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생포(生捕)
님의 침묵

425.
타이요우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온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즉각 투항하라!”
격분한 독립군 병사가 벌떡 일어나 장갑차에 탄 타이요우를 향해 총을 난사한다. 반파된 건물 창가 쪽에서 빛이 번쩍거리더니 한줄기 섬광이 공기를 가른다. 목을 관통당한 병사가 피를 뿌리며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는다.
“서광휘! 투항하라! 투항하지 않으면 네가 보는 앞에서 부하들을 한 명씩 사살하겠다.”
타이요우의 목소리가 기계음과 섞여 카랑카랑한 쇳소리를 낸다.
“서광휘! 거기 있는 거 다 안다. 우리는 패잔병 따위에는 관심 없다. 서광휘, 너만 투항하면 퇴로를 열어주겠다.”
귀에 거슬린 듯 인상을 찌푸리던 고 중대장이 넌더리를 친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대장님이 투항하는 순간 놈들은 아군을 모조리 학살할 겁니다.”
“타이요우, 아니 김세출에 대해서 잘 알지. 무지막지한 자야.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아. 내 목을 노리고 있어. 절대 나를 죽이지 못해. 영웅이 되려는 자거든. 고 대위! 이번에는 제발 내 말을 들어. 내가 시간을 끌 테니, 부하들을 인솔하고 이곳을 떠나!”
“대장님!”
그는 고 대위의 손을 뿌리친다. 양손에 권총을 든 그는 타이요우가 탄 장갑차로 총을 쏘며 달리기 시작한다. 귓바퀴를 바짝 세운 독립이가 황갈색의 털을 세운 채 보조를 맞춘다.
“김출세! 내 탄환을 받아라! 네 목숨을 거두기 위해 저승사자가 왔다!”
독립이가 잔해더미를 뛰어넘어 훌쩍 날아오른다. 얼굴에 총알이 스친 타이요우가 기겁하여 장갑차 안으로 몸을 숨긴다. 총알이 빗발친다.
고 대위는 부하들에게 손짓으로 철수를 명한다. 부하들은 중대장의 뒤를 따라 포위망을 뚫고 무너져 내린 성벽을 뛰어넘는다. 타이요우가 장갑차 안에서 명령을 내린다.
“놈을 생포해야 한다. 놈의 다리를 겨냥하라!”
저격수가 광휘의 오른발을 겨눈다. 섬광과 함께 총알이 그의 허벅지에 박힌다. 그는 엉금엉금 팔꿈치로 기어가면서 장갑차 쪽으로 다가간다. 입으로 핀을 뽑은 뒤 안간힘을 다해 장갑차 쪽으로 수류탄을 던진다.
운전병이 재빨리 장갑차를 후진시킨다. 수류탄이 터지면서 장갑차에 불이 붙는다. 타이요우가 해치를 열고 탈출한다. 광휘가 엎드린 채 권총을 조준한다. 타이요우가 간신히 총탄을 피한다.
건너편 옥상에서 빛이 번쩍한다. 총알이 광휘의 왼발을 관통한다. 졸지에 양쪽 발 모두를 피격당한 광휘는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미나토 오사무 대위가 부하들을 인솔하고 조심스럽게 광휘에게 다가간다. 광희는 건물 잔해에 몸을 기댄 채 총을 발사한다. 하지만 총알이 바닥이 난 탓에 헛방 소리만 난다. 광휘는 권총을 냅다 던지곤 널브러진다.
총알이 없는 것을 알게 된 오사무가 턱짓으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복부에 총상을 입은 독립이가 비트적거리며 오사무에게 으르렁거린다. 병사들이 광휘 쪽으로 접근하려는 순간 힘차게 투레질을 하던 말 한 마리가 훌쩍 벽돌더미를 뛰어넘는다.
주찬은 낮게 몸을 숙인 채 권총을 난사하며 광휘에게 다가간다. 수류탄을 던진 뒤 말에서 내린 주찬이 광휘를 부축한다. 막 말에 오르려는 순간 저격수가 쏜 총알이 주찬의 등을 관통한다. 주찬이 풀썩 주저앉는다. 광휘도 힘없이 널브러진다.
관동군의 포위망이 좁혀올 즈음 이번에는 리쥔이 탄 말이 바람을 가르며 달려온다. 고삐를 입에 문 리쥔은 양손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며 총을 난사한다. 총알이 날아가는 곳마다 관동군이 픽픽 고꾸라진다.
말에서 내린 리쥔이 주찬을 안장 위에 눕힌다. 말에 오른 그가 광휘에게 손을 뻗는다. 그러나 광휘가 말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세차게 갈긴다. 놀란 말이 앞발을 쳐들고 헛발질을 한다. 그러곤 말머리를 돌려 잔해를 뛰어넘어 달아나기 시작한다.
