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한초희
님의 침묵

498.
총상을 입은 환부에 발그스름히 새살이 돋는다. 나타샤는 간지러운 듯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환부를 벅벅 긁곤 한다. 낯이 익은 걸까. 물끄러미 자신을 내려다보는 빅터를 향해 어린아이처럼 방긋 웃기도 한다.
“군의관! 환자가 나를 보고 웃었네. 의식이 돌아온 건가?”
군의관은 배시시 웃는다.
“환부를 긁는 것을 보면 감각체계에는 이상이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의식은 여전히 망각상태입니다.”
“자네도 방긋 웃는 걸 봤지 않나?”
“의식이 일시적으로 반응을 보인 거죠. 아마 환자는 무의식 속에서 특정 기억을 의도적으로 지우거나 복원시키려고 힘든 싸움을 펼치고 있을 겁니다.”
이내 낙담한 빅터가 한숨을 내쉰다.
“병참선이 돌아갈 때 도쿄로 이송할까 하네.”
“잘 하신 결정입니다. 저도 대구 야전병원으로 전출명령을 받고 의무실을 폐쇄할 참입니다.”
“그동안 고마웠네.”
“별말씀을요. 환자의 쾌유를 빌겠습니다.”
빅터가 군의관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병실을 나간다.
나타샤는 초점 없는 눈동자로 맹탕 허공을 바라본다. 이따금 가락지를 쥔 오른손이 움찔거리며 끔벅거리던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친다. 마비된 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파닥거린다. 의무병이 달려와 그녀의 팔에 진정제를 투입한다. 의무병은 침대 난간에 손과 발을 천으로 묶어 고정시킨다.
나타샤는 간혹 의식이 돌아오면 현실을 극구 거부하거나 왜곡하는 이상증후를 보인다. 무의식의 서랍 속에 켜켜이 쌓인 시간들이 꿈틀거릴 때마다 방어기제가 작동한 성싶다.
그녀의 뇌리에 뒤죽박죽으로 얽힌 시간들이란 상실과 배반 그리고 가열하게 살아온 투쟁으로 점철된다. 낳아 주고 길러 준 생부(生父) ‘경덕’과 거두어 준 양모(養母) ‘주찬’ 그리고 키워 준 양부(養父) ‘갈라예프’와의 추억이 번연히 떠오를 때면 그녀의 동공에서 빛이 발산된다. 잠깐이나마 혈육의 정을 나눈 오빠 ‘인호’가 불쑥 나타나는 순간 그녀의 얼굴은 환희로 가득 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계바늘이 적막한 모스크바에 멈출라치면 나타샤는 소스라치게 경기를 일으킨다. 난생 처음 이성에 눈을 뜨게 한 스탈린과의 열애는 알렉세이라는 복병을 만나면서 애증의 관계로 돌변한다. 배신과 증오가 들끓는 크렘린궁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급기야 심장박동수가 걷잡을 수 없이 뛰어오른다.
잠수함에서 맞닥뜨린 알렉세이가 총구를 겨누는 모습이 번연히 떠오른 탓일까.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 묶인 손과 발을 마구 뒤튼다.
군의관이 의무병과 병실로 뛰어간다. 빅터가 뒤를 따른다. 군의관은 나타샤의 팔뚝에 진정제를 주사한다. 얼마간 뒤척이던 그녀가 까무룩 실신한다.
“속히 도쿄 병원으로 옮기는 게 좋겠습니다. 앞으로 발작증세는 더 심하게 나타날 겁니다.”
군의관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빅터를 바라본다.
“바로 이송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겠네.”
군의관이 밖으로 나간 뒤 빅터가 혼절한 나타샤의 곁으로 다가간다. 그는 슬그머니 손을 내밀어 나타샤의 오른손을 잡는다. 손바닥 놓인 가락지를 발견한 그가 눈물을 글썽거린다.
“초희야! 네가 바로 초희로구나!”
그는 윗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낸다. 경덕과 인호 사이에서 초희가 수줍게 웃고 있다. 그는 나타샤와 사진을 번갈아보며 나타샤가 초희란 사실을 확신한다. 그는 나타샤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준다.
“초희야! 걱정하지 마! 앞으론 네 오빠가 영원히 네 곁을 지켜줄 테니까.”
그가 눈물을 흘리며 나타샤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을 즈음 맥나마라가 병실로 들어선다.
“대령님! 맥스 장군님으로부터 호출이 왔습니다.”
눈물을 훔친 빅터가 나타샤의 손에 사진을 쥐어준다.
“초희야! 이 사진을 보면 잊힌 기억이 되살아날 거야.”
문 쪽으로 돌아서던 빅터가 통증이 재발한 듯 멈칫한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은 본 맥나마라가 그를 부축하고 복도로 나선다.
“대령님,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맥스 장군과의 면담을 취소하시고 쉬세요. 무리하시다간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 못할 수도 있어요! 제발······”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무슨 일인데요?”
“아무래도 나타샤를 도쿄로 돌아가는 포세이돈함에 태워야 할 것 같아. 상태가 갈수록 심각해.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타샤의 새로운 신분증이 필요하네.”
