪽
27 27화 불령선인(不逞鮮人) +1 19.04.19 150 4 43쪽
26 26화 님의 침묵 +1 19.04.19 158 4 48쪽
25 25화 이민(移民) +2 19.04.18 169 4 39쪽
24 24화 회자정리(會者定離) +2 19.04.18 159 5 44쪽
23 23화 여걸(女傑) 수잔 +5 19.04.17 161 4 46쪽
22 22화 3·1 만세운동 +5 19.04.17 163 4 44쪽
21 21화 천적(天敵) +1 19.04.16 162 5 49쪽
20 20화 아카키 타이요우(赤木太陽) +4 19.04.16 171 5 52쪽
19 19화 망국(亡國) +4 19.04.15 178 3 49쪽
18 18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3 19.04.15 180 3 46쪽
17 17화 한성진격작전(漢城進擊作戰) +4 19.04.14 177 4 49쪽
16 16화 의병전쟁(義兵戰爭) +4 19.04.14 183 4 43쪽
15 15화 춘투(春鬪) +5 19.04.13 196 3 47쪽
14 14화 암살미수(暗殺未遂) +4 19.04.13 211 3 37쪽
13 13화 결혼(結婚) +3 19.04.12 289 6 42쪽
12 12화 돈버거 +9 19.04.12 272 7 44쪽
11 11화 대한제국(大韓帝國) +2 19.04.11 292 7 45쪽
10 10화 김출세(金出世) +7 19.04.11 319 8 42쪽
9 9화 낙향(落鄕) +4 19.04.10 341 8 42쪽
8 8화 혁파안(革罷案) +4 19.04.10 358 9 41쪽
7 7화 증기자동차 +2 19.04.09 419 12 22쪽
6 6화 2차 사행(使行) +2 19.04.09 424 13 24쪽
5 5화 견문록(見聞錄) +5 19.04.08 472 14 19쪽
4 4화 북경(北京) +1 19.04.08 577 12 19쪽
3 3화 만남 +1 19.04.08 707 13 15쪽
2 2화 1차 사행(使行) +2 19.04.08 1,046 14 14쪽
1 1화 파락호(破落戶) 이하응 +17 19.04.08 2,032 2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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