오사무가 광휘 앞에 우뚝 선다. 병사들이 그의 주위를 에워싼다. 오사무가 무릎을 꿇고 앉아 광휘의 상태를 살핀다. 누워있는 독립이가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피범벅이 된 광휘의 눈자위가 움찔한다. 축 늘어졌던 광휘가 잽싸게 수류탄을 뽑아 입으로 핀을 뽑는다. 그러고 서글서글한 눈매로 미소를 짓는다.
“동창과 함께 저승길을 가게 돼서 심심하진 않겠어.”
광휘가 수류탄을 놓으려는 순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병사가 냅다 걷어찬다. 수류탄이 공중에서 빙그르르 돌며 폭발한다. 파편이 사방으로 튄다. 오사무와 병사 세 명의 얼굴에 파편이 박힌다.
타이요우가 황급히 다가와 혀를 찬다. 오사무와 병사들이 악다구니를 쓰며 고통을 호소한다. 성가신 듯 타이요우가 의무병에게 턱짓을 한다.
“치워!”
의무병들이 부상병을 들것에 실어 옮긴다.
타이요우가 두리번거리며 의무장교를 찾는다.
“의무장교!”
의무장교가 헐레벌떡 뛰어온다.
“죽었나?”
흙더미에 깔린 광휘는 까무룩 혼절한다. 의무장교가 단추를 풀고 청진기를 대려하지만 여의치 않다. 장기를 보호하고 있는 가슴우리가 온통 총탄과 파편을 맞아 피가 철철 흘러넘친다. 가까스로 피를 훔쳐낸 후 청진기를 댄 의무장교가 진땀을 흘린다.
“숨이 간신히 붙어있습니다.”
앞발로 겨우 기어간 독립이가 피범벅이 된 광휘의 얼굴을 핥으며 끙끙거린다. 타이요우가 냅다 독립이를 걷어찬다.
“저 개가 그 유명한 영웅의 수호신인가?”
타이요우가 독립이에게 권총을 겨눈다. 잠시 골몰한 그가 총을 거두고 부하들에게 일갈한다.
“놈을 일으켜 세워.”
오장 두 명이 피를 흘리는 광휘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운다. 타이요우가 광휘 옆에 선다. 그러곤 종군기자에게 손을 흔든다.
“역사적인 순간을 놓칠 순 없지. 잘 나오게 찍어!”
타이요우가 숨을 헐떡거리는 독립이의 배를 밟고 포즈를 취한다. 종군기자가 발화기가 달린 판 위에 마그네슘가루를 한줌 올린다. 포즈를 취한 피사체에 초점을 맞춘 종군기자가 셔터를 누른다. 마그네슘가루가 ‘펑’ 소리를 내고 하얀 버섯연기를 내뿜는다. 타이요우가 사진을 찍은 다음 의무장교에게 신신당부한다.
“놈이 죽으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무조건 살려라!”
“알겠습니다.”
광휘가 들것에 실려 현장을 떠난다. 타이요우가 손수건으로 총알이 스친 뺨을 닦는다. 검붉은 피가 흥건하게 묻은 걸 확인한 그가 손수건을 내던진다.
“하시모토 중위!”
타격단의 소대장이 다가온다.
“예.”
“지금부터 자네가 오사무 대신 중대를 이끈다.”
“감사합니다.”
가슴이 부풀어 오른 하시모토가 숨을 참는다.
“신징 군병원으로 이송시켜 총탄을 제거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사령부 출입 기자들한테 서광휘를 생포했다고 흘려.”
“예,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하시모토가 의료진을 경호하며 총총히 사라진다. 홀로 남은 타이요우가 담배를 꺼내 문다. 희끄무레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전쟁터를 훑어보던 그가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고 파한대소를 터트린다. 얼마간 웃던 그가 웃음기를 거두고 입엣말을 늘어놓는다.
‘한경덕! 보고 있느냐? 네 아들의 목숨이 내 수중에 놓였다. 한 씨 집안의 머슴으로 태어난 나한테 너희 집안의 운명이 달렸단 말이다. 차근차근, 쥐락펴락하며 지르밟아주마. 한 씨 집안의 멸문은 곧 나의 영광이니라. 하늘에서든 땅속에서든 타이요우 가문이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지켜봐라!’
426.
고봉림은 패잔병을 이끌고 간신히 슈앙쳉바오를 탈출한다. 독립군은 추격대를 피해 제각기 생존을 도모한다. 막대한 피해를 입은 카오펑린은 둥베이의용군을 해산하는 수순을 밟는다.
주찬은 복부를 관통한 치명상을 입고 사경을 헤맨다. 대부분의 단원을 잃은 마적단도 연고를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 민가로 숨어든 리쥔은 주찬을 극진히 보살핀다. 장기가 파열된 주찬은 리쥔의 간호로 목숨을 연명한다.