“나타샤는 소련이 파견한 스파이가 아닙니까?”
“내 동생이야!”
“네?”
맥나마라가 화들짝 놀라며 무르춤한다.
“여동생의 생사를 모르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내 동생이 틀림없어.”
“이렇게 기가 막힌 클라이맥스가 있다니! 빅터 대령이 마지막에 여동생을 만난다? 야호! 이거 완전 흥행하겠는걸!”
“시끄러워!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가선 절대 안 돼!”
맥나마라가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한초희’란 이름으로 신분증을 만들어. 그리고 신분에 대하여 물으면 내자동 안가에서 특별 고용한 요원이라고 해!”
“알겠습니다.”
빅터는 아픈 몸을 이끌고 맥나마라가 운전하는 지프의 보조석에 올라탄다. 시내를 가로지른 지프는 청사 앞에서 멈춘다.
“대령님,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알았어. 일이나 잘 처리해!”
“그럼, 전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러 갑니다. 이따 모시러 올게요.”
맥나마라가 차를 돌려 청사를 빠져나간다. 빅터를 목발을 짚고 청사로 들어간다. 맥스 소장이 그를 맞이한다.
“아픈데도 와 주다니, 고맙군!”
“무슨 일입니까?”
“부산시장과 부산항 사용과 병참기지 예정지를 의논하기 위해 왔네. 자네가 이곳 상황을 잘 알고 있잖나?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그리고 참 이승만 대통령의 특사도 참석한다고 하더군.”
“알겠습니다.”
빅터는 조사단 일행과 함께 회의장으로 향한다. 회의장 안에서 부산시장과 항만청장 등 관계자들이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다.
“상부로부터 맥스 장군님의 요구사항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잠시 후 대통령 특사가 오셔서 대통령의 의사를 전해드릴 겁니다.”
시장이 시종 웃음기 있는 얼굴로 상대를 대한다.
“귀국의 전폭적인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맥스 소장이 고개를 틀어 포드 공병감을 바라본다. 포드 대령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발언권을 얻는다.
“시장님. 수송선이 접안할 수 있도록 부산항의 8부두를 확장했으면 합니다.”
시장이 항만청장과 귓속말을 나눈 뒤 흔쾌히 응한다.
“8번뿐만 아니라 부산항 전부를 써도 좋습니다.”
“그리고 항구와 철도의 접근이 용이한 범일동 일대를 병참기지의 예정지로 선정했습니다. 지역 주민의 동의를 구했으면 좋겠습니다.”
시장이 호기롭게 답한다.
“그곳은 이미 미군의 보급창이 있는 곳입니다. 범일동 주민을 당장 이주시키겠습니다.”
빅터가 고개를 숙인 채 손수건으로 목덜미의 식은땀을 닦을 즈음 출세가 회의실로 들어온다. 시장이 벌떡 일어나 그가 앉을 의자를 빼준다. 그가 앉자마자 시장이 맥스 소장에게 소개한다.
“장군님! 이분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각하께서 보내신 김출세 특사이십니다.”
일순 ‘김출세’란 이름을 들은 빅터가 고개를 천천히 든다. 출세는 맥스 장군과 악수를 나눈다.
“이승만 대통령각하가 맥아더 사령관과 회담하신 후 맥스 소장님의 편의를 꼼꼼히 챙기라고 특별지시를 내렸습니다.”
출세가 선심을 쓰듯 거들먹거린다.
“감사합니다.”
“부탁하실 말씀은 관계자와 허심탄회하게 나누십시오.”
“벌써 시장님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출세가 시장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불편한 시선을 감지한 그가 멈칫한다. 그러곤 천천히 자세를 바로잡고 상대를 주시한다.
항만청장과 공병감이 세부사항을 점검하는데도 출세와 빅터는 꼼짝도 않고 눈싸움을 벌인다. 구슬땀이 출세의 희끗희끗한 살쩍을 타고 흘러내린다.
“한국에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속담이 있습니다. 이후의 일 얘기는 식사하면서 합시다.”
시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일행들을 재촉한다. 맥스 소장도 조사단을 거느리고 회의장을 나선다. 시장이 출세에게 귀띔한다.
“특사님, 자리를 옮기시지요.”
출세가 빅터를 꼬나보며 입엣말로 중얼거린다.
“난 생각 없으니 장군님을 잘 모시게.”
“네, 알겠습니다. 생각이 바뀌시면 초원복집으로 오십시오. 그럼······”
분위기를 파악한 시장이 슬그머니 문을 닫고 나간다. 출세와 빅터만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다. 천장에 달린 선풍기가 맥없이 돌아간다. 두 사람은 할 얘기가 많은 듯 제각기 눈동자를 되록거린다. 먼저 출세가 말문을 연다.
“이곳까지 얼굴을 내밀다니 명줄이 꽤 질기군.”
“저승사자가 제 어깨에 앉은 것도 모르는 주제에······”
두 사람의 동공에서 뿜어져 나온 눈빛이 불꽃을 튄다.