현상금에 눈 먼 주민의 신고로 헌병대가 들이닥친다. 교전 중에 리쥔은 끝까지 주찬을 보호하다 장렬히 전사한다. 주찬은 성치 않은 몸으로 하얼빈 형무소로 이감된다.
서광휘가 생포된 사진이 실린 신문이 도처에 뿌려진다. 둥베이의용군의 패배와 서광휘의 생포 소식을 접한 만주는 실의에 빠진다. 가뜩이나 동장군의 기세까지 엄습하면서 거리는 생기마저 잃는다.
서광휘의 생포 소식은 경성에서도 대서특필된다. 거리마다 신문팔이들이 ‘호외요, 호회’를 외치며 행인들의 이목을 끈다. 출근길임에도 불구하고 서행하는 전차 안에서 승객들이 손을 뻗어 호외를 받아 읽는다. 호외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온통 낙담과 탄식 일색이다. 흥분한 행인들은 총독부로 몰려가 서광휘를 석방하라며 시위를 벌인다.
수잔은 헨리의 손을 잡고 공사관으로 향하던 중 한 무리와 마주친다. 이른 아침이지만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웅성거린다. 신문팔이에게 호외를 건네받은 수잔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피로 범벅이 되고 퉁퉁 부어오른 얼굴이지만 ‘한인호’를 단박에 알아본 그녀는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통곡한다.
총상을 입은 공사는 제물포행을 강행한다. 공사가 조수석에 탄 뒤 왓슨 여사와 수잔 모자가 뒷좌석에 오른다. 왓슨 여사는 눈물을 흘리는 수잔의 손을 꼭 잡고 다독인다. 왓슨 공사의 차를 필두로 각 나라의 공사들이 탄 승용차가 정동을 벗어날 즈음 고등계 형사가 탄 차량 두 대가 따라붙는다.
제물포항은 미국공사관이 주최하는 연주회의 준비로 부산하다. 부둣가에 설치된 노천 무대에 귀빈석을 포함하여 일반석의 좌석이 배열된다. 이윽고 통통배가 부두에 접안한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악기를 들고 내린다. 제각기 자리를 잡은 단원들이 악기를 켜며 리허설을 한다. 구경꾼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몰려들기 시작한다.
오후 2시경이 되자 공사들이 탄 차들이 부둣가에 도착한다. 팔에 붕대를 두른 왓슨 공사가 각국의 공사 부부와 귀빈을 맞이한다. 수잔도 귀빈석에 자리를 잡는다. 어느덧 공연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아리랑이 연주된다. 객석에서 아리랑을 따라 부르는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연주음을 압도한다.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가 아리랑을 부르며 눈시울을 붉힌다. 인파 곳곳에 배치된 경찰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제제를 한다. 목청을 돋운 아리랑 가락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표 경부와 조 경부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잡초 같은 조센징들! 쯧쯧쯧, 나라를 잃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 꼬락서니하고는······”
표 경부가 혀를 찬다. 조 경부가 거든다.
“기미가요를 불러도 시원찮을 판에 청승맞게 아리랑이라니? 꼴도 보기 싫은데 당장 중지시킬까?”
표 경부가 손사래를 친다. 그러곤 득의에 찬 표정으로 호외를 펼친다.
“경시정님께서 서광휘를 생포하셨잖아. 머지않아 총독부 경무국으로 영전하실 텐데,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뭐가 있어? 그까짓 아리랑이 뭔 대수라고. 하하핫!”
“그렇지, 우리한텐 경시정님이 계시지. 자네 말마따나 음악회를 방해했다고 구설수에 올라 좋을 게 없지.”
“당연하지. 앞으로 큰일이 기다리는데 몸을 사려야지.”
조 경부가 팔꿈치로 슬쩍 표 경부의 옆구리를 쿡 지른다.
“경시정님이 오시면 우리도 챙겨주실라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고향 땅에서 경찰서장이나 했으면 딱인데······”
표 경부가 허투로 호통을 치듯 나무란다.
“에잇, 이 몹쓸 사람아! 경시정님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실세잖아. 누가 되어서야 쓰겠나! 빅터를 잡으면 또 모를까? 그나저나 사내가 고작 서장이 뭔가?”
표 경부가 너스레를 떤다. 웃음을 참지 못한 조 경부가 한술 더 뜬다.
“이왕 하는 거 경시정까지는 해야겠지? 빅터, 네 이놈! 제물포에 나타나기만 해라! 네 놈을 잡아 신문 일면에 이름이 대문짝만 하게 실리는 게 소원이다.”
“이 사람이 아주 속물근성에 젖어 있군!”
“자네는 경시정이 싫단 말인가?”
“누가 싫다고 했나? 하하핫! 우리 아버지 소원이 번듯한 벼슬을 해서 지방에 직함을 올리는 게 아닌가? 현고경시정부군시위! 생각만 해도 가슴이 터질 것만 같네.”
표 경부와 조 경부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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