“내 몸에 상처를 낸 놈은 내 손으로 직접 처단하는 게 내 방침이다.”
출세가 고개를 쳐들고 눈자위에 난 칼자국을 매만진다.
“기억할 텐데? 박진만, 그 무지몽매한 놈이 춘천을 떠날 때 나한테 낫을 휘두른 것을······”
“기억하다마다. 춘천 전체가 경삿날이었지.”
빅터가 조롱하듯이 빈정거린다. 출세의 왼쪽 뺨이 경련을 일으킨다.
“그놈은 내 총을 맞고 만주 호숫가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빅터가 어깨를 으쓱한다.
“인두겁을 쓴 네 놈한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인가? 새삼스럽긴······”
빅터가 입술을 실룩거리며 비웃는다. 바싹 약이 오른 듯 출세가 콧잔등을 벌름거린다.
“그 놈의 버르장머리 없는 말본새는 한 씨 일족의 내력인가보지? 그 아비나 자식이나 여전하군. 하하핫!”
“그 추악한 입을 다시 한 번 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빅터가 목발을 내던지고 옆구리에 손을 올린다. 출세도 잽싸게 손으로 허리춤을 부여잡는다. 탁자 밑으로 권총을 쥔 두 사람은 얼마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서로를 응시한다.
“지금껏 후회한 삶을 살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은행에서 너의 심장에 총알을 박지 못한 것만은 땅을 치고 후회한다.”
빅터가 눈을 부라린다.
“나를 쏜 게 너였군! 난 지금도 밤마다 이 상처를 보며 곱씹어왔다.”
돌연 출세가 왼팔의 소매를 걷어 올린다. 팔뚝에 총알이 관통한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아 선홍빛을 띤다.
“좀 전에 말한 것처럼 나한테 해를 가한 자는 직접 내 손으로 처단한다!”
출세는 말을 마치자마자 상처를 물어뜯는다. 그러곤 피가 흥건한 입으로 빅터를 노려본다.
“네가 죽든 내가 죽든 둘 중의 한 명은 오늘이 제삿날이다!”
출세가 벌떡 일어서며 총을 뽑아든다. 빅터도 반사적으로 의자를 밀치고 일어나며 총을 겨군다. 두 사람은 게걸음치며 탁자를 벗어난다.
“미련한 놈! 네 놈이 감추고 있는 계집이 누구인지나 알고 있나?”
출세가 비아냥거리며 비열한 웃음을 짓는다. 입술 사이로 금니가 번뜩인다.
“네 놈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한······, 초······, 희! 일명 나타샤라고도 하지.”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세간에서 한초희가 한경덕과 박미라의 딸이라고들 알고 있지.”
빅터의 미간이 움찔한다. 방아쇠에 걸친 오른손 검지가 바르르 떨린다.
“그러나 세상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이 존재하는 법이지! 네 형, 서광휘도 초희의 탄생에 대한 비밀을 듣곤 삼일 밤낮을 절규하다가 끝내 자살했다.”
빅터의 오른쪽 대퇴부에서 피가 철철 흐른다. 그의 얼굴은 이미 땀으로 범벅인 된 상태다. 시력이 흐릿한 듯 그가 연신 눈을 껌벅인다. 손아귀에 악력이 떨어진 탓에 총구가 흔들린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맥나마라가 회의실로 뛰어 들어온다.
“대령님! 신분증을 발급받았습니다.”
신분증을 들고 들어온 맥나마라는 총구를 겨눈 채 대치하는 장면을 보곤 아연실색한다.
“대령님! 총을 거두십시오. 저 자는 죽일 가치도 없습니다.”
맥나마라가 천천히 빅터에게 다가간다.
“신분증까지 만든 걸 보니 빼돌릴 작정이군! 절대 그렇게 놔둘 수는 없다. 왜냐고? 한초희는 내 딸이니까!”
출세가 총구를 내뻗으며 빅터를 겨눈다. 빅터도 맥나마라의 팔을 뿌리치고 총구를 내민다. 총구가 두 사람의 얼굴에 바투 밀착된다.
“한초희는 엄연히 한 씨 가문의 딸이다. 초희를 욕보이지 마라!”
빅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호적에는 그렇게 올랐겠지만 초희는 내 씨를 받은 내 딸이야! 절대 넘겨줄 수 없어!”
출세가 침을 튀기며 맞대응한다.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조명철과 노덕술이 들이닥친다. 맥나마라가 가슴에 찬 권총을 뽑아들고 조명철과 노덕술을 겨냥한다.
“움직이지 마!”
조명철과 노덕술이 슬금슬금 출세 곁으로 이동한다.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쏘겠다.”
맥나마라는 땀을 흘리는 빅터를 부축하고 뒷걸음질을 친다. 회의실을 빠져나간 맥나마라는 지프에 빅터를 태우곤 황급히 청사를 떠난다.
“신분증까지 만들었더군. 당장 범일동으로 가서 놈들을 감시해!”
출세는 명철과 덕술에게 지시를 내리곤 권총으로 탁자를 내